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강 다른 복음은 없다?(갈라디아서 1:6-9)
I. 바울의 놀란 모습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인사를 마친 바울은 “놀랐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란 그 이유가 “이토록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는 말 속에 다 담겨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긴 시간 양육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거기서 떠나는 것은 어쩌면 순식간일 수도 있습니다.
“떠나다”는 말은 쉽게 생각하면 단순한 출발이나 여행처럼 느껴지지만, 원문을 보면 넘어서(meta) 세우다(tithemi)라는 단어를 쓰는데, 영어번역으로는 deserting입니다. desert는 사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면 안 되는 곳으로 넘어가 버린다.”는 강한 뜻이 담긴 말입니다. 심지어 deserting이라는 말은 “탈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대열에서 이탈을 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디로부터 어디로 그렇게 쉽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세워주신 것으로부터” 떠나서 “다른 복음을 향하여”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놀랐던 것입니다.
II.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원문으로 헤테로 유앙겔리온인데, 헤태로(heteros)라는 단어는 영어에도 들어와서 heterodox라고 하면 이설(異說)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서로 다름”을 의미하는 다양성의 뜻이 아니라, 원래의 것을 슬쩍 바꾼 유사품을 말합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기름”은 참기름이지, “다른 참기름”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은 첫째, 갈라디아 교인들을 교란시켰습니다. 그리고 둘째, 복음을 왜곡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였는지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오늘날에도 유사 기독교들이 등장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교란하고 유혹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른 채 노예와 같은 삶을 삽니다. 최근 뉴스에 방송된 것처럼, 신체적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노동력 착취를 당하거나, 무지막지한 폭력에 시달리거나, 심지어는 성적착취를 당하기도 하여, 결국 해당 사이비 종교 교주들이 구속당한 사건들입니다.
실재하지도 않은 것이 “있다”고 전한다면 누구든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바울의 표현은 거의 절규에 가깝습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어줄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잘 속아 넘어갑니다. 얼마를 투자하면 원금의 몇 배가 되는 이익이 단숨에 돌아온다는 “판매 시스템”이 마치 잘 굴러갈 것처럼 속이고 유혹하면 사람들은 넘어갑니다. 자기의 욕심에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허황된 판매와 이익구조를 설명하면 그것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본질이 안 보이고 얻게 될 이익에 눈이 멀어서 그것이 “확실하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당신의 믿음이 잘못되어서 곧 망할 거라는 위협이 먹히는 경우입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이런 협박이 먹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겁을 주는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 “더 탁월한 다른 복음”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뒤에 나오겠지만, 바울이 말한 복음의 원조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율법전승을 포함한 것이라고 교란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예루살렘이 잘 보전하였고, 메시아로부터 인정을 받은 율법을 이방인 크리스천들도 복음 안에 담아야하는데, 바울은 그 부분을 빼고 전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III. 다른 복음은 있다.
상당수의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런 “다른 복음”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이고, 그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야말로 더 훌륭한 복음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을 “교란”시킨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보면 안디옥으로 찾아온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크게 생겼을 것이고, 그 두려움 사이를 파고 든 것이 “다른 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교란”이라는 말은 선동하여 흥분시키는 정치선동적인 언사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동의 목적은 “복음의 왜곡”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바울의 표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복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Gospel of Christ)인데, 사실 소유격은 동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복음”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논점은 그리스도를 전했느냐 아니면 다른 것을 전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그 일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사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맞서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신 분입니다. 예수는 성전과 제사장 중심의 형식적 표층종교의 길로 빠져든 유대교와 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담고 있는 신앙의 본질과 정신을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를 다시 율법주의 안으로 끌어들인다면, 이것은 “복음의 왜곡”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을 다르게 왜곡한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이란 원래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왜곡된 형태로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기에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사이비와 이단을 뜻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정받는 기독교 교단 내부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데 있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아야 할 본질적인 것과,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변해야 마땅한 형식적인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복음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겪었던 그 시대의 어려움을 오늘의 우리도 똑같이 겪고 있기 때문에 “다른 복음”에 관한 바울의 교훈은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다.
IV. 아나테마(αναθεμα, Anathema)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거듭 단호하게 말합니다.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저주 받음이 되게 하시오.”입니다. 하지만, “저주”라는 바울의 표현이 우리 마음에 조금 걸립니다. 그렇게까지 배타적인 표현을 써야만 했을까하고 말입니다.
“저주”로 번역된 “아나테마”는 아나티테미(ana-tithemi, 무엇 위에 세우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래 그리스 세계에서 이미 사용하던 단어인데, “평가 받기 위해 신 앞에 내세운 인간의 행위”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내 던져졌다는 것으로 신은 이것을 받고 복을 주거나 아니면 파괴해 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그리스 문화의 단어 이해를 염두에 둔다면, 바울이 말하는 “저주”는 자기가 남을 판단하고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바울은 하나님의 판단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짓도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이라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도록 “아나테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고픈 말은 이런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가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면, 그는 너희의 공동체에서 제거되어 그를 저주하실 하나님께 넘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바울과 그 일행이던지, 아니면 거룩한 천사라고 하더라도 “이미 전한 그 복음”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포함됩니다. 그러니 바울의 “저주”는 자신을 포함하고 있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기에 안성맞춤인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당사자들 편에서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받은 복음과 다른 말을 전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우리는 익숙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해주는 복음이 “다른 복음”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신앙세계의 혼란은 전하는 사람과 전달받는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런 혼란과 왜곡을 피하고, 전해 받은 복음의 본질을 잘 지켜내어 후세에 전하기 위함입니다.
2024년 3월 10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