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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정진규, 박의상의 시
강 경 호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절, 나는 빈센트 반 고흐를 동경했다. 예술적 광기로 자신을 휘발유처럼 연소시키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하루 종일 눈내린 들녘에서 차가운 눈 위에 신문지를 깔고 무등산을 그렸다. 덕분에 스물한 살 되던 여름방학 때는 좌골신경마비라는 병을 얻어 몸을 뒤척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한 달 동안 방안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 시절 나의 영혼을 온통 차지해버렸던 사람은 낯선 나라의 불행하고 행복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이다.
고흐 <자화상> 1889년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미술품을 판매하는 상점의 점원으로 일을 시작해 22세 때까지 6년 동안 일을 했다. 24세 때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28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여년 가까이 아주 짧은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고흐는 불멸의 작품들을 그려냈으니 그의 생은 불행했으나, 그러나 화가로서는 불행한 그의 생이 그를 행복하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고흐를 생각하면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상처와 늘 함께 했던 병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화가라고 말하지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으며, 간질 발작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정상인들처럼 살고 싶어했다. 평생 혼자 살았지만 단란하게 가정을 꾸미고 오순도순 살고자 했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구하려 했지만 끝내는 상처만 입고 고갱과의 말다툼 때문에 정신분열증이 도져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고흐는 죽는 날까지 고갱을 좋은 친구로 여기며 진실한 우정을 나누며 고갱의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열광했다. 고흐는 가난하고 힘없는 화가들을 위해 공동체를 구상하기도 하고 당대의 수많은 작가나 화가들과의 교우도 활발하게 하기도 한다.
고흐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작품에 대해 늘 연구하고 사색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유익하게 다가가기를 소망했다. 그러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가난한 농부들이거나 우체부, 늙은이, 여인 그리고 자연이었다. 특히 농부들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은 매우 따스했다. 그래서 농부들의 삶을 목가적으로 표현한 밀레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
고흐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아우 테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고흐라는 한 인간의 삶에서 테오를 빼버리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늘의 별처럼 여리고 맑아 순수하기 짝이 없는 유약하고 병약한 고흐를 형으로 둔 테오는 화상을 하면서 형의 후견인으로 정신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평생동안 후원했다. 고흐가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 늘 편지를 통해 위무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고흐에게 동생 테오가 없었다면 일찍 세상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고흐의 그림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화가 고흐를 천재화가라고만 했지, 그의 아우 테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 고흐를 만든 사람이 테오라고 해야 할 정도로 테오 역시 영혼이 맑고 순수했다. 늘 형의 절망과 좌절을 들어주고,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고흐는 작품을 그리면 테오에게 보냈는데 편지를 동봉했다. 무려 700여 통의 편지가 그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작품과 일상의 이야기들이지만 모두가 꾸밈이 없고 진실한 것이어서 독자들의 영혼을 헹군다. 그러므로 고흐와 테오 형제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가슴 속에 맑고 순정한 눈물방울을 맺게 한다.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형제가 있었음을 알고 또 다시 가슴 속에 눈물을 맺게 될 것이다. 고흐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쏘아 생을 마감한 후 반년 뒤 정신병자가 되어 형 곁으로 가버린 테오의 숨은 사연을 알게 되면 120년 전의 슬픈 이야기이지만 오늘 또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심란해지면 고흐의 순정한 영혼을 생각한다. 그의 슬픈 삶과 예술을 통해 나를 되비쳐보곤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시인들의 100여 편의 넘는 시가 그의 삶과 예술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역사 속의 많은 위인들을 시인들이 시로 쓰지만 유독 화가 고흐의 그림과 삶을 시 속에 끌어들여 많은 시로 형상화하는지 독자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고흐는 평생 가난하고 쓸쓸했다. 상처지고 간질병을 몸에 지녀 죽는 날까지 병마에 시달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확신을 가졌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하여 동생 테오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서 불꽃이 타오르듯 열정이 넘치는 툭툭 튀는 이미지의 붓텃치, 수많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그에 관한 많은 정보, 그 편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세계, 그리고 귀를 자르고 권총으로 자살한 극적인 삶이 수많은 시인들의 가슴을 움직였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도 그의 삶과 예술을 변용시켜 시로 전이시킨 경우가 많다.
특히 정진규는 농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을 「감자먹는 사람들-삽질소리」로 전이시키고 있다.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3년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엇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
-정진규, 「감자먹는 소리 -삽질 소리」 전문
정진규는 그의 시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고흐의 같은 제목의 그림 「감자먹는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 깃든 의미를 충실하게 변용하여 담아냈다. 고흐의 그림 속의 풍경에서 시인은 자신의 기억 한 켠에 내재한 추억과 오버랩 시킨다. 추억이 그림을 통해 언어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그림은 시인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 동기유발과 상상력을 위한 매재가 된다. 100여년 전의 고흐와 정진규가 만나 새로운 의미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고흐의 그림속엔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구분이 안 되는 희미한 램프불빛 아래에 다섯 사람의 농부가 식탁에 앉아 있다. 이들은 모두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데 중앙에 치마입은 여자가 등을 보이며 앉아있고, 왼쪽의 두 사람이 포크로 감자를 집으려 하고 있다. 오른쪽의 한 사람은 감자를 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커피를 따르는 농부들의 모습은 고단해 보이지만 편안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초라해 보이는 실내와 허름해 보이는 이들이 입은 옷은 넉넉하지 않는 농부들의 삶을 보여준다. 아마 하루 일을 끝내고 내일의 노동을 위해 충전하는 시간으로 여겨진다.
정진규 시 속의 화자는 고흐의 그림 속 농부들의 모습에서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하루 종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을 하다가 “삶은 감자를 먹”는 시간은 그들의 남루한 삶처럼 “언제나 불빛 흐린/저녁 식탁”이다. 그래서 모두가 저녁 식사 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간혹 식사하면서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이면 “삐걱거”릴 뿐이다. 9행에 이르러 “다만 셋째 형만이/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면서 그림에서 유추할 수 없는 화자 가족의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화자의 형이 버거운 농부의 삶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우리 농촌의 현실이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농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희망을 놓고 살아가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한때는 ‘무작정 상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가던 때가 있었다. 그 결과 이제 농촌은 늙은이들만 지키는 쓸쓸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 작품 속 화자의 가족은 모두 “마디 굵은 손”을 하고 있다. 마치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을 닮았다. 그것은 “서걱서걱 흙을 파”는 고된 노동의 탓이다. 그래서 노동이 지긋지긋한 가족은 “삽질소리들을 꿈속에서도” 듣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화자의 가족은 “타고난 사람들이었다”엔 모두가 삽질을 잘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지만, 그러나 농부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정진규의 「감자먹는 사람들 -삽질소리」는 농부들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결코 절망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암시해주는 대목은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인데 시적 상징으로 “새벽”과 “빗줄기”가 “희망”을 의미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힘든 삶 속에서도 “우리는” “빗줄기”를 통해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을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의 여유도 생겨 비오는 날은 노동을 멈추고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흙먼지와 피곤함을 씻기 위해 “목욕탕”에도 “가고 싶”은 것이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에 정진규의 상상력이 덧칠되어 농부들의 고단한 삶과 희망을 그려낸 「감자먹는 사람들 -삽질소리」는 회화와 시가 만나 어떻게 변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흐 <씨 뿌리는 사람> , 1888년
박애주의자로 한때 전도사가 되어 노동에 지친 탄광노동자들에게 위무의 복음을 전해주기도 한 고흐는, 그러나 곧 기독교를 일탈하고 만다. 이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그가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온 것은 농부들의 삶이다. 그래서 밀레처럼 ‘씨 뿌리는 사람’, ‘밀밭’, ‘낫으로 풀을 베는 소년’, ‘식사하는 농촌 여인’, ‘이삭 줍는 여인’, ‘삽질하는 농부’, ‘꽃이 핀 복숭아나무’, ‘꽃이 핀 자두나무’, ‘수확’, ‘포도밭’ 등 일련의 농촌 관련의 그림을 수없이 그려낸다. 이처럼 고흐가 농촌과 농부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들만이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곤궁한 삶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흐는 「농부의 손」을 그리기도 했는데 화면 전면에 “굵은 감자”처럼 투박해지고 거칠어진 농부의 손을 클로즈업 된 손에서 삶의 진정성을 엿보게 한다. 들에서 농기구를 쥐고 일하는 농부의 모습과 더불어 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손만으로도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한 짝의 구두」(1886)는 들에서 일하다가 벗어놓은 농부의 리얼리티를 실감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흐는 1886년부터 「한 짝의 구두」와 「세 짝의 구두」 등 세 편이 구두 그림을 그렸다. 일련의 구두 그림 중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많이 시로 형상화한 1886년에 그린 「한 짝의 구두」이다. 이 그림 속의 구두는 끈이 풀어진 낡고 검은 구두 한 켤레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구두의 배경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없는 공간으로 그려져 있어 주제를 살리기 위한 배경처리를 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시로 전이시킨 시인은 박의상과 이승훈이 있는데 박의상의 「구두 1 -반 고흐의 그림 ‘구두’」를 살펴본다.
고흐 <구두>, 1886년
구두를 벗고
반 고흐는 물었을 것이다
너는 어디를 그렇게 쏘다녔느냐고
무엇을 그렇게 많이 걷어차고
어디에 그렇게 많이 치이고
왜 그렇게 많이
닳고 해지고 터졌느냐고
그는 구두 한 켤레를 그리면서
그 질문들을 그리면서
그리다가
웃었을 것이다
그렇게 헤매어야 다시
왔지 않느냐고
그냥 터덜터덜 떠도는
어떤 목적지를 모르는 너도
다시 지금 만난
네가 목적지가 된
그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웃다가
그는 구두를 벗고 정중히
그 이마에 입맞추고
이젠 맨몸으로라도
맨발로라도
저를 이끌고 한세상
또 어디로
떠나려고 했을 것이다.
-박의상, 「구두 1 -반 고흐의 그림 `구두'」 전문
박의상의 시는 제목이 말해주듯 고흐의 그림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고흐의 삶에 대한 살핌으로 읽힌다. 실제 고흐의 삶과 예술 지향으로 볼 때 그림 속의 구두는 틀림없이 농부의 구두로 여겨지지만 박의상은 고흐가 신었던 구두로 설정한다. 그래서 박의상의 시는 “구두를 벗고/ 반 고흐는 풀었을 것이다”라고 짐작한다. 그러면서 고흐 자신이 ‘구두’라는 또 다른 자신에게 “너는 어디를 그렇게 쏘다녔느냐고/ 무엇을 그렇게 많이 걷어차고/ 어디에 그렇게 많이 치이고/ 내 그렇게 많이/ 닳고 해지고 터졌느냐고” 묻는 형식으로 자신의 실존을 통찰한다. 박의상의 시는 고흐가 자신이 신고 다니던 구두를 벗어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구두를 바라보며 던지는 질문이다. 이는 박의상이 고흐의 삶을 조망하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고흐의 내면을 들여다 본 결과이다. 실제로 고흐는 탄광촌으로, 남프랑스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가난과 병마와 외로움과 싸워왔다. 그러면서 상처 입으면서도 박애주의적인 신념으로 세상의 불의와 대결하며 살았다. 그러한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구두를 바라보는 고흐는 “그 질문들을 그리면서/ 그러다가/ 웃었을 것이다”고 화자는 고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는 “그렇게 헤매어야 다시/ 왔지 않느냐고” 고흐의 현재의 삶에 긍정적인 시각을 던진다. 그래서 “그냥 터덜터덜 떠도는/ 어떤 목적지를 모르는 너도/ 다시 지금 만난/ 네가 목적지가 된/ 그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웃”는 고흐를 떠올린다. 즉 누구든 삶의 길이 버겁든지 가볍든 지간에 모두가 자신의 길이며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흐의 심정을 시를 통해 화자의 생각을 곁들인다. 어떠한 삶이든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고흐의 질문과 대답은 결론적으로 “그는 구두를 벗고 정중히/ 그 이마에 입맞추”게 한다. 실제로 고흐가 자신의 구두에게 입 맞추지만 그것은 자신의 지난한 삶을 껴안는 하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흐는 지금껏 버겁게 걸어온 자신의 삶을 위해 “이젠 맨몸으로라도/ 맨발로라도/ 저를 이끌고 간 세상/ 또 이리로/ 떠나려 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이르러 또 어디론가로 자신이 선택한 길을 떠나려 했을 고흐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린 후 남프랑스 아를에 가서 고갱과 함께 ‘노란 집’에서 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한때는 아프리카 외인부대에서 5년 정도 살다오고자 하는 계획도 세운다. 아우 테오의 반대로 그 꿈이 무산되었지만, 쉽지 않은, 그래서 편치 않은 삶을 살다가 아를의 ‘노란 집’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문제로 고갱과 다투다 오른쪽 귀를 자르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1890년 7월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발작을 일으켜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어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박의상은 불우했던 한 예술가의 삶에 대해 보편적인 삶의 원리를 적용시켜 누구의 삶이든지간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야함을 노래했다고 볼 수 있다.
-계간<시와사람> 2010년 봄호 56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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