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시세계
1933년부터 〈동아일보〉와 〈학등〉에 3~4편의 시를 발표한 뒤, 1935년 〈신건설〉에 〈자화상〉을 발표하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였다.
1936년 김광균·김달진·김동리·김진세·여상현·오장환·함형수 등과 함께 시전문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여기에 〈화사 花蛇〉·〈달밤〉·〈방 房〉 등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3년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 인문사에서 발행한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며 친일 시들과 종군기 등을 썼다.
이때의 친일 행각은 1980년 전두환 군사정부를 찬양한 일과 함께 그에게는 씻을 수 없은 과오가 되었다. 친일소설인 〈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軍屬志望)〉(조광, 1943. 9)을 비롯한 소설 2편과 많은 평론이 있지만, 20권이 넘는 시집을 포함한 시선집의 분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창작의 주류는 시였으며, 시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 세계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첫 시집 〈화사집 花蛇集〉(1941)에서부터 2번째 시집 〈귀촉도 歸蜀途〉(1948) 이전까지의 시기로,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생명의식이 그 특징을 이룬다. 〈화사집〉에 실린 〈자화상〉·〈문둥이〉·〈화사〉·〈입맞춤〉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이다.
두번째 단계는 2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시집 〈서정주시선〉956) 이전까지의 시기로, 초기의 관능적인 세계를 벗어나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3번째 단계는 시집 〈신라초 新羅抄〉(1961)와 〈동천 冬天〉969)이 나온 시기로, 신라의 정신과 새로운 동양사상의 탐구가 중심이 된다. 시집 〈동천〉에서는 〈신라초〉에서 얻은 동양적 정신을 좀더 심화시켜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여섯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975) 에서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사람들과 풍속을 산문 양식에 담아내 동양적 정신을 확대하여 '고향'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정력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해 〈떠돌이의 시〉(1976)·〈산시 〉(1991)·〈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의 시집을 냈다. 1983년과 1991년 2번에 걸쳐 민음사에서 〈미당 서정주 시전집〉을 펴냈다. 그밖에 평론집으로 〈시창작교실〉(1956)·〈시문학 개론〉(1959)·〈한국의 현대시〉(1969)·〈시문학 원론〉(1983) 등을 펴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인용: 다음백과
1. 자화상(自畵像)/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2,화사 /서정주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꿰어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베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베암
3,부활/ 서정주
내 너를 찾아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순아, 이것이 몇 만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촉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이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4,귀촉도/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미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5,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6,무등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8,상리과원/ 서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나 낙동강 상류와도 같은 융융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어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았다.
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 마리의 꿀벌들이 온종일 북 치고 소고 치고 맞이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추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들과 나란히 마주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ㅡ아스라한 침잠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느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귀소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르쳐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소리를 들릴 일이다
9,꽃밭에 독백/ 서정주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10,기다림/ 서정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이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소만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이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11.동천/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12,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13,추석 / 서정주
대추 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그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14,저무는 황혼/서정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너머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으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이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매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슷이 비끼어 누워
나도 이제는 잠이나 들까
15,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16,내가 돌이 되면/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17,가벼이/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이제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이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간을 짓더래도
가벼이 한눈 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18,석류꽃/서정주
춘향이
눈썹
너머
광한루 너머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무주 남원 석류꽃을……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구름 너머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우리는 뜨내기
나무 기러기
소리도 없이
그 꽃가마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나니……
19,나그네의 꽃다발/ 서정주
내 어느 해던가 적적하여 못 견디어서
나그네 되어 호올로 산골을 헤매다가
스스로워 꺾어 모은 한 옴큼의 꽃다발ㅡ
그 꽃다발을 나는
어느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에게 주었느니.
그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는
지금쯤은 얼마나 커서
제 적적해 따 모은 꽃다발을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몇십 년 뒤
이 꽃다발의 선사는 또 한 다리를 건네어서
내가 못 본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질 것인가?
그리하여
천 년이나 천오백 년이 지난 어느 날에도
비 오다가 개이는 산 변두리나
막막한 벌판의 해 어스름을
새 나그네의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이 쥐이고
그걸 받을 아이는 오고 있을 것인가?
20,내 아내/서정주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21.신부/서정주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22,해일/서정주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이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23.시론/ 서정주
바닷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24,낮잠/서정주
묘법연화경 속에
내 까마득 그 뜻을 잊어먹은 글자가 하나.
무교동 왕대폿집으로 가서
팁을 오백 원씩이나 주어도
도무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글자가 하나.
내리는 이슬비에
자라는 보리밭에
기왕이면 비 열 끗짜리 속의 장끼나 한 마리
여기 그냥 그려두고
낮잠이나 들까나
25,한 발 고여 해오리/서정주
이동백이 새타령에
월명 추수 찬 모래
한 발 고여 해오리 있지?
세상이 두루두루 늦가을 찬물이면
두 발 다 시리게스리 적시고 있어서야 쓰는가?
한 발은 치켜들어 덜 시리게 고였다가
물 속에 시린 발이 아주 저려오거든
바꾸어서 물에 넣고 저린 발 또 고여야지.
아무렴 아무렴 그렇고말고,
슬기가 별 슬기가 또 어디 있나?
26,가을비 소리/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27,늙은 사내의 시/서정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 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28.국화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29.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30,산사꽃/서정주
산 보네 산 보네 밤낮 산 보네
그대와 나 둘이서 바래 보기면
번갈아 보며 보며 쉬기도 할걸
그대 깊이 잠들고 나 홀로 깨여
산 보네 산 보네 두 몫 산 보네.
그대와 나 둘이서 맞추았던 눈
기왕이면 끝까지 버틸 일이지
무엇하러 지긋히 감고 마는가
그대 감은 눈 우에 청청히 솟는 산
산 보네 산 보네 두 몫 산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