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왕인 박사, 그는 누구인가?
왕인 박사는 백제의 박사벼슬을 지낸 인물입니다. 여기서 박사의 의미는 현대의 학위가 아닌 유교식 관직명이지요. 왕인 박사는 아직기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초빙하여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천자문(千字文)』은 4언절구 한시(漢詩)이자 대표적인 한문 습자교본이지요. 여기서 논란이 될만한 부분은 『논어』가 아니라 『천자문』입니다.
왜냐하면 『천자문』이 언제 생겼느냐에 따라 왕인 박사가 일본에 ‘언제’ 이것을 전파했을지를 짐작해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천자문』의 탄생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지요. 하나는 중국 삼국시대 서예가이자 정치가인 종요(鍾繇, 151~ 230)가 이미 『천자문』을 지었다는 설입니다. 다른 하나는 통설대로 저자가 주흥사(周興嗣, 470~521)라는 학설이지요.
주흥사는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양나라 무제 시절의 학자입니다. 때마침 시대가 백제 국왕인 무령왕과 같은 시대이지요. 무령왕은 서기 462~523년에 살았던 인물이니 주흥사와 나이 차이는 있어도 동시대 인물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왕인 박사의 학문 전파는 종요 『천자문』설에 비해 상당히 늦어지게 되지요.
참고로 종요는 저 유명한 『삼국지연의』의 인물인 위 무제 조조의 신하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종요가 『천자문』이라는 저서를 만든 사람이라면 왕인 박사가 기존에 알려진대로 근초고왕 때 인물이라 하겠지요. 그렇지만 주흥사가 『천자문』을 만든 사람이라면 백제는 상당히 늦게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한 셈입니다.
② 왕인 박사에 대한 기록은?
인지도에 비해 왕인 박사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일본 기록이고 한국 사람이 쓴 기록은 가뭄에 콩나듯하고요. 그것조차도 많지도 않습니다.
옛날에는 (일본에) 문자가 없었는데, 우리의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백제(百濟) 사람 왕인(王仁)이 서적(書籍)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하고 있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3권 「학술(學術) 7칙」 |
『일동기유』는 개화기 혹은 근대시기의 문신인 김기수(1832~1894)가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서기 1877년에 작성한 견문록이자 사행록입니다. 견문록(見聞錄)은 보고 들은 지식을 기록하여 놓은 글이지요. 사행록(使行錄)이란 외국 특히 중국에 나가 체험한 것을 자유롭게 기록한 글입니다. 이 『일동기유』는 김기수가 곡산군수로 있을 때 정리한 글이지요.
즉 일본에 갔다 온 다음 해인 서기 1877년 2월에 황해도 상산(象山)인 곡산에서 군수로 있을 때 쓴 글이라는 말입니다. 조선이 강화도조약을 맺은 해인 서기 1876년에 수신사 7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에 다녀왔지요. 어떻든 김기수가 왕인 박사에 대해 ‘창작’을 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왕인 박사에 대해 일본에서 어떻게든 정보를 접했고 그것을 기록했다 하겠지요.
백제의 군주 초고왕(照古王)이 한 쌍의 말을 아치키시[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바치게 했다. 또 검과 거울을 바쳤다. (오진 덴노가) 백제에 현명한 이가 있으면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 명을 받아 바친 사람이 와니키시[화이길사(和邇吉師)]이다. 이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도합 11권을 함께 가져와 바쳤다. 『고지키[고사기(古事記)]』 중권(中卷)6 「오진 덴노[응신천황(應神天皇)] 조」 |
여기서의 아치[아지]라는 인물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는 아직기입니다. 아직기라는 이름은 『니혼쇼키[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나오지요. 와니[화이]라는 인물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인(王仁) 박사 바로 그 사람입니다. 초고왕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근초고왕일 것이고요. 연대라던가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한편 키시[길사(吉師)]는 족장(族長)을 나타내는, 공경하는 뜻으로 부르는 칭호 즉 경칭(敬稱)이라고 합니다. 백제에서 국왕을 뜻하는 건길지(鞬吉支)의 ‘길지’는 ‘길사’(kishi) 에 해당될 수 있다고 하지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백제어로 왕을 ‘Koni-Kishi’ 혹은 ‘Kokishi’라 부른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Kishi’와 ‘길사(吉師 kishi)’는 동일한 말로 볼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길사(kishi)’는 백제어로 왕 또는 그와 동격의 존칭어였다 하겠습니다. 이상의 주장에 대한 출처는 『위례문화 10호』(2007년)이고요. 왕권이 강화된 근초고왕 시대 혹은 그 이후 시대상을 감안하면 길사 존칭이 국왕과 동등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렇지만 설령 길사라는 존칭이 국왕과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존칭인 것은 변함이 없지요.
15년 가을 8월 임신삭 정묘(6일)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伎)를 파견하여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다. (중략) 천황이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가미츠케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과 간나기와케(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지키노후비토[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 봄 2월 왕인이 왔다.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 전적(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은 후미노오비토[서수(書首)] 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권제10 「예전천황(譽田天皇;호무타노스메라미코토) 응신천황(應神天皇)」 |
여기서 후미노오비토 즉 ‘서수’는 고대 일본에서 최고 학자를 일컫는 관직으로 보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출처는 「월드코리안뉴스」, 2014.11.10. 09:46 기사이고요. 아지키노후비토라는 말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아직기와 관련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후비토(ふびと, 史)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두 가지 뜻이 있지요. 하나는 서기(書記)나 옛날의 기록관을 뜻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 상대(上代)의 카바네(かばね)의 하나가 후비토입니다. 후비토라 기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귀화인으로서, 기록을 업으로 했다고 하지요. 카바네[姓]는 야마토[대화(大和)]·나라[나량(奈良)] 시대에 씨족의 존비(尊卑)를 나타내기 위한 계급적 칭호입니다. 존비(尊卑)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존귀함과 비천함을 뜻하지요.
이것을 판별하는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카바네였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