시조는 여백과 울림을 위한 악기라서 ……
바둑 한 판 황룡사지 / 최길하
바둑은 한 점 돌에 궁궐을 세우는 일
극락도 잠시 비친 반딧불 불티였다. 황룡의 찬란한 빛도 식은 재가 되었다. 기둥은 구름으로 처마는 새떼들로 금부처 9층탑도 꽃가루 바람되어 눈 먼 봄 매콤한 먼지 재채기가 터졌다.
바닥은 바다란 말 경전이 다 모인 말 풀벌레 밀어올린 설음의 난간 끝에 너와 난 눈물에 비친 아침이슬 꿈자리.
<시작노트> 이 세상 물리 중에 물이 흘러가는 이유처럼 분명한 것이 또 있을까? 어떤 물이든 물은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실밥 같은 산골 도랑물에서 시냇물, 시냇물에서 강물, 강물에서 바다까지. 최종 닫는 곳이 '바다'다. 그럼 바다란 제일 낮은 곳, 바닥이란 말이 된다. 바다=바닥이란 말이다.
황룡사는 바다 같은 대지 위에 세계 통일을 염원하며 대 제국을 세우기 위한 궁궐터였다. 27대 선덕여왕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26대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석가모니 아버지 이름)'이고 백정의 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 이름인 '마야부인'이다. 만약 진평왕이 아들 을 낳았다면 '석가'라고 짓지 않았을까?
그런데 딸만 셋을 낳는다. 첫째 딸은 '천명'이다.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다. 천명공주 는 25대 진지왕(진평왕의 형이며 폐위됨)의 아들과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은 것이다. 진지왕과 진 평왕은 둘 다 24대 진흥왕의 아들이니 천명공주는 4촌간 혼인이다.
둘째가 '덕만'공주 선덕여왕이다. 덕만은 '덕만우바이' 석가 열반경에 제자로 나온다. 선덕여왕은 석가의 제자라는 상징의미다. 셋째 딸은 '선화'공주다. 서동요의 주이공 백제 무왕의 부인이 된다.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건립한다. 첨성대는 우물 모양이다. 돌을 쌓은 위에 우물정자(井) 돌을 놓 았다. 우물은 여인 선덕여왕을 상징한다. 하늘의 일월성진과 교감하는 생명 성수의 우물이란 뜻 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메신저의 상징이다.
분황사를 짓는다. 분(芬)=향기로운, 황(皇)=황제, 즉 선덕여왕의 왕사인 것이다. 그래서 복장 유물로 바늘 가위 골무 같은 것이 나왔다. 바로 그 옆에 황용사다. 황용=선덕여왕이다. 어마 어마한 절터만 남아있다.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만 바둑판처럼 놓여있다. 바닥을 보여주고 있다. 바다를 보여주고 있다.
찬란했던 꿈도 불티가 되었다. 황용에 드림도 바람먼지인 것이다. 한 나라의 거대한 프로젝 트도 바둑 한 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황량한 절터에서 진짜 황용사의 진면목을 보았다. 경주를 가면 나는 꼭 이 황용사지엘 간다. 작년 이곳에서 나는 황용사지의 완성을 보았다. 그 찬란했던 건물들이 불 타서 다 사라진 다음, 보여주는 이 주춧돌의 '바닥'. 이것이 화엄이다. '바다'다. 색즉시공이 다.
바둑판처럼 즐비한 주춧돌들은 기둥을 세웠던 건물이 모두 좌우대칭었음을 말해준다. 즉 균형과 평등이다. 저울이다. 이렇게 바닥과 저울로 하나의 꽃, 화엄을 이룬다는 경전이 바 로 황용사지다. 주춧돌만 남은 이 바둑판이 화엄경의 완성이다. 색즉시공을 그대로 보여 주는 敎의 완성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