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한국 연극사 차범석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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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과의 대화] 차범석 극작가 사람과 사람

2004/09/1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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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과의 대화 ⑩] 살아 있는 한국 연극사 차범석 극작가

윤석진 월간중앙 차장(grayoon@joongang.co.kr)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 차범석.

‘원로’를 거부하고 지금도 작품을 쓰는 당당한 현역이다. 연극인으로서 그는 소극장운동과 연극의 대중화운동을 선도해 왔다. 아직도 연극계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노스승이기도 하다. 극작가 데뷔 50주년을 훌쩍 넘긴 연극계의 거성(巨星) 차범석이 말하는 한국 연극사 그리고 한국 현대사.

차범석(車凡錫·80)은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다. 평생 희곡을 써왔다. 1951년 ‘별은 밤마다’를 시작으로 2003년 ‘옥단어!’까지 작품이 100여 편을 넘는다. 그 작품들을 묶은 작품집이 8권에 이른다. 순수 창작품만 그렇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작품 수다.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또 장막극이 주특기다. 단막극은 작품도 많지 않고, 무대에 올리지 않은 작품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가 쓴 장막극은 발표할 때마다 연극계의 주목을 받았고, 무대에서도 호평받았다. 차범석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산불’이 고등학교 국정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렸던 것만 봐도 그의 작품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차범석은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살아 있는 연극사이기도 하다. 1956년 대학 연극반 출신들로 결성한 제작극회 창단 동인으로 참여해 7년여 동안 이끌면서 한국 연극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20년 동안 주도적으로 이끈 극단 ‘산하’는 1963년부터 83년까지 20여 년 동안 한국 연극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는 마주앉자 ‘원로’라는 용어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현역 작가이지 원로 작가가 아닙니다. 작가는 죽을 때까지 작가 아닙니까.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별 생각 없이 원로라는 표현을 쓴 기자가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지금도 쓰고 있는 작품이 있다고 말했다.

“‘남포간’이라는 작품입니다. 목포가 무대죠. 목포에 남포간이라는 동네가 일제시대부터 있어요. 다이너마이트를 남포로 불렀고, 남포간이라는 게 광산 아닙니까. 그곳에는 버림까지는 아니지만 차별받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등장 인물들이 실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책 속에 파묻혀 산 어린 시절

― 원래 연극에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아니면 글쓰기 자체에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아무래도 글쓰기였죠. 어려서부터요. 가정 환경이 좋은 편이었거든요. 책을 많이 읽었어요. 목포북보통학교에 다녔는데, 1년에 한 번씩 교지도 만들었습니다. 1935년, 내가 4학년 때 쓴 ‘아침’이라는 글이 교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교지를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그 글에 늦가을이라는 뜻의 ‘만추’(晩秋)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말을 알았을까 싶어요.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요. 조금 일찍 깨우쳤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적 차범석의 집안은 당시 목포에서는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유복했다. 320평 대지에 안채·사랑채 등에 걸쳐 방이 무려 13개나 되는 대가(大家)였다. 당시 목포에서는 몇 집밖에 없었던 전화도 있었는데, 집 전화번호가 107번이었다고 차범석은 기억했다. 할아버지가 당시로서는 매우 진취적이었는지, 자식 교육에 열성이었다고 차범석은 설명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4형제 모두 당시 일본유학을 다녀왔을 정도였다. 한 집은커녕 한 마을에 대학생 한 명 보기가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목포는 6대 도시로 꼽힐 만큼 큰 도시였잖아요? 瞿?사람들이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목포에서는 외지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장남인 아버지가 동생들 교육을 다 시켰는데요. 그래서 책들이 사랑방이나 창고에 가득했습니다. 말 그대로 서고(書庫)였죠. 보통학교 때는 어려운 책은 못 읽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수필, 소설 등 다양하게 읽었습니다.”

당시 목포에는 책방이 두 군데 있었다. 그 서점에 전화하면 책을 많이 사는 차범석 집에는 아예 배달해 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차범석은 어렸을 적부터 책 속에 파묻혀 산 셈이다.

“만화, 모험소설, 탐정소설 등 다양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책과 가까웠다는 뜻이죠.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익숙해졌고요. 구제중학교 3∼4학년 무렵 문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습작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쓴 소설 습작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발표는 못했지만요.”

“리얼리즘 일부러 추구한 적 없어”

― 그러니까 학창 시절 내내 이른바 ‘문학청년’으로 지냈던 겁니까.

“그렇죠. 그것 말고도 미술부·음악부·합창단 활동도 했습니다. 예능계 쪽으로는 골고루 재능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기할 것은 보통학교 6학년 때, 열세 살 때죠. 목포에 최승희무용단이 왔어요. 그 공연을 제가 봤거든요. 내게는  첫 무대예술 경험이었고, 극장과 친숙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내가 무용을 알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고, 그래서 나중에 무용극까지 쓰게 됩니다.”국립무용단이 공연한 ‘도미부인’(1982) ‘은하수’(1983) ‘저 하늘 저 북소리’(1985) 등이 모두 차범석이 집필한 무용극 작품이다. 아무래도 극작가에게는 작품 이야기를 먼저 묻는 게 순서일 듯싶었다.

―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스스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남들이 나더러 리얼리즘 작가라고 하는데 내 스스로 그렇게 얘기해본 적은 없어요. 내 작품의 기본 정신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의 사실입니다. 일제 강점기, 6·25 등 우리의 사실이 어땠는가, 이를 정확하게 포착해 내는 것입니다. 곧 우리 역사와 맞물려 있죠. 뒤틀렸던 우리 이야기 중 새로운 것을 써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것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 수밖에 없죠. 당시 외국의 실존주의·구조주의·서사문학 등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했겠지만 나는 그보다 우리 것을 찾는 데 주력했던 것입니다.”

차범석의 작품 소재는 우리 땅, 우리나라 사람 그리고 우리 역사에 철저히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실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내가 현실에서 겪었던 일, 내 고향 이야기, 우리의 역사를 작품으로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실주의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사실주의 희곡이니 사실주의 연극이니 그럽니다. 그런데 내가 문학을 하면서 무슨 무슨 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리얼리즘 작품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리얼리즘 작품을 쓰겠다고 한 것은 아니에요. 작가의 작품은 일생을 통해 변할 수 있습니다. 나도 초반과 후반 작품이 달라지지만 내가 언제부터 바꿔야겠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살아온 현실을 더 나은 작품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한 결과일 뿐입니다.”

― 스스로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요?

“아무래도 초기 작품으로는 ‘밀주’ ‘귀향’ ‘성난기계’ 등을 들고 싶습니다. 공연했던 작품으로는 역시 ‘산불’(1962) ‘꿈하늘’(1983) ‘새야 새야 파랑새야’(1974)입니다. 남들이 비교적 호평했는데, 나도 동의하죠.”

― 선생님의 글쓰기는 희곡은 물론 수필·평론·오페라·무용극 그리고 논문까지 정말 다양해 보입니다.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자세를 묻는 겁니다. “내가 작품으로 쓴 소재는 모두 내가 거쳐왔던 일들입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못 써요. 젊은 연극인, 그중에서도 작가 지망생들에게 네가 가장 자신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작품으로 쓰라고 말합니다. 남한테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힌트를 얻어 쓰려고 하지 말고요. ‘이색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글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 이야기가 아니다. 빌려온 이야기일 뿐’이라는 말을 해줍니다. 그런 소재라도 충분히 자신이 있을 때 쓰라는 말입니다.”

― 흔히 창작을 산고(産苦)에 비유합니다. 선생님도 작품을 쓸 때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까.

“나는 작품을 구상하는 기간이 굉장히 길어요. 대표적으로 ‘산불’은 10년 만에 쓴 작품입니다. ‘옥단어!’(2003년 11월)가 최근 작품인데, 7년 걸렸습니다.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몇 달 만에 쓴 작품도 있습니다. 箏?시기에 청탁받아 쓴 작품 같은 경우죠. 나는 일단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 두 달이면 씁니다. 작가라면 작품을 쓰는 중에 원고지를 구겨 버리거나 줄담배를 피워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일단 시작하면 거칠 것 없이 그대로 써내려 가는 스타일입니다. 물론 가끔 막히는 대목도 있죠. 구상이 길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쓸 때는 대사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대사를 입으로 외며 씁니다. 그래서 밤에 글을 쓰면 마누라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고는 합니다.”

“희곡 대사는 글이 아니라 말이다”

그는 희곡의 대사에 대해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라면서 이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대사는 말이지 글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작품을 보면 대사가 모두 문장입니다. 말은 쉬워야 합니다. 어렵게 말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쉬운 말 가운데 깊은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사는 시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또 극작가는 배우가 연기할 때 말하기 좋게 써야 합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누구를 위해 말하는 겁니까. 관객을 위해서거든요. 관객이 그 말을 듣고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배우들끼리만 알아듣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관객들은 보고만 있으라는 얘기죠. 그렇게 되면 작품이 아닙니다. 연극계에서는 대사가 배우 입에 붙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기 좋다는 뜻 아닙니까. 말하기 어려운 것은 문장이죠. 그것이 문법적으로는 옳은지는 모르지만, 말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대사를 씁니다.”

앞서 차범석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의 학력을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 편이다. 차범석은 1942년 5년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서중의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고보 졸업자가 웬 고등학교 입학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일제 말기 당시 학제는 요즘과 조금 달랐다. 대학 예과 코스에 해당하는 2년제 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의 고등학교 격이었다.

“시대극을 보면 왜 이런 모습 있잖습니까. 둥그런 모자를 쓰고 망토 입고 게다짝 신은…. 그게 고등학생이었거든요.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는 그런 고등학생이 되는 것이 꿈이었죠. 국내에 있는 연희전문이나 보성전문은 그때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도쿄(東京)에서 학원에 다니면서 2년 동안 재수생 노릇을 한 것이죠.”

그런데 도쿄에서의 재수생활이 차범석에게 꼭 시간의 허비만은 아니었다. 젊었을 적 그의 문화적 소양을 키우는 데는 오히려 결정적 기간이 되었다.

“학원은 오전반이었는데 오후 3시쯤 수업이 끝나면 갈 데가 없는 겁니다. 학원은 구속력도 없잖아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그 시간에 영화나 연극을 보러 주로 극장에 다녔습니다. 도쿄 신주쿠(新宿)에 소극장들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그곳에 광음좌(光音座) 극장이 있었는데요. 200석도 채 안 되는 소극장입니다. 광음좌에 들어가면 흘러간 영화를 계속 돌려줘요. 불란서 영화 같은 것을 말입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진 후 ‘원수’가 된 영·미 영화는 일본 극장에서 사라지고, 주로 같은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나 중립국인 아르헨티나·스페인·오스트리아 영화 명작은 거의 다 봤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화 지식은 그때 공부한 것입니다.”

무대예술에 흥미 느껴 극작가 길 선택

― 앞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면서 왜 극작가가 되셨습니까.

“소설이든 희곡이든 같은 문학 아닙니까. 그런데 무대예술에 흥미를 느끼던 차에 문학과 연극이 만나는 희곡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구체적으로 극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해방되면서부터입니다. 그때는 희곡 작가가 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집안에 예능 계통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집안에서 예술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누가 물어보면 나는 ‘자가발전’했다고 대답하고는 하죠. 혼자 흥미를 갖고 쫓아다녔죠. 집안에서도 나는 조금 별난 존재였습니다.”

― 그러면 문학을 하겠다는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집안에서 내 별명이 ‘우렁각시’였습니다.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거든요.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주로 안방의 이불 속에 들어가 놀러온 동네 아주머니들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어요. 아버지는 내가 공부도 좀 하고 성격도 차분해 보이니까 ‘의과’(대학)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아버지 앞에서 고개만 끄덕거렸지 마음속으로 한 번도 의과를 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렇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던 분이 사범학교는 왜 갔습니까.

“일본 도쿄에서 재수를 마칠 무렵 조선 청년 징병제가 생깁니다. 의무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이 사범학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교사가 부족하던 시절이니까요. 그래서 일본 고등학교에 들어간다는 꿈을 접고 광주사범학교에 들어갔던 겁니다. 광주사범학교 강습과에 1기생으로 13명이 입학했는데, 모두 일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군인 보충에 혈안이었던 일제가 징집 대상에 사범학교 학생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사범학교 입학 후 3개월이 지나자 사범학교 학생들도 징병 대상에서 예외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일본군에 끌려가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1년을 다니면 졸업인데 그 소식을 듣고 나머지 기간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 무전여행을 다니고 그랬습니다. 지리산 노고단까지 올라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사범학교 동기생들끼리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밀주를 사다 마시고 밤새 노래를 부르는 등 데카당스적 생활을 했죠. 바람난 것은 아니고 방황이었어요.” 그런데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징집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교사 발령이 났는데, 그곳이 내 모교인 목포북보통학교였습니다.”

차범석이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5월13일, 마침내 차범석에게 징집영장이 날아왔다. 그리고 일본군에 징집돼 배치된 곳이 제주도 한림면이었다. 전투는 없었던 곳이어서 차범석은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했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생활을 만 3개월 했습니다. 가보니 정규 군인이 아니고 작업대더라고요. 우리가 한 일은 군사용 굴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미군 상륙에 대비한 함정을 숨겨놓는 비밀 창고였죠. 그해 8월15일 해방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기쁜 날 독립만세를 못 불러봤습니다. 일본 군대 내였으니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민간인 배를 빌려 타고 해방 후 보름여 만에 목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연세대 재학중 6·25로  중퇴

목포로 돌아온 차범석은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해 9월 23세의 늦깎이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대학들은 9월에 첫학기를 시작하는 이른바 ‘코스모스 입학’을 하던 때였다. 또 서울대가 생기기 전이었다. 그즈음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발생해 교통편이 끊기는 바람에 스리쿼터를 빌려 타고 서울로 올라오며 고생했던 기억을 차범석은 떠올렸다.

“전문학교 문과 입학 후 1년이 지나 교육제도가 바뀌어 연희대가 되었습니다. 입학 동기생이 124명인가 그랬는데, 나이 차이들이 많았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살 아래지만 김동길 교수 등이 입학 동기입니다.” 차범석은 연세대 영문과 출신이다.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이 국문과가 아닌 영문과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문과가 문학부로 개편되었는데, 그 안에 영문과도 있었습니다. 제가 영문학을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제 말에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는 고보 시절 5년 동안 영어를 제대로 배웠거든요. 그리고 목포는 천주교가 일찍 들어왔고, 그 교세가 강한 곳이었습니다. 한 성당에 오브 라이언이라는 이름의 아일랜드 출신 신부가 와 계셨는데요. 그 신부님에게 친구들과 함께 한 반년 동안 영어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좀 했던 편입니다. 앞으로 희곡을 쓰려면 영어를 좀더 공부해야겠다 싶었죠. 영어로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 작품들을 더 많이 읽을 생각으로요.”

차범석은 그에 앞서 1946년 겨울 결혼한다. 지금까지 해로하는 부인 박옥순 여사와였다. “첫 겨울방학 때 목포에 내려갔는데 아버지가 결혼하라는 겁니다. 나는 결혼의 ‘결’자도 생각을 안 하고 있을 때거든요. 부모의 강권으로 어쨌든 결혼하게 됐습니다. 결혼 초기에 부인은 목포에 남겨두고 1년에 방학 때만 두어 차례 만나고는 했죠. 4학년 되던 해인 1950년 서울 서대문에 방 한 칸을 얻어 처음 신접살림을 차렸어요.”  

―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1950년에 왜 대학을 중퇴하게 됩니까.

“4학년 때, 그해 6·25가 났잖아요? 목포가 적 치하에 들어가면서 시골에서 올라오던 생활비가 끊겨 돈도 다 떨어졌습니다. 금비녀·금가락지·재봉틀 등 살림살이를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죠. 그때 우리 형이 국군 장교였는데, 6·25가 나면서 형수와 조카 둘, 동생까지 우리 집으로 온 겁니다. 학생 신분에 집에서 학비가 끊겨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잖아요. 그때 국군 의용군에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의용군 가족에게는 식량을 배급한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집사람이 절대 반대해요. 그러고는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죽자며 목포로 내려가자고 해요. 그때 그 제안을 반대해 처음으로 부부싸움까지 했습니다. 내가 집사람한테 져서 7월26일 서울을 떠나 1주일을 걸어 목포로 내려갔습니다. 목포가 이미 인민군에게 함락된 뒤라서 전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이죠.”

마음의 고통 준 ‘잠시 동안의 부역’ 경력

― 그때 목포집은 무사했습니까.

“목포에 내려갔더니 인민군들이 내일까지 집을 비우라고 했다는 겁니다. 정치보위부에서 집이 넓으니 장교클럽으로 사용하겠다면서요. 그날 살림을 끌어내고 어머니와 함께 마루에 앉아 밤새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은 고모댁, 누나집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어요. 또 아버지가 이미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더군요. 일제 때 도의원 등을 했으니 친일파 혐의를 받았고, 형이 국군 장교니 영락없이 반동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힌 겁니다. 취조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주변 백성들을 괴롭힌 일이 없거든요. 장학금을 내놓는 등 목포사회에서는 칭송이 자자했을 만큼 아버지가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냥 풀려나오기는 했습니다.”

― 차선생님은 그 사이 목포에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는 어떻게 해요? 아버지가 궁지에 몰리자 인민군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연극도, 무용도 했던 까닭에 적 치하 목포에서 연극동맹·무용동맹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9·28 서울 수복이 되면서 세상이 뒤집혔잖아요?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 부역 혐의를 조사받고 보름간인가 콩밥을 먹었죠. 본의가 아니었다는 점은 인정받아 별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전과자는 아니지만 그런 낙인이 찍혀 그후 굉장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동안 허무주의에 빠지고 그랬죠. 그런 게 작용해 ‘산불’이라는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차범석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고백할 수 없는, 그러니까 잠시나마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잠시나마 곤욕을 치른 차범석은 다시 목포에서 취직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1950년 목포중학교 국어 교사가 된다. 그리고 1956년에는 서울 덕성여고로 옮겨 1961년까지 교사생활을 계속한다.

“대식구들이 먹고 살 길이 없어서였습니다. 당시 전시연합대학이 꾸려졌는데 복학할 생각도 없었고요.” 차범석은 1961년 문화방송 PD로 자리를 옮긴다. 편성국에서 연예과장, CM과장, 제작부장, 편성부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한 달 모자란 10년’ 동안 방송국 생활을 했다. ‘극작가로서는 특이한 이력’이라고 기자가 말했더니 차범석은 그 사연을 이렇게 얘기했다. “ MBC가 처음 생길 때 1기생으로 입사했던 겁니다. 동기생은 대부분 나중에 방송계에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되었죠. 후에 KBS 사장을 했던 최창봉도 입사 동기입니다. 그런데 문화방송이 돈이 없어 그해 개국하지 못하자 최창봉은 마침 KBS가 TV 방송을 시작한다니까 옮겨가더군요. 내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MBC에 남았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송 일이 재미는 있었습니다.”      

‘별은 밤마다’로 1951년 데뷔

차범석은 MBC에 근무하며 1966년 연세대 영문과에 복학해 이듬해 2월 졸업장을 받는다. 차범석은 1946년에 입학해 67년에 졸업했으니 21년 만에 졸업한 셈이 된다. 그것도 보기 드문 진기록이다.“나는 작가로서 대학 졸업장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오화섭·박영준 교수 등이 앞으로 졸업장이 필요할 것이라며 복학을 권유하더군요. 당시 연세대에 강사로 나가던 때입니다. 1학기에는 강사, 2학기에는 학생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던 거죠.”

이렇듯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차범석의 습작 희곡 쓰기는 계속된다. 해방 후부터 그것은 차범석에게 쉰 적이 없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차범석은 자신의 데뷔작으로 1951년작 ‘별은 밤마다’라는 작품을 꼽는다. ‘산불’의 전편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 빨치산이 산에서 여자 빨치산을 만나 결혼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기혼남임을 알고 자살한다는 줄거리였다. 그 작품은 차범석 스스로 기획·연출·주연을 맡아 목포에서 연극 무대에 올려졌다. 그래서 차범석은 2001년에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을 하게 된다.

차범석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밀주’라는 작품으로 희곡 부문 가작으로 뽑혀 극작가로서 공인을 받는다. 그런데 다음해 희곡 ‘귀향’으로 또다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도전한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밀주’ 작품으로 가작에 뽑혔는데, 성에 안 차는 겁니다. 기어코 당선작에 뽑히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해 두번째 도전에서 내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해 서울로 올라왔던 겁니다. 그때 학교를 덕성여고로 옮겼잖아요?”

― 서울로 올라오던 1956년 ‘제작극회’ 창단 동인으로 나서는데 어떤 극단이었습니까.

“내가 연세대에 다닐 때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유치진 씨가 이끌던 한국연극학회가 있었어요. 1949년 10월 그분이 한국 연극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키워야 한다는 취지에서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어떤 작품으로 출전할까 고민하다 유치진 씨의 조언을 받았습니다. 정통 희랍극으로 시작하라면서 ‘오이디푸스 왕’을 추천하더군요. 내가 기획하고 일어판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도 함께 했습니다. 그 작품이 그 경연대회에서 우승했어요.” ‘제작극회’에 대해 물었는데 서론이 긴 편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불가피한 배경설명이었다.  

“그 경연대회에는 서울대·고려대·숙명여대·동국대·정치대(건국대 전신) 등 10여 개 대학이 참여했습니다. 그때 각 대학에서 연극을 하는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잖아요? 그 친구들 중 지금 기억나는 인물로는 서울대 연극반 연출을 맡고 있던 김기영이 있습니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잖습니까. 연극영화과가 없을 때여서 전공들이 모두 달랐는데, 그중 뜻이 맞는 사람끼리 대학 극회를 만들었습니다. 공연도 하고 소극장에서 희곡 낭독회도 했어요. 그런데 6·25가 나잖습니까. 그 통에 뿔뿔이 흩어져 6년 동안 공백이 생겼죠. 또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대학 극회 멤버들이 다시 모이자고 해서 만든 겁니다. 제작극회라는 극단 이름도 내가 지었습니다.”

― 제작극회 동인들로는 어떤 분들이 있었습니까.

“조동화 씨라고 있죠? ‘춤’ 잡지 발행인 말입니다. 약학대 출신인데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최창봉 사장도 동인이었고요. 고려대 출신 김경옥, 나중에 시나리오 작가가 된 임희재·최상연·구선모 등 13명인가 모여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첫 무대에 올린 작품이 ‘사형수’였어요. 대성빌딩 강당에서 공연했습니다.”

― 제작극회가 다른 극단과 구별되는 성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작극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소극장 연극운동을 내걸고 나온 극단입니다. 그후 ‘실험극장’ 등 소극장이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해방 전에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그때까지는 상업적 목적의 돈벌이용 연극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대학을 나온 30대 지성파 연극인들이 나오자 언론에서도 신선하다면서 밀어줬습니다. 그때 나온 선언문을 보면 우리가 언제까지 신파극이나 과장된 연극을 할 것인가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더 자연스럽고 현대적인 감각의 연극, 내면적으로 속삭이는 것처럼 연기하는 연극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범석은 당시 연극계 풍토와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극단이라면 사실상 ‘신협’밖에 없었거든요. 이해랑·김동원 씨 등이 그 주축이었죠. 마구 외치고 과장된 연기를 보여줬는데, 저런 것은 연극이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작극회의 목표는 내부적으로 ‘신협’ 타도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신협’ 사람들이 우리를 곱게 볼 리 없죠. 건방진 자식들이라고요. 나중에는 풀어져 함께 공연도 했지만요.” 그러나 소극장운동 기치를 들고 나왔던 제작극회의 수명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7년여 동안 모두 13회 정도 공연을 했을 겁니다. 그쯤 되니 연극을 대하는 단원들의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연극 애호가들이 모여 취미로 연극을 하는 성격이 돼버린 겁니다. 연극을 내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나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내게는 연극이 예술이자 직업까지 되어야 했습니다. 나는 전문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언제까지나 대학생들만 상대하는 아마추어 연극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때 벌써 제작극회를 나와 새로운 소극장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중 쓸 만한 사람들 몇 명만 뽑아 합치면 훌륭한 극단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자신했습니다.”

“그렇게 성공을 자신한 이유는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차범석은 또다시 배경 설명을 자세하게 했다.

“1963년 극단 ‘신협’이 재기 공연을 했습니다. 당시 ‘신협’ 단원들이 한때 영화로 빠져 이해랑 씨만 고독하게 남아 재건했던 겁니다. 악극에서 활동했던 당시 인기 영화배우들, 그러니까 허장강·황해 씨 등이 재건된 ‘신협’에 들어갔습니다. 아이로니컬한 것이 소극장운동으로 ‘신협’과는 다른 길을 가는 나더러 희곡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품이 ‘갈매기 떼’입니다.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사업으로 생각하고 스폰서를 했어요. 6월6일 서울에서 무대에 올렸는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누볐죠.”

극단 ‘산하’로 연극 대중화운동

차범석은 이런 ‘신협’의 재기 성공이 자극제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 ‘묵은 배우들로도 저렇게 성공하는데 신선한 소극장 배우들 몇 명만 모이면 ‘신협’과 대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심했던 겁니다. 그래서 조각(組閣)에 착수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이 누구냐? ‘실험극장’에서는 이기하·이순재·김성옥·오현경·이낙훈 등 쟁쟁한 멤버들이었습니다. 제작극회에서는 천선녀·백수련·김영옥, 강효실. 또 라디오 전성시대였는데, 연속극에서 성우로 인기가 있던 사람들 중 주상현, 구민, 강효실이  있었죠. 그들은 화술에 대해서는 도가 텄고 또한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이니 모두 24명이었습니다.  극단 이름은 ‘산하’였고요. 그래서 첫 공연을 한 것이 1963년 9월28일이었습니다.”

― 극단 ‘산하’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그랬습니다. 극단 ‘산하’는 선언문이 없다고요. 단 하나다. 연극의 대중화운동이다. 그것은 뭐냐?  첫째, 언제까지 대학생을 상대로 번역극만 할 것이냐? 우리의 연극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속 극작가가 나·임희재·하유상·오학영 등 네 사람이었습니다. 각자 1년에 한 편씩만 써도 네 편의 작품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끔 하자는 것이었죠. 둘째, 연극은 왜 서울에서만 하느냐?  옛날 동양극장 시절이나 신파극만 봐도 지방에도 연극을 보는 관객은 있다, 가능하면 지방까지 가자, 그래서 연극의 저변 확대를 꾀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당시 소극장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개런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배우들이 표를 팔아야 했어요. 배우들에게는 표를 많이 팔수록 좋은 거죠. 극단 ‘산하’에서는 연기자들에게 일절 돈에 부담을 안 준다, 배우는 연기에만 몰두하라고 했어요.”

창단 20년 만에 해체된 극단 ‘산하’의 운명

배우들에게 표 파는 것을 중지시키고 연기에 몰두하게 한 조치는 당시 연극계 풍토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연극계 일각에서는 이를 비웃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극단을 만든다고 했더니 연극계에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강적이 나타난 것이니까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중견 연극인들까지 연극의 대중화를 두고 ‘동대문시장 아줌마들까지 관객으로 동원해 저질 연극을 할 것이냐’면서 비판하더군요.” 그러나 아무리 취지와 뜻이 좋다고 하더라도 극단 운영 문제는 현실이었다.

“극단 운영은 운영위원 다섯 명이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나이도 많고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나는 그때 (문화)방송사에 근무했고, 작품 고료가 나왔으니 당연히 운영위원이 되었고요. 또 인기 작가였던 임희재, 성우 구민, 무대감독 표재순 씨, 앞서 말한 기획자 김유성 등이었습니다. 200만 원이 든다면 한 사람이 50만 원씩 갹출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연을 하고 수익이 나면 제작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배우들에게 배분했어요. 그때만 해도 그것이 연극계에서는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연극의 대중화를 목표로 내걸었던 극단 ‘산하’는 창립 20년 만인 1983년 해체된다. 더구나 극단을 만든 대표 차범석 본인의 손으로였다. 그 배경은 당시 연극계 풍토의 변화였다. 상업주의 연극의 번성과 PD 시스템 도입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당시 상업주의 연극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연극계에도 이른바 PD 시스템이 들어왔습니다. 상업주의는 번 만큼 가져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연극계에도 돈이 전부라는 사고가 지배했습니다. PD 시스템은 한두 명의 스타에 의존하는 스타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당시 김의경의 현대극단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한 번 공연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연극이 당장 손님은 들지 모르죠. 하지만 연극은 엉망이야. 그런 작품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반면 차범석이 고집하고 있던 극단 ‘산하’ 같은 동인제 극단은 이에 비하면 지나치게 ‘순수함’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동인제 극단이었거든. 동인제는 수입을 누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분위기의 극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극단 ‘산하’)가 상업주의를 받아들이고 PD 시스템으로 바꿀 능력이 있느냐? 막대한 자본이 있어야 하고, 전속 배우들에게 월급을 줘야 하는데, 그럴 돈이 어디 있습니까. 뜻은 좋지만 우리에게 PD 시스템 도입은 시기상조다, 한솥밥을 먹고 사는 우리는 동인제여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고, 지켰습니다.”  

― 선생님이 너무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20년이 되다 보니 TV가 생기고 배우들 가운데 스타들이 생기잖아요? 전운·강부자·백수련·이순재 씨 등이 그 예입니다. 그들의 인생관이 달라져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겁니다. 젊은 배우들의 생각도 달라지더군요. 뭐 좀 하자고 하면 ‘얼마 줄 겁니까’ 이렇게 먼저 따져요. 또 소속감이 없어. 나는 어느 극단의 누구라는…. 자존심이 없어요. 누가 돈만 준다면 어디든 다 가요.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운명을 같이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다 무너져 버렸어. 할 수 없이 갈 사람은 가라, 그러나 올 사람은 언제든 받아준다고 그랬죠.”

― 그래서 결국 극단 ‘산하’를 해체하게 되는군요?

“후배한테 넘기면 될 일이지 독재자처럼 내 마음대로 해체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었죠. 단원들의 정신적 결합이 무너진 상태에서 좋은 연극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데려다 공연하는 일은 못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이 말입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단원들에게 나는 너희를 못 믿는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극단을 물려주려고 몇 사람 젊은 연출자를 골랐어요. 그중 하나가 오태석이죠. 김영덕이도 데려왔고요. 그런데 나와 연극관이 달라. 극단 ‘산하’가 내세웠던 연극의 대중화라는 모토를 구현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을 나는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 막을 내려야죠.”

그래도 극단 ‘산하’는 전통 있는 극단답게 그냥 간판을 내리지는 않았다.

“마지막 작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옛날 옛적에 훠이 훠이’라는 작품입니다. 그해 연극상을 휩쓸었죠. 새로운 연출가, 새로운 배우들로 말입니다. 그때 단원들은 왜 그런 작품 제목을 택했는지 몰랐죠. 그것은 ‘옛날 옛적은 훠이 날아가라’ 곧 극단 ‘산하’는 날아가라는 뜻이었습니다. 내 연극 인생에서 또 하나의 종장(終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는 극단 ‘산하’가 운영난에 봉착해 문을 닫은 것으로 이해하더군요. 내가 그 이유를 얘기하지 않았으니까요. 돈문제라면 내 신분으로 남대문시장에서 달러 빚이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문제였지.”

우리 연극계, “기초가 안 돼 있다.”

차범석은 자신의 소신을 말할 때는 거침이 없고, 강렬한 언어를 구사한다. 스스로 ‘욕 잘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할 정도다. 한번은 연습에 늦은 여자배우들에게 보통사람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설을 하는 바람에 눈물을 쏟아냈던 기억을 지금도 되뇌더라는 것이다.

― 차선생님은 요즘 연극계의 풍토, 연극계의 수준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몹시 부정적으로 봐요. 기초가 안 돼 있어요. 요즘 연극계 풍토는 모국어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이 전문대학까지 포함해 전국에 100개가 넘는다고 그럽니다.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수준을 내가 알거든요. 그 사람들이 특히 실기에서 무엇을 가르치겠어요. 그들은 우리 언어인 모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배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모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정확한 우리말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출가도, 방송국의 아나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범석이 모국어 공부를 연극의 기초라고 강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말이 통하고 의미만 전달되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무대예술의 언어에는 문법은 없지만 약속은 있습니다. 무대에서 그 약속이 없어졌어요. 관객들이야 이해하든 말든 모두 제 마음대로 말을 합니다. 기초가 없으니 그러는 겁니다. 우리말을 10년은 공부한 다음 무대에 올라야 합니다. 연극은 고등학생들도, 대학생들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이 하는 것일 뿐입니다. 작품 입장료로 2만 원도 받고, 5만 원도 받으려면 제대로 기초를 갖춘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거죠.”

연극사 모르는 것도 연극계의 큰 문제

차범석은 이와 더불어 날로 고조되는 우리 연극계의 상업적 풍토에 대해 개탄과 함께 우려를 거듭했다.

“요즘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손님이 들 것인가 여부입니다. 좋은 연극을 만들어 보자고 덤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예술이란 것이 손님이 드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잖아요? 악극도 있고, 뮤지컬도 있고, 무대예술 장르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연극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술적인, 문학성 있는 작품을 하자는 것이 먼저죠. 한때 우리나라에 마당극, 민족극이 유행을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좀 뜸해졌습니다. 왜 그러냐? 작품에 문학성이 없으니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예술성 작품으로 승화시킨 희곡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나라 연극계 풍토의 문제점으로 차범석은 우리 연극사에 무지함을 꼽았다.

“요즘 40대, 50대 전후의 평론가들이나 전문가들은 우리 연극사를 잘 몰라요. 해방 전이나 해방공간의 연극은 전혀 모르고 요즘 작품만 알죠. 그래서 작품도 옛날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교(연세대)에서 1년 동안 강의를 하는데, 내 강좌 제목이 ‘20세기 연극 바로보기’입니다. 21세기에 말입니다. 연극사적으로도 지난 100년 동안 엄청난 고비가 많았습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21세기 연극이 된다는 겁니다. 해방공간에서 6·25까지 언급한 연극역사가 없습니다. ‘빨갱이 연극이니까’라는 식으로 지레 싫어하잖아요? 그러면 전부 빨갱이 연극만 했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그 사이에 공연한 연극 작품 리스트를 다 만들었어요. 유치한 작품은 있었지만 ‘빨갱이 작품’은 없었습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46년부터 공연된 우리나라 연극의 80%는 봤다고 자부합니다. 고등학생 연극까지요. 당시 좋은 작품들 많이 나왔습니다. 나라도 그런 연극사를 진작 썼어야 했습니다. 왜 안 썼느냐? ‘빨갱이 연극’으로 알려진 작품을 좋게 썼다가는 오해받을 소지가 있으니까요. 이제는 있는 그대로 연극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선생님이 직접 집필할 생각은 없습니까.

“요즘 쓰고 있죠. 지금은 소극장운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 강의를 할 때나 후배 연극인들을 만났을 때 어떤 점을 가장 강조하십니까.

“연극인들이란 것이 작가도 있지만 배우 지망생이 대부분 아닙니까. 나는 배우는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배우들이 그런 자각이나 자부심이 없습니다. 배우들은 뽑혀가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어. 새로운 작품을 할 때 출연에 뽑힌 배우들이 늘 그럽니다. 작가 선생이, 연출 선생이 도와 주셨다고요. 그럼 배우 선생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유일하게 배우 선생만은 아직 없어요. 왜 그렇게 자존심이 없습니까. 연극은 배우예술입니다. 연극에서 배우는 작가나 연출가와 대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배우도 작품을 분석하고 연출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번째, 기초를 위해 10년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10년이 길다고 생각하면 빨리 보따리 싸서 나가라고 합니다. 나는 10년이 길지 않다고 생각해요. 요즘 연극을 해서는 밥 먹고 살 수 없다면서 TV 등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거기서 연기 잘한다는 사람들 보세요. 다들 10년 이상씩 썩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연기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너희는 왜 그것을 안 하려고 하느냐고요.”

‘전원일기’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

― 선생님에게 대중들이 갖는 호기심 중 하나는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초대 작가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방송 드라마는 거의 쓰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전원일기’는 쓰게 됐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 1년 동안 썼어요. ‘전원일기’를 기획했던 이연헌 PD가 MBC 2기생 출신으로, 내가 MBC에 있을 때 같이 근무했던 후배입니다. 그가 집으로 찾아왔더군요. 농촌 드라마를 하겠다면서 내게 극본을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 자리에서 거절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죠. 첫째, 나는 농민의 자식이 아니다. 농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농촌 드라마를 쓰지 못하겠다. 둘째, 아파트로 뒤덮이고 모두 자가용 굴리는 세상에 거름 냄새 나는 농촌 이야기가 먹히겠느냐? 시청률이 없을 것이다. 세번째, 1980년대 초반은 농촌이 피폐해 모두 도시로 올라오는 판인데 누가 그것을 보겠느냐고요. 그런데 이PD가 그래요. 흔히 드라마에서 보는 갈등·복선 등은 배제하고, 드라마를 보는 동안 한 편의 잔잔한 수필을 읽는 것 같은 작품을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더라고요. 사람의 가슴을 잔잔하게 적셔주는 ‘비극’(非劇)은 될 만하다, 세상이 가팔라지고 억세지고 물질화되어 가는데, 농촌이 갖는 풋풋함, 정서, 풍속, 인심을 그리면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 선생님은 ‘전원일기’가 최장수 드라마로 자리잡는 기초를 다진 셈인데요. 초대 작가로서 ‘전원일기’의 장수 비결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재미있는 것은 극중 일용네(김수미 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때 김수미를 노역 출연자로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김수미 씨는 아시는 대로 굉장히 서구적인 외모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뭔가 색다른 캐릭터의 배역을 한 사람 두자고 했더니 이PD가 받아들였습니다. 주연 같은 조연 아니었습니까. 나머지 배역들도 TV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 중에서는 다들 연기파여서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는 작가로서 농촌의 아픔도 그리고 싶었는데 그때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잖아요.”

― 그래서 1년 만에 ‘전원일기’ 집필을 그만두게 됐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그랬습니다. 뜻이 좋아 시작은 하지만 대신 나는 본궤도에 오르면 다른 작가에게 물려주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자고요. 왜냐하면, 나는 연극이 전공이고 방송작가가 아니잖습니까. 내가 갈 길은 연극이지 다른 길이 아니니까요. 다행히 기획 의도가 맞아떨어져 1년 만에 ‘전원일기’ 드라마가 좋아졌잖아요? 주간극으로 매회 다른 작품을 써야 했는데, 그것을 희곡으로 썼다고 생각하면 손실이 너무 크잖아요? 바뀐 김한영 PD는 내가 서운한 것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고 자꾸 말리더라고요. 내가 그랬죠.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했고, 첫 작품 제목이 ‘박수 칠 때 떠나라’ 아닙니까? 세상살이라는 것은 남들이 잘한다고 할 때 자리를 내놓아야지 우쭐대면 인기가 떨어진다는 말을 했습니다. 당시 시류를 그릴 수 있었던 것에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전원일기’가 1,000회를 돌파했을 때 자축연이 있었습니다. 나도 초청받아 갔는데,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의 기획 의도와 빛깔이 바래고, 정작 해야 할 말을 못하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 ‘전원일기’가 막을 내렸을 때 많이 서운하셨겠습니다?

“조금 아쉽기는 했죠. 하지만, 노추(老醜)라고, 늙어 추해지는 것도 있거든요. 너무 오래돼 우려먹어 진을 빼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잖아요? 진작 끝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도 끊고 맺는 것이 있어야지, 질질 끌다가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당사자들도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작가가 고갈된 거죠.”

“정부가 예술인 대접 잘못한다”

― 선생님은 1981년 일찌감치 예술원 회원이 되셨고, 95년 부회장, 99년 회장 등을 역임했는데 나라에서 예술인 대접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 겁니까.

“아니죠. 예술인 대접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관광부) 장관한테도,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대놓고 그런 얘기를 했는데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고향도 같고 그래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듣기에는 문화예술에 굉장히 관심이 있는 것으로 돼 있고, 또 박지원 장관 때 예산 지원을 얼마만큼 올리는 고무적인 일도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정말로 김대중 정권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다면 1명의 장관이 최소한 3년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에서 주무장관이 5명이나 바뀌었습니다. 1년에 한 명 꼴로요. 거기다 장관 중 전문가가 누가 있었습니까. 소설가 김한길 장관 정도 빼놓고는 전부 정치인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창동 장관이 임명된 후 내 뜻을 알고 ‘3년은 길고 2년만 하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2년도 안 돼 또 바뀐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말짱 거짓말입니다. 이 정권도 안됩니다. 내가 문예진흥원장을 1년7개월(1998년 3월∼2000년 1월) 했지만, 그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 방금 언급한 이창동 감독이 문광부 장관을 하는 데는 찬성합니까.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했죠. 작가니까. 작가정신이라는 것은 창조할 수 있으니까요. 작가는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데까지 눈길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다만, 이장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이 정권의 팀원 가운데  ‘네가 하라’고 내보다시피 해서 나왔다는 게 잘못된 것이죠.”

― 외람된 질문이지만 예술원이 원로 예술가들의 노인당처럼 우리 눈에 비치기도 하거든요. 예술원의 본래 기능이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각 분야 원로 예술가들의 예우 기관입니다. 그 기능 가운데 국정 정책을 세울 때 자문에 응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국정 기관이 예술원의 자문을 받았느냐? 안 해요. 장관이 바뀔 때마다 그 얘기를 했거든요. 그 기능이 없으니까 밖에서 보기에 한 달에 얼마씩 받아먹는 양로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 한 달에 120만 원인가 줘요. 그런데 그게 예우의 전부인가. 나이를 먹은 만큼 노하우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가 그것을 뽑아 써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은 예술원 자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정부가 예술원 회원을 써먹지 못하는 겁니다. 50∼60년 동안 예술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예우해 주려면 정부에서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대놓고 하는 얘기입니다. 예술원 회원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안 해요.”

― 선생님의 인생에, 작품세계에 고향이라는 존재가 영향을 미쳤습니까.

“소재의 대부분이 고향과 그 주변입니다. 구체적으로 ‘산불’은 영암이고, ‘밀주’는 흑산도, ‘귀향’은 해남 우수영입니다. ‘학이여 사랑일레라’는 목포 삼학도고요. ‘갈매기 떼’도 목포가 배경이죠. 아무래도 고향에 정이 가고 예뻐 보이지 않습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기서 자꾸 무엇을 캐내게 되죠. 소설가도 그렇잖아요. 늙어서는 고향에 가서 작품도 쓰고요. 나도 고향으로 내려갈까 생각도 해봤는데 현실이 여의치 않습니다.”

차범석의 목포 옛집은 안채만 사라진 채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차범석은 애초에 이 집을 사서 목포시에 기증한 뒤 문화살롱처럼 운영해 보려는 꿈을 꾸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연극 관련 자료도 그곳에 전시해 놓고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차범석은 말했다. 그러나 차범석의 그 꿈은 현재로서는 먼 곳에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이 ‘만만찮은 값’을 부르기 때문이다.

“우선 그럴 돈이 없고, 내가 내려가 살려는 것도 아닙니다. 현지에서는 목포시에서 매입해 지방문화재처럼 운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성격상 남에게 기대는 것은 싫습니다.”

― ‘빚 없는 삶’이 선생님의 가훈이라고 돼 있습니다. 좀 독특해 보이는데, 정말 가훈입니까.

“실제로 우리집 가훈입니다. 남한테 절대로 기대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자수성가가 내 생활 목표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버지가 부자였지만 내가 물려받은 유산은 한푼도 없습니다. 목포에서 분가해 서울로 올라온 뒤 하숙도 치고 내 처가 삯바느질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피땀 흘려 모은 것이 내 재산이지, 공짜로 얻은 재물은 공짜로 나가는 법입니다.”

― 취미가 영화감상으로 되어 있는데, 요즘도 자주 보십니까.

“자주 보죠. 극장에 가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위성방송을 봤거든요. 일본 위성방송에서는 우리나라에 못 들어온 영화를 매일 방영합니다. 해방 후 몇 년 동안 일본에 못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나왔던 작품을 보는 게 요즘 낙입니다.”

편리한 것 거부하는 ‘3無주의자’

차범석은 올해 80을 꽉 채웠다. 그러나 작품도 쓰고, 강의도 하는 그야말로 ‘당당한 현역’이다. 건강 비결을 묻자 첫 마디가 ‘소식주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차범석은  ‘3무(無)주의자’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나섰다.

“자가용 없는 것, 휴대전화 없는 것, 신용카드 없는 것 세 가지입니다. 나는 편리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에서도 휴대전화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으니까요. 내 대답은 ‘자기들이 필요하면 찾아오겠지’라는 것입니다.” 차범석에게는 남은 꿈이 하나 있다. ‘제대로 된 소극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꼭 해보고 싶습니다. 누가 조금만 도와준다면요. 요즘 소극장은 대극장과 똑같이 상업적으로 운영되어 구분이 모호할 만큼 뒤죽박죽입니다. 소극장이란 좁은 공간에서 돈 안 들이고 몇 사람이 나와 연극을 하는 겁니다. 말 그대로 소극장 정신에 충실한 형태로 운영해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소극장 정신이 살아 있지 못해 꽃피우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정신운동입니다. 예술운동입니다. 거기서 번져나와 오늘날과 같은 기성 연극을 엎어버릴 수도 있고, 사회를 개혁할 수도 있는 겁니다.

― 일생을 통틀어 지금까지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한 것이 있습니까.“내가 못한 것?  뜨거운 사랑을 못해봤지.”

차범석은 이 농담을 꺼내놓고는 모처럼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사랑’에 대한 아쉬움인지, 아니면 새로운 갈구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차범석이 앞에서 말한 ‘당당한 현역’을 새삼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2004년 07월호 | 입력날짜 2004.06.17

[출처] [한국 지성과의 대화] 차범석 극작가|작성자 이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