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8월 11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활명수 광고.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금메달, 동메달 수상을 축하하는 광고다. |
활명수를 만드는 동화약품은 4가지 부문에서 한국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먼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업체이자 제약회사라는 기록이다.
국내에서 창업 1세기를 넘긴 업체는 두산그룹과 조흥은행을 포함,
동화약품 3개뿐이며 제조업체로는 동화약품이 유일하다.
기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창사 이래 동일 장소(서울 중구 순화동의 현재 동화약품 본사 자리)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다음으로는 최장수 의약품인 활명수와 가장 오래된 상표인 ‘부채표’.
1897년 처음 생산된 활명수는 1910년 12월 일본 조선총독부 특허국에 등록한 최고(最古)의 등록 상품이며 부채표는
1910년 8월 국내 최초로 등록한 상표다.
김응환 동화약품 상무에 따르면 ‘부채표’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에 나오는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종이와 대나무가 만나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에서 유래했다.
활명수는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궁중의 선전관으로 있던 민병호 선생이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게까지 널리 보급한 것이다. 선전관이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이다. 활명수는 소화에 도움이 되는 생약 성분을 서양의학에 접목시킨 것으로, 말하자면 ‘신약(新藥)’인 셈이다. 위 속의 음식물을 직접 삭이는 것이 아니라 위 신경을 자극해 정지 상태에 있는 위를 다시 활동하게 하는 원리다.
▲ 1965년 TV에 방영된 활명수 광고. |
김응환 상무는 “급체와 같은 소화불량에 신통한 효력을 지닌 활명수는 동의보감에도 없는 비방”이라며 “한국 바이오테크(BT)의 시초”라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기이고, 그나마 약을 구하기 힘들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으면서도 복용이 간편한 활명수는 그 이름인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로서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김응환 상무는 “구한말 한국을 방문했던 여행가 비숍은 ‘한국 사람들이 활명수를 만병통치약으로 먹었다’고 묘사했다”고 말했다. 활명수는 외국인 눈에도 띌 만큼 백성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김용우 개발부 상무는 “당시 활명수를 만들었던 11가지 생약 성분은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활명수가 나온 1897년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씨가 동화약방(同和藥房)을 세웠다. 현재 동화약품의 모체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회사였다. 이 동화약방을 통해 활명수가 대중화됐다. 전국에 지점이 설립됐으며 특약점이 만주지방까지 퍼져 있었다. 지금처럼 약국이 없었던 그 당시 사람들은 동화약방 지점에서 활명수를 살 수 있었다.
당시 60㎖짜리 활명수 1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의 비싼 가격이었다. 따라서 한 번 사면 아껴두고 속이 답답하거나 급체했을 때만 먹었다고 한다. 현재 가격은 500원으로, 대중적인 상비약이 됐다.
소주 업계의 판매 경쟁이 치열했던 1960년대 진로소주 영업판촉팀이 판촉 활동의 일환으로 술집을 돌아다니며 진로소주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 소주의 쓴 맛을 없애주고 소주의 색깔을 노르스름하게 해 마치 양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활명수 칵테일’은 주당(酒黨)들의 화제로 떠올랐다.
활명수는 100년 넘도록 이어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19년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이 독립운동과 관련해 일본에 체포됐다. 당시 동화약방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 기관인 ‘서울연통부’가 자리잡고 있었다.(1995년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동화약품 부지에 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졌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건너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휴대했다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민 사장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회사는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일제는 동화약방에 대한 허가 약품 품목을 87종에서 24종으로 대폭 줄였다. 활명수의 판매도 주춤했다.
주당들 화제로 등장한 ‘활명수 칵테일’
민 사장이 세상을 떠나자 회사가 더욱 어려워지고 활명수 판매는 연간 30만병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1937년 기업인인 윤창식 5대 사장이 동화약방을 인수하면서 활명수는 한 고비를 넘긴다. 윤 사장이 현대적인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면서 1930년대 후반 활명수는 한 해 최고 500만병이 팔리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만주에 지점을 설치했다. 당시 선금을 예치하고도 제품을 구입하기 힘들 정도로 없어서 못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남북이 갈라지면서 북한 지역의 생산 시설과 시장을 잃었다. 6·25 전쟁 때에는 원료와 기구를 기차에 싣고 마산으로 피란, 약을 생산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서울 사옥이 파괴돼 활명수 생산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대 기계를 새로 들여오는 등 복구 노력 끝에 1961년 동화약방은 매출액 1억환을 돌파했다. 1962년 사명(社名)을 동화약방에서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활명수는 그 오랜 역사만큼 유사 제품도 많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다. 김응환 상무는 “1910년대 당시에도 활명회생수(活命回生水)·활명액(活命液)·생명수(生命水) 등 60여종의 유사 제품이 난립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제품들은 활명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965년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계피·아선약(인도산 콩과 식물의 즙액으로 만든 생약) 등에 탄산가스를 섞은 까스명수(삼성제약)가 활명수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당시 인기를 끌던 청량음료에 탄산가스가 들어있는 것에 착안, 한약 맛을 없애고 청량감을 주면서도 효과가 빨리 나타나도록 만든 것이다.
동화약품은 1967년 기존의 활명수에 탄산가스를 넣은 ‘까스활명수’를 생산, 반격에 나섰다. 경쟁은 치열했다. 1969년 관리비를 제외한 제조 원가가 병당 14원이었지만 생산자 가격이 병당 9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1969년 까스활명수는 5870만병을 생산, 까스명수(4500만병)를 따돌렸다. 1991년에는 까스활명수의 기능을 강화한 ‘까스활명수큐’를 내놓았으며 현재 액제 소화제 시장의 55%를 점유하고 있다.
액제 소화제 시장의 55% 점유
1990년대에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다”라는 광고로 차별화에 나서며 굳히기에 들어간다. 지기호 광고선전실장은 “부채표를 강조한 광고 전략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면서 활명수는 다시 한 번 위기를 맞는다. 지기호 실장은 “일반의약품인 활명수는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의약분업 실시 이후 소비자들이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활명수 구매량이 줄었다”고 말했다.
김응환 상무는 “의약분업 이후 처방제로 쓰이는 전문의약품 사용이 늘어나면서 활명수를 비롯한 일반의약품 매출이 영향을 받았다”며 “하지만 의약분업이 정착되면서 활명수가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소비자들이 인식하면서 매출량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238억원이었던 활명수 매출액은 2002년 308억원, 2003년 306억원에 이어 올해 370억원을 내다보고 있다.
활명수가 1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김용우 개발부 상무는 “100년이라는 전통 위에 끊임없이 활명수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1가지 생약 요소는 그대로이지만, 추출 방식이나 제조 방식에 대해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청량감을 좋아하는 소비자 입맛에 맞춰 활명수에 탄산가스를 넣고 맛과 시원함을 보강한 것도 활명수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다. 김 상무는 “한국인 체질에 맞는 소화제로서 활명수의 약효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식생활이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변하는 데 따라 제품 개발도 서두르고 있다.
▲ 동화약품(당시 동화약방)이 일제 조선총독부에 등록한 상표의 등록증. |
지기호 광고선전실장은 전통이 주는 ‘신뢰’의 바탕 아래 시대 감각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장수 비결로 꼽았다.
1965년 제약회사 최초로 애니메이션 광고를 내보냈고, 1974년 시원한 계곡물을 배경으로 한 광고는 중앙광고대상 컬러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부채표’를 부각시키는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건강을 중시하는 웰빙 바람에 맞춰 앞으로는 활명수 내에 있는 ‘몸에 좋은 11가지 생약 성분’을 강조할 계획이다. 소화기능이 왕성한 10~20대보다 소화기능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30대 이상부터가 주 타깃인 것도 특징이다.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에 봉사한다는 창업 정신이 활명수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발매 2세기에 접어든 지 7년째, 활명수는
서민들의 아픈 배를 가라앉히는 국민 소화제로서의 전통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활명수의 역사는 한국 제약의 역사일 뿐 아니라 한국 제조업의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김응환 상무의 말이다.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sbkim@chosun.com)
[활명회생수, 활명액, 생명수, 까스명수, 위청수, 생록천… ] 활명수, 유사제품과의 경쟁 100년
1965년 삼성제약에서 계피·아선약(인도산 콩과 식물의 즙액으로 만든 생약) 등 소화 기능을 돕는 생약 성분에 탄산가스를 첨가한 ‘까스명수’를 내놓으면서 활명수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나게 된다. 까스명수는 청량음료에 들어가던 탄산가스를 넣음으로써 한약의 거북한 맛을 없애고 청량감을 주는 한편 소화 작용도 빨라지게 만들었다.
동화약품은 1967년 ‘까스활명수’를 출시한다. 경쟁이 치열했던 1968~1970년 사이 두 회사는 총 광고비 지출의 절반 이상을 활명수와 까스명수 선전에 충당했을 정도다. 동화약품은 활명수의 ‘원조(元祖)’ 역사를 내세웠고 삼성제약은 “세계 최초로 ‘발포(發泡)성 구급위장약’인 까스명수를 발매한다”고 선전했다. 현재는 활명수(까스활명수Q)가 5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들 제품 외에도 생약 성분의 액제 소화제로는 위청수(솔표 조선무약), 속청(종근당), 생록천(광동), 생단액(일양) 등이 있다.
[동화약품김응환상무] “전통·신약 조화시켜 새로운 100년 준비한다”
“서양에 아스피린이 있다면 한국에는 활명수가 있습니다. 두 약품은 같은 1897년에 태어났죠. 각각 약품의 대명사이기도 하고요. 동화약품이 간암 치료용 신약인 ‘밀리칸주’를 개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활명수를 제조하면서 익혀온 노하우가 밑바탕이 됐습니다.”
김응환 상무는 “동화약품과 활명수는 앞으로도 최고(最古) 제약회사의 최고(最古) 브랜드로서 전통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며 “신약 개발에도 힘을 기울여 21세기 첨단 의약품 메이커로의 도약을 통해 신구(新舊)의 조화를 이루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 상무는 “올해 활명수·후시딘·판콜에이 등 기존의 주력 제품과 신약 개발을 중심으로 2350억원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화약품이 2001년 개발한 ‘밀리칸주’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간암치료용 방사성 의약품으로 국내 ‘신약 3호’다. 외국에서 투자 문의가 이어진다고 한다. 동화약품은 현재 2가지의 신약 제품 개발을 추진 중이다.
김 상무는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창업 이념 아래 정도(正道)를 중시하는 회사 경영 원칙이야말로 동화약품의 동력”이라며 “동화는 의약품 생산이라는 한 우물을 계속 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상무는 “오랫동안 이어내려온 가족적인 분위기도 동화약품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동화약품은 1978년 국내 제조업체로서는 최초로 생산직을 포함한 전 사원에 월급제를 도입했다. 또한 임직원이 업무상 받은 선물을 한데 모아 일련번호를 매겨 두었다가 설과 추석 때 추첨을 통해 나눠 갖는 ‘수혜품 추첨제’를 1937년부터 실시해오고 있다.
“107년의 역사 자체도 빛이 납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100년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