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전은 건덕전 동쪽 자문(紫門) 안에 있고 그 제도는 3간인데, 비록 화려함은 만령전(萬齡殿)만 못하나 규모는 크다.
매양 중국에서 사자가 고려에 가려면, 기일에 앞서 반드시 먼저 보내는 소개서(紹介書) 가 있는데, 그 연락이 오면 여기에서 받는다. 고인(賈人)이 국경에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맞아 위로하고, 사관(舍館)이 결정된 뒤에 장령전에서 그가 바치는 것을 받고서 그 값어치를 계산하여 방물(方物)로 두 배쯤 되게 보상한다.
장경전 長慶殿
장경․중광(重光)․선정(宣政) 3 전(殿)은 옛 기록에 비록 그 이름이 실려있으나 지금 듣건대, 중광전․장경전을 중수하여 딴 전(殿)으로 바꾸었다 하니, 아마도 지금 전각(殿閣)을 세운 곳이 선정전으로서 곧 외조(外朝 군왕이 국정을 듣는 곳)인 것 같고, 이곳에서 세시 (歲時)에 그 신하들과 모여서 연회를 베푼다. 왕의 탄일(誕日)에도 명절 이름을 붙였으니, 왕 우(王俁)가 8월 17일 출생했으므로, 그 날을 ‘함녕절’(咸寧節)이라고 부른다.
그 날은 공족(公族)․귀신(貴臣)․근시(近侍)들을 장경전에 크게 모으고, 중국 고인(賈人)으로 사관에 있는 사람에게도 역시 관원을 보내어 자리를 마련하되, 화․이(華夷 중국과 고려) 두 가지 음악을 쓰며 또한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문(頌德文))가 있다.
그들이 노래 부른 것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궁궐 숲에 서기 비치어 宮時端色照宮林
무르녹은 화기에 쌓인 음기 걷히었네 和氣濃濃破積陰
집집마다 향불 피워 국운을 빌고 香火千家祈國壽
두 나라 음악에 손인 마음 즐거우리 笙歌二部樂賓心
취기 돌자 햇살 주렴에 옮겼고, 興酣日影移珠箔
춤을 끝낸 기생 머리 옥비녀가 삐딱. 舞罷花枝倒玉簪
부디 좋은 때 실컷 즐겨야 하니 須盡淸歡酬美景
술잔 크다 말고 조용히 드세. 慫容莫訴酒杯深
연영전각 延英殿閣
연영전각은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다. 제도와 대소(大小)는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같은데,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 보인다. 그 북쪽의 것을 또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연회하는 곳이다.
앞에 3각(閣)을 세웠는데 ‘보문각’(寶文閣)이라고 하는 곳에는 열성(列聖 중국의 여러 임금들)이 내린 조서(詔書)를 간직했고, 서쪽 것은 ‘청연각’(淸燕閣)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사기와 자․집(子集 제자(諸子)와 백가(百家)의 문집)을 간수했다. 일찌기 그 청연각의 기문(記文 문체의 하나로서 그 건물의 사적이나 경치를 적은 글)을 구득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候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신(臣) 김 연(金緣)은 봉교(奉敎)하여 찬(撰)하고, 통봉대부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通奉大夫 寶文閣學士 左散騎常侍 上護軍 唐城郡開國男 食邑三百戶 賜紫金魚袋) 신(臣) 홍 관(洪灌)은 봉교하여 비문(碑文)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했다.
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난 덕으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 중화풍속)을 흠모하기 때문에, 대내(大內)의 옆과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과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청연 두 각(閣)을 지어 송(宋)나라 황제(皇帝)의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조칙(詔勅)․서화(書畵)를 모셔 놓고, 계시하여 훈칙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용의(容儀)를 엄숙하게 한 뒤에 절하고 우러러보았다.
한결같이 주공(周公)․공자․맹자․양웅(揚雄)이래의 고금 서적을 모아놓고 날마다 노사(老師)․숙유(宿儒)들과 선왕(先王)의 도를 토론하여 부연하며 배우고 닦고 익히니, 집[堂] 밖을 나갈 것도 없이 삼강(三綱)․오상(五常)의 교화와 성명(性命)․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흘러 퍼졌다.
그리하여 금년(고려 예종12 1117) 여름 4월 갑술일에 특별히 수태부 상서령 대방공(守太傅尙書令帶方公) 신(臣) 보(俌), 수태부 상서공 태원공(守太傅尙書公太原公) 신 효(효), 수태보 제안후(守太保 齊安候) 신 서(서), 수태부 통의후(守太傅通義候) 신 교(僑), 수태보 낙랑후(守太傅樂浪候) 신 경용(景庸)․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위(偉),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자겸(資謙)․신 연(緣),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晙), 수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궤(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 신 자지(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모임을 차리고서 조용히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덕이 부족한 몸인데 하늘이 내린 태평을 힘입어 종묘와 사직에 복이 쌓이고 3면의 변방에 병란(兵亂)이 일지 않고, 글과 법이 중하(中夏)와 같게 되었다. 무릇 정책을 세워 일을 하여감과 대소간(大小間)의 행사를 중국에 자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숭녕(崇寧 송나라 휘종의 연호)․대관(大觀 송나라 휘종의 연호) 이래로 시행하고 주조(注措)하는 방법과 보문각(寶文閣) 경연(經筵)에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선화(宣化 송나라 휘종의 연호) 때 제도를 따른 것이요, 깊숙한 궁궐 조용한 자리에 재상들을 인견(引見)함은 태청(太淸 양무제(梁武帝)의 연호)의 연회를 법받은 것이니, 비록 예(禮)는 차등이 있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높이는 뜻은 한가지다.
지금 입조(入朝 송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것)했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桂香)․어주(御酒)․용봉(龍鳳)․명단(茗團 송나라 차[茶])․진과(珍菓) 보명(寶皿)을 가지고 돌아왔기로, 아름답게 여겨 경들과 함께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움을 즐기고자 하노라.“
하니, 신하들이 모두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섬돌에 몰려가 엎드리며,
“고루(固陋)한 몸이라 감히 훌륭한 예에 참여할 수 없읍니다.”
하고 사양하니, 왕이 곧 도로가 앉도록 하고, 온화한 안색으로 대접하며 각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였는데, 거기에 차려놓은 그릇과 잔이나 접시에 담긴 음식과 각가지 과일은, 육상(六尙) : 임금의 일용품 일체를 제공하는 여섯 가지 부서. 송(宋)나라는 상식(尙食)․상약(尙藥)․상의(尙衣)․상사(尙舍)․상온(尙醞)․상연(尙輦)을 두었는데, 이를 육상이라 불렀다.《文獻通考 職宮考》
육상(六尙)의 이름난 진품과 사방의 맛좋은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상국(上國)의 파리(玻璃 유리)․마노(瑪瑙 보석)․비취(翡翠)․서시(犀兕 무소의 뿔이나 가족을 말한다)와 기괴하여 애완(愛玩)스러운 물건들을 상 위에 진열하여 놓고 훈(壎)․지(篪)․강(椌)․갈(楬)․금슬(琴瑟)․종(鍾)․경(磬)의 즐겁고 단아한 곡조로 당(堂) 아래서 합주(合奏)하도록 하고, 왕이 잔을 들고서 근신(近臣)을 시켜 권하며 이르기를,
“군신의 사이는 오직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니, 각기 양대로 사양하지 말고 마셔라.”
하니, 좌우 신하들이 재배(再拜)하면서 감사함을 아뢰고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받기도 하여 화락한 즐거움이 매우 흡족하였다.
술잔이 9번 돌게 되자,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가, 이어서 궁중 귀인(貴人)들로 습의(襲衣)와 보대(寶帶)를 가져다가 내리도록 하여, 그 후의(厚意)를 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러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고, 음식 먹고 행동하기를 각기 편리한 대로 하도록 하므로, 더러는 마음을 터놓고 담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망울을 굴려 관람하기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뜰가에는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는데, 오만 가지로 우뚝우뚝한 산과 사방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동정호(洞定湖)와 오(吳)나라 회계산(會稽山) 같은 그윽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니, 잔치가 끝나도록 더위를 잊고 취하도록 몹시 마시다가 밤이 깊어 파했다.
이에 진신(搢神)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흔연(欣然)하게 기쁜 기색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는 인자와 검소를 보배로 삼고 넘치는 행동이 없으며, 옷은 문수(文繡)를 입지 않고 그릇은 조각한 것을 쓰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곳을 얻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소의간식(宵衣旰食) 소의 간식(宵衣旰食) :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식사한다는 뜻. ꡔ당서ꡕ(唐書) 유분전(劉賁傳)에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자신을 수양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식사한다.·······”하였다.
하는 중에도 노심 초사하여 가엾게 여기고, 반대로 군신(群臣)과 귀한 손님에게 잔치 대접함에 있어서는, 내부(內附)에 간수했던 진귀한 것과 상국(上國)에서 특별히 은사(恩賜)한 것까지 다 털어, 하루가 다 가도록 놀고 밤에까지 계속하고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어진이를 존대하고 예를 중하게 여기며 선(善)을 좋아하고 권세를 망각하는 마음이, 실로 역대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듣건대, 옛날 노(魯)나라 임금이 천자의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반궁(泮宮)에서 선생(先生)과 군자(君子)가 같이 즐겼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노후가 와서 반궁에서 술을 마시누나! 이미 좋은 술 마셨으니 길이 장수하리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고, 노침(路寢 임금이나 제후가 정사를 보던 곳)에서 잔치하면서는 대부(大夫)와 서사(庶士)가 같이 서로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잔치차려 기뻐하니 대부와 서사도 즐거워하는구나! 나라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많은 복을 받음이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다 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도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은의(恩意)를 받들어, 신하들을 총애로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천보 천보(天保) : ꡔ시경ꡕ의 편명. 내용은 신하가 임금의 복을 빌어주며 부르는 노래.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 임금 안정시키기를 매우 공고히 하셨구나!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좋게 하셨으니 무슨 복인들 내려 주지 않으랴·······”
시(天保詩)와 같이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갖고, 언어(言語 왕의 측근 관리)․법종(法從)은 ‘아유가빈’(我有嘉賓) 아유가빈(我有嘉賓) : ꡔ시경ꡕ 녹명편(鹿鳴篇)의 한 구절. 녹명편은 잔치를 베풀어 주며 부르는 노래인데, 대략에 “화목하게 우는 사슴이여! 들에서 풀을 먹고 있구나! 나는 아름다운 손님을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노라·······” 하였다.
의 시(詩)를 부(賦 노래부름)하고, 고사(瞽史) ․ 가공(歌工)은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음악 : 치소(藢招)와 각소(角招)의 음률로 된 노래인데, 그 내용은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는 것이 무어 잘못이겠는가! 임금에게 간하는 사람은 임금을 좋아하는 신하이다.” 하였다.≪孟子 梁惠王下≫
음악을 연주하여, 환희(歡喜)가 서로 교환되고 예의가 법도에 맞게 되었다.
이때에 있어, 사람과 신령의 화락함, 천지의 아름다운 감응, 상하가 베풀어 주고 보답하는 것,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모두 화락하게 음식을 들며 담소(談笑)하는 속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길이 늙지 않고 많은 복을 받는 다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며,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대양(對揚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칭양하는 것)할 것이다.
신은 우매하고 졸렬한데도 만행(萬幸)한 때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재부(宰府)를 맡고 있는데, 신을 못났다 아니하고 특별히 글을 지으라는 명령이 잇기에 사양했으나 허락하여 주지 않으므로 삼가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억지로 ‘기’(記)를 짓는다.
임천각 臨川閣
임천각은 회경전(會慶殿)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다. 집은 네 기둥으로 되었고 창문이 툭 트였으나 밖이 겹처마로 되어 있지 않아 자못 대문(臺門)과 같은데, 연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책 수만 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장경궁 長慶宮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 등성이에 있다. 두 개의 조그만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왕부와 통하고 동으로는 선의문(宣義門)과 통하며 긴 거리에는 낡은집 몇 채가 있다. 왕옹(王顒)의 여러 자매가 그 속에서 살았는데, 뒤에 시집가고 드디어 그 곳을 비워 두었으므로 황폐가 더욱 심했다. 왕우(王俁)가 병이 위독하여 거기에 가 치료했는데, 마침내 치유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따라서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삼았다. 왕 우를 모시던 궁녀와 그 의 옛 관속 수십 인이 지킨다.
좌춘궁 左春宮
좌춘궁은 회경전의 동쪽 춘덕문(春德門)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처음으로 책봉(冊封)되면 세자(世子)라 하고,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난 뒤에는 여기에 거처하는데, 옥우(屋宇)의 제도는 왕궁(王宮)만 못하다.
대문의 편액은 ‘대화’(大和)라고 했고, 다음은 ‘원인’(元仁), 그 다음은 ‘육덕’(育德)이라고 했다.
일 보는 집은 편액이 없고, 들보와 기둥은 길고 크며, 병풍 위에는 ꡔ문왕세자편ꡕ(文王世子篇)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관속(官屬) 십수 인을 두었다.
우춘궁(右春宮)은 승평문(昇平門) 밖 어사대(御史臺) 서쪽에 있는데, 왕의 자매와 여러 여인이 거처한다.
별궁 別宮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궁(宮)과 전토(田土)를 받으며, 탕목(湯沐)도 받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
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拊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조선(朝鮮)․상안(常安 타본에는 장안(長安))․낙랑(樂浪)․변한(卞韓) 등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
지금 공족(公族)으로는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에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되었고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권
관복 冠服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문신 문신(文身) :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기타 물감으로 글씨・그림 무늬를 들이는 것
하고 발이 교차한다 이마에 교차한다[雕題交趾] :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ꡔ예기ꡕ(禮記) 왕제(王制)에 동이(東夷)는 단발문신(斷髮文身)이라 했고, 남만(南蠻)은 조제교지(雕題交趾)라 하였다.
[雕題交趾]고 한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밭갈이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사(漢史)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변(弁)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商 중국 고대 은나라의 처음 이름)이나 주(周)의 관(冠)과 변(弁)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당(唐) 나라 초에 차츰 오채(五采)의 옷을 입어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으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덜었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 관복도(冠服圖) : 관복의 만듦새를 그린 그림. 이 그림은 지금 전해오지 않는다.
를 그린다.
왕복 王服
고려왕은 상복(常服)에는 높은 오사모(烏紗帽)에 소매가 좁은 상포(緗袍 담황색(淡黃色) 포)를 입고, 자라(紫羅)로 만든 넓은 허리띠 넓은 허리띠[勒巾] : 원래는 늑백(勒帛)으로 넓은 띠이다. 이 실물이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남아있다. 넓은 띠로 뒤에는 끈으로 매게 되어 있다.
[勒巾]를 띠고 이 허리띠는 사이사이에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았다. 나라의 관원(官員)과 사민(士民)이 모여 조회(朝會)할 때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며,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옥규(玉圭)를 든다. 다만, 중국의 사신이 가면 자라(紫羅)의 공복(公服)을 입고,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들고 옥대(玉帶)를 띠고, 행례의 범절이 아주 신절(臣節)에 조심한다. 혹 평상시 쉴 때에는 검은 건[烏巾]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
영관복 令官服
고려의 관제는 당(唐)나라 무덕(武德 당(唐)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아홉 등급[九等]이 있었다. 첫째는 대대로(大對盧)인데 나라 일을 총괄하고, 다음이 태대형(太大兄), 다음이 울절(鬱折), 다음이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다음이 의두대형(衣頭大兄)으로 기밀을 맡고 정사(政事)를 논의하여 병마를 보내는 일과 관작(官爵)을 주는 일을 맡았고, 다음이 대사자(大使者), 다음이 대형(大兄), 다음이 사자(使者), 다음이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이 소형(小兄), 다음이 제과절(諸過節), 다음이 선인(先人)이며, 또 빈객(賓客)을 맡는 이가 있어 중국의 홍로경(鴻矑卿) : 홍로(鴻矑)는 홍로시(鴻矑寺)의 약칭으로 당대의 관청이름. 외국에 관한 사무(事務)와 조공(朝貢)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곳이고, 경(卿)은 그 사무를 관장하는 (官吏)를 말한다.
홍로경(鴻矑卿)에 비할 수 있으니, 대부사자(大夫使者)로써 그 관리를 삼고, 또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 정 7품벼슬), 통사사인(通事舍人 각문(閣門)의 정 7품벼슬) 전서객(典書客)이 있는데, 다 소형(小兄) 이상으로 관리를 삼는다. 또 여러 큰 성에는 욕살(傉薩)을 두었는데, 중국의 여러 독부(督府) 독부(督府) : 총대장(總大將)이 거처하는 마을
에 비할 수 있으며, 여러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었는데, 이는 중국의 자사(刺史)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도사(道使) 도사(道使) : 지금의 도지사와 같은 직책. 고려는 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두었다가,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12주(州)에 절도사를 두었다가 현종 때에 오도・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4도호부 8목을 두었다.
라고도 이르고 무관(武官)에는 대모달(大摸達)이 있는데 이는 위장군(衛將軍)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조의 두대형(皀衣頭大兄) 이상이라야 될 수 있으며, 다음은 말객(末客)인데 중랑장(中郞將)에 비교되는 것으로 대형(大兄) 이상으로 그를 삼고, 그 다음은 영천인(領千人)인데 이하 각기 등차(等差)가 있다. 이제 그 관(官)의 이름이나 공훈[勳秩]의 품계가 혹 중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누가 그 사유를 물으면 곧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고사(故事)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의관(衣冠)에 있어서도 또한 혹 비슷한 것이 있다. 전세(前世) 고구려의 신하의 복식이 청라(靑羅)로 관을 하고 강라(袶羅 붉은 나)로 이(珥 원래는 귀걸이이지만, 여기서는 귀를 싸는 장식)를 하고 새깃[鳥羽]으로 장식하더니, 요즈음은 나라의 관원들이 거의 다 자주 무늬가 있는 엷은 나의 포[紫文羅袍]를 입고 비치는 깁으로 만든 복두(복두)를 쓰며, 허리에는 옥띠[玉帶]를 띠고, 금어(金魚) 금어(金魚) : 황금으로 고기 모양과 같이 만든 대(袋). 당대(唐代) 3품관 이상이 차던 것.
를 차되, 관이 태사(太師)․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인 자가 입는다.
국상복 國相服
국상(國相)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둥근 문양이 있는 금띠[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시중(侍中), 태위(太尉), 사도(司徒), 상서(尙書)・중서문하시랑(中書門下侍郞 정2품)・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정당문학(政堂文學)・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추밀사(樞密使 종3품)・동지원주사(同知院奏事) 등의 관원들도 모두 이를 입는 것을 허락해 준다.
근시복 近侍服
근신[近侍]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구문금대(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좌우상시(左右常侍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어사대부(御使大夫), 좌・우승 좌・우승(左右丞) :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 3품 벼슬
(左右丞), 육상서 육상서(六尙書) : 상서이부(尙書吏部)․상서병부․상서호부․상서형부․상서예부․상서공부이며 정 3품벼슬이다.
(六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 정3품 벼슬)․승지학사(한림원의 학사승지(學士承旨), 정3품 벼슬) 이상 및 지대국조사명 접반관(祗待國朝使命接伴官)과 관반관(館伴官) 등이 다 입는다.
종관복 從官服
종관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어선금대 어선금대(御仙金帶) : 송(宋) 대에 문신(文臣)이 띠던 띠의 이름
(御仙金帶)를 띠니,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御史臺)의 중승, 종4품)․간관(諫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좌․우 간의대부, 정4품)․급사(給事 종4품)․시랑(侍郞 육부(六部)의 정4품 벼슬), 주(州)․목(牧)의 유수(留守)와 사(使)․부사(副使)․합문집찬(閤門執贊 합문의 집찬벼슬, 종4품)․육상직관(六尙直官)․도지병마 도지병마(都知兵馬) : 문종 때에 창립된 국방기관으로,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중앙은 문하시중․서령 상서령이 겸임하고, 현지에서는 도병마사(都兵馬使)․지병마사(知兵馬使)․부사(副詞) 등으로 나뉘었다.
(都知兵馬)․사부호사 사부호사(四部護使) : 군사적 주요 도시인 안북(安北)․안남(安南)․안동(安東)․안변(安邊)에 도호부를 두고 도호부사(都護府使)라는 관을 두었다.
(四部護使) 등과 특별한 은수(恩數 훈공에 의하여 왕의 특별한 은영(恩榮)을 입는것)를 입은 자가 다 입으며, 왕의 세자(世子) 및 왕의 형제도 또한 그러하다.
경감복 卿監服
경감의 복색은 비문나포(緋文羅袍)에 붉은 가죽 바탕의 무소 뿔의 띠[紅鞓犀帶]를 하고, 이에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육시경이 육시경이(六寺卿貳) : 상서육부(尙書六部) 소관 하의 제시(諸寺), 즉 태상시(太常寺)․위위시(衛尉寺)․태복시(太僕寺)․예빈시(禮賓寺)․대부시(大府寺)․사농시(司農寺)․사재시(司宰寺) 등이 있다.
(六寺卿貳)․성부승랑(省部丞郞 상서도성(尙書都省)과 육부(部)의 승과 낭(郎))․국자유관(國子儒官 국자감(國子監)의 유관이 사업(司業))․비서전직(秘書典職 비서성(秘書省)의 감(監)․소감(少監) 등)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조관복 朝官服
조관의 복색은 비문나포를 입고 흑정각대(黑鞓角臺)를 띠고,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사업박사(司業博士 국자감(國子監)의 종4품 벼슬․사업(司業))와 사관교서(史館校書 직사관(直士館)(정9품)벼슬), 태의(太醫)․사천(司天)의 두 성(省)의 녹사(綠事 정9품)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그 계(階)나 관(官)은 또한 햇수를 따지며, 반드시 그 계나 관을 옮긴 뒤에야 갈아 입는다. 관반(館伴 사신의 접대관)이 중국의 사신을 관(館)에서 뵐 때에는 각기 두 사람의 비포(紕袍)를 입은 자를 두어 앞을 인도하게 하는데, 다만 어대(魚袋)를 차지 않으니, 마땅히 이것은 중국의 주의쌍인(朱衣雙引 향도(嚮導)하는 관원은 붉은 옷을 입었으므로 주의리(朱衣吏)라고도 한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서관복 庶官服
서관(庶官 6품(六品) 이하의 하급관원)의 복색은, 녹의(綠衣 서관의 옷은 포(袍)라 하지 않고 의(衣)라 하였다)에 목홀(木笏)을 들고, 복두(幞頭)를 쓰고, 검은 가죽띠[烏鞓]를 띠니, 진사(進士)로 입관(入官)한 때로부터 성조(省曹)의 보리(補吏)나 주현(州縣)의 영위 주현(州縣)의 영위(令尉) : 주현의 으뜸 벼슬아치. 《高麗史 卷七五》에, “문종 18년 8월에 모든 주(州)․목(牧)의 자사(刺史)․통판(通判)과 현(縣)의 영위(令尉)․장리(長吏) 등의 실적과 백성의 고락을 조사하기 위하여 관리를 보내어 조사했다.” 하였다.
(令尉)․주부(主簿 각 관아의 종7품 종8품의 주부(注簿) 벼슬인 듯함.)․사재(司宰 사재감(司宰鑑)의 벼슬인듯함.) 등이 다 이를 입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 물 人物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人材)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루고, 나머지는 혹 진사(進士)를 하여 뽑히거나 혹 재물을 바치고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 세록(世祿) : 대대로 이어 받는 세습의 국록(國錄). 《孟子 文公上》에 “대대로 국록을 이어 받게 하는 것은 등 나라가 이미 실시하고 있다.” 하였다.
받는 이직(吏職)까지도 등급이 있으니, 그러므로 직(職)이 있고 계(階)가 있고 훈(勳)이 있고 사(賜)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衛)가 있다.
이것은 본조(本朝)의 괸제를 고찰하여 본받되 개원(開元 당 나라 현종(玄宗)의 연호)의 예(禮)를 참작하여 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名實)이 맞지 않고 청탁(淸濁)이 혼동되어 한갓 형식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 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 약이(洪若伊)․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 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 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 승중(朴昇中),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 약온(金若溫),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 홍재(崔洪宰),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 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 준경(拓俊京)․이 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왕부(王府)에서의 4차례 연회를 제한 외에는 이들과 같이 잔치하며 담소하였는데 화락한 분위기였다.
사적(私적 사사로이 임금과 만나는 것)과 송유(送遺 선사)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양 인(梁鱗)과 김 유간(金惟揀), 형부시랑(刑部侍郞) 임 경청(林景淸), 공부시랑 노 영거(盧令거), 중시대부(中侍大夫) 황 군상(黃君裳), 공부낭중(工部郎中) 정 준(鄭俊), 좌사낭중(左司郎中) 이 지보(李之甫), 전전승지(殿前承旨) 임 총신(林寵臣), 조산랑 비서승(朝散郞秘書承) 김 단(金端), 합문사(閤門使) 김 보신(金輔臣),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이 영지(李潁之)와 조 기(曹祺), 내전숭반(內殿崇班) 호 인영(胡仁潁), 인진사(引進使) 왕 의(王儀), 합문지후(閤門祗候) 고 당유(高唐愈)와 민 중형(閔仲衡),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점(李漸)과 양 문구(梁文矩), 중위랑(中衛郞) 유 급(劉及), 중량랑(中亮郞) 팽 경(彭京), 충훈랑(忠訓郞) 왕 승(王承), 성충랑(成忠郞) 이 준기(李俊琦)와 김 세안(金世安), 보의랑(保義郞) 이 준이(李俊異), 승절랑(承節郞) 허 의(許宜)․하 경(何景)․진 언경(陣彦卿)이 맡았으며, 전명(傳命)하고 찬도(찬導 안내)함은, 정의대부 예부상서(正議大夫禮部尙書) 김 부일(金富佾), 통의대부 전중감(通議大夫殿中監) 정 담(鄭覃), 상서(尙書) 이 도(李도), 중량대부 지합문사(中亮大夫知閤門事) 심 안지(沈安之), 중량대부 합문부사(中亮大夫閤門副使) 유 문지(劉文志),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김 의원(金義元),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심 기(沈起)․왕 수(王 洙)․김 택(金澤)․이 예재(李銳材)․김 순정(金純正)․황 관(黃觀)․이 숙(李淑)․진 적(陳迪), 합문지후(閤門祗候) 윤 인용(尹仁勇)․박 승(朴承)․정택(鄭擇)․진 칭(陳칭),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덕승(李德承)․오 자여(吳子璵)․탁 안(卓安)이 하였는데, 모두 재능(才能)과 언변과 박식으로 뽑혀 이 일을 맡았다.
상면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같이 서로 연락(燕樂)하고 유관(游觀)하였는데, 그들의 읍손(揖遜 인사범절)하는 거동이 절차있고 화락하여 볼만한 데가 있었다.
지금 우선 이 자겸(李資謙) 이하부터 그형상을 그린 것이 5사람인데, 아울러 그 족망(族望)까지 설명을 하겠다.
수태사상서령 이 자겸 守太師尙書令李資謙
고려는 본래부터 족망(族望)을 숭상하고 국상(國相)은 거개 훈척(勳戚 나라에 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을 임용한다. 왕 운(王運)으로 부터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장가 들었는데, 왕 우(王俁)도 세자(世子) 때에 또한 이씨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호(門戶)가 빛나고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겸의 형 자의(資義)가 전대(前代) 왕 때에 이미 국상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유찬(流竄 귀양보내는 것)되었기 때문에 자겸이 형의 일을 경계삼아 매양 스스로 조심하였으므로, 왕 우가 깊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춘궁(春宮 세자)의 스승이자 벗을 삼았다.
이때 왕 해(王楷)가 아직도 어렸지만, 자겸이 박식하고 견문이 많은 선비 8인을 선발하여 지도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김 단(金端) 같은 무리는 그 무렵 본조(本朝)로부터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 같은 자격을 주는것)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바로 이 선발에 참예되었다.
임인년(고려 예종(睿宗) 17, 1122) 여름 4월에 왕 우(王俁)가 죽으매, 여러 아우들이 다투어 서려고 했다. 이에 앞서 왕 옹(王옹)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왕 우가 맏이었다.
자겸이 이미 왕 해를 세웠는데,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보(보)가 그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여 드디어 문하시랑(門下侍郞) 한 교여(韓교如)․추밀사(樞密使) 문 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불궤(不軌반역)를 음모하니, 예부상서(禮部尙書) 이 영(李永)․이부시랑(吏部侍郞) 정 극영(鄭克永)․병부시랑(兵部侍郞) 임 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었는데, 미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매, 곧 체포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자겸이 이에 왕에게 풍간(諷諫)하여 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여당(餘黨) 수백 인을 잡아들였기 때문에,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太師)로 승진시키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자겸은 풍모(風貌)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락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이적 중에서는 능히 왕실을 부장(扶獎)하는 자이니, 역시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접반 정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어대 윤 언식 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國賜紫金魚袋尹彦植
윤씨는 원래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윤 관(尹瓘)이 왕 우(王우) 때에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어 일찌기 조공하러 중국에 왔었는데, 언식은 곧 그의 아들이다. 대대로 이씨(李氏)들과 혼인했고, 또한 이자겸(李資謙)과 퍽 좋게 지냈다. 왕 해(王楷)가 세자로 있을 때 언식도 역시 인익(引翼 인도하고 보익하다)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였었기 때문에, 왕 해가 즉위한 뒤 높고 귀한 벼슬에 승진되었다.
언식은 풍채가 아름답고 자질이 훤칠하여 완연(宛然)히 유자(儒者)의 기풍이 있어, 오랑캐로 대할 수 없었다.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 부식 同接伴通奉大夫尙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金富軾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큰 씨족이 되어 전사로부터 이미 실려 오는데, 그들이 박씨(朴氏)와 더불어 족망(族望)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문학(文學)으로써 진출된 사람이 많다.
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임과 복종을 받는 것이 능히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그의 아우 부철(富轍)은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찌기 그의 형제들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동지추밀원사 상주국 김 인규 館伴金紫光祿大夫守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김 경융(金景融)은 왕 옹(王옹) 때의 태부 수중서령(太傅守中書令)이니, 인규는 곧 그의 아들이다. 옹의 아버지 휘(徽)가 일찌기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니, 왕 해(王楷)가 인규를 원구(元舅)로 존대할 분의가 있다.
한 교여(韓교如)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 자겸(李資謙)이 왕 해를 도와 여러 반역 도당을 베었는데, 인규가 참여하여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사空)으로 벼슬을 올리고 중추부(中樞府)에 있도록 했다.
인규는 늘씬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모습이 훤칠하고 준수하며, 행동도 단정하고 장중하므로, 선발하여 사신을 접대하게 한 것이다.
동관반 정의대부 수상서 병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이 지미 同館伴正義大夫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李之美
고려는 매양 중조(中朝)에서 사신이 가게 되면 반드시 인재(人材)를 선발하거나 혹은 조공(朝貢)갔던 사람으로 관반(館伴)을 삼는다.
지미는 곧 자겸의 아들인데, 풍채와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 언젠가 일찌기 천궐(天闕)에 입근(入覲)하고 관(館)에 머무는 여러 달 동안 관중에서 일어났언 모든 일을 지미가 처결하였는데 예(禮)에 맞지않게 하는 것이 없었고, 동작이 찬찬하고 단아하여 여유 작작하게 중화(中華)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매양 조정(朝廷) 일에 언급되면 반드시 권권(眷眷 마음이 늘 쏠리는 것)하게 쏠리는 뜻이 있었으니, 그의 충성이 또한 가상하다고 할 만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9 권
의 물 1 儀物一
여러 오랑캐 나라는 비록 임금이 있으나, 그 출입에는 정(旌 장목을 단 기)과 전(전 자루 위가 굽은 기) 십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붙이들과 거의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고려는 본래 조빙(朝聘)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군신 상하가 거동할 적에 예문(禮文 예법의 명문)이 있으니, 왕의 순행(巡行)에 각기 의물(儀物)과 신기(神旗)가 있어, 선구(先驅)하는 갑사(甲士)가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육위(六衛) 육위(六衛) :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인데 고려 태조 2년(919)에 두었다. 목종(穆宗)시대에 군영을 만들어 직원과 장수를 갖추었고, 이 때(1002) 이미 이군(二軍)을 육위의 위에 두었다. 이 이군은 응양군(鷹揚軍), 용호군(龍虎軍)이다.
의 군대가 각기 그 의물을 잡고 가니, 비록 다 전례(典禮)에 맞지는 않으나, 다른 여러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나 볼 만하다. 이것이 공자(孔子)가 살고 싶다 하고 더럽다 하지 않은 이유이다. 더구나, 고려는 기자(箕子)의 나라인데다가 성조(聖朝 송을 일컬음)의 권회(眷懷)함이 두터운 터이니 더욱 말할나위 있겠는가? 이제 아울러 그 의물을 아래에 그린다.
반리선 盤리扇
반리선이 둘이니, 강라(絳羅 붉은 비단)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가운데에 단리(單리 한 마리의 작은 용)가 꾸불꾸불 굼틀거리는 그림을 수놓았는데, 그 제도가 뿔은 하나요 비늘은 없고, 그 모습은 용(龍)과 비슷하되, 대개 도롱뇽[蛟]이나 뿔 없는 용[ ]의 붙이이다. 왕이 행차할 때면 앞에 서서 금포(錦袍)를 씌워 바람을 막는데, 친위군(親衛軍) 친위군(親衛軍) : 왕의 친위부대로서 둘이 있으니, 이를 이군(二軍)이라 한다. 이 이군은 바로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이다.
이 이를 잡고, 잔치할 때는 뜰 가운데에 세우되, 예(禮)가 끝나면 거둔다.
쌍리선 雙리扇
쌍리선은 넷이다. 그 빛깔과 장식은 대략 단리(單리)와 비슷한데, 다만 수놓은 모양이 줄로 벌렸고, 예를 행할 때는 친위군이 이를 잡는다.
수화선 繡花扇
수화선은 둘이다. 붉은 나[絳羅]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하고, 가운데에 모란 꽃 둘을 수놓았는데, 부채의 모습은 이문선(이文扇)에 비하면 그 위가 조금 패어, 예를 행할 때는 이선(이扇)의 다음에 벌여 세우는데, 친위군이 잡는다. 삼색선(三色扇)은 그 너비가 2척이요, 높이가 4자요, 그 자루의 길이는 각각 10자가 된다고 한다.
우선 羽扇
우선은 넷이다. 그 제도는 푸른깃[翠羽]을 모아 차차 엮어내려 아래를 은으로 장식하였는데, 모양이 문금(文禽) 같다. 여기에 황금(黃金)을 칠하여, 자못 화려한 문채가 나지만 다루기가 어렵고, 오래 되면 깃이 빠져 그 형상이 위가 모[方]지게 된다. 이제 그 완전한 형상을 그렸는데, 처음의 모습에서 오래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거의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도는 자루의 길이가 10자요, 부채의 너비가 1척 5촌, 높이가 2자다. 예를 행할때는, 금화곡각(金花曲脚) 금화곡각(金花曲脚) : 《高麗史 卷七四》에“ 충목왕 3년(1347) 10월 김 인관(金仁琯)이 급제하자 왕이 말과 붉은 신을 하사하고 금화모를 쓰도록 허락하였다.” 한다.
으로 장식한 복두와 비단옷[錦衣]을 입은 친위장군(親衛將軍)이 이를 잡게 한다.
곡개 曲蓋
곡개(曲蓋) 곡개(曲蓋) : 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막는 것. 곡직화개(曲直華蓋)란 것도 있고, 청곡병대산(靑曲柄大傘)이라는 것도 있다.
는 둘이다. 그 모양은 6모지고, 각기 유소(流蘇 내려뜨리는 장식물)가 있고, 붉은 나〔絳羅〕로 장식하고 위에 명주(明珠)와 금은을 섞어 장식하고 그 자루는 조금 굽었다. 왕이 출입할 때 그것을 받치지 않고 다만 위군(衛軍)이 이를 잡혀서 보(步) 앞에 가게 하는 것으로 의식을 삼는다. 그 만듦새는 높이 12자요, 너비 6자이다.
청개 靑蓋
청개의 만듦새는 거의 중국과 같다. 안쪽은 붉은 나〔絳羅〕로 만들고, 넓은 폭을 아래로 늘이고, 또 노란 실로 짠 끈으로 장식했다. 듣건대, 보통 때는 다홍〔紅〕을 쓰나, 중국 사신이 오면 청라(靑羅)로 위를 가린다 한다. 대개 고려인은 다홍을 가장 귀히 여겨 국왕(國王)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데, 이제 위를 덮는 것은 또한 중국 조정에 공순하여 사절(使節)에게 겸손하는 일단인가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0 권
의 물 2 儀物二
화개 華蓋
화개의 제도는 문라(文羅)에 그림과 수(繡)를 섞어 꾸미고, 위는 육각(六角)이요 각기 유소(流蘇)가 나왔는데, 그 모양이 패환(佩環 패옥(佩玉)의 고리)과 같으며, 오채(五采 오색의 비단)로 드림을 가지런히 내렸는데 여기서 방울소리를 낸다. 그 뚜껑[蓋]은 세로가 세 자요 가로가 여섯 자요 길이가 25척이니, 대례(大禮)인즉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 8위(衛)의 하나)이 이를 잡고, 창합문(창闔門)밖에 서 있다.
황번 黃幡
황번의 제도는 문양 있는 나[文羅]로 만들고, 위에 상운(祥雲 상서로운 구름)을 수놓고, 그 형상이 위를 뾰족하게 하고, 두 귀에 유소(流蘇)를 내렸는데, 흔들면 소리가 난다. 번(幡)의 머리에서 끝가지 길이가 9척이요, 넓이가 1척 5촌이요, 자루의 길이가 1장 5척이며, 대례(大禮) 때에는 화개(華蓋)와 나란히 세우는데 그것을 잡고 선 군인의 복식(服飾)도 한가지이다.
표미 豹尾
표미 표미(豹尾) : 표범 꼬리를 단 의장. 최근 발견된 당대의 벽화에 이 표미의 그림이 있다. 이 벽화에는 칼집도 표미로 장식하고 있다.
의 제도는 창[矛]위에 꽂아 크고 작기가 같지 아니하며, 그 표범의 꼬리 모양에 따라 이를 취하니, 조서[詔]를 맞을 때는 천우위군(千牛衛軍)이 이를 잡고 앞에 섰으며, 문(門)에 이르면 동덕(同德)․승평(昇平) 두 문 사이에 세운다.
금월 金鉞
금도끼의 제도는, 주부(住斧)와 비슷하되 장대의 끝에 나는 난조(鸞鳥)를 한 마리 세워, 갈 적에는 움직여 치켜오르는 형상을 하니, 왕이 거둥하면 용호친위군장(龍虎親衛軍將) 한 사람이 이를 잡고 뒤에 따른다.
구장 毬杖
구장 구장(毬杖) : 격구할 때 쓰는 공채.
의 제도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은[白金]으로 이를 감싸되, 가운데에 조금 좋은 것은 구멍에 채수(采綬)를 꿰어 늘어뜨렸다. 대례(大禮)에는 산원교위(散員校尉) 10명이 이를 잡고, 회경전(會慶殿) 양쪽 층계 밑에 서 있다.
기패 旂旆
기패의 제도는 강라(絳羅 붉은 깁)호 이것을 만들고, 서로 잇대어 대[竿]위에 서 맺어 내려뜨리며, 또는 그 꼭대기에 흰깃[白羽]으로 장식을 하는 것도 있다. 군산도(群山島)부터 이미 보이며, 다만 영군(領軍)이나 집사(執事)하는 이에게 각기 내려준다. 대개 이를 빌어 지휘하는 물건이므로 위군(衛軍)은 기패를 소중한 물건으로 여기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1 권
장 위 1 仗衛一
고려 왕성(王城)의 장위는 다른 군(郡)에 비하여 가장 성대하고, 날랜 군사가 모두 모였으며, 중구의 사절이 이르면 이들을 모두 내어 영예로운 모양을 보인다.
그 제도는 인민이 16세 이상이면 군역(軍役)에 충당되는데, 그 육군(六軍 육위六衛)의 상위(上衛)는 항상 관부(官府)에 머무르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전지[田]를 지급하여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가, 경(警 외국의 침입등 국가의 비상사태)이 있으면 무장을 하고 적지에 달려가고, 일을 맡게되면 또 그일에종사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전묘(田苗久)에 복귀하니, 우연하게도 옛날의 향민제도[鄕民之制] 향민제도[鄕民之制] : 중국 고대의 지방제도. 주제(周制)는 5가(家)를 비(比), 5비를 여(閭), 5여를 족(族), 5족을 당(黨), 5당을 주(州), 5주를 향(鄕)이라 하여, 향은 1만 2천 5백 가였다. 이후 춘추 시대의 제(齊)와 진․한(秦漢)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에 부합된다.
처음 위 나라 때[魏世]의 고려(高麗 즉 고구려) 호수는 3만에 불과하더니,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이 평양(平壤)을 함락시켰을 때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은 전세(前世) 에 비해 또 배가 증가되였다.
왕성에 머물러 숙위(宿衛)하는 군사는 항상 3만이며, 이들이 교대로 번(番)을 나누어 수비한다. 군사를 제어하는 방략 군사를 제어하는 방략: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장군(將軍)․중랑장(中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으로 편성된다. 《高麗史 百官志》
은, 군(軍)에는 장(將)을 두고, 장에는 영(領)을 두고, 대오(隊伍)에는 정보(正步)를 두었으며 열(列)에는 등(等)을 두었다. 열은 육군(六軍)으로 되었는데 용호(龍虎)․신호(神虎)․흥위(興衛)․금오(金吾)․천우(千牛)․공학(控鶴)이며, 이를 나누어 양위(兩衛)를 만드니 좌위(左衛) 우위(右衛)이며, 이를 또 3등으로 구별하여 초군(超軍) 맹군(猛軍) 해군(海軍)이라 한다.
경묵(黥墨 묵형(墨刑), 즉 먹물로 살갗을 뜨는 형벌) 하는 제도나 영둔(營屯)하는 거처는 없고, 오직 공적인 일에 사역되면 의복으로 구별할 뿐이다.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 봉액(逢掖) : 옛날 선비가 입는 녚이 넓게 트이고 소매가 큰 도포(道袍)의 한가지. 봉의(逢衣).
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 고모(金化高帽 모자위에 금화로 꾸민 戰帽)는 거의 2자[尺]이나 되고, 비단 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帶]는 사타구니[袴]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용호좌우친위기두 龍虎左右親衛旗頭
용호좌우친위기두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 : 용호좌우친위는 용호군(龍虎軍)을 말하는 것으로서, ꡔ고려사ꡕ 동상에 ‘용호군에는 두 영군(領軍)이 있고, 상장군․대장군 각 1인을 두었으며, 매영에는 장군․중랑장․낭장․별장․산원․위․대정을 두었다’ 하였다. 기두는 사기자(司旗者) 즉 군기를 맡은 사람. 고려 때의 중앙군은 2군 6위(二軍六衛) 체제인데, 2군인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은 왕의 친위군이며, 6위 가운데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興威衛)의 3위는 수도 개경의 수비와 경수(更戍)를 담당하고, 금오위(金吾衛)는 경찰, 천우위(千牛衛)는 의장(儀仗), 감문위(監門衛)는 궁성 안팍 여러 문(門)의 수위를 담당하였다.
는 구문 금포(毬文錦袍 환상(環狀)무늬가 있는 비단도포)를 입고, 도금(塗金)한 띠를 띠며, 전각 복두(展脚幞頭 복두의 일종. 후면에 좌우 양 뿔이 있는 것)를 쓰니 대략 중국의 복식(服飾) 제도와 같다. 작은 깃발[小旗]을 가지고 육군(六軍)을 호령하니 이것이 군위(軍衛)의 대장(隊長)이다. 왕부(王府) 안에는 지키는 자가 두 사람뿐인데, 사자(使者 중국사신을 가리킴)가 오게 되면 한 사람을 병장(兵仗) 안쪽에 배치하여 말을 타고 앞서서 인도하게 한다. 이것은 사신을 대우하려고 공급하는 것으로서, 왕을 모시는 사람을 거둔 것이니, 예의가 이 정도면 가히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신호좌우친위군장 神虎左右親衛軍將
신호좌우친위군장도 또한 구문금포(毬文錦袍)에 도금한 띠를 띠며, 모두(帽頭)의 뿔을 꺽어 올려서 오른쪽으로 조금 굽게 구부렸는데, (즉 절각복두(折脚幞頭)를 말함) 금화(金化)로 장식하였다. 왕이 출입할 때에는 10여 인이 우선(羽扇 새깃으로 만든 부채.의장의 하나)과 금월(金鉞 금도끼. 의장의 하나)을 잡고 시종한다.
신호좌우친위군 神虎左右親衛軍
신호좌우친위군도 구문 금포에 도금한 띠를 띠며 금화 대모(錦化大帽 금화로 장식한 큰 모자)를 썼는데, 붉은 띠를 더하여 턱 아래에 맨 것이 갓끈[紘纓] 등속과 같다. 그 만듦새는 매우 높아 바라보기에 우뚝하다. 옛날 제(齊) 나라 영녕(永寧) 제(齊) 나라 영녕(永寧) : 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제. 영명(永明)의 잘못. ꡔ남제서ꡕ(南齊書) 권 58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고려조에 이 기사가 보인다. 영명은 남제 무제(武帝)의 연호(483∼493).
연간에 고려 사신이 왔을 때 궁고(窮袴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거풍(拒風)을 썼었다.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 왕 융(王融) : 중국 남제 때 사람. 자는 원장(元長). 벼슬은 중서랑에 이르고 문사(文辭)를 민첩하게 잘하여 창졸간에 글을 지어도 모두 공교하였다 한다.《南齊書 卷四七》
이 이를 히롱하여 말하기를, ‘의복이 맞지 않는 것은 몸의 재앙이다. 머리에 쓴 것은 무슨 물건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옛날 고깔[弁]의 유상(遺像)이오.' 하였다. 지금 높은 모자의 제도를 보니, 그 거풍의 풍속은 아직도 그런가보다.
흥위좌우친위군 興威左右親衛軍
흥위좌우친위군은 분홍 무늬의 비단을 입었는데, 옷깃에 점점이 오색 모양의 꽃송이로 장식하였으며, 금화 대모를 쓰고, 흑서속대(黑犀束帶 검은 물소뿔로 만든 띠)를 띠었다. 왕의 좌우에 20여 인이 있는데 출동할때에는 이문 수화(螭文繡化 뿔 없는 용 무늬와 수 넣은 꽃 무늬)의 대선(大扇 의장의 하나)과 곡개(曲蓋 자루가 굽은 일산(日傘). 의장의 하나)를 잡고 전후에서 호종한다. 평상복은 용호・신위 이하 모두가 보라색 모자[紫帽]를 썼는데 금식(금식)이 없다. 여러 위(衛) 가운데 이들의 인품만이 조금 헌칠하다.
상육군좌우위장군 上六軍左右衛將軍
상육군좌우위장군은 개주(介冑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데, 검은 가죽과 쇠로 만들었으며, 무늬 있는 비단으로 꽤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였다. 허리 아래에는 10여개의 띠를 드리웠는데 오색 수 놓은 꽃무늬[五采繡化]로 장식하였고,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찼다. 손을 마주 끼고 국궁(鞠躬 몸을 굽히는 것)하여 궁전 문 위에 서 있는데, 수조(受詔 천자의 조서를 받는 것)를 하거나 배표(拜表 천자에게 올리는 표(표)를 절하고 보내는 것)하는 날에는 회경전(會慶殿) 중문에 6인, 양쪽 곁문[偏門]에 각각 4인이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는 것이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다. 공손하고 엄숙한 모습이 또한 가상스럽다.
상육군위중검랑장 上六軍衛中檢郞將
상육군위중검랑장은 궁금(宮禁 왕궁)에 공이 있는 사람을 차례로 옮겨 보직을 하니, 왕이 친신(親信)하여 이들의 힘을 입어 내외를 보전하고 막는 것이다. 평상복은 모두 보라색 옷과 복두(幞頭)이며, 대례(大禮 국경의례)와 재제(齋祭 불교의식과 유교의식)・수조・배표에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나오는데 투구[兜鍪]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다 진다. 보라색 무늬 비단건[紫文羅巾]을 썼는데 이것은 구슬[珠具]로 장식하였다.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차고 손에는 탄궁(彈弓 탄환을 쏜는 활)을 들었다. 왕이 출행할 때는 그 앞에 있으면서 훤화(喧嘩 큰 소리로 떠들썩한 것)가 있으면 시위를 당기는데 발사하지는 않고 경계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지게 한다. 새가 지나가면 탄환으로 쏘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가면서 순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전에 탄궁을 든 뜻이 의심스러워 까닭을 물으니, ‘어사를 탄핵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용호중맹군 龍虎中猛軍
용호중맹군은 푸른 베로 만든 좁은 저고리[靑布窄衣]와 흰 모시로 만든 좁은 바지[白苧窮袴]를 입고, 다시 투구와 갑옷을 덧입었는데, 오직 부박(覆膊 어께를 가리는 것)만이 없다. 투구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닌다. 각각 작은 창을 들고 창 위에 흰 기를 달았는데, 큰기는 한자가 안되며, 구름무늬를 그려 장식하였다. 조서를 맞이하기 위해 성에 들어가 수조(受詔)하고 배표(拜表)할 때는 여러 의장군 뒤에서 길을 끼고 전진하며, 부(府)에 모일 때와 유관(遊觀)을 할 때는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다. 병장(兵仗) 가운데 이 군사가 가장 많아 약 3만 인이나 된다.
금오장위군 金吾仗衛軍
금오장위군은 자관수삼(紫寬袖衫 자색 넓은 소매의 적삼)을 입었으며, 복두를 말아 썼는데 [著] 색동[采]으로 위를 묶어서, 각각 그 방위의 빛깔을 따라 한 방위가 한 대(隊)가 되고 한대가 한 빛깔이 되며, 간간이 둥근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다. 번개(幡蓋 번은 기치, 개는 청개(靑蓋). 황개(黃蓋) 등 의장의 한가지) 등 의물(儀物)을 들고 창합문(閶闔門) 밖에 섰다.
공학군 控鶴軍
공학군(숙위 근시(宿衛近侍)하는 군사)은 자문나포(紫文羅袍)를 입었는데, 오색으로 간간이 크고 둥가나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고 절각복두(折脚幞頭)를 썼다. 무릇 수십인이 조여(詔與 조서를 실은 가마)를 받들며, 왕이나 사신이 사사로이 보러 왕래할때는 상비(箱篚 상자와 대그릇)를 받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2 권
장 위 2 仗衛二
천우우장위군 千牛右仗衛軍
천우우장위군은 붉은 착의(窄衣 좁은 옷)를 입고 피변(皮弁 가죽으로 만든 고깔)을 썼으며, 검은 뿔로 만든 띠[黑角束帶]를 띠었다. 허리에는 두쪽의 옷 가리개가 있는데, 짐승 무늬로 장식하였고, 손에는 작은 창[小戈]을 들었는데 창위에 한개의 북을 꿰어 다니 그 제도가 <중국의> 도(鞉 작은 북)와 같다. 화극(畵戟 그림을 그려넣은 창)‧등장(鐙杖)‧표미(豹尾 표범 꼬리로 장식된 의장물(儀仗物))등속을 든 사람도 있는데 복식은 모두 한 모양이다.
신기군 神旗軍
신기군(고려 금군(禁軍)의 일종)은 가죽으로 머리를 덮었는데, 상부에 목비(木鼻)를 만들어 짐승의 이마 모양이 되게 한 것은 용맹스러움을 표시한 것이다. 붉은 저고리는 짧고 뒤에 또 두 쪽의 옷가리개를 덮붙이고 있는데, 이는 짐승 무늬로 장식이 돠어 있다. 조서(詔書)를 받거나 예(禮)를 받을 때는 앞에 진열하여 오방대신기(五方大神旗)를 펼쳐 수레에 싣고 향하는 곳을 따라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수레마다 10여 인씩 탄다. 산길이 험난하고 높은데다 마침 큰 더위에 땀이 흘러 등을 흠뻑 적시니, 다른 장위군에 비하여 가장 수고가 많다.
용호상초군 龍虎上超軍
용호상초군(용호위의 한 군)은 푸른 착의를 입고, 문라두건(文羅頭巾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앞깃과 등에 모두 단호(團號 둥근표시)가 있는데, 그 제도는 한결 같지 않다. 왕궁의 사령(使令)은 모두 용을 그린 무늬[龍文]로 하고, 나머지는 서려있는 꽃무늬[盤化]로 하였는데 모두가 금박을 먹이고 간간이 수 놓은 것도 섞였는데 그 제작이 정교하다. 관중(館中 사신이 머물러 있는 객사)의 삼절(三節) 삼절(三節) : 정사・부사 이외의 관원들을 상・중・하 3 절로 나눈다.
이 있는 자리 곁에 두서너 사람을 배치하고 순라(巡邏)라 이름하니, 이는 실로 비상사태를 살피는 것이다. 사신이 출입할 때는 또 사령을 지급하는데, 상절(上節)에게는 10 인이고 나머지는 등급에 따라 강쇄(降殺)한다.
용호하해군 龍虎下海軍
용호하해군은 청포 착의를 입었는데, 맴도는 소리개[盤鵰]를 누렇게 수놓았으며 붉은 가죽과 구리로 만든 장식을 띠고 붉은 채찍을 들었다. 순천문(順天門)의 수위(守衛)가 20여 인인데, 매향 관회(館會)에 이르면, 뜰 가운데 벌여 있다가 술잔이 돌면 ‘예' 하고 물러나 동서 두 줄로 엇갈려 돌아가며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관부문위교위 官府門衛校尉
관부문위교의는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 보라색 무늬의 비단으로 만든 좁은 옷)를 입고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썼으며, 오른쪽에 장검(長劍)을 차고서 손을 마주끼고 섰다. 그 맡은 직책을 보면 군사의 계급을 총할하며, 전진(戰陣)에서 적진의 수급(首級)을 노획하고서도 은자(銀子)의 하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차레로 여기에 보직되어 왕부(王府)에 머무르면서 여러 문들을 수위한다. 회경문(會慶門)에서부터 좌・우친위장군(左右親衛將軍)을 배치하였는데, 그 밖에는 안은 광화문(廣化門)과 밖은 선의문(宣義門) 등 여러 문에 모두 있으며 사관(寺觀 불사와 도관(道觀))이나 관부(官府)에서도 또한 쓴다. 그러나 복식과 인재가 모두 앞의 것에 미치지 못하고, 한때에 임시로 배치하였다가 다른 명색(名色)의 사람으로 충당하는데, 이는 일등 품질(品秩)이 아니다.
육군산원기두 六軍散員旗頭
육군산원기구는 자연도(紫燕島 인천항 서쪽 27리에 있음)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이 또한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이다. 전각복두를 쓰고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에 속대를 띠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기패(旗旆)등 장위의물(仗衛儀物)을 들었다. 영군집사(領軍執事)는 대(隊)마다 각각 한 사람인데 행렬의 진퇴는 이들을 보고 표준을 삼으니 바로 중국의 인원(員人)과 같은 유이다.
좌우위견롱군 左右衛牽攏軍
좌우위견롱군은 자색착의(紫色窄衣)를 입으니 연작문금(練鵲文錦 까치 무늬가 든 누인비단)이다. 검은 깁[烏紗]을 연결하여 만든 연모(軟帽)를 쓰며, 베적삼에 짚신을 신고 많은 말을 어거한다. 오직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와 상절관(上節官)에게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용호초군으로 대신하였다.
영군랑장기병 領軍郞將騎兵
영군랑장기병은 복식의 등급이 한결같지 않다. 무릇 자색 비단 전포[戰袍]를 입고 흰 고의[白袴]에 검은 짚신과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에 구슬로 장식한 것은 모두 고려 사람이었다. 그리고 청록긴사대화전포(靑綠緊絲大花戰袍 청록색 촘촘한 실로 짠 옷감에 큰 꽃무늬가 있는 전포)를 입었으며, 바지가 자색․황색 또는 검은 빛인 것과, 머리를 깍고 두건이 길지 않으며 정수리에 딱 붙게 쓴 것은, 듣건데 글안(契丹)의 항졸(降卒)이라 한다. 사부(使副)가 왕부(王府)에서 화합하고 봉선고(奉先庫 선왕의 제사때 쓰는 곡식등 제물을 두는 곳집)앞 언덕 위에 돌아왔을때 앞에서 인도하는 전구(前驅) 수십 기(騎)를 보았는데, 말방울을 울리며 치닫고 안장과 등자(革登子) 사이에서 날뛰는 것이 경쾌하고도 민첩하였다. 이것은 무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도이(島夷 고려를 말함)가 편벽되고 먼곳에서 우연히 경졸(勁卒)을 만나 님이 알아주기를 바라기에 급급한 것을 보니 또한 가소로왔다.
영병상기장군 領兵上騎將軍
영병상기장군은 자색 비단 착의[紫羅窄衣]를 입고, 전각복두를 썼으며, 오른쪽에는 호창(虎韔 호랑이를 그린 활집)을 띠고 왼손에는 활과 살을 들었다. 병장(兵仗)안에 무릇 1백여 인을 세워 두는데, 이를 양대(隊)로 나누어, 매양 인사(人使)가 나갈 때는 앞에 있다가 광화문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정지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귀관(歸館)하면 다시 순천문의 외문(外門)에 서 있는다. 행렬이 극히 정제하고 기율이 있어 낭기(郎騎)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3 권
병 기 兵器
범엽서 범엽서(范曄書) : 범 엽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 자는 울종(蔚宗).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글을 잘하였다. 문제(文帝) 원가(元嘉 424-453) 초에 여러 사가의 후한(後漢)의 사서(史書)를 정리하여 다시 새로운 ꡔ후한서ꡕ를 완성. 여기 인용된 기사는 동서(同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이다.
(范曄書 후한서)에 이르기를 ‘이(夷)는 뿌리[柢]이니, 어질어서 생육하기를 좋아함[仁而好生]을 말하는 것이니, 만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천성이 유순하다.' 하였다. 따라서 서융(西戎)이 싸움을 좋아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팔조(八條)로 교화한 땅이지만, 그러나 그 병기가 매우 간단하고 성긴 것이 어찌 그 성품에 근원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병법에 이르기를 ‘병기가 견고하지 못하면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고려 사람의 병기가 성기고 간단한 것은 여러 차례 흉노(匈奴)에게 곤액(困扼)을 당하여 능히 더불어 겨루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습속이 다른 병기라 해도 각각 베푸는 바가 있는 것이니, 알아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 명물(名物)을 갖추어 완쪽에 그린다.
행고 行鼓
행고의 모양은 아악(雅樂)의 작은 북[搏拊]과 약간 닮았는데 중강(中腔 북의 불룩한 부분)이 조금 길고 구리 고리로 장식하였으며, 보라색 띠로 죄어 허리 아래 매었다. 군대가 행진하면 앞에서, 쇠징[金 ]과 간격을 두고 치는데 그 음절이 자못 느리다. 쇠징의 모양은 중국의 제도와 다르지 않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궁시 弓矢
궁전(弓葥)의 제도는 형상이 간략하여 탄궁(彈弓)과 같다. 몸집의 전 길이가 5자이며, 화살은 대를 사용하지 않고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더 짧고 작다. 화살을 쏠 때는 시위가 가득히 당기어지기를기다리지 않고 온 몸을 들어 쏘아 보내니, 화살이 비록 멀리 나가기는 해도 힘은 없다. 전문수위(殿門守衛)와 장위군 내의 기병 및 중검랑장(中檢郞將)이 모두 호창(虎韔 활집이름)에 살을 끼고 있으니, 이는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관혁 貫革
과녁의 모양은 대략 도고(鞉鼓)와 같은데, 양변에 모두 가죽으로 만든 귀가 있어서 움직이면 소리가 나며, 창[矛] 위에 꾀어 달았다. 대(隊)마다 약 20여 인이고, 대례(大禮)에는 천우좌우장위군(千牛左右仗衛軍)으로 잡게 한다.
등장 鐙杖
등장은 국왕이 조서를 받을 때마다 베푸는데, 위는 말둥자를 만들고, 대[竿]에는 붉은 칠을 하였다. 사자가 앞으로 나갈 때 천우위군(千牛衛軍) 수십인이 이를 잡고, 왕의 행차에는 앞에 있는데, 등자는 도금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제도는 모두 쇠로 만들었다.
의극 儀戟
의극(의장에 쓰는 창)은 두 가지 등급이 있다. 회경문(會慶門) 안에 각각 12개를 진열하고, 상하를 금동(金銅)으로 장식하였는데 형체가 매우 크다. 조서를 맞고 연회를 베풀 때는 병장(兵仗) 안에 진열된 것은 크기가 겨우 6자쯤 되는데, 대체로 중국과 대략 같으나 제작의 대소가 같지 않을 뿐이다.
호가 胡笳
호가의 제도는 위가 빨고 아래는 굵으며, 그 모양이 약간 짧다. 사자가 군산도(群山島)에 처음 이르렀을 때 순위장(巡尉將 순시하는 위의 장수)이 주졸(舟卒 수병)을 맞아 푸른 옷을 입고 이를 부는데, 그 소리가 오열하는 듯 곡조를 이루지 않고 오직 무리로 시끄럽게 더들썩함이 문맹(蚊虻모기와 등에)의 소리처럼 들렸을 뿐이다. 조서를 맞을 때는 앞에서 행진하며, 매양 수십 보마다 문득 조금 물러나 조여(詔輿)쪽으로 얼굴을 돌려 불고, 소리가 그쳐야 행진을 하는데, 그런 뒤에야 징과 북을 쳐서 박자를 맞춘다.
수패 獸牌
수패(방패의 일종)의 제도는, 몸체는 나무이고 그 뒤에 가죽을 덮었으며 산예(狻猊 사자) 모양을 그렸다. 위에 다섯 개의 칼을 꼿고 꿩 꼬리로 가리웠는데,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또 능히 상대방을 찌를 수 있으나, 그 견고하고 예리함을 남에게 훤히 보이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여러가지 유희하는 아이가 가지는 물건 같으니, 족히 시석(矢石)을 막아내지 못할 듯하다. 지금 고려의 병장 가운데는 두 가지가 모두 있으나 작고 큰 차가 있을 뿐이다.
패검 佩劍
패검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날이 예리하여 백금(白金)과 오서(烏犀 검은 물소뼈)로 섞어 만들었다. 해사어피(海沙魚皮 바다상어 가죽)로 칼집을 만들고, 곁에 환뉴(環紐 칼집 둘레에 고리를 달아 매는 것)를 만들어 색 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革帶)상옥체(象玉王彘)봉필(琫珌 칼의 장식, 즉 위의 장식은 봉, 아래 장식은 파이다.) 등속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유제(遺制)이다. 문위교위(門衛校尉)와 중검랑기(中檢郞騎)가 모두 찼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4 권
기 치 旗幟
고려의 의장제도[制度]는 매양 재제(再製)와 사천(祀川)할 때는 10면에 큰기를 세우며, 각각 그 방위의 빛깔에 따라 신물(神物)을 그리고 이를 ‘신기’(神技)라 하니, 그 제도가 매우 넓다. 기마다 비단 몇 필(匹)을 쓰는데, 아래에는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고, 수레마다 붉은 옷 입은 장위군(仗衛軍) 십수 인이 끌고 가다가 왕이 있는 곳을 따라 차례로 서 있게 마련이다. 사면에는 각각 큰 새끼줄을 달아 풍세(風勢)에 대비하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나라 사람들은 신기를 세운것을 바라보면 감히 그곳을 향하여 가지 못한다. 오직 조서가 처음 입성하여 예를 받을때까지 만 모두 특별히 사용하니 이는 송 나라 황제의 명령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밖에 오방(五方) 중기(中旗)가 있으니, 군산도 (群山島)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보았는데, 오직 홍기(紅旗)에만 용호(龍虎)를 장식하였고 맹군 갑사(甲士)가 잡고 있었다. 또 작은 백기(小白旗)가 있는데, 크기가 손바닥에도 차지 않으며, 창에 매단 것이 아이들 장난과도 같다. 지금 아울러 그림에 나열한다.
상기 象旗
상기(코끼리를 그린 기, 남방의 상징)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旒)이 모두 검으니 이는 수수(水數 즉 북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그렸는데, 앞에 한 호아 (胡兒 동호[東胡]아이, 즉 굴안 사람)가 한 자루의 금과(金戈)를 들고, 다시 큰 새끼줄로 그 머리를 끌어 잡아당기니 왼쪽을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행진할 때는 그 뒷 멍에에 달고 지세(地勢)에 따라 붙둘고 전진하며, 예를 행할 때가 되면 방향에 의하여 세우는데, 상기의 위치는 검은것을 우선으로 한다. 「예경」(禮經 예기)을 살피건대, ‘무거’(武車)는 깃발을 펴고, 덕거(德車)는 깃발을 맨다. 무거(武車)는.......맨다 : 이는 「예기」 곡례펀(曲禮篇)에 보이는데, 주(注)에 “무거는 위무를 숭 상하므로 꽃처럼 펴고, 덕의 아름다움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깃대에 잡아 매는 것이다.” [武車尙威武 故舒散若花 德美在內 故압기於竿] 하였다.
하였으니, 수레에 기를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린 것이요, 특별히 동이(東夷)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겠다.
응준기 應集旗
응준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旒]이 모두 붉으니, 이는 화수(火數 즉 남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새와 새매가 날아 오르는 모양을 그리니, 빠르고 속한 의취가 있다.
「주관」 (周官 「주례」<周禮>에 ‘새매로 기를 만든다’ 새미도.......만든다 : 「주례」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보인다.
(鳥集爲旗)하였으니, 지금 이 붉은 기에 새매를 쓴 것도 또한 우연히 옛 제도에 부합한다. 그 항렬은 상기의 다음에 있다.
해마기 海馬旗
마기(馬旗)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푸르니, 목수(木數 즉 동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 한 마리의 말을 그렸는데, 앞 어깻죽지에 갈기가 있어 마치 불이 치솟는 것 같으니, 대개 말은 화축(火畜 불기운을 지닌 가축)이기 때문이다. 푸른 기에 그려서 나무와 불이 상생(相生)하는 것을 상징하고 위치는 청룡(靑龍 동방의 별자리 이름)과 주작(朱雀 남방의 별자리 이름) 두 신(神)을 응하였다. 그 항렬은 응기(應旗)의 다음이다.
봉기 鳳旗
봉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누르니, 토수(土數 즉 중앙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 나는 봉(鳳)을 그리니, 봉의 물건됨이 몸에 오채(五彩)를 띠었고, 위치는 중궁(中宮)을응하였다. 대개 오행(五行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은 흙[土]이 아니면 나지 못하는데, 다섯 방위의 빛깔이 우모(羽毛 봉황새의 털)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형상을 취한 것이다. 그 항렬은 태백기(太白旗) 다음에 있다.
태백기 太白旗
태백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희니 금수의 수[金數 즉 서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사람 하나를 그렸는데, 금관을 쓰고 규옥(圭玉)을 들었으며, 누런 옷에 초록 겉옷을 걸쳤는데, 이는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한 것이다. 한 마리의 거북을 탔는데, 거북은 뱀의 머리가 있어, 그 합한 모양을 취하였다. 대개 금(金)은 수(水)의 모체가 되고 수는 능히 금을 생(生)하는 것이니 위치는 백호(白虎 서방의 신)와 진무(眞武) 진무(眞武) : 즉 현무(玄武). 송(宋) 상부(祥符 1008∼1016) 연간에 왕실선대(先代)의 이름을 휘하여 ‘현무를 진무’로 고친 것.
의 두 신에 응한다. 「예경」(禮經)에 ‘국군(國君)의 행차에는 앞에 주작(朱雀)이 있고 뒤에 진무(眞武)가 있으며, 왼쪽에 청룡, 오른쪽에 백호가 있다’ 하였으니, 두 기에 서로 나타난 것이 자뭇 고제 (古制)에 부합한다. 그 항렬은 마기(馬旗)의 다음에 있다.
오방기 五方旗
북방의 기는 흑색의 한 술[一旒]로 된 것이며 그 너비는 두 폭인데, 그림이나 수놓은 무늬가 없다. 사신이 처음 국경에 이르면서 부터 임성할 때까지 여러 기와 더불어 전도(前導)가 되며, 항렬은 차례가 없고 세워 놓은 것도 무수한데 푸른 옷 입은 군사로 이를 잡게 한다 . 처음에 국신 사부(國信使副 국신을 가지고 가는 사행(使行)의 정사와 부사)가 구례(舊例)에 의하여 금수(錦繡)로 된 사이사이에 번쩍이는 광택이 있는 기 40면(面)을 주었다가, 조서가 처음 입성할 때 주인(舟人 뱃사람)을 시켜 들고 전도하게 하였는데, 들판이 휘황하게 비치니, 고려 사람들이 놀라 구경하면서 자못 스스로 그 비루한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남방의 기는 붉은 색 한 술[赤色一旒]로 된 것으로, 가운데에 신인(神人)을 그렸는데, 손에 나무 채찍을 들어 다른 것들과 차이가 있다. 오방의 기 가운데 홀로 붉은 기만이 많았다.
동방의 기는 푸른색 한 술로 된것인데, 가운데에 그림과 수가 없다. 넓고 좁은것, 또는 많고 적기가 여러 기들과 비슷하다.
서방의 기는 흰색 한 술로 된것으로 역시 그림과 수가 없으며, 여러 기에 비하여, 숫자가 약간 적었다.
중앙의 기는 황색 한술로 된 것이며, 역시 그림과 수가 없다.
오직 군산도(群山島)와 자연도(紫燕島)에서 신사(信使)를 맞이하여 해안에 진열했을 때에만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여러 채색이 섞인 가운데 번적이는 광택이 나는데, 네 모퉁이에 운기(雲氣)를 그린 것이 있는데, 이는 여러 고을의 순위(巡尉)와 전선(戰船)의 나병(邏兵)이 들고 있었다.
소기 小旗
소기의 제도는 붉은 술에 흰 바탕으로 되고, 위에 초록색 구름을 그렸다.
사신이 입성하고 국왕이 조서를 맞이할 때 용호군(龍虎軍) 수만 인이 갑옷을 입고 기를 잡고 길 양편으로 행진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권
거 마 車馬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는데, 군사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나라를 제정할 때에 반드시 수레의 수를 보아 그 크고 작음의 차등을 두었으니, 「시」(詩 모시 毛時)의 송(頌)에 노(魯)와 위(衛)의 부(富)를 칭송함도 모두 말(馬)로써 말한것이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나,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또한 다르다.
채여 采輿
채여는 셋인데, 하나는 조서를 봉안하고, 또 하나는 어서(御書)를 봉안하며, 앞의 한 채여에는 대금향구(大金香毬) 대금향구(大金香毬) : 도금한 향구로 혼천의 (渾天儀)와 같다. 그 가운데 3층으로 된 빗장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를 담았다. 그 제도는 오색 무늬의 비단을 쓰고 사이사이 금수(錦繡)를 섞어 맺었으며, 위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강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왕세자(王世子)와 고려의 관리들이 조서를 맞아 길목에서 채여를 바라보고 절하였다.
견여 肩與
견여의 제도는 대략 호상(胡床)과 같은데, 등(藤)으로 상란(翔鸞 나는 난새)을 꿰고, 꽃무늬로 붉게 칠했으며, 사이사이 금을 칠하여 꾸몄다. 위에는 비단방석을 깔고, 네 개의 대에는 각각 채색 실을 싸매었다. 군산도로부터 입성할 때까지 매양 사관을 나서면 반드시 견여로 받드니,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가 참람된 예라 하여 감히 타지 못하고, 오직 전장(前丈 얖선 장위군) 가운데 행진하여 의식을 삼았을 뿐이었다.
우거 牛車
우거의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여 아주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의 멍에에 소를 매어 끌게 하는데, 매양 그 위에 물건을 싣고는 반드시 새끼줄로 꿰매어야 비로소 기울어 엎어짐을 면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개가 산길이어서, 행진하면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왕마 王馬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혹은 금 혹은 옥으로 되었으니, 모두 조정(朝廷 증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장)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 융坐 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 )를 까는 것과 같다.
사절마 使節馬
고려는 대금(大金 여진족이 세운 나라 이름)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그 나라에는 준마(駿馬)가 많다. 그러나 말 기르는 사람[ 人]이 길들이기를 잘못하여, 그 걸음이 빠른 것은 모두 천연적인 것이요, 사람의 힘을 빌어서 그런것이 아니다. 안장의 제도는 오직 왕이 타는 것만이 붉은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금옥 장식을 더한 것이고, 대신들은 보라색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은으로 장식을 하였다. 나머지는 글안의 풍속과 같이 또한 등급이 없다. 처음 사신이 사관에 도착하면 날을 가려 조서를 받는데, 받드는 안마(鞍馬 안장 갖춘 말 )가 대략 왕의 제도와 같았다. 그래서 사자가 참람되고 사치하다고 굳이 사양하기를 여러 차례 한 뒤에야 고려 관원이 타는 것과 같은 다른 말로 바꾸었다. 상절(上節)이 탄것은 사부(使副)의 것보다 한 등급 내리고, 중절(中節)은 등급에 따라 강쇄하였다.
기병마 騎兵馬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다. 나전으로 안장을 만들고, 안장의 끈과 고삐는 백지(栢枝)와 마노석(瑪瑙石 보석의 일종)으로 만들었는데, 사이사이 황금과 오은(烏銀)을 섞어 장식하였다. 양쪽 원( 수레의 뒤를 누르는 장치)에는 거위 목을 그렸는데 몸의 배나 되며, 고려 사람은 이를 ‘천아’(天 )라 한다. 가죽 고삐와 방울 울리는 것도 또한 옛 뜻이 있다.
잡재 雜載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
또 낙타(駱駝)로 무거운 것을 끄는 것도 없으며 사람은 매우 가벼운 것이나 지고 간다. 그래서 이것저것 싣는 데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제도는 두개의 그릇을 좌우에 장치하고 말 등에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물건들을 모두 그 그릇 속에 넣어둔다. 머리를 얽고 가슴을 매는 것은 승기(乘騎 타는말)의 제도와 같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모는데 그 걸음이 자못 빠르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6 권
관 부 官府
당・우(唐虞) 때에는 백 명의 관원을 두었고 하・상(夏常) 때는 관원이 늘어났으나 그것만으로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주(周) 나라에 이르러서는 상세하게 갖춰져, 천지(天地)와 사시(四時)를 위로 관찰하고 아래로 살피어 도(道)에 맞게 운영(運營)하여 정사가 잘 거행되었으니, 어찌 형식만 갖추어 실지와 맞지 않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고려는 초기에 12등급의 관원을 두고 오랑캐의 언어로 명칭을 붙이고서 다시 정화(淨化)하지 않다가, 황화(皇化 송나라 황제의 교화)를 입게 되면서부터 관(官)을 설치하고 부(府)를 두어 중화를 모방하여 부르기는 하였으나, 직(職)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적에는 오히려 이풍(夷風)을 그대로 따르므로 이따금 형식만 갖추고 실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의리를 사모하는 뜻은 역시 가상하다고 할만하다.
대성 臺省
관부(官府)의 설치는 대개 모두 조정(朝廷)의 아름다운 명칭을 모방하였으나 그 직(職)을 맡기고 벼슬을 제수함에 이르러서는 실지가 이름과 맞지 아니하여, 한갖 형식만 갖춘 것이고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상서성(尙書省)은 승휴문(承休門)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고 양쪽의 행랑은 10연 간씩이며, 중앙에 당(堂) 3간을 만들었는데 곧 관원들이 일을 보도록 한 곳으로서, 정사가 여기에서 나온다.
상서성 서쪽과 춘궁(春宮) 남쪽 앞에 문 하나가 트였고 안에 3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중앙의 것이 중서성(中書省)이고 왼편의 것이 문하성(門下省)이고 윗편의 것이 추밀원(樞密院)이니, 곧 국상(國相)・평장사(平章事)・지원사(知院事)가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예빈성(禮賓省)은 건덕전(乾德殿) 앞쪽 옆에 있는데 사방 이웃 나라의 빈객(賓客)을 관장하는 곳이고, 팔관사(八關司)는 승평문(昇平門) 동쪽에 있는데 재제(齋祭)의 일을 맡은 곳이고, 어사대(御史臺)는 좌동덕문(左同德門)안에 있는데 풍헌(風憲 풍교와 헌장)을 펴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상승국(尙乘局)은 거마(車馬)를 저장하는 하는 곳이고, 군기감(軍器監)은 갑장(甲仗)을 간수 하는 곳이다.
빈성(賓省)은 예의(禮儀)를 맡고, 합문(閤門)은 찬도(贊導)를 맡아 보고, 대영창(大盈倉)은 보화(寶貨)를 저장는 내탕(內帑)이고, 우창(右倉)은 곡식을 축적(蓄積)하는 곳인데, 이것들은 모두 왕이 거처하는 내성(內城)에 있다.
광화문(光化門) 밖으로 말하면 관도(官道)의 북쪽에 있는 것은 상서호부(尙書戶部)요, 또 그 동쪽의 것은 공부(工部)・고공(考功)・대악국(大樂局)・양온국(良瑥國)으로 네개의 문이 모두 북으로 열지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각각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관도의 남쪽에는 병・형・이(兵形吏) 삼사(司三)가 있는데, 그 문은 남쪽에 열지어 북쪽을 향하였고, 또 동남쪽으로 수십 보쯤에 있는 것은 주전감(鑄錢監)이고 조금 북쪽의 것은 장작감(獎作監)이다.
감문(監門)・천우(千牛)・금오(금오) 3위(가)는 북문(북문) 안에 있는데 금오가 조금 동쪽에 가까이 있는것은 호위의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대시(大市)・경시(京市) 2사(司)는 남쪽 큰 거리에 있는데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관시(關市)의 정사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관현(管絃악기) 같은 것에 있어서도 방(坊)이 있고 궁전(弓前)은 사(司)가 있으며 복두(僕頭)는 소(所)가 있고 점천(占天 관상하는것)은 대(臺)가 있으니, 무릇 이들은 모두 외성(外城) 안에 있다.
또한 개성부(開成府)가 성(城)과 40리 거리에 있는데, 모든 백성들의 혼인.전답.투송(鬪訟)하는 일을 관리한다.
국자감 國子監
국자감은 전에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는데 편액을 ‘국자감’이라고 했다.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세우고 양쪽 향랑( )에 재사(齎舍)를 설치하여 제생(諸生)들을 거처하게 했다. 전의 제도는 지극히 좁았는데 지금은 예현방(禮賢坊)으로 옯겼으니, 학도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에 그 제도를 키운 것이다.
창름 倉廩
창름의 제도는 관약(關 빗장이나 자물쇠)을 걸지 아니하고 밖에 담장[牆垣]을 쌓되 오직 문 하나를 내어 도적을 막는다. 내성(內城) 안에 3창(倉)이 있었는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우창(右倉) 뿐이다.
선의문(宣義門) 밖에 있는 창고는 ‘용문창’(龍門倉)이요 홍주(洪州) 산중(山中)에 있는 창고는 ‘부용창’(富用倉)이니, 세속에 전하기를 ‘부용창’(富用倉)이라 함은 잘못이다.
대의창(大義倉)은 전에는 서남문 (西南門)에 있었는데 쌀 3백만을 쌓았었다. 화재를 만나 모두 타 버리게 되자 드디어 장퍠문(長覇門)으로 옮겼으니, 고려 사람들이 여러 물이 모이는 곳이므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따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해염(海鹽)・상평(常平) 2창(創)이 있는데, 서로 거리가 수백 보쯤 된다. 오직 부용창과 우창은 평상시에는 풀지 아니하고 전쟁・수재・한재에 대비하는 것을 저장하는데 그 쌓은 모양이 둥근 집과 같으니, 바로「시경」(詩經)에 이른바 ‘또한 큰 창고가 있도다’ 한 것이 이것이다. 바닥에다 훍으로 대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두 자「尺」쯤 되며 풀을 엮어 멱서리[ ]을 만들어 그 속에 미곡 한 섬씩을 담아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丈]이나 되어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는다.
대개 쌀은 기운이 소통되지 아니하면 부패하게 되는데, 지금 고려의 창름에는 비록 두어 해가 된 쌀이라도 새로운 것은 멱서리로 쌓는 법을 써서 다소 그 기운이 소통하기 때문이다.
국상(國相)에게는 해마다 쌀 4백 20멱서리를 주되, 치사(致仕 지금의 정년퇴임과 같다)하면 반으로 주고, 상서(尙書). 시랑(侍郞)이하는 2백50멱서리, 경(卿). 감(監). 낭관(郎官)은 1백50멱서리, 남반관(南班官)은 45멱서리, 제군(諸軍)의 위(衛). 녹사(錄事)는 19멱서리인다, 그중 무신(武臣)은 이등급에 비교하여 문관(文官)과 서로 비등하게 올려준다.
내・외직(內外職)의 현임(現任)으로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산관 동정(散官同正)으로서 녹은 없이 전토(田土)를 급여(給與)받은 사람이 또한 1만 4천여 명인데 그 전토는 모두 지방 고을(外州)에 있으며, 전군(佃軍)이 농사지어 시기에 맞추어 가져다 바치면 나누어 급여해 준다.
부고 府庫
봉선고(奉先庫)는 광화문(廣化門) 동쪽과 순천관(順天館)의 관도(官道) 북쪽에 있다. 앞문이 2간인데 조금 동쪽으로 문을 냈고 왼쪽에 집 하나가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높아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오른쪽에 누각(樓閣) 하나가 있는데 동쪽면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고 오직 그 기둥에 방시(방示)하기를 ‘저수 방화’(貯水防火)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안에 저장한것은 바로 선왕(先王)을 받드는 제기(祭器)와 생뢰(牲牢 제물)요, 또한 국기(國忌 왕이나 황후의 제삿날)에는 재료(齋料)를 여기에서 지급하여 모든 절(寺) 에 풀어 준다.
약국 藥局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귀신을 섬길줄만 알아, 저주(詛呪) 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왕 휘(王徽)때 사신을 보내어 입공(入貢)하고 의술(醫術)을 구해 간 뒤로부터 사람들이 점차로 배워 익혔으나, 그 방술에 정통(精通)하지는 못했다.
선화(宣化) 무술년(고려 예종<睿宗> 13.1118) 에 사신이 와서 소장( 소章)을 올려, 의직(醫職)을 내리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므로, 상(上)이 그 건의를 허락하여 드디어 남줄(藍茁) 등을 고려로 보냈는데, 그런 지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의술을 통한 자가 많아져서, 보제사(普濟寺) 동쪽에 약국(藥局)을 세우고 3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는 ‘태의’(太醫), 둘째는 ‘의학’(醫學), 세째는 ‘국생’(局生)이라 하여, 푸른 옷에 나무 홀(笏 벼슬아치가 조정에 들어갈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것) 차림으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다.
고려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으로써 교역(交易) 했으나, 오직 약을 사는 것은 간혹 전보(錢寶)로써 교역하였다.
영 어 囹圄
영어의 만듦새는 그 담장이 높아 모양이 환도(環도)와 같고 중앙에 집이 있으니, 대개 옛날의 원토(園土 감옥)와 같이 만든 것이다. 지금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어 형부(形部)와 마주하고 있다.
가벼운 죄인은 형부로 보내고 도둑 및 중죄인은 옥(獄)으로 보내는데, 포승으로 잡아매어 한 사람도 도망갈 수 없고, 또한 가추(枷 )를 채우는 법도 있다. 그러나 지체시키기만 하고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여 철을 넘기고 해를 지나게 되기까지 하는데, 오직 금(金)으로 속바쳐야만 풀려나게 된다.
무릇 장형(仗形)을 집행하는 법은, 하나의 큰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두손을 그 위에 묶어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치는데,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에서 열까지를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직 대역(大逆)과 불효(不孝)죄는 참형(斬刑)하고, 다음은 뒤로 결하여 비골( 骨 넓적다리뼈)과 가슴이 서로 닿도록 하여 피부가 터지게 되어야 그만두니, 또한 거열(車裂)과 같은 유이다. 외방 고을에서는 형살(刑殺)을 시행하지 아니하고 모두 칼을 쉬워 왕성(王城)으로 보내는데, 해마다 8월에 여수(廬囚 죄상을 참작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는 것) 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7 권
사 우 祠宇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父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방자와 압승 압승(壓勝) : 사악한 기를 꺾어 힘을 못 쓰게 만든다는 방술의 일종.
(壓勝)을 알 따름이다.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이 되면 으례 남녀가 떼지어 난잡한 노래를 하고 귀신⋅사직⋅영성 영성(靈星) : 천전성(天田星)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한초(漢初)에 영성을 제사한 기록이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보인다.
(靈星)을 제사하고, 10월에 하늘을 제사하기 위해 큰 모임을 갖는데 그 것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나라 동쪽에 굴이 있는데 수신(수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맞아다가 제사한다. 귀신.......제사한다 : 이상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 고구려 조의 기사를 추린 것이다.
’ 하였다.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 산에 의지하여 나라 남쪽에 성을 쌓고 건자월(建子月 북두성의 자루 끝이 자(子)의 방향을 가리키는 달)에 관속들을 거느리고 의장물(儀物)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한다. 후에 글안(契丹)의 책명(冊命)을 받을 때와 그들이 세자(世子)를 세울 때에는 역시 거기서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10월에 동맹하는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소찬을 차려놓고 그것을 팔관재(八關齋)라하는데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 그 조상의 종묘는 나라의 동문 밖에 있는데, 왕이 처음 습봉(襲封 왕위의 계승을 말함) 할때와 3년에 한 번씩 하는 큰 제사 때에만 거복(車服)과 면규(冕圭)를 갖추고 친히 제사하고 그 나머지는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한다.
원단(元旦)과 매달 초하루와, 춘추와 단오에 다 조상의 신주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俯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중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노래하여 밤낮을 계속한다. 또 일반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왕과 비빈이 다 가서 구경하고 나라 사람들은 도로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들이 신사(神祀)로 백리 안에 있는 것에는 사시에 관원을 보내어 태뢰(太牢 제물로 쓰는 소) 로 제사하게 한다. 또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그 경내에 두루 다 베풀어 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신을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분담시켜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여 백금(白金 은을 말함)1천냥을 모으고, 나머지 물건들도 이와 맞가는 데 그것들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이 거처하는 궁실 말고는 오직 사우(祠宇)의 만듦새만이 화려하다. 여러 사찰 중에서 안화사(安和寺)가 으뜸인데, 그것은 거기에 신한(宸翰 임금이 쓴 글을 말함)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곳에서의 일로 도로에서 지내온 것과 재사(齋祠)를 가 보고서 이목에 접한 것들을 취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머지 보지 못한 제도는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복원관 福源觀
복원관 복원관(福源觀) : 고려에서는 복원궁(福源宮)으로 불렸다. 그 건립 연대는, 「송사」(宋史)4백 87권 고려전에는 대관(大觀) 연간(1107∼1110)으로 되어 있고, 「고려도경」에서는 정화(政和) 연간(1111∼1117)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는 예종(睿宗) 15년(1120) 조에 친초(親醮)한 기록이 처음 나와,지금으로서는 확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고려 예종 치하에 세워진 것만은 틀림없다. 고려 측의 복원궁에 관련된 참고할 만한 기록으로는 고려 중기의 문인 임춘(林椿)이 쓴 「일재기」(逸齋記)가 있다. 《西河先生集 卷五, 東文選 卷六四》에 이 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른 복원궁의 건립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은 왕부(王府 왕궁을 말함)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있는데 정화(政和 송 휘종(宋 徽宗) 연호. 1111∼1117) 연간에 세워진 것이다. 앞 방은 ‘부석지문’ 부석지문(敷錫之門) : ‘부석’은 널리 펴내어 뭇사람에게 준다는 뜻. 《尙書住疏 卷十二 洪範敷錫厥庶民 疏》
(敷錫之門)이라 하였고 다음 방은 ‘복원지관’(福原之觀)이라 하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전내(殿內)에 삼청상 삼청상(三淸像) : 도교에서 말하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삼청경(三淸境)의 그림. 삼청경는 도교의 최고 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는 대라천(大羅天)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고, 각 궁전에는 현세의 궁정 조직같이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선백(仙伯)․선대부(仙大夫)가 있으며, 또 이러한 선관(仙官)들과 별도로 독립해서 태상노군천사(太上老君天師)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태상노군은 도교에서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받들어서 존칭한 것으로, 그의 존호(尊號)는 현현황제(玄玄皇帝)등 여러가지 있는데 혼원황제(混元皇帝)도 그 중의 하나다. 결국 상청경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자의 화상을 부각시켜 그린 것이고 그 노자의 수염 빛깔이 감색이었다는 것이다. 《雲급七籤 卷二 太上老君開天經, 同 卷三 道校 三洞宗元》
(三淸像)을 그렸는데 혼원황제(混元皇帝)의 수염과 머리털이 다 감색이어서 우연히 성조(聖朝)께서 진성(眞聖) 성조(聖朝).........진성(眞聖) : 성조는 당시의 북송 황제 즉 휘종(徽宗)을 말하며 그림을 잘 그렸다. 진성(眞聖)은 노자의 별칭이다.
의 모습을 그린 뜻과 합치한다니 또한 가상하다. 예전에는 나라 사람들이 허정(虛靜)의 가르침(도교를 말함.)을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사람마다 다 귀의하여 신앙할 줄 안다고 한다.
정국안화사 靖國安和寺
안화사는 왕부의 동쪽에서 산길을 3∼4리 가면 점차로 수풀이 깨끗하고 우거진 산록이 험악한 것이 보인다.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는 옥륜사(玉輪寺)에서 수십 보를 지나가면 작은 길이 구불구불 얽혀 있고 높은 소나무가 길을 끼고 있는데, 삼엄하기가 만 자루의 미늘창을 세워놓은 듯하다. 맑은 물이 여울져 뛰어오르며 놀란 듯 달려가 돌을 씻어내는 것이, 쇠를 울리고 옥을 부수는 것 같다. 시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고 건너쪽 강언덕에 세운 두 개의 정자가 여울 돌무더기에 반쯤 잠겨 있는데, 청헌정(淸軒亭)・연의정(連의亭)이 그것들로 서로간의 거리는 수백 보가 된다. 다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산문각 산문각(山門閣) : 상부가 누각으로 된 산문. 산문은 불교 사원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문을 말한다.
(山門閣)을 지나 시냇물을 끼고 몇 리를 가 안화문(安和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정국안사로 들어간다. 절의 액자는 곧 지금의 태사(太師) 채경 채경(蔡京) : 1047∼1126. 자는 원장(元長), 선유(仙遊) 사람으로 그 서실(書室)을 육학당(六鶴堂)이라 했다. 그는 왕 안석(王 安石)의 신법을 부활시키는 등 국정을 장악하고 태사(太師)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네 차례 파출되었다가 네 차례 국정을 장악한 인물로, 후에 정강(靖康)의 변란의 책임을 지고 몰려 났다. 《宋史 姦臣傳》
(蔡京)의 글씨이다. 문의 서쪽에 정자가 있는데 방(榜)이 ‘냉천’(冷泉)으로 되어 있다. 또 좀 북쪽으로 가면 자취문(紫翠門) 으로 들어가고, 다음에는 신호문(神護門)으로 들어간다. 문 동쪽 월랑에 상(像)이 있는데 그것은 제석 제석(帝釋) : 불가의 설화에 나오는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자로,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면서 불법을 옹호하고 아수라(阿修羅)를 쳐몰아 내는 것으로 되어있다.그 범명(梵名)은 석가제환인타라(釋迦提桓因陀羅 Sakra devanam Indrah 샤크라)임.
(帝釋)이다.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香積)이라 하며, 가운데에는 무량수전 무량수전(無量壽殿) :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ha)을 봉안한 불전.
(無量壽殿)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두 누각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양화’(陽和) 라하고 서쪽의 것을 ‘중화’(重華)라 한다. 여기서부터 뒤에는 세 문이 늘어서 있는데 동쪽 것을 ‘신한’(神翰)이라하며, 그 뒤에 전각이 있는데 ‘능인’ 능인(能仁) : 석존(釋尊)의 별칭. (Sakya-muni를 의역(意譯)한 것으로 전해진다. 송 휘종의 글씨로 액자를 만들어서 걸었던 것이다.
(能仁)이라고 한다. 전각의 두 액자는 실로 금상 황제께서 내린 어서(御書)이다. 중문은 ‘선법’(善法)이라 하는데 그 뒤에 선법당 선법당(善法堂) : 본래 제석천(帝釋天)에 있는 궁전 이름. 제천(諸天)에서 그 곳에 모여 사람의 선악을 논의한다는 것이다. Sudharman.
(善法堂)이 있고, 서문은 ‘효사’(孝思)라 한다. 뜰 뒤에 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미타당’(彌陀堂)이라고 한다. 전각 사이에 두 곁채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관음 관음(觀音)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svara). 세상의 중생이 구원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면 곧 구원해 준다는 것으로, 구원을 청하는 양상이 천태만상인 데 따르느라 관세음보살도 천변만화한다고 한다.
(觀音)을 봉안하였고 또 하나에는 약사 약사(藥師) : 약사여래(藥師如來).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고뇌를 구제해 주는 부처로 알려진다. Bhaisajyaguru
(藥師)를 봉안하였다. 동쪽 월랑에는 조사상 조사상(祖師像) : 조사의 상. 조사는 선종(禪宗)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말함.
(祖師像)이 그려져 있고 서쪽 월랑에는 지장왕 지장왕(地藏王) :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말함. Ksitigarbha. 왼손에 보주(寶珠), 오른손에 석장(錫杖)을 들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地藏王)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승도(僧徒)의 거실이다.
그 서쪽에 재궁 재궁(齋宮) : 나라의 태묘제(太廟祭)에 재(齋)를 드리는 곳.
(齋宮)이 있는데, 왕이 그 절에 오면 심방문(尋芳門)으로 해서 그 위(位)를 들러 간다. 앞문은 ‘응상’(凝祥), 북문은 ‘향복’(嚮福)이며, 가운데는 인수전(仁壽殿)이고 뒤는 제운각(齊雲閣)이다. 샘이 산 중턱에서 나오는데 달고 깨끗하여 사랑스럽다.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방(榜)이 역시 안화천(安和泉)이다. 화훼(花卉)・죽목(竹木)・괴석(怪石)을 심어서 놀고 쉬는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 토목과 분식(粉飾)이 은근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와 병풍 속에 있는 듯하다. 고려인들은 규장(奎章 천자의 글을 말함)과 예조(睿藻 왕의 글을 말함)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가서 삼절(三節)의 관속과 종리(從吏)를 거느리고 어서전(御書殿) 아래에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여[飯僧] 복을 빌고 날이 저물어서 관사로 돌아가니, 실로 선화(宣和) 5년(123) 7월 2일 계축이었다.
광통보제사 廣通普濟寺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 남향쪽에 걸려 있고, 중문의 방은 ‘신통지문(神通之門) 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문수(文殊)‧보현(普賢) 세상이 놓여 있고 금선(金仙) : 불타(佛陀)의 별칭. 문수는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Manjunri),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는 보살로 알려진다. 보현은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로,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불 곁에 시립하여 부처의 이․정․행(理定行)의 덕을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果속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흥국사 興國寺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 끝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넘어간다. 대문은 동쪽을 면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과 정전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銅)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표기를 다는 장대)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솔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져 있다. 그 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께서 총애 회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국청사 國淸寺
국청사는 서교정(西郊亭) 서쪽 3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긴 낭하와 넓은 곁채에 높은 소나무와 괴석이 서로서로 비치며 둘러 있어 경치가 맑고 수려하다. 곁에 석관음(石觀音)이 벼랑 밑에 높이 서 있다. 근자에 사절이 지나가는데 국청사의 문을 경과할 때 그 곳 치의(緇衣) 차림의 승도(僧徒) 1백여 명이 떼지어 나와 구경을 하였다.
왕성내외제사 王城內外諸寺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다가 있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1018∼1085)연간에 내린 협저불상 협저불상(夾紵佛像) : 겹으로 된 모시에 그린 불상.
(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 또는 불경을 말함)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옹 고려숙종) 이 숭녕(崇寧 송 휘종 연호 1102∼1106)때의 사자(使者) 유규 유규(劉逵) : 자는 공로(公路). 수현(隨縣)사람으로, 숭녕(崇寧) 2년(고려 숙종 8, 1103)6월에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국신사가 되어 부사 급사중 오 식(吳拭)과 함께 고려에 다녀갔다. 이 때 의관(醫官) 4인을 대동해 와 고려에서 중국 의술을 교습시켰다. 규는 채 경(蔡京)에 아부하여 중서 시랑(中書侍郞)을 지내다 몇 차례의 부침 끝에 지항주(知杭州)․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까지 지냈다.《宋史 卷三五一》
(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 상국사(相國寺) : 하남성 개봉현 동북에 있는 절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따르면 매월 5차례씩 시장으로 개방하였다.
(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읍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홍원사(洪圓寺)이고, 장패문으로 들어가 시내의 북쪽은 숭화사(崇化寺)이며 남쪽은 용화사(龍華寺) 이다. 뒤로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타(彌陀)・자씨(慈氏) 두 절이 있다. 그러나 그리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지는 않다. 숭교원(崇敎院)은 회빈문(會賓門)안에 있고, 보제(普濟)・도일(道日)・금선(金善) 세 절은 태안문(太安門)안에 있는데 정족(鼎足)을 이루고 솟아 있다.
관도(官道)의 북쪽 유암산(由암山)을 사이에 두고 또 봉선(奉先)과 미륵(彌勒) 두 절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대불사(大佛寺)이다. 왕부(王府)의 동북쪽으로 가면 춘궁(春宮 태자가 거처 하는 궁전)과 상거가 멀지 않은 곳에 두 절이 있는데 하나는 ‘법왕’(法王)이고 다음은 ‘인경’(印經)이다. 태화북문(太和北門)으로 해서 들어가면 구산(龜山)과 옥륜(玉輪) 두 절이 있는데, 그것은 안화사(安和寺)로 가는 길에 있는 절이다. 광진사(廣眞寺)는 장작감 장작감(將作監) : 토목이나 영선 등의 일을 맡아 보는 관청. 후에 선공감(繕工監) 등으로 개칭되었다.
(將作監) 동쪽에 있고, 보운사(普雲寺)는 장경궁(長慶宮) 남쪽에 있다. 숭인문(崇仁門)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곧 홍호사(洪護寺)이고, 또 동북쪽으로 안정문(安定門)을 나가면 귀법(歸法)・영통(靈通) 두 절이 있다. 순천관(順天館 송의 사절 일행이 묵는 관사) 북쪽에 작은 집 수십 간이 있는데 ‘순천사’(順天寺)라는 방이 붙어 있다. 사절이 관사에 와서부터 한 달 동안은 승도들이 계속 범패를 불렀으며, 방에는 ‘이기국신사부일행평선’ 이기국신사부일행(以祈國信使副一行) : ‘국신사와 부사 일행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하여’ 의 뜻.
(以祈國信使副一行平善)이라 하였다. 대체로 충심에서 우러난 진실이지 일시적인 거짓이 아니다.
또 자연도(紫燕島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에는 제물사(濟物寺)가 있고 군산도(群山島)에는 자복사(資福寺)가 있는데, 정전과 문과 월랑 이외에는 대청이나 방이 없고 그 승도는 2∼3인뿐이다. 이상의 모든 절들은 그 건물이 좁고 누추한데다 또 수효가 많아 그 그림은 생략하고 그 이름만 적어 둔다.
숭산묘 崧山廟
숭산신사(崧山神祠)는 왕부의 북쪽에 있다. 순천관에서 나가 병부(兵部)까지 가서 곧장 북쪽으로 시내를 따라 가다가 구산사와 복원관을 지나고, 북창문(北昌門)을 나가 5리 가량을 가면 산길이 험악하고 높은 소나무가 울창한데 성중을 굽어보면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다. 그 신(神)은 본래 고산(高山)이라고 했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기로는, 상부(祥符 곧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글안(契丹 요(遼)를 말함)이 왕성으로 침입해 다가오자 글안(契丹)이...........다가오자 : 고려 현종(顯宗) 2년(1011)에 글안이 침입하여 송도에 들어와서 태묘․궁궐․민가를 분탕하여 왕이 각지로 파천해다니기까지 하였다. 《高麗史 卷四》
, 그 신이 밤중에 소나무 수만 그루로 변화하여 사람 소리를 내매, 오랑캐들은 원군이 있는가 의심하고 곧 철퇴하였으므로, 후에 그 상을 봉해서 숭(崧)이라 하고 그 신을 제사드려 받들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옷을 시주하고 좋은 말을 바치며 기도를 한다. 근자에 사신이 와서 6월 26일 정미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사당이 멀어서 산중턱까지만 가서 주찬을 진설하고 배례하였다. 이것은 구법[舊典]에 따른 것이다.
동신사 東神祠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평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간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夫餘)의 처인 하신(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 몽(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使者)가 오면 관원을 보내어 전제(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생뢰(牲牢 제물로 바치는 희생)와 작헌(酌獻 잔을 드림)은 숭산신에 대한 법식과 같다.
합굴룡사 蛤窟龍祠
합굴룡사는 급수문(急水門)의 위쪽 공지에 있다. 작은 집이 두어 간 있는데 그 가운데에 신상(神像)이 있다. 뱃길로는 물이 얕아 접근할 수 없고, 다만 뱃사공들이 작은 배로 맞아다가 제사할 뿐이다. 근자에 사자가 그 곳에 가서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더니 그 이튿날 작은 뱀 한 마리가 나왔는데 푸른 색이었다. 이를 보고 다들 신의 화신이라 하니, 역시 팽려 팽려(彭려) :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파陽湖). 팽려택(彭려澤)이라고도 한다. 팽려호의 관련된 이적의 고사는 미상.
(彭려)를 순풍으로 건너게 한 이적과 같았다. 그래서 신물(神物)이란 없는 데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조정의 영검한 위력이 가는 곳이면 만맥(蠻貊)의 나라라도 통하는 것이다.
오룡묘 五龍廟
오룡묘는 군산도(群山島)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 위에 있다. 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 뒤 두어 걸음 되는 데에다 지금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만을 새로 지었을 뿐이다. 정면에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8 권
도 교 道敎
고려는 땅이 동해에 접해 있어서 틀림없이 도산(道山)・선도(仙島)와는 상거가 멀지 않을 것이다. 그 백성들이 장생불사하는 가르침을 사모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다만 중원(中原)에서는 앞서 대부분 정토(征討)를 일삼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도로 교화시킨 자가 없었던 것이다. 당실(唐祚)이 일어나는 혼원시조 혼원시조(混元始祖) : 노자(老子). 당(唐)이 창업하자, 노자가 동성(同姓)인 이씨(李氏)이므로 노자를 시조로 받들었다. 당 고종(唐高宗)은 건봉(乾封) 원년(666)에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추호(追號)하였고, 현종(玄宗)은 천보(天寶) 원년(742)에 현원묘(玄元廟)를 설치하여 규모를 갖추어 조자를 제사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대성조(大聖祖)라 가호(加號)하였다. 동 8 년(749)에는 대도현원황제(大道玄元皇帝)라 칭하고, 동 13년(759)에는 다시 대성조 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帝)라 칭했다. 북송 때에 와서 진종(眞宗)은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에 노자를 태상노군혼원상덕황제(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라 칭했다.<各帝王本紀>
(混元始祖)를 섬겼다. 그래서 무덕(武德 당 고조의 연호.618∼626) 연간에 고려(고구려를 말함.)에서 사신을 보내어, 도사가 그 곳에 가서 오천언(五千言 노자의 도덕경을 말함.)을 강론하여 현미(玄微 심오한 이치)를 풀이해 주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현미(玄微)를 풀이해.......것이다. : 이 일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8 양년(624∼625)에 걸쳐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三國遺事 寶藏泰老 三國史記 榮留王本記>
. 고조(高祖 당 고조를 말함.618∼626재위)는 성군이었는지라 그것을 기틀하게 여겨 그 청을 다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도교를 숭상함이 불전(佛典)을 능가하였다.
대관(大觀) 경인년(고려 예종5, 1110)에 천자께서 저 먼 고장에서 묘도(妙道)를 듣기를 원함을 돌보시어서 신사(信使)를 보내시고 우류(羽流 도사를 말함)2인을 딸려 보내어 교법(敎法)에 통달한 자를 골라 훈도(訓導)하여 주게 하였다 교법(敎法)에 통달한 .......하였다 : ‘고려사’ 10권 예종 5년 5월 조에, 왕 양(王襄)과 장 방창(張邦昌)을 정부사로 한 북송의 사절이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도사 2인을 보내온 일은 적혀 있지 않다. ‘송사’(宋史)의 휘종본기(徽宗本紀) 당해년 및 동 고려전에도 언급이 없다.
. 왕 우(王俁 고려 예종(睿宗))는 신앙이 돈독하여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1111∼1117)연간에 비로소 복원관(福原觀)을 세워 도의 터득이 높고 참된 도사 10여인을 받을었다. 그러나 그 도사들은 낮에는 재궁(齋宮)에 있다가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고는 하였다. 그래서 후에 간관(諫官)이 지적 비판하여서 다소간 법으로 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간혹 듣기로는, 우(우)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늘 도가의 도록(圖錄 도가의 서적)을 보급하는 데 뜻을 두어 기어코 도교로 호교(胡敎 곧불료)를 바꿔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우(우)가 나라를 다스렸을......하였다. : 예종 자신이 도록(圖錄)을 받고 불교 대신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올려놓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는 말은, 예종의 도교에 대한 신심이 독실했던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고려 상하에 나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또 서 궁의 이러한 말은 도교 황제인 송 휘종에 대한 일종의 아유적인 언사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종이 훙거하자 그의 장자인 인종이 이 자겸(李資謙)의 힘으로 곧 즉위했는데, 그 해 12월에 예종의 도교 정책과 관련이 깊었던 한 안인(韓安仁)과 이 중약(李仲若)은 왕권을 둘러 싼 갈등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 니러한 일로 미루어볼 때 예종 생전의 도교로의 경도(傾到)가 심상한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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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道士
도사의 복장은 우의(羽衣 새털로 짜서 민든 도가의 옷)를 사용하지 않고, 백포(白佈)로 만든 갖옷에 조건(早巾 검정색 두건)과 사대(四帶 네 줄이 늘여 뜨려진 의대)를 입는데 평민의 의복과 비료하면 다만 그 소매가 좀 큼직할 따름이다.
석 씨 釋氏
부처의 가르침은 천축(天竺 인도의 고칭.)에서 처음 나와 드이어는 사방의 이족(夷簇)들에 전파되어 그 법이 성하여졌다. 고여는 지록 바다 동쪽에 있기는 하나 듣기로는 청량법안 청량법안(淸凉法眼) : 중국 청량사(淸凉寺)의 법안 문익(法眼文益)에 의해 전해진 선종(禪宗)의 익파. 청량사는 지금의 남경시 남쪽에 있는 이른바 건업청량사(建業淸凉寺)다. 법안종은 화엄초지(華嚴初地) 중의 육상의(六相義)를 들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종지(宗旨)로 삼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선가의 육대조(六代祖)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제자 행사(行思)에서 시작되어, 5전하여 설봉(雪峯)에 와 다시 현사(玄沙)와 나한(羅漢)을 거쳐 건업 청량사의 법안 문익에게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서궁은 이 법안이 우리 땅에 전파되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淸凉法眼)의 한 차가 동쪽으로 건너온 후에 승도들이 성리(性理)를 꽤 알게 되었다 한다. 한 번은보제사(普濟寺)의 승당(僧堂)에서 방을 걸어[葛榜] 대중에게 보이는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말[言]이 도를 싣기에 부족한 지가 오래 되었다. 대천경권(大千經卷무수한 북교경전을 말함)은다 병을 고쳐 주는 설이기는 하나 정법안장 정법안장(正法眼藏) : 선문(禪門)에서 바른 세계를 보는 방법. 즉 깨달음의 진실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데, 석존이 깨닥은 무상의 정법(正法)을 가리킨다.
(正法眼藏)을 부촉(付囑)할 데가 없는지라, 세존(世尊)이 이에 꽃을 들어 보여 주었더니, 미소하는 자가 있었다 꽃을 들어.........있었다 : 이것이 이른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의 염화미소(염華微笑)의 고사다.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할 때 대범천왕(大梵天王)한테서 받은 금바라화를 따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모두 그 뜻을 터득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깨닥아 미소를 지어 석가는 결국 가섭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수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심전심의 묘처를 설명한 것이다. <五燈會元碧巖錄 序>
. 그런데 자손들에 내려와서는 언변으로 서로 나타내는 것을 담선(談禪 선을 이야기함)이라고들 부르니 망령되지 아니한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는 오직 가섭(迦葉) 하나뿐이었으니 그런 깨달음을 뭇사람들에게 쉽사리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옛사람조차도 양(羊)을 남기기를 좋아하여서 예(禮)의 큰 뜻을 잊지 않았거든 양(羊)을 남기기를 ........않았거든 : 자공(子貢)이 새닥을 고하는 데 바치는 희생용(犧牲用)의 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孔子)가 그에게,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말했다.<論語>
, 하물며 말[言說]이라는 도구는 족히 그 뜻을 얻을 수 있겠는가. 듣건데, 시를 설명하는 것은 그 생각으로 시의 뜻을 맞나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시(詩)를 설명.......하는데: 맹자(孟子)는 함 구몽(咸丘蒙)의 질문에 대답한 말 가운데서, ‘글자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도 않는다. 읽는 사람의 마음으로 시의 뜻을 맞아 들인다면 그것이 바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孟子 萬章上>
우리 교종(敎宗) 역시 그러하다. 대체로 말로서는 생각을 찾지마는 생각이 따르는 곳을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또한 잠자코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는 법이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과 말 같은 말단적인 것에 급급할 것인가?”
이 수백 마디를 보니 깊이 종지(宗旨)를 터득하고 있다. 북상과 공구(供具 제물.향화 따위를 괴어 놓는 제구)가 모두 다 깨끗하고 표기의 장식과 비단 천개(天蓋 불상위 같은 데 설치 하는 덮개)는 질서가 정연하다. 대경(大經)으로는 화엄(華嚴)과 반야(般若) 반야(般若) : 반야바라밀다심경 (般若波羅密多心經 Parjna-paramita-hrdaya sutra). ‘마하'(摩何) 두 자를 위에 붙이기도 하고 ‘반야경’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성립한 경전으로, 탁월한 지혜로 최고의 경지를 풀어낸 경문으로 전해지고 각 종파에서 널리 받들어진다.
가 있고 작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또 본래 중국에서 연구하여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자도 있어서, 낭송시켜 보았더니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범패(梵唄)로 말하면 또 사투리여서 전연 분간할 수가 없다. 그들의 요발(饒跋 불가에서 쓰는 악기 이름.)은 생김새가 작고 소리가 시름겹고, 그들의 소라 소리는 호통을 치듯 매우 크다.
앞서 원풍(元豊 송 신조의 연호. 1078-1085) 연간에 상절(上節)의 사신 송 밀(宋密)이 자연도(紫燕島)에서 죽었는데 송밀(宋密)이 자연도에서 죽었는데 : 원풍 연간에 북송에서 고령에 사절을 세 차례 보냈는데 송 밀이 어느 때에 따라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그 후부터는 사신이 오면 반드시 제물사(濟物寺)에서 불승의공양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 상절이 차례에 따라 무덤 아래에 둘러서서 베례하였다. 근자에 어명을 받들고 그곳에 가서도 역시 전례에 따랐다. 비록 생존자와 사망자 사이의 은의(恩義)는 물론 그럴 것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 이국에 가면 멀리 고향을 생각하게 되는지가, 느닷없이 객사한 무덤을 보고서는 문물을 뿌리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대체로 이역 땅에 사신을 가는 데는 요동이 가장 어려우니, 해양이 막혀 있어 위험이 오만 기지인데, 온전히 끝마치고 조종에 복명할 수 있게됨이 어찌 다행하지 읺겠는가? 본래 왕의 위령에 의지함이 아니라면 교룡과 조개의 뱃속에 장사지내지 않을 자가 극히 드물 것이니, 어씨 부처가 오로지 보호해 줄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 의복 제도를 그려서 이동(異同)을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국사 國師
국사의 칭호는 대체로 중국에 승직의 강유(綱維) 강유(綱維) : 절 안을 통찰하고 불사(佛事)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자로, 사주(寺主).상좌(上座).도유나(都維那) 3인이 있어 그것을 삼강(三綱)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국사는 이러한 중국의 강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위의 한 등급은 왕사(王師)라고 하는데 왕이 만나면 그에게 배례를 한다. 다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 : 송대(宋代) 선승(禪僧)의 옷. 능직(陵織) 비단으로 만들고, 여기에 꽃무늬를 수놓았다. 값이 비싼 것이라 한다.<行事少資特記 下 三之一>
와 긴 소매의 편삼 편삼(偏衫) :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겨드랑으로 걸치는 옷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으로 걸치는 옷을 합쳐 만든 법의(法衣).
(偏衫)과 금발차 금발차(金跋遮) : 금색으로 만든 금강저(金剛杵), 불승이 번뇌 파쇄의 상징으로 손에 들고 있는 인도의고대 무기. 범어 Vajra의 음역으로 ‘발자라’로 쓰기도 한다. ‘발차’로 쓰는 것은 중국 송대에 그런 물건을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발차곡(跋遮曲)이 있는 데서 연유된다.
(金跋遮)를 착용하고, 아래에는 자상(紫裳)과 오혁검리 오혁검리(烏革鈐履) :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 조이개가 달린 신발.
(烏革鈐履)가 있다.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 후두부에 돌출한 뼈.)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깍아 버리면 그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줄러 넙적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자품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넙적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중화상대사 三重和尙大師
삼중화상 장도(張度)는 율사 율사(律師) : 지율사(持律師) 또는 율자(律者)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계율에 통달한 고승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또 도사 삼등 수행(修行)의 셋째를 율사라고도 했다.<唐六典 尙書禮部 祠部郞中員外郞>
(律師)의 종류이다, 자황첩상복전가사 자황첩상복전가사(紫黃貼相福田袈裟) : 자황색으로 몸에 꼭맞게 만든 밭고랑 줄무늬가 있는 가사.
(紫黃貼相福田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을 입고, 아래는 역시 자상(紫裳)이다. 지위는 국사 아래에 있고 경론(經論)을 강설하며 성종 성종(性宗) : 법성종(法性宗)의 약칭. 일체의 법상(法相)은 다 허망하다 하여 진성공적(眞性空寂)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주지(主旨)로 하는 종파. 삼중화상은 그 이법을 전습시킨다는 것이다.
(性宗)을 전습시킨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언변이 좋고 박식한 이를 택해서 그 일을 시킨다.
아사리대덕 阿闍梨大德
아사리 아사리(阿射梨) : 범어 acarya 의 음역. 곧 스승이라는 뜻으로, 궤범사(軌範師)라고도 하는데, 교단의 교사 역할을 하는 자로, 아사리대덕은 덕이 높은 중이라는 뜻. 승직의 하나다.
대덕은 삼중화상보다 한 등 떨어진다. 교문(校門)의 직무를 분답하는데, 그 옷은 짧은 소매의 편삼(偏衫)과 괴색(壞色 진한 고동색) 괘의 괘의(掛衣) : 괘락(掛絡),괘락(掛洛),괘라(掛羅),괘자(掛子) 등의 별칭이 있는데, 선승(禪僧)이 평소에 사용하는 작은 약식 가사.
(掛衣)에 오조 오조(五條) : 오조가사(五條袈裟antarvasa). 가로 다섯 줄무늬가 있는 천을 말라서 만든 가사. 본래는 내복이었으나 후에 옷 위에 걸쳐 입도록 되었다. 원내도행잡작의(院內道行雜作衣)라고도 한다.
(五條)이고, 아래는 황상(黃裳)이 있다. 국사와 삼중은 몇 사람에 불과하고 아사리 한 등급은 사람수가 극히 많은데 그 취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미비구 沙彌比丘
사미비구 사미비구(沙彌比丘) : 어린 중을 말함. 사미(Sramonera)는 자비지(慈悲地)에 안식한다는 것이 그 본 뜻이다.
는 어려서부터 출가(出家)하여 수구 수구(受具) : 구족계(具足戒)를 받음을 말함. 구족계는 정식 비구 또는 비구니가 되기 위해 비구는 2백 50계, 비구니는 5백계를 받는데 그것을 받으면 정식으로 교단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게 된다.
(受具)를 거치지 않은 자이다. 괴색의 포의(布衣)로 역시 첩상(貼相 첩상가사를 말함)이 없다. 계율이 높아져야 비로소 자복(紫服)으로 바꾸고, 차례에 따라 옮겨지고 올라가고 한 뒤에야 납의(衲衣)를 갖게 된다. 대체로 고려의 승복은 마납 마납(磨衲) : 고려 특산의 귀중한 직물로 만든 가사.<六祖壇經>
(磨衲)만을 가장 존중한다.
재가화상 在家和尙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붂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기는 하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글안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이족(夷簇)의 사람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린 것을 가지고 화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9 권
민 서 民庶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유(儒 선비)를 귀히 여기으로, 그 나라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평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이 공장이를 따르지 못한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고을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色]을 좋아하여, 분별 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 남자.......쉽게하여 : 우리 나라 여성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구절이다. 조선조 때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는 송유(宋儒)의 처녀 숭배사상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처녀성(處女性)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여성은 중문 밖을 나가지 못하는 내외법(內外法)의 굴레 밑에 청상과부(靑孀寡婦)・소박녀(疏薄女) 등의 가형적 생활을 강요당한 것이다.
,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 지금 그 나라의 백성을 그림으로 그리되 진사(進士)를 편(篇) 머리에 둔다.
진사 進士
진사의 이름도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국자감(國子監)에 모여서 거의 4백명을 합시(合試)한 뒤에 왕이 친시하여, 시(時)・부(賦)・논(論) 세 제목을 시험보여 합격하는 이에게 벼슬을 준다. 정화(政和) 연간에 학생(學生) 김단(金端) 등을 입조(入朝)케 하매 은사과(恩賜科)에 합격하니, 이로부터 선비를 뽑을 때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그 고부를 견주고 우열(優劣)을 시합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였으므로, 이제 유(儒)를 업(業)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니,이는 중국을 향모(向慕)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사의 복식은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을 쓰고, 검은 주[筽紬]로 웃옷[衣]을 하고 검은 띠에 가죽신을 신고, 공(貢)에 들면 모자를 더 쓰고 모자를 더 쓰고 : 문라건 위에 모자(帽子)를 더 쓴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복두(僕頭)를 더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안에 크게 놀아 영관 영관(榮觀) : 이 전통은 조선조에도 3일간 거리를 돌아다니는 [三日遊街] 행사로 남아 있었다.
(榮觀)을 삼는다 한다.
농상 農商
농상의 백성은, 농민은 빈부할 것 없이, 장사치는 원근할 것 없이 다 백저포 백저포[白釘袍] : 이 백저포에 대하여는 현재 동경(銅鏡)에 그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을 보년 두루마기 비슷하고, 하리에 넓은 띠를 띠고 있다.
(白紵袍)를 만들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별한다. 나라의 벼슬아치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頭巾)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향리(鄕吏)나 백성리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공기 工技
고려는 공장이의 기술이 지국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 복두소(服頭所)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는 관을 만드는 곳.
(僕頭所)・장작감 장작감(將作監) : 제시(諸詩)의 하나로 선공시(繕工詩)라고도 하며, 토목과 영선(營繕)을 맡았었다.
(將作監)이 그 곳이다. 이들의 상복(常服)은 흰 모시 도포에 검은 건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광에서 붉은 도포[紅袍]을 내린다. 또 듣자니, 글안(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중에 고당이가 열 중에 하나는 있는데. 그 정교한 솜씨를 가진 이를 왕부(王府)에 머물게 하여, 요즈음 기복(器服)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으나, 다만 부화스럽고 거짓스러운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질박(質朴)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
민장 民長
민장의 명칭은 중국의 향병(鄕兵)이나 보오(保伍)의 장과 같다. 즉 백성 가운데 부족(富足)한 자를 뽑아 시키되, 그 마을의 큰 일이면 관부(官府)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그 복식은 문라(文羅)로 건(巾)을 하고 검은 주(紬)로 갖옷을 하고 혹각 대를 띠고 검은 가죽의 구리 구리(句履) : 첨단에 장식이 있는 구형(矩形)의 신.
(句履)를 신으니, 또한 아직 공(貢)에 들지 않은 진사(進士)의 복식과 서로 닮았다.
주인 舟人
고려의 두건 두건(頭巾) : 머리에 쓰는 건(巾)으로, 녹태책(鹿胎責)이라 하는 것인데, 4개의 띠가 달린 두건이다.
(頭巾)은 다만 문라(文羅)를 중히 여겨 한 건의 값이 쌀 한 섬[石] 값이 되어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밑천은 없고, 또 알상투를 하여 죄수(罪囚)와 다름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죽관 죽관(竹冠) : 삿갓을 말한다. 우량(雨量)이 많은 동남아.일본 에도 발달한 관모로서 그 제도가 일정치 않다.
(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존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짧은 갈(褐 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배마다 10여인이 밤에는 갑판을 올리고 삿대를 뚜드리며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여 시끄럽가가 거위와 따오기의 무리가 우는 것 같아 조금도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으니 대개 그 풍속이 그러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0 권
부 인 婦人
삼한(三韓)의 의복 제도는 염색(染色)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使)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를 넣은 비단과 꽃부늬를 넣은 비단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모시 노랑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얼마 전에 세공(歲貢) 사신이 중국 궁궐에 이르러 조정에서 내리는 십등관복(十等冠服)을 얻어와 드디어 이를 본받아 십등관복(十等冠服)을 ..........본받아 : 고려는 처음에 광종(光宗) 때 후주(後周)의 제도를 들여 중국 복식을 입었으나 그 뒤 글안에서 변복을 들여오고, 분종 32년 6월에 송(宋) 신종(神宗)이 어의(御衣) 2벌을 사여하어 송과 교섭이 되었다. 의종(毅宗) 상정례(詳定禮)에 복식이 보이나, 여기에는 백관(百官)도 면류관을 쓴 것 같이 되어 있으니 이 점은 의심스럽다. 그러나 공복(公服). 상복(常服)은 송제를 입은 것 같다.
, 지금은 왕부(王府)와 국상(國相)의 집에도 자못 중국풍이 있으니, 다시 세월이 지나가년 다 중국풍이 될 것 같다. 이제 잠깐 그 중국과 다른 것만 골라, 이를 그림으로 그린다.
귀부 貴婦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 너울 : 너울은 본문에는 멱라(冪羅)로 되어 있다. 당대(唐代)에 중앙 아시아에서 당에 들어온 것으로, 신라 시대에 이를 하였느냐는 의심스럽다. 신라에서는 영포(領布)라고 하여 쇼올 같은 것은 걸친 듯하며, 이것이 일본에 건너가 비례(比禮)가 되었다. 고려 시대는 한창 유행하여 여자는 너울을 쓰고, 군(裙)을 입고, 말을 탔던 것 같다. 이 글에는 여자도 포(袍)를 닙어 남자의 옷과 같다고 하였으니, 전주 포 도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최근 청주(淸州) 채씨묘(蔡氏墓)에서 발견된 조선 초의 여복(女服)에서 첩리(帖裏). 천익(天翼)이 보이니, 상의 하상(上衣 下裳)의 제도이어서 이는 원대의 질손(質孫)의 영향이므로, 이 전통이 중도에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모시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너른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攬)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釋]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으로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恃妃)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다 하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비첩 婢妾
궁부(宮府)에는 후궁(後妾)이 있고, 관리에게는 첩(妾)이 있는데, 백성의 처나, 잡역에 조사하는 비자(婢子)도 복식이 서로 비슷하다. 그들은 일을 하고 구실을 들기 때문에 너울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아니하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 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 : 이 제도는 조선의 가리마(加里魔)의 제도로 혜원(蕙園) 풍속도에 나온다. 너울을 접너올려 머리 위에 책갑(冊匣)과 같이 올려 놓은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고려 이래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너울은 조선말까지 존속되었다.
옷을 걷고 다니며, 손에는 부채를 잡았으나 손톱 보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많이들 붉은 한삼으로 손을 가린다.
천사 賤使
부인의 머리는 귀천이 한가지로 오른 쪽으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깁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 붉은 깁으로 묶고.......꽃는다. : 이는 조선말의 사양머리 형식이다. 사양머이에는 도토락 당기를 달게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신라 이래 사양머리형으로 틀어올렸다가 그 나머지는 피발(被髮) 그대로 위에 내려뜨린 것 같다. 또 이 머리가 긴 것이 미인의 조건이기도 하였다.
가난한 집에서는 다만 너울이 없으니, 대개 그 값이 은(銀) 한근과 맞먹어 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금제(禁制)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 두르눈 치마를 입되 8폭으로 만들어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는데, 주름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 부귀한 자 처첩들의 치마는 7∼8필을 이은 것이 있으니 치마는...........있으니 : 이는 당시의 유행으로 특기할 만한 것이지만, 실지로 치마를 포개어 입었다기보다는 조선 때에도 있었듯이, 페티코우트와 같이 3단(段), 5단, 7단으로 치마의 아래 폭을 벌리게 하기 위하여 표상(表裳)안에 그렇게 입은 것 같기도 하나 미상이다.
, 더욱 우스운 일이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종신(從臣) 유 규(劉逵)와 오 식(吳拭) 등이 사명을 받들고 고려에 갔을 적에 칠석(七夕)을 만났다. 마침 관반사(館伴使). 유신(柳伸) 이 무악(舞樂)하는 기녀[女倡]를 돌아보며 정사・부사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머리를 빗어 늘어뜨리니, 필시 옛 추마계 추마계(墜馬繫) : 낭자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머리. ,<후한書 梁夷傳>에 “수심에 잠긴 눈썹에 가는 허리, 흰 기운머리..........라” 하였다.
(墜馬磎)인가 합니다.”
하매, 유 규 등이 대답하기를,
“추마계는 동한(東漢) 양 기(梁冀)의 처 손 수(孫讐)가 한 것이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소이다.”
하니, 신(伸) 등이 그렇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고치지 못하니, 아마 이는 그 옛풍속의 퇴결 퇴결(堆結) : 상투의 형태. 원의로서는 머리를 뒤에 내려뜨려 방망이 모양으로 맺는다는 것이며, 중국에서는 남월(南越)의 풍속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동이(東夷)의 풍습을 보면, 머리 정수리에 상투를 하고 있다. 백제는 머리를 양도(兩道)로 가르는데, 일본의 미두랑(美豆浪)이 그것이다.
(堆結)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귀녀 貴女
만이(蠻夷)의 옷이 비록 거의 같은 종류이나, 또한 정한 제도가 없는 것 같다. 사신이 처음에 성(城)에 등어갈 적에 길옆 누관(樓觀) 사이에 난간에 의지하고 있는 귀녀를 가끔 보았다. 이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겨우 열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머리를 풀지 않았고, 황의(黃衣)는 또한 여름 복식으로는 마땅한 것이 아니기에, 시험삼아 이를 힐문하였으나 끝내 이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떤 이가 ‘왕부(王府) 소아의 옷이다.’하였다.
여자 女子
서민(庶民)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紅羅]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노[黑羅]로 대신할 뿐이다.
부 負
고려의 법이 관비(官婢)를 두어 대대로 물려오기 때문에 왕부(王府)로부터 국리나 도관(道觀)이나 사찰(寺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을 주어 구실들게 하였다. 그들이 일할 적에 어깨에 멜 힘이 없으면 등에 지는데, 그 행보가 빨라 남자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대 戴
지고 이는 일이 그 노고는 한가지다. 물이나 쌀이나 밥이나 마시는 것이나 다 구리항아리에 답았으므로 어깨에 메지 않고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키고 가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경서(經書)를 상고하면 ‘머리 희뜩희뜩한 자가 도로에 지고 이지 않는다.’함은, 그 힘을 쓰는 것이 진실로 근골에 고통을 주는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마저 등에 업었으니, 소위 그 아이를 포대기에 싸업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