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넌 누구니
뉴스위크 지음
중앙일보시사미디어 / 2007년 5월 / 1권 289쪽․2권 241쪽 / 10,000원
▣ 저자 뉴스위크
세계 전역에서 특파원들이 보내온 심층 취재 기사로 엮어지는 국제 시사 주간지다. 1933년 2월 17일 창간됐고 1961년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가 인수했다. 매주 400만 부 이상이 발행되며 2100만 명이 읽는다.
▣ 역자 뉴스위크 한국판
1991년 11월 6일 중앙일보가 뉴스위크와 계약을 맺어 창간했으며 현재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소속이다. 뉴스위크 기사를 번역해 한국인의 관점에서 재가공하고, 세계적 시각에서 한국 기사를 발굴해 싣는다.
▣ Short Summary
미국은 해방과 6․25전쟁으로 한국에 깊숙이 들어왔다. 미국은 왜 한반도를 소련과 나눠 점령했을까.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뭘까. 무엇을 기대하며 한국에 대규모 군사․경제 원조를 했을까. 미국은 한국 현대사의 어느 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어느 부분에서 무력했나. 이 책은 그런 의문을 풀어줄 열쇠다. 미국의 시각에서 한미 관계의 역사적인 흐름을 개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의 한국 관련 기사는 미국정부나 의회, 또는 지식인들이 지난 50여 년간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고민했는지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에 관해 다룬 주요 기사들을 엮은 책. 해방과 한국전쟁, 4.19 혁명과 급속한 경제 발전, 제5공화국과 민주화 운동까지 한국을 조명한 다양한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 차례
책머리에
서문 : 미국 - 미국인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1940s 해방 그리고 분단
귀국할 날 기다리는 이승만 박사 / 미․소 ‘두 개의 코리아’로 분할 통치 / 신탁통치 반대 시위 사상자 9명 발생 / 공산주의자들의 파업 선동 / 병력 철수 둘러싼 미․소의 신경전
1950s 동족상잔의 비극
미국, 세계 경찰 역할을 맡다 / 한국전 종전의 돌파구를 찾다 / ‘위험한 도박’의 성공 / 군사 전쟁에서 이념 전쟁으로 / 유엔의 새로운 저지선 ‘맥아더 라인’ / 중공이 허풍 아니라면 큰 혼란 예상 / 38선의 종말 / 고위급이 결정을 내리다 / 결코 식지 않는 유엔의 화력 / 한국과 맥아더 / 공산군의 병력 증강과 외교적 실패 / 중공군의 3차 공세, 그리고 수훈부대 / 휴전의 의미 / 휴전은 물 건너갔나 / “전쟁포로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 연합국의 조언 묵살한 이승만 대통령 / 미국과 유엔이 피란민 치료 / 선택의 기로에 선 아이젠하워 / 거제도 포로들의 교육 / 반년 만에 재개된 휴전협상 / 세뇌된 포로들의 원상회복 가능할까 / 한국과 미국, 휴전 회담에 의견 접근 / 공산군의 막판 대공세 / 이승만 대통령 휴전 서면협의 / 평화회담의 어두운 앞날 / 다시 일어서는 한국
1960s 혁명과 쿠테타
민주주의의 적으로 추락한 이승만 / “우아하게 민주주의 따질 겨를 없다” / 한국 민주주의 아직 멀었다 / 권력은 강하고 나라는 약하다 / 술렁이는 서울 - ‘격동의 바다’ / 남북대치의 최전선 - 판문점 /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산다” / 한국은 폐허를 딛고 일어섰다 / 백마부대의 베트남 참전 / 국회에 인분 뿌린 김두한 / 경제는 발전하지만 남북 긴장은 여전 / 남한도 문제다
1970s 개발 독재와 신군부 등장
한국은 자신도 미국도 못 믿는다 / 박대통령 승리는 경제정책의 후광 / 남북 첫 공식 회담 ‘이산가족과 통일’ / 세 번째 계엄령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탓? / 민주주의보다 안정을 택했다 /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나이 / 남산의 유령들 / 박 대통령 저격 미수와 육 여사의 죽음 / 신흥 종교가 판친다 / ‘패션과 언어’ 정화 운동 /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 박동선 / 거센 반대에 부닥친 카터의 철군 계획 / “미국 철수하면 전쟁 위험 커진다” / 한국인들이 몰려온다 / KAL기 소련 영내 불시착 사건 / 카터와 힘겨루기에서 한국 판정승 / 물가와 정치의 이중고에 시달린다 / 야당 탄압에 대학생들 거리로 / “국민이 저항할 것이다” / 박정희 사망 그 후 / 여전히 군부가 권력의 중심 / 별들의 전쟁 / “나라가 위태롭다”
1980s 민주화 운동과 올림픽
한국의 실권자 전두환 소장 / 피로 물든 광주 / 미국과 신군부의 신경전 / 불안한 앞날 / “이제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할 때다” / 사회의 ‘불순물’을 제거하라 / 군사법원, 김대중에 사형 선고 / 한반도의 두 철권 통치자 / 해외까지 미친 전두환의 힘 / 왜 서울은 춤추지 않는가 / 사채 시장의 여왕 장영자 / 비행기 공중도 납치 외교? / 아웅산 폭탄 테러 / 30년간의 냉전 / 신상옥․최은희 망명인가 납치인가 / 한반도에 닥칠 미래의 충격 / 서울 올림픽을 향하여 / 오래된 적수 새로운 친구 / ‘은둔’에서 개방으로 / 주식회사 한국이 몰려온다 / 남북 이산가족의 감동적인 재회 /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 남북 관계 아직 희망은 있다 /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섰다 / 정치․사회적 변혁 이끄는 신세대 / 막 오른 서울 아시안 게임 / 아시아의 떠오르는 국제도시 서울 / 자식들 인권침해에 분노하는 부모들 / 개혁은 물 건너갔나 / 육사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 한국의 정치 기적 / 노태우의 압도적 승리 / 꿈이 많은 나라 코리아 / 막 오른 서울 올림픽
1990s 문민정부 시대의 개막
골 깊은 지역감정 / 더 이상 기적은 없다 / 현대 자동차의 수출 행진 ‘주춤’ / 부동산 투기 열풍 / 고르바초프-노태우 첫 정상회담 / 남북한 화해의 머나먼 길 / 과격파 젊은이들 사이에 절망감 팽배 / 김영삼 대장정 고비는 지금부터 / 국민의 정부 출범
표지 기사로 읽는 한국 현대사
Korea 넌 누구니
뉴스위크 지음
중앙일보시사미디어 / 2007년 5월 / 1권 289쪽․2권 241쪽 / 10,000원
서문: 미국 - 미국인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몇 달 전 한 일간지에 회고록을 기고한 일본인 학자는 1977년 월간 《대화》 8월호에 실렸던 리영희 교수의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리영희 교수는 ‘일본인들이 망언을 되풀이하는 근원적인 책임과 잘못이 과연 일본인들에게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망언을 허용하는 근거가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탓도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일본인 학자는 리영희 교수의 글이 기존의 한․일 관계 논의를 180도로 바꾸는 새로운 인식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한․미 관계를 고민해왔다. 미국은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켰고, 한국 전쟁 당시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주었으며, 1950년대 이후에는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에 큰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미국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국인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질문이 아니었다. 단지 한국이 미국에 매우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기도 하고, 한국의 내부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며,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진정 한국은 미국에 그렇게 중요한 나라인가? 만약 중요하다면 왜 중요하고, 어떤 요소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중요하게 고려하도록 만드는가? 만약 중요하지 않다면 미국은 왜 그렇게 많은 비용을 한국을 위해 사용할까? 사실 이 질문들은 리영희 교수가 한․일 관계를 고민한 동일한 맥락에서 한․미관계를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우방이면서 동시에 제국이라는 역할까지 했다면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한․미 관계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부정적인 역할에 한국인들이 실망했다면 그러한 역할을 만들어낸 책임 속에는 한국인들의 몫도 존재하지 않을까.
1940s 해방 그리고 분단
RHEE'S REVIVAL 《1943년 12월 13일자》
귀국할 날 기다리는 이승만 박사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대표부의 전권대표다. 그는 관 속에 들어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가 전권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워싱턴으로 돌아온 유일한 외교관이다. 이 박사는 지난주 카이로 협정문서가 발표되자마자 성명을 발표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이 박사와 그의 정부[현재 중국 충칭(重慶)에 망명]가 조국 땅에 내리쬐던 일본이라는 빛보다 더 강렬한 빛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박사는 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할 날이 길러지기를 반세기 이상 기다려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신사다운 면모를 갖춘 이 박사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다. 그는 감정에 북받치는 목소리로 조용히 기쁨을 표시했다. 말하는 동안 간간이 손가락 끝을 입으로 후후 불었다.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일본 감옥에 투옥돼 몇 년간 옥살이를 할 때 거의 매일 대나무 회초리로 손가락 끝을 후려치는 고문을 받아 생긴 버릇이다. 이 박사는 1904년 석방될 당시 옥중에서 쓴 ‘독립 정신’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 박사는 1912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또 다시 투옥될 위기에 처하자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감리교대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의 출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박사는 일본이 일개 한국인을 붙들어 두는 처사는 한국을 그만큼 두려워한다는 표시이며 2500만 한국인에게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에 뜨끔한 일본은 미국 체류기간 중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6개월 이내에 귀국한다는 전제로 그의 출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후에도 미국에 남아있던 이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내각의 의견을 들으려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의 측근들은 그를 관 속에 숨겨 상하이로 들여보냈다. 일본 정부는 그의 목에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허사였다. 이 박사는 몇 년 전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의 뒤를 김구 주석이 이었다. 한국 안에 있는 한국인들 역시 김구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 아래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종교 탄압마저 받고 있다. 68세인 이 박사는 살아생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계 민주진영에서 승인 받고(아직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자유를 찾은 조국의 품에 돌아갈 날이 꼭 오리라고 믿었다.
- 김구는 이번 주 충칭에서 전후(戰後) 즉시가 아니라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회담 당사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KOREA UNDER TWO FLAGS 《1945년 10월 1일자》
미․소 ‘두개의 코리아’로 분할 통치
해럴드 아이잭스 뉴스위크 특파원은 미국과 소련이 ‘해방’해준 이후 한국에 닥친 정치․경제적 혼란상을 믿을 만하게 설명한 기사를 보내왔다.
존 R하지 중장은 미 육군 제24사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을 이행할 연합국 최고위층의 정책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설사 연합국의 정책이 있다 해도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가 아는 내용은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받은 특명뿐이었다.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현 정부 체제를 유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처음엔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이끄는 조선 총독부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미군을 하늘이 보낸 해방군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한 한국인에게는 충격이요, 실망이었다. 한국인들의 이런 반응은 미국의 점령 정책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식량, 토지, 정치: 그 다음 시급한 문제는 식량이다. 일본인들은 전쟁 동안 농촌에서 모든 곡물을 약탈했으며, 비축해 놓은 다량의 식량을 미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태우거나 버렸으며, 그 외 다른 방법으로도 먹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쌀과 육류․어류․채소는 구하기 힘들고 가격도 비싸다. 일본인들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화폐를 남발하고, 물가 통제조치를 중단함으로써 소비자 시장에 혼란을 야기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많은 사람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라고 알려졌다. 좀 더 광범위한 경제 문제는 부동산 소유권 문제다. 땅과 공장․상점을 포함해 전체 부동산의 약 80%가 일본인 소유로 추정된다. 하지 중장은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몰수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현재 미군은 혹시 있을지 모를 한국인들의 점거 시도를 우려해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보호 중이다. 미군의 점령 이후 50여 개의 정당과 위원회․단체가 생겼다. 가장 중심이 되는 두 단체는 민주당과 인민공화국건국준비위원회다.
두 개의 코리아는 안 된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군 통치 지역과 소련군 통치 지역으로 나뉨으로써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한국인들은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들은 이런 상황 역시 ‘일본의 책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자가 이해한 바로는 미 국무부와 육군 모두 분할 통치는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현재 이곳의 상황 전개로 미루어 한국 점령에 관한 사전 계획이나 관련 정책의 진지한 고려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곳에 파견된 미 국무부 대표라고는 한국 경험이 전무하고 정치적 책임도 없는 하위 외교관 한 명뿐이다. 어쨌든 원래는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소련․중국․영국이 형식적으로 대표를 파견할 계획이었다는 정보를 접했다. 분할 통치 발표는 포츠담 회담 이후에 나왔고, 미국 측 관계자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소련은 신속히 움직였다. 그들은 미군이 도착하기 13일 전인 8월 26일 관할 지역을 점거했다.
1950s 동족상잔의 비극
UNCLE SAM TAKES AS WORLD COP 《1950년 7월 10일자》
미국, 세계 경찰 역할을 맡다
미국이 자유를 수호하려고 이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적은 없었다. 대담한 국가정책을 승인하면서 미국인들이 이처럼 굳은 결집력을 과시한 적은 없었다. 아직도 용감한 기사의 개입을 갈망하는 세계에서 미국의 국가적 자존심이 이같이 고양된 적은 없었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의 남한 투입을 명령했다. 이로써 미국은 정복욕에 사로잡힌 공산군으로부터 극동의 이 공화국을 구해내는 돌이키지 못할 임무를 떠맡게 됐다. 발표 당시 트루먼은 미국의 대표로, 그리고 말 그대로 자유세계의 대표로 연설했다. 트루먼은 미군 최고사령관으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적 침략 행위에 맞서 유엔을 대표해 행동할 권한을 위임받은 세계 경찰 총수의 자격으로 연설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침략 현장에서 트루먼을 대신하는 부사령관이 됐다.
위험: 트루먼과 참모들은 미군 투입을 전쟁이 아니라 치안유지 작전이라고 불렀다. 신중한 표현이었다. 미국 측은 또 러시아가 지금이나 추후에 북한군 침략자들과 쉽게 관계를 단절하도록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참모들은 미국이 중대한 위협에 직면한 사실을 알았다. 러시아는 북한군을 물러가게 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직접 남침에 가담하진 않았다. 소련제(U.S.S.R.)표식의 항공기가 최전방에서 간혹 눈에 띄었지만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에 뛰어들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위성국 국민들에게 맡기려는 듯했다. 위성국 사람들은 전투 초기단계에 스스로도 놀랄 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러시아가 만주나 시베리아에 주둔 중인 자체 병력을 동원해 북한군을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 군사력은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 휘하의 군사력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세계가 북한의 남침에 정신이 팔린 사이 소련은 대만․인도차이나․베를린․유고슬라비아․이란 등 10여 곳 중에서 한 곳을 실제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험에는 신중한 계산이 요구된다. 미국과 유엔의 입장에서 한 번도 싸워 보지도 않고 ‘트루먼 라인’(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하려 트루먼이 동북아시아에 그은 선)이 뚫리도록 내버려 둔다면 세계에(특히 서구 민주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에) 앞으로 러시아권 밖에선 안보를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분할에 뒤이은 일련의 사태도 따지고 보면 서구의 그 같은 ‘직무 유기’의 결과였을지 모른다(적어도 트루먼과 그의 참모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트루먼 진영은 그러나 그 같은 일련의 사태 이후에 초래될지 모를 세계대전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도전에 맞선 미군
‘사후 약방문’이라는 한국의 오랜 속담은 4200년 동안 이 나라에서 그래 왔듯이 지난주에도 그대로 통했다. 한국전쟁 발발 첫 주 내내 서구는 환자를 구하려는 희망에 약방문을 하나씩 처방해 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처방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구하기엔 시간상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 남침한 지 불과 이틀 뒤인 6월 27일 오전 9시 30분(현지시간) 이미 러시아제 T-30중형 탱크와 T-70경형 탱크를 포함한 북한군 탱크 100대가 서울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서울은 시민들(현재114만 1766명)이 대혼란에 빠져 무법천지가 됐다. 북한군은 지프․담배 등 모든 동산(動産)을 ‘빌려’갔다.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을 접수하자마자 주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고 황급히 집과 가게 앞에 ‘해방군 환영’이라고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그러나 서울 중심가 도로 변에는 침략자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초가집과 기와집 안에서 지냈고, 가게 문은 나무판자로 굳게 걸어 잠갔다.
NEW UNITED NATIONS LINE-MACARTHUR'S 《1950년 10월 9일자》
유엔의 새로운 저지선 ‘맥아더 라인’
이번 주 38선을 넘은 유엔군의 목표다. 유엔군은 서울 함락 후 북한 수도 평양을 쟁취하겠다고 수륙양용 공격에 나섰다. 미 해병대가 38선에 접근하면서 이미 재개되기 시작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막으려는 목적이다. 맥아더 라인은 맥아더 장군이 혼자 정한 저지선이 아니었다. 그 선은 맥아더가 북한군의 항복을 요구하기 전에 맥아더에게 주어진 비밀 지시의 일환으로 미국 정부가 결정했다. 맥아더 라인은 북한에서 동서의 폭이 좁은 지역을 가로지르는 선이다. (토끼 모양을 한 한반도의 목 부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선). 유엔군은 잔여 북한군을 괴멸시킨 뒤에도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물론 한국전쟁의 모든 작전처럼 이 계획도 사전 통고 없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한국전을 해결할 정치적 방법이 모색되는 동안 유엔군이 그곳에서 대기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선이 중국․러시아와 유엔군 사이에 상당한 면적의 완충 지대를 남겨두려는 취지로 설정됐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38선을 넘는 모든 전략에는 인천상륙작전처럼 매우 큰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북한 땅에 진입할 무렵 이미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은 38선이 뚫리면 중국이 북한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중국의 이런 위협을 허풍으로 여긴다. 그러나 맥아더라인은 중국이 한국에 실제로 개입할 경우 기꺼이 맞서 세계평화에 초래될 위험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더군다나 유엔의 38선 통과 결정 이후 공산 진영에 초래된 혼란은 전적으로 우연만은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계획을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할 어떤 근거도 못 찾았다. 미국은 38선 통과가 군사적인 기습공격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연합국의 조언 묵살한 이승만 대통령
“敬天愛人”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 집무실 문에 걸린 훈시다. 이 대통령이 직접 붓으로 쓴 15cm 높이의 사자성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가르침대로 살려 애썼어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는다고 이 대통령은 느꼈으리라. 국민의 손으로 뽑은 국회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유엔이 승인한 1948년의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임무는 의회에 맡겨졌다. 그러나 의회는 이 대통령에게 다시 대통령직을 맡길 분위기가 아니다.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이 대통령의 헌법 개정안도 보류됐다. 국민투표라면 이 대통령이 재선될지도 모른다. 지난주 워싱턴에 도착한 외교 보고서는 우려를 자아냈다. 이 대통령이 아직도 국회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보인다고 묘사됐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리라고 예측했다. 일부 보고서는 이범석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하는 이 대통령 충복들이 무력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어떤 외교적인 충고에도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존 J 무초 미국 대사는 이 대통령에게 미국의 입장을 끈질기게 설명했다. 그는 헌법적 절차를 지키겠다는 보장을 받아내려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엔이 적극적으로 도우려 한다는 뜻을 이 대통령에게 확인해 줬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미국과 유엔이 경제와 금융 지원을 줄이기로 한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정간섭보다는 낫다.”
▶유엔 한국 통일부흥위원회(UNCURK)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UNCURK는 열흘간 냉각기를 두며 체포된 반대파 의원들을 석방하고, 부산 지역 계엄령을 해제하는 한편 의회를 휴회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대사도 이 제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앤서니 이든에 이어 영국 외무부 2인자인 셀윈 로이드는 한국의 정치 싸움 때문에 영국 내 여론이 나빠진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했다. 로이드는 체포된 의원들이 “2~3일 내에” 재판을 받으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 정치위기를 헌법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확약도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오히려 일부 반대파를 탄압했다. 국내로 반입되는 모든 외국 발행물 중에서 이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내용을 모두 까맣게 지우도록 검열 팀에 지시했다. 한국 정부는 관영 라디오를 통한 ‘미국의 목소리’ 방송을 중단했다. 그 방송이 “심하게 반정부적이고 명백하게 모욕적인 비판”을 방송했다는 이유였다. 이 대통령의 공식 대변인 클래런스 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의 방송국이 주권국가인 한국의 분열에 사용되지 않도록 단호히 대처하겠다.” 미국 대사관은 “크게 놀랐다”고 표현했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미국 대사관 앞의 경찰 경비력을 늘렸다. 경찰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훼방을 놓아 방문자 수가 줄어들도록 했다. 미국의 항의에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지만 즉각적인 조치는 없었다.
한국과 미국, 휴전 회담에 의견 접근
이번 주 한반도의 휴전으로 향한 길은 두 명의 초병이 경비를 선 평범한 출입구에서 시작됐다. 구불구불한 사유 차로를 따라 올라가다 파출소 한 곳과 몇 개의 초소를 더 지나면 서울 북한산의 완만한 비탈의 널따란 잔디밭과 숲으로 둘러싸인 낮은 벽돌 건물이 나타난다. 차도 끝에 자리 잡은 이 평범한 저택은 청록색 기와지붕과 가운데에 솟아오른 높은 굴뚝이 돋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였다. 월터 S 로버트슨 극동담당 국무차관보가 이 건물의 남쪽 입구를 들락거렸다. 그는 한국의 휴전 반대 불길을 잡으라고 지난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파견한 1인 소방대였다.
아이젠하워의 소방수: 대통령이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긴 로버트슨은 건장하고 호감을 주는 버지니아 주 출신의 “민주당 내 아이젠하워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투자 은행가로 일하던 로버트슨은 10년 전인 49세 때 호주 군사물자 대여 팀 책임자로 국제문제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충칭(重慶)주재 미국 공사를 맡아 베이징에서 1946년 대(對)중국 마셜 미션(협상을 통해 중공군과 국민당 군의 통합정부를 꾀했던 미국 조지 마셜 장군의 계획)의 중재자로 어려운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대통령 특사로서 즉석에서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를 지원하는 유엔군 사령관 마크 W 클라크 대장도 미 국방부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때보다 큰 자유재량권을 부여받은 야전지휘관이다. 주 초반 클라크 대장은 로버트슨이 도착하기 전 도쿄에서 서울로 날아가 이 대통령과 두 차례 회담했다.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6월 26일 이 대통령을 첫 대면하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 후 혼자 또는 클라크와 함께 매일 이 대통령과 의견을 교환했다. 로버트슨은 첫 회담이 “아주 우호적이었다”고 평했으며 곧 쌍방이 한․미 방위조약에 관한 합의에 접근했다고 보도됐다. 한․미 방위조약은 이 대통령이 내건 휴전 수용전제조건 중의 하나였다. 앞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이 매듭지어진 후 그런 조약을 협상하자고 제안했었다. 한편 클라크는 당장 판문점에서 회담을 열고 휴전협정을 매듭짓자고 공산군 측에 요구했다. 그는 풀려난 북한 포로들을 다시 잡아들이라는 북한 측의 요구를 이행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유엔 사령부는 “능력이 닿는 데까지 군사적 보장 조치를 마련해 남한 측이 휴전 조건을 준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분노: 앞서 이 대통령은 휴전 조건으로 세 가지를 계속 요구했다. 미국의 대한(對韓)안전보장, 중공군의 만주 철수, 휴전 후 정치회담의 90일 시한 설정 등이다. 그 기간 내에 아무런 조약이 나오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하자는 주장이다. 전쟁 발발 3주년인 6월25일, 이 대통령은 서울의 불타버린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 모인 대규모 휴전반대 집회에 나가 연설했다. 열변을 토한 다른 연사들과는 달리 이 대통령은 실로 품위가 있었다. 느리고 신중하게 말을 하며 가끔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당장 공산군과의 대결”을 요구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하면서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산군 측은 로버트슨의 임무가 이 대통령의 “응석을 받아주려는” 미국의 위험한 의지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라디오 베이징은 한․미 방위조약이 어떤 평화협정에도 위협이 되는 ‘시한폭탄’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로버트슨-이승만의 회담으로 휴전 협상 결렬위기가 “커진다”고 주장하고 풀려난 전쟁포로들을 다시 체포하라는 요구를 방송했다.
1960s 혁명과 쿠테타
FREEDOM, FRIENDS, AND FALLACIES 《1960년 5월 2일자》
민주주의의 적으로 추락한 이승만
자유국가의 국민은 지난주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며 한마디로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과연 이 나라가 겨우 7년 전에 5만 4000명의 미국인이 공산주의를 물리치려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그 작고 용감했던 나라란 말인가? 과연 이 나라의 대통령은 성미가 좀 급하지만 신념은 누구보다 굳었던, 그리고 온 생애를 바쳐 민족의 자유를 위해 무슨 일이든 맞서 싸웠던 그 이승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지난주 남한은 야만적인 탄압의 현장이었다. 이승만의 하수인들이 투표함을 마음대로 채워 넣고 국민투표를 조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인에게도 매우 친숙한 이름인 대전․대구․인천 등지의 학생 시위대를 탱크로 진압했다. 하지만 지금 그 도시에서는 무장도 하지 않은 일반시민 수백 명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했다. 그들에게 총구를 겨눈 경찰 중에는 예전에 미군의 전우였던 사람들도 있다.
실패?: 남한의 비극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춤추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들 탓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에 만연한 현상을 반영했다. 신생 독립국들은 전후에 거의 모두가 열정적으로 민주주의를 끌어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지난 3월 인도네시아 의회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예산안 통과를 거부했다. 그러자 수카르노는 간단히 의회를 해산해 버리고 대통령포고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벵골만 건너편의 민주주의 국가 실론(현 스리랑카)에서는 총리가 암살을 당했고 후임 총리도 지난주 취임 3주 만에 사임해버렸다.
폭력진압: 남아공은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이 일으킨 소요를 경찰봉과 장갑차로 진압했다. 서아프리카 가나의 흑인 총리는 새로 탄생한 공화국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무장병력을 보내 정적을 해치운 덕분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사회에서도 민주주의는 어려움을 겪는다. 터키 정부는 3개월 동안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일본 사회당은 미국과의 안보조약 체결을 저지하려고 의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민주주의 국가 이탈리아도 9주 동안 무정부 상태로 후계자 언급도 없이 그냥 물러나 버리는 총리 내정자 아민토레 판파니의 모습을 손놓고 바라봐야만 했다.
이 모든 사태는 경제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신생독립국은 민주주의를 쉽게 이루기 힘들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는 법적․사회적 전통이 부족한 영어권 나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민주주의는 가장 세련된 정부 형태이며, 만들기도 작동하기도 유지하기도 가장 힘든 정치체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분명 다른 형태의 정부가 출범할 것이다. 이집트와 태국은 독재정권의 인기가 높고 파키스탄은 독재자 아래서 자비로운 형태의 ‘기초민주주의’를 실험한다. 현재로 봐서 한국의 향후 정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달렸다. 하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그의 지배에 항거한 젊은이들에게 상당 부분 달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은 희망적인 신호였다.
한국 현지 상황
서울 외곽의 언덕 위에서 탐조등이 텅 빈 시내를 비췄다. 시커먼 한국군 탱크가 주요 교차로에 서 있고 총검을 빼든 군인들이 정부 건물을 지킨다. 10년 전 전쟁으로 부서진 수도 서울의 하늘이 그랬듯이 폐허 속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서울을 휘감았다. 지난주 유혈폭동으로 한국 학생 13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상하게도 서울은 조용했다. 엄격한 야간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모든 학교와 대학이 교문을 폐쇄했고 버스 한 대 돌아다니지 않았다. 서울은 긴장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를 뒤흔들어 놓은 이번 사태의 다음 국면을 기다렸다.
어떻게 해서 이번 위기가 혁명 직전까지 갔나? 뉴스위크 극동담당 특파원 라파엘 스타인버그 기자가 이번 소요의 생생한 목격담을 전해왔다. 이승만에 맞선 극렬한 저항은 3월 15일 대통령 선거 이후 수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었다. 선거부정과 협박을 목격한 한국인들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선거부정만 고발해대던 민주당의 선거운동이 과연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리고 야만적인 경찰의 진압이 뭔지도 알게 됐다. 선거 후에 학생들이 대규모 반대시위를 벌였던 마산에서 최소한 12명의 젊은이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STRONG MEN, WEAK COUNTRY 《1962년 10월 29일자》
권력은 강하고 나라는 약하다
오전 9시가 채 안 됐을 때 에어컨이 나오고 방탄창이 굳게 닫힌, 붉은 전조등의 검정 캐딜락이 수도 서울의 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머리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두려움과 존경심으로 훈장 다섯 개가 달린 황록색 군복의 무표정한 사나이를 마주하길 꺼린다. 국가 재건최고회의 두꺼운 판유리 문 앞에 리무진이 서자 호위병들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힘차게 경례를 올린다. 그렇게 남한 최고의 권력자 박정희 장군이 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961년 5월의 어느 날 밤 겨우 군인 3600명을 이끌고 남한을 접수한 임시군사정부의 수장인 박정희는, 60만 군대와 미국의 후원을 받아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넘어뜨린 뒤 지금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대통령 권한 대행을 선언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으며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커피․미국담배와 축첩 같은 ‘쓸모없는 사치’를 못하도록 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화폐를 환에서 원으로 바꿔 통화를 재평가하고 안정시켰다. 또한 실각한 장면 총리를 구속하는 등 이른바 ‘정치순화’운동에 맞선 모든 저항을 제거했다. 오늘날 그의 개혁은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치며 권총을 들이밀며 이뤄진다.
투표: 이렇게 유리한 고지에서 김종필이 국가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가 재건당’을 조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내년 총선에 즈음해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던 수차례 거듭된 약속의 이행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앞으로 8개월 동안 한국 국민은 투표장에 두 번 나가게 된다. 사실 결과는 뻔하다. 12월에는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군대가 작성한 입법안에 국민투표를 한다. 그리고 내년 5월에는 새로운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하지만 한국은 선거나 법령으로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 4성 장군 박정희가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 선거에 나설 테고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된다.
굴레: 남한 인구 2500만 명중 200만 명 이상(가용 노동인구의 약 20%)이 실업자다. 명시적으로 제공된 미국의 투자원조금만도 22억 달러에 달하는데 경제는 비능률과 나태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한국은 숙련된 기술 인력이 부족하다. 김종필의 CIA(중앙정보부)는 광범위한 업무를 다룬다. 남한 사람들에게 돼지우리를 짓는 일부터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일까지 거의 모든 일을 가르친다. 이런 훈련 프로그램 덕분에 CIA는 ‘중앙대학교(Central University)’라는 별명이 붙었다. 또한 최고회의 구성원들에게 대학에서 행정학 과정을 밟으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렇듯 나름대로 성과는 있지만 여전히 모순이 가득하다. 군사 정부는 애초에 철저한 도덕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반(半)합법적 홍등가 8곳을 서울에 세웠다. 카바레와 술집이 통금시간까지 흥청대고 뒷골목에서는 일본 파친코 영업장들이 버젓이 운영된다. CIA는 주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에서 실내 운동경기장을 새로 짓고 고층빌딩 ‘자유센터’를 세우고 “아시아 청소년들에게 반공주의를 가르치려는” 학교의 건축까지 관리 감독한다.
외화: 가장 논란이 많은 CIA프로젝트는 서울 외곽에 짓는 450만 달러짜리 워커힐 리조트다.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월튼 H워커 중장의 이름을 딴 이 리조트가 오는 12월에 개장하면 룰렛, 블랙잭, 그리고 회전무대를 갖춘 나이트클럽이 구비된 극동의 라스베이거스가 될 예정이다. 레스토랑․바․테니스코트․볼링장․수영장 등은 주로 5만 명의 남한 주둔 미군이 이용한다. 2개의 호텔과 13개의 모텔은 싱글 룸에 2.80달러, 더블 룸에 3.50달러인데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을 기재할 의무는 없다. 워커힐은 무역수지 불균형을 줄여 볼 심사로 고안됐다. 한 해 170만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목표다. “우리는 미군들에게 정말 뭔가를 해주고 싶다”고 김종필은 생색내는 듯이 말했다. “미군은 워커힐에서 어머니께 꽃을 보내거나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할 수도 있다.”
외교: 지난주 김 대령은 도덕재무장회의에 참석하고 보다 나은 한․일간 무역 관계를 수립하려고 도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과 협의하겠지만 김종필 자신도 배상금 합의 가능성은 매우 낫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김종필은 워싱턴으로 간다. 미국 CIA가 개발한 최신 기술을 둘러보고 미국 당국자들을 만나면 분명 남한의 독재통치를 완화하라는 압력을 다시금 받게 된다. 그런 압력을 예상한 김종필은 지난주 미국에서 교육 받은 온건한 지식인이자 전임 총리인 장면 박사를 석방했다. 장면은 1960년 독재자 이승만을 하야시킨 학생시위 후에 총리로 선출됐다. 하지만 지난달에는 징역 10년 선고를 받았다. 반혁명단체에 780달러를 기부했다는 날조된 죄목 때문이었다.
‘A ROUGH SEA’ 《1965년 1월 4일자》
술렁이는 서울 - ‘격동의 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또 다른 아시아 나라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불과 십여 년 전 미국은 공산주의를 물리치려고 이 땅에 3만 3629명의 젊은 목숨을 바쳤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의 무관심이 큰 걱정이다. 원조가 많이 줄어들까 불안하다. 열흘 동안 남한을 방문한 제임스 맥트루이트 뉴스위크 도쿄 지국장은 현지의 사정을 이렇게 전해왔다. 김포공황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는 넓고 현대적이다. 그 옆 황폐하게 얼어붙은 대지 사이로 에메랄드빛의 한강이 흐른다. 소달구지를 빼면 도로는 한산하다. 수도 서울에 거의 다다랐을 때 길은 갑자기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초가지붕이 이어지는 지저분한 길가에, 한눈에도 몹시 추워 보이는 농부들이 작은 불씨 곁에서 옹기종기 몸을 웅크린다. 미국이 10년 동안 30억 달러를 원조했지만 남한은 여전히 가난하고 가난하며, 그저 가난할 뿐이다.
시골 아낙네들은 얼마 안 되는 귤 몇 덩어리를 지키느라 덜덜 떨며 밤을 지새운다. 버려진 네 살배기 아이가 넝마조각만 걸친 채 벽에 기대서 비참하게 목이 터져라 울어도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서울의 TV방송국이 눈부신 스튜디오를 마련한 남산 근처 비탈길에는 천막과 나무를 얼기설기 이어붙인 판잣집 수천 채가 서 있다. 추산에 따르면 60만 명이 이 더러운 헛간 같은 곳에 살며 서울 인구 350만 명 중 10%는 원조물자에 의지해 산다. 일자리라고 해봤자 한 달 월급이 고작 15달러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2700만 한국사람 대부분이 둥지를 튼 시골에 가면 그런 평균치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외국 방문객들에게 한국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인 반도호텔의 방 한 개 값이 5달러20센트밖에 안 된다. 장거리 택시요금도 12센트면 족하고 구두닦이를 한 달 내내 대놓고 써도 32센트면 뒤집어쓴다. 십여 곳이 성업 중인 서양식 나이트클럽도 가격은 아주 저렴하다. 쇼는 볼만하다. ‘집시데몬’이라는 이름의 헬렌 해리스는 클럽 맨해튼에서 밤마다 스트립쇼를 한다. 매력적인 접대부들은 별로 풍만하지는 않지만 손님을 따라서 집에 같이 갈 준비가 돼 있다.
고아들: 이러한 한․미관계에서 비롯된 한 가지 결과는 수많은 고아의 양산이다. 좀 긍정적인 현상을 찾자면 영어로 쓰인 ‘중매(Marriages Arranged)’ 간판의 범람이라 하겠다. 미군 당국이 여러 가지 제한조처로 차단하려 들지만 매달 미군 100여 명이 한국여성과 결혼한다. 달러를 잔뜩 가진 미국인과 결혼 내지는 잠자리라도 같이 하겠다고 달려드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은 이 나라의 가난을 표상하는 또 하나의 징표다. 그러나 이제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보통의 경우라면 동네 선술집에서 소주라는 아주 지독한 술 한 잔 사 먹을 생활수준은 됐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물가가 치솟으면서 한국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필사적인 응급책이 필요해졌다. 가장 흔한 풍경은 거리에서 껌을 파는 어린 소년들이다. 가족의 궁핍을 어떻게든 돕겠다는 심산이다. 물론 궁핍은 한국인에게 전혀 낯선 일상이 아니다. 지난 13세기부터 계속된 몽고족의 침입과 일본인들의 침략은 한반도의 실질경제를 고갈시켰다. 1896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은 남한 사람 22만 5000명의 목숨을 빼앗고 17만 5000명의 부상자를 만들었다. 생존자들은 그 상흔 위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했다.
경제 활기: 박정희 대통령은 또 한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한국의 국민 총생산은 매년 5% 이상씩 증가한다. 섬유․텅스텐․기계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수출은 5년 전 2000만 달러에서 껑충 뛰어 올해 1억 1000만 달러가 기대된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에서 두 눈으로 뚜렷이 확인된다. 여전히 가난하긴 하지만 예전보다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양호해졌고 옷차림도 좋아졌다.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하고 거리도 밝아졌다. “모든 일이 잘만 풀리면 6~7년 내에 경제자립도 가능하다”고 미국의 한 경제전문가는 평가했다. 이런 전망을 낙관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은, 한국인이 증오해 마지않는 옛날 지배자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양국 협상은 무역흑자와 보상금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단속적으로 열린 한․일 정부 회담은 지난 3년 동안 별 진전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부 해상에서 일본 어선은 한국 해안 100마일 밖에서 조업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장 때문이다. “한국은 고통을 겪었고 일본은 고통을 줬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고 박은 말했다.
1970s 개발 독재와 신군부 등장
CRISIS OF CONFIDENCE IN KOREA 《1970년 7월 27일자》
한국은 자신도 미국도 못 믿는다
북녘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이 막 둥지를 튼 대한민국에 침략했다. 그리고 ‘냉전’시대의 가장 잔혹했던 그 분쟁이 일어난 지 만 20년이 지났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미증유의 성장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막상 군사력만 제외하고 모든 분야에서 심상치 않은 신뢰감 위기를 느끼게 됐다.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지역 미군 감축 계획은 한국에 불확실성이라는 충격파를 던졌다. 얼마 전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버나드 크리셔가 한국으로 날아가 국민과 정치가들의 분위기를 전해 왔다. 이번 주 데이비드 패커드 국방차관과 한국의 정래혁 국방장관은 하와이에서 만났다. 분명히 한국전쟁 이래 두 우방 간에 민감한 회담이 될 전망이다. 쟁점은 남한에 주둔하는 6만 명 이상의 미군 병력 중 약 2만 명을 철수한다는 워싱턴의 계획이다.
지난주 이틀간의 초조한 논쟁을 마친 한국 국회는 “어떤 근거에서든” 미군 감축을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개적 논의를 꺼렸지만 (한 대변인은 일반 대중이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라고 말했다) 신범식 문화공보부 장관은 그런 과묵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여기 있는 당신네 군대는 베트남 주둔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더군다나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러면서 전쟁을 막아준다. 한국에서 미군 한 명이라도 철수하는 날에는 미군이 가진 전쟁 억지력의 상징을 스스로 해치는 꼴이 된다.” 그런 떠들썩한 두려움은 미군에게 훈련받은 강력한 군인 56만 명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1969년에 15.9%)을 자랑하는 나라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나는 서울 시내에 새롭게 솟아오른 마천루, 수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드넓은 고속도로, 사람들로 붐비는 디스코텍과 교통 혼잡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20년 전의 기억, 즉 스탈린주의적 정치지도자인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을 등에 업고 38선을 쳐들어온 일은 여전히 생생하다. “당신들은 1950년에 저질렀던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고 한국의 관리 한 명은 말했다. “미국이 군대를 감축하면 김일성은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믿고 또 다른 공격을 감행하려들지 모른다. 그러면 결국 이곳 남한에 현재 수준으로 미군을 주둔시키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
CHOOSING THE FAMILIAR 《1971년 5월 10일자》
박대통령 승리는 경제정책의 후광
선거유세란 박정희(53)한국 대통령에게 언제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전임 육군 소장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3선에 나서면서도 유세장에는 최소한도로 나갔다. 간혹 나서는 선거운동도 지역 대도시에 잠깐 비행기를 타고 가는 정도다. 참모들마저 “학교 선생님처럼” 청중을 가르치려 드는 대통령의 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박정희의 최고 정적인 김대중(45)씨는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한다. 작은 마을들로 차를 몰며 김 의원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제도화하려 한다고 강조하고 이제는 “변화할 때”라고 역설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선거운동 초기 상대적으로 무명이던 김대중 후보는 공격적이고 호감 가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난주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박 대통령이 약 100만 표에 달하는 표 차로 손쉽게 세 번째의 4년 임기를 거머쥐었다. 결과가 말해주듯 선거운동은 별로 활기가 없었을지언정 유권자에게는 박대통령의 메시지가 통했다.
경제번영: 하지만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의 자신은 정권이 일궈낸 제 성과라는 자부심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10년 동안 한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국민 총생산량은 매년 평균 12%씩 성장했다. 이러한 수치로 볼 때,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는 경제정책의 후광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새로운 5개년 경제계획을 계획대로 달성할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가장 산업화된 나라를 만든다는 목표다. 동시에 박대통령의 굳건한 반공주의는 많은 한국 국민의 마음과 통하는 듯하다. 한국 국민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급속히 이탈하는 문제로 걱정이 많다. 그러므로 14년간의 일인 통치가 겨우 싹트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손상시킬지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같은 선택을 했다고 보인다. 미국의 외교관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의 승리는 지속성을 의미한다. 변화무쌍한 아시아 상황에서 보면 이런 선택도 나쁘지는 않다.”
1980s 민주화 운동과 올림픽
KOREA'S MAN IN CHARGE 《1980년 1월 21일자》
한국의 실권자 전두환 소장
지난해 12월 영관급 장교들이 한국의 계엄사령관을 체포했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은 미국의 동맹국이 위험한 군사독재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두려움이 확산됐다. 그러나 카터 정부와 한국 국민의 압력을 받는 신군부 장군들은 권력을 잡을 뜻이 없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뉴스위크의 버나드 크리셔 기자가 보도한다.
한국의 새 실권자는 전면에 나서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육군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지난해 12월 12일 전차와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움켜쥐었다. 실제로 만나 보니 겸손한 전문가의 인상을 풍겼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장군들은 대체로 자기들끼리 별을 몇 개 더 얹어주는 잔치를 벌인다. 그러나 그의 양 어깨에는 여전히 별 두개만 달렸다. 전두환은 군인이 대한민국처럼 복잡한 공업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며, 자신은 오로지 부대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한국 사회 곳곳에 손을 뻗쳐 온 보안부대를 통해 인상적인 정치권력을 구사한다. 일부 한국 국민은 과연 전두환의 언행이 일치할지 의문을 품는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든가, 현재보다 더 독재자가 되든가 둘 중 하나”라고 한 시민은 말했다.
전격체포: 지난주 전 장군을 만나 한동안 함께 있었다. 그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필자가 자신이 만난 첫 언론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 줄 때 마음이 더 편한 듯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그가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의 전격체포 지시는 단지 업무 수행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 측 공식 설명에 따르면 정 총장이 지난해 10월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개입한 증거가 있어(적어도 현장 근처에 있었고 사건 뒤 수상하게 행동했다) 전두환은 수사를 지휘하는 합수부 책임자의 입장에서 마땅한 행동을 취해야 했다.
국가 안보를 고려해 임시 대통령이 선출된 지 6일 뒤인 12월 12일로 체포를 연기했다고 한다. “많은 소문과 오해가 있는 줄 안다”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단독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 얼굴을 보고 믿어 줬으면 좋겠다. 확실한 증거를 토대로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된 한 장군을 체포하려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군부는 내각이나 대통령이나 그 어떤 정책도 바꾸지 않았다. 만일 쿠데타였다면 다르지 않았겠는가.” 주 장관은 12․12사태를 군사 쿠데타로 정의하고 정 총장 체포에 전방 병력을 동원했다고 비난하는 카터 정부의 비판자들에게 대꾸하고 싶은 듯했다. 그 병력은 정 총장의 일부 부하가 반격하는 바람에 보강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뜻밖의 상황에서 서울 근교에 주둔한 일부 전방부대의 동원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사태가 되풀이되는 일은 없다고 분명히 장담한다.”
Korea 넌 누구니
뉴스위크 지음
중앙일보시사미디어 / 2007년 5월 / 1권 289쪽․2권 241쪽 / 10,000원
▣ 저자 뉴스위크
세계 전역에서 특파원들이 보내온 심층 취재 기사로 엮어지는 국제 시사 주간지다. 1933년 2월 17일 창간됐고 1961년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가 인수했다. 매주 400만 부 이상이 발행되며 2100만 명이 읽는다.
▣ 역자 뉴스위크 한국판
1991년 11월 6일 중앙일보가 뉴스위크와 계약을 맺어 창간했으며 현재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소속이다. 뉴스위크 기사를 번역해 한국인의 관점에서 재가공하고, 세계적 시각에서 한국 기사를 발굴해 싣는다.
▣ Short Summary
미국은 해방과 6․25전쟁으로 한국에 깊숙이 들어왔다. 미국은 왜 한반도를 소련과 나눠 점령했을까.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뭘까. 무엇을 기대하며 한국에 대규모 군사․경제 원조를 했을까. 미국은 한국 현대사의 어느 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어느 부분에서 무력했나. 이 책은 그런 의문을 풀어줄 열쇠다. 미국의 시각에서 한미 관계의 역사적인 흐름을 개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의 한국 관련 기사는 미국정부나 의회, 또는 지식인들이 지난 50여 년간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고민했는지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에 관해 다룬 주요 기사들을 엮은 책. 해방과 한국전쟁, 4.19 혁명과 급속한 경제 발전, 제5공화국과 민주화 운동까지 한국을 조명한 다양한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 차례
책머리에
서문 : 미국 - 미국인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1940s 해방 그리고 분단
귀국할 날 기다리는 이승만 박사 / 미․소 ‘두 개의 코리아’로 분할 통치 / 신탁통치 반대 시위 사상자 9명 발생 / 공산주의자들의 파업 선동 / 병력 철수 둘러싼 미․소의 신경전
1950s 동족상잔의 비극
미국, 세계 경찰 역할을 맡다 / 한국전 종전의 돌파구를 찾다 / ‘위험한 도박’의 성공 / 군사 전쟁에서 이념 전쟁으로 / 유엔의 새로운 저지선 ‘맥아더 라인’ / 중공이 허풍 아니라면 큰 혼란 예상 / 38선의 종말 / 고위급이 결정을 내리다 / 결코 식지 않는 유엔의 화력 / 한국과 맥아더 / 공산군의 병력 증강과 외교적 실패 / 중공군의 3차 공세, 그리고 수훈부대 / 휴전의 의미 / 휴전은 물 건너갔나 / “전쟁포로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 연합국의 조언 묵살한 이승만 대통령 / 미국과 유엔이 피란민 치료 / 선택의 기로에 선 아이젠하워 / 거제도 포로들의 교육 / 반년 만에 재개된 휴전협상 / 세뇌된 포로들의 원상회복 가능할까 / 한국과 미국, 휴전 회담에 의견 접근 / 공산군의 막판 대공세 / 이승만 대통령 휴전 서면협의 / 평화회담의 어두운 앞날 / 다시 일어서는 한국
1960s 혁명과 쿠테타
민주주의의 적으로 추락한 이승만 / “우아하게 민주주의 따질 겨를 없다” / 한국 민주주의 아직 멀었다 / 권력은 강하고 나라는 약하다 / 술렁이는 서울 - ‘격동의 바다’ / 남북대치의 최전선 - 판문점 /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산다” / 한국은 폐허를 딛고 일어섰다 / 백마부대의 베트남 참전 / 국회에 인분 뿌린 김두한 / 경제는 발전하지만 남북 긴장은 여전 / 남한도 문제다
1970s 개발 독재와 신군부 등장
한국은 자신도 미국도 못 믿는다 / 박대통령 승리는 경제정책의 후광 / 남북 첫 공식 회담 ‘이산가족과 통일’ / 세 번째 계엄령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탓? / 민주주의보다 안정을 택했다 /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나이 / 남산의 유령들 / 박 대통령 저격 미수와 육 여사의 죽음 / 신흥 종교가 판친다 / ‘패션과 언어’ 정화 운동 /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 박동선 / 거센 반대에 부닥친 카터의 철군 계획 / “미국 철수하면 전쟁 위험 커진다” / 한국인들이 몰려온다 / KAL기 소련 영내 불시착 사건 / 카터와 힘겨루기에서 한국 판정승 / 물가와 정치의 이중고에 시달린다 / 야당 탄압에 대학생들 거리로 / “국민이 저항할 것이다” / 박정희 사망 그 후 / 여전히 군부가 권력의 중심 / 별들의 전쟁 / “나라가 위태롭다”
1980s 민주화 운동과 올림픽
한국의 실권자 전두환 소장 / 피로 물든 광주 / 미국과 신군부의 신경전 / 불안한 앞날 / “이제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할 때다” / 사회의 ‘불순물’을 제거하라 / 군사법원, 김대중에 사형 선고 / 한반도의 두 철권 통치자 / 해외까지 미친 전두환의 힘 / 왜 서울은 춤추지 않는가 / 사채 시장의 여왕 장영자 / 비행기 공중도 납치 외교? / 아웅산 폭탄 테러 / 30년간의 냉전 / 신상옥․최은희 망명인가 납치인가 / 한반도에 닥칠 미래의 충격 / 서울 올림픽을 향하여 / 오래된 적수 새로운 친구 / ‘은둔’에서 개방으로 / 주식회사 한국이 몰려온다 / 남북 이산가족의 감동적인 재회 /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 남북 관계 아직 희망은 있다 /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섰다 / 정치․사회적 변혁 이끄는 신세대 / 막 오른 서울 아시안 게임 / 아시아의 떠오르는 국제도시 서울 / 자식들 인권침해에 분노하는 부모들 / 개혁은 물 건너갔나 / 육사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 한국의 정치 기적 / 노태우의 압도적 승리 / 꿈이 많은 나라 코리아 / 막 오른 서울 올림픽
1990s 문민정부 시대의 개막
골 깊은 지역감정 / 더 이상 기적은 없다 / 현대 자동차의 수출 행진 ‘주춤’ / 부동산 투기 열풍 / 고르바초프-노태우 첫 정상회담 / 남북한 화해의 머나먼 길 / 과격파 젊은이들 사이에 절망감 팽배 / 김영삼 대장정 고비는 지금부터 / 국민의 정부 출범
표지 기사로 읽는 한국 현대사
Korea 넌 누구니
뉴스위크 지음
중앙일보시사미디어 / 2007년 5월 / 1권 289쪽․2권 241쪽 / 10,000원
서문: 미국 - 미국인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몇 달 전 한 일간지에 회고록을 기고한 일본인 학자는 1977년 월간 《대화》 8월호에 실렸던 리영희 교수의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리영희 교수는 ‘일본인들이 망언을 되풀이하는 근원적인 책임과 잘못이 과연 일본인들에게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망언을 허용하는 근거가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탓도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일본인 학자는 리영희 교수의 글이 기존의 한․일 관계 논의를 180도로 바꾸는 새로운 인식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한․미 관계를 고민해왔다. 미국은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켰고, 한국 전쟁 당시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주었으며, 1950년대 이후에는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에 큰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미국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국인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질문이 아니었다. 단지 한국이 미국에 매우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기도 하고, 한국의 내부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며,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진정 한국은 미국에 그렇게 중요한 나라인가? 만약 중요하다면 왜 중요하고, 어떤 요소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중요하게 고려하도록 만드는가? 만약 중요하지 않다면 미국은 왜 그렇게 많은 비용을 한국을 위해 사용할까? 사실 이 질문들은 리영희 교수가 한․일 관계를 고민한 동일한 맥락에서 한․미관계를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우방이면서 동시에 제국이라는 역할까지 했다면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한․미 관계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부정적인 역할에 한국인들이 실망했다면 그러한 역할을 만들어낸 책임 속에는 한국인들의 몫도 존재하지 않을까.
1940s 해방 그리고 분단
RHEE'S REVIVAL 《1943년 12월 13일자》
귀국할 날 기다리는 이승만 박사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대표부의 전권대표다. 그는 관 속에 들어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가 전권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워싱턴으로 돌아온 유일한 외교관이다. 이 박사는 지난주 카이로 협정문서가 발표되자마자 성명을 발표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이 박사와 그의 정부[현재 중국 충칭(重慶)에 망명]가 조국 땅에 내리쬐던 일본이라는 빛보다 더 강렬한 빛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박사는 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할 날이 길러지기를 반세기 이상 기다려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신사다운 면모를 갖춘 이 박사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다. 그는 감정에 북받치는 목소리로 조용히 기쁨을 표시했다. 말하는 동안 간간이 손가락 끝을 입으로 후후 불었다.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일본 감옥에 투옥돼 몇 년간 옥살이를 할 때 거의 매일 대나무 회초리로 손가락 끝을 후려치는 고문을 받아 생긴 버릇이다. 이 박사는 1904년 석방될 당시 옥중에서 쓴 ‘독립 정신’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 박사는 1912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또 다시 투옥될 위기에 처하자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감리교대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의 출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박사는 일본이 일개 한국인을 붙들어 두는 처사는 한국을 그만큼 두려워한다는 표시이며 2500만 한국인에게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에 뜨끔한 일본은 미국 체류기간 중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6개월 이내에 귀국한다는 전제로 그의 출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후에도 미국에 남아있던 이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내각의 의견을 들으려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의 측근들은 그를 관 속에 숨겨 상하이로 들여보냈다. 일본 정부는 그의 목에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허사였다. 이 박사는 몇 년 전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의 뒤를 김구 주석이 이었다. 한국 안에 있는 한국인들 역시 김구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 아래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종교 탄압마저 받고 있다. 68세인 이 박사는 살아생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계 민주진영에서 승인 받고(아직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자유를 찾은 조국의 품에 돌아갈 날이 꼭 오리라고 믿었다.
- 김구는 이번 주 충칭에서 전후(戰後) 즉시가 아니라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회담 당사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KOREA UNDER TWO FLAGS 《1945년 10월 1일자》
미․소 ‘두개의 코리아’로 분할 통치
해럴드 아이잭스 뉴스위크 특파원은 미국과 소련이 ‘해방’해준 이후 한국에 닥친 정치․경제적 혼란상을 믿을 만하게 설명한 기사를 보내왔다.
존 R하지 중장은 미 육군 제24사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을 이행할 연합국 최고위층의 정책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설사 연합국의 정책이 있다 해도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가 아는 내용은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받은 특명뿐이었다.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현 정부 체제를 유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처음엔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이끄는 조선 총독부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미군을 하늘이 보낸 해방군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한 한국인에게는 충격이요, 실망이었다. 한국인들의 이런 반응은 미국의 점령 정책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식량, 토지, 정치: 그 다음 시급한 문제는 식량이다. 일본인들은 전쟁 동안 농촌에서 모든 곡물을 약탈했으며, 비축해 놓은 다량의 식량을 미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태우거나 버렸으며, 그 외 다른 방법으로도 먹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쌀과 육류․어류․채소는 구하기 힘들고 가격도 비싸다. 일본인들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화폐를 남발하고, 물가 통제조치를 중단함으로써 소비자 시장에 혼란을 야기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많은 사람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라고 알려졌다. 좀 더 광범위한 경제 문제는 부동산 소유권 문제다. 땅과 공장․상점을 포함해 전체 부동산의 약 80%가 일본인 소유로 추정된다. 하지 중장은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몰수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현재 미군은 혹시 있을지 모를 한국인들의 점거 시도를 우려해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보호 중이다. 미군의 점령 이후 50여 개의 정당과 위원회․단체가 생겼다. 가장 중심이 되는 두 단체는 민주당과 인민공화국건국준비위원회다.
두 개의 코리아는 안 된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군 통치 지역과 소련군 통치 지역으로 나뉨으로써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한국인들은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들은 이런 상황 역시 ‘일본의 책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자가 이해한 바로는 미 국무부와 육군 모두 분할 통치는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현재 이곳의 상황 전개로 미루어 한국 점령에 관한 사전 계획이나 관련 정책의 진지한 고려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곳에 파견된 미 국무부 대표라고는 한국 경험이 전무하고 정치적 책임도 없는 하위 외교관 한 명뿐이다. 어쨌든 원래는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소련․중국․영국이 형식적으로 대표를 파견할 계획이었다는 정보를 접했다. 분할 통치 발표는 포츠담 회담 이후에 나왔고, 미국 측 관계자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소련은 신속히 움직였다. 그들은 미군이 도착하기 13일 전인 8월 26일 관할 지역을 점거했다.
1950s 동족상잔의 비극
UNCLE SAM TAKES AS WORLD COP 《1950년 7월 10일자》
미국, 세계 경찰 역할을 맡다
미국이 자유를 수호하려고 이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적은 없었다. 대담한 국가정책을 승인하면서 미국인들이 이처럼 굳은 결집력을 과시한 적은 없었다. 아직도 용감한 기사의 개입을 갈망하는 세계에서 미국의 국가적 자존심이 이같이 고양된 적은 없었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의 남한 투입을 명령했다. 이로써 미국은 정복욕에 사로잡힌 공산군으로부터 극동의 이 공화국을 구해내는 돌이키지 못할 임무를 떠맡게 됐다. 발표 당시 트루먼은 미국의 대표로, 그리고 말 그대로 자유세계의 대표로 연설했다. 트루먼은 미군 최고사령관으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적 침략 행위에 맞서 유엔을 대표해 행동할 권한을 위임받은 세계 경찰 총수의 자격으로 연설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침략 현장에서 트루먼을 대신하는 부사령관이 됐다.
위험: 트루먼과 참모들은 미군 투입을 전쟁이 아니라 치안유지 작전이라고 불렀다. 신중한 표현이었다. 미국 측은 또 러시아가 지금이나 추후에 북한군 침략자들과 쉽게 관계를 단절하도록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참모들은 미국이 중대한 위협에 직면한 사실을 알았다. 러시아는 북한군을 물러가게 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직접 남침에 가담하진 않았다. 소련제(U.S.S.R.)표식의 항공기가 최전방에서 간혹 눈에 띄었지만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에 뛰어들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위성국 국민들에게 맡기려는 듯했다. 위성국 사람들은 전투 초기단계에 스스로도 놀랄 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러시아가 만주나 시베리아에 주둔 중인 자체 병력을 동원해 북한군을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 군사력은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 휘하의 군사력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세계가 북한의 남침에 정신이 팔린 사이 소련은 대만․인도차이나․베를린․유고슬라비아․이란 등 10여 곳 중에서 한 곳을 실제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험에는 신중한 계산이 요구된다. 미국과 유엔의 입장에서 한 번도 싸워 보지도 않고 ‘트루먼 라인’(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하려 트루먼이 동북아시아에 그은 선)이 뚫리도록 내버려 둔다면 세계에(특히 서구 민주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에) 앞으로 러시아권 밖에선 안보를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분할에 뒤이은 일련의 사태도 따지고 보면 서구의 그 같은 ‘직무 유기’의 결과였을지 모른다(적어도 트루먼과 그의 참모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트루먼 진영은 그러나 그 같은 일련의 사태 이후에 초래될지 모를 세계대전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도전에 맞선 미군
‘사후 약방문’이라는 한국의 오랜 속담은 4200년 동안 이 나라에서 그래 왔듯이 지난주에도 그대로 통했다. 한국전쟁 발발 첫 주 내내 서구는 환자를 구하려는 희망에 약방문을 하나씩 처방해 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처방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구하기엔 시간상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 남침한 지 불과 이틀 뒤인 6월 27일 오전 9시 30분(현지시간) 이미 러시아제 T-30중형 탱크와 T-70경형 탱크를 포함한 북한군 탱크 100대가 서울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서울은 시민들(현재114만 1766명)이 대혼란에 빠져 무법천지가 됐다. 북한군은 지프․담배 등 모든 동산(動産)을 ‘빌려’갔다.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을 접수하자마자 주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고 황급히 집과 가게 앞에 ‘해방군 환영’이라고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그러나 서울 중심가 도로 변에는 침략자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초가집과 기와집 안에서 지냈고, 가게 문은 나무판자로 굳게 걸어 잠갔다.
NEW UNITED NATIONS LINE-MACARTHUR'S 《1950년 10월 9일자》
유엔의 새로운 저지선 ‘맥아더 라인’
이번 주 38선을 넘은 유엔군의 목표다. 유엔군은 서울 함락 후 북한 수도 평양을 쟁취하겠다고 수륙양용 공격에 나섰다. 미 해병대가 38선에 접근하면서 이미 재개되기 시작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막으려는 목적이다. 맥아더 라인은 맥아더 장군이 혼자 정한 저지선이 아니었다. 그 선은 맥아더가 북한군의 항복을 요구하기 전에 맥아더에게 주어진 비밀 지시의 일환으로 미국 정부가 결정했다. 맥아더 라인은 북한에서 동서의 폭이 좁은 지역을 가로지르는 선이다. (토끼 모양을 한 한반도의 목 부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선). 유엔군은 잔여 북한군을 괴멸시킨 뒤에도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물론 한국전쟁의 모든 작전처럼 이 계획도 사전 통고 없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한국전을 해결할 정치적 방법이 모색되는 동안 유엔군이 그곳에서 대기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선이 중국․러시아와 유엔군 사이에 상당한 면적의 완충 지대를 남겨두려는 취지로 설정됐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38선을 넘는 모든 전략에는 인천상륙작전처럼 매우 큰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북한 땅에 진입할 무렵 이미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은 38선이 뚫리면 중국이 북한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중국의 이런 위협을 허풍으로 여긴다. 그러나 맥아더라인은 중국이 한국에 실제로 개입할 경우 기꺼이 맞서 세계평화에 초래될 위험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더군다나 유엔의 38선 통과 결정 이후 공산 진영에 초래된 혼란은 전적으로 우연만은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계획을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할 어떤 근거도 못 찾았다. 미국은 38선 통과가 군사적인 기습공격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연합국의 조언 묵살한 이승만 대통령
“敬天愛人”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 집무실 문에 걸린 훈시다. 이 대통령이 직접 붓으로 쓴 15cm 높이의 사자성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가르침대로 살려 애썼어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는다고 이 대통령은 느꼈으리라. 국민의 손으로 뽑은 국회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유엔이 승인한 1948년의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임무는 의회에 맡겨졌다. 그러나 의회는 이 대통령에게 다시 대통령직을 맡길 분위기가 아니다.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이 대통령의 헌법 개정안도 보류됐다. 국민투표라면 이 대통령이 재선될지도 모른다. 지난주 워싱턴에 도착한 외교 보고서는 우려를 자아냈다. 이 대통령이 아직도 국회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보인다고 묘사됐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리라고 예측했다. 일부 보고서는 이범석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하는 이 대통령 충복들이 무력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어떤 외교적인 충고에도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존 J 무초 미국 대사는 이 대통령에게 미국의 입장을 끈질기게 설명했다. 그는 헌법적 절차를 지키겠다는 보장을 받아내려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엔이 적극적으로 도우려 한다는 뜻을 이 대통령에게 확인해 줬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미국과 유엔이 경제와 금융 지원을 줄이기로 한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정간섭보다는 낫다.”
▶유엔 한국 통일부흥위원회(UNCURK)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UNCURK는 열흘간 냉각기를 두며 체포된 반대파 의원들을 석방하고, 부산 지역 계엄령을 해제하는 한편 의회를 휴회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대사도 이 제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앤서니 이든에 이어 영국 외무부 2인자인 셀윈 로이드는 한국의 정치 싸움 때문에 영국 내 여론이 나빠진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했다. 로이드는 체포된 의원들이 “2~3일 내에” 재판을 받으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 정치위기를 헌법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확약도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오히려 일부 반대파를 탄압했다. 국내로 반입되는 모든 외국 발행물 중에서 이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내용을 모두 까맣게 지우도록 검열 팀에 지시했다. 한국 정부는 관영 라디오를 통한 ‘미국의 목소리’ 방송을 중단했다. 그 방송이 “심하게 반정부적이고 명백하게 모욕적인 비판”을 방송했다는 이유였다. 이 대통령의 공식 대변인 클래런스 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의 방송국이 주권국가인 한국의 분열에 사용되지 않도록 단호히 대처하겠다.” 미국 대사관은 “크게 놀랐다”고 표현했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미국 대사관 앞의 경찰 경비력을 늘렸다. 경찰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훼방을 놓아 방문자 수가 줄어들도록 했다. 미국의 항의에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지만 즉각적인 조치는 없었다.
한국과 미국, 휴전 회담에 의견 접근
이번 주 한반도의 휴전으로 향한 길은 두 명의 초병이 경비를 선 평범한 출입구에서 시작됐다. 구불구불한 사유 차로를 따라 올라가다 파출소 한 곳과 몇 개의 초소를 더 지나면 서울 북한산의 완만한 비탈의 널따란 잔디밭과 숲으로 둘러싸인 낮은 벽돌 건물이 나타난다. 차도 끝에 자리 잡은 이 평범한 저택은 청록색 기와지붕과 가운데에 솟아오른 높은 굴뚝이 돋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였다. 월터 S 로버트슨 극동담당 국무차관보가 이 건물의 남쪽 입구를 들락거렸다. 그는 한국의 휴전 반대 불길을 잡으라고 지난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파견한 1인 소방대였다.
아이젠하워의 소방수: 대통령이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긴 로버트슨은 건장하고 호감을 주는 버지니아 주 출신의 “민주당 내 아이젠하워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투자 은행가로 일하던 로버트슨은 10년 전인 49세 때 호주 군사물자 대여 팀 책임자로 국제문제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충칭(重慶)주재 미국 공사를 맡아 베이징에서 1946년 대(對)중국 마셜 미션(협상을 통해 중공군과 국민당 군의 통합정부를 꾀했던 미국 조지 마셜 장군의 계획)의 중재자로 어려운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대통령 특사로서 즉석에서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를 지원하는 유엔군 사령관 마크 W 클라크 대장도 미 국방부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때보다 큰 자유재량권을 부여받은 야전지휘관이다. 주 초반 클라크 대장은 로버트슨이 도착하기 전 도쿄에서 서울로 날아가 이 대통령과 두 차례 회담했다.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6월 26일 이 대통령을 첫 대면하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 후 혼자 또는 클라크와 함께 매일 이 대통령과 의견을 교환했다. 로버트슨은 첫 회담이 “아주 우호적이었다”고 평했으며 곧 쌍방이 한․미 방위조약에 관한 합의에 접근했다고 보도됐다. 한․미 방위조약은 이 대통령이 내건 휴전 수용전제조건 중의 하나였다. 앞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이 매듭지어진 후 그런 조약을 협상하자고 제안했었다. 한편 클라크는 당장 판문점에서 회담을 열고 휴전협정을 매듭짓자고 공산군 측에 요구했다. 그는 풀려난 북한 포로들을 다시 잡아들이라는 북한 측의 요구를 이행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유엔 사령부는 “능력이 닿는 데까지 군사적 보장 조치를 마련해 남한 측이 휴전 조건을 준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분노: 앞서 이 대통령은 휴전 조건으로 세 가지를 계속 요구했다. 미국의 대한(對韓)안전보장, 중공군의 만주 철수, 휴전 후 정치회담의 90일 시한 설정 등이다. 그 기간 내에 아무런 조약이 나오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하자는 주장이다. 전쟁 발발 3주년인 6월25일, 이 대통령은 서울의 불타버린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 모인 대규모 휴전반대 집회에 나가 연설했다. 열변을 토한 다른 연사들과는 달리 이 대통령은 실로 품위가 있었다. 느리고 신중하게 말을 하며 가끔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당장 공산군과의 대결”을 요구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하면서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산군 측은 로버트슨의 임무가 이 대통령의 “응석을 받아주려는” 미국의 위험한 의지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라디오 베이징은 한․미 방위조약이 어떤 평화협정에도 위협이 되는 ‘시한폭탄’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로버트슨-이승만의 회담으로 휴전 협상 결렬위기가 “커진다”고 주장하고 풀려난 전쟁포로들을 다시 체포하라는 요구를 방송했다.
1960s 혁명과 쿠테타
FREEDOM, FRIENDS, AND FALLACIES 《1960년 5월 2일자》
민주주의의 적으로 추락한 이승만
자유국가의 국민은 지난주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며 한마디로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과연 이 나라가 겨우 7년 전에 5만 4000명의 미국인이 공산주의를 물리치려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그 작고 용감했던 나라란 말인가? 과연 이 나라의 대통령은 성미가 좀 급하지만 신념은 누구보다 굳었던, 그리고 온 생애를 바쳐 민족의 자유를 위해 무슨 일이든 맞서 싸웠던 그 이승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지난주 남한은 야만적인 탄압의 현장이었다. 이승만의 하수인들이 투표함을 마음대로 채워 넣고 국민투표를 조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인에게도 매우 친숙한 이름인 대전․대구․인천 등지의 학생 시위대를 탱크로 진압했다. 하지만 지금 그 도시에서는 무장도 하지 않은 일반시민 수백 명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했다. 그들에게 총구를 겨눈 경찰 중에는 예전에 미군의 전우였던 사람들도 있다.
실패?: 남한의 비극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춤추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들 탓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에 만연한 현상을 반영했다. 신생 독립국들은 전후에 거의 모두가 열정적으로 민주주의를 끌어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지난 3월 인도네시아 의회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예산안 통과를 거부했다. 그러자 수카르노는 간단히 의회를 해산해 버리고 대통령포고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벵골만 건너편의 민주주의 국가 실론(현 스리랑카)에서는 총리가 암살을 당했고 후임 총리도 지난주 취임 3주 만에 사임해버렸다.
폭력진압: 남아공은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이 일으킨 소요를 경찰봉과 장갑차로 진압했다. 서아프리카 가나의 흑인 총리는 새로 탄생한 공화국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무장병력을 보내 정적을 해치운 덕분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사회에서도 민주주의는 어려움을 겪는다. 터키 정부는 3개월 동안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일본 사회당은 미국과의 안보조약 체결을 저지하려고 의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민주주의 국가 이탈리아도 9주 동안 무정부 상태로 후계자 언급도 없이 그냥 물러나 버리는 총리 내정자 아민토레 판파니의 모습을 손놓고 바라봐야만 했다.
이 모든 사태는 경제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신생독립국은 민주주의를 쉽게 이루기 힘들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는 법적․사회적 전통이 부족한 영어권 나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민주주의는 가장 세련된 정부 형태이며, 만들기도 작동하기도 유지하기도 가장 힘든 정치체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분명 다른 형태의 정부가 출범할 것이다. 이집트와 태국은 독재정권의 인기가 높고 파키스탄은 독재자 아래서 자비로운 형태의 ‘기초민주주의’를 실험한다. 현재로 봐서 한국의 향후 정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달렸다. 하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그의 지배에 항거한 젊은이들에게 상당 부분 달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은 희망적인 신호였다.
한국 현지 상황
서울 외곽의 언덕 위에서 탐조등이 텅 빈 시내를 비췄다. 시커먼 한국군 탱크가 주요 교차로에 서 있고 총검을 빼든 군인들이 정부 건물을 지킨다. 10년 전 전쟁으로 부서진 수도 서울의 하늘이 그랬듯이 폐허 속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서울을 휘감았다. 지난주 유혈폭동으로 한국 학생 13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상하게도 서울은 조용했다. 엄격한 야간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모든 학교와 대학이 교문을 폐쇄했고 버스 한 대 돌아다니지 않았다. 서울은 긴장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를 뒤흔들어 놓은 이번 사태의 다음 국면을 기다렸다.
어떻게 해서 이번 위기가 혁명 직전까지 갔나? 뉴스위크 극동담당 특파원 라파엘 스타인버그 기자가 이번 소요의 생생한 목격담을 전해왔다. 이승만에 맞선 극렬한 저항은 3월 15일 대통령 선거 이후 수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었다. 선거부정과 협박을 목격한 한국인들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선거부정만 고발해대던 민주당의 선거운동이 과연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리고 야만적인 경찰의 진압이 뭔지도 알게 됐다. 선거 후에 학생들이 대규모 반대시위를 벌였던 마산에서 최소한 12명의 젊은이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STRONG MEN, WEAK COUNTRY 《1962년 10월 29일자》
권력은 강하고 나라는 약하다
오전 9시가 채 안 됐을 때 에어컨이 나오고 방탄창이 굳게 닫힌, 붉은 전조등의 검정 캐딜락이 수도 서울의 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머리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두려움과 존경심으로 훈장 다섯 개가 달린 황록색 군복의 무표정한 사나이를 마주하길 꺼린다. 국가 재건최고회의 두꺼운 판유리 문 앞에 리무진이 서자 호위병들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힘차게 경례를 올린다. 그렇게 남한 최고의 권력자 박정희 장군이 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961년 5월의 어느 날 밤 겨우 군인 3600명을 이끌고 남한을 접수한 임시군사정부의 수장인 박정희는, 60만 군대와 미국의 후원을 받아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넘어뜨린 뒤 지금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대통령 권한 대행을 선언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으며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커피․미국담배와 축첩 같은 ‘쓸모없는 사치’를 못하도록 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화폐를 환에서 원으로 바꿔 통화를 재평가하고 안정시켰다. 또한 실각한 장면 총리를 구속하는 등 이른바 ‘정치순화’운동에 맞선 모든 저항을 제거했다. 오늘날 그의 개혁은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치며 권총을 들이밀며 이뤄진다.
투표: 이렇게 유리한 고지에서 김종필이 국가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가 재건당’을 조직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내년 총선에 즈음해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던 수차례 거듭된 약속의 이행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앞으로 8개월 동안 한국 국민은 투표장에 두 번 나가게 된다. 사실 결과는 뻔하다. 12월에는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군대가 작성한 입법안에 국민투표를 한다. 그리고 내년 5월에는 새로운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하지만 한국은 선거나 법령으로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 4성 장군 박정희가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 선거에 나설 테고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된다.
굴레: 남한 인구 2500만 명중 200만 명 이상(가용 노동인구의 약 20%)이 실업자다. 명시적으로 제공된 미국의 투자원조금만도 22억 달러에 달하는데 경제는 비능률과 나태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한국은 숙련된 기술 인력이 부족하다. 김종필의 CIA(중앙정보부)는 광범위한 업무를 다룬다. 남한 사람들에게 돼지우리를 짓는 일부터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일까지 거의 모든 일을 가르친다. 이런 훈련 프로그램 덕분에 CIA는 ‘중앙대학교(Central University)’라는 별명이 붙었다. 또한 최고회의 구성원들에게 대학에서 행정학 과정을 밟으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렇듯 나름대로 성과는 있지만 여전히 모순이 가득하다. 군사 정부는 애초에 철저한 도덕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반(半)합법적 홍등가 8곳을 서울에 세웠다. 카바레와 술집이 통금시간까지 흥청대고 뒷골목에서는 일본 파친코 영업장들이 버젓이 운영된다. CIA는 주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에서 실내 운동경기장을 새로 짓고 고층빌딩 ‘자유센터’를 세우고 “아시아 청소년들에게 반공주의를 가르치려는” 학교의 건축까지 관리 감독한다.
외화: 가장 논란이 많은 CIA프로젝트는 서울 외곽에 짓는 450만 달러짜리 워커힐 리조트다.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월튼 H워커 중장의 이름을 딴 이 리조트가 오는 12월에 개장하면 룰렛, 블랙잭, 그리고 회전무대를 갖춘 나이트클럽이 구비된 극동의 라스베이거스가 될 예정이다. 레스토랑․바․테니스코트․볼링장․수영장 등은 주로 5만 명의 남한 주둔 미군이 이용한다. 2개의 호텔과 13개의 모텔은 싱글 룸에 2.80달러, 더블 룸에 3.50달러인데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을 기재할 의무는 없다. 워커힐은 무역수지 불균형을 줄여 볼 심사로 고안됐다. 한 해 170만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목표다. “우리는 미군들에게 정말 뭔가를 해주고 싶다”고 김종필은 생색내는 듯이 말했다. “미군은 워커힐에서 어머니께 꽃을 보내거나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할 수도 있다.”
외교: 지난주 김 대령은 도덕재무장회의에 참석하고 보다 나은 한․일간 무역 관계를 수립하려고 도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과 협의하겠지만 김종필 자신도 배상금 합의 가능성은 매우 낫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김종필은 워싱턴으로 간다. 미국 CIA가 개발한 최신 기술을 둘러보고 미국 당국자들을 만나면 분명 남한의 독재통치를 완화하라는 압력을 다시금 받게 된다. 그런 압력을 예상한 김종필은 지난주 미국에서 교육 받은 온건한 지식인이자 전임 총리인 장면 박사를 석방했다. 장면은 1960년 독재자 이승만을 하야시킨 학생시위 후에 총리로 선출됐다. 하지만 지난달에는 징역 10년 선고를 받았다. 반혁명단체에 780달러를 기부했다는 날조된 죄목 때문이었다.
‘A ROUGH SEA’ 《1965년 1월 4일자》
술렁이는 서울 - ‘격동의 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또 다른 아시아 나라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불과 십여 년 전 미국은 공산주의를 물리치려고 이 땅에 3만 3629명의 젊은 목숨을 바쳤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의 무관심이 큰 걱정이다. 원조가 많이 줄어들까 불안하다. 열흘 동안 남한을 방문한 제임스 맥트루이트 뉴스위크 도쿄 지국장은 현지의 사정을 이렇게 전해왔다. 김포공황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는 넓고 현대적이다. 그 옆 황폐하게 얼어붙은 대지 사이로 에메랄드빛의 한강이 흐른다. 소달구지를 빼면 도로는 한산하다. 수도 서울에 거의 다다랐을 때 길은 갑자기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초가지붕이 이어지는 지저분한 길가에, 한눈에도 몹시 추워 보이는 농부들이 작은 불씨 곁에서 옹기종기 몸을 웅크린다. 미국이 10년 동안 30억 달러를 원조했지만 남한은 여전히 가난하고 가난하며, 그저 가난할 뿐이다.
시골 아낙네들은 얼마 안 되는 귤 몇 덩어리를 지키느라 덜덜 떨며 밤을 지새운다. 버려진 네 살배기 아이가 넝마조각만 걸친 채 벽에 기대서 비참하게 목이 터져라 울어도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서울의 TV방송국이 눈부신 스튜디오를 마련한 남산 근처 비탈길에는 천막과 나무를 얼기설기 이어붙인 판잣집 수천 채가 서 있다. 추산에 따르면 60만 명이 이 더러운 헛간 같은 곳에 살며 서울 인구 350만 명 중 10%는 원조물자에 의지해 산다. 일자리라고 해봤자 한 달 월급이 고작 15달러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2700만 한국사람 대부분이 둥지를 튼 시골에 가면 그런 평균치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외국 방문객들에게 한국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인 반도호텔의 방 한 개 값이 5달러20센트밖에 안 된다. 장거리 택시요금도 12센트면 족하고 구두닦이를 한 달 내내 대놓고 써도 32센트면 뒤집어쓴다. 십여 곳이 성업 중인 서양식 나이트클럽도 가격은 아주 저렴하다. 쇼는 볼만하다. ‘집시데몬’이라는 이름의 헬렌 해리스는 클럽 맨해튼에서 밤마다 스트립쇼를 한다. 매력적인 접대부들은 별로 풍만하지는 않지만 손님을 따라서 집에 같이 갈 준비가 돼 있다.
고아들: 이러한 한․미관계에서 비롯된 한 가지 결과는 수많은 고아의 양산이다. 좀 긍정적인 현상을 찾자면 영어로 쓰인 ‘중매(Marriages Arranged)’ 간판의 범람이라 하겠다. 미군 당국이 여러 가지 제한조처로 차단하려 들지만 매달 미군 100여 명이 한국여성과 결혼한다. 달러를 잔뜩 가진 미국인과 결혼 내지는 잠자리라도 같이 하겠다고 달려드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은 이 나라의 가난을 표상하는 또 하나의 징표다. 그러나 이제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보통의 경우라면 동네 선술집에서 소주라는 아주 지독한 술 한 잔 사 먹을 생활수준은 됐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물가가 치솟으면서 한국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필사적인 응급책이 필요해졌다. 가장 흔한 풍경은 거리에서 껌을 파는 어린 소년들이다. 가족의 궁핍을 어떻게든 돕겠다는 심산이다. 물론 궁핍은 한국인에게 전혀 낯선 일상이 아니다. 지난 13세기부터 계속된 몽고족의 침입과 일본인들의 침략은 한반도의 실질경제를 고갈시켰다. 1896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은 남한 사람 22만 5000명의 목숨을 빼앗고 17만 5000명의 부상자를 만들었다. 생존자들은 그 상흔 위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했다.
경제 활기: 박정희 대통령은 또 한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한국의 국민 총생산은 매년 5% 이상씩 증가한다. 섬유․텅스텐․기계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수출은 5년 전 2000만 달러에서 껑충 뛰어 올해 1억 1000만 달러가 기대된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에서 두 눈으로 뚜렷이 확인된다. 여전히 가난하긴 하지만 예전보다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양호해졌고 옷차림도 좋아졌다.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하고 거리도 밝아졌다. “모든 일이 잘만 풀리면 6~7년 내에 경제자립도 가능하다”고 미국의 한 경제전문가는 평가했다. 이런 전망을 낙관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은, 한국인이 증오해 마지않는 옛날 지배자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양국 협상은 무역흑자와 보상금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단속적으로 열린 한․일 정부 회담은 지난 3년 동안 별 진전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부 해상에서 일본 어선은 한국 해안 100마일 밖에서 조업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장 때문이다. “한국은 고통을 겪었고 일본은 고통을 줬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고 박은 말했다.
1970s 개발 독재와 신군부 등장
CRISIS OF CONFIDENCE IN KOREA 《1970년 7월 27일자》
한국은 자신도 미국도 못 믿는다
북녘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이 막 둥지를 튼 대한민국에 침략했다. 그리고 ‘냉전’시대의 가장 잔혹했던 그 분쟁이 일어난 지 만 20년이 지났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미증유의 성장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막상 군사력만 제외하고 모든 분야에서 심상치 않은 신뢰감 위기를 느끼게 됐다.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지역 미군 감축 계획은 한국에 불확실성이라는 충격파를 던졌다. 얼마 전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버나드 크리셔가 한국으로 날아가 국민과 정치가들의 분위기를 전해 왔다. 이번 주 데이비드 패커드 국방차관과 한국의 정래혁 국방장관은 하와이에서 만났다. 분명히 한국전쟁 이래 두 우방 간에 민감한 회담이 될 전망이다. 쟁점은 남한에 주둔하는 6만 명 이상의 미군 병력 중 약 2만 명을 철수한다는 워싱턴의 계획이다.
지난주 이틀간의 초조한 논쟁을 마친 한국 국회는 “어떤 근거에서든” 미군 감축을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개적 논의를 꺼렸지만 (한 대변인은 일반 대중이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라고 말했다) 신범식 문화공보부 장관은 그런 과묵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여기 있는 당신네 군대는 베트남 주둔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더군다나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러면서 전쟁을 막아준다. 한국에서 미군 한 명이라도 철수하는 날에는 미군이 가진 전쟁 억지력의 상징을 스스로 해치는 꼴이 된다.” 그런 떠들썩한 두려움은 미군에게 훈련받은 강력한 군인 56만 명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1969년에 15.9%)을 자랑하는 나라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나는 서울 시내에 새롭게 솟아오른 마천루, 수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드넓은 고속도로, 사람들로 붐비는 디스코텍과 교통 혼잡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20년 전의 기억, 즉 스탈린주의적 정치지도자인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을 등에 업고 38선을 쳐들어온 일은 여전히 생생하다. “당신들은 1950년에 저질렀던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고 한국의 관리 한 명은 말했다. “미국이 군대를 감축하면 김일성은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믿고 또 다른 공격을 감행하려들지 모른다. 그러면 결국 이곳 남한에 현재 수준으로 미군을 주둔시키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
CHOOSING THE FAMILIAR 《1971년 5월 10일자》
박대통령 승리는 경제정책의 후광
선거유세란 박정희(53)한국 대통령에게 언제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전임 육군 소장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3선에 나서면서도 유세장에는 최소한도로 나갔다. 간혹 나서는 선거운동도 지역 대도시에 잠깐 비행기를 타고 가는 정도다. 참모들마저 “학교 선생님처럼” 청중을 가르치려 드는 대통령의 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박정희의 최고 정적인 김대중(45)씨는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한다. 작은 마을들로 차를 몰며 김 의원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제도화하려 한다고 강조하고 이제는 “변화할 때”라고 역설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선거운동 초기 상대적으로 무명이던 김대중 후보는 공격적이고 호감 가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난주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박 대통령이 약 100만 표에 달하는 표 차로 손쉽게 세 번째의 4년 임기를 거머쥐었다. 결과가 말해주듯 선거운동은 별로 활기가 없었을지언정 유권자에게는 박대통령의 메시지가 통했다.
경제번영: 하지만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의 자신은 정권이 일궈낸 제 성과라는 자부심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10년 동안 한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국민 총생산량은 매년 평균 12%씩 성장했다. 이러한 수치로 볼 때,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는 경제정책의 후광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새로운 5개년 경제계획을 계획대로 달성할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가장 산업화된 나라를 만든다는 목표다. 동시에 박대통령의 굳건한 반공주의는 많은 한국 국민의 마음과 통하는 듯하다. 한국 국민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급속히 이탈하는 문제로 걱정이 많다. 그러므로 14년간의 일인 통치가 겨우 싹트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손상시킬지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같은 선택을 했다고 보인다. 미국의 외교관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의 승리는 지속성을 의미한다. 변화무쌍한 아시아 상황에서 보면 이런 선택도 나쁘지는 않다.”
1980s 민주화 운동과 올림픽
KOREA'S MAN IN CHARGE 《1980년 1월 21일자》
한국의 실권자 전두환 소장
지난해 12월 영관급 장교들이 한국의 계엄사령관을 체포했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은 미국의 동맹국이 위험한 군사독재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두려움이 확산됐다. 그러나 카터 정부와 한국 국민의 압력을 받는 신군부 장군들은 권력을 잡을 뜻이 없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뉴스위크의 버나드 크리셔 기자가 보도한다.
한국의 새 실권자는 전면에 나서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육군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지난해 12월 12일 전차와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움켜쥐었다. 실제로 만나 보니 겸손한 전문가의 인상을 풍겼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장군들은 대체로 자기들끼리 별을 몇 개 더 얹어주는 잔치를 벌인다. 그러나 그의 양 어깨에는 여전히 별 두개만 달렸다. 전두환은 군인이 대한민국처럼 복잡한 공업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며, 자신은 오로지 부대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한국 사회 곳곳에 손을 뻗쳐 온 보안부대를 통해 인상적인 정치권력을 구사한다. 일부 한국 국민은 과연 전두환의 언행이 일치할지 의문을 품는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든가, 현재보다 더 독재자가 되든가 둘 중 하나”라고 한 시민은 말했다.
전격체포: 지난주 전 장군을 만나 한동안 함께 있었다. 그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필자가 자신이 만난 첫 언론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 줄 때 마음이 더 편한 듯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그가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의 전격체포 지시는 단지 업무 수행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 측 공식 설명에 따르면 정 총장이 지난해 10월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개입한 증거가 있어(적어도 현장 근처에 있었고 사건 뒤 수상하게 행동했다) 전두환은 수사를 지휘하는 합수부 책임자의 입장에서 마땅한 행동을 취해야 했다.
국가 안보를 고려해 임시 대통령이 선출된 지 6일 뒤인 12월 12일로 체포를 연기했다고 한다. “많은 소문과 오해가 있는 줄 안다”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단독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 얼굴을 보고 믿어 줬으면 좋겠다. 확실한 증거를 토대로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된 한 장군을 체포하려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군부는 내각이나 대통령이나 그 어떤 정책도 바꾸지 않았다. 만일 쿠데타였다면 다르지 않았겠는가.” 주 장관은 12․12사태를 군사 쿠데타로 정의하고 정 총장 체포에 전방 병력을 동원했다고 비난하는 카터 정부의 비판자들에게 대꾸하고 싶은 듯했다. 그 병력은 정 총장의 일부 부하가 반격하는 바람에 보강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뜻밖의 상황에서 서울 근교에 주둔한 일부 전방부대의 동원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사태가 되풀이되는 일은 없다고 분명히 장담한다.”
THIRTY YEARS OF FEUDING 《1983년 10월 24일자》
30년간의 냉전
한국정부 관리들은 아직 어떤 증거도 나오기 전에 랑군 참사를 북한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그것은 30년간 지속돼온 북한과의 냉전, 그리고 최근 북한의 테러 행위를 여러 번 겪은 경험에서 나온 반사작용이었다. 한국 관리들은 북한이 남한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여러 차례 음모를 꾸몄다고 지적했다. 지난 2년 동안만 해도 전두환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최소한 세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건들은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켰을 뿐이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었다. 서울의 김창순 북한 연구소 소장은 “만일 전 대통령이 버마에서 살해됐다면 남북한 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런 적대감의 중심에는 상대방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결국에는 어느 한쪽만이 살아남는다는 인식이다. 서울과 평양은 상대방의 외교활동을 극도로 의식하며 자국의 외교정책을 수행한다. 양측은 일종의 제로섬 투쟁을 벌인다. 한쪽의 성공은 자동적으로 다른 쪽의 실패로 간주된다.
한국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매우 큰 성과를 거둔 듯하다. 한국 정부와 미군의 일부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남한의 성공적인 국위 선양과 경제 번영에 갈수록 초조감과 시기심을 키워왔다. 궁지에 몰린 북한의 김일성은 과격한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해왔다. 지난해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평양을 방문한 뒤, 북한과 리비아는 군사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북한은 또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공급하고 국제 테러분자들을 훈련시키는 국가로 부상했다. 한 서울 주재 서방 외교관은 “북한인들은 외교사절들조차 대사관 운영 경비를 조달하려고 밀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북한의 호전적인 수사(修辭)와 비밀 군사 활동은 더욱 불길한 조짐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북한은 남한을 겨냥한 잦은 비방 활동의 수위를 전례 없이 높였다. 예를 들어 북한은 지난 9월 대구의 미국 문화원에서 폭발물이 터져 고등학생 1명이 사망한 사건을 찬양했다.
북한은 분명히 남쪽의 적(敵)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지녔다. 미국 관리들의 추정에 따르면 북한은 남쪽의 한국군과 미군에 비해 탱크 수는 2배 이상, 공군력은 2배, 해군력은 4배 많다. 북한은 지난 10년간 병력 규모를 2배로 늘려 75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소득의 25%를 군사비로 지출하며, 군사력 규모에선 공산권 국가들 중 4위를 차지한다. 북한은 군국주의적인 행태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비(非)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목적으로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메시지다. 서방 진영이 이런 교섭 제의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김일성이 전혀 예측하지 못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너무 자주 외채 상환을 피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소련마저도 북한에 차관 제공을 거부한다.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의 고위 인사들은 평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과연 김일성이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올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 있는 중앙일보의 김영희 편집국장은 “우리의 상식적인 기준으로 김일성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인식이 지속되는 한 한국(과 이웃국가들)은 북한 정권을 계속 불신하게 될 듯하다.
FUTURE SHOCK FOR THE KOREAS 《1984년 7월 9일자》
한반도에 닥칠 미래의 충격
1950년대부터 끝없이 반복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남과 북을 가르는 판문점 근처의 황량한 지대에서 눈을 부릅뜬 북한 병사들이 콘크리트 바닥을 힘차게 행진해 가로질렀다. 31년간 지속된 군사회담의 각국 대표들이 콘크리트 벽돌의 임시 막사로 들어가자 미국과 남한 호위병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회담장에서는 북측 대표가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핵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고 비난했다. 미국 대표는 북한의 간첩선이 최근 남한 근처 해안에서 침몰한 사진을 내보였다. 두 시간 반의 격렬한 논쟁 끝에 제425회 군사정전위원회(MAC)는 3주 전 폐회됐고 화해의 미래는 요원하기만 하다. 한국전쟁 후 30여 년간의 판문점 회담이 정지된 화면처럼 보였던 사실은 운명 같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한반도를 제외한 곳은 경제적․정치적․군사적인 급변의 시기였다.
한반도에 결전을 앞둔 긴장감이 감돈다. 기관총 진지로 뒤덮인 38선의 언덕길처럼 끊임없이 높은 긴장 상태와 극악한 적의가 가득 찬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남한의 62만 명의 군대는 4만 명 미군의 지원을 받는다. 남한의 미군은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 중 둘째로 큰 규모며, 흔히 전술적인 핵무기의 엄청난 비축창고라고 일컬어진다(정책상 미국 국방부는 핵무기의 배치 여부를 확인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중국과 소련의 공급 지원으로 북한은 지난 10년간 자국 군대를 두 배에 가까운 규모인 75만 명으로 늘렸다.
작은 충돌: 그 군사력을 활용하려는 도발 역시 풍부하다. 83년의 두 달 사이에 소련의 전투기가 대한항공의 제트 여객기를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시켰고, 랑군(현 양곤)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폭탄 테러로 한국 각료 4명과 방문 중이던 13명의 고위 인사를 암살했다. 두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미국과 남한, 북한의 군사들은 즉시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최근의 평화적 제의에도 불구하고 국경 지역의 소규모 충돌은 여전히 잦았다. 그리고 남한의 관리들은 서울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86년 아시안 게임이나 88년 올림픽을 이용해 평양이 새로운 테러를 획책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반도의 미세한 지정학적 균형 상태를 고려할 때 서울과 평양의 극히 사소한 외교적 변화가 주변국에 반향을 몰고 오기 쉽다. 전 대통령은 남한의 경제성장을 등에 업고 새로운 외교정책을 시도하려고 한다. 더욱 폭넓게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일제 강점기 기억이 없고 한국 전쟁도 희미하게 기억하는 신세대들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다.
북한의 향후 외교적 태도 변화는 더욱 예측하기 힘들다. 만약 김정일이 정권을 잡으면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따라서 대대적인 정책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다. 한편 아직 힘이 넘치는 ‘위대한 지도자’는 계속해서 특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외교정책을 구사한다. 84년 초부터 김일성은 오랜 후원자인 중국과의 유대를 지속하면서 동시에 소련과 우호관계를 다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한국이나 미국과 새로운 평화회담을 하겠다며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평양은 서방의 “우호적인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제적인 관계를 고려하겠다고 수줍게 발표했다. 여기서 김일성의 동기는 확연했다. 수 년 동안 국내 총생산(GNP)의 25%를 국방비에 할애하다 보니 자금 유입이 절실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는 상호불신의 늪에서 당분간 헤어나지 못할 전망이다. 84년 1월 북한은 통일을 가로막는 현재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미국과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추측하건대 그 협상은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철수 조항을 담았을지 모른다.
1990s 문민정부 시대의 개막
NO MORE MIRACLES 《1990년 5월 14일자》
더 이상 기적은 없다
서울이 1988년 여름 올림픽을 치를 때까지 한국은 아시아 제2의 경제기적을 반드시 이룰 나라 같았다. 한국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을 나라라고 거의 모두 한목소리로 말했다. 근면하고 값싼 노동력으로, 다른 나라에선 거의 들어보지 못한 수출 시장의 끊임없는 수요에 부응했다. 그에 따르는 혜택은 어마어마했다. 1986년에서 88년까지 3년 동안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연간 12%씩 성장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무역수지가 곧 흑자로 돌아섰고 외채가 급속히 줄었으며, 주가는 연간 78%씩 급등했다. 무엇보다 한국산 제품은 품질과 기술혁신 측면에서 격찬을 받았다. 가격이 6000달러로 책정된 현대자동차의 날쌘 소형차는 미국에서 판매된 외국산 모델의 첫 해 매출 기록을 깼다. 대우통신이 생산하는 리딩 에지라는 첨단 개인용 컴퓨터는 IBM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했다. 당연히 한국은 일본과 비교됐다. 동아시아의 이 두 나라는 모두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으며, 국민들이 유교사상과 근면․희생 정신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한국인들이 내심과 달리 겉으로 했던 말이 옳았던 듯하다. 여름올림픽 개최로 행복감에 젖은 국제무대 등장 축하연을 연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한국의 정책 입안가와 기업인 사이의 분위기는 올림픽 직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대부분의 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인상적인 발전상이지만 한국의 성장률은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거의 반 토막 났다. 서방의 분석가들은 한국의 무역 흑자가 일본처럼 영구히 지속되리라고 예측했지만 치솟던 흑자 폭은 올해 적자로 되돌아설 형편이다. 외채도 조금씩 다시 늘어나는 추세이고 물가상승률도 오르는 중이며 주식시장은 급락했다. 게다가 한국의 막강한 노조가 최근 몇 주 사이에 상당히 저항적으로 변하면서 임금 협상 시기에 암운을 드리웠다. 임금 협상은 한국의 향후 경쟁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처럼 활짝 피던 경제가 어떻게 갑자기 시들게 됐을까? 쉽게 답해질 질문이 아니다.
DJ'S RARE CHANCE 《1997년 12월 31일자》
국민의 정부 출범
JEFFREY BARTHOLET 도쿄지국장
지난주 설마 하던 사람들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야당 후보 김대중(金大中․73)씨가 20여 년에 걸친 각고 끝에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대권 도전에서 세 번이나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야당 후보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즉시 국민의 자유 신장을 천명하면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병행’을 강조했다. 김 당선자의 취임 후 첫 번째 과제는 자신의 대선 공약을 백지로 돌리는 일이다. 현재 1만 달러를 조금 밑도는 1인당 국민소득을 2000년대 초까지 3만 달러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 세금 삭감, 인플레 진정, 금리 대폭 인하에 250만 개의 일자리까지 창출해 낸다는 공약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민중론자로 그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보수진영의 양분 때문이었다. 일부 경제 전문가가 우려하는 까닭도 바로 그 점이다.
2주 전의 그의 IMF ‘재협상’ 발언이 시장에 새로운 혼란을 몰고 오면서 증시가 곤두박질치자 그는 자신의 발언을 즉각 부인했다. 지난주 기자회견에서는 “다시 한 번 밝히지만 IMF와 현 정부가 합의한 사항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몇 개월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과감한 조치들을 이미 단행했다. 외국인이라도 한국 기업의 지분을 50%까지 사들일 수 있게 됐다. 전에는 7%에 불과했다. 게다가 금리 상한선을 25%에서 40%로 끌어올리고 원화 환율 변동 폭 제한을 철폐했으며 채권 시장도 개방했다. 그러나 금융시장 개방, 정부 기구 축소, 내실 있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환경 조성 등 더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인기도가 바닥을 맴도는 가운데 임기 만료를 두 달 앞둔 김영삼(金永三)대통령은 국민 화합을 추구하는 김 당선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지난해 부패와 군사반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다. 이번 대선 후보 가운데 선거부정을 문제 삼은 사람이 없다는 점도 한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돈 봉투가 난무하는 일도 눈에 띄지 않았으며 일당(日當)을 주고 일부 청중을 동원하던 대규모 옥외 집회는 법으로 금지됐다. 한국은 이제 바른 길로 접어들었다. 길고도 험한 길을 인도해야 할 책임은 김 당선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