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재효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고창 아전이었다. 그런데 칭송하는 비가 셋이나 서 있다. 세운 연대순으로 살펴보자.
읍성 안쪽 옛날 작청(作廳)이었던 건물 옆에 비석을 여럿 모아놓은 곳에, 앞줄에 관찰사, 군수, 현감 등의 송덕비(頌德碑)가 있고, 그 뒤에 <통정대부신공재효유애비>(通政大夫申公在孝遺愛碑)가 있다. 신재효 사후 6년이 된 1890년에 다른 데 세운 비를 거기다 옮겨놓았다. 전면 오른쪽에 “근검지조 박시지인”(勤儉之操 博施之仁), 왼쪽에 “군자지덕 영세불혼”(君子之德 永世不混)이라고 써놓고 다른 문구는 없다. 통정대부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이다. 써놓은 문구는 근검해서 절약한 재물로 널리 사랑을 베푼 군자의 덕행이 영원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이다. 이 비만 보면 신재효가 재물로 사랑을 베푼 사대부인 것처럼 생각된다.
위에서 말한 비가 서 있는 곳 맞은편에 1963년에 세운 <동리신재효선생추념비>(桐里申在孝先生追念碑)가 있다. 뒷면에 새긴 비문을 보면, 통정대부, 절충장군(折衝將軍), 가선대부(嘉善大夫) 등의 품계를 열거하고, “원근이 모두 선생을 우러러 신오위장(申五衛將)이라고 한다”고 했다. 비를 다시 세운 이유는 신재효가 판소리를 위해 기여한 공적을 기리고자 해서인데, 관직을 대단하게 여기는 지난 시기의 관습을 이었다.
* 고창 모양성 앞 신재효 고택
세 번째 비는 신재효가 살던 집 뜰에 1984년에 세운 <동리가비>(桐里歌碑)이다. 김동욱(金東旭)교수가 회장인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이 비는 신재효가 관직이 아닌 풍류를 사랑하면서, 가산을 털어 판소리를 돌보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후 백년이 지나서야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고 평가되었다.
신재효는 원래 경기도 양주 출신인데, 자기 아버지 때에 서울서 전라도 고창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하며 돈을 모으고 기반을 구축한 데 힘입어 고창 아전으로 정착했다. 이방ㆍ호방을 맡아 재산을 더 늘리고, 재산을 이용해 지위 향상을 꾀해 마침내 정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는 무반 직함을 얻었다. 같은 품계의 유사 직책으로 지칭되어 신오위장(申五衛將)이라고 알려졌다. 새로 얻은 지위에 걸맞게 양반으로 행세하고 한시도 더러 지었으나 만족을 얻을 수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다. 아전 신분에서 출발해서 상인 노릇, 양반 노릇도 한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예술이 판소리였다.
신재효가 스스로 판소리를 부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서 넉넉한 재력을 이용해 판소리광대들을 모아 후원자가 되고, 자기 생각대로 판소리를 공연하도록 지도했으며, 판소리 이론을 가다듬고 사설을 개작했다. 대원군이 경복궁 낙성연 기념공연을 주관하게 한 것을 보면 능력이 의욕에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명창 김세종(金世宗)을 지도해서 판소리에 관한 자기 나름대로의 구상을 살리고자 했으며, 진채선, 허금파(許錦波) 등의 여류광대를 길러 내서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춘향가>를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으로 갈라 개작해서 수련기의 아이 광대를 위한 대본을 따로 마련한 것도 전에 볼 수 없던 일이다. 그렇게 해서 판소리가 더욱 다양해지도록 했다.
그런데 신재효의 <춘향가>는 상층 취향의 문장 수식이 많이 들어가고, 판소리로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독서물이 되고 말았다는 평을 듣는다. 저속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려고 하다가 그런 결과에 이르렀으며, 광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하기 어려웠던 한계도 있었다. <심청가>의 경우에도 심봉사의 빈곤한 생활이나 잡스러운 거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투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도록 고쳐 놓았다. <박타령>에서는 탁발하러 온 도승이 집터를 잡아 준 덕분에 흥부가 부자가 되도록 꾸며서 초경험적인 요소가 확대되도록 했다.
작품 전편을 한꺼번에 다듬느라고, 앞뒤의 연결에 구애되지 않고 표출되던 발랄한 현실 인식을 손상시켰다. 애써 다듬은 대본이 문학작품에 그치고 판소리의 실상과 맞지 않아 가창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명창 광대는 누구나 고정된 대본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더늠을 개발하고자 했다.
〈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는 신재효 개작본 여섯 마당에 포함되는데, 위에서 든 세 마당과는 다르다.〈토별가>는 같은 소재의 이본들과 견주어 보면 남해 용궁에서 벌어지는 벼슬아치들 사이의 다툼을 잘 그린 데 특색이 있어, 아전으로서의 현실인식을 그런 방식으로 나타냈다 할 수 있다. <적벽가>에서는 조조(曹操)의 모사 정욱(程昱)을 방자형의 인물로 만들고 조조에게 반감을 품은 군사들의 설움 타령을 확대시켰다. <변강쇠가>는 신재효본만 남아 있어서 견주어 살필 자료가 없으나, 유랑민의 비참한 생활을 꾸밈없이 그리고 남녀 관계의 비속한 거동을 농도 짙게 묘사해서 윤리도덕에 의한 윤색과는 거리가 멀다.
판소리 공연에서 허두가(虛頭歌) 또는 단가(短歌)로 부르라고 지은 짧은 노래에서 말한 바도 다양하다. 경복궁 낙성 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이 왕조의 번영을 칭송하는 한편 음담패설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 <허두가>라고 표제를 달고 지은 노래 열세 편은 대부분 한문 투의 유식한 문구에다 고사를 다수 섞어 상층 취향의 관념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판소리광대의 재주를 자랑한 <광대가>(廣大歌)에서는 한문학에서 자랑하는 고금의 명문이 모두 헛것이라고 한 데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로 판소리 예술론을 폈다.
거려천지(巨旅天地) 우리 행락 광대 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得音)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지차 득음이요, 그 지차 너름새라.
“거려천지”라고 한 온 천하에서 광대가 하는 행세가 다른 무엇보다도 좋다고 했다. 광대 노릇을 잘 하려면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요건은 인물이 잘 나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설 꾸미는 솜씨가 뛰어나야 한다고 했다. 셋째 요건으로 든 ‘득음’은 음악의 수련이 어느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넷째로 말한 ‘너름새’는 ‘놀음새’라고 표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노는 모습”이지만, 원래의 말을 그대로 두어야 제 맛이 난다.
너름새라 하는 것은 귀성(鬼星) 끼고 맵시 있고,
경각(頃刻)의 천태만상(千態萬象), 위선위귀(爲仙爲鬼) 천변만화(千變萬化).
좌상의 풍류호걸 구경하는 남녀노소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넷째 요건 ‘너름새’라고 한 연기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귀성”은 이십팔수의 하나인 별이다. 그 별의 정기가 끼어 든 사람은 귀신들린 듯이 논다고 여겼다. 귀성이 끼었으면서 맵시가 있는 것이 최고의 광대이다. 그런 재주로 짧은 시간에 천만 가지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선도 되고 귀신도 되는 재주로 수많은 변화를 이루는 것이 최고의 연기라고 했다.
이어서 장단의 변화에 따르는 수법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 다음에는 광대론으로 넘어갔다. 역대 명창 가운데 송흥록(宋興祿), 모흥갑(牟興甲), 권사인(權士仁), 신만엽(申萬葉), 황해청(黃海淸), 고수관(高壽寬), 김계철(金啓哲), 송광록(宋光祿), 주덕기(朱德基) 등을 뛰어난 기량을 들어 찬양했다.
송흥록을 두고서 한 말을 보자. “송선달 홍록이는 타성주옥 방약무인 화란춘성 만화방창 시중천자 이태백”이라고 했다. 뱉어내는 소리마다 주옥같아 방약무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화란춘성하고 만화방창한 봄 동산에 들어가는 것 같게 하니, 문장가에 비한다면 시중천자(詩中天子)라는 이태백(李太白)의 위치라고 했다. 나머지 일곱 사람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역대의 문장가에 견주어,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국문으로 된 예술비평 또는 문학비평은 여기서 비롯했다.
* 신재효 고택에 재현해 놓은 판소리 문생들의 연습 장면
신재효가 지은 노래 가운데 <치산가>(治産歌) 또한 주목할 만하다.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내용인데, 근검절약해서 농사에 힘쓰고 돈 날 작물을 심어 파는 것이 요령이라면서 자기 경험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오섬가>(烏蟾歌)는 자기의 내면적인 충동을 다채롭게 표출한 단형 판소리이다. 까마귀 남편과 두꺼비 아내의 애절한 이별을 대화체로 다루는 것을 기본 설정으로 하고서, 남녀 관계의 여러 양상을 다루고 성행위를 짙은 색조로 묘사했다.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별난 작품을 마련한 데서 기존의 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로운 창작 의지가 엿보인다. <도리화가>(桃梨花歌)에서는 진채선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그런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대의 시련을 의식하고 작품세계를 넓혔다. 1866년(고종 3)에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나 망국의 위기가 닥친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 잠 못 이룬다고 하면서 <십보가>(十步歌) 또는 <갈처사십보가>(葛處士十步歌)라고 하는 것을 지었다. 열 걸음 걸으면서 한 수씩 지어 부른다고 하는 노래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서두에서 제2보까지를 들어 본다.
여관 한등 잠이 안 와 이리저리 생각하니,
세상사가 말 아니라.
예의동방 좋은 나라 삼강오륜 없어지니
뉘 아니 한심한가.
문을 열고 뜰에 나려 이리저리 방황타가
열 걸음 걸어서 십보가를 불러 보세.
한 걸음 걸어 서서 일천지를 바라보니
일치일란(一治一亂) 고금사가 일성일쇠(一盛一衰) 분명하다.
일편 영대 밝은 마음 일년 삼백육십일에
일심의(一心義)로 지내보세.
두어 걸음 걸어가서 이십 가지로 생각하니,
이성지합(二姓之合) 좋은 예절 이십팔수(二十八宿) 종기하여
이천만 동포 생겨나서 이 세상에 다 죽을까.
이군불사(二君不事) 충신절과 이부불경(二夫不更) 열녀행을
잃지 말고 지켜보세.
제1보의 노래에서는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은 정한 이치이므로 위기가 닥쳤다고 당황하지 말자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밝은 마음을 한결같이 지니고 견뎌 내자고 했다. 제2보에서는 두 성이 만나 부부가 되는 예절에 따라, 별들의 기운이 뭉쳐서 태어난 자랑스러운 “이천만 동포”가 죽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자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상 전래의 올바른 도리를 굳게 지켜 나가자고 했다.
다른 표현은 다소 진부하다고 하더라도 “이천만 동포”라는 말을 쓴 것은 주목할 일이다. 한 배에서 태어난 새끼를 지칭하던 말 ‘동포’(同胞)를 민족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사용한 첫 번째 사례가 이것이 아닌가 한다. 구두어에서는 그런 의미 변화가 오래 전에 나타났을 수 있으나 글에다 적어 명시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이천만 동포”라는 말을 쓰자 민족 전체가 대등한 처지에 있고 누구나 같은 운명이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이루어졌다.
시골 아전인 신재효가 근대민족의식이 출현하도록 하는 커다란 과업을 국문으로 지은 노래에서 이룩한 것은 조금도 기이하지 않다. 지체 높은 사대부는 시대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뛰어나다 해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한문으로 쓰는 논설에서는 동포라는 언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체가 낮은 사람이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긴 노래라야 시대 변화를 바로 나타낼 수 있었다.
*신재효 고택 내부
그 때 지은 노래에 <괘씸한 서양 되놈>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강화도에 침공한 프랑스군이 수비군과의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은 것을 보고 기뻐하며 전승을 축하한 내용이다. 전문이 다음과 같다.
괘씸하다 서양 되놈.
무군무부(無君無父)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
단군기자 동방국의 충효윤리 밝았느니,
어이 감히 여어보자 흥병가해(興兵加海) 나왔다가,
방수성(防水城) 불에 타고, 정족산성(鼎足山城) 총에 죽고,
남은 목숨 도생(逃生)하여 바삐바삐 도망한다.
승전을 축하하기만 하고 패배는 말하지 않았다. 천주학은 임금도 아비도 모른다고 나무랐다. 단군과 기자 이래의 충효윤리를 받들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침략을 격퇴하고 조선 전래의 가치관을 지킬 수 있다고 낙관했다.
신재효가 창작한 이상과 같은 작품들은 판소리의 허두가 또는 단형 판소리가 판소리 자체의 부속물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문학으로서 적극적인 구실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해 준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이미 거둔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는 작가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허두가는 분위기 조성의 장식물로 삼는 데 그치고 판소리 자체에만 힘쓰는 관례가 지속되었다. 판소리가 현장예술인 구비문학으로서 생명을 이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참신한 창작이 시도되지 않고 다섯 마당 외에 다른 작품이 추가되지 않았다.
=> 신재효를 대단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시해온 다른 누구를 찾아 평가하면 시대가 다시 달라지는 단서를 마련한다.
<한국신명나라 http://cafe.daum.net/koreawonderland>
* 고창 판소리박물관의 판소리사 정리자료
*<신재효 고택>
*<신재효 고택>
*<신재효 고택>
*<신재효 고택>
*<모양성 앞 고창읍 비석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