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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기쁨의 간증
1-11절, 바울의 감사와 기도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종들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종들’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과 그의 조력자인 디모데가 항상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사역자임을 보인다. 종들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또한 신구약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성경에 정통하고 그 모든 말씀을 믿고 그 모든 교훈을 순종하는 성도들과 직분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내졌다. 빌립보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었다.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여진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배롭고 귀하다. 성경은 그들을 위해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목사들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주신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대로, 모든 성도들은 성경책을 날마다 열심히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심령과 삶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해야 한다(1:8). 또 빌립보 교회에는 감독들과 집사들도 있었다. 감독은 양들을 보살피는 직분이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이다(행 20:17, 28).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설교하는 장로라고 불린다. 집사는 헌금 수금과 지출에 관한 일을 하는 직분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거듭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얻어 지식과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변화되고 실생활이 더 거룩해져야 할 것이다. 또 평안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몸의 건강과 물질적 유여함, 그리고 환경적 평화와 안정까지도 내포할 것이다.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3-5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함을 인함’이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그때 곧 그들이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았던 그 날부터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는 당시까지, 주후 50년경부터 61년경까지 약 11년간일 것이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한다’는 원어(테 코이노니아 휘몬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 th'/ koinwniva/ uJmw'n eij" to; eujaggevlion)는 ‘복음에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본다(NASB, NIV). 복음에 참여했다는 말은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하는 복음의 협력자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7절).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도하였고 또 헌금으로 후원하였다(4:15).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 속에 주신 구원 곧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가리킨다고 본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그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때가 되어 구원하신다. 그는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 히브리서 12:2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표현하는데, ‘믿음의 주’라는 말은 ‘시작자’라는 뜻이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완성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또는 그의 재림의 날까지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온전케 하신다.
[7-8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심정]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확신을 가진 근거는, 그들이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할 때 그들이 그와 함께 입장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단들로부터 복음을 변호하였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입장을 같이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였고 또 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랑하고 사모한다고 말하였다.
[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분별력]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인정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몇 가지 기도 제목을 열거하였다. 첫째로, 그는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하였다. ‘총명’이라는 원어(아이스데시스 ai[sqhsi")는 ‘분별력’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되 분별력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우리로 잘못된 길을 가게 하고 잘못된 열심을 갖게 한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위가 ‘얼마큼 세속적이어도 괜찮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가장 선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 가장 선한 것을 택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 세상의 일들 중에 믿음과 영혼 구원의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귀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며 일주일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일이요 예수님을 믿는 일만 썩지 않고 영생하는 일이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29). 그러므로 믿음의 일은 성도의 본업이요 그 외의 일들은 다 부업이다. 세월이 빠르게 지나 우리가 죽음의 문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하였다. ‘진실하여’라는 원어(에일리크리네스)는 ‘햇빛에 비추어 입증된, 순수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밝은 태양 빛 아래서 한 점의 흠이 없을 정도로 진실하고 흠 없는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14에서 주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그가 주신 의(義)와 생명과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온전케 될 것을 확신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성화를 이룰 것이며 영광에 이를 것이다. 그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지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의 은혜에 동참하자.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울의 복음을 위한 고난과 변명과 확정에 참여했고 또 후원도 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심정은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변호하고 복음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셋째로, 우리는 온전함을 위해 기도하자. 바울은 교인들이 지식과 분별력 있는 사랑의 풍성함을 가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했다. 우리도 지식과 분별력 있는 사랑의 풍성함을 가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자.
12-19절, 기쁨의 간증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이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일을 가리킨다. 그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의 일이 후퇴하지 않고 도리어 진전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종들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섭리하신다(롬 8:28). 고난은 보통 우리의 인격을 깨끗케 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한다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복음의 일을 중단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복음의 진전과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13-14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시위대’(프라이토리온)라는 말은 로마 황제의 시위대 뜰을 가리킨다고 본다(BDAG). 사도 바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그가 옥에 갇힌 것이 그의 어떤 잘못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나 ‘형제 중 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형제 중 다수’에 연결되는 말이라고 본다(KJV, NIV). 담대히 전도한 자들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된 자들이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 . . 신뢰하므로’라는 말은 형제들이 사도 바울의 매임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전한 복음의 진실성은 그의 옥에 갇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복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담력 있는 증거를 낳았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고난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질투와 경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전통본문은 16절과 17절의 순서가 반대다(Byz, KJV). 전도를 하는 데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질투하며 그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또 참으로 영혼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전도하였다.
전자의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다는 것이 의아스럽지만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는 경쟁심과 이기적 야망이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거나 구원할 영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가 중요했다. 이런 자들이 진실한 신자이었을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했다. 복음을 변명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율법주의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켰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변호해야 했다. 사탄은 때때로 복음을 정면으로 반대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교묘히 그것을 가감하고 왜곡하고 변질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전파와 변호의 일을 다 감당하여야 한다. 교리적 논쟁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복음의 변호가 실패하면 복음의 전파도 헛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사랑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또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사랑하므로, 또 죄와 멸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일 것이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떤 이들은 겉모습으로만 전도했고, 어떤 이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신다면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감옥이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고 감옥이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파된다면, 심지어 잘못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전도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주의 교회나 천주교회와 협력하며 전도하는 방식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후 6:14-17). 단지 본문의 뜻은, 비록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그를 바르게만 전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절] [이는]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영]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앎이니라].
본문은 앞절에서 말한 그의 기뻐함의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위대 안에서 전파되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리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이 우리의 간구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내 구원’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복음이 시위대 안에 전파됨으로 또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은 그곳에서 풀려날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내다보며 또한 기뻐한다.
[20-21절] [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내용은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범사에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진실과 의를 생명으로 여기며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게 하기를 항상 그리고 담대히 원하였다. 그것이 그의 생활 신조이었다. 그것은 모든 성도가 본받을 만한 일이다.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 까닭은 그가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그를 통해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비슷하게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만 위한다면 사는 것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은 복음에 진보가 되었다. 비록 그가 옥에 갇혔지만, 복음은 시위대 안에서 확장되었고 많은 형제들이 도리어 분발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다. 요셉은 형들이 그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의 가족들을 그 기근에서 구원하셨다고 말했었다(창 50:20).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그것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롬 8:28).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신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전도할 때 결코 경쟁심이나 외식으로 하지 말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 멸망할 수많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복음이 온 세계 만민에게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마 28:19; 막 16:15; 눅 24:47; 행 1:8). 비록 결함 있는 전도자나 교인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다 할지라도 바른 복음이 전해진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시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가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영혼들의 구원과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살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거하는 더 좋은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하고 복된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22-30절,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2-24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육신으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명의 연장을 뜻하며, ‘내 일의 열매’라는 말은 그가 살면 주님과 복음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둘 중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즉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성도는 죽으면 즉시 천국에 들어가며 그리스도께로 간다. 주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면서 회개한 한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8에서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성도가 죽어 천국에 들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은 참으로 사모할 만한 일이다. 천국은 이 수고로운 세상, 광야와 같고 눈물 골짜기와 같고 죽음의 그늘진 땅인 이 세상보다 더 사모할 만한 곳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국은 참된 기쁨과 평안이 넘친 곳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원어(아낭카이오스)는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인생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성장]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믿음의 진보[성장]와 기쁨을 위하여’--이것이 사도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만일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해서 더 이상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해 할 일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거할 것임을 알았다. 26절의 ‘자랑’이라는 원어(카우케마)는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KJV, NIV). 문맥상 그것이 더 좋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교회에 가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자신으로 인해 풍성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쉰아들룬테스)[함께 싸우는](KJV, NASB, NIV)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이것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며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신 의(義)에 일치하게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과,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변호하는 일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1에서도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방향(거룩, 의, 선)이 있다. 우리는 그 방향을 거슬러 행하지 말고 그 방향대로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복음 신앙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져야 하고(고전 1:10; 빌 2:2),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는 일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2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교훈했고, 디모데후서 4:7에서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했다. 유다는 유다서 3절에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교훈하였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우리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의 보수와 변호를 위해 함께 싸울 것이다.
[28절]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표]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표]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또 한가지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믿으려 할 때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때때로 우리에게는 대적자들이 있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과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일과 전도의 일에는 환난과 핍박이 예상된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과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그런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성도가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그것을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표이며, 그것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표이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는 말은 이렇게 진실히 믿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4:7).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도, 또 그것을 잘 이겨나가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29-3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 속에는 당연히 그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조롱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삶이다.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5:11-12).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고난과 싸움이 있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자신이 전도 사역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자세히 증거하였다(고전 4:9-13; 고후 6:4-10; 11:23-27). 바울뿐 아니라 빌립보교회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초대교회는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한 교회이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도 그러하였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성도들은 죽으면 천국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간다. 우리는 주께서 회개한 행악자에게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죽을 때 천국에 들어가 주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또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이 육신의 장막을 떠나 천국에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담대히 원해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 때문이다. 주께서는 친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믿음의 의는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된다.
둘째로, 주의 종들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하지만, 사는 것이 성도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했다.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게 살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특히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복음 신앙을 위해 즉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변호하는 일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함께 싸워야 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천주교회와 이단 종파들뿐 아니라,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의 용납과 복음주의의 타협과 은사주의의 혼란과 세속적 교회음악(CCM)과 열린 예배의 풍조가 교회들 속에 만연해 있다. 참된 교회들은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근본주의적 장로교회가 취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 입장을 위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함께 싸워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즐거이 받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위해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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