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장 24-29절. 성령님을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함
1.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써 우리 죄인들이 완전히 구원받은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좇아서 죄에 빠지고, 지옥 형벌의 길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 믿는 성도는 천국에 가게 됨을 말씀드렸습니다.
2. 이제 오늘은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자원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 주님께 받은 바 구원의 은혜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듯이, 이제는 내가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죄악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희생을 베푸는 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넘치는 감격과 삶의 보람과 희열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어느 분이 말씀한 대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불행한 것보다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이 더욱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5.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셔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하지만, 그 보다도 더욱 내가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예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으시면서 살아가시는 행복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라며, 그 보다도 사랑하는 대상들을 가지시는 행복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젖먹이 아기를 기르는 엄마가 왜 행복합니까?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힘들게 돈을 버시는 아버지들이 왜 행복합니까?
그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린 아기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야 할 의미와 내 존재가치 때문에 행복감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신앙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성도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6. 오늘 설교의 제목은 <성도를 위한 고난의 기쁨>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성도에게 베푸는 고난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I rejoice in my sufferings for your sake, and in my flesh I do my share on behalf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in filling up 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s.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Νῦν χαίρω ἐν τοῖς παθήμασιν ὑπὲρ ὑμῶν,
now I rejoice in the sufferings for you
‘기뻐하고’(χαίρω)는 현재형으로서 ‘기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내 육체에 채우노라.
καὶ ἀνταναπληρῶ τὰ ὑστερήματα τῶν θλίψεων τοῦ Χριστοῦ ἐν τῇ σαρκί μου
and I am filling up that which is lacking of the tribulations of the Christ in the flesh of me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고난들의 모자란 것을 내 육체에 내가 채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채우노라’(ἀνταναπληρῶ)는 현재형으로서(I am filling up) 현재 채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자란 것’(ὑστερήματα)이란 ‘결여된 것, 필요한 것, 결점, 모자란 것’(that which is lacking, need, defect or shortcoming)을 뜻합니다.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ὑπὲρ τοῦ σώματος αὐτοῦ, ὅ ἐστιν ἡ ἐκκλησία,
for the body of Him, which is the church
직역하면 ‘교회인 그의 몸을 위하여’란 뜻입니다.
동사(ἐ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is).
1.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속죄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고,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교회를 위해서 고난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천주교는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해서, 천주교 신부들이 금욕하고 금식하고 고난을 자초해서 ‘은공 저장’이라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자’로 추앙된 신부들의 공덕을 면죄부로 사게 한 것입니다.
이 면죄부 판매로 인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서 개신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처럼 본 24절은 대단히 중요한 성경 구절이 되어 있습니다.
본 절을 해석하는 열쇠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바울이 성도를 위한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7장 27절에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완성되었고, 예수님의 일꾼들은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수고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3. 바울 사도는 성도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세상에서 괴로움 받는 것을 기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기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성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괴로움 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음식 만들고 빨래하고 집안 청소하는 괴로운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무한히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가신 그리스도께서 남겨두신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교회 성도를 위한 괴로움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이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고, 성도들의 복음 신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4. 바울은 교회를 위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거룩하게 지속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많은 주의 종들의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성도님들의 고난과 수고로 오늘날까지 교회가 이렇게 아름답게 지속되어 온 것을 감사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 되었는데, 바울의 임무는 이방인 구원이라는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25절.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f this church I was made a minister according to the stewardship from God bestowed on me for your benefit, so that I might fully carry out th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ἧς ἐγενόμην ἐγὼ διάκονος
of which I became I minister
‘된’(ἐγενόμην)은 부정과거로서(became) 확실히 일군 된 것을 가리키고,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κατὰ τὴν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Θεοῦ τὴν δοθεῖσάν μοι εἰς ὑμᾶς
according to the administration of the God the having been given me toward you
직역하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란 뜻입니다.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οἰκονομίαν)는 ‘가정사를 관리함, 청지기 직분, 경륜’(management of household affairs, stewardship, administration)이란 뜻입니다.
이전의 개역성경에는 ‘경륜’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번의 개역개정에는 ‘직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내게 주신’에서 동사(δοθεῖσάν)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given) 직역하면 ‘나에게 주어진’이란 뜻인데, 능동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확실히 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πληρῶσαι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to complete the word of the God
직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일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인 용법으로 번역한 한글 번역은 잘한 것입니다.
1.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의 일꾼이 되었는데,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받고 있고, 이 고난도 하나님의 뜻(복음 전도)을 이루려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바울이 교회의 일꾼된 것은 성도를 위하여 주님이 주신 사도의 직분(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사도의 직분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찬양대, 구역장, 남녀전도회 임원 등)은 각자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에 따라서, 받은바 은사들을 활용하여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처럼 봉사할 때, 구원의 은혜 못지않은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봉사는 남을 위하기보다는 실상 자기에게 은혜와 행복감이 넘치게 하는 행복의 제조기입니다.
26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at is, the mystery which has been hidden from the past ages and generations, but has now been manifested to His saints,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τὸ μυστήριον τὸ ἀποκεκρυμμένον ἀπὸ τῶν αἰώνων καὶ ἀπὸ τῶν γενεῶν—
the mystery the having been hidden from the ages and from the generations
‘감추어진 것인데’(ἀποκεκρυμμένον)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hidden) 완전히 감추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νῦν δὲ ἐφανερώθη τοῖς ἁγίοις αὐτοῦ,
now however having been manifested to the saints of Him
‘나타났고’(ἐφανερώ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having been manifested) 확실히 나타난 것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비밀(μυστήριον: mystery)은 원래 신비주의 집단에서 비밀스럽게 전수되어 오는 교리를 가리키는데, 본 절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란 비밀은 구약시대에는 감추어져 왔으나, 바울에게 계시되어 현저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ἀπὸ τῶν αἰώνων καὶ ἀπὸ τῶν γενεῶν: from the ages and from the generations)는 앞에 것( αἰώνων: ages)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 뒤에 것(γενεῶν: generations)은 여러 세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아주 오랜 세월을 표현한 것입니다.
2. 바울이 맡은 직분(경륜)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것인데, ‘이방인 구원’은 바울 이전까지는 비밀로 감추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구약성경을 잘 알면서도, 이방인 구원의 비밀을 몰라서, 바울에게 모진 핍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1) 바울도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이 기독교의 최고의 직분인 사도의 직분을 맡게 된 것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예수님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사도로 파송하셨을 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신의 과거 유대교인의 생활이 잘못되었고, 기독교의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울의 소청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해봐도 옳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다시피 하고, 수많은 사람을 가두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는데, 아무리 바울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형제가 되었다고 하지만, 바울에게 부모나 형제를 잃은 성도들이 바울에게 용서와 사랑이 잘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바울 사도가 아무리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지만, 자기 동족에 대한 인간의 애정이라는 것은 쉽게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먼저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동족인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를 받지 않고, 오히려 바울을 죽이려고 돌을 던지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미련스럽게도 그제서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정이란 위대한 바울에게 있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로마서 9장을 보면,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이 구원을 받기 위함이라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 구원을 소원했던 동포애를 볼 수 있습니다.
27절.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o whom God willed to make known what is the riches of the glory of this mystery among the Gentiles, which is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알게 하려 하심이라
οἷς ἠθέλησεν ὁ Θεὸς γνωρίσαι
to whom willed the God to make known
‘알게 하려’(γνωρί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make known)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심이라’(ἠθέλησεν)는 부정과거로서(willed) 확실하게 의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τί τὸ πλοῦτος τῆς δόξης τοῦ μυστηρίου τούτου ἐν τοῖς ἔθνεσιν,
what the riches of the glory of the mystery this among the gentiles
동사는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ὅς ἐστιν Χριστὸς ἐν ὑμῖν, ἡ ἐλπὶς τῆς δόξης·
which is Christ in you, the hope of the glory
직역하면 ‘이것은 너희 안의 그리스도시니, 영광의 소망이시다’는 뜻입니다.
즉 관계대명사(ὅς)를 ‘이 비밀’로 해석한 것입니다.
동사(ἐστιν)는 현재입니다(is).
1. 이 ‘비밀’이란 오랫동안 구원의 특권에서 제외되어왔던 이방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로 유대인과 차별이 없이 구원받게 된 계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방인이 예수님의 나라에서 기업으로 구원받는 구원은 말할 수 없이 풍성한 것입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이신데, 이 그리스도께서는 성도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밀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계셔서, 그 비밀의 영광이 구약 성전이 아니라 성도 안에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계신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이 영광을 잃어버렸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로 인해 우리들은 영광의 영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찬송가 185장.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큰 환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주 믿는 성도들 다 전할 소식은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2. ‘비밀’이란 오랫동안 구원의 특권에서 제외된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게 된 것을 가리키고, ‘비밀의 영광’이란 이방인의 구원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자칭 의롭다고 하는 유대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감격보다는 죄 많은 이방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감격과 영광은 휠씬 더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도,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은 그만큼 감격적으로 많이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과연, 바리새인 시몬보다, 죄 많은 여인이 용서와 구원을 받고 예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이 더욱 풍성했습니다.
4. “이 비밀이란 성도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 계신 것이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 그리스도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던 영광을 다시 찾게 해주신 영광의 소망이 되십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범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으나, 이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 들임으로써, 잃었던 영광을 다시 되찾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요한계시록 3:20.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바울은 성도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따라 자기도 힘을 다하여 수고했습니다.
28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e proclaim Him, admonishing every man and teaching every man with all wisdom, so that we may present every man complete in Christ.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ὃν ἡμεῖς καταγγέλλομεν,
whom we we preach,
‘우리가’(ἡμεῖς, we)가 강조되어 있고, ‘전파하여’(preach)는 현재형으로서(preach) 현재 전파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
νουθετοῦντες πάντα ἄνθρωπον
admonishing every man
‘권하고’(νουθετοῦ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admonishing) 현재 권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καὶ διδάσκοντες πάντα ἄνθρωπον ἐν πάσῃ σοφίᾳ,
and teaching every man in all wisdom
‘가르침은’(διδάσκοντες)은 현재분사로서(teaching) 현재 가르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ἵνα παραστήσωμεν πάντα ἄνθρωπον τέλειον ἐν Χριστῷ·
so that we may present every man perfect in Christ
‘세우려 함이니’(παραστήσωμεν)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we may present) 확실하게 세우려고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고, 전도의 방법은 각 사람을 권하고 지혜로 가르치는 것이고, 전도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권하는 것’은 오늘날 설교에 해당하고, ‘가르치는 것’은 교육에 해당합니다.
‘완전한 자’(τέλειον, perfect)란 원래 신비주의에서 주장하는 목표인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완전한 자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성령님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삶을 가리킵니다.
신비주의 종교에서는 이 완전한 자가 극히 소수에게 제한되어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각 사람’ 즉 ‘모든 사람’(πάντα ἄνθρωπον: every man)에게 해당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여 전도하고 목회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장 31절에서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 성도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전파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하는 선교사였습니다.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목회하시는 분이 아니셨으므로, 편지로 각 교회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신약성경은 대부분이 바울 사도가 각 교회에 편지로 써서 보낸 글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세상 학문을 배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나,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여, 우리의 영혼에 양식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곳곳마다 영혼이 기갈을 느끼며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 지식이나 세상 향락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혼의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떡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육신의 떡을 먹는 자마다 죽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원히 살고,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은 너무도 소중하여, 돈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와서 먹고 마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3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도,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양식과 향락을 위해서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새벽에 교회에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성경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따서, 자기의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맙니다.
성경은 성경에 말씀한 대로 차례대로 말씀을 이해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하시는 교회라서 참 다행입니다.
29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is purpose also I labor, striving according to His power, which mightily works within me.
이를 위하여 나도--수고하노라
εἰς ὃ καὶ κοπιῶ,
unto this also I toil,
‘수고하노라’(κοπιῶ)는 현재형으로서(I toil) 지금 수고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ἀγωνιζόμενος κατὰ τὴν ἐνέργειαν αὐτοῦ τὴν ἐνεργουμένην ἐν ἐμοὶ ἐν δυνάμει.
striving according to the energy of Him the working in me in power
‘역사하시는’(ἐνεργουμένην)은 현재분사로서(working) 현재 내 안에서 능력으로 확실히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힘을 다하여’(ἀγωνιζό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striving) 내가 지금 힘을 다하여 애쓰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은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자신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자기 혼자 힘으로 수고하는 것이고, 신비주의자는 성령님의 역사에만 끌려가는 것인데 반하여, 바울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자기도 제 정신과 의지를 가지고 힘써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 절은 기독교인의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의지나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참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2. 바울 사도는 늘 기도하여 성령님이 지혜를 주시고, 능력으로 역사해주실 것을 기도했고, 그래서 성령님이 바울에게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기적적으로도 역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성령님의 역사에 따라서 힘을 다하여 전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편지를 쓰고, 사람을 보내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책망하고, 이단을 경계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고, 돈도 벌고, 헌금하고, 구제하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성령님의 역사만을 강조하면서,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고, 신비주의자입니다.
반면에 기도하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노력과 인간적인 술수로만 교회 일을 하려는 것은 인본주의요 율법주의입니다.
3. 바울은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주의 일을 했고, 또 한편 자기도 힘을 다하여 수고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건전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계신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즉, 성령님의 역사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은 <인본주의 불신자>입니다.
반면에, 성령님의 역사에만 맡기고, 자기는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입니다.
건전한 신앙생활은 열심히 기도하여,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고, 성령님의 인도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고, 나도 힘과 지혜와 능력을 다하여 기도하고 연구하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용서와 사랑과 천국 구원을 받은 감격을 가지고, 나도 이 사랑을 주님의 몸된 교회 성도를 위해서 힘써 수고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 충만하시고, 가정과 자녀들이 복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