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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교회의 큰 별, 소양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 총 5년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일제에 항거했다. 주기철 목사는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였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내용인즉, 일본의 천조대신 아마디라스 오오미까미를 섬기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는 일종의 국민의례이니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 목사에 동조하는 여러 성도들도 같이 투옥되었다. 어느 날, 일본 순사들은 주 목사의 의기를 꺾으려고 주 목사와 성도들을 감옥 마당에 모여 놓고 말했다. “오늘 여러분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 받지 않도록 해 주겠다.” 교도소 마당에는 널빤지에 못을 무수히 박아 놓고 못 위를 걷는 고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 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주 목사는 말했다;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마치고 주 목사는 자진해서 못이 무수히 박힌 널빤지 위로 올라갔다. 순간 성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주 목사의 발자국 발자국마다 붉은 피가 얼룩졌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 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하리요. 나는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을 뿐입니다.” 1944년도에 주기철 목사는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49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고난의 명상록’을 썼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개통학교에 입학, 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맏형 주기원이 목회했던, 웅천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개통학교 7년 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부산에서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 선생 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았다.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 달도 채 안 돼 지병인 안질이 심해져 낙향했다.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즈음 첫 부인이었던 안갑수와 혼인한다.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 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1922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 번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설교에 나섰다. 또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주 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이로 인해 주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5차례 총 5년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5차례의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으로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했다. 다섯 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채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1944년 4월21일 금요일 밤 9시 30분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고 웃으며 운명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옥중에서 부인(정양순)에게 보낸 편지> 1942년 10월 14일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달마다 하루도 어기지 않던 당신이 이렇게 늦은 것 보니 아마도 집안에 무슨 변이 생긴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아픈지요. 무슨 별일인지요. 하여튼 면회를 못 오게 될 사정이면 편지라도 하여주셔야 한 가지만 위해서 염려나 기도를 할 터인데 편지까지 없으니 무슨 일인가 하여 별별 걱정 여러 가지로 생각게 됩니다. 속속 소식을 절망(切望)합니다. 밤마다 몽중에 당신의 심중에 근심과 몸이 불안한 것 같이 보였는데 아마 근심 걱정에 눌러 병이된 모양 같습니다. 그러나 금심과 걱정은 절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이란 병중의 병이요 죄 중에 큰 죄가 되는 것이외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면 주께서 권고해 주신다고 했는데 맡기지 않고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이 불순종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근심을 이루고 근심이 맺혀 병이되는 것이요, 영적 생각은 자족한 마음이 생기게 되고 자족한 줄로 아는 것은 일대 거부가 되는 것이올시다. 걱정은 병중에 큰 병이요, 죄 중에 큰 죄가 되는 것이요, 자족은 부자보다 낫고 만족한 생활자외다. 내가 항상 말하거니와 고난은 참으로 큰 복이외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대복은 없는 법이외다. 모든 기구도 그러하고 부자나 학자나 모든 성인군자 일지라도 다 고난의 산물입니다. 고난은 성공의 어머니이지요. 고난이 복의 씨입니다. 고난 중에서 자기의 과거의 죄가 다 깨닫게 되어 사죄의 은혜도 받고, 세상의 벗이 되어 죄 중에 빠지는 자가 고난의 채찍을 통해 하나님에게 더욱 점점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육체적 염려와 생각의 염려는 우리의 신앙 생명이 자라가지 못하게 하는 걱정의 돌작밭이요 염려의 가시덤불이외다. 그래서 이 걱정 근심이 우리 받는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고, 하늘 장래 영광을 못 보게 눈을 가리우게 하는 것이외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는 조금도 염려치 말아주소서. 한 덩어리 주먹밥 한 잔의 소금 국물의 그 맛이야말로 신선의 요리요 천사의 떡 맛이외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나의 식량을 본래 적게 하였아오니 이 밥으로도 내게는 만족이요 나의 키를 작게 하심으로 옷과 이불은 나의 발등을 덮으니 이만하면 만족이 아닐까요? 새를 먹이시고 들의 풀을 곱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이며 일하는 일꾼이리요. 고로 주께서는 적게 믿는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꾸지람을 하십니다. 염려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을 탄식 할 뿐이오니 그런고로 기도하는 것이외다. 안심하소서.
주기철목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는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네 차례나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의 고문은 잔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지도자들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순응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일제의 잔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단번에 순교의 칼날을 내민다면 그래도 해 볼 만하지만 목숨은 끊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끝없이 가해지는 잔혹한 고문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고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그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초량교회와 마산교회를 거쳐 산정현교회로 부임했다. 그때가 1936년 7월로 신사참배에 대한 분분한 의견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 와중에 그를 기다린 것은 시련과 고난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과 교회가 부딪쳐야 했던 역사적 실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4차에 걸쳐 검속되었다. 제 1차 검속(1938/4-1938/6)은 신사참배 강요의 분기점에, 제 2차 검속(1938/8-1939/1)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앞둔 시기에, 농우회사건 연루혐의자로, 제3차 검속(1939/10-1940/4)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절정기에, 그리고 마지막 검속(1940/9-1944/4)은 일제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 할 때였다.
제 2차 검속에서 석방된 후, 주 목사는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는 마치 그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유언한다는 것과 같은 설교였다.
이 설교를 들은 산정현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설교가 있은 후, 일제는 주 목사에게 3개월 내에 목사직을 사면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목사직을 사면하면 신사참배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타협안도 내놓았다.
그리고 어느 주일 아침, 일제 경찰대는 산정현교회당을 포위하고 그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주 목사는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 둘 것이오, 내 설교권은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할 수는 없소”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라고 최후의 통첩을 가했다.
이에 주 목사는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오, 체포하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오. 그러니 나는 내 할 일을 하겠소”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는 며칠 후 연행되었다. 일제의 요구를 수용하여 평안히 살기보다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1940년 9월에 검거된 후 1944년 4월 21일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신앙 때문이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순교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주 목사님께서 친히 작곡한 찬송가사를 불러보자!
"서쪽하는 붉은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한발자욱 두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욱마다 가진포악 지셨구나
눈물없이 못가는길 피-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픈다리 싸매주고 저는다리 고쳐주사
보지못한 눈을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고개 나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주기철 목사는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나를 받아주소서."라고 마지막 기도를 남긴 채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이나 충성스런 목사의 죽음을 넘어 한국교회가 저지른 신사참배의 무서운 죄를 속죄 하는 속죄양으로서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죽음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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