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메(外海) 순례
소토메는 나가사키(長崎県)에서 북서부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해안의 절경을 배경으로 푸른 바다에 흘러들어가는 ‘고노우라 강(神浦江)’이 청류를 이루는 천혜의 고장입니다. ‘고노우라 강’ 하류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옛 모습의 거리와 건물들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토메 지역은 천주교와의 진한 인연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순례지입니다. 참혹한 박해를 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견디기 어려운 탄압을 피해서 이 소토메 지역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한 박해시기의 사연을 ‘침묵’이라는 소설로 발표한 작가가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의 이 소설은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 ‘침묵’의 원본입니다. 이 소설의 무대가 ‘소토메’입니다.
1. 소설 ‘침묵’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가 1966년에 소토메를 무대로 한 소설 ‘침묵’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1970년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실베스타 훈장을, 1995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인간의 나약함을 공감하고, 고통을 함께 하는 교회의 심정을 ‘침묵’ 속에서 녹여내는 집필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침묵’의 구체척인 무대의 현장은 소토메 지역에서 ‘쿠로사키 성당(黑崎教会)’이 세워진 곳입니다. ‘쿠로사키 나가타 습지공원’을 끼고 흐르는 강변에 붉은 벽돌로 아름답게 지어진 성당입니다. 쿠로사키 성당에서 소설 ‘침묵’의 내용으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던 크리스토폴 페레이라 신부가 도쿠가와 막부정권의 고문에 굴복하고 배교했다는 소식이 그의 본국 포르투갈에 전해진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그러자 그를 가장 존경했던 제자 신부들이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 중의 한 명인 로드리고 신부가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함께 간 동료선교사 가스페와 더불어 비밀리 선교활동을 합니다. 은사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가 사실인가 아닌가 확인하려 합니다. 동료 가스페 신부가 잡혀서 순교하게 되고, 로드리고 신부 또한 배교자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취조를 받게 됩니다.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로드리고는 은사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하였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배교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페레이라 신부가 박해자들과 함께 로드리고를 배교하도록 압박합니다. 해서, 페레이라 은사 신부를 미워하게 됩니다. 교활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다가 예수님 상이 새겨진 동판성화를 붙인 나무판을 밟으라 했습니다.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주되 밟지 않는 사람은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것을 ‘후미에(踏み絵 ふみえ)’라 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차마 그 후미에를 동조할 수가 없어서, 그 성화판을 들고 그 속의 예수님 얼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다가 돌연 땅바닥에 놓고 발로 밟게 됩니다. 그리고는 배교한 은사 페레이라와 같은 배교자가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교활한 박해자들과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가 말합니다. “네가 그걸 밟지 않으면 너 앞에서 많은 신자들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계속 고통 속에 죽어갈 것이다. 네가 가면적으로라도 배교의 표시로 그걸 밟으면 저 교우들의 고통을 멈추게 해줄 수 있다.” 망설이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그림판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은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 신부는 붙잡혀 와서 그렇게 ‘후미에’를 강요당하기까지 신자들이 당하는 박해의 참상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쿠로사키 강’의 하구와 같은 바닷가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신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로드리고 신부는 “주님,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하면서 통곡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박해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비웃으면서 그 십자가에서 묶여서 죽어 보라며 다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쿠로사키 강’의 하구에 썰물이 빠진 후에 그 하구의 한가운데에다 십자가를 세워 놓고 거기에 신자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한 후에 밀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점차 차오릅니다. 그러면 물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신자들을 오랜 시간 짠 바닷물로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처형 방식을 수책형(水磔刑)이라 합니다. 신자들이 그렇게 말뚝에 묶여서 고통당하게 되는데 바닷물이 점점 차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기도하며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로드리고 신부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주님을 원망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로드리고 신부 역시 배교자 기치지로의 밀고에 의해서 체포되고 나가사키에 끌려가서 박해자로부터 집요하게 배교의 회유를 당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이미 배교한 은사 페레이라 신부의 회유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눈앞에서 많은 신자들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신음 속에 죽어갑니다. 그 앞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예수님의 초상이 그려진 판을 밟지 않으면 신자들을 그런 식으로 계속 잡아들여 죽이겠다고 박해자가 협박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연이어 “주님,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하면서 눈물로 원망의 기도를 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님의 성화를 밟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로드리고’라는 자기 소설 ‘침묵’속의 인물을 통하여 박해시절 처절했던 신자들의 고뇌를 한 사제의 고뇌 속에, 즉 참혹한 현실의 연약한 교회의 아픈 가슴 속에, 신앙의 갈등을 담아 녹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엔도 슈사쿠가 그린 ‘로드리고 신부의 심정’을 ‘쿠로사키 성당’에서 묵상하고 나서 순례자들은 다음 행선지로 향하게 됩니다. 그 성당에서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가레마츠 신사(枯松神社)’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숨어 사는 신자들(기리시단)이 옛적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영령을 모시고 참배하는 신사(神社)입니다. 위장된 배교, 즉 가면적으로 ‘후미에’에 따른 신자들의 행태! 그런 신자들이 가장하여 신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하여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을 일컬어 ‘잠복기리시단(潛伏切支丹)’ 즉 ‘가쿠레 기리시단(隱れ キリシタン)’이라 합니다. 그 가쿠레 기리시단들이 그들 나름 구전으로 비밀리에 끼리끼리 바치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라쇼(おらしょ, oratio)라 하는 그 비밀기도는 일본말이면서도 일본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녹음한 것을 소토메의 시츠 문화촌 ‘드로 신부 기념관’에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2. 드로 신부와 소토메(外海)
‘시츠 문화촌(出津 文化村)’으로 가는 길에 ‘엔도 슈사쿠 문학관’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문학 업적을 소개하는 자료들의 전시물 가운데에 그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기도서들과 성물들이 그의 손때 묻은 상태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문학관을 지나서 해안가에 세워진 ‘침묵의 비’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소설 ‘침묵’의 구절을 바위에 새긴 자연석 비석이 소토메의 시츠 문화촌 어귀 바닷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비석에 새겨진 그의 소설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이렇듯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나 푸릅니다.” 박해를 피하여 숨어사는 신자들의 고장인 소토메를 무대로 하여 ‘침묵’을 집필하면서 엔도 슈사쿠는 고난으로 슬픈 사람들과 푸른 바다를 그렇게 대조하여 기도했습니다.
고고학에 의해 구석기 시대의 인간 주거지역이었다고 전해지는 소토메 지역의 ‘역사 민속 자료관’이 시츠 문화촌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그 자료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전시물 중에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유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시츠 문화촌에서 순례자들이 찾아갈 중요한 곳은 ‘시츠 천주당’과 ‘드로 신부 기념관’입니다. 소토메 지방은 오랜 박해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의 은거지로 삼은 곳입니다. ‘소토메’라는 명칭이 ‘변두리바다(外海)’라는 뜻이듯이, 나가사키에서 박해를 당하던 신자들이 숨어들어 어촌과 바닷가의 궁벽한 골짜기에서 은밀히 신앙을 유지하던 곳입니다. 이곳의 잠복 기리시단을 찾아 사목자로 찾아온 프랑스인 선교사 마르코 마리 드로(M. de Rotz) 신부가 부임한 것은 1879년의 일입니다.
드로 신부는 1868년에 선교사로 나가사키 오우라에 도착하여 요코하마를 오가면서 인쇄소를 설립하여 일본 교회의 선교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그 시절에 세워진 요코하마와 나가사키의 인쇄소에서 조선교회의 교리서와 한불자전을 인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로 신부는 1875년에 나가사키 오우라에 라틴 신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당시의 나가사키 교구장 프티장 주교의 지시에 따라 드로 신부가 지은 라틴 신학교에 우리 병인 순교성인들의 서짓골 무덤 유해를 옮겨 모시게 된 역사를 우리 순례자들은 시츠의 도로 신부 기념관에서 또한 기억하게 됩니다. 도로 신부는 1879년에 소토메 지역의 사목자로 부임하고 이어서 1882년에 ‘시츠 천주당(出津天主堂)’을 건립합니다. 그는 지역의 잠복 기리시단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위한 터전과 생업기술을 가르치며 33년간의 삶을 바치고 1914년에 그곳 신자들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를 ‘소토메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의 기념관과 ‘시츠 천주당’에서 순례자들은 그의 손때 묻은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시츠 천주당’은 바닷가 마을의 태풍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지붕을 낮게 하고 길고 견고하게 지은 성당입니다. 가난한 지역 사람들을 위한 의료기관과 생활기술 지도관 등을 더불어 관람하는 순례자들은 드로 신부의 숨결을 느끼는 가운데 ‘시츠 천주당’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시츠 문화촌 언덕을 걷는 순례자들은 박해시대의 숨어 살던 신자들이 농사짓던 밭둑을 지나게 됩니다. 그 가난과 고난 속에 살던 신자들을 찾아 평생을 바친 드로 신부 또한 이 밭길을 수없이 걸었으리라 상상하며 떠나는 순례자들의 눈에는 언덕아래 푸르고 푸른 바다가 펼쳐집니다. 저런 바닷길 수만리를 건너왔던 동시대의 프랑스 출신 파리외방선교회 동료 사제들이 우리의 조선 땅에서도 그렇게 신자들을 찾아 수없이 생을 바쳤음을 또한 순례자들은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순교로 목숨 바친 분들의 유해가 또한 저 바다를 건너 나가사키에 모셔졌던 역사를 또한 기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