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丁 南道國의 인생 발자취
南道國의 主要 略歷
★★2001년 6월 주한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 사령부 공보관 정년 퇴임
★★2002년 - 2007년 경상북도 명예 관광 통역 안내원
- 1937년 5월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501번지에서 출생
- 1953년 2월 울진 중학교 졸업
- 1959년 6월 주한 미육군 제7보병사단 항공대 전입
- 1961년 11월 대한민국 육군하사로 만기 제대
- 1962년 3월 미 공군 군산비행장 헌병대 경비원 취업
- 1967년 7월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사령부 안전관 전임
- 1990년 1월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사령부 공보관 전임
- 1970년 3월 주한 미 대사관 한국어 통 번역관 등록
- 1970년 ~ 1973년 (사단법인) 한국 해외 개발공사 군사지사 장
- 1970년 ~ 1978년 전국 외국기관 노동조합 군산지부 수석 부회장
- 2001년 6월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공보관 퇴임
- 2003년 1월 ~ 2005년 12월 울진군 근남면 구산 1리 장
- 2002년 1월 ~ 2007년 12월 경북도 명예 관광 통역 안내원
- 2009년 6월 ~ 2011년 6월 남씨 울진군 종친회장
- 2017년 01월 ~ 현재 까지, 남씨 대종회 부회장
상장 및 표창 (償帳 및 表彰)
- 1972년 전국외국기관 노동조합 위원장 표창패
- `1972년 전라북도 지사 표창패
- 1975년 4월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장 최우수 직원 상 수상
- 1999년 까지 매년 24년 간 미공군 제 8전투비행단 최우수 직원 상 연속 수상 (Outstanding Performance Award from 8TFW/CC)
- 1979년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 우수 안전 운전 상 수상
The Safe Driver of 8th Fighter Wing, USAF
- 1984년 미공군 법무처장 감사장
A Letter of Appreciation from the Staff Judge Advocation, USAF
- 1990년 4월 미 공군 최우수 직원 상 (미 공군 참모총장)
(The Top Civilian Employee of USAF Award from Chief Staff, USAF)
- 1994년 4월 미 태평양 공군 사령관 상, 주한 미군 사령관 상 수상
(Seperior Performance Award from PACIFIC Air Fore, USAF),
and from the Commander, US Forces Korea,
- 1994년 기아특수강 군산공장 장 감사패
Letter of Appreciation, Presidnet, KIA Special Steel Factory, Kunsan,
- 1995년 ~ 2000년 대한민국 문교부 장관 상, 건설 교통부 장관 상, 노동부 장관 상 수상
Award from the Ministry of Education, Traffic & Construction, and Labor & Employee, in Korea
- 1996년 전라북도 지사 상, 전라북도 교육장 상, 전라북도 경찰청장 상 수상
Award from Governor, Chollabuk-Do, the Superintendent, Chollabuk-Do, and the Chief of Chollabuk-Do Police Beareu.
- 1996년 4월 미 공군 최우수 공보관 상 (팬타곤 미국방성 장관)
Award the Top Public Affairs Civilian in USAF, Pentagon, USA.
- 1996년 ~ 2000년 미 공군 엘멘돌프 기지 (알레스카), 카디나 기지 (일본), 엔들슨 기지(괌), 등지 VIP 투어 참여 통역
VIP Tour leader Elmendolf AFB, Alaska, Kadena AFB, Japan, and Anderson AFB, Guam.
- 1997년 주한 미공군 35년 근속 상
Award a Thirty-Five Years Service in USAF in Korea
- 1997년 군산시 구암동 현대아파트 관리소장 감사패
- 1998년 군산시 한미친선 협의회장 공로패
- 1999년 군산세광교회 감사패
- 1999년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 군목 감사패
- 2000년 6월 주한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공보관 퇴임 (64세)
Retired the Puiblic Affairs Officer from 8FW, USAF
학력 (Education)
- 1945년 노음 초등학교 졸업 (Graduated Noum Primary School)
- 1953년 울진 중학교 졸업 (Graduated Uljin Middle School)
- 1969년 미공군 안전전문가 과정 수료 (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
USAF Safety Technicians Course (Denver, Colorado, USA)
- 1972년 미공군 안전 감독관 과정 수료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
USAF Safety Seuprvisors Course (Denver, Colorado, USA)
- 1974년 미공군 보급 자금 관리관 과정 수료 (미국 콜로라도 덴버 시)
USAF Material Facilities Specialist Course (Denver, Colorado)
- 1977년 미공군 안전 장교 과정 수료 (미국 콜로라도 덴버 시)
USAF Safety Officers Course, (Denver, Colorado)
- 1982년 미공군 교통안전 전문가 과정 수료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 USAF AAA Driver Improvement Program Instructors Course, (Denver, Colorado)
- 1978년, 1984년, 1986년, 미국 시카고 안전 전문가 워크 샾 참석.
Attended the NSC (Annual National Safety Council Workshop, Chicago, Illinois, USA)
문학 작품 수상:
2013년 8월, 울진문학 제1회 경연대회 수필부문 우수상 수상, 제목, 칠레 광산사고의 교훈
2015년 8월, 경북도 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사진부문 은상 수상, 제목, 울진 대왕송
2017년 8월, 경북도 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수필부문 은상 수상, 제목, 노인과 장애인과 정보화 시대
2017년 8월, 한국문학 34회 설중매 작품 경연대회 신인상 수상, 제목, 노인과 장애인과 정보화 시대
책 발간물:
2006년 6월 남도국 고희 기념 (감사의 발자취)
2009년 9월 남도국 내 인생 70년 회고록
2013년 10월 뒷들마을 600년 사
2015년 12월 聖留山의 精氣 (남도국 八旬 기념)
출생 과 성장
1937년 음력 4월 26일, 오후 2시,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501번지, 약 100여 호가 사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철저한 한 농가의 자녀 6형제 7 남매 중 반갑잖게 막내아들로 태어난 한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다. 농사라야 겨우 논 10마지기 (1,500평), 밭 약 800 평정도의 중 하위 농가, 그나마도 일본 정부에서 세계 2차 전쟁 준비하느라고 애써 지어놓은 곡식은 물론 철, 강철, 구리 같은 것도 모두 강제로 거두어 가고, 젊은 청년들은 전장터로, 여인들은 소위 위안부로, 또 다른 사람들도 구분하여 징용하여 저들이 사용하는 수단으로 모두 징용되어 나가고 없으니, 농촌의 생활 형편은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고,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 하였으며, 농가의 생활고는 말이 아니었다.
1944년 3월에 일본인이 가르치는 노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이름 (미나미도곡구)로 개명하였고, 일본 말로 배우고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위반자를 가려내기 위해 카드를 개인에게 10 장 씩 배부하고 일주일에 다 없어지면, 학교에서 벌을 받거나 학생 점수에 불이익을 주는 무서운 체벌 제도를 만들어 어느 학생도 한글 사용을 못하도록 하여 철저하게 그들의 나라를 만들어 갔다.
그 다음 해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고 미국과 서방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게 되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물러가고,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세워지는 가 했드니, 우리와 관계없는 미국과 소련이 힘의 논리를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그들 마음대로 휴전선이라는 선을 가르고,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앞세운 대한민국 정부가, 북쪽은 공산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북조선 인민공화국이 세워 져 한반도는 두쪽으로 되었다.
1950년 2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3월에 울진 중학교에 입학 하여 이제 좀 공부 를 제대로 하는가 싶었는데, 북한의 김일성 군대가 그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선전 포고도 없이 탱크와 우수한 육군 병력을 앞세워 남한을 침략해 왔다. 아무 준비도 없이 권력 싸움에만 몰두하든 남한 정부는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우세한 북한군의 기세는 물밀듯이 남으로 남으로 밀어오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북한군은 대구 일부와 부산을 제외하고 모든 남한을 점령하여 명실공히 남한 전체를 적화 통일 하려는 그들의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아직 어려서 피난도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다. 위로부터 네분의 형님들은 각가 군과 경찰에 투신하여 참전하였으나, 나와 바로 위의 병국 형, 둘은 원하지도 않는 인민학교에 입학하여 북한의 교육을 받으며, 헌법을 배우며, 군사교육 및 공산주의 사상을 석달이나 배우고 있든 중, 유엔군의 지원에 힘을 얻은 국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하여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남쪽에 흩어져 있든 북한군 공비들을 모두 소탕하고, 다시 북한으로 밀고 압록강 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의 전쟁 참여로 국군이 후퇴하여, 휴전선 경계에 이르러, 치고받고 하는 치열한 전쟁 끝에 드디어, 휴전선이 갈라지고 조국의 아픈 분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몹시도 가난하여, 배곯고, 추위에 떨고, 고달픈 농촌 생활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중학을 겨우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삿일에 한 3년 찌들든 나는, 1957년 이른 봄, 별로 반가워 하지도 않는 군산의 셋 째 이국 형님에게로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난다. 이국 형님은 그 당시 경찰관으로 강원도에서 태백산 공비 토벌을 마치고 전라도 지리산의 남은 공비들을 마져 소탕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하여 임무를 마치고, 첫 발령 받아 군산 경찰서에서 근무하든 중이였다.
군산으로 출향
형님 내 외분이 살고 있든 군산시 장재동 만월고무 공장 옆 단칸방에, 밤 10시 경에 여장을 풀고 꿈을 내려놓는다. 돈도 없고 할 일도 없지만, 배 고픈 것 만은 형님의 월급 만으로도 면할 수 있었다. 군산시립 도서관에 나가 독학으로 몇 개월 지내면서, 꿈에도 그리든 대학교 입학이라도 하여 간절히 소원하든 대학생의 꿈을 실현해 본다.
병국 형님의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를 위조하여 익산에 위치한 원광대학교 법학과에 원서를 접수하니, 쉽게 입학허가가 나온다. 명실공히 4년제 대학 법학도가 되었지만, 도저히 학비를 조달할 능력이 생겨나질 않는다. 당시 원광대학교는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등록금 운영에 융통성이 다소 있어 등록금을 3 차례에 분리하여 납부하기로 하고 학교에 나가게 되었으나, 당시 경찰관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소요되는 모든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학교를 포기하고 군 입대를 지원하게 되었다.
육군에 입대
1959년 3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니 군번 10504205를 부여해 준다. 제26연대에 배치되어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데, 군기가 얼마나 엄한지, 잘 못한 것 없는데도 군기 잡는다고 단체 기합을 주는데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식사도 영양가 있고 좋은 반찬은 높은 사람들이 다 빼 돌리고, 국물만 주걱으로 휘휘 저어 쟁반에 담아 준 극히 적은 양의 밥을 말아 김치 한 조각으로 때우고 하루 종일 심한 훈련을 받는 것은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어찌어찌 한달 동안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익산 금마의 포병 훈련을 또 2 주간 받게되었다. 포병 훈련은 그리 심한 기합은 없었든 걸로 기억난다.
6 주간 군사 훈련을 모두 마치고 부대 배치를 기다리는데, 내 이름이 카튜사 (미육군 부대)로 배치될 장병 명단에 들어있지 않은가? 호명되어 10여 명의 대열에 끼어 트럭으로 이동되어, 카튜사 장병들의 대기 부대인 경기도 부평에서, 미군들과 함께 배치받을 부대에서 필요한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받으며, 군복과 군화 모두 미국 군대와 똑 같이 지급되고, 여기서부터 식사도 미국 식으로 제공된다. 3일 만에 경기도 동두천에 위치한 미육군 제 7보병 사단에 배치되고 여기서 또 생연리에 위치한 항공대대로 발령을 받게 된다.
주한미육군 부대로 발령
나의 군대 생활 18개월을 여기서 지나게 되었다. 양식이 싫어 한 달 동안은 식당 근처 가기만 하면 구역질나고, 차라리 먹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집 가까운 동료 장병들은 주말에 집으로 외출하여 맛있는 한식을 먹고 와서 근무를 하는 적도 있었으나, 멀고 먼 울진이 고향이고 돈도 없는 나로서는 갈대도 없어, 인내하며 주말이든 주중이든 미군들과만 함께 벗하며 살아왔다. 부대 내에서 영화 감상, 당구 게임, 말방울 던지기, 포카 게임 등을 하며 미국 영어 회화를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미육군 제7보병사단으로
이런 생활 6개월 여, 대대 서무계에서 서무계 조수로 발령을 한다. 여기서도 열심히 생전 처음 접해 보는 행정 업무와 영문, 한글 타자를 익혀 익숙해진다. 착실하게 일 잘 하니 하사로 까지 진급되어. 1960년 3월, 제대 6개월을 남겨두고, 한국군에 발령을 받아가니, 운 좋게도 부산 적기에 위치한 육군 군수기지 사령부다. 여기서도 운 좋게 교육계로 발령받아 미쳐 일 배우며 재미있게 일 하며 지나는데, 느닷없이 5.16 군사 혁명이 발생한다. 우리 부대 사령관 김 용순 중장과 제2군 사령관 박 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 구데타가 발생하여 내가 근무하는 부산 지역은 군대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바뀐다.
육군 군수기지 사령부로 전보
교육계 임무를맡은 나는 민간인 야간 통행금지 업무를 맡아 매일 같이 위반자의 신상과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였다. 1961년 11월 16일, 드디어 군 생활을 마감하고 육군하사로 만기 제대하여 군 생활 32 개월을 마감하게되었다.
육군 하사로 전역
1961년 11월, 군 복무를 마칠 무렵, 군산 경찰서에 근무하든 이국 형님이 군산 비행장에서 젊고 영어 잘 하는 경비원 모집이 있으니 와서 응시해 보라는 통보를 받는다. 제대 후 곧바로 군산으로 달려가 군산 미공군 기지 헌병대에서 모집하는 군견대원에 응시원서를 내고 기다리다 필기 시험을 치뤘다. 10대 1 을 넘는 경쟁율을 뚫고 필기 시험을 합격하고, 면점 시험은 회화에 능숙하여 넉넉하게 합격 하였다.
미공군 군산비행장 군견대원에 입사
당시 미군 부대의 경비원은 까다로운 신원 조회와 신체 검사를 또 거쳐야 했다. 신원조회는 무려 일년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는 때문에 그 동안 군산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이 기간에, 군산 비행장의 건설공사 현장에서 막 노동 일 하면서 나 스스로 자급 자족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1963년 3월, 군산비행장 민간인 인사처에서 취업 통보를 보내왔다. 신체 검사야 물어볼 필요없이 거뜬히 합격하고, 명실공히 남들이 그렇게도 부러원하는 군산 비행장 헌병대 군견대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주로 오후 6시에서 다음 날 6시 까지 비행장의 외각 지대와 취약지구를 훈련된 군견과 함께 하루 8시간을 교대 근무를 하게 된다. 주에 5일, 밤 10시 부터 다음 날 4시 까지 근무를 하면 야간 수당이 기본 급료의 50% 추가로 지급된다. 그래서 한 달에 지급 받는 급료가 무려 24,000 환, 한국의 어느 직장 보다 높은 대우를 받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헌병대 정문 경비원으로 자리이동
그로 부터 2년 후, 하나님의 뜻인가? 나는 미국방성 인원 감축 계획에 따라, 그 직장에서 감원을 당하고, 대신 같은 헌병대 소속의 군산비행장 정문 (Check Point)에 근무 배치를 받게된다. 첵크포인트는 군인이 출입하는 정문이 아닌, 민간인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모든 군산 비행장을 출입하는 민간인은 여기를 경유하여 출입증을 받고, 퇴근시는 출입증을 반납하는 곳이다. 방문객을 알선하고 밖으로 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제 물품 몰래 빼 나가는 것을 찾아내고 보고하는 직무였다.
젊고 힘 있을 때라, 나는 여기서도 일 잘하고, 시간을 아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왔다. 성실하고 착하니, 좋은 색시 소개해 주겠다는 제의가 많이들어온다. 같이 근무하든 배신자 형수 씨가 소개하는 군산시내 미도파 미장원의 미용사 조연자를 가까히 사귀며 열애하든 끝에, 2년 만에 양가의 승락을 얻어 결혼을 하게 된다. 나 보다 5년 아래의 미모의 아가씨, 고향은 충남 대전으로 대전 함밭 여고를 졸업 했다한다. 철도국에 다니든 아버지의 3 형제 3 남매의 2녀로, 대체로 무난하게 살아왔으나,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행방 불명되어, 가족이 생계가 어려워 뿔뿔히 흩어져 먹고 살기 위하여 군산 까지 직장을 찾아 와 마침 형수 씨의 미장원에서 착실히 일하며 눈에 들어 나에게 까지 알려진, 남 주기 아까운 처녀였다.
조연자와 만남
1965년 8월 30일, 결혼 하기로 날짜를 정하고, 권 오명 군산 경찰서장의 주례로 우리 둘은 결혼 식을 올렸다. 아무것도 준비한 것 없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 당일, 나는 야간 근무에, 조연자는 미장원의 손님 받는 일에 몰두 하며,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며 돈을 벌었다.
미도파 미장원 개설
한편, 울진의 놀고있는 형제 화국 형님, 길자 동생, 조카, 문자, 경자, 기홍, 팔촌 동생 성국, 정국, 옥수, 이란 등을 차례로 불러와서 직장을 구해 주고 셋 방 얻어 살게 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살았다. 2 년 후, 우리는 영화동의 목 좋은 곳에 이층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 바쁘게 열심히 살면서도, 친구가 소개하는 군산에서 제일 큰 군산 개복동교회에 첫 발을 들여 놓고 차 문제 목사님으로 부터 세례를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한다. 첫 째 성의와 둘째 성미가 태어 나 유아 세례를 받게되며, 나는 집사로 성가대로 임명되어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하니 하느님이 은혜를 막 부어 주신다.
한국 해외개발공사 군산출장소 개설
1970년, 해외 나들이를 많이 해 온 나는, 당시 미국인들과 국제 결혼을 해 놓고 미국으로 들어가는 수속을 하는데 많은 애로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돕기 위하여, 해외 개발공사 군산 출장소를 개설한다. 정확하고 똑똑하게 업무를 잘 처리하니, 여기 저기서, 심지어 경기도에서 조차 소문을 듣고 날 찾아온다. 신원조회가 힘들면 마당 발을 이용하여 치안국, 도경, 혹은 지역 경찰서를 방문하여 교섭을 한다. 호적 상에 문제가 있으면 시청 호적계를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안되는 일 없이 낮에는 비행장 직장일, 퇴근 후엔 결혼 수속 하는 일하느라 직원 둘 두고 척척 잘 처리하며 밤 이 늦도록 일 해도 힘든 줄을 모른다. 한 3년 을 하니 집 사람도 잘 벌고 돈도 좀 모아졌으며, 영화동에서 명성도 알려지니 군산에서 신흥재벌이 곧 탄생하리란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마당발 별명
한편 나는, 형수씨가 운영하는 중앙로 1가의 만원 다방과 영화동 뉴욕 다방의 지배인 역을 자칭하여, 경군회 (경상도 인의 모임) 총무의 마당발을 최대한 활용, 형수 씨의 다방도 잘 되게 도와주는 역활도 하였으며, 또 외국기관 노동조합 군산지부 수석 부회장 직도 그뜬히 수행하며 타인의 부러움을 자아내게 했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청년으로, 인구 28만의 조그마한 도시 군산에서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듯이, 내 가정도 부와 명예는 그런대로 확보했으나, 딸 만 넷이 계속 탄생되는 어려움을 체험하게 된다. 고민 끝에 조 연자와 의논하여, 가정과 교육이 더 중요하니, 이제 미장원과 해외 개발공사를 접고, 변두리 삼학동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삼학동으로 이사
1978년 7월에 삼학동으로 이사하여 그해 11월, 드디어 아들 경문이를 얻었다. 나는 그래도 외국기관 노동조합 군산지부 수석 부지부장으로 힘있게 활약한다. 규정상으로는 안전관은 관리직이라 노동조합 간부가 될 수 없었으나, 조합에서 일 할 만한 일꾼이 필요하다며 사측에 간곡히 요청하여 나를 노조 부지부장으로 추대하는 것을 허락 받아, 노사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언어가 확실하게 잘 통하는 노사 회의는 그 때부터 현안이 없어지고 잘 풀려 나가는 노동 조합으로, 노 사 모두 윈 윈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전국적으로 인증받는 모범 노동 조합과 사측이 되었다.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군산지부 수석 부지부장
한편 나는, 많은 조합원 혹은 비조합원들을 도와 부당 해고나 억울한 인권 탄압 같은 일을 지원하는데열심히 노력한 결과, 미군 물품 도난, 해고, 마찰, 강등, 감원 등의 문제들을 탄원서로, 회의로, 교섭 등을 통하여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 같으면 시의원 당선 쯤은 문제가 없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사령부 안전처 안전관
1968년 7월, 사령부 안전처로 승진하여 자리 이동 함에 따라, 해외 나들이가 잦아들었다. 안전관 직무는 그 때만해도 한국에는 없었다. 교육을 목적으로 일본 요꼬다 기지로, 필리핀 클락 기지로, 미국 덴버 공군기지로, 씨카고 미국 연례 안전 워크 샆 행사 참석 이유로, 미국을 열번 넘게 드나들며 미공군에서 요구하는 안전 업무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필요한 교육비는 물론 미국방성 자금이다.
1982년 3월, 나는 또 보급대대 보급 자금 관리관으로 자리 이동하여 2년을 근무하게 된다. 여기서도 나의 근면성은 사측의 눈에 드러나, 노동조합 부 지부장 일을 맡아 하는에도, 6급에서 7급으로 승급시켜 주고, 미국 덴버의 보급 자금 관리관 과정 학교로 또 보내주어 3주간을 배우고 돌아온다. 여기서 절실히 느끼고 깨달은 것은, 미국은 사람을 능력 위주로 선택하는 것이지 학벌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학벌 위주로 하는 한국 사회 같았으면, 나의 인생 행로는 가는 곳, 오는 곳 할 것 없이 절망에 부딛혀 아무 것도 얻어낼 것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생각한다.
1990년 까지 사령부 안전관 자리를 튼튼하게 지키며, 주한 미공군의 안전 업무 (비행 및 무기 안전 포함)를 잘 감당하며, 20 여 년 간 매 년 최우수 직원 상을 받으며 일 해 오든 차, 옆 사무실에 근무하든 한인 공보관이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여러 응시자들이 있었고, 나는 옮겨봤자 별 이로울 것 없을 것 같아 주저하고 있는데, 신청 마즈막 날 안전 처장이 나를 찾아와, 사령관이 나에게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권하드라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런 기회가 하늘이 준 축복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인사처에 연락하여 신청 마감 임박시간에 접수를 시켰다.
사령관 보좌관 공보관으로
다섯 명의 기라성 같은 신청자를 물리치고 사령관은 나를 선택해 주었다. 인사처를 통해 전해온 선택의 이유는 근면하고 착하며 살아있는 영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있는자 이기 때문이란다. 그리하여 나는 군산 비행장 1,300 명의 한국인 직원 중 가장 높은 직위인 GS-11급, 사령관의 공보관, 보좌관, 통 번역관으로 직책을 맡아 일하게 된다.
공보관 업무는 문자 그대로 사령관을 보좌하는 사람으로 그분의 현지 자문관이다. 사령관은 일년에 한번 씩 바뀌지만, 한미 친선과 우호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은 중단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역의 행정, 입법, 사법부 기관 장, 군 부대 간의 협조 사항, 민간인들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 등등 주로 하는 일이 미군 부대 안의 일을 밖의 사람과 연관시켜 현안이 잘 되게 하는 업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내 업무가 밖의 한국 기관장, 민간인 리더, 기업체 장, 그리고 유명 인사들과 접촉하고 함께 협조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하게되었다.
심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을 적도, 억울한 일로 누명을 쓴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좋은 일도 많이 했다. 교육청과 합의하여 우수한 중학생들을 영어 회화 지도하는데 능력있는 장병 들을 보내 주어 가시적 효과를 거두게 한 일을 10여 년간 해 왔다. 또 유명 기업체, 기관, 아파트, 유치원, 여성단체 등의 영어 회화반도 운영하면서 지역민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미공군 전략기지 알레스카 방문 (VIP 투어)
또 지역 기관장과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미공군의 전략 기지를 방문하는 일을 여러번 실행하였다.군산 시장을 비롯 경찰서장, 상공회의소 회장과 한미친선 위원회 회장 등을 초청하여, 미국령 알레스카에 위치한 엘멘돌프 공군기지를 방문하여 2박 3일 간, 미군 전략 전술 훈련 과정을 자세히 공개하여 브리핑 받고 돌아온 일은 지금도 생각하면 꿈과 같은 일이었다.
괌 미공군 엔들슨 기지 방문 (VIP 투어)
그뿐인가? 1998년 5월엔, 군산 한미친선 골프회원을 포함한 약 20 여명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미국령 괌에 위치한 엔들슨 공군 기지를 방문하여 또 다른 미공군의 태평양 전술 무기를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 일본 오끼나와 카디나 공군기지에 들러 미공군이 자랑하는 각종 최신 전투기와 무기들을 보는 순간 우리 일행은 입을 다물수가 없을 정도로 그들의 전쟁위력이 참으로 대단함을 느꼈다.
알레스카 이야기
특히 알레스카 엘멘돌프를 방문했을 때는, 그 자연 환경이 너무나 잘 보존되고, 유지 관리되고 있는 것을 보며 연거푸 감탄을 자아낸다. 가는데 마다, 보이는 곳 마다 자연 생태 그대로다. 조금만 훼손하면 벌금이 엄청나게 많단다. 석유 자원이 풍부하여 그기서 생산되어 케나다를 경유 미국 본토로 수송되는 석유의 량은 미국 전체 사용량 1/3을 충당한다 한다. 석유 수송 파이프가 얼마나 큰지 우리 성인 셋이서 팔을 벌리고 맞 잡을 정도로 큰 파이프로, 눈, 비, 바람과 6도 이상의 지진에도 안전한 공법으로 설계하여 설치 했다고 한다.
알레스카는 지도 상으로, 세계의 꼭대기 머리위에, 러시아의 코 앞에, 일본의 어깨 위에 위치해 있으며, 워싱턴과 5 시간, 도교와 6 시간, 런던과도 6 시간 거리에 있어, 셰게 어떤 나라의 분쟁에도 10 시간 내에 출동할 태세를 구비하고 있으며, 또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나날이 새로운 전략 전술을 개발하고 조종사 양성 훈련을을 쉬지 않고 하고 있으며, 또 엄청난 예산을 여기에 집중 투자하여 운영하고 있다. 알레스카는 문자 그대로 지구 상의 파라다이스다. 생태계의 원조이며, 자원의 대국이다. 세계를 지원하는 공군의 전략 전술 상의 최적지다. 미국은 그렇게 풍부한 육, 해, 공 및 지하 자원을 숨겨두고 조금 씩 조금씩 캐 내어 아끼며 사용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괌 도 이야기
괌 도는 세계 제 2차 전쟁 전만 해도 일본의 영토였으나, 2차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고 미국 영으로 바뀐 우리나라 제주도 넓이 만한 섬으로 아무 쓸모없고 찾는 사람도 없어 원 주민만 살든 곳이 었으나, 미국이 철저하게 개발하여 지금은 청정하고 아름답고 조용한 휴양지로 세계에 이름난 곳으로 변하였다. 물가가 별로 비싸지도 않고, 대체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곳으로 많은 신혼 여행 부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문자 그대로 자연이 살아 있으며, 호텔에서 청정한 바다를 내려다 보면, 그 바다의 끝이 보이질 않고 관광객은 하루 종일 수영복 차림에 바다와 식당과 카바레에 들락 거려도 누구 시비하는 자 하나없는 치안이 완벽하게 지켜주는 곳이다. 우리국적 대한항공이 1990년 대 중반, 많은 관광객을 태우고 그 곳 국제공항에서 무리한 착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낸바 있으며, 그로인해 대한항공은 불안전한 항공사라는 오명을 남겼든 부끄러운 역사도 있었다.
일본오끼나와 섬
오끼나와, 일본의 남단에 위치한 섬이다. 원주민들과 주둔 미군 간에 티격 배격 다툼이 자주 발생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슬기롭게 잘 다독이며 미군 약 10,000 여 명을 그곳에 주둔시키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많은 미군을 그기에 배치한 원인은 무엇일까? 일본의 자주 국방 체면에 먹칠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미군 약 30,000 여 명을 오끼나와, 미자와, 요꼬다 기지에 주둔시키고 있고, 미국의 항공 모함과 최신 전투기 및 전쟁 물자를 그 기지에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보유한 전쟁 물자를 우리 일반 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공할 무기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무기들은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극동 지방에서 사용될 것들이다. 유사시엔 어떤 한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거나 초토화 시키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노리는 의도가 바로 그런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오끼나와에서 우리 한국 땅에 전투기가 날아오는 시간은 불과 두 시간 정도다.
미공군 최우수 공보관 상 수상: 1995년 4월, 나는 미공군 최우수 공보관 (민간인 부문)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워싱턴으로 갔다. 세계에서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크다는 미 국방성 펜타곤에 이르러 출장증을 제시하니, 본부에서 해병대 중위를 보내어 나를 에스코트 한다. 겹겹이 설치된 몇개의 검문소를 통과하여 공군본부에 이르니, 특무상사가 나를 정답게 맞아준다. 그분의 안내로 나는 숙소를 정하고 내일 수상할 장소를 미리 안내받았다. 다음 날 아침 10시, 국방부 대 회의실에 약 3,000 명의 요원들이 운집한 가운데 육.해.공.해병대 별로 최우수 장병 및 민간인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공군의 민간인으로, 더구나 한국인으로, 호명 받아 시상하는 단상에 오르니 눈이 가물가물 한 듯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국방부 장관이 나에게 최우수 공보관 상을 전해 줄 때, 나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 외에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카메라 후레쉬가 여기 저기서 터뜨린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단상을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내 곁으로 닥아온다. 그 분들 모두 전에 군산 비행장에서 나와 함께 일하든 분이거나 아니면 친하게 지내든 분들이였는데, 심지어는 멀리 다섯 시간을 달려 온 분도 내가 상 받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찾아온 것이라 한다. 미공군에 몸 담아온 40 여 년, 나는 이때 처럼 보람있고 감개 무량한 일은 처음이다. 대한민국의 국토 방위 업무에 40 년 간을 열정을 바쳐 노력한 결과를 미국 국방성에서 인증받는 기회였다. 무척이나 감사하고 행복하였다.
미공군 최우수 부대 상
1999년 4월, 군산 제8전투비행단이 미공군 최우수 부대로 선정되었다. 나와 4명의 한국인 직원과, 12명의 미군 장병이 사령관을 동행하여 미국방성 펜타곤으로 수상하러 갔다. 약 3,000 여명의 국방성 참모들이 운집한 가운데 공군 최우수 부대의 Gary North 사령관 (공군 준장)은 수상 소감을 전하는 가운데 우리는 수 만리 떨어진 한국에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지키는 전투 부대로, 적의 위협으로 부터 한 시간 내에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미공군 최 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역설한 후, 그 중에서도 40 여 년 간 대한민국 공군과 미 공군의 작전과 역활을 잘 보좌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고있는 "남 도국" 이라는 분이 이 자리에 왔다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다. 나는 양손을 높이 치켜 흔들며 그들의 환호에 감사를 표시하였다. 행사가 성황리에 축제 분위기로 끝나고 난 후, 역시 많은 전에 군산 비행장을 거쳐 간 분들이 우리를 찾아와 축하해 주고, 함께 기념 사진 찍고, 군산의 지인들에게 안부 전하는 정다운 일들이 있었음에, 10 년이 넘은 지금도 나는 그때의 감격했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미백악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국립도서관, 링컨 기념관, 한국전 참전 기념관 투어
그 다음날, 군산에서 초청받아 간 일행은, 국방성의 초청으로 VIP 투어에 나선다. 백악관을 비롯하여 미국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재무부, 국립도서관, 링컨 기념관,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등을 하루 종일 관람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많은 기념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백악관 에서만은 사진 촬영을 금하였다.
정년 연장
1997년 10월, 정년 연장이 이루어졌다. 만 60세가 되면 정년으로 퇴임하게 되어 있으나, 나는 근무 성적이 우수하고 업적과 공이 많으며 연장해도 건강 상 문제가 없으므로 사령관이 정년 연장 신청서에 서명함으로 5년 간 연장을 허가 받았다. 그러나 그 기간에 건강 상, 혹은 근무에 지장을 초래할 무슨 예측할 수없는 일이 발생하면 퇴직해야하는 조건과, 또 연봉도 월 약 100 만원 줄인 12급 호봉에서 3 호봉으로 조정하여 근무를 계속하게 되었다. 작업에 연속성이 보장되고 매년 새로 부임하는 사령관과 장병들에게 편안하게 업무를 인수하게 하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이것 역시 윈 윈 작전의 일환이 었다. 그 후 2000년 6월 퇴임 시 까지 3년 4개월 간 연장 근무를 하고 퇴임하였다.
주한 미군 부대는 육군, 해군, 공군이든, 사령관의 한미 친선을 위한 프로그램을 긴밀히 운영하고 있다.
지역민과의 친선과 유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부대의 안전과 발전 및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지역 기관장과 민간, 군 부대와의 긴밀한 유대는 필수이기 때문이다. 공보관이라는 직책은 사령관의 현지 보좌관이다. 사령관의 한미 친선 프로그램을 위하여 몸을 바쳐 충성해야 하는 자리다. 지역 기관장은 물론 민간인들 까지도 친밀하게 유대 관계를 잘 유지해야 그들의 임무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벳부 온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호주, 중국 베이징 관광
1996년 8월, 온천으로 세계 제일의 일본 벳부 온천장을 2박 3일 간 다녀 온적도 있고, 1998년 동남아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호주를 돌아오는 5박 6일 간의 여행을, 2003년 9월, 중국의 베이징, 만리장성, 12왕릉 등 3박 4일 간 관광을 다니면서 세계의 넓고 큰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보는 기회를 체험한 바 있다.
군산 비행장 퇴직
군산 미공군 기지 사령관은 오래 전 부터 한미친선 협회와 한미친선 골프회를 만들어 지역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군 부대 출입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높은 지위로 착각하며 그 지역의 이렇다 하는 사람은 모두 기지 출입증을 소유하며 들어와서 양식을 먹고, 골프를 치며, 장교 클럽에서 양주 마시며 히히득 거리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뻐기든 세상이었다.
나는 그들의 출입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일하다보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잘 날 없었다. 여차하면 힘 없는 내가 바람 맞기가 일쑤다. 당시 군산 경찰 서장인 이 모 총경이 사령관과 전예없이 친하게 지냈다. 그 분이 자기 아는 두 분을 사령관에게 부탁하여 기지 출입증을 내어 준 것이 나에게 화근이 떨어졌다. 나를 잘 아는 어떤 배신자가 내가 사령관에게 말하여 출입증을 내 준 것으로 알고, 이를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검찰에 소환되어 갔지만 나는 차마 경찰서장의 비리를 폭로할 수 는 없었다. 사령관은 미군이라 한국 검찰이 어찌할 수 도 없고, 또 사령관이 그들의 출입을 허가할 권한이 있는 사람으로 위반한 아무것도 없었다.
힘 없는 나를 구치소에 구속시키고 이리 저리 공갈과 협박이 진행 되었고, 통장 정리 등 별 짓을 다 해 보지만 영장 발부 사유는 되질 않는다. 6월 초 부터 7월 중순 까지 한창 더운 여름 날, 나는 군산 형무소에 구금되어 30 여일 간 있다가, 재판을 받고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말 못하는 것은 죄다. 불어서는 안되는 말을 하는 것 또한 죄다. 법에 위반되지 않은 죄도 실증법에 해당되는 모순을 나는 발견 했다. 2년 집행 유예 판정을 받은 것으로 나는 만족해야 했다. 그 때 나는 43년 의 세월 몸 담아온 군산 비행장을 사직하고, 군산을 떠나기로 결심하며, 집 사람 동행하여 살기좋다는 케나다로, 미국 씨카고로, 호주 시드니로 여행하며 살펴 보았다. 집 사람이 죽어도 외국은 싫고 한국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귀국하여 고민하든 끝에 울진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최종 결심을 하게되었다.
43 년 간 정든 군산을 떠나다
43년 이란 긴 세월, 힘있고 젊어 잘 나가든 시절, 그곳에서 부인 조연자를 만나 희비고락의 오랜 세월, 1남 4녀의 자녀를 낳아, 키우고, 교육하고, 시집 장가 보내고, 사위들 손자 손녀들 모두 열 여덟 식구가 열심히 일하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함께 살았고, 일요일이면 서울에 사는 큰 딸과 아들을 제외한 열세 식구 모두 군산 세광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성도 간의 교제를 유지하며, 불탄 교회 신축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손 병선 목사님 전국 기독교 연합회 회장 추대할 때도 앞장서 당선 시키든 큰 일들도 이루어 냈다. 어디 그뿐이랴? 군산에서의 43년은 진실로 나는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많은 가시적인 좋은 일의 업적을 남긴 시대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30 여 일 간의 감옥살이를 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정말 새로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체험하였다. 군산 교도소에 수의를 입고 들어가니 한 방에 12명이 있었는데 방은 굉장히 좁았다. 어떤 사람인가, 나를 알아보고, 당신은 사무실에 알려서 미국인과 함께 방을 쓰면서 통역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힌트를 준다. 그의 말대로 통역을 신청 했드니, 한 시간 후에 영어 시험지를 보내준다. 대체로 쉬운 영어 단어 50 문제 였다. 금방 써서 보내고 난 두 시간 후에, 나는 한 교통 사고로 입소한 미국인과 함께 방을 같이 쓰게 되었다. 얼마나 편하고 넓은지? 대체로 편안하게 지내온 감방살이었다.
나는 또 배신자의 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것을 알게되었다. 배신자는 평소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함께 골프하며 서울로, 오산, 광주 비행장으로, 익산 팔봉 CC, 로 계룡대 군 부대 골프장으로 다니면서 신나게 즐겁게 골프치며 친하게 지내든 사람이었다. 그러든 그가, 자기가 원하는 요구 (들어줄 수 없는)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뒤에서 장난을 한 것이다. 나름대로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주위의 사람들이 다 인증하는 정도니,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실이라고 세상 사람과 검찰에서 믿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3 년 후 그는 유감스럽게도, 사업이 부도나서 파산을 맞게 되었으며, 또 1년 후 그의 부인이 암으로 서울의 큰 병원을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 때 당시는 물론, 1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군산의 뜻 있는 저명인사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다시 있어서는 안될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로 규정하고, 남 도국이 군산을 떠나지 않도록 군산의 지도자가 막았어야 할 일이였다고 했단다. 군산 신문사 김 X X 사장은 그 사건 이후로 군산 비행장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출입을 자제하고 민족의 긍지와 체면을 유지하자는 켐페인을 벌였다고 한다.
울진에 귀향한 11 년, 지난 여름에도, 친하게 지내든 친구들, 전주에서 군산에서, 서울에서 가끔씩 다녀간다. 울진의 물과 산과 공기와 온천이 너무 좋단다. 남도국이 울진을 택한 이유를 이제사 알겠단다. 아이들도 여름이면 으례껏 울진와서 쉬어가는 것을 관례로 여긴다. 그래서 나와 집 사람은 울진에 들어와 사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구산 1리장
울진 근남 구산 1리, 뒷들 마을, 옛날에 함께 지내든 사람들 일부는 세상을 떠났고, 일부는 살아계시나 농삿일에 찌들려 많이들 늙었다. 구산 1리 리장을 맡아 달라는 동네 어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2004년 부터 2005년 까지 일하는 사이 태풍 매미와 루사를 만나 동네가 연 2년 째 물에 잠기는 바람에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동네 제방과 하수구 등이 더욱 튼튼해 졌고 동네를 연결하는 교량 세군데가 국비 지원으로 새롭게 튼튼하게 건축되어 이제는 물 걱정 없이 사는 동네가 되었다.
경상북도 명예 관광통역 안내원
한 편, 울진군 문화관광과에서, 경북도에 추천하여, 경북도 관광통역 안내원으로 임명해 주었다. 매일 아침 9시에 성류굴 사무소에 출근하여 오후 5시에 퇴근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을 했는데, 2003년 7월 부터 2007년 12월까지, 매년 6 개월 간, 일주일에 5일 간, 일당 35,000원을 받으며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리라. 울진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 이유로 군수가 바뀐 후, 내 자리를 없애는 바람에, 도에서 내려주든 관광 가이드 예산도 중단되고 말았다.
남씨 울진군 종친회장
울진 귀향 후, 근남 농협 영농 회장, 대의원 등의 직책도 맡아 했으며, 남씨 울진군 종친회 회장, 남씨 대종회 부회장, 남씨 근남면 종친회장, 울진 중고등학교 2/5 동창회장, 노음 초등학교 10회 동창회 총무 직을 맡아 왔다. 청소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울진 교육청 청소년 상담 자원 봉사자로 일하면서 울진 중, 죽변, 후포, 부구, 매화 중학교 학생들의 문제를 가까이서 도와주는 일도 했었다. 지금은 한국 침례교 울진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성도들과의 교제를 잘 이루며, 또 일요일 오후엔 육군 해안대대 연지소초 군 부대를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조용한 안식처 울진
아침이면 제일 먼저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 부부는 아침 첫 시간에 짧게나마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고, 그 날의 안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가벼운 산책이나 체조 후, 식사는 가급적 적은 양으로 하고, 컴퓨터에 앉아 메일을 연다. 하루 사이에 많은 사람에게로 부터 보내온 메일을 확인하고 필요한 분에겐 답장을, 불필요한 분의 것은 삭제하고, 또 좋은 글 있으면 옮겨서 편집하여 좋아하는 친지에게 보내기도 하며, 사진, 음악 등도 잘 감상하며 꼼꼼히 챙기는 일 하는데 평균 서너 시간 소요된다. 오후에는 주로 운동을 하는데 집중한다. 자전거 타고 왕피천을 달리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종합 운동장을 돌아서 비월, 누금, 막금, 너우내를 달려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는 보통 90 분이 소요된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달리기 힘들 때는 운동장을 열 바퀴 쯤 달리면 그날의 운동량은 충분 하다.
2008년 8월 부턴가, 운좋게도 나는 울진 종합 복지회관에서 배우는 컴퓨터 교실에 나가서 지금까지 계속 배우고 있다. 처음엔 인터넷 부터 시작하여, 한글, 엑셀,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배우면서, 서식 만드는 법, 한글 타자 하는 법, 인터넷 하는 법, 사진 올리고 편집히고 보내고 받는 법, 음악 다운 받고 보내고 복사 하는 법, 엑셀로 서식 만드는 법, 파워포인트로 슬라이드 활용하는 법 등, 어려운 컴퓨터를 그리 힘들지 않게 많이 배워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잘 하는 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끔, 글을 써서 울진 신문과 울진 문화원 문화지에 연재하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친지, 아들, 사위, 손자 손녀들과도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 받으며, 그런대로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꿈이 있다면, 나는 좋은 시와 글을 쓰고 싶으며, 또 나보다 어려운, 나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세상으로 부터 그져 받았으니 그 모든 것 다 사회에 돌려 주고 떠나고 싶다.
남씨 대종회 부회장
2010년 1월 부터 2011년 11월 현재 까지 남씨 대종회 (영양, 의령, 고성 3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 교통 오지인 울진에서 대종회의 중대한 일을 효과적으로 잘하기는 적잖은 노력이 필요하나, 한편, 내가 옛날 바쁘다는 핑개로 하지 못했든 종친회의 일을 늦은 지금에사 한다는 미안한 마음으로 참여 해 오고있다.
울진중고교 2/5 동창회 회장
귀향 후 울진 중고교 2/5 동창회를 찾아 신고하고, 회의에 열심히 참여했드니, 회원들이 내게
동창회장 직을 맡긴다. 2011 년 1월 부터 2012년 12월 까지, 나는 가장 낮은 자세로 회원들의 뜻을 헤아리며 심부름 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했드니, 전에 불참하든 회원도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해 주어 고마웠다. 전에 없든 참석율을 기뻐하며 회원 모두들 좋아한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 경북도 울진군 지회 근남분회장
2012년 2월 한국 지체장애인협회 경상북도 울진군지회 근남면 분회 장 업무를 맡아 40여명의 회원을 80명으로 증가 시키고 2013년 12월 분회결성을 하여 부회장, 총무, 감사 및 운영 위원 13명을 분회 운영위원을 두고 매년 분기별로 운영 위원회를 개최하고 있다. 분회원의 인권과 단결 및 사기 앙양을 위한 일을 맡아 봉사하는 내 일생의 마즈막 기회로 생각하고 나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일을 돕는데 최선을 하려 한다.
나는 청춘이고 싶다
앞만 보며 달려온 나의 삶, 숨 쉴 틈조차 없이,
지난날의 수많은 사연들이 가슴을 적셔온다.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하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한 것 없이 벌써 칠순을 넘어 중노인의
저물어가는 황혼길 언덕까지 달려왔나 하는 아쉬움,
창밖에 날려지는 장대비에 젖어 슬픔으로 엄습 해온다.
난, 아직도 헛 욕심 같은 거 버리지를 못하는가?
잠시 스쳐가는 인생, 이게 진정 노욕이란 건가?
인생은 하나씩 잃어 가는데도, 난 아직 지난날의 일 들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것들. . .
지난날의 그 많은 추억들이 아름답게만 아른거린다.
이렇게 지난 일들을 다시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아직도 내 곁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친구며,
자녀들이 있고, 또 나를 아껴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누가 날 보고 초라한 노인이라 말하랴?
나는 결코 곧은 모습으로 새로운 인생길을 가고 싶다.
내 인생은 나만의 역사이지 남을 위한 것 아니다.
아직 난 별로 남긴 것이 없고, 남길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걸 찾아 남기고 가야 한다.
남아 있는 삶이 어떤 변화를 요구하든,
설령, 여름 한 철 슬피 우는 매미 같은 삶일지라도
난, 남은 인생 더 깊이 생각하며 열심히 살련다.
더불어 쉴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를 찾으려 한다.
나이는 살아온 경륜일 뿐, 내가 가는 길을
가로 막을 순 없다. 나는 아직도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모든 일을 하려면, 나는 청춘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힘 있는 청춘이고 싶다.
세월아, 이젠 너만 가거라
세월아, 이젠 너만 가거라 !
지금까지 너 따라 여기까지 오느라
숨이차고 힘 들어서 더 따라 가기 어려우니
요번에는 나를 두고 너만 가면 어떻겠느냐!
전에는 느릿 느릿 오든 너,
요새는 왜 이리도 빨리 오노
나는 늦게 시작하여 할 일도 많으니
교회에서 더 배우고, 기도하고,
준비하여, 좀 있다가려한다.
세월아, 요번에는 나를 두고
너만 가면 어떠리.
훗날, 아주 먼 훗날,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보고, 듣고 판단하셔서
이제는 괜찮다, 준비 되었다고
부르시면, 그 때에 너와 나 만나,
고통없고 눈물없는 천국에서,
우리 함께 즐겁게 사랑하며 살자구나 !
세월아, 나의 사랑하는 세월아 !
첫댓글 남선배님! 님이쓰신 자서전 한 글짜도 빼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답이다 앞으로 연장하여 자서전을 계속 쓰시길 ~
그리고 하이팅! 하시길 ~ 있었든 일 숨김없이 부끄러움없이 쓰신"글" ~ ~ 남선배님 존경합니다 언젠가 저와 대화 중에 선배님이 이곳의 훌륭하신 분들 몇몇분 말씀 하실때 저가 말씀 드렸잔아요 훌륭하신 분들 중에서도 남선배님도 절대 빠지지 않으실 분이라고요ㅛㅛㅛ 자서전 글중에 마지막의 선배님의 회생정신! 한사람의 희생으로 여러사람이 희생되지 안고 잘되길 바라는 멋진 마음... 그리고 귀향하여 멋지게 글쓰며 ㅎㅎㅎ 컴동료된것 항상 영광 또 영광으로 ~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주시길 ~
바다게다 님! 글과 이야기 내용이 미천하지만 끝 까지 읽고 격려해 주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써 나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자서전 참으로 감동입니다. 이다음에 저도 이렇게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장르별 일목요연하게 하나하나 기록해 내려간 과거 현제 미래 기억하기 쉽게 읽기 쉽게 잘 정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합니다.
장로님의 자서전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은 언제나 청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