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내리는 지도읍 읍사무소가 있는 능곡[토당리]을 기준으로 볼 때 남서쪽에 위치한 법정리의 명칭이다. 좁더 자세하게 그 위치를 살펴보면 행주내리의 동쪽으로는 강매리와 서쪽으로는 행주외리, 남쪽으로는 행주외리와 서울시 그리고 북쪽으로 행신리·토당리와 경계하고 있다. 즉 행주 산성이 있는 마을이다. 행주내리는 행주산성의 바깥 방향에서 바라다 보면 산성 안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본래 행주(幸州)라는 말은 이 곳에 살구나무가 많다하여 향주[살구나무]라 하였으나 후에 한자가 변하여 행주(幸州)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행주내리는 1리, 2리로 행정 구분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논농사·밭농사를 하고 있으나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행주산성 주변에 음식점을 운영하여 생활하는 집들이 늘고 있다.
행주내1리는 행주산성을 기준으로 동북방향 즉, 행신리·토당리 방향에 있는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이 마을의 옛 자연촌락 지명은 성동(城洞)또는 잣골인데 대부분 농사지역으로 논농사·밭농사 위주의 생활을 하였으나 최근들어 대형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마을의 촌락들은 덕양산 기슭에 자연촌락 단위로 형성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병싸개[짚으로 만든 병을 보호하는 기구]를 만들어 생활했다 한다. 이 마을에는 덕수 장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는데 이들이 처음 이곳에 정착한 것은 1566년이라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69가구 70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잿골, 잣골
잿골은 행주내 1리의 옛 자연촌락 지명으로 예전에 이 곳에 죄를 범한 잡범(雜犯)들을 가두어 놓는 굴이 하나 있어 이를 잡골이라고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음이 변하여 잣골, 잿골 혹은 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성곡동(城谷洞), 성동(城洞)
성동(城洞)이라는 명칭은 이 곳이 행주산성의 아래에 있는 동네라해서 붙여진 것이고, 이 동네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으로는 재성 혹은 성곡동 마을인데 이것은 산성이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행주 기씨 비호(행주기씨유허비)
행주산성 북쪽 중턱에 위치해 있는 이 비는 행주 기씨의 행적과 업적을 담고 있다. 이 비의 내용을 보면 고려말 행주 기씨 집안에서 공녀로 뽑혀간 사람중에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 때부터 원나라의 감찰기관을 페지하고 원나라의 힘을 제거한 후에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향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기감천(奇甘泉)
행주 기씨가 이 동네에서 모여 살 때 그 집안 사람들이 먹던 샘물이 있어 이를 '기감천'이라 불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약수로 사용하고 있다.
소화사지(小華寺址)
행주내리에 있던 절터의 명칭으로 행주산성(幸州山城)위 호숫가에 있었으나 지금은 다만 고려(高麗) 인빈의 다음과 같은 시(詩)가 전해지고 있을 뿐으로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초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에 비오는 줄 알겠고, 산에 비오는 줄 알겠고, 돛대가 봉우리 위에 나오니 바다에 바람 있는 줄 알겠다.
기감천, 기씨 바위(기가바위)
앞에서 설명한 기감천 약수터와 기씨 비호 비가 있는 부근에 바위가 몇 개 있는데 이 바위에서 행주 기씨 시조가 태어났다고하여 기씨바위라 부른다. 이곳은 본래 숲이 우거지고 꽃들이 밚아 경치가 좋았으나 지금은 행주산성 내에 있어 옛 모습이 많이 변하였다.
⊙ 망곡재
망곡재는 행주산성 입구에서 행주내 2리 방향에 있는 고개의 이름으로 이 고개의 지명유래는, 고려시대에 이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번성을 누리었는데 매번 국상을 당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이 고개에 올라와 당시 수도인 개성을 향해 통곡을 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엄나무고개
행주산성 입구 광장에서 행주내리로 내려가는 작은 고개의 이름인데 엄나무는 가시가 많이 달린,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이 생긴 나무로 옛날엔 엄나무 숲이 우거지고 인가가 드물어서 이 고개는 무척 으슥하였다고 한다. 엄나무 고개는 엄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박우물
박우물은 행주내 1리 마을회관 뒷편에 있는 우물의 이름으로, 우물은 작지만 예전엔 온 마을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 박우물은 바가지로 우물을 떠 먹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행주산성(幸州山城)
삼국시대(三國時代) 이곳에서 일어났던 격전에 대한 기록으로 문헌(文獻)에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현재까지 잔존하는 산성(山城)과 그곳에서 출토(出土)되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와당(瓦當) 및 토기(土器)등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三國時代)때부터 이미 군사전략상(軍事戰 上) 요지(要地)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더구나 삼국정립기(三國鼎立期),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를 둘러싸고 끓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던 사실과, 또 한강유역의 최종 지배권을 획득한 신라(新羅)에 의해 삼국(三國)의 통일(統一)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서 이곳의 전술사적(戰術史的) 가치는 분명하다 하겠다. 그리하여 이 지역 행주(幸州)의 지명유래(地名由來)는 몇차례 변동을 겪게 되었는데, 본래 백제(百濟)의 계백현( 伯縣)이었으나 그 지배권이 고구려(高句麗)로 넘어가면서 왕봉(王逢)으로 개명(改名)되었으며, 다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우왕(遇王)으로 개명(改名)하여 한양군영현(漢陽郡領縣)에 속하게 하였다. 그후 후삼국(後三國)의 과도기를 수습한 고려(高麗)가 건국초(建國初)에 행주(幸州)로 고쳐 현종(顯宗) 9년(1018)에 양주(樣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뒤 조선(朝鮮)의 태종(太宗) 13년(1413)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2현을 합하여 고양군(高陽郡)으로 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적(遊跡) 및 명소(名所)
1963년 10월 18일 사적(史跡) 56호로 지정된 이 행주신성에는 현재 3개의 대첩기념비(大捷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선조(宣祖) 36년(1603) 고 박정희 대통령(故 朴正熙 大統領)이 쓴 친필(親筆)의 큰 비가 건립되어 있다. 또 선조(宣祖)때 세운 산봉(山峯)의 처음 세운 비가 풍화로 마멸될 것을 염려하여 똑같은 모양의 대첩(大捷) 중간비(重刊碑)를 세웠는데 이 비에는 조영연의 추기(追記)가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권율장군(權慄將軍)의 사당인 기공사(紀功詞)가 6.25전쟁때 소실되었는데 그때 충격을 받아 화강석비신(花 石碑身)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그리하여 근래 1970년과 1978년 및 1986년의 3차례에 걸친 대보수쟁화사업(大步修爭化事業)을 통해 새로운 행주산성(幸州山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성 주위에는 충장사(忠莊祠), 삼문(三門), 대첩비(大捷碑), 대첩비각(大捷碑閣), 덕양정(德陽亭), 진강정(鎭江亭), 대첩문(大捷門), 행주산성기념관(幸州山城記念館), 충의정(忠義亭), 권율장군동상(權慄將軍銅像), 충훈정(忠勳亭), 및 관리사무소(管理事務所)의 주차장(駐車 )등이 복원, 전비 또는 신축되어 당시 전쟁(戰爭)의 상황과 선인(先人)의 애국정신을 본받게 하고 있다.더구나 최근 1986년 5월에 개통된 「올림픽대로」의 종착지가 이 행주산성이라는 사실은 이곳에 깃든 조상의 애국정신을 우리 고양군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충장사(忠莊祠)
충장사(忠莊祠)는 행주(幸州) 나루터에 있던 권율장군의 사당인 기공사(紀功祠)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으므로 이름을 고쳐 복원된 것이다. 원래 헌종(憲宗) 8년(1842) 왕명에 의해 세운 행주기공사(幸州紀功祠)와 함께 행주 나루터에 있던 이 사당을 한강의 강세(江勢)가 면하여 홍살문을 세웠던 자리까지 강물이 들어와서 홍공사(紅功祠)가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몇몇 독지가(篤志家)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다시 6.25전쟁 때 소실되어 주초만 남게 되었다. 당시 기공사(紀功祠)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평 11.3평(37.4㎡)이었으며, 그 앞에 9칸의 소규모의 제실을 두고 그앞 15미터밖에 홍살문이 있었다. 사당(祠堂)을 복원함에 있어서 원래 위치가 한강 물줄기의 변황에 영향을 받는 곳이었으므로 다시 그 자리에 세울 수도 없었고, 산성과의 거리가 멀어 격전지 순례자의 참배가 불편할 것도 고려하여 오늘날 과 같이 대첩지내인 산성 안으로 위치를 바꿔 신축하게 된 것이다. 복원된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11.7미터), 측면 3칸(7.8미터), 건평 36.7칸(91.26㎡)의 겹처마 다포집 합각지붕이다. 골재는 마루와 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근콘크리트로 하였고 모서리는 단청(丹靑)을 하였으며 정면엔 빗살문을 달았다. 기단(基壇)은 화강석 장대기단(花崗石 長臺基壇)으로 높이 80㎝이고 앤타시스식 원형기둥 위에 창방주두 (昌枋柱頭) 외에 3포(包) 1출목(出目)의 포를 짰으며 그 위에 굴도리 및 장혀를 받쳤다. 내부는 고주(高柱)로 종보를 보아지로 쌓아 떠받치고 파연대공(波蓮臺工)과 함께 도리와 단연(短椽)을 설치 하였다. 기와는 반달모양의 막새기와를 하고 용마루에는 양성없이 차꼬막이 부고위 7단 쌓기로 마감하였다. 기단에서 3.3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눈 2미터높이의 장대기단(長臺基壇)을 쌓았으며 이로부터 12.5미터 떨어진 곳에 사당 삼문을 세웠다. 그 양측에는 높이 1.5미터의 사고석담장이 32미터의 길이로 뻗어 있다.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은 담장의 높이는 1.8미터이고 그 앞에 150평(495㎡)의 광장이 있고 폭 7.5미터의 진입로가 있으며 그 주위에는 잔듸를 깔았다.사당 옆에 있는 비석(碑石)은 원래 기공사(紀功詞)에 있던 대첩비(大捷碑)의 중간비(重刊碑)를 옮겨 놓은 것이다. 끝으로 충장사편액(忠莊祠篇額)은 고 박정희대통령(故 朴正熙大統領)이 쓴 휘호(揮豪)이다.
삼문(三問)
사당(祠堂) 앞 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7평(23.4㎡) 철근 콘크리트의 맞배 초익공(初翼工) 집이다. 주초 위에 각주(角柱)를 세워 주두(柱頭)와 창방(昌枋)을 얹었고 보 위에는 소슬대공을 얹어 굴도리를 받쳤다. 홑치마 위에 지붕을 얹혔는데 중앙의 칸이 측칸보다 1미터 솟아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문을 가로지른 인방(引紡) 위에 두 짝 대문은 판자(板子)로 짜서 달았으며, 모로 단청(丹靑)을 하였다. 삼문과 광장은 장대석(長臺石) 계단 13단으로 연결하는데 특이한 것은 원래의 사당삼문 (祠堂三門)을 모방하여 2계단의 최상단을 기둥칸 사이로 끝이 나게 한 점이다.담장 축대 밑의 기초는 성토지역이므로 토관 파일박기의 특수공법으로 시공하였다. 삼문 앞 우측 녹지공간에 있는 행주대첩의 한글판 비(碑)는 임창순(任昌淳)이 초역(秒譯)하고 김웅현(金應顯)의 글씨를 새겨 1979년에 세운 것이다.그규모는 2단 기단(基壇) 위에 가로 2.4미터, 세로 1.4미터, 두께 54㎝의 화강석 비신(花崗石 碑身)으로 가로 0.9미터, 두께 25㎝의 오석판(烏石板)을 붙였다.
대첩비각(大捷碑閣)
선조(宣祖) 38년(1603)에 세운 대첩비(大捷碑)에 비각(碑閣)을 세워 보호케 된 것은 일제식민지시대 때였다. 그러나 이때 세운 비각(碑閣)은 10자(子)간의 기본형식을 무시한 조야(租野)한 건물이었으며 게다가 관리의 미숙으로 노후하고 퇴락하였다. 그러나 70년대의 철저한 보수공사(補修工事)로 지금은 철근 콘크리트의 단단한 비각(碑閣)이 다시 세워졌으며 건평은 2.7평(9㎡)이다. 기단(基壇)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내부 바닥은 벽돌을 가지런히 깔았다. 기둥은 원주(圓柱)로, 그 위에 주두(柱頭)와 초익공(初翼工)의 쇠서를 뽑아 냈으며, 모로 단청(丹靑)을 하였고 지붕은 합각(合閣)이며 막새를 사용하였다.
대첩비(大捷碑)
덕양산 정상(德陽山 頂上)에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이 대첩비(大捷碑)는 1963년 8월 15일 경기도민과 각계 유지들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정문에서 정상까지 800미터의 경내 경사도로를 걸어 올라가면 힘들기 때문에 전적지순례자(戰跡地巡禮者)들의 편의를 위해서나 승첩(勝捷)의 감회와 산성의 풍광(風光)을 감상(鑑賞)하게 하기 위하여 이 정자를 신축한 것이다. 되는 거대한 비[기념비]를 떠받치고 있다.
덕양정(德陽亭)
대첩비(大捷碑)로부터 동남방 아래쪽 토성 앞쪽 언덕 길가에 세운 정자이다. 정문에서 정상까지 800미터의 경내 경사도로를 걸어 올라가면 힘들기 때문에 전적지순례자(戰跡地巡禮者)들의 편의를 위해서나 승첩(勝捷)의 감회와 산성의 풍광(風光)을 감상(鑑賞)하게 하기 위하여 이 정자를 신축한 것이다. 사방이 확트인 곳에 위치한 이 덕양정(德陽亭)은, 8모의 3단 평면기단(平面基壇)에 건평 13.3평(44㎡)에 삼익공(三翼工), 화반(花盤)받침을 한 8모집이다. 기둥은 8각의 철근 콘크리트로 했으며, 내부 바닥은 인조석(人造石)으로깔았고 지붕은 8모로 모둠 지붕으로 하였으며 그 위에는 절병통(節甁桶)을 설치하였다.
진강정(鎭江亭)
산 아래쪽 사방이 확트인 곳에 위치한 이 정자는 덕양정과 마찬가지로 전적지순례자(戰蹟地巡禮者)의 편의를 위해 세운 것이며 그 구조도 덕양정과 거의 같다. 그 구조는 삼익공(三翼工)집으로 원형기둥 위에 굴도리를 받치는 화반(花盤)과 굴도리아지가 있고 주두(柱頭)위에 첨자를 두었다. 기단은 장단(長壇)을 놓기 위해 계단이 건물 바닥과 연결되어 있으며 계자(鷄子)난간과 계자난간대가 긴 의자를 겸하게 하였다.규모는 건평 10.9평(36㎡)로 덕양정보다 다소 작으며 겹처마 사모지부이에 절병통(節甁桶)을 올렸으며 역시 철근 콘크리트로 신축하였다.
대첩문(大捷門)
철근 콘크리트로 신축된 대첩문(大捷門)의 규모는 정면 3칸(11.7미터), 측면 2칸(4.5미터), 건평 16평(52.65㎡)의 맞배지붕의 홑처마 집이다. 원형 기등 위에 초익공(初翼工)을 올렸고, 창방(昌枋) 위의 장려(長櫚)사이에 소로를 배열하였으며 나무판문은 철엽(鐵葉)으로 쌓았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 갓돌에다 콘크리트 모르타르로 포장하여 깔았다. 대첩문(大捷門)의 양식은 평삼문(平三門)으로서, 측칸의 문폭은 3.6미터이고 중앙칸의 문폭은 4.5미터 높이는 4.7미터로서 차량이 통과할 수 있게 하였다. 정문 옆에는 사고석 담장을 설치했으며 높이 1.8미터, 길이 32미터로 쌓았다.
행주산성 기념관(幸州山城 記念館)
이 기념관은 1978년 당시에는 덕양산봉 대첩비(德陽山峯 大捷碑)뒤편에 십자형으로 지었으나 그 위치가 맞지않다하여 전적지 순례자(戰跡地 巡禮者)의 편의를 위한 휴게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1979년에 충장사(忠莊祠) 뒤편 언덕의 구무기고(舊武器庫)와 군량창고(軍糧倉庫)가 있던 자리로 여겨지는 곳에 다시 신축된 것이다. 규모는 정면 5칸(14.4미터), 측면 3칸, 건평 39.3평(129.6㎡)의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다. 기단은 화강석(花崗石),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81㎝이고 위에는 벽돌을 깔았으며 기단 중앙에는 3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둥근 초석(礎石)위에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상단 둘레는 40.5㎝, 하단 둘레는 45㎝로서 민흘림 기둥이며 높이는 3.1미터이다. 지붕형은 합각(合閣)지붕에 벽돌로 치장쌓기를 하였으며 용마루에는 자꼬막이 처리를 하였다. 단층의 겹처마로 이익공(二翼工)을 하여 창방(昌枋)위에 화반(花盤)을 얹혔다. 기와는 막새 등 중와 (中瓦 )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건물의 외벽은 역시 벽돌로 치장쌓기를 하고, 내벽은 미장 위에 벽지마감을 하였다. 정면 중앙문 안에 전실(前室)을 두었으며 출입문은 스프링셧터를 설치하였다. 전면에는 바닥에서 1.8미터 높이에서 창방(昌枋) 밑까지에 이르고 고정창(固定窓)을 설치하였으나 후면과 좌우측에는 창이 없다. 밑바닥은 인조석을 깔았으며 천장에는 아스칼텍스를 붙였다.
충의정(忠義亭)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이 충의정은 원래 기념관으로 건립한 것이었으나 위치가 부적당하다 하여 별도로 기념관은 충장사(忠莊祠)위쪽에 신축하고 용도를 바꿔 휴식처를 겸한 충의정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외모는 웅장하고 규모도 매우 큰 편으로 덕양산 정상(德陽山 頂上)의 대첩비(大捷碑)뒤, 최근 헬리포트로 이용하던 평평한 능선에 우뚝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이른바 비루(飛樓)라고 부를 만한 건물이다. 그 규모에 있어서 장대석(長臺石)기단은 높이 90㎝이며 기둥 중심간의 거리는 2.1미터이다. 그 위의 실외 회랑(廻廊)에는 벽돌을 깔고 정면 기둥안 10.18평(33.66㎡)전부는 타일을 깔았다. 건물은 정면 5칸(18미터)의 십자형(十字型)[날개형이라고도 함]집으로 4귀퉁이의 기단은 가로·세로 각 3.3미터씩 모를 죽였다. 휴식처의 면적은 45.08평(149.94㎡), 회랑면적은 39.53평(130.68㎡)로서 총건평은 84.88평(180.62㎡)이다. 건물구조는 한식 단층(韓式 單層), 기와전돌 치장쌓기를 한 합각(合閣)지붕이며 용마루에는 차조 마감처리를 하였다. 처마는 이익공(二翼工)겹처마에다 창방(昌枋)위에 화반(花盤)을 얹고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높이가 3.2미터이다. 치장쌓기한 전벽돌 위에는 산성 아래의 관망(觀望)을 위하여 두 짝미닫이 관망창(觀望窓)을 설치하고 사방에 보두 철제출입문(鐵製出入門)을 설치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하고 그 재료는 아스칼텍스를 썼다.
권율장군 동상(權慄將軍 銅象)
행주산성 대첩문(幸州山城 大捷門)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장군의 동상을 2억8천여만원을 들여 1986년 4월 30일 경기도에서 건립하였다. 장군의 투구, 갑옷, 무기류 등은 임진왜란 전의 것으로 문헌참고와 고증을 통하여 세운 것이다. 또 아래 부조인물(浮彫人物)은 한국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자 하였다. 동상재료는 청동으로 좌대재료는 화강암으로 하였으며 규모와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상(銅像) : 5미터(높이) 좌대 : 3.35(높이)조상(彫像) : 김세중 작(金世中 作) 제자(題字) : 김충현 서(金忠顯 書) 동상명문(銅像銘文) : 허선도 찬(虛善道 撰) 부조명문(浮彫銘文) : 최영희(崔永禧 撰) 부조(浮彫) : 4종, 청동재(靑銅材)
충훈정(忠勳亭)
충장사(忠莊祠) 아래쪽에 위치하여 건너편 산기슭에 과혁판(貫革板)을 설치한 사정(射亭)으로 정확한 소재지는 지도읍 행정외리 116번지이다. 건물구조는 건평 80.32㎡, 정면 5간 측면 3간의 2층누각(二層樓閣)으로 이익공(二翼工)워형기둥의 한식 합각 팔작지붕으로 단청을 들였으며 사업비믐 8천3백7십만원으로 1986년 2월 17일에 준공(竣工)하였다. 권율장군의 후손인 권 이 충훈정 현판(忠勳亭 懸板)을 썼다.
⊙ 미뜨래미산
행주초등학교 뒷편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그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앞성논
앞성논은 성동마을 앞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행주산성 앞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림벌논
행신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푸른 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먹게뜰논
강매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푸른 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떡논
떡논은 강매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예전 이 논 주인이 흉년에 배가 고파 이 논과 떡을 바꾸어 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피논
피논은 이 마을에 흉년이 들어 기근에 허덕일 때 피 3말과 바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떡논과 함께 예전 우리 조상들의 어려운 시절을 알게 해주는 논 이름이다. 자개비논 강매리 방향에 있는 논 이름으로 그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영세이논
자개비논 부근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이 논 주인의 이름인 영세이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장세이논 장세이논은 영세이논 옆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논 주인의 성인 장씨 성(姓)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루무리논 구루무리논은 논뚝의 모양이 구부러져 있어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황논
황논은 논의 흙 색깔이 다른논과 달리 황토색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 덕양산
행주내리에 위치한 해발 124미터 산이름으로 임진난 당시 우리나라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현장이다. 이 산의 북쪽으로는 행주평야로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한강과 인접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배수진의 싸움터가 되었다.
⊙ 골터
덕수 장씨의 선산이 있는 곳의 소지명으로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태뒷논
벌태뒷논은 이 벌이 있던 곳에 집이 있었고 그 뒤에 (집 뒤) 있던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식해논식해논은 음력 10월에 4대조 이상의 조상에게 시제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되는 식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쌀을 반드시 이 논에서 거두어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턱논
예전 큰 가뭄때에 농사를 짓기위해 용두레로 물을 푸던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길마논(질마논)
길마논은 그 모양새가 소(牛)에 짐을 실을 때 잔등 위에 놓던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절멸산
절멸산은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현재 이 이름은 행주내·외리에 사는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다. 절멸산의 유래는 임진난 당시 이 곳에서 왜군이 절멸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곤개정
성동마을에서 행주산성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던 정자의 이름으로 주위의 나무와 물들로 좋은 경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 절골
절골은 앞에서 소개한 소화사지를 가리키는 듯 한데, 지금은 덕양산 정상에서 난지도 방향으로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후 이 소화사지는 빈대가 많아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옥터밭
행주초등학교에서 웃말마을로 들어오다가 좌측에 있는 밭의 이름으로 예전에 이 밭에 죄인을 가두던 감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황새논 성동마을에서 강매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이곳에 황새가 많이 날아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레물 둥치
성동마을에서 행주산성 정문 방향에 있는 소지명으로 예전 이곳에 두레우물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레물
두레물은 두레물 둥치 앞에 있는 우물의 이름으로 두레박으로 물을 떠 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두레물 뚝
두레물 뚝은 두레물 우물 앞에 있던 논뚝의 이름이나, 지금은 집들이 들어서 있다.
⊙ 아랫말 모탱이
행주초등학교에서 웃말로 들어오는 입구의 소지명으로 길을 돌아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행주대첩비
행주산성 행주대첩비 바로 밑에 오성 이항복의 장인인 권율을 위해서 세운 권율승전비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승전비 옆면에 금이 간 것이 일제식민지시대 때부터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여 해방될 무렵에 이르러서는 더욱 틈이 커졌다 한다. 그벌어진 크기가 손 주먹 하나가 들어갔다 나왔다 할 정도여서 그 안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살기도 했었다는데 해방 이후에는 그 틈이 다시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나뭇가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다시 아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일본에 침략 당한 것을 분노하는 권율 장군의 뜻이 나타난 신기한 일이라고 후세 사람들은 말하며 6∼7월 밤 정각이면 권율 장군이 말을 타고 나와서 달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한다. 비각 옆 담에서는 무서운 밤이면 사람이 지나갈 때 그 사람에게 흙과 모래를 끼얹는다고 한다. 즉, 담 안에서 밖으로 흙과 모래가 던져지는 것이다. 권율이 장난치는 것이라 한다.
행주내2리는 앞에서 소개한 행주내 1리 마을에서 능곡방향 39번 국도 부근에 있는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행주내 1리와 2리의 구분은 대수로를 경계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자연촌락 명칭은 맨돌, 장세이마을이며 대부분 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이 마을의 본래 집성촌을 이룬 성씨는 벽진 이씨로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마을의 촌락들은 자연촌락 단위로 형성되어 있는데 가옥의 구조는 대부분 근·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현재 이 마을에는 1989년 통계로 149가구 6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맨돌
맨돌은 행주내 2리의 자연촌락 명칭으로 능곡에서 행주산성으로 오다보면 왼편에 보이는 작은 마을이 맨돌촌락이다. 맨돌이라는 지명에는 세가지 유래담이 있다. 첫째는 이 곳이 원래 돌이 많은 지역이라서 눈에 띄는 곳마다 온통[맨]돌이라하여 맨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행주대첩(幸州大捷)싸움에서 이곳의 아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들을 담아 아군 병사들에게 날라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라고 한다. 또 하나는 맨돌의 한자명(漢字名)과 연관된 것으로 옛날에 한강으로 배가 다니던 시절에는 지금의 기독교 방송국 뒷편으로도 강물이 흘러 들어서 행주 전체가 하나의 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름이난 주막이 있어 배를 타고 한양으로 일을 보러가던 황해도, 평안도 사람들이 이 곳에 잠시 머물러 목을 축이곤 하였다 하니 그 주막거리가 바로 강매리 강구산(江口山)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곳에 머물기 위하여 배를 댈 때 연안에 있는 커다란 돌에 끈으로 그들의 배를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끈을 매는 돌 즉, 결석(結石)이 있는 곳이라하여 결석리(結石里)라고 부르던가 혹은 순수한 우리말로 맨돌리라 부른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예전에 지금의 행주내리 입구인 삼거리 근처가 매우 질은 진흙탕이었다고 한다. 이 진흙땅은 인근에서도 유명했는데 마차는 물론 사람들도 왕래하기가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햇빛이 조금만 내리쪼이면 금방 질던 길이 마치 돌맹이와 같이 딴딴하게 국어져 결석이라 했다가 맨돌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 성황단(城隍壇)
군(郡) 서쪽 15리 지점과 지도읍 행주리(幸州里) 두곳에 위치해 있다. 일명 서낭당 또는 국수당이라고도 하는 성환단의 기원에 관해서는 중국고대(中國 古代)로부터 토지의 부귀와 번영을 지키는 성지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과 강태공(姜太公) 부인의 넋을 위로키 위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즉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의 명재상(名宰相)강태공은 先 80하여 160세를 살았는데 후팔십 정승으로써 文王을 도와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전인 선팔십세까지는 풀씨앗이나 피죽으로 겨우 연명을 하면서 줄곧 낚시로 소일하며 도를 닦았다고 한다. 하루는 강태공의 부인이 돌피씨를 털어 삶아서 물에 깨끗이 씻어 멍석에 널어 놓고 품팔이를 나가면서 강태공에게 돌피씨를 잘 돌보라고 하였다. 부인이 외출한 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으나 강태공은 이를 돌볼 생각도 않고 낚시질만 계속하여 결국 멍석에 말려놓은 돌피씨는 몽땅 씻겨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부인은 이 광경을 보고 화가나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 후 어느날 남루한 차림의 강태공 부인이 풍악을 울리면서 지나가는 큰 행렬이 있기에 다가가 비로서 강태공 부인은 집을 나온 것을 후회하고 전남편인 강태공에게 달려가 다시 살 것을 애원하였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강태공은 행렬이 언덕에 닿자 행렬을 멈추게하고 부인에게 동이에 물을 길어오게 시키고 그 물을 길에 버리게 한 다음 다시 담으라고 하였다. 이에 부인이 쏟은 물을 어찌 다시 담을 수 있느냐고 하자, 강태공 역시 마찬가지로 지난 일은 다시 되돌이킬 수 없다고 하며 부인의 가출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 후로 지나가는 사람이 돌을 던져 시체를 매장하게 되고 돌보아 줄 자손이 없음으로 해서 오가는 사람의 고가밥을 얻어먹게 된 것이 성황당의 유래라고도 한다. 이와같은 풍습은 오늘날에까지도 남아 길가는 사람은 누구나 돌을 올려 놓거나 침을 뱉거나하여 자기 물건을 두고 지나가는데 이는 성낭신에게 재난을 막고 복을 빌어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한 민간신앙의 뿌리깊은 풍습의 하나라 하겠다.
⊙ 장세이
맨돌마을에서 39번 국도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의 자연촌락 명칭으로 예전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무실우물
을축년 제방공사 때 사무실을 짓고 공사장 인부들이 함께 사용하기 위해 판우물이 이름으로, 마루턱이 논은 논의 위치가 작은 언덕위에 있어 붙여진 논 이름이다. 국마루턱이논 군마루턱이논은 이곳에 경지 정리가 되기 이전에 있던 논의 이름으로, 막루터이논은 논의 위치가 작은 언덕위에 있어 붙여진 논 이름이다.
자재비논
정확한 유래와 위치는 알 수 없다.
방아다리논
예전에 이 논 근처에 물레방아 또는 디딜방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새뜰논
예전에는 논이 아니었으나 새로 만든 논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구렁이논[진구렁논]
논이 다른 논에 비해 매우 질고 또 구렁텅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낙착공이논
낙착공이논은 39번 국도에서 행주내 2리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지금 만들어진 수로끝의 물이 마지막으로 낙차가 크게 떨어지는 곳 부근에 있어 붙여진 논이름이다.
게논
예전에 이 논에 식용으로 사용하는 게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게모시논
정확한 위치와 유래는 알 수 없다.
베에등이논[뱀논]
예전부터 이 논에 물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검은다리논
다리의 색깔이 갯벌과 같이 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당화박이논
예전에 이논에 해당화 나무가 박혀 있어 붙여진 논 이름이다.
골연머리논
논의 위치가 골연머리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사거리논
논의 위치가 사거리 부근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딴펄
벌판의 위치가 마을 앞의 큰 벌판이 아니라 외따로 떨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행주외리는 앞에서 설명한 행주내리에서 행주산성 넘어 즉, 한강방향에 있는 마을의 법정리 명칭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능곡에서 김포방향으로 이어진 39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행주대교를 건너가 바로 직전 좌측에 위치한 마을이 행주외리 마을이다. 행주외리의 동쪽으로는 행주내리가, 서쪽으로는 김포군 고촌면과 지도읍 신평리와 남쪽으로는 김포군, 북으로는 토당리·행주내리와 경계하고 있다. 행주외리는 앞에서 설명한 행주산성을 기준으로 볼 때 산성 밖 즉, 한강 방향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본래 행주외리의 옛 자연지명은 서원촌과 소애촌[샛말]이며 대부분의 촌락들은 한강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행주외리는 본래 한 마을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행정구역으로 나뉘면서 새로이 구분하게 된 것이다.
행주외1리는 39번 국도 행주대교 좌측에 있는 마을의 행정리 명칭으로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옛 자연촌락 명칭은 소애촌, 또는 샛말이며 대부분의 지명들이 한강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옛날부터 이 마을은 반농반어의 어촌과 농촌을 겸했는데 농업으로는 수수·콩·조를 재배하고 한강에서는 잉어·웅어를 주로 잡아 생활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현재 많은 면에서 큰 변화가 일고 있는데 대부분의 촌락들은 근대·현대적인 가옥구조로 변모하였으며 일반 주택보다는 대형음식점이 신축되고 있어 마을 곳곳이 공사현장이다. 또 마을 앞으로 자유로가 건설되면 많은 변화가 예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1989년 통계로 이 마을에는 101거구 41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행주 나룻터
행주나룻터는 73번 군도로 돌빵구지 앞에 있던 옛 나루의 명칭으로 이 곳이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곳이라서 물고기도 많을 뿐더러 서울로 올라가는 배와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이 곳에서 꼭 정박을 해 나루가 만들어 졌고 이 나루 부근의 지명이 행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나루는 한때 굉장히 번창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지금은 거의 흔적도 없고 강을 사용할 수도 없다.
포대
덕양산으로부터 행주외 1리에 걸쳐 있는 각 봉우리에는 구한말 서양군대가 우리나라를 개항시키고자 강화도를 거슬러 서울로 진입하려 할 때 이에 대한 예방책으로 강화도의 강 양 옆에 포대를 두었고, 만약 이 곳이 뚫릴 경우를 생각해서 이 곳 행주산 즉, 덕양산과 김포쪽의 개양산과 개화산 봉우리에도 포대를 설치해 놓았다. 포대를 설치한 후 다헹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곳은 서울도 방어하고 이중의 임무를 띤 의의 깊은 곳이다.
⊙ 소애촌
소애촌은 행주외 1리의 옛 자연촌락의 명칭으로 한강 바로 옆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보안상 한강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고 있다.
⊙ 돌빵구지
돌빵구지는 행주외 1리와 행주외 2리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옛 소지명으로 한강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돌빵구지라 하는 것은 예전에 이곳에 큰 바위들이 있고 이곳에 고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 바위들은 그 규모가 대단해서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간 사람들이 멀리서 이 바위를 보고 자신의 마을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6.25한국 동란이후 배를 이용한 생활이 어렵게 되고 또 73번 군도로가 생기면서 돌빵구지의 일부는 없어지고 지금은 대형음식점이 만들어지고 있어 대부분 없어졌다.
⊙ 괴물웅구지
39번 국도에서 소애촌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옛 자연소지명으로 옛날 한강뚝이 쌓여지기 이전에 이곳에 괴물이 살던 웅덩이가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 부근에 상여도가가 있었다고 한다.
⊙ 샛말
샛말은 소애촌과 같이 행주외1리의 옛 자연촌락 명칭으로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샛고개
샛말에서 행주외 2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옛부터 상여가 넘어다니지 못하는 곳이다.
매학당지(梅鶴堂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여 귀래정의 동록(東麓)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매학당은 김광욱의 손인 김성최가 건립하였다. 한편 같은 곳에 관란정이 있었는데 이는 죽소(竹所)의 증손인 의령현감 김시좌가 세운 것이다.
유사정지
지도읍 외성동 봉정리에 있었으나 후에 사옹원분원이 자리를 잡아 왕께 올리는 웅어를 잡는 위어소로 썼다. 유사정은 죽소의 손인 인제현감 김성대에 의해 건립되었다. 정자가 헐리고 위어소로 쓰이면서 기와를 대신하여 초가지붕을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연체당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여 유사정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연체당은 감역 김현행이 건립한 것으로 세 형제가 한집에서 화목하게 살았기 때문에 상체의 뜻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연체당이라 하였다. 당대 대유 우암 송시열이 당액을 쓰고 강규환이 이를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범허정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지하여 유사정 북쪽에 있었다. 범허정은 조선 숙종 4년(1678) 이조판서 송광연이 세운것으로, 「학해범허주」의 뜻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범허정이라 하였다. 정자를 세운 뒤 송광연은 약천 남구만과 동강 조상우 등과 더불어 시주로서 즐기몀서 범허팔경을 남겼다.
장밀헌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해 있다. 장밀헌은 범허정의 손자인 송인명이 세운 것으로 원래 송하옹 조윤형이 쓴 헌액이 있었다.
육회정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여 귀래정 후록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육회정은 범허정 송광연의 형인 황간현감 송광준이 건립한 것이다. 일찍기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정자의 터전을 귀래정 주인 김성최에게 청하니 김성최가 술을 마시고 허락하면서 시 한수를 지어 이르기를 "한 조각의 강산이 석잔의 술보다 낫다"라 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송광준이 죽고 정자 또한 무너졌다 한다.
귀락당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며 범허정의 서쪽에 있었다. 귀약당은 판서 이만성이 세워 만년의 여가를 즐기던 곳이다. 후에 김재화가 거주하게 됨에 따라, 당명을 고쳐 일어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다시 거주하게 됨에 따라, 당명을 고쳐 일어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다시 판서 김세균의 묘사가 되어 그 이름이 바뀌게 되었는데「춘우로기유」의 뜻을 취하여「춘우루」라 하였다.
낙건정지
지도읍 외성동 용정 위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낙건정은 조선 숙종때의 판서 김동필이 세운 것으로, 중국 구양수의 사송시 "몸이 건강할 때라야 비로소 즐거움이 있나니 쇠하고 들어서 부축임을 기다리지 말라" 의 뜻을 취해 정자의 이름을 「낙건정」이라 하였다. 원래 이곳에서 김전신이 지은 낙건지와 서당 이덕수가 지은「낙건정기」가 있다. 또 원교 이광사가 지은 시「낙건팔경」에 백하 윤순이 쓰고, 겸재 정선이 지은 당액이 있었다 한다.
숙여루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며 범허정 서쪽에 있었으나 후에 권율장군의 사당인 기공사로 쓰이게 되었다. 숙여루는 낙건정 김동필의 아들인 상고당 김광수가 세운 것으로 일명 망운루라고도 한다.
평원정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며 범허정 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평원정은 장밀헌 송인명의 둘째 아들인 참의 송익언이 세운 것이다.
고심정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며 범허정 후록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고심정은 인천부사 김근행이 건립한 것으로 옛날 남당 한원진이 글을 배우던 곳이라 하여 건물을 새로 지어 기념한 곳이다.
취백당지
지도읍 외성동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그터만 남아 있다. 취백당에 관한 문헌으로 서당 이덕수가 지은「낙건정기」에 있으나, 누구에 의해 건립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돌방꾸지 고개
샛말마을에서 서원촌〔행주외 2리〕마을로 가기위해 넘나들던 고개의 이름으로 앞에서 소개한 돌방꾸지 위에 있던 고개이다. 이곳은 워낙 길이 좁고 바위가 많아 매우 으슥했던 곳이며 또한 나무가 많아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돌방꾸지 고개라 하는 것은 이곳의 지명이 돌방꾸지이기 때문이다.
⊙ 평구데이
앞에서 소개한 돌빵꾸지에서 좀더 산위로 오르면 지금은 남아있지않으나 예전에 넓고 큰 평지에 큰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옛 석빙고 자리였다고 한다. 이 석빙고는 조선조 임금한테 올리는 웅어를 보관하기 위한 어름을 저장하던 곳인 듯 하다.
피논
피논은 샛말에서 토당 4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옛부터 이 논에 피가 많아 붙여진 논 이름이다.
황논
황논은 피논 부근 토당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이곳에 예정 황씨 성을 가진 황해도 장수가 이곳에서 객사하여 이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 약 30년전 이곳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으나 자손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감판서 묘
돌방꾸지에서 서원촌 방향에 있던 큰묘로 묘분이 크고 망주, 문인석 등은 갖추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 도산제산
지금의 행주교회가 있는 산의 이름으로 약 50년전 이곳에서 1년에 한 번씩 도당제를 올려 붙여진 지명이다.
팔정자
행주외리에 정자 여덟 개가 있어 흔히 행주외리 팔정자라 부른다고 한다.
행주외2리는 앞에서 소개한 행주산성 정문에서 한강방향에 있는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마을의 촌락들은 73번 국도로 부근 좌·우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옛 자연촌락 명칭은 서원촌이다. 이마을은 1리에 비해 비교적 한강과 떨어져 있는 지역도 있기 때문에 과수원·논농사 등 생활의 모습이 다양하며 주민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촌락들은 대부분 근·현대식으로 잘 지어져 있으며 특히 서원근처에는 많은 대형음식점들이 자리잡고 있어 옛 모습이 많이 변화 되었다. 1989년 통계로 이 마을에는 126가구 56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서원촌
서원촌은 행주외2리의 자연촌락명칭으로 이곳에 행주서원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즉, 이 행주서원(幸州書院)은 글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권율장군의 제향(祭享)을 지내는 곳으로서, 조선시대 헌종이 서삼능에 거동할 때마다 권율장군의 제소(祭所)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왕명을 내려 1842년에 완성시킨 건물이라 한다. 그 후 고양군 사람들은 행주초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이 곳에서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 구렁목 고개
행주외 2리에서 행주산성 입구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옛날엔 훨씬 높고 숲이 우거져서 낮에도 지나다니기가 무서웠을 정도라고 한다. 워낙 으슥한 곳이라 산적들이 숨어있음직 하다해서 검은 고개, 구렁목 고개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구렁목 고개는 이 고개가 구렁이가 넘어간 것과 같이 구불구불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샛작골
행주산성 정문에서 행주외리로 이어지는 73번 군도를 따라 약 50미터 정도 내려와 좌측에 있는 큰 골짜기의 이름으로 앞에서 소개한 행주내 1리 작골과 서원촌 촌락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몇 개의 음식점 밖에 없지만 70∼80년 전에는 약 60호 정도가 있던 큰 마을이었으며, 최근 10여년 전만 해도 약 20호 정도가 살았으나 박정희대통령때 행주산성을 사적지로 모두 보존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옛 진주 유씨 족보에는 간현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 향화촌(香花村)
향화촌은 갬뺏말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나무 향(香)'자와 '꽃 화(花)'자를 써서 향화촌이 되었으며, 그 후 행자로 바꾸어 행화촌으로 부르고 있다.
바가지 우물
샛작골에 있던 우물의 이름으로 예전에 바가지로 우물 물을 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베미
샛작굴 안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옛날 한강물이 이 마을 앞에까지 들어오곤 했는데 물이 빠진 후에 보면 이 논에 유난히 뱀장어·메기·잉어 등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웃경주
샛작골에서 한강 서원촌 방향, 이병산 기슭에 있는 지명으로 지명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갬뱃말〔갠배말〕
서원이 있는 마을을 달이 부르는 지명으로 한강 부근 갯벌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갬배는 갯벌을 부르는 명칭이다.
⊙ 관청
이병산에서 한강방향에 있는 옛 자연 소지명으로 예전 이곳에 행주내외리를 관할하던 관청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는 고기를 팔던 육곡간과 파출소 등도 있었다고 한다.
⊙ 빨래돌 머리
앞에서 소개한 관청에 있는 소지명으로 예전 이곳에서 빨래를 하던 큰 돌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개무시
지금의 달동네 마을과 맨돌〔행주내 2리〕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논 이름으로 옛날에는 한강물이 이곳까지 이르고, 이 부근 논들이 모두 갯벌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이 논을 약 15미터정도 파면 갯벌흙이 그대로 나온다고 한다.
개무시동뚝
앞에서 소개한 개무시에서 맨돌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던 논뚝의 이름인데 이곳은 그 높이가 대단히 높아 논뚤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예전에 농악놀이를 자주 가졌다고 한다.
황주목사 묘
샛작골 뒷편에 있는 묘로 성은 류씨이며 본관은 진주다. 이 묘를 흔히 황주목사를 지냈다하여 황주목사 묘라 부른다.
⊙ 공동묘지
샛작골 뒷편에 있는 묘로 성은 류씨이며 본관은 진주인 사람의 묘다. 이 묘를 흔히 황주목사를 지냈다 하여 황주목사 묘라 부른다.
⊙ 신재산
앞에서 소개한 돌빵꾸지에서 행주외 1리 방향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그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황게논
행주외 2리 마을에서 토당리 방향에 있는 논의 이름으로 예전 이 논에 황색 게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논 이름이다.
⊙ 갬배고개
샛작골에서 갬배말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73번 군도로가 지나고 있다.
은경묘
앞에서 소개한 달동네 뒷편에 있는 묘로 은씨 성을 가진 사람의 묘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경은 통일신라시대의 충신이나 출생 및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 마루테기
마루테기는 앞에서 소개한 은정승묘 뒷편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으로 산마루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한우물골짜기
샛작골을 달리 부르는 지명으로 앞에서 설명한 바가지 우물이 유명하므로 이 우물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토당리는 지도읍 읍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고양군청이 있는 원당에서 남서방면으로 약 4㎞ 지점에 있는 마을의 법정리 명칭이다. 토당리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동쪽으로는 화정리.행신리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내곡리, 대장리와 남쪽으로는 행주외리.행주내리.강매리와 북쪽으로는 화정리와 경계하고 있다. 토당리는 본래 옛부터 논농사, 밭농사가 일반적이었이나 일제식민지시대 때 일본인에 의해 새끼를 만드는 공장이 세워졌다. 1990년 현재 토당리는 모두 8개의 행정리로 구분되어 있으며 토당 4리 이외에는 모두 옛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토당리의 지명 유래에는 모두 세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첫 번째,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치성을 드리던 삼성당이라는 사당이 있어 마을의 중심이 되었다. 이 삼성당이 흙으로 만든 사당, 곧 토당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토당리가 되었다 한다.
두번째, 삼성당에서 지내던 도당굿, 도당제에서 유래되었다. 곧 도당굿(제)를 지내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도당리가 되었다가 변화되어 토당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옛날 일등공신들이 당시의 정치제도나 이념등과 맞지 않아 사임을 하고 낙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서울시골(서울에서 가까운 시골이라는 뜻으로 능곡을 가리킨다)로 내려와 많이 살게 되었는데 이들 선비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하였으므로 돈이 없어 흙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사는 곳을 토당리라 하나 지금도 그 명칭이 계속되고 있다.
토당리는 현재 경의선과 교외선, 398번 지방도로 39번 국도 등이 통과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서울과 인접해 있어 1980년대 초반부터 급속히 도시화 작업이 추진되어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토당3리 앞에서 설명한 토당 1.2리 마을에서 서울방향 즉, 행신리 방향에 위치한 마을의 행정리 명칭인데 구체적으로 지금의 능곡중.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도 약 10년전 까지만 해도 평범한 농촌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1980년 이후 도시화 작업이 추진되어 지금은 주변의 야산을 깍아 모두 아파트 위주로 건물이 조성되고 있다. 본래 이 곳의 지명은 능동이었는데 이 지명은 능곡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1989년 통계로 이 마을에는 972가구 3,69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송장고개
송장고개는 토당리에서 행신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지금 모두 3가지의 지명유래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이 명칭이 생겨난 것은 일제식민지시대 때 인데,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식구나 친지가 죽었을 경우 꼭 이 고개에서 화장을 시켰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을 송장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시대 이곳에 좌량을 지낸 송씨가 살아 그의 이름을 따서 송좌랑고개라 한 것이 와전되어 송장고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전에 이 고개에 도둑이 하도 들끓어 혼자서 고개를 넘으려다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여 송장고개라 하였다.
◎ 능동(능곡, 능곡촌, 능골)
능동은 토당 3리의 자연촌락으로 지명대로 하면 이곳에 능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 이곳에는 능이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곳이 왕능을 만들기 위한 후보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이 왕능은 없고 단지 능을 만들기 위한 후보지였던 이유는 원래 왕능자리는 골이 100개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한 개가 모자란 99골 터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는 원래 이곳이 왕릉의 후보지였으나 골이 하나 부족하여 능자리로 쓰지 못하게 되자 왕이 당시 관찰사였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이곳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는데 정감사가 이곳 사패지에 그의 할아버지 묘를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더욱 더 명성을 떨치고 번성하였다는 것이다. 이 능곡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능을 쓸 만큼 산세와 지형이 좋은 곳이라고 한다. 옛부터 '뫼' 자가 들어가는 지명에는 꼭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 지도읍에도 다섯 '뫼' 즉, 사뫼, 가라뫼, 번데뫼, 장고뫼, 강구뫼가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역의 지세가 원래부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토당8리는 앞에서 소개한 토당 1리와 토당 5리 마을에서 화정 3리 백양동. 행신 4리 성신마을 방향에 있는 마을의 행정리 명칭인데 현재 택지개발과 더불어 한참 공사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1989년 현재 이 마을에는 796가구 2,80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우물
이 우물은 물이 좋고 항상 가물지 않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날 정도로 따뜻했다. 그래서 일제식민지시대 때에는 일본인들도 이 우물의 물이 좋다 하여 그대로 보존케 했으나 6.25사변 후 자가수도로 인해 점차 사용하지 않아 자연히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