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7017 서울로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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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15번출구(공항철도)
-> 서울로7017 F 진입로
-> 서울로 6번 대우재단 출구
-> 남대문교회
-> 한양도성
-> 백범광장
-> 남산육교
-> 숭례문 (남대문시장)
소요시간 : 약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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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소개(서울도보관광 사이트에서)
서울의 밤풍경과 함께 서울로를 걷는 코스입니다.
야경의 도시 서울 한가운데서
경성역에서 서울역, 문화역서울284까지 90년 동안
도시를 지켜온 서울역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울로를 걷고,
한양도성을 따라 서울의 또 다른 밤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코스내 주요 관광명소 ----------------
1. 서울로 7017
1970년에 지어진 고가도로를 사람길로 바꾸는 프로젝트다.
2015년 안전등급 D등급 - 철거예정
2017년 시빈들의 보행을 위한 서울로로 재탄생
17개의 사람길이라는 뜻도 포함
645개의 화분과 24,085 그루의 꽃과 나무
---출처 : 서울도보관광 홈페이지 코스내 주요 관광명소 서울로 7017에서
문화역 서울 284
1900년 경인선 개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
1905년 남대문역 개설
1925년 경성역 신축건물 시대로
서양식으로 지어진 역사 내부
매표소, 대합실, 경양식집 -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집합소
1947년 ‘서울역’으로
(구)서울역사 : 사적 제284호로 지정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중
자료 : 1925년 10월 8일 동아일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의역 :
새로 단장한 경성역
이전 남대문 정거장터에 새로 지은 부흥식(네오 바로크 식) 벽돌 이층 양옥 경성정가장도 머지 않아 손님을 맞이하게 된답니다. 이 정거장은 4년전 즉 임술년(1922년) 6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올해(1925년) 9월 30일, 만 40개월만에 공사를 마쳤답니다. 내부단장후 오는 10월 12일 오전 11시 30분에는 정거장 앞 넓은 마당에서 수발제를 재내고 14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는 정거장 내부를 일반사람에게 공개를 한답니다. 건물의 연면적은 17,269평방미터인데 본관 지계면적만 2,747평방 미터로 총공사비 1,945,946원이랍니다. 이 집구조는 가보시면 아실텐데, 내부에는 승강기와 난방장치도 있고, 아래층에는 예전과 같이 1,2,3등 대합실외에 부인대합실, 귀빈실 강객실도 있답니다. 2층에는 이발소와 크고 작은 식당이 있다는데 200여명분의 연회설비도 할만하답니다. 그 중에도 웃긴것은 중간계단에는 돈을 내야 들어갈수 있는 변소를 만들어 두었답니다.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서울역 고가도로 개축이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문화재 주변경관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개발 우선시대의 서울
김현옥 서울시장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시장
서울지하철과 강남개발등의 밑그림을 완성하다.
1970년 4월 8일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다
1967년 무허가 건물 136,650동에 대한 양성화 계획 발표
일부 보조금 지급, 나머지 9만가구에 대한 시민 아파트 건설계획 발표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
1969~1971, 2000동 9만가구 건설목표
재정문제로 서울시는 골조 공사만 진행
나머지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직접하기로
1971년의 한국사
3월 유일한 선생 사망
8월 광주대단지 사건, (여기서 광주는 현재의 성남시가 되었다)
만리동 : 만리현, 최만리, 일본인 공동묘지
서울역에서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만리현[=만리재]에서 유래
세종대 문신 최만리가 살던 곳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만리재 북쪽의 봉학산 : 봉황과 학이 내려와 도성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돌싸움---- 출처 동아일보 1995년 1월 1일 기사중에서
유득공 <경도잡지> 에서
서울의 삼문밖과 아현사람들이 만리재에서 서로 돌을 던지며 싸웠는데,
삼문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아현 사람이 이기면 다른 도의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
<수서>에서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정월초에 두 패거리가 패수에 모여 돌을 던지며 싸웠고 왕도 구경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 1393년 5월 2일 임금이 청심정에 올라 척석희[단오날에 하던 돌싸움, 무술연마차원에서 행해지던 것이었으나, 사상자가 많이 나와 조선조에서 폐지하였다.]을 구경하였다.
- 1401년 5월 5일 국속에 5월 5일에 넓은 가로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석전이라 한다. 사헌부 시사 김효공이 길을 벽제하고 가는데 돌을 던지던 자가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복례 정리[아랫 사람]을 시켜 돌을 던지던 자를 잡으려 하자 정리를 치고 도망하였다. 이에 문하부에서 김효공을 탄핵하였다.
- 1402년 5월 5일. 청화정에 올라가서 석전을 구경하였다.
- 1404년 4월 29일. 한첩목아가 화원에 이르러 석전을 구경하였다.
- 1413년 5월 5일 종로 광통가에서 척석희하다가 대장1인이 돌에 맞아 죽다
- 1421년 5월 2일. 상왕[=태종]이 이질[설사병]을 앓아 임금이 풍양궁에 나가 문병하였다. 상왕이 서울에 가서 석전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주변에서 말리니, 구경하면 혹시 나을지 아는가 하였다.
- 1421년 5월 3일. 상왕이 병조참판 이명덕을 보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하여 좌우대로 나누게하였다.
- 1427년 5월 3일 세 사신이 종루에 올라 석전희[돌싸움 하는 유희]를 구경하였다.
- 1438년 5월 19일. 의금부로 하여금 금지시킨 석전을 행한 익녕군 서산군 등을 추방하였다.
- 1473년 5월 6일. 선전관 이윤겸을 보내 동대문 밖에서 석전하는 사람을 금하게 하였다.
향전(鄕戰) : 지방의 한 관례(慣例)로 일정한 날을 정하여 갑(甲)·을(乙) 두 지방의 주민(住民)사이에 행하는 희전(戲戰). 석전(石戰)·줄다리기·차전(車戰) 등이 있었음
향전율(鄕戰律) : 석전(石戰)이나 차전(車戰) 등의 희전(戱戰)을 한 자들에게 내리는 형으로 곤장 1백 대를 쳐서 먼 곳에 귀양보냄.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刑典) 금제(禁制).
- 1771년 11월 18일. 이후 저자 거리에서 씨름하며 치고 때리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살인(殺人)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그 관사(官司)에서 엄중히 장(杖) 1백 대를 때리도록 하라. 일찍이 듣건대 평양(平壤)에서는 상원일[음력 정원 대보름]에 에 석전(石戰)을 벌인다고 하니, 장(杖)으로 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더욱이 돌멩이이겠는가? 관서에 분부해서 일체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경중(京中)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에 벌이는 석전을 포청에 분부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종중결곤(從重決棍)하게 하라."
조선초에는 석전이 단오에 행해지다가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대에는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림동 : 약현, 약현성당, 서소문 밖 장, 칠패시장
약전중동과 한림동에서 한글자씩 따서
조선시대 서부 반석방과 반송방 지역
약전현 : 아현 3거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아서
김정호 살았던 곳
양정중학교 >> 손기정공원
약현성당 - 한국최초의 서양식 벽돌건물
한림동 : 이정보가 무학대사의 말에 따라 집을 짓고, 6세손 이정암의 3형제가 모두 한림 벼슬에 나아간데서 유래.
염창동 수제화 거리
봉래동
2. 남대문교회와 연세빌딩
미국의 선교자이자 의사였던 알렌에 의해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운영되었었습니다.
기독교 바탕으로 신분 차별없이 진료를 보았고 방문자자 증가하면서 미국의 실업가가 세브란스에게 후원을 받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하게 됩니다. 선교사였던 알렌의 주도하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며 '제중원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병원과 함께 남문 밖으로 이전을 하며 '남대문교회'로 설립되었습니다.
---출처 : 서울도보관광 홈페이지 코스내 주요 관광명소 남대문교회에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의 근대화 구상의 하나로 의료 근대화 계획
1884년 갑신정변 중 다친 민영환을 치료한 미국의 선교자이자 의사였던 알렌의 이야기
재동의 제중원 시절
1885년 음력 2월 29일 재동(현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 설립
1885년 음력 3월 12일 제중원으로 이름을 변경
1885년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미국인 선교사들 중심의 종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후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며 분리되었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조선에 입국
자신의 정동집에서 예배를 시작하다.
1887년 9월 27일 돈의문 안쪽에서 14명의 신자로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세우면 독립하였다.
1885년 4월 5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조선에 입국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 개교
1885년 10월 11일 자신의 정동집에서 예배 시작
1887년 9월 예배용 건물 마련해서 사용 시작.
Bethel chapel 로 교회 역사 본격 시작
동현(구리개)의 제중원 시절
1886년 10월 ~11월 동현(구리개, 지금의 을지로)으로 제중원 이전
재동에서의 병원 영업이 너무 성황이어서 넓은 건물이 필요해서
조선 정부는 왕실 소유의 땅이었던 구리개의 땅을 주어 이전케 했다.
1894년 갑오개혁과 제중원
6월 갑오개혁으로 제중원을 위생국으로 흡수
7월 18일에는 내무아문으로 이관 관리했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패로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다.
이에 미 선교사 들은 고종에 쇄신을 건의
고종은 제중원의 경영권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하였다.
1904년 도동(현재 연세빌딩 자리) 세브란스 병원의 시대
새 병원 설립, 공사 기간 : 1902~1904.9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병원이 세워졌다.
1939년 일제에 의한 선교사 입국 금지령이전까지 지속적인 미국인 선교사들의 지원이 있었다
선교사 알렌(Allen,H.N., 安連)
헤론(Heron,J.W., 惠論) 부부
의사 스크랜턴(Scranton,W.B.)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H.G., 元杜尤)
에비슨(Avison,O.R., 魚丕信)
세브란스(Severance,L.H.)
1904년 남대문 밖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이전해오다
1910년 세브란스의 지원으로 새 교회 건물을 준공하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남대문 교회 사람들
이갑성(李甲成)- 33인중 1인
함태영(咸台永) 등
- 3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갑성은 청년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손병희(孫秉熙)·길선주(吉善宙)·이필주(李弼柱)·백용성(白龍城)·김완규(金完圭)·
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양전백(梁甸白)·양한묵(梁漢默)·유여대(劉如大)·이갑성(李甲成)·
이명룡(李明龍)·이승훈(李昇薰)·이종훈(李鍾勳)·이종일(李鍾一)·임예환(林禮煥)·
박준승(朴準承)·박희도(朴熙道)·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신석구(申錫九)·
오세창(吳世昌)·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최성모(崔聖模)·최린(崔麟)·
한용운(韓龍雲)·홍병기(洪秉箕)·홍기조(洪基兆)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갑성 [李甲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886년 ~ 1981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연당(硏堂). 경상북도 대구 출신.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YMCA의 이사를 맡아 청년들을 지도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지냈다. 같은 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뒤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협력해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했고,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고,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을 지냈고, 1965년 광복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 총재를 맡았다.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에 참석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남대문 교회
: 1924년 12월, 제3대 목사로 취임한 김익두(金益斗)는 유명한 부흥설교가로서 교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이단시비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또한 1934년에 취임한 김영주(金英珠)는 ‘창세기 모세 저작설 부인사건’을 일으켜 총회에서 이단여부를 조사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와 조선혁신교단의 설립으로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혁신교단의 의장인 전필순(全弼淳)의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다.
1944년에는 김치선(金致善)이 제6대 목사로 부임하여 1953년까지 시무하면서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현 대한신학교의 전신인 야간신학원도 설립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수복 후 재건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당시 집사이던 박태선(朴泰善)의 신앙노선에 문제가 제기되어 이단시비를 불러일으켰다.
1954년 9월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한인교회활동을 벌이던 김태묵(金泰默)이 부임하여 교회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고, 1957년부터 1979년까지는 배명준(裵明俊)이 제8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박정찬 이후 2013년 현재 손윤탁 목사에 이르기까지 13명의 한국인 목사들이 이끌어 온 이 교회는 교회의 대형화에 강조를 두기보다는 새 교회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공덕(孔德)·행화정(杏花亭)·삼판통·청량리중앙교회·해방촌교회를 세웠으며, 최근에는 맹인교회인 애능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
1979년에는 교회의 역사를 정리한 『남대문교회사』를 편찬하였고, 1987년에는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대문교회 [南大門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주식 일부를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다
-- 세브란스 병원의 재정건전성 강화에 도움
3.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입니다. 태조 때 특별한 기술 없이 돌을 쌓는 방식으로 처음 세워지고 이후 세종 숙종 순조를 거치며 기술이 발달하여 돌을 깎아 쌓게 되어 지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성곽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따라 남산자락에 올라 서울의 또 다른 밤 풍경을 만나보세요.
---출처 : 서울도보관광 홈페이지 코스내 주요 관광명소 한양도성에서
태조대의 한양도성
1395년 윤 9월 도성 축성을 결정하다
1396년 1월 9일 ~2월 28일, 1차 도성공사
59500척, 공사 실명 책임제, 97개 구간
공사인원 11만 8천여명
1396.8.6~9.24 2차 축성 공사
8.13 신덕왕후 강씨 사망, 태조는 공사에 거의 개입하지 못함.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9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1397.1 축성공사
1398.2 남대문 문루 완성
세종대의 한양도성
20여년의 기간동안 무너진 성곽을 수리하다.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다
1421년 10월 13일 도성수축도감을 만들다
수리구간 약 28,000여척, 공사기간 40일, 인원 약 32만명
1422년 1월 14일 백악산신과 목멱산신에 제사
1422.1.15~2.23. 사망자 872명. 사망률 0.27%
성곽높이 16~23척
문종대의 수리 1451.2.25~3.17 - 기간에 대한 확인 필요.
세조 연산군 광해군 인조대에도 부분적인 성곽에 대한 수축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의 한양도성
양란 이후의 국방의식 강화를 목적으로.
1704.3월~1709년
군인들을 중심으로 공사를 진행. 약 5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돌은 정릉 근처 청수동에서 채석
사방 2척의 정방형 석재를 사용
순조대의 한양도성
일제강점기의 한양도성
1907년 숭례문이 폐쇄되다.
1975년의 한양도성복원
1968.1.21 북한 무장 공비 침투 사건 - 일명 김신조 사태
국방의식고취를 목적
4. 남산공원
백범광장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던 곳
4·19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허물었다.
1968년 8월 백범광장을 만들면서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공원 내에는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있고 이시영(李始榮) 선생 동상이 있다.
남산공원 관련 기사
1970년 11월 19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대화가 피는 백범광장 - 현대화의 숲에 싸인 남산[10]
서울 새 풍속도(35)
정치집회서 예비군 훈련장으로
새벽 예배, 쇼 공원과 함께
덩치만 크고 제 구실 못하는 야외 음악당
어린이 회관 옆선 노인들의 열띤 시국토론이
남산은 해방과 함께 수만흔 집회 장소로 사용돼왔다. 크게는 수십만 인파가 몰렸다는 정치집회에서부터 작게는 노인네들의 한가한 시국정담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터전을 마련해 온 남산은 바로 시민의 광장이었다.
해방이후 남산집회로 첫기록되기는 해방 이듬해 좌익계의 3.1절 기념식을 가장한 행사.
서울운동장에 모였던 우익계의 기념행사를 방해하려고 남대문 앞에서 충돌, 피를 흐린 골육상쟁의 역사의 첫페이지를 열었다.
그보다 조금 늦게 옛조선신궁 경성신사터에서 열린 기독교인들의 첫부활절 새벽예배는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의 박해속에 숨져간 순교자들의 피의 역사와 고난을 딛고선 승리의 기록으로 찬송됐다. 새벽공기를 뚫고 승리의 기도와 찬송이 남산골짜기를 타고 온 서울시내에 메아리지던 그날의 감격을 잊지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 때부터 매해 부활절 새벽예배가 기독교인들의 연합으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5.16직후 남산 야외음악당이 세워지면서 남산은 보다 넓은 모임의 터를 마련했다. 모 재벌이 추문이 있은 뒤 헌납한 6백 60만원으로 이룩했다는 남산 야외음악당은 건평 1,017평에 96평의 무대를 가진 콘크리트 건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라벤식의 특수구조를 자랑, 마치 조개껍데기를 펼쳐놓은 것 같은 무대구조는 나팔을 확대해논 것 같아 음향효과가 좋다고했지만 실제 음향효과는 좋지않고, 소리만 1백미터 떨어진 곳까지 퍼지도록 돼 있어 야외집회만 자주 있는 모양이다.
이래서 남산야외음악당은 지어진 이름대로 음악연주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문화예술의 전당을 꿈꾸어 야외 음악당 건물안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사무실과 연습실이 자리잡았으나 맞지 않는 여건은 이곳을 경축일에 시민위안회, 쇼 공연장으로나 알맞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지금은 음악당이라는 허울좋은 이름뿐. 사실살이곳의 주인인 서울시립교향악단조차 외면해버린지 오래다.
한때는 정치집회장소로 곧잘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지난 67년 대통령선거때 여야 대통령 후보의 남산유세에 수십만명이 모였던 그 이후 남산에서의 정치집회는 일제금지, 장충단 남산 야외음악당을 중심한 수많은 정치일화, 자유당 깡패에 의한 장충단 집회 방해사건 같은 것이 모두 옛일로 흘러가버렸다.
남산 야외음악당 앞 광장 6,600평은 지난해 백범 동상이 이곳에 세워지면서부터 백범광장으로 이름지어졌다.
지난해 아폴로 우주선의 달착륙광경을 이곳에 설치한 대형텔리비젼스크린으로 중계, TV없는 서민층의 서글품을 씻겨주기도 했던 것처럼 음악당이란 이름이 갖는 귀족적인 의미가 보다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광장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은 남산 야외음악당 앞 백범광장이 예비군 훈련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매일같이 수백명의 얼룩무늬 예비군 5~6개 지역 및 직장중대가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의 갑호부대 예비군 점호를 받는 곳도 바로 이곳. 예비군 검열을 받던 직장 중대가 아침부터 검열나온 현역군인들의 기합에 땀을 흘리고 있다.
일요일에도 훈련결석예비군들이 경찰에 의해 다시 소집되어 보충훈련으로 모처럼의 휴일을 남산에서 보낸다.
"이곳은 백범 광장입니다.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일생을 바치신 그분의 광장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예비군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어느 예비군 중대장의 일장훈시가 실감있다. 그러나 훈련에 나온 예비군들은 휴식시간이면 곧잘 백범 동상 앞이나 잔디위 어느곳이나 드러눕는가 하면 예비군을 노리고 몰려든 장사치들이 광장주변에 자리잡기도 한다.
파고다공원이 유료공원이 되면서 한가로운 정담에 하루해를 보내던 노인네들은 모두 남산으로 쫓겨왔다. 지금 이들의 안식처는 장충단 제1광장 끝 남산 오름길 옆에 마련된 10여개 벤치 위에 언제나 40~50명의 노인네들이 모여 정다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래서 남산의 노인집회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때로는 울분을 털어놓는가 하면 찬사의 박수를 보내는 대화의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화제와 토론에 열을 올리는 노인네 집회의 주위를 지나는 젊은이들이 곧잘 발길을 멈추고 불붙는 논쟁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주변에는 어느새 백여명 청중이 에워싸는 인기마저 있다.
이렇게 남산에 모이던 노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남산동지회가 지난 68년 창립되고 어린이회관 개관후 노인회관도 마련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 복지시설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인지..
이승만 동상 관련
1960년 5월 28일 경향신문 기사에에서. 민의(사설). 남산의 동상
4월혁명으로 이승만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신생 제2공화국 탄생을 눈앞에 둔 이때 아직도 남산 일우에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듯한 그 노인의 동상이 남아 있어 서울 시민의 기분을 상하게 하니 과정 담장자는 하루 속히 동상을 철거하여 국민의 뜻에 따르기 바란다. 12년간 독재정권 밑에서 날뛰던 卒徒들은속속 검거되고 있는 금일, 그 두령의 처단은 건국공로로써 우선 구속단계에서 제외된 듯 하니 탑골공원의 동상은 의거 당시 학생의 손에 의하여 철거되었거늘 동일한 남산의 동상도 하루 속히 철거하고 앞으로 세워질 순국의거학도의 위령탑이 건립되는 날을 기다림이 가할 것이다.
일시민의 과문인지는 모르지만 생존자의 동상을 건립함은 과거나 현재를 통해서 이승만 정권하에만 있는 듯하다. 극도에 달한 아부와 자아독존이며 수억대를 산하는 재정낭비를 회상할 때 국민을 우롱함이 이 이상 없을줄로 안다.
무슨 업적이 있다고 우리 후손에까지 보이기 위하여 가치없는 동상을 그냥 두는 것이냐 하루 속히 철거하여 구악의 상을 없애주기바라며 온 국민의 원성의 대상이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위대한 4월혁명으로써 타도한 현재에 와서 독재자의 동상이 오늘날까지 수도 한복판에 으젓이 서있다는 것은 4월혁명의 의의를 모독할 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수치라 아니할 수 없다. 정치경제 각 부면에 숙정작업이 과감히 실시되는 이 마당에서 외형상의 숙정도 급선무일 것이다.
.... 장충동 P 生
1960년 6월 2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민의(사설). 이박사의 동상
여기서 민의는 사설과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우리는 썩은 정치가 미웠을 뿐 결코 인간 우남이나 그 누구가 밉지는 않았으며 더구나 건국공로자로서 그를 존경하기까지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독립과 건국의 공로자 우남의 동상이 쓰러져 길바닥에 질질 끌려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며 우리의 실수를 통절히 후회했었다.
지난 28일자 석간 [민의] 난에 남산의 동상이 밉다고 한 어느 독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과거가 쓰라리고 뼈저렸으면 괴로움을 주던 자의 모습을 아로새긴 한 개의 구리 덩어리에가지 그처럼 증오가 쏠리겠는가.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지난 날 우리가 반공회관을 불살랐지만 그 앞에 서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건드리기는 커녕 화환까지 바쳤던 일을 상기하자.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혁명의 본질을 밝혀 특히 공산진영의 왜곡선전을 막았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 마당에 이르러서는 독립과 건국에 이바지한 그의 공고만은 인정하여 남산동상을 철거하지 않을 것은 물론 파고도의 동상도 다시 세워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관후한 민족성과 피를 흘린 참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만방에 보여주자. 쓰라렸던 과거를 되씹는 보복행위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이문동 一學生
이문동 일학생은 작성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0년 7월 24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권세와 아부로 남산에 세운 이박사 동상도 하야하기로
서울 시가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남산광장에 2억 수천만환을 들여 건립한 이승만 박사 동상이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새 정부가 서기 전에 철거되다.
지난날 이승만 독재 대통령의 80회 誕辰을 기념하는 가지가지 아부행사속의 하나로 이 거창스런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을때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굳이 건립한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욕되는 일이라"는 비난성도 높았던 것인데, 독재자를 에워싼 악의 무리들의 아첨 결과는 끝내 본인에게 여생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높이 81, 총체적 25,741 입방척, 중량이 4,381톤, 동상대지가 삼천여평
일년 걸려 조립된 이 동상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유수의 거대한 규모의 것이지만, 앞으로 건립될 민의원 의사당의 앞자리에 서 있을 독재동상이 아무런 의의도 갖지 않는다 하여 동상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보았다는 것.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ㅈㅇ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선한다..고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독재자의 동상은 윤모 조각가의 작품으로 된 것이지만, 어쩐지 본인의 형상과도 크게 달라보인다는 중론도 없지는 않다. 이제 없어지게된 동상을 가리켜 악정을 하면 저 사람 말로같이 된다는 본보기로 남겨둘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람. 초대대통령이니 동상으로 남겨두기 위하여 딴곳으로 옮기자는 온건파도 있다.
여하튼 우남회관 우남정 등 우남자가 붙는 여러 가지 지난날의 악몽같은 기억을 되살려주는 가운데 그의 우상이 제일 먼저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나보다.
민중의 뜻에 의하여
1960년 8월 23일 동아일보기사에서.
이승만 동상, 헐어뜯기 시작
독재의 상징과도 같이 남산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이승만 동상이 22일부터 헐어뜯기우기 시작...
동원된 10여명의 인부들은 먼저 환목을 짜서 세워올리고 다시 가마때기를 씌워서 무너뜨리기 위한 기초작업에 열중..
당국자 말에 의하면 이를내에 완전히 헐어뜨릴수 있으리라고
조각가 윤모씨의 손에 의하여 이곳에 세워진지 3년.
독재와 부패와 아부에 둘러싸였던 그외 별신도 이제 마지막 운명을 재촉.
1960년 8월 31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餘滴
남산에 세웠던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이 드디어 30일 철거되었다.
이 동상 철거에는 170만환의 경비가 들었다는 경제적 이유외에 동상이야 무슨 죄가 있을까 기념물로 존치시키면 되지 않느냐 하는 이유에서 반대론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독재자가 남기고 간 여러 가지 일들을 뒷치닥거리 하기에 우리는 돈도 들고 힘도 들게 되었다.
한국땅의 자연미가 아름답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데, 인공미에 이르러서는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보잘것이 없다. 빈곤때문에 문화재의 창조력이 정지된 탓이리라. 수도 서울만 보더라도 그 산악미의 아려함은 누구나 놀랄바이나, 한번 시가에 들어설 대 거기에는 교량 하나 동o 하나건물 한 채 독특한 오리지날티를 자랑하며 빛내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있다는 것은 식민지시대의 상처어린 혼동뿐이다.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라면 관뚜껑을 덮고난 뒤에 만들어도 늦지 아니하다. 이 전 대통령의 동상도 너무 조급하게 세웠기때문에 철거의 비운에 빠진 것이다. 사학재단에서 생존하는 총장들이 자신의 동상을 건립하는 것이 유행되다시피한 일이 있다. 4.19 직후 모 대학교에서 그 혁명의 혼란 속에서 일여인의 동상이 이 교정에 세워졌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은 이미 작고한 동대학의 이사이며 다액의 기부를 한 바 있는 비구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 동상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는 정면으로 보면 비구니상이지만 옆으로보면 동대학교 총장상이라하여 신비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더구나 동총장과 그 비구니와의 사생활관계가 드러나서 전교적으로 물의가 발생하자 이 동상은 철거되고 말았으나 야뉴스신처럼 이양상을 가진 여인의 동상이야기는 대학분규의 폭풍우속에 일삽화로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전에 독재자 알젠틴 대통령이 여우 출신인 그의 애처 에바 베롱의 동상을 세워 오 나의 태양이여 하면서 독재자를 숭배하던 박명의 여인의 혼을 위로한 바 있거니와 여기의 일총장은 스승이요 선배요 혹은 구원의 여인인 비구니의 동상속에 자기의 모습을 합체하여 영원한 양신합체의 경지에 침잠코자 꾀한 것인바 거기에는 종교적 신비성외에 애정의 극치와 하염없는 낭만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본다.
파고다 공원에 서 있던 이승만 동상은 혁명당일에 철거당하였거니와 이제 남산의 동상마저 철거되는바...
1960년 9월 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이승만 동상자리에 단군동상건립청원
31운동당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바 있는 정재용 옹은 2일 곽 민의원 의장에게 배달민족의 시조 단군동상을 남산 이승만 동상 철거자리에 건립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남산 백범 김구 동상 관련
1969년 4월 8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백범 동상 남산에 기공
고 백범 김구 선생 동상 건립 기공식이 8일 상오 10시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곽상훈씨 -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장 - 백낙준씨 김성곤 의원 등과 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오는 9월중으로 준공될 이 공사는 박 대통령의 금일봉과 김성곤 의원이 낸 5백만원의 찬조금 등 각계서 보내온 찬조금 2천만원으로 건립된다. 동신은 19척, 좌대는 18척이다.
1969년 6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백범, 동상 완성
8월 23일 탄일 제막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 앞 광장에 세워질 김구 선생 동상 (높이 6.2m) 의 원상이 조각가 김경승 민복진 양씨에 의해 11일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동상은 백범 선생의 탄일인 오는 8월 23일 제막 완성되는데 동 사업협회는 오는 26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 백범묘소에서 20주기 추도회를 갖는다.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白凡金九紀念館資料室 ]
설립일 2002. 10. 22.
서울시 용산구 백범 김구기념관 자료실은
백범 김구 선생(1876.8.29 ~ 1949.6.26)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문헌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이다.
1949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를 설립하였고,
1969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과 백범 광장을 건립하였다.
1999년 백범기념관을 설립하기 위한 위원회가 발족되고 모금운동을 통해 2000년 6월 착공하여, 2002년 10월 준공하였다.
전체 시설 규모는 대지면적 1만 8,364㎡, 건축면적 9,683㎡로, 지상 2층 전시관 및 컨벤션센터를 갖춘 건물이다. 주요 내부시설로는 제1,2전시관, 컨벤션홀, 대회의실, 제1,2교육장, 백범광장, 백범 김구선생 묘소, 이봉창 의사 동상 등이 있다.
이곳 자료실의 소장 도서로는 백범 김구 선생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 [白凡金九紀念館資料室]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도서관, 굿모닝미디어)
백범 김구
1876년 출생
1890년 한학을 배우다
1893년 동학에 입교하다
1895년 동학농민운동을 하다 만주로 피신하여 의병이 되다
1896년 일본인 살해혐의로 고향 해주에서 체포되다
인천감옥에 수감, 사형 선고, 고종의 특사로 감형
1898년 탈옥, 마곡사의 승려가 되다
1899년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재직중, 신민회에 가입하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 15년형을 선고받다.
복역중 인천 항만 건설공사 노역을 하다
1915년 감형을 받아, 출옥하다
출옥후 농촌계몽운동에 나서다.
1919년 3.1운동후 상해로 망명
1928년 한국 독립당을 조직
1932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5년 한국 국민당 조직
1940년 한국독립당 조직 - 민족주의 진영
1944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 선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안두희에게 암살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관련
1986년 4월 17일 기사에서.
이시영 선생 동상 남산서 제막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제막식이 17일 오전 11시 서울 남산 구 야외음악당자리인 백범광장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 이재형 국회의장, 이민우 신민당 총재, 유석현 광복회 회장,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정일권 전 국무총리, 윤택중 기념사업회장, 유족측의 이종찬 의원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제막식에서 채문식 동상건립위원장은 이시영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를 세울때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우리의 정통 법맥을 지켜온 등불이었다며, 대한민국을 건국한 원훈으로 구한말 상해임시정부 등 역사 3대를 연결시켜온 유일한 분이라고 말했따.
또 윤 전 대통령은 추념사를 통해 성재 선생은 구한말에는 우국지사로, 일제암흑기에는 항일독립투사로, 해방후에는 반공 반독재의 민주지도자로 이나라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며, 건국후 이나라가 독재의 길을 걷자 시위소찬(尸位素餐) 이란 명귀를 남기고 부통령 직을 버렸던 일은 우리세대와 후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영 선생의 동상은 높이 3미터의 좌대위에 2.7미터 높이의 좌상으로 홍익대 최기원 교수가 제작했다.
이시영[李始榮 ]
1869(고종 6)∼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박승문(朴勝文)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서간도(西間島)유하현(柳河縣)삼원보(三源堡)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13년 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그 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리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년『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년 10월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영 [李始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남산공원 [Namsan Park, 南山公園] (두산백과)
남산(南山:262m)을 중심으로 꾸며진 공원이다.
총면적은 102만 9300㎡으로 서울특별시 공원 중에서 가장 넓다.
처음 세워진 공원은 1897년에 문을 연 왜성대공원(왜 ·倭城大公園)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의 주둔지인 것을 일본인들이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도로를 내고 벚나무 600그루를 심었다.
1908년에는 현재 남산3호터널 부근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 조성되었으며, 1910년에는 다시 시민공원으로 개장하였다.
현재 남산공원은 크게 장충지구와 예장지구·회현지구·한남지구로 나뉜다.
회현지구 :
과학교육원과 남산도서관 ·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남산 팔각정과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정상까지를 포함하고 있어
남산의 여러 구역 중 가장 넓다.
과학교육원은 1970년 어린이회관 건물로 지어진 것이다.
남산 위에 우뚝 선 서울타워는
본래 종합전파탑이 있던 곳으로 1975년에 건립되었다.
5층의 회전 전망대는
해발 480m의 높이로 서울의 전경을 훤히 볼 수 있으며,
건물 안에 해양수족관과 지구촌민속박물관이 있다.
5. 숭례문
일명 남대문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축물로 인정받아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
2008년 화재로 2층 누각의 대부분과, 1층 누각의 일부가 소실
약 5년간 복원공사
1398년 2월 숭례문 문루 완성
1447년 개축공사
1479년 개축공사
2005년 5월 숭례문 광장 조성
2006년 3월 3일 숭례문 광장 일반에 개방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사건
복원 : 2010.2~2013.5.4
6. 남대문 시장
1608년 남창동 위치에 선혜청 설치
1911.3. 송병준, 조선농업주식회사 설립. 곡물 중심의 농산물을 주로 판매하던 시장
1922년 소유권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앙물산주식회사로 넘어가다.
한국인 점포들이 내쫓겨 나가 염천교 등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해방이후
남대문 상인 연합회가 관리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시장은 폐허가 되었다.
월남한 피난민들이 자리하였다.
미군 군용원조 물자 등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1958년 남대문 상인연합 번영회에서 시장 운영
1963년 남대문시장 주식회사가 공동출자로 설립되어 시장 운영
1968년 화재로 시장이 피해를 입다.
1975년에도 화재가 있었고 이후, 남대문 시장 현대화 계획을 세워지다.
현재는 의류 중심의 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무리 :
우리는 계속되는 변화속에서 살고 있다.
그 변화의 흐름을 선점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한다고
판단된다.
과거 변화의 흐름을 알면
미래 변화의 방향이 보이지 않을까
우리 역사의 현장을 보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