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서원 존도사 이건 상량문〔廬江書院尊道祠移建上梁文〕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 하지 않으니 선유(先儒)는 낙동강 가에서 도학을 강론하였고, 땅은 그 비경(秘境)을 드러내 주어 후학(後學)은 여산(廬山)의 북쪽에 사당을 세운다. 어찌 향불을 올리기만 하겠는가. 장차 전형(典刑)을 남김없이 밝혀 가리라.
퇴도 선생 문순공은 전체대용(全體大用)의 학문으로 하늘과 인간을 소통케 한 유자이시다.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 4대의 시서(詩書)를 구전(口傳)하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줄도 알지 못하셨고,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 등 군유(群儒)의 법도를 심수(心受)하니 어떤 이도 선생을 앞서지 못할 것이다. 비록 제가(諸家)의 학문에 막힘이 없었지만 주자(朱子)의 학문에 더욱 치력하였다. 《계몽전의》로 우매한 이들을 계도(啓導)함에 정정당당 하였으며, 《성학십도》로 군왕을 일깨움에 끝없이 넓고 엄숙하였다. 원(元)ㆍ명(明)의 선비들을 통록(通錄)하여 유학(儒學)과 육학(陸學)의 다르고 같음을 분변하였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자세히 분석하여 리(理)는 근원이고 기(氣)는 말단(末端)임을 천명하였다.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백세百世가 흘러도 나의 말은 바뀌지 않으리라.
상서로운 햇빛 나고 구름 이니, 여러 선비들 마음도 상쾌히 바라보네.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갖추니, 부리는 아이도 이 마음을 아는구나. 장차 고비(皐比)를 백 년 동안 길이 의탁하려 했더니, 어찌 화책(華簀)을 하룻저녁에 급히 바꾸셨는가. 요금(瑤琴)이 줄이 끊기듯 태산교악 같은 거동 떠나신지 오래이나, 목탁은 소리 그치니 어찌 강한(江漢)과 추양(秋陽)의 생각을 누르겠는가.
본래 이 문헌의 고장은 실로 상재(桑梓)가 심겨진 고향이다. 해는 마침 알봉(閼逢)을 만났고, 의논은 향노(鄕老)들 사이에 화합하였다. 산길로 6, 7리를 들어가서 고려조의 백련사 옛터를 얻으니, 강가의 8, 9채의 촌락은 태평한 세상 유생이 사는 곳으로 바뀌었도다. 하물며 선생의 어렸을 적 향기가 절간의 누각 사이에 뿌려져 있었으니 선생이 과화존신(過化存神)하신 여운을 생각해보면 동기가 서로 구하며 소리가 서로 응하는 오묘함을 느낀다. 교문(橋門)을 에워싸고 다투어 경청하니 사람들이 장차 소식을 듣고서 알게 되고, 고협(鼓篋)하며 다투어 오니 선비들도 또한 학문의 대체(大體)를 알게 되었다.
재앙이 사납게 닥쳐와서 신우(神宇)가 표류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지난 일은 버리고 새롭기를 도모하니 때를 놓칠 수 없고, 어제는 패하였으나 오늘은 이기나니 하늘도 유정(有情)한 듯하다. 사우(士友)의 담론이 처음에는 의견이 들쭉날쭉하여 달랐으나 향린(鄕隣)의 의론은 끝내 충분히 상의하여 의견이 같아졌다. 다행히 서애(西厓)와 회곡(晦谷)의 존사(尊師)와 동포(東浦) 부사(府使)의 흥학(興學)에 힘입어 곤궁했던 형편이 넉넉해져 드넓은 궁정(宮庭) 터를 가려서 선택하였고, 어려운 시절이지만 성대히 거행하여 우선 크고 높은 침묘(寢廟)를 세운다. 백성들이 자식처럼 와서 돕기를 남보다 먼저 하려 했고, 넓고 큰 규모는 새가 날개를 펼치듯 화려함이 예전보다 더하도다.
이에 갱장(羹牆)에도 떠오르는 이 그리움을 부쳐 두고자 하니, 감히 유업(遺業)을 이어받는 이 터에서 태만함이 있을 쏜가. 담장은 몇 길 높이 세워졌으니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거실마다 여덟 곳에 창문을 내니 밖에서도 들을 수 있으며 안에 있어도 볼 수 있으리라. 거문고 타고 시 읊는 곳이 되게 하며, 불경(佛經) 읽는 무리에 속하지 않게 하라. 산은 더욱 높아지고 물은 더욱 깊어지니 천지가 개벽한 때인 듯하고, 도학이 보호되고 사설(邪說)이 사라지니 상도(常道)가 바르게 되어 백성이 창성(昌盛)한다. 어찌 지나간 한 시절의 계승에만 그치겠는가. 응당 앞날도 영세(永世)토록 열어 가리라. 예법(禮法)의 도장(道場)과 인의(仁義)의 부고(府庫)를 완연(宛然)히 지팡이를 짚고 따르리니, 숙속(菽粟)의 맛을 알고 포백(布帛)으로 옷 입는 사람이면 누군들 풍문만 듣고도 흥기(興起)하지 않겠는가. 좋은 날을 택하여 긴 들보 함께 올리니, 솜씨 좋은 도끼질 잠시 멈추고 다 같이 파창(巴唱)을 들어보세.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향하니 兒郞偉梁之東
어렴풋이 새벽 해 떠오르니 발을 걷어올리네 瞳矓曉日上䈴櫳
일신의 덕을 밝힘도 아마 이와 같지 않겠는가 一身明德將無同
어울려 지으매 격치의 공이 더해만 가리라 群產須加格致功
들보를 서쪽으로 향하니 西
흐르는 물의 근원은 퇴계로 이어지고 活水源頭接退溪
무슨 일을 부지런히 새벽닭이 울도록 하는가 底事孜孜趁曉鷄
현인과 성인을 바라서 모두 닮기를 원해서라 希賢希聖競思齊
들보를 남쪽으로 향하니 南
맑은 강 굽이굽이 초록과 쪽빛이 어우러지고 澄江曲折綠挼藍
이와 같은 오묘함에 누가 참여하였는가 如斯之妙問誰參
종전에 한결같은 법도로 회암이 있었구나 一揆從前有晦菴
들보를 북쪽으로 향하니 北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시니 사물과 법칙도 있었도다 天賦斯民有物則
고요한 곳 깊이 함양하여 아름다운 덕 밝히고 屋漏沈涵明懿德
조정으로 펼쳐 넓히어 황극을 보좌하려네 巖廊展擴佐皇極
들보를 위로 향하니 上
강건하게 쉬지 않음은 현묘한 기상들 乾乾不息有玄象
밝고 밝은 이 이치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昭昭此理指諸掌
아 하늘을 본받아라 우리 선비들이여 須法天行嗟我黨
들보를 아래로 향하니 下
온 정성 스며 있는 너른 사당에 머물러 處此渠渠之廣廈
고금에 마음 다해 화이의 경계를 꿰뚫으려니 一心今古通夷夏
힘이 남거든 연건과 굴가를 본받으련다 餘力淵騫方屈賈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上梁)한 뒤로 청구(靑丘)에 문풍(文風)이 일고, 영남(嶺南)에 가르침의 은택이 흠뻑 내리게 하소서.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 받들고 붕우(朋友)를 친애하는 품성은 사람마다 갖춘 양지(良知)에 근거하게 하시고, 자신을 수양하여 다른 이를 바로잡으며,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도리가 각 집안의 가풍(家風)에 이르게 하소서. 문사(文士)가 겉모습만 치장하여 방황하게 하는 재주를 끊게 하고, 군자가 몸소 실천하며 두터운 성실(誠實)함으로 이루어지는 공부를 더하소서. 어려서 배운 것을 장성하여 실행코자 하는 것이 비록 출처(出處)의 의리(義理)에 달린 일이라 해도 대본(大本)과 달도(達道)를 응당 배우는 시절에 증험하게 하소서. 동방의 유자(儒者)들이 모두 일어나 서주(西周)의 성대함을 바라보게 하소서.
廬江書院尊道祠移建上梁文
天未喪斯文。先儒講道於洛水之上。地爲抉其祕。後學建祠於廬峯之陰。豈香火之徒崇。將典刑之昭示。恭惟退陶先生文純公。全體大用之學。通天與人之儒。口虞夏商周四代之書。不知老至。心孔孟程朱群儒之法。莫之或先。雖諸家無所不通。於新安尤致其力。傳疑啓聾瞽。亭亭堂堂。聖學誥君王。灝灝噩噩。通錄元明之士。辨儒陸之異同。縷分四七之情。闡理氣之源委。萬物皆備於我。百世不易吾言。瑞日祥雲。多士快覩。深衣大帶。走卒皆知。將皐比百年之永憑。奈華簀一夕之遽易。瑤琴絃斷。久失泰山喬嶽之儀。木鐸聲停。寧禁江漢秋陽之思。顧玆文獻之府。實是桑梓之鄕。歲適丁於閼逢。議克諧於鄕老。山行六七里。得前朝白蓮遺基。江村八九椽。變昭代靑襟攸宇。矧又先生少年之馥。曾播禪宮梵樓之中。想過化存神之餘。有氣求聲應之妙。環橋競聽。人將聞而知之。鼓篋爭來。士亦識其大者。那知陰沴之暴至。以致神宇之漂流。舍其舊而親是圖。時不可失。敗於昨而今者勝。天若有情。士友之談始參差而異序。鄕隣之議卒爛漫而同歸。幸西厓晦谷之尊師。賴東浦明府之興學。抜貧爲富。改卜實實之宮庭。時屈擧贏。先建奕奕之寢廟。甿庶子來之恐後。宏規鳥革之侈前。寔欲寓慕於羹牆。其敢有怠於堂構。牆成數仞。仰之彌高鑽之彌堅。室洞八窓。出必有聞入必有見。復令絃誦之所。不屬梵唄之徒。山增而高。水增而深。天開地闢。道爲之閑。邪爲之息。經正民興。豈特繼往於一時。應亦開來於永世。禮法場仁義府。宛然操杖而從。菽粟味布帛文。孰不聞風而起。吉日始卜。修梁共抛。郢斤少停。巴唱齊聽。兒郞偉梁之東。瞳矓曉日上䈴櫳。一身明德將無同。群產須加格致功。西。活水源頭接退溪。底事孜孜趁曉鷄。希賢希聖競思齊。南。澄江曲折綠挼藍。如斯之妙問誰參。一揆從前有晦菴。北。天賦斯民有物則。屋漏沈涵明懿德。巖廊展擴佐皇極。上。乾乾不息有玄象。昭昭此理指諸掌。須法天行嗟我黨。下。處此渠渠之廣廈。一心今古通夷夏。餘力淵騫方屈賈。伏願上梁之後。扇文風於靑丘。霈敎雨於南嶺。愛親敬兄。隆師親友之性。本人人之良知。修己治人。化民成俗之方。致家家之時習。絶文士浮華放浪之術。加君子踐履篤實之功。幼學壯行。雖係出處之義。大本達道。當驗位育之時。盡起東魯之儒。竚見西周之盛。
[주1] 여산(廬山)의 …… 세운다 : 1575년(선조8) 지방 사림들이 안동부(安東府) 동북쪽 여산촌(廬山村)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는 백련사(白蓮寺) 절터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워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어 중창하였다. 1620년(광해군12)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 김성일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6년(숙종2) 사액을 받고 ‘호계(虎溪)’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2] 정정당당(亭亭堂堂) : 속어(俗語)로 불편불의(不偏不倚)의 뜻이다. 《朱子語類 卷95》 주희(朱熹)가 중용의 중(中) 자를 풀이하면서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不偏不倚 無過不及〕”라고 하였다.
[주3] 끝없이 넓고 엄숙하였다 :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우하 시대의 글은 혼혼하고, 상서는 호호하고, 주서는 악악하다.〔虞夏之書渾渾爾 商書灝灝爾 周書噩噩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혼혼은 밝고 엄숙한 모양이고, 호호는 끝없이 멀고 아득한 모양이고, 악악은 엄숙한 모양 또는 밝고 곧은 모양이라고도 한다.
[주4] 만물의 …… 있으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 보아 참되다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라고 하였다.
[주5] 백세(百世)가 …… 않으리라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리라.〔聖人復起 不易吾言矣〕”라고 한 구절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이황에 대한 존숭(尊崇)의 념(念)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용되었다.
[주6] 고비(皐比) : 호랑이 가죽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장재(張載)가 역(易)을 강론할 때, 이것을 깔고 앉았기에 사석(師席)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스승인 이황을 가리킨 것이다.
[주7] 화책(華簀) : 화려하게 만든 대자리나 깔개 등이다. 증자(曾子)가 임종 직전에, 깔고 누운 대자리가 너무 화려하여 예(禮)에 맞지 않음을 알고, 바꾸게 하였다는 역책(易簀)의 고사가 전한다. 보통 현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는데, 여기서는 이황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주8] 강한(江漢)과 추양(秋陽)의 생각 : 선사(先師)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돌아가신 뒤에 자하(子夏), 자유(子游) 등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 하여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고자 하여 증자(曾子)에게 강요하자, 증자가 반대하며 “비교하자면 공자는 장강과 한수에 씻고서 여름 햇볕에 말린 것이어서 더할 수 없이 깨끗하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皓皓乎不可尙已〕”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9] 상재(桑梓)가 심겨진 고향 : 상재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말한다. 《시경》 〈소반(小弁)〉의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하는 데〔維桑與梓 必恭敬止〕”에서 보이듯, 부모가 자손들이 누에를 치고 목재로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심는다는 것으로, 부모가 살던 고향 또는 고향이 같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황이 태어난 고향임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주10] 알봉(閼逢) : 알봉은 고갑자(古甲子)로 ‘갑(甲)’을 말하므로, 여기서는 갑술년(1574)을 가리킨다.
[주11] 과화존신(過化存神) : 성인의 가르침이 백성에 미치는 공효가 천지의 화육ㆍ운행과 비견될 정도로 성대함을 표현한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성인이 지나가는 곳마다 감화를 받고, 머무는 곳마다 백성들이 신령스럽게 된다.〔所過者化 所存者神〕”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주12] 동기(同氣)가 …… 응하는 :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에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 …… 이는 각자 자기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 …… 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13] 교문(橋門)을 에워싸고 : 고대에 태학(太學) 주위가 연못으로 싸여 있어 다리를 사방으로 놓아 출입하였는데, 이 다리를 교문이라 한다. 교문을 에워쌌다는 말은 천자가 태학에서 경(經)을 강론하면 제후들이 토론하였는데, 이것을 듣고자 선비와 관리들이 태학 주위에 구름처럼 몰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79上 儒林列傳序》
[주14] 고협(鼓篋) : 북을 쳐서 책상자를 연다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입학하여 북을 쳐서 울리고 책을 꺼내는 것은 그 학업을 공손히 받기 위함이다.〔入學鼓篋 孫其業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중국 고대에 일종의 입학 의식이었다. 뒤에 책상자를 지고 와서 배우기를 구한다는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
[주15] 재앙이 …… 알았으리요 : 1605년(선조38)에 대홍수를 당하여 서원이 수해(水害)를 입은 것을 말한다.
[주16] 서애(西厓)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이다. 1566년(명종21)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598년 명나라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北人)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다. 이후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등이 전한다.
[주17] 회곡(晦谷) : 권춘란(權春蘭, 1539~1617)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이다. 1573년(선조6)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회곡문집(晦谷文集)》, 《공문언인록(孔門言仁錄)》 등이 전한다.
[주18] 동포(東浦) 부사(府使) :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을 말한다. 《백암집》 연보에 김륵이 66세 때인 1605년 7월에 안동 대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여강서원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포는 지금의 경북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번계 마을 주변을 말하는데, 김륵이 동포 16경을 읊고, 정탁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차운한 시가 남아 있다.
[주19] 갱장(羹牆)에도 떠오르는 :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날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은 3년을 앙모하였으니, 앉으면 담벼락에서 요 임금의 모습을 뵙는 듯하였고, 식사를 하면 국그릇 속에서 요 임금을 뵙는 듯하였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牆 食則覩堯於羹〕”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성현(聖賢) 또는 선대(先代)를 추모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20] 우러러볼수록 …… 견고하며 :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부자(夫子)의 도(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볼 때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부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해 주시므로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한지라, 그를 따라가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를 원용하였다.
[주21] 인의(仁義)의 부고(府庫) :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7년 조에 “조최(趙衰)는, ‘시서(詩書)는 의(義)의 부(府)이다.’라고 했다.” 하였으며, 소옹(邵雍)은 〈관물내편(觀物內篇)〉에 그 말을 인용하여, 《주역》, 《시경》, 《서경》, 《춘추》를 성인(聖人)의 사부(四府)라고 하였다.
[주22] 숙속(菽粟)의 …… 사람 : 숙속은 콩과 조 등의 곡물이고, 포백(布帛)은 삼베이다. 이 말은 《송사(宋史)》 권427 〈정이열전(程頤列傳)〉에 “정이가 마침내는 공맹(孔孟)이 미처 전하지 못한 학문을 터득하여 뭇 유자들의 영수가 되었는데, 그가 말한 뜻을 보면 모두 포백숙속과 같았으므로 덕을 아는 이들이 더욱 그를 존숭하였다.〔卒得孔孟不傳之學 以爲諸儒倡 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 知德者尤尊崇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즉 평범하지만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의미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인의(仁義)의 도와 같은 유가(儒家)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비유하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주23] 파창(巴唱) : 초(楚)나라의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를 말하는데, 보통 세속적인 노래를 의미한다.
[주24] 연건(淵騫)과 굴가(屈賈) : 공자 제자인 안연(顔淵, 기원전 521~기원전 481)과 민자건(閔子騫, 기원전 536~기원전 487), 그리고 전국(戰國) 시대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屈原, 기원전 340~기원전 278)과 전한(前漢) 초기의 사상가인 가의(賈誼, 기원전 201~기원전 168)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