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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형제를 사랑함은 빛 안에 사는 증거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절] 나의 자녀들(테크니아)[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자녀들아’라고 자주 불렀다(2:1, 12, 28; 3:7; 4:4; 5:21). 그의 말투는 그의 나이가 많았고 교인들에 대한 사랑도 많았음을 보인다. 그는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그는 본절에서 본 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가 교훈과 책망을 받아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딤후 3:1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안 짓는 삶을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므로,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프로스 톤 파테라)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이며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것의 계속적 적용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에게 효험이 있고 그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宥和)제물’ (propitia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3:25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제물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물론, 여기에 ‘세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세상의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성도들을 위해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3-4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 요한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 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은 곧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주신 십계명의 요약과도 같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라고 간주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인가, 모르는 자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그의 자녀이다.
[5-6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가리킨다면, 그 사랑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되고 우리의 구원을 확증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우리의 계명 순종을 통해 온전케 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돈이나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으나,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온전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또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죄를 멀리하고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죄 짓지 않는 삶은 사도 요한이 본 서신을 쓴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도 구원, 곧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죄 안 짓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도 육신의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마귀의 시험과 세상과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시며 유화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의 십자가 대속의 의(義)를 의지하며 그의 보혈의 샘에서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음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지금도 우리의 죄를 씻는 효력이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지난 죄를 다 씻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현재의 부족과 연약도 씻어주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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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절, 빛 안에 사는 증거
[7-8절] 사랑하는 자들아[형제들아](전통사본),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처음부터](전통사본)5)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말한 계명은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곧 십계명을 가리킨다고 말한 후, 또 새 계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새 계명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나 우리들에게나 참된 것, 곧 진리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고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했었으나, 이제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다.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9-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스칸달론)[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형제를 미워한다’는 원어(미손)(현재분사)는 형제를 계속 미워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빛 가운데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의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반면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어두운 밤에 산 속을 헤맨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 곳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12-14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얻었음](원문)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세 부류로 구별하여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의 성화의 정도를 따라 구별한 것이라고 보인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연령도 많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다. 참 믿음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주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의 여정은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며 그를 더 깊이 아는 과정이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하여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표현된다.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킨다. 청년들이 사탄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자라가며 강해져서 사탄과 악령들의 음모와 장난과 방해를 다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복음 전도와 참된 교회 건립은 영적 전쟁이며 거기에는 영적으로 강한 용사들, 전사들이 많이 요구된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38; 신 6:4-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전심전력하여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이나 집이나 땅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 아내, 자녀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한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음란한 욕망으로 더러워져 있다. 또 그것들은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적 아름다움은 실상 그렇게 가치가 있지 못하다(잠 31:30). 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명예나 권세 등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이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되다고 증거하였다(전 1:2; 12:8).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형제를 사랑함은 빛과 어두움을 분별하는 잣대가 된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온 자이지만, 사랑치 않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형제 사랑은 구원받음과 구원받지 못함을 분별하는 기준도 된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온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피 흘려 사신 영혼, 곧 주 예수님 믿는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고 미워하는 자는 확실히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림돌이 없는 자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그 증거가 된다.
셋째로, 교회에는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준비되어 사탄과 악령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청년들, 좋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특히 이단 사설이 많은 말세에 충성된 전사들이 많이 필요하다.
넷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구약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9절, 이단들을 조심하라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 징조의 하나이었다(마 24:5). 종말 징조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있었다. 그것은 천주교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보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본다. 많은 교회들이 배교하였고 이단종파들이 득세하고 또 온 세계는 제1,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참혹한 핵전쟁이 될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 날 교회를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참 신자뿐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도 섞여 있다. 그것은 열두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들어있었던 것과 같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었다(요 6:64).
[20-21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한다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23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없느니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6)
이단들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그들은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그의 신성(神性)과 속죄사역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음란하고 탐욕적이며 교만하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이단은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성경만 믿지 않고 교황의 무오성(無誤性)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한다.
오늘날 더 심각한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대속 사역, 그의 부활, 그의 승천과 재림을 부인한다. 그것은 실로 적그리스도 사상이다. 또 성경 교훈을 넘어 은사 체험을 강조하는 은사주의도 이단이다.
역사상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되기도 하였다. 구약시대에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아합 때 그러했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천주교회가 그러했다. 오늘날 교회 상황도 비슷하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 신앙은 오늘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낡은 것으로 간주되고, 천주교회, 자유주의 신학, 은사주의의 배교에 대한 책망은 사랑 없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배척을 받는다.
[24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이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한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말씀은 그 진리를 믿고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옛신앙이며 보수신앙이다. 우리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일어난 각종 이단종파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연합운동과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의 바른 진리를 믿고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 연합이 성도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다.
[25절]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를 믿음으로 얻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은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 우리는 영생을 이미 받았고(요 5:24)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26-27절]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을 미혹케 하는 이단들을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 성령께서는 완전하고 참된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고전 12:28; 엡 4:11). 그러나 우리는 가장 좋은 교사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주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며(요 14:26)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16:13).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들은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신약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가 된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주의 재림의 날에 그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도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단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다. 이단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신 죽음임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음란하고 탐욕적이고 교만하다. 우리는 이런 이단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분별해야 하고, 각종 이단종파들을 분별해야 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분별해야 하고, 또 은사주의를 분별해야 한다.
둘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이다(20, 27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마다(고전 12:3),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마다(롬 8:15)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 안에 거하신다(롬 8:9; 엡 1:13).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며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케 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사람이 중생하고 구원을 받았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또 그의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써 주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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