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을 그림순례⑩] 달래강에 뜨는 달 충주 대림산 단월마을 | ||||||||||||||||||||
고향집에 내려온 첫날밤은
맹꽁 매앵꽁 맹꽁 화음을 넣어주던 맹꽁이 아하, 너희들도 같은 물에서 울고 있었구나. 그래, 몇 십 년도 더 지난 얘기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여태 무얼 하자고 어딜 다니며 개글개글개글 우는 개구리, 겨우 개 같은 글이나 쓰려느냐며 결굴 바보 맹꽁이 같은 생존이라며 매앵 꽁 매앵 꽁 우는 맹꽁이, 알았어 알아 들었대두 저 산 기슭 뻐꾸기마저 새벽까지 말참견을 해대던 고향집에 내려 온 첫날밤은 모두 모두 함께 모여 울며 새웠다. 마음속의 환한 불 추억을 밝혀 놓고 그 날 밤 우리 집엔 가득가득 차오르던 울음소리로 어디 한군데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재호 ‘함께 울며’ 전문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비지땀 속에 잡초와의 전쟁을 치루면서 내게 보내온 감자를 나는 화실에서 간식으로 먹으며 붓을 들었는데 그 때마다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결국 형에 대한 그리움에 나는 화첩을 챙겨 충주로 떠나야 했다. 오전내 비에 씻긴 해맑은 달래강(일명 달천강)을 지나 두 시간여만에 터미널에 도착하자 형과 형수가 함께 나와 그지없이 반겨준다. 마침 형과 동창인 정제택(鄭濟澤.공군 예비역 대령)님의 배려로 점심을 함께 나누고 고향집에 이르렀다. 단월동 신대 마을 534번지. 그새 두 철을 넘긴 집은 땀 흘린 덕인지 생각보다 정갈했고, 부부가 가꾼 소담한 텃밭의 곡식도 가을바람에 익어가고 있었다. 청백리의 표본으로 꼽히는 고 이종근 의원 부친 이종근(李鐘根) 의원(충북 중원 6선)이 타계하신 후 맏아들인 재호형이 노모를 모시고 내려온 이 집은 충주 현대사의 모태요, 산실이다. 실제 무슨 인연인지 내가 서울 건국대병원으로 병문안 가서 노부부가 침대와 휠체어에 의지해 두 손을 잡은 모습을 당시 엽서에 담았는데, 닷새 후 부친께서 돌아가셨다. 처음이자 마지막 모습의 엽서그림 3장이 액자 속에 담겨 있어 감회가 뭉클하다.
그러나 세상사 빛이 있으면 어둠도 깊은 법. 청백리의 가족은 모두 숨죽여 가장의 뜻을 따라야 했던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맏며느리 형수는 이제야 바깥 산이, 나무가 보인다고 했다. 부엌에서 나와 뜰 한 번 쳐다보지 못했다는 정치인의 가족사가 그렇다. 어디 위민(爲民)의 길이 희생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육사 8기 출신으로 5.16혁명 이후 준장으로 예편한 인물로, 거친 정치사에 유독 청빈한 지도자로 회자된 성품은 강직함 못지않게 문사와 예인의 기질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일찍이 농고 시절, 농활운동 때 단가를 지어 보급했던 경험이 있거니와, 이후 독서와 지필묵을 가까이 했던 고인은 낙선 땐 먹을 갈아 대나무를 그려 손자 손녀에게 선물했다. 또 손수 돼지를 키우고 애민(愛民)의 뜻을 기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는 그런 재호형을 좋아한다. 늘 ‘진짜론’을 주장하며 훤한 대낮에 등불을 켜고 ‘가짜 아닌 진짜’를 찾아 떠돌다 끝내 서울생활을 청산한 시인. 고향 단월을 아호로 자처한 까닭에 다시 시인은 단심(丹心)의 붉은 달을 품고 귀향한 것이리라. 거실에는 낯익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풍죽(風竹)이 걸려 있어 반가운데 고인께 선물한 내력이 각별하다. 즉 고암이 파리 체류시 동백림사건(1968년)으로 끌려와 옥고를 치를 때 구원운동을 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이 서린 대 그림은 고인의 성품과 뜻을 추앙한 매우 뜻깊은 작품이다. 나 또한 고인을 이제는 장군이나 정치인 보다는 선생으로 부르고 싶다. 이 땅에서 개결한 선비의 삶을 살다간 선생으로 말이다. ‘소설보다 긴 이야기의 강’ 이층의 서재, 시인의 집필실을 둘러보고 다시 마당을 나서니 한 쌍의 목련나뭇잎이 무성하게 하늘을 덮고 있다. 봄이면 흰 꽃 자주꽃 분분이 벙그는 목련꽃 아래 평상에서 묵죽(墨竹)을 쳤다는 고인의 자취는 그림도 능한 시인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제 귀농으로 부친이 떠난 자리에서 시인은 독서와 다담(茶談) 속에 시상을 가다듬을 테니까. 어느새 어둠이 깔리자 소식을 알고 유흥현(柳興鉉.54) 통장이 박수하씨(49)와 그물, 소쿠리를 들고 나타났다. 길손에게 마을 앞 달래강으로 고기잡이를 가잔다. 호기심에 형이 내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그들을 따라 초가을 밤 강물로 저벅저벅 들어가는 시간. 갈대숲이 키를 넘어 스산한 기운이 엄습한다. 그리고 달빛만이 아련한 강물 위에 갑작스레 던져지는 그물의 파동.
통장의 투망이 거두어질 때마다 고기는 어둠 속에서 은빛을 펄떡이며 한 아름 쏟아진다. 바로 형과 주하씨가 익숙하게 맨손으로 배를 따고 소쿠리에 담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생생한 원시의 체험인가. 형과 단월초교 선후배인 통장은 어릴 때 ‘풋고추 다 내놓고 놀던 달래강의 추억’ 이라며 연신 즐거워한다. 몇 차례 투망질에 가득한 물고기를 흡족한 마음으로 담아 이동한 곳은 농기구가 그득한 소위 통장의 작업실 본부였다. 부침개를 붙이는 형수와 통장부인 유호 엄마,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손영훈씨)의 아내 정영희씨가 옥수수를 까며 일행을 반긴다. 오늘은 길손을 위해 매운탕 대신 튀김 민물고기로 대접할 셈인데 잡은 물고기는 피라미, 쏘가리, 꺽지, 징거미, 참매자, 동자개, 납자루, 무래무지, 통바구 등 참으로 다양하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한때 사라졌던 물고기들이 강이 맑아지면서 되돌아 온 것이다.
… 강가에서 함께 자라던 물고기 같은 친구들 그렇다면 저 강물의 고기처럼 시인도 마침내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지난 일과 남의 이야기를 증언해 놓으려는 걸까. 깊어가는 술잔은 달래강에 어린 단월의 사연으로 밤새 붉디 붉어갔다. 거대한 와송은 소나무 명품 반열에 오름직 이튿날 아침, 형이 잡은 우렁이에 담복장(청국장)을 끓여내주는 형수의 따스한 정성이 숙취를 씻는다. 화첩을 챙겨 동리를 돌아보자 쪽빛 하늘 아래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먼저 붉은 고추를 따는 마을 노인회장 임선규(林仙圭.70) 부부께 인사드리고 ‘아오리’로 부르는 푸른 사과, ‘홍월’의 개량종 사과농원(유수현, 유호현씨 운영)을 돌아보는데 울타리는 수수와 옥수수로 둘렸다. 그 아래 국화, 원추리, 댑싸리들 또한 도란도란 정답다. 집담 뜨락에는 봉숭아, 맨드라미, 과꽃이 한창이고, 지붕 위 호박덩굴이 담을 타고 내려온다. 텃밭에는 보랏빛 가지가 탐스럽고 담장 너머로 검붉은 석류가 알알이 맺힌 풍광이다. 이어 통장네 담장 아래 하얀 부추꽃이 눈부신데 그를 따라가 본 비닐 농원은 방울토마토 재배산실이다. 벼농사 외에 주생산물이 방울토마토라는 설명 속에 성실, 근면한 그의 생활은 든든한 신뢰로 다가왔다.
또한 통장의 덕목은 최대한 소비를 줄이는 생활신조다. 이제껏 신용카드를 써본 일이 없다는 대목에서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는 바쁜 농사 일정에도 50가구 200여 명의 주민을 대표하는 의무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생전의 이종근 의원을 아버지처럼 따랐다며 “인생이란 장맛비에 처마 밑에서 잠시 소낙비 피해가는 일”에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듣고 무욕의 삶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고인이 의원시절 지역을 위해 기여한 바 건국대학 캠퍼스 유치, 임경업 장군(1594-1646)의 위업과 정신을 추모하는 충렬사 성역화 작업이 꼽히니 모두 정신문화의 모태를 염원한 까닭이다. 그 뜻을 따라 충렬사로 가는 길목, 하마비에서 옷고름 여미고 사당에 배향한 후 단월초교 앞 단호사(丹湖寺)에 이르렀다. 앞마당엔 500년 수령의 거대한 와송(臥松)이 삼층석탑을 품고 있다. 한 마디로 소나무 명품 반열에 오름직하다. 이 소나무가 팔을 뻗어 참배하던 약사전의 철불이 지금은 새로 지은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대림산 굽어보는 빛나는 고장 60년 전통(1946년 개교)의 단월초교는 28대 교장 김형수씨(57)가 재임 중인데 재호형 때(10회 졸업)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반세기의 위용을 보여준다. 나무 앞의 옛 교실이 재건축된다니 화첩에 담은 그림이 모쪼록 기념이 되는 셈인가.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우리는 이제 달래강 건너 고층아파트 옥상으로 다시 올랐다. 사실 어제도 올라 밑그림을 그렸건만 오늘은 매우 쾌청하여 강산이 더욱 푸르고 유장하다. 대림산이 우뚝하니 남산과 계명산이 어깨를 나누고 단월벌을 휘감아 돌아가는 달래강. 강 위 넓은 들녘은 상단, 하단, 모시래, 신대로 나뉘는데, 시인이 사는 신대 마을은 새터라는 뜻이다.
쓸쓸하고 혼자인 날들 마을 전경을 다시 보고 내려와 차는 뒷산 월은고개를 넘어간다. 달은태로 불리는 월은 마을. 달이 숨는 터에 월계사까지 있으니 모두 달에 취한 이름이다. 그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달천평야, 강물은 휘돌아 달천대교에서 탄금대교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탄금대의 물이 한강으로 접어드는 형국이다. 내친김에 대림산 지역을 한 바퀴 돌아보고 마을로 돌아오니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 주민들이 모여 있다.
시인의 서재에서 하룻밤을 다시 지새며 나는 형에게 마을의 특성을 살린 강변문화제를 제안했다. 이곳 역사인물로 악성 우륵과 서성(書聖) 김생이 머물던 곳으로 중원벌과 달래강 주변의 자연환경을 모태로 창작을 불태운 근현대의 작가들, 신경림, 유종호, 이상화, 권태응, 김태길, 안장환, 류근원, 서범석 등 한국문단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된 터전임을 환기하며 형의 삶 또한 달래강의 달빛이 되어주길 간구하는 마음으로. 다음날 오후, 아내에게 전하라고 청국장과 달래강에서 잡은 냉동 민물고기를 싸서 건네주는 형 부부의 배웅을 받고 아쉽게 헤어진 지 이제 한 달째. 마을 그림에 붓을 떼고 펜을 든 시간, 충주에서 택배소포가 왔다. 발신인은 단월 신대 마을 유흥현 통장. 그새 여물어 딴 방울토마토를 한 아름 추석 선물로 보내온 것이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방울토마토의 생김이 어쩐지 오늘은 알알이 모두 붉은 달(丹月) 송이 같아만 보인다. 여름내 땀 흘린 결실로 단월에서 온 토마토. 그 사연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