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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익(金之益,1685~1746) 본관 상산. 김천시 농소면 율리 거주.
<열락재 유고 3권> 개인소장
번역 : 카페지기(김진곤)
逰金烏山錄(유금오산록)
금오산을 여행하고 기록하다
상산인 김지익(金之益,1685~1746)
環仁善皆山也, 其東南諸峯 林壑尤羙 望之蔚然而明秀者 金烏也. 斗起乎平野之中 半落乎靑天之外 而洛水徑其東 鑑湖扶其西. 山之磅礴 水之淸淑 與之配合 眞吾東方絶勝之名山也.
인동과 선산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산 중에, 그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숲과 골짜기가 아름답고 전망이 성대하고 아름다운 곳이 금오산이다. 평야 가운데 우뚝 솟아 푸른 하늘 바깥에 반쯤 떨어져 있듯한데, 낙동강이 그 동쪽을 지나가고 감호가 그 서쪽을 떠 받치고 있다. 산은 바위로 험준하고 물은 맑고 깨끗하여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이 참으로 우리 동방의 절경으로 이름난 산이다.
山之以金烏名 抑不知何義 而扶桑在其下 若木附于近 而山既最高 境甚明豁 朝日之出寅賓, 毎旱無乃以日中金烏取而爲名者耶. 古賦云 折若木而拂日 又日掛扶桑之紅旭 然則以扶桑名驛 若木名村 以金烏名山者. 盖亦以其類稱之而著 此名境之聚扵一區者歟.
추측해보면 산을 금오로 이름 지은 것이 어떠한 뜻인지 알 수 없지만, 부상이 그 아래에 있고 약목이 가까운 곳에 붙어있으며, 산의 최고 높은 곳은 터여서 아침 해가 뜨면 공손히 인도하여, 매번 가뭄이 이르지 않도록 해 속의 금오를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고부에 전하기를 “약목의 가지를 꺾어 해를 치켜 올려서, 해를 부상에 걸어서 빛나게 한다.” 하였기 때문에 부상으로 역의 이름을 짓고, 약목으로 마을 이름을 짓고, 금오로 산 이름을 지었다. 대개 그 동류를 칭하여 이름을 드러내고, 이 유명한 구역에 모여 한 구역을 이루었다.
*부상(扶桑) : ①해가 돋는 동쪽 바다 ②中國 傳說에서, 동쪽 바다 속에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나무 ③ 김천시 남면의 고개명칭 *약목(若木) : ① <산해경>에 나오는 신령한 나무로, 흑수와 청수 사이에 있다함. <회남자>에는 곤륜구의 서쪽에 있다고 함 ②지명. 칠곡군 약목면 *조일지출(朝日之出) : 해돋이 *절약목이불일(折若木而拂日) :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약목의 가지를 꺾어 태양이 지지 못하게 후려쳐서, 잠시 동안 여기저기 한가하게 소요해 볼거나.[折若木以拂日兮 聊逍遙以相羊]”라는 말이 나오는데, 약목(若木)은 해가 지는 곳에서 자라는 푸른 잎사귀에 붉은 꽃이 피는 나무라고 한다. *홍욱(紅旭) : 떠오르는 해
尋其主脉 以長伯爲太祖 太白爲中祖 頭流爲小祖. 一脉逶迤乎 牛峴爲佛靈, 自佛靈而爲白馬 自白馬而過峽于扶桑巖峩突兀 如飛鳥之奮翮冲宵 如朝暾之湧出海門 名以金烏者 亦以是乎. 獨無玉兔之爲名似可小欠 而造化既無全功 地號之關一亦無足恠也.
그 주맥을 찾으면 장백산이 태조이며, 태백산이 중조, 두류산이 소조 이다. 일맥이 구불구불하다가 우두령이 불령산이 되고, 불령산에서 백마산에 이르고, 백마산에서 지나다가 좁은 부상에서 바위가 솟아오르는 것이 무릇 날아가는 새가 날개를 떨쳐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고, 아침 해가 해문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같아서 금오라 이름하였는데 이 또한 옳지 않은가. 옥토끼로 이름 지은 것이 하나도 없어 작은 흠일 수 있지만, 조화옹이 온전히 이룬 것이 없다면 땅 이름과 관련된 것이 하나인 것 역시 의심할 수 없다.
*충소(冲宵) : 척추의 꼬리뼈 부근의 혈 *조돈(朝暾) : 아침에 떠오르는 해 *해문(海門) : 두 육지 사이에 끼어 있는 바다의 통로 *옥토(玉兔) : 옥토끼 /달(月) ※金烏玉兔 : 해와 달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해 속에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 옥토끼가 있다는 전설☞월항,월명 등의 지명이 주변에 있음.
地當要衝 天惟設險, 鐵壁磨穹 粉堞連雲 南倭北狄 莫敢誰何. 壯哉. 關防誠我國之寶也. 然吾○王修德 威武遠暢 山磎之高 奚足可論呼.
땅이 요충이 되면 하늘은 험한 곳을 설치하니, 철벽이 하늘에 맞닿고, 분첩은 구름에 이어지니 남쪽 왜구와 북쪽 오랑캐 누가 감히 어찌하리오. 장하도다. 관방은 참으로 우리나라의 보배이다. 그래서 우리 〇왕께서 덕을 닦아 위무를 멀리 펼치는데 산과 골짜기 우뚝하다고 어찌 충분히 논하지 않으리오.
地不能自勝 因人而腞 玆山之一層增重 何莫非冶老之淸風也. 惟我先生以麗代之名賢 當鵠嶺松老之日 有鳳翔千仭之志 荷衣蕙帶 返其初服 開門山下以終餘年. 先生古之夷齊 首陽今之金烏也 倘非夷齊之採藢首陽. 何以稱高. 苟無先生之閉門 金烏何必增重乎.
땅은 스스로 빼어날 수 없기에 사람으로 인해 새겨지는데, 이 산이 한층 더 중하게 된 것은 야노의 청풍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우리 선생은 고려의 명현이었다. 곡령의 소나무가 늙어진 때에, 봉황이 천길을 날던 뜻을 가지고, 연잎 옷 혜초띠였던 처음 복장으로 돌아와 산 아래에 문호를 열고 여생을 마쳤다. 선생은 옛날의 백이 숙제 같고 수양산은 지금의 금오산 같다. 백이숙제가 토란을 캐던 수양산이 아니라한들 어찌 높게 칭하지 않겠는가. 선생의 폐문이 없었다면 금오산이 어찌 중하게 되었겠는가.
*곡령(鵠嶺) : 송악산을 말함 *하의혜대(荷衣蕙帶) : 연잎 옷 혜초 띠. 신선의 옷을 형용한 말로 《초사(楚辭)》 〈구가(九歌) 소사명(少司命)〉에 “연잎 옷에 혜초 띠 매고 갑자기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네.[荷衣兮蕙帶, 儵而來, 忽而逝.]”라고 보인다.
家扵玆山之下 起居飮食 與山接也. 以至近求一觀宜易易焉焉 而塵臼苦海 未能擺脫 聸望雲山 徒勞夢想矣. 壬戌之秋九月 既望忽挑山水之興 與客携笻思一登賞. 今吾衰甚矣 脚力似難支而病痹, 秋風心壮 落日攀木縁岩 盡日登陟, 而足不一跌 步不一仆 白雲上山 身亦隨雲矣.
집이 이산 아래에 있어 먹고 살면서 산에 접해 있었다. 지근에서 한번 여행하는 것이 마땅히 쉬웠지만, 세상의 고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운산을 우러러보며 부질없이 꿈을 꾸었다. 임술년(1742년) 가을 9월에 그동안 바라던대로 홀연히 산수의 흥에 도전하여, 나그네들과 지팡이를 짚고서 한 번 올라 감상할 것을 생각했다.
지금 나는 매우 쇠하였기에 다리 힘은 지탱하기 힘들 것 같고 병으로 저렸지만, 가을바람에 씩씩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햇살에 나뭇가지를 잡고 바위에 붙어 종일토록 올라갔다. 발은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걸음은 한번도 넘어지지 않으면서 흰 구름이 산을 오르니 몸 역시 구름을 따라갔다.
自卑登高 仰望咨嗟 而寸步纔窮 天地軒豁. 始得觀覽之富 終副宿昔之願矣. 山經地誌 茫昧非受, 氣象千萬 巨細難悉, 試以團辭 欲爲提挈, 粗敍所覯 掛一漏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오를 때에는 올려보고 탄식하였는데, 몇 발자국 걸음을 다하자 천지가 훤히 트였다. 비로소 여행의 풍성함을 얻으니 지난날의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산의 경로와 지지는 아득히 어두워 볼 수가 없었지만, 기상은 천만가지 여서 크고 작음을 다하기 어려웠다. 글을 모두 모아서 시험하고자 대강이라도 묘사하고 싶어, 그 만난 바를 거칠게 구성하여 하나만 쓰고 나머지는 줄인다.
*단사제설 궤일만루(團辭提挈 掛一萬漏) : 어떤 일의 일부분만을 언급하고 전체는 빠뜨린다는 뜻으로, 주도면밀하게 일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남산(南山)〉 시에 “여기에 관련된 기록들을 모두 모아서 대강이라도 묘사해 보고 싶었지만, 일부분만을 언급하게 될 뿐 전체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고 생각되었다.[團辭試提挈 掛一念萬漏]”라는 표현이 있다. 《韓昌黎集 卷1》
盖嘗登山而周覽 則滿城撲地者 公廨民家也. 畵閣朱毫隱映乎 雲間者鎭南梵宇也. 疊榭層欄下臨乎 無地者將軍坐臺也. 城頭翼然者 四方表樓也. 岩底澄碧者 列邑溝池也. 萬丈層峰高揷天中者 候望臺也. 余登其上 東江一帶 南徼千峰 森羅眼底 山戎島夷在吾目中 臺之名以候望者此也.
산을 올라 감상하며 두루 돌아보니 성에 가득한 것은 관청과 민가였다.
화각의 단청 빛이 은은하게 비치며 구름 사이에 있는 것은 진남사이다. 이층 난간에 이층 지붕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공중에 있는 것이 장군 좌대이다. 성 위에는 나는 듯한 누각이 사방에 드러나고, 바위 밑에는 맑은 물이 여러 읍의 주지이다.
만장의 층층 봉우리가 하늘에 높이 꽂혀 있는 것이 후망대이다. 내가 그곳에 올라 동쪽 강 주변과 남쪽 봉우리를 살펴보니, 삼림이 눈 아래 있고 산융과 도이가 눈 안에 있었다. 대의 이름을 후망대라 한 것이 이것이다.
*구지(溝池) : 성곽의 해자(垓子)
百尺寄岩屹立城東者 藥師峰也. 峰形如佛形成三並 峙峰下有小庵, 庵中坐藥師佛 故號藥師峰也. 峰非山也是石也. 旣非禹斧之所鑿 無乃神斤之所斵者耶.
성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백척의 기암이 약사암이다. 봉우리의 모양이 부처의 모양으로 세 개가 나란히 있고 우뚝 솟은 봉우리 아래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암자에는 약사불이 앉아 있어서 약사봉이라 부른다. 봉우리가 산이 아니라 돌이니, 우임금이 도끼로 뚫어낸 것이 아니라 신이 도끼로 깎아낸 것이 아니겠는가.
*우부지소착(禹斧之所鑿) : 우(禹)가 천하의 하천(河川)을 개척할 때 용문산(龍門山)을 도끼로 끊었다 하여 우부(禹斧) 또는 우착(禹鑿)이라 한다. 《淮南子》
庵行數里許有寺 名曰寶峰. 開窓憑檻 眼豁心淸 玆盖金山之弟一勝. 槩而壁上曾有題詠 其曰, 東江一帶鷗邉色 南徼千峰雁外秋者 吳使君道一之詩也. 其曰, 閑穿樹色僧歸院 冷踏山光客上樓者 金丞旨洪福之詩也. 惟此二公之詩 足以爽人 牙類詩得 江山之助寺有 顔色之生名區. 勝觀老在扵此矣. 中間寺灾 今始重剙 而詩偏尙未更揭 奐展無常 堪可慨然.
암자에서 몇 리를 가면 절이 있는데 이름은 보봉이다. 창을 열고 난간에 기대니 눈이 커지고 마음이 맑아지는데 이것이 김산의 제일 좋은 경치이다. 벽 위에는 일찍이 제목을 붙혀 읊은 시가 있는데 그 제영에 “동강 일대는 갈매기 노니는 모습이고, 남쪽 천봉을 돌아보니 기러기 날아가는 가을이네.”하였는데, 오사군 도일의 시이다. 그 제영에 “나뭇잎 한가히 뚫고서 스님이 돌아오고, 산 풍광 시원하게 밟으며 나그네 루에 오르네.” 하였는데 김승지 홍복의 시이다.
이 두 분의 시를 생각하면 충분히 사람을 시원하게 하여 아류의 시를 얻으니 “강산이 도와서 절이 있고, 안색이 피어나는 이름난 곳을 늙어서 이처럼 여행하게 되었네.”하였다. 중간에 절이 불에 타서 지금 중창을 시작하였으나, 시편을 여전히 다시 걸 수 없으니 절을 새롭게 하는 게 무상하여 매우 탄식하였다.
*오도일(吳道一,1645~1703) : 본관 해주, 세칭 東人 三學士로 불림. 西坡集卷之五 / 詩○星山錄 壬申夏에 위의 시가 수록되어 있음. *김홍복(金洪福,1649~1698) : 본관은 김해. 호는 동원(東園). 父 헌납 덕승(德承). ※오도일이 성주목사로 있을 대 선산에 유배되어 있던 친구 김흥복과 두 고을의 경계인 보봉에서 만나서 회포를 풀었던 이야기 있음.
山北懸崖有道詵窟在乎. 絶壁之上 啼猿飛鳥亦愁攀援 自非身具羽翼莫可飛上. 故只聞其名 未見其中 而古人傳言 道詵嘗栖身于此. 此說近扵桃源之荒唐 吾斯之未信也. 北城之下 倉庚崇崇 米栗陳陳 是大惠倉也. 人之大命 國之關防 其在斯欺.
산 북쪽에 현애는 도선굴이 있는 곳이다. 절벽 위는 울부짖는 원숭이나 나는 새도 잡고 올라가기 힘든데, 몸에 날개가 없는데 어찌 날아오르겠는가. 그래서 단지 그 이름을 들었을 뿐 그 가운데를 보지 못했는데, 옛사람이 전하는 말에 “도선이 예전에 여기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무릉도원의 이야기처럼 황당하여 나는 이것을 믿지 않았다.
북성의 아래에 꾀꼬리가 높이 나는 곳에 쌀과 곡식을 늘여 놓았는데 이곳이 대혜창이다. 사람이 맡은 큰일과 나라를 지키는 관문이 그 곳에 감추어져 있다.
*창경(倉庚) : 《시경》 〈칠월(七月)〉에 “봄에 햇볕이 비로소 따뜻해져 꾀꼬리가 울거든〔春日載陽 有鳴倉庚〕”이라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꾀꼬리를 ‘창경’이라는 이칭으로 표현하였
倉之下洞之中 碑屹然有竹蒼愁. 碑是冶隱之閭表 竹乃先生之手種. 高山蒼蒼 江水浤浤 一絲淸風 千古竪髮. 倚碑而摩挲 撫竹而盤桓 佇立遺墟 終日不去. 事有曠世而相感 心故嘘唏而不禁矣.
창고 아래 마을 중간에 비석이 홀연히 솟아 있는데 대나무가 무성하여 깊다. 비는 바로 야은의 정려를 나타내며, 대나무는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다. “높은 산은 푸르고 강물은 넘실거리니, 한 줄기 고결한 바람 오래도록 머리털이 곧추세우네.” 비에 기대어 쓰다듬다 대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다가 유허에 우두커니 서서 종일토록 가지 못하였다. 시대는 다르나 서로 느껴져 마음의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削立東南 嵂屼撑空者 孤雲之伽倻也. 聸想其仙風道骨, 恨未得攀笙鶴而承眞訣也. 西之黃鶴 曹先生梅溪之所逰賞也. 東之逰鶴 張先生旅軒之所栖息也. 苞山之琵瑟 達成高丘 郭翁忘憂之所. 鍾靈徐公樂齋之考樂所也. 吳山之前 洛江之濱 院宇屹立 冶老之所安靈 而其上盖有冶隱旅軒二先生塚云.
동남방에 깎아지르듯 허공에 우뚝한 것은 고운 선생의 가야산이다. 그 선풍도골을 우러러 생각하면,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한 한으로 선학을 잡고 진결을 이었다.
서쪽의 황학산은 매계 조선생이 노닐며 감상하던 곳이다.
동쪽의 유학산은 장선생 여헌이 머물던 곳이다.
포산의 비슬산은 달성의 옛 언덕인데 곽망우가 있던 곳이다. 종령은 서락재 공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오산 앞 낙동강 가에 서원이 우뚝 솟아 있는데 야은 선생의 영혼이 편안히 계신 곳으로, 그 위에는 야은과 여헌 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서락재(徐思遠,1550~1615) : 주자학 및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침.
院之北江之上磨崖天齊刻以祗柱 斯乃中國楊經理之筆也. 黃河激湍之中 有石屹立 書此祇柱中流四字 以表伯夷之貞節矣. 惟我圃隱先生聘于上國時 舼舟入于河中 摹其字出來 立石于此 書之于石. 旋我冶老之節 亦如華人之慕孤竹也.
원우의 북쪽 강 위에는 ‘지주’를 새긴 마애가 하늘과 가지런히 있는데, 그것은 중국 양경리의 글씨이다. 황하의 급한 물줄기 가운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지주중류’네 자의 글을 써서 백이의 정절을 표현하였다. 생각해 보건데 포은 선생이 상국에 초대 되었을 때, 작은 배로 황하의 가운데로 들어가 그 글자를 베껴 돌아 나와, 이곳에 서 있는 돌에 글을 새겼다. 우리 야은 선생의 절개를 돌아보면 역시 중국 사람들이 숭모하는 고죽(백이)과 같다.
*양경리(楊經理) :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지주중류(祇柱中流) : 중류지주. ‘지주(砥柱)’는 황하 중류의 하남삼문협(河南三門峽) 경내에 있는 높이 10여 미터의 산 모양의 바위이다. 황하의 물결은 삼문협 일대에서 가장 세차게 흐르는데, 여기에서 인문(人門), 신문(神門), 귀문(鬼門) 등의 세 갈래 급류가 형성되어 격랑을 일으키며 돌진한다. 삼문협의 아래에는 산 모양의 지주가 삼문협을 통과한 급류를 막고 서 있는데, 지주 아래로는 강폭이 넓어지고 물결도 평탄하게 흘러간다. 이렇게 격랑을 일으키는 급류를 막고 서 있는 지주에서 유래하여, ‘중류지주’는 역경에도 의연히 버티는 용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수경 주(水經注)》에 의하면, 황하의 이 지주는 우(禹)임금이 치수를 할 때 산언덕이 물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산의 좌우를 파낸 후부터 강물이 산의 양쪽으로 갈려 흘러가게 되었으며, 산의 모습이 물속에 기둥처럼 솟아 있으므로 ‘지주’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洛之賓有岩 名曰不知. 岩之上有院 號以東洛 即旅翁之本院. 院有月臺 風情月來 爽襟淸慮 千載之下 可以挹先生之古風也. 院之東有邑城 即玉山碓府也.
낙강 가에 바위가 있는데 이름을 ‘부지’라고 한다. 바위의 상류에 있는 서원을 동락이라 부르는데 여옹을 모시는 서원이다. 서원의 월대에 달이 뜬 풍정에, 옷깃 여미는 맑은 생각 천년 뒤에도 생겨나니 선생의 고풍을 받들 수 있네. (동락)서원의 동쪽에 읍성이 있는데 옥산을 다스리는 부이다.
府之東有山特立. 山之頭載疂石 如籠樻之積寘 麯子之層儲. 奇形恠壮 嵳峩崑岩 眞天生勝地 名曰天生. 因其石爲城 而龍蛇之變 郭忘憂堂 勦倭勝戰于此. 奪取倭賊之軍械 以爲城庫之蔵 至今守護. 此亦烏山之所眺望 而助其勝賞者也.
옥산부의 동쪽에 특별한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 겹겹이 된 돌을 이고 있는데, 삼태기 흙을 쌓아둔 듯도 하고, 누룩을 층층이 쌓은 듯도 하다. 기이한 모양이 괴이하고 장엄하며, 험하고 높은 것이 곤륜의 바위 같아 참으로 하늘이 내린 뛰어난 땅이기에 이름을 ‘천생’이라 하였다.
그 돌을 성으로 삼았는데 용사지변 때 곽망우당(곽재우)이 왜군을 공격하여 이곳에서 승전하였다. 왜적의 무기를 빼앗아 성의 창고에 감추고 지금도 수호한다. 이것 역시 금오산의 조망이니 좋은 경관을 도와준다.
至若玉林也, 東陽也, 龍澤也, 普提也, 獅子也, 亦山中之佛院. 風景無窮 脚力有限 難遍以足踏而眼閱也. 山之一脈逶遥而南 作爲名山者 即申統制瑠衣冠之所藏也.
옥림(玉林) 동양(東陽) 용택(龍澤) 보제(普提) 사자(獅子)는 산중의 불원이다. 풍경은 끝이 없는데 다리 힘은 한계가 있어 발로 답사하기가 어려워 눈으로 살펴보았다. 산의 한 맥이 꾸불꾸불하게 남쪽으로 이어져 명산을 이루었는데 통제사 신유의 의관이 감추어져 있는 곳이다.
一麓蜿蟺而北爲名基無數 一善之坪城也. 綱障也 鳳溪也. 鳳溪即吉先生胚胎之地也. 鳳溪村前有吉先生旌閭碑, 藥哥貞節碑, 又有孝子碑, 萬古爲行人之所. 或爲山形翼然 望之如飛鳳歸巢者 乃善府武雀也. 舊廨層疂乎. 山下新城崔嵬於江上美哉. 府也眞嶺外碓鎭也. 况扵黃猿之歲 潢池之變 以此金烏之鎭兵 無血刄而卽破 兹城實嶠南之堡障也.
한 구릉이 가늘게 꿈틀거리다 북쪽에 무수한 명당이 되는데, 일선의 평성, 강장, 봉계이다. 봉계는 길 선생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봉계촌 앞에는 길선생정려비, 락가정절비, 효자비가 있는데 오래도록 객들이 참배하는 곳이다.
혹 산세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 되는데, 바라보면 날아가는 봉황이 둥지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선산부의 무작으로 오래된 관청이 겹겹이 있다. 산 아래에는 새로 지은 성이 우뚝하여 강 위에 아름답게 비친다. 선산부는 참으로 영남의 요해처에 있는 진이다. 황원지세(무신년,1728년)의 변란 때에는, 금오산의 진병은 칼에 피를 흘리지 않고 즉시 깨트렸으니, 이 성은 참으로 교남의 보장이 되었다.
*완선 : 지렁이 *낙가정절비(藥哥貞節碑) : '선산 삼강(三綱)정려'는 문화재자료 333호이다. 삼강정려는 이곳 봉계마을(봉한리)에서 난 충신, 효자, 열녀 세 분을 기려서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도록 나라에서 표창한 징표이다. 충신은 야은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이고, 효자는 부모님을 지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한 배숙기(裵淑綺)이며, 열녀는 남편이 왜구에 잡혀간 후 8년을 하루같이 정절을 지킨 조을생의 아내 약가(藥哥)이다. 이 삼강정려는 경북 구미시 고아읍 봉한3길 28에 있다. *황원지세(黃猿之歲) : 黃은土로 천간의 戊(+),己(-)에 해당. 猿은 申(+)으로 이해는 무신년에 해당함. *황지지변(潢池之變) : 전국적 규모가 아닌 좁은 지역 내의 변란
其北則藍山月巖之古院也. 其東即洛峯之遺祠也. 皆本朝本府名賢之享爼豆者也. 栗里又有影堂 冶老遺眞之所揭也. 月波亭上 明月千秋, 觀水楼下 江水萬頃. 梅鶴亭畔 岩古烟鎖, 洛西亭前 山飛水走. 聸望徘徊 怳揖古君子遺風 斯亦金山之一大觀也.
그 북쪽의 람산에는 월암 서원이 있고, 그 동쪽에는 낙봉서원이 있다. 모두 조선시대 선산부의 명현으로 서원에 배향 되었다.
율리에는 또 영당이 있는데 야로 선생의 유진이 걸려 있었다. 월파정 위에는 밝은 달 영원하고, 관수루 아래에는 강물이 넘실거리네. 매학정 옆의 오래된 바위 안개에 잠겨있고, 락서정 앞에는 산이 솟고 물이 흐르네. 우러러보며 서성거리다, 옛 군자의 유풍에 황망히 읍하니 이것 역시 김오산의 한 장관이다.
*월암서원(月巖之古院) : 1630년(인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이맹전(李孟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1694년(숙종 20)에 사액 *낙봉서원(洛峯之遺祠) : 1647년(인조 2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숙자(金叔滋)·김취성(金就成)·박운(朴雲)·김취문(金就文)·고응척(高應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1787년(정조 11)에 사액.
大抵烏山精氣 皆聚于一善, 一善名賢 古多輩出. 世俗傳 朝鮮人才半在嶺南 嶺南人才半在一善者. 何莫非烏山之旋精 洛水之泄靈乎. 倘所謂 人傑地靈 信而有微也. 望長安扵日下 指鳥嶺扵雲間 窮睇眄扵中天 極娛逰扵睱日. 亦足以滌宕 半世汨沒之塵襟 而履巉岩披 蒙茸悚悚乎 凛凛乎. 不可以乆留 忽臨睨夫舊鄊 亦有思乎故居.
대개 금오산의 정기는 모두 일선에 모이고, 일선에서는 명현이 예로부터 많이 배출 되었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일선에 있다.” 하는 것은 어찌 금오산을 감싸는 정기와 낙수에서 흘러내리는 영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를 일러 인걸과 지령에 대하여 조금 믿을 만 한 것이다.
“햇살 아래 장안을 바라보며, 구름 사이에 있는 조령을 가리키네. 마음껏 눈길 돌려 천지를 바라보며 한가하게 마음껏 여행을 즐겼네.” 반평생 빠져있던 찌든 가슴을 씻어내기에 충분하였기에 가파른 바위 사이를 헤쳐나가니, 무성한 풀이 무섭고 늠름하였다. 오래 머무를 수 없어 홀연히 옛 고향을 굽어보니, 역시 옛날 살던 곳이 생각이 났다.
*망장안어일하(望長安扵日下) :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望長安於日下”등의 구절 있음. *홀림예부구향(忽臨睨夫舊鄊) :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말미에 고국인 초(楚)나라를 그리워하면서 “하늘 위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에 올라와서, 홀연히 옛 고향을 아래로 굽어보노라니, 마부도 슬퍼하고 내 말도 그리워하여, 머뭇머뭇 뒤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네.〔陟升皇之赫戲兮 忽臨睨夫舊鄕 僕夫悲余馬懷兮 蜷局顧而不行〕”라고 마무리한 말이 나온다. 혁희대(赫曦臺)의 혁희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라는 말이다.
遂與客出自西門之下. 少憇于靈妙寺古址 即羅代大唐天寶年間所剏也. 遺墟猶存 庻殿獨立, 石佛古塔 相對無語, 有若普陀之在荆 漢仙之垂淚 亦足以生千古感慨之懷也. 遂乃徐徐而步 寸寸而憩 歸臥草堂 白日己暮矣.
드디어 객들과 함께 서문에서 나와 하산하였다. 영묘사 옛터에서 잠시 쉬었는데 이 절은 신라시대 대당천보연간(742~756)에 창건되었다. 유허가 여전히 남아 여러 전각들이 홀로 서 있고, 석불과 오래된 탑은 서로 마주 보며 말이 없어, 마치 보타가 가시밭에 있어 한선(신선)이 눈물을 흘리듯 하여, 역시 천고의 감개지회가 생겨나기에 충분하였다. 마침내 천천히 걸으며 굽이마다 쉬면서 초당에 돌아와 누우니 한낮이 이미 저물었다.
*영묘사(靈妙寺) : 김천시 남면의 갈항사를 말하는 듯
當初登山之日 只爲眠而不計脚 亦既勞之及. 今還家之後 休吾足而安吾身 始覺仙鄕不在扵山 而在扵房也. 吁, 太史公之窺龍門 探禹穴 非直爲景物役也. 將以書天下之大觀 恢其胷襟 助其文章 則今吾玆山之逰. 亦豈尋常等閑之逰賞也. 孔子曰, 智者樂水 仁者樂山. 吾扵仁智之樂 雖未及聖人之眞趣, 而至扵恢胸而助詩 則己得古人之精粕, 子長畏我乎. 我畏子長乎.
당초 산에 오를 때에는 잠잘 것만 계획하고 다리 힘을 계획하지 않았는데 역시 이미 피로에 이르렀다. 지금 집으로 돌아온 후에 다리를 쉬고 몸을 편안히 하자, 비로소 선향은 산에 있지 않고 방에 있음을 깨달았다.
아. 태사공(사마천)이 용문을 살피고 우혈을 찾은 것은 비단 경치 역할만이 아니었다. 장차 천하의 대관을 쓸때에 그 흉금을 넓혀 그 문장을 돕고자 한 것인데, 지금 내가 이 산을 여행한 것과 같다. 어찌 찾은 바를 등한시 하는 것이 여행의 감상이겠는가.
공자께서 이르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긴다.”고 하였다. 내가 어짊과 지혜를 즐기는 것이 비록 성인의 취미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슴을 넓히고 시를 지어 이미 옛사람의 정수를 얻었으니, 자장(사마천)은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자장을 부러워한다.
聸望峻巘 想大禹之神功, 景仰遺址 慕冶老之淸風. 一行中所自得者 誠多且侈矣. 然則與人之徒費脚力兮無 心淂而虛性虛還者 相去萬矣. 噫, 無主者江山 無限者風月也. 取之誰禁 用之奚渴. 觀之非難 知之實難, 樂之尤難. 今吾之觀之知之亦不下古人 而其扵樂之深 何敢望聖人乎分留. 物色之一半以竢日 後之觀者 苟能觀山而軆其厚重 臨水而悟其周流 則其扵仁智. 庶得其一端 而必將徐造乎. 道隨處而逢源矣.
가파른 절벽을 바라보며 대우의 신공을 상상하고, 남긴 자취를 우러러보며 야노의 청풍을 그리워하였다. 한번 떠난 여행에 얻고자 한 것이 참으로 많고 화려하였다. 그래서 사람과 함께 하면서 다리 힘의 소비가 없었다. 마음이 가득했다가 비워지고 성품이 허로 돌아오는 것은 서로 차이가 크게 난다.
아! 주인이 없는 것이 강산이고, 끝없는 것이 풍월이다. 취하는 것을 누가 금하고 사용한다고 어찌 마르리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알기는 실로 어렵고, 즐기기는 더욱 어렵다. 지금 내가 보고 아는 것 역시 옛사람보다 못하지 않지만, 그 즐기는 깊이가 어찌 감히 성인이 남긴 것을 바라보겠는가.
물색의 반은 날을 기다리니, 뒤에 살펴보는 이가 진실로 산을 보면서 그 중후함을 체득하고, 물에 임하여서는 그 흘러감을 깨닫는 것은 인과 지에 기인한다. 그 일단을 두루 얻었으니 반드시 장차 천천히 만들어 낼 것이다. 도는 이르는 곳마다 근본을 만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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