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치유의 결, 그 정점 속 정형 미학
-강인순 시조집 『사진 한 장』 읽기-
김경미(시인)
1. 들어가기
평론가라면 대부분 방금 발간된 따끈따끈하고 인기 있는 작품들에 매달린다. 그것이 독자의 관심 끌기에도, 본인 홍보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중성도 없고 낡은 산물로 취급될 수도 있는 시조집(그것도 발간된 지 5년이나 지난)을 굳이 들추는 것은, 시조는 어렵다는 틀부터 깨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독자들의 외면을 등에 지고 몸부림치는 시조 장르의 가여움 때문이다.
3장 6구 45자 내외의 정형을 가진 시조, 참 어렵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시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비평가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심지어 독자들은 물론, 국문학계에서조차 저평가되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형이라는 형태적 제한 속에서도 리듬감과 운율을 살릴 수 있는 장르는 시조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시조는 앞으로도 여전히 유효한 문화유산의 자격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래서 더더욱 현대문학의 주인은 시라는 애매한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강인순 시인의 제5시조집 『사진 한 장』(고요아침, 2017)은 우선, 좋은 바탕으로 뽑아낸 작품들이 많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시조가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독자들에게도 편안하게 다가가 사유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시인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가려내고, 보태어 다시 묶는 시편들”로 앞서 발표한 네 권의 시집에서 가린 작품과, 시력 40년의 깊이 있는 시를 탐독할 수 있다.
강인순 시인은 시대의식을 뛰어넘은 개인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며 서정의 회복을 강조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의 의식에는 역사의 중요성, 소시민적인 삶과 행복, 한 방울의 물조차 헐렁하게 앉아 있지 않다. 거기다 시인만이 가진 삶의 철학이 농축돼 있다. 그렇다고 요란한 형용사나 감탄사를 붙여가면서 꾸미기에 공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배운 역사를 토대로 문제를 인식하고, 실수를 인정하면서 본인의 삶을 이끈다. 이를 통해 창발의 조용한 파동과 의미를 재정렬하고 있다.
2. 설움이라 쓰고, 치유라 읽다
강인순 시조는 하늘이 처음 열리던 그 장엄한 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등단작 「서동 이후薯童以後」만 보더라도, 까마득한 설화를 끄집어낸 뒤 근원적인 사랑의 눈을 틔운 역사적 이야기로 끌고 온다.
「서동요」는 백제지역의 설화와 신라지역의 노래가 합쳐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삼국유사』 속의 향가는 신라의 노래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향가의 모습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통해서인데,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작할 때 먼저 존재하던 문헌을 대체로 수용하였다. 이는 곧 「서동요」가 다른 지역이 아닌 신라의 노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신화적인 속성을 띠고 있던 신비로운 이야기는 절멸된 시간을 넘어 현실적인 서정을 담은 시조로 탄생 되었다. “슬픈 역사들을 반추하는 해빙의 들판/ 들꽃 씨 눈 틔우며”(「서동 이후薯童以後」) 시작된 사랑은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꿔 버린다. 역사는 역사고 사랑은 사랑이다. 관념에 갇혀버릴 수도 있는 역사를 끌고 와 오늘이라는 현장에 사랑 노래로 생생하게 풀어냈다.
사진 속 아저씨는 한복을 입으셨다.
굳게 입을 다물고 뒤에는 일장기 둔 채
긴 칼 찬 일본인 관리
함께 찍은 소화昭和 18년
마을이 온통 간 후 돌아온 이 하나 없다
오뉴월 긴 이랑을 눈물로 맨 우리 숙모
씨받이 아들 하나가
또 아들을 낳았다
낡은 사진 속에는 이젠 지울 눈물이 없다
돌아보면 서러웠던 시간의 생채기들
우리들 무딘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다
-「사진 한 장」 전문
한 컷 사진으로 보여주는 역사는 얼마나 비극적인가. 또 얼마나 반어적이고 중의적인가. 역사도 묻히고 삶도 묻힌다. 그 필연적인 서사 앞에서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낡은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불안했던 역사의 비극적 성정을 절대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얻은 소중한 물품이 ‘사진 한 장’이다.
첫째 수에서는 듣기만 했던 이야기를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일장기 둔 채”, “한복을 입은 아저씨”는 혼자지만 둘째 수 “마을이 온통 간 후 돌아온 이 하나 없”는 전체로 복기한다. 개인의 슬픔이 마을의 슬픔으로, 마을의 슬픔이, 나라의 슬픔으로, 나라의 슬픔이 후손의 슬픔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슬픈 역사가 된다. 청각(듣기만 했던)에서 연결된 이미지는 시각적(낡은 사진)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시에 다 담지 않은 숱한 이야기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대의 눈물 말린 긴 사설 들려오고”(「저녁 삽화」), “잊었던 기억의 증언 거룩한 증언”(「사금파리를 위하여」)이 된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사람들의 존재를 바라보는 통증은 폭력이나 재난이 없는 평화와 평안의 위장으로 기술된다. 슬픔은 있지만, 강박적 멜랑콜리가 없다는 게 독자들을 안심하게 한다. 본인이 기억하는 아픈 경험 가운데 가장 선명한 역사의 지문이 상상의 원형을 재현하고 있다. 낡은 사진처럼 역사에도 얼룩이 남았지만 극복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해맑은 해법의 역설을 보인다. 눌렸던 기억을 “펴는 어진 백성의 숨결”이 “꽃무늬로 부활하는”(「사금파리를 위하여」) 서사로 풀고 있다.
눅눅한 시간을 끌고 온 과거가 깎이고 닦여 길고 습했던 시간은 거룩한 필사가 된다. 본 것처럼 들은 것처럼 얼크러졌던 역사를, 그 아픈 기억의 파편들을 경건하게 압축하여 회복시킨다. 처참한데 아름답다. 생각 없는 표현은 없다. 사유 없는 소신도 없다. 너무나 고요한 침잠이 분연히 일어선다. 긴 역사를 짧은 세 수의 시조로 표현했지만, 역사의 상흔마다 입 맞추지 않은 부분이 없다.
까마득한 전설부터 현재까지, 상흔으로 남을 역사도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앉는 순간, 창의성과 상상력의 본질 그 중심에 올라선 시선이 된다. 새로운 가치로 담긴다. 그래서 어두운데 밝다. “이 나라 습한 산자락 초병처럼 지켜”(「원추리꽃이란」)선 인간의 감성과 철학에 따뜻한 서정을 입혀, 비극적이었던 순간을 회복하고 치유한다.
애국의 결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날을 이어가면서 그 정서 그대로, 그 감정 그대로 깊은 상념의 바다를 건넜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회상을 통한 유년의 기억을 되새기는 회귀적 정서에는 의미화, 감각화, 지각화 된 체험적 의식이 담겨 있다. 시인의 갈증 속 해갈과 기원이 들어있다.
3. 일상이라 쓰고, 선이라 읽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한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를 때를 일컬어 우리는 그것을 진선진미라 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선과 도덕성의 발현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집합체는 가정이다. 그래서 가장이라면 누구나 가정을 잘 꾸리겠다는 다짐과 그에 반하는 책임감을 안고 산다. 강인순 시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날이 저무는 걸 ‘길이 저물면’으로 제목을 단 아래 시에 한 뼘 더 눈길이 간다.
저물어 날 저물어 모든 길 집으로 가네
익숙한 불빛 찾아 지친 하루를 끌고
돌아가 넥타이 풀고 양말을 벗어 놓네
종일 지친 긴 그림자 문밖에 서성이고도
사는 일 하루쯤은 젖혀두고 싶지만
돌아서 다시 강 건너 그 길을 나서야지
-「길이 저물면」 전문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본분과 삶의 목적을 잃지 않는 평범한 가장의 귀가를 그리고 있다. 고요해서, 평안해서, 순응해서 오히려 눈물겹게 와 닿는다. 평범함이 성찰과 사유의 순간으로 바뀌는 역설이다.
때론 넥타이가 조여들거나 비틀리겠지만 “뉘 집 방금 싼 김밥 햇살 속 길을 나서”(「소풍」)는 아이를 생각하며, 또는 그 아이의 마음으로 출근길을 나섰을 것이다. 외면에 나타난 의미는 일반적인 가장의 일상적 이야기다. 그러나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무의식에 저장된 슈퍼맨 콤플렉스로도 볼 수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다가도 아직 멀었다는 자괴감이 시도 때도 없이 강박한다. 밑바닥에 침입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이 늦은 귀가를 빨갛게 비추고 있다. 마지막 한 줄 “돌아서 다시 강 건너 그 길을 나서야지”에 모든 희망적 의미가 압축되어 있다.
삶의 땀과 눈물이 시조의 씨앗이 된 듯한 시인의 삶을 바라보고 있으면 조급함이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의 일생이 역사인 듯, 이야기인 듯 속속 쌓인다. 속사정 일일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한 편의 시조로 태연하게 표현되었다. 저물 듯 아니 저문 삶 속에서 허기보다 희망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주운 생각이 다분히 따뜻하기 때문이다. 은유가 탱탱하다.
어머니를 부르고 싶은
청명淸明의 아침 햇살
곱게 감꽃 지는
뜨락에 모아 놓고
수줍어
낮게 부르다
붉어지는 눈시울
-「초록 시편草綠詩篇」 전문
굳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알 것이다. 생의 길이 이어지는 동안은, 그것도 인생 황혼기에 접어둔 장년이라면, 오래전 어머니를 여윈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나를 벗게 된다.
찰나적 직관에 의한 난감한 슬픔일까? 아니면 초월한 그리움일까?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붉어지는 눈시울” 속에서도 마음의 결핍을 보이지 않는다. 독백처럼 읊조린 들끓음을 정형의 틀에 짧게 얹었지만, 세월이 가더라도 공감되는 고통과 승화는 오직 어머니한테서만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법에 서툰 편지를 쓴 것도 그때쯤/ 결국은 부치지 못해 가시만 여태 돋고”(「찔레」) “몇 번 씩 달아보아도 가늠할 수 없는 무엇”(「저울」) 때문에 “붉어지는 눈시울”이 “마침내 어쩌지 못해 지르고 만 비명”(「저무는 가을날」)으로 터지고 만다. “빙그레 웃으시면서 괜찮아 다됐어.”(「그랬었지」)라는 어머니의 한 마디가 “그리움 한 폭 수채화로 마주하는 전설의 터”(「메밀밭을 지나며」)처럼 깨끗하게 각인된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원초적인 사랑과 희생이 해체와 재조립되는 동안, 그 뿌리는 내내 뻗어갈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인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결국,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머니의 젖줄처럼 한 길로 이어지는 것이다.
4. 물이라 쓰고, 명상이라 읽다
물은 물인데 물을 생수로 명명하면 어떤 의미가 될까? 일단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 결합물인 물에서 ‘샘물, 정화수’로 위상이 조금 높아지면서 격도 달라진다. 물과 생수! 같은 의미로 보기도 섬세하게 나누기도 어색하지만, 물의 원형적 의미를 따지기 전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성찰의 거울로 삼는 순간 물은 물이 아닌, 길이 된다. 물을 거울로 삼기 시작하면서 시인의 삶과 시작詩作에 끼친 영향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이다. 셋째,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산이 가로 막으면 돌아간다. 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간다. 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인다.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는 문구 정도는 시인도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시인은 흐르는 물 한 자락에 손을 담그듯 톡톡 튀는 통찰로 명상을 건져낸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가장 부드러운 생성의 순간을 맛보게 한다. 물은 멈추지 않는 생명이다. 물이 단단한 생명을 만드는 최고의 매개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시인은 부드러운 근육만으로 입힌 듯한 시어로 장착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경외와 감성 사이에서 물에 대한 진정성과 순수성의 확실한 정체를 찾는다.
“지난 여름 내가 만난 설악을 흐르던 물”로 시작된 물에 대한 단상은 “오만한 목젖에 걸린 크나큰 가시”(「생수에 관한 명상1」)로 귀결된다. 깨끗한 물을 넘겨야 하는 오만한 목젖은 그 물조차도 크나큰 가시, 혹은 채찍이 된다.
새재를 오르다가 계곡물에 손 담근다
손 씻다 물위에 쓴 글씨 ‘너무 맑다’
피라미 한 마리 나와 그걸 물고 사라진다
한 철을 이 골에서 보냈으면 하다가도
금방 집 생각나는 변변치 못한 속물
저렇게 물이 되어서 그대 손끝 적시고 싶은
-「생수에 관한 명상 9」 전문
물의 깨끗한 맥이 그대로 드러나는 맑고 투명한 작품이다. 물의 본질인 정화작용을 잘 이해하고 표현하였다. “계곡물에 손 담”그는 순간, 물과 시인은 하나가 된다. 물이 시인인지, 시인이 물인지 완벽한 물아일체다. “물위에 쓴 글씨”, “그걸 물고 사라”지는 피라미는 “유혹이란 말뜻을”(「생수에 관한 명상 11-금강 옥류金剛玉旒」) 명상처럼 가르친다. 놀랍도록 세심하고 섬세한 통찰력으로 물의 표정을 읽어 낸다. 절제된 형태 속에서 시의 정갈한 맑음을 만들고 그 맑음이 몸속을 다스려 봄의 물, 깊은 물, 아픔을 고치는 약수가 되는 순간이다. 그게 바로 치유의 핵이 된다.
누구나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 남다른 눈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볼 줄 아는 혜안이다. 이는 곧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관심이 가는 곳에 에너지가 가고 에너지가 가는 곳에 창의력이 샘 솟는다. 남다른 눈과 남다른 관심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겠지만, 남다른 상상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와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수에 관한 명상」 연작시는 평범한 것에 눈길을 주며 건져 올려 낸 산물이다. 물을 대할 때, 관념을 탈피하려는 시선이 예리하고 신선하지 않으면, 이토록 명확하고 편안한 명상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인순 시조를 대표하는, 곧은 속대 속 부드러움의 결정체는 연작시인 「생수에 관한 명상」에서 찾을 수 있다.
5. 인생이라 쓰고, 꿈이라 읽다
인생이란 판에서 한낱 꿈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시인은, 장자를 통해 배우고 있다. “일찍이 온 세상은 수심 모를 바다였었나/ 헛된 꿈 헤엄치던 우린 작은 물고기”(「목어木魚」)이면서도 어느 순간 수만 수십만 번의 성찰을 위한 날갯짓으로 비에도 젖지 않는 나비를 염원한다. 그래서 무념무상한 삶의 대표적인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나비의 꿈’은 어김없이 이 시조집에도 등장한다.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펄 나는 범나비였다. 스스로 기분이 좋아서 그것이 장주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장주였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장주가 나비 되는 꿈을 꾼 것일까? 나비가 장주 된 꿈을 꾼 것일까? 이것은 <장자莊子>의 제물편齊物篇에 나오는 멋진 글의 한 토막이다. 장자는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깬 것인가를 망설이고 있다.
어둠이 길을 덮고 마음마저 덥힐 때쯤
뭇시선 아랑곳 않고 바쁘게 집을 짓는
해와 달 비치지 않는 지하통로 한 구석
나비집 짓는 그는 도시의 낯선 莊子
지친 삶의 그늘을 저 바닥에 잠시 뉘고
어쩌면 우화羽化의 큰 꿈 차곡차곡 쌓을거나
-「우화羽化를 꿈꾸다」 전문
나비는 인생 덧없음의 상징이다. 보잘것없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날개를 펴면서 경계를 넘어서려는 밝은 꿈이다. 삶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기를 갈구한다. 접힌 애벌레이기도 하지만, 날아갈 나비이기도 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 앉으려다 날아가며/ 그게 이승인지 피안彼岸의 문턱인지”(「꽃살문 소묘」)로 표현된 것만 봐도 잠시 들렀다 가는 세상에 묶였지만 무심한 자유로움이 있다. 그렇지만 나와 너, 혹은 꿈과 삶! 이 모든 것은 한낱 우화로 마감된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혹은 그것조차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선문답을 한다. 꼬물꼬물한 번데기에서 아름다운 날개를 단 나비가 되기까지 꿈만 꾸다 만 우화는 아닐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듯한 이 시는 풍자보다 교훈으로 받아들여진다.
흘림체 현판마저 독경으로 젖는 시간
한 바랑 여린 햇볕 보시인양 따사롭다
버리고 또 다시 얻는 마음 환한 가을날
-「수정사水淨寺의 가을」 둘째 수
시인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줄 안다. 살아오는 동안 “가끔은 흔들리다”(「저울」)가 “긴 그림자 서성이는”(「조탑리에서-권정생」) “눈밭에 맨발로 선”(「겨울, 소광리」) 채로 “다 닳아 오만한 세상 굽은 길에 버”(「겨울, 소광리」)린다. 이제 시인에게 남은 깨달음은 “버리고 또 다시 얻는 마음 환한 가을날”로 결정된다. 그 사이 비 오고 바람 불고, 꽃 피고 꽃 지는 현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대답을 얻으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진리를 깨달으며 안착하는, 철학적 진술로 마무리된다.
6. 나가기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우성치는 글들이 주의력을 흩뜨린다. 주의력도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점을 어려운 글을 읽으며 소진해 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시조는 외면 첫 번째 순위가 된다.
그래서 『사진 한 장』만큼은 표현 형식에 의한 감상평가형으로 접근하면서, 평론이나 비평의 일차적 특징인 작품에 대한 비판을 일절 하지 않았다. 표현론적 관점은 시를 시인의 감정이나 내면을 표출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즉, 안에서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표현’이 된다. 이때의 안은 시인 자신의 내면, 감정, 개성이다. 표현론에서 작품의 평가 기준은 그 ‘안’의 표현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 그 독창성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강인순 시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첫째, 그의 시조는 거창하지 않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시, 골치 아픈 시, 요란한 시가 없다. 달리 말하면 정직함을 기본으로 한, 쉬우면서도 순화된 낱말로 표현했다.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소란한 마음 안팎이 정리된다. 시조조차 시로 아는 시대에 시조를 쓴다는 것은, 그것도 쉽게 쓴다는 것은 여간한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둘째, 그의 시조는 정형적인 형태를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원룸 속 젊은 시인들의 거침없는 표현이 판을 치는 시대에, 그는 짧고 함축적이지만 한 뼘 느린 숨결로 그의 시를 장착했다. 시조의 핵심적 역할인 우리말과 우리 정신을 불어 넣었다. 그래서 시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상상력의 장으로 내면적인 폭을 넓혔다. 즉, 낱말을 배치하는 기술과 여백이 강인순 시조의 결정판이 되었다. 공감적 선과 결, 모난 곳을 다듬어 부드럽게 했다.
함축과 직관력을 갖춘 시조는 지루한 사족이 필요치 않다. 어제의 삶을 지우고, 어제의 시를 지운다. 흔들림을 멈추게 한다. 마음의 속도를 늦춘다. 평범한 것이 오히려 비범한 것인 듯 간략할수록 풍부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 맥을 지키는 축을 만들고 여백을 남긴다.
셋째, 그의 시조는 인간의 감성에 기초한 인문학적 특성에 따뜻한 서정을 입혔다. 문학적 삶의 영역도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된다. 사유 혹은 흉터가 소소한 삶의 의식이고 시의 근원이다. 시를 통해 명예나 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시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전부가 보인다. 혹은 하나를 버리면 백 개를 얻는다는 말도 있다. 강인순은 시를 쓰면서 아상을 버리려 무던히도 노력한 흔적을 보인다. 시인은 시 속에서 그가 경험한 것들을 친근하게 표현하면서 혼란한 영혼을 정립한다. 애초에 깨달음을 구하지 않았지만 절로 깨달음을 얻었고, 그의 작품을 접한 독자들까지 깨달음 속으로 안내했다. 그의 작품을 음미하고 되뇌다 보면 맑은 숲에 들어갔다가 나온 느낌이다. 시인은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필자가 배웠을 뿐이다.
니체는 말했다. 아예 모르는 것이 반쯤 아는 것보다 낫다고. 편협한 시각과 좁쌀만 한 지식으로 강인순 시조를 톺아보면서, 아끼는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트린 것 같은 자괴감도 든다. 그러나 엇박자도 박자라고 어긋난 박자에 맞춰 춤을 출 줄 아는 독자들도 반드시 있으리라 믿는다. 보태어, 강인순 시인의 작품들이 “언젠가 가슴을 태울”(「꽃씨」) 설렘과 감동을 담은 시조 장르의 지침서가 되리라 기대한다.
<참고문헌>
강인순,『서동 이후』, 영남사, 1991.
___,『초록 시편』, 책만드는 집, 2001.
___,『생수에 관한 명상』, 고요아침, 2008.
___,『그랬었지』, 책만드는집, 2015.
___,『사진 한 장』, 고요아침, 2017.
강혜선,『한국고전시가작품론』, 집문당, 1992.
김대현,『술몽쇄언』, 을유문화사, 2004.
박현수,『시론』, 예옥, 2012.
신영복,『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___,『처음처럼』, 돌베개, 2017.
황현산,『잘 표현된 불행』, 난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