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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그리스도의 뛰어나심
1-8절, 문안과 감사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1)으로부터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그의 직분에 대한 소명감이 분명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 가운데 그 직분에 그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에 대한 소명감과 사명감이 분명해야 겸손하게 그리고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다.
‘성도’는 매우 존귀한 이름이다. 죄로 인해 더러워졌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고 단번에 거룩해졌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존귀한 이름이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며 천국의 백성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다. 실상, 신앙 안에서 맺어진 관계는 혈육 관계보다 더 의미가 있다. 믿음 안에서의 형제 자매는 육신의 형제 자매보다 더 친밀하다. 육신의 형제는 100년 간의 관계이지만, 믿음의 형제는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 ‘은혜와 평안’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복이다. 은혜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의 복이다. 평안은 그 구원에 뒤따르며 동반되는 복이며, 그것은 마음의 평안뿐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안도 포함한다. 은혜와 평안은 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해야 하며, 또 그 복을 누려야 한다.
[3-5절]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항상 기도하며]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귀한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도 자신을 위해, 다른 성도들을 위해, 특히 목사와 직분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세상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들이다. 성도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신의 구원과 미래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첫째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구원의 생명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큰 보화이다. 그런데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신 자들만 가질 수 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이 귀한 믿음이 있었다.
둘째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이 참 교회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고, 바른 교리 사상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배교의 시대에 배교에 따라가거나 배교와 타협지 않고 잘못된 연합운동에 참여치 않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참 교회이다. 그러나 참 교회는 또한 바른 말씀을 실천하는 것, 특히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모든 교인들이 겸손히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일치 단합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셋째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가진 소망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성도들의 소망은 그들을 위해 하늘에 쌓아둔 것들, 즉 천국과 부활과 영생 등 영광스러운 내용이다(롬 8:18).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는 원어는 ‘복음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는 뜻으로 소망의 내용이 복음 진리 안에 제시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 영광스러운 천국과 부활과 영생은 바로 구원이 의미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내용을 포함한다.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복음이 진리의 말씀임을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곳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는 하나님 안에만 있고 하나님의 주신 복음 안에만 있다. 그 내용이 구원의 소식이고, 영광의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한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한 자들이다.
[6절]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리킨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가리킨다. 이미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구원의 열매들이다. ‘깨닫다’는 원어(에피기노스코)는 ‘참된 지식에 도달하다, 바르게 인식하다’는 뜻이다. 구원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고 믿을 때에 온다. 참 지식은 믿음에 필수적 요소이다. 참된 깨달음과 지식이 없이는 참 믿음이 건립될 수 없다. 믿음은 참되고 견고한 지식 위에 세워지지, 바른 지식 없는 막연한 감정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7-8절]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에바브라에게서도]2)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에바브라는 바울 일행과 ‘함께 종된’ 자, 곧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에게서도 복음 진리를 배웠다.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고, 복음을 듣고 배우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믿는 데서 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새 생명의 일을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과정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이다. 에바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이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믿었고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였다. 사랑은 참된 복음 신앙의 증거이며 말씀 순종의 표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사모하며 받아 누려야 한다. 그것은 큰복이다. 우리는 이미 이 복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 물질적 필요의 공급, 환경적 평안을 누린다. 우리는 늘 이 복을 사모하며 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 간직된 소망 곧 천국과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또 그것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 믿음은 구원의 생명이며 참 사랑은 참 믿음의 열매이며 증표이고 참 소망은 우리의 구원의 목표이며 힘과 기쁨이다.
9-14절, 사도 바울의 기도
[9절]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첫째로, 그는 그들이 모든 영적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였다. ‘아는 것’이라는 원어(에피그노시스)는 ‘정확하게 아는 것’을 가리킨다(Thayer). 무슨 일이든지, 먼저 그 일에 대해 알아야 잘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가 죄인들을 위해 구주를 보내셨고 구주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 사역을 이루셨고 사람이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되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그의 모든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10절]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주께 합당히 행하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때 하나님께 합당히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성경책을 읽고 배우며 하나님의 뜻 알기를 원하는 것은 그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이다. 지식은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우리가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에게 합당하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합당하게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근심하실 것이며, 우리가 계속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진노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범사에 또한 온전히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행위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그의 명령은 사람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악은 피조물에게서 나왔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선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의 요지는 첫째,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과, 둘째,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기도의 내용은 처음 내용에 대한 보충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좀 필요한 일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과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확실하게, 또 더 깊이 아는 것이 신앙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8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교훈하였다.
[11절]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셋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능력 있는 자가 되고 오래 참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역사상 종종 그의 능력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 능력이 바로 우리의 힘의 원천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 곧 그의 전능(全能)으로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이것은 육신적인 힘 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적인 힘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들을 잘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 것이다.
힘의 유익은 참음에서 나타난다. 힘이 있는 자만이 잘 참을 수 있다. 그런 힘이 없는 자는 조금 참다가 낙심하거나 스스로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을 가진 자는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다.
[12절]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넷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기를 기도하였다. 그는 그들의 구원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일로 표현하였다. 어둠은 무지와 부도덕과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재의 세상과 장래의 지옥의 모습이다. 그러나 빛은 지식과 의와 생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재 참된 교회와 장래의 영광스런 천국의 모습이다. 성도의 기업은 천국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5:34에 보면, 주께서는 의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그 기업을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표현하였다(벧전 1:4). 우리는 구원 얻는 많은 자들 중에 속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법적으로 그 기업을 얻게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법적으로 정당하게 그 기업을 얻게 하셨다.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흑암의 권세’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가리킨다. 죄인들은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탄의 권세 아래 살고 있다. 우리는 과거에 거기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의 사랑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혹은 ‘그의 사랑의 표시로 주신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그 나라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가까움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마 4:17),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미 제자들 가운데 임하였음을 말씀하셨다(눅 17:20-21). 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9는 신약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다.
‘건져내사’라는 말(에루사토)과 ‘옮기셨으니’라는 말(메테스테센)은 단순과거시제로서 그 사실이 단번에 이루어진 과거의 사실임을 나타낸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의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重生), 곧 거듭남은 반복되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은 자들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 곧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이었다.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얻었다.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죗값을 지불하고 죄의 속박 즉 죄의 가책과 공포와 정죄와 형벌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고 우리의 죄책과 형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구속(救贖) 혹은 속죄는 죄사함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사함을 가리킨다. 복음은 죄사함의 방법을 제시하는 소식이다. ‘얻었다’는 말(에코멘)은 ‘가지고 있다.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죄사함의 구원을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인생의 정로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그의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가 바로 믿고 바로 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선한 행위와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다 선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힘쓰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어떠한 고난에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지식과 행위가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고난 중에 낙심하며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어떤 고난에도 참고 견딜 수 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음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세계, 즉 지식과 의와 기쁨의 세계로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한다.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보다 더 큰 감사의 이유는 없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허무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장차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큰 구원을 얻었다.
15-18절, 그리스도의 뛰어나심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속(救贖)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바울은 15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나심, 그의 탁월하심을 열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요 4:24) “아무 사람도 보지 못했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지만(딤전 6: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전통본문)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형상이셨으므로].” 히브리서 1:3, “이[아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형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다. 낳으심과 창조는 비슷한 점이 있다. 창조도 낳으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혼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낳으심으로 표현된다(요 1:13; 약 1:18).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낳으심과 창조는 동일하지 않다. 창조는 질적 차이를 만든다. 창조주는 무한하시지만, 피조물은 유한하다. 그러나 낳으심은 동질적 존재를 낳는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두 분 다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창조되신 것이 아니고 나신 것이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요한복음 1:1에서 ‘하나님’으로, 이사야 9:6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요한일서 5:20에서 ‘참 하나님’으로, 디도서 2:13에서 ‘크신 하나님’으로 불리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유한자(有限者)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 무한자(無限者)에게서 나신 무한자, 영원자에게서 나신 영원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심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그 아들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때는 사람의 시간 관념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 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한 하나님의 세계, 곧 영원 세계에서의 일이다.
[16절]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에게’(엔 아우토) 창조되었다는 원어는,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디 아우투) 창조되었다는 원어도 이와 비슷하게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에 의해 혹은 그를 통해 창조된 세계는, 하늘에 있는 것들 곧 하늘과 천사들과 해와 달과 별들과, 땅에 있는 것들 곧 땅과 바다들과 호수들과 강들과 식물들, 새들, 물고기들, 동물들,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보이는 물질세계 뿐 아니라, 또한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즉 천사들의 세계도 포함한다.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라는 말은 천사들을 가리켰다고 보인다. 다니엘서는 세상 나라들의 위정자들 배후에 천사들이 있음을 증거하였다(단 10:13, 20, 21).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만물들의 창조의 목적이시다. 만물이 다 ‘그를 위하여’(에이스 아우톤) 창조되었다.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만물 창조의 목적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증거하셨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의 창조 목적이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들의 목적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온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7절]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영원 전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본문에서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시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 ‘함께 서 있다’는 표현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보존자이시다. 느헤미야 9:6,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보존자이시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머리와 몸은 생명적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순종적 관계도 나타낸다. 그는 머리, 곧 우두머리, 주님, 통치자이시다.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대항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 곧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절대순종하며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여덟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이시다. ‘근본’이라는 원어(아르케)는 ‘근원, 시작’이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3:14은 그를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표현했다. ‘근본, 근원, 시작’이라는 헬라어는 고대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의 중요한 주제이었다. 그들은 존재의 세계 즉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했다. 성경은 우주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아홉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이것은 그가 최초로 영광스런 부활을 하셨음을 뜻한다.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고전 15:20). 아직 아무도 그와 같이 영광스런 부활을 경험치 못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나 나사로의 부활도 죽은 몸의 회생(回生)에 불과하였지 그런 영광스런 부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의 부활체를 입으셨다. 장차 그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때,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빌 3:21).
열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 ‘으뜸이 되다’는 원어(프로튜오)는 ‘뛰어남, 탁월함을 가지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 세상에서 뛰어나신 분이 누구이신가? 그는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그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빌립보서 2:9-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보다 먼저 나셨고 먼저 계셨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그는 모든 창조물의 목적이시며 우주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또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 가운데서 뛰어나신 주님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비한 인격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시며(요 1:1) 참 하나님이시며(요일 5:20) 크신 하나님이시다(딛 2:13). 우리는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특히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오직 그를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둘째로, 우리는 창조의 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며 오직 그를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만물은 그를 위해 창조되었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후 5:15).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다(계 19:16).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모든 교훈에 절대복종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계 2:10).
19-23절,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
[19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모든 충만’이라는 말은 ‘신성(神性)의 충만’을 가리킨다.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속성들 중의 한두 가지를 가지셨거나 하나님과 비슷한 모양 정도가 아니셨고, 신성의 모든 충만을 가지신 자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요 1:1; 요일 5:20).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요 화목의 십자가이었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원수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레위기 17:11의 말씀대로, 사람의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피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9:22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했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흘리실 피를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표현하셨다(마 26:28).
화목의 대상은 만물이며, 그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 사람의 죄로 인하여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창 3:17),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지금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고(롬 8:20-22) 또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 비인격적 생물의 세계나 물질 세계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화목한다’는 원어(아포카탈랏소)가 ‘원상 회복시킨다’는 뜻을 가지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죄의 결과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의 결과는 온 우주에 미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5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만물’이라는 말은 타락한 천사들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마태복음 5장 이하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좁은 길로 가는 자들보다 많고 그 결말은 멸망이라고 가르치셨고, 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염소들, 곧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7:13-14; 25:41). 영생의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확실히 있을 것이다.
[21-22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곧 화목 사역의 일차적 대상은 사람들이다. 그 화목 사역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게 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켰고 사람과 하나님을 원수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화목케 된 것이다.
화목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정과 선택의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엡 1:4-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가 이루신 속죄사역의 효과가 우리에게 적용되었다.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법적 의(義)이다. 구원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장차 다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되는 것이며 그가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이루셨다. 물론, 법적 구원을 받은 자는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헛된 세상 것들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는 이제 죄의 도구가 아니고 의의 도구로, 세상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롬 6:13).
[23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증거는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화목 사역의 효력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적용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하다.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견고히 서고 복음 안에서 주신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믿음은 사도들을 통해 전파된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생긴다. 전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을 통해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증거한다.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도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한 기초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사람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성경을 읽고 복음을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을 깨닫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성경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사람의 범죄는 사람을 하나님과 불화(不和)하게 했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 사람의 가장 큰 불행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며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은 화목의 메시지이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둘째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한다. 믿음은 곧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목과 영생의 길이다. 그러나 불신앙은 곧 사망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셋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 곧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을 때, 세상의 헛된 것들 곧 돈과 육신적 쾌락과 세상 권세와 명예 등을 위해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헛되고 죄악되며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들을 회개하였고 또 현재의 모든 죄악된 성질과 습관을 고백하였고 미워하였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답게 또 천국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24-29절,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이 받는 고난은 자기 잘못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뻐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교회를 위한 고난은 곧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사도 바울은 주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완전했고 거기에 무엇을 첨가할 것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의 고난에 부족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그의 몸된 교회가 받아야 할 고난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의 몸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도 당해야 할 것이다(행 14:22; 계 6:11).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말한 것은 그가 당시에 벌써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과연 그는 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자기가 당한 많은 고난을 자세히 간증했다(고전 4:11-13; 고후 1:8-9; 6:4-5; 11:23-27).
[25-27절]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오이코노미아)[직무, 사명]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이룬다는 뜻이라고 본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이방인들의 구원이 구약시대에는 감취었던 바이었으나 이제 밝히 증거되고 있다는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으나, 지금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거하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그는 이 비밀을 ‘비밀의 영광’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영광스러운 구원임을 나타낸다. 승천하신 주께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마 24:30), 죽었던 성도들은 그때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고전 15:42-44; 빌 3:20-21)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원히 복되게 살 것이다(계 21, 22장).
[28-29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드리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役事)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본문은 목회의 핵심과 목회의 목적을 보인다. 목회의 핵심은 설교이며, 설교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일을 힘써야 한다. 또 목회의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세운다’는 원어(파리스테미)는 ‘드린다’는 뜻이다. 목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완전한 자를 만든다’는 말은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와 성화(聖化, 거룩하여짐)를 다 포함한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그는 법적으로 완전한 자가 된다. 그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10, 14의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온전케 되었다(완료시제).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聖化)의 진리이다. 성화는, 칭의와 함께, 설교의 두 번째 중요한 부분이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고 또 교회를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다. 성경과 교회의 일차적 목적은 칭의를 위한 것이지만, 이차적 목적은 성화를 위한 것이다. 칭의는 성도에게 자유와 평안과 담대함을 주며, 성화도 그것 못지 않게 우리에게 기쁨과 용기를 더해준다. 성도는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롬 6:22).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버릴 것이다(마 3:8-10).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29절의 ‘역사(役事)를 따라’라는 원어(카타 텐 에네르게이안)는 ‘힘을 따라’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또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말(코피오 아고니조메노스)은 ‘애쓰며 수고한다’는 뜻이다. 본절은 목회의 힘과 수고에 대해 말한다. 목회의 힘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목회자는 그 힘으로 설교하며 목회한다. 그러나 목회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 애쓰고 수고해야 한다. 다른 일들과 같이, 목회도 충실한 노력과 수고에서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달란트 비유(마 25:14-30)나 므나 비유(눅 19:11-27)는 복음의 일꾼들이 게으르지 말고 충실하게 일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전통사본)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전념]하라”(딤전 4:12-13).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해졌고 완전케 되었다. 이것이 칭의(稱義)의 진리이며 복음의 중심 내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이유요 자유의 근거요 담대함의 원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또한 실제로도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들은 지식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진리이다.
둘째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충실하게 애쓰며 수고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로와 힘과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주 안에 사는 자들은 결코 낙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위해 애쓰며 수고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주 예수께서 항상 공급해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과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장차 때가 되면 영광 중에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다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되며 영광스러운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영생의 복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스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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