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곡(巖谷) 도세순(都世純, 1574~1653)의 <용사일기(龍蛇日記)>는 18세 청소년이 쓴 전란을 체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데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기드문 감성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조총과 칼을 든 왜병을 나무가지로 가려 숨었다가 적의 공격을 날쌔게 피하여 바위 밑으로 숨는 절박한 순간을 전해주는 내용은 가히 감각이 예민한 청소년의 눈으로 묘사된 임진왜란의 숨막히는 순간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적이 대거 침입하였다. 도적의 무리가 백만이고, 도적의 배가 서로 맞닿아 바다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우리나라는 태평성세를 누린 지 오래라,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고 살았다. 하루아침에 적들이 들이닥치니 변방의 장수들은 능히 막아내지 못하였다. 어떤 군사는 성을 버리고 쥐 숨듯 하고, 어떤 곳에서는 모든 군사가 적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적은 부산진 등을 함락하고 동래를 에워쌌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을 견고히 하고 저항하였으나 수비가 완전치 못하여 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관대를 하고 단정히 앉아 서쪽을 향하여 재배를 한 후 죽음을 당하였다.
적은 연이어 여러 군을 함락하고, 바다와 뭍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향하는 곳에 막히는 것이 없다. 기세가 마치 기왓장을 깨듯 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가혹하고 무거운 노역을 일삼은 監司(감사) 김수와, 늙어서 용맹이 없는 兵使(병사) 曺大坤(조대곤)은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스스로만 방위할 뿐 싸움을 하지 않았다. 적은 방자하게 마치 무인지경을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때 牧使(목사) 李德設(이덕설)과 判官(판관) 高峴(고현)은 본주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현풍1 경계에 진을 치자 병졸들이 헛되이 놀라서 흩어졌다. 이에 인민들도 모두 놀라고, 멀리서 가까이서 소요가 일어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다.
이때에 나2와 집안 종친들은 피란할 것을 논의하였지만, 의견이 분분해서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 하였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깊은 산이라면 적은 복병이 숨어 있을 곳으로 의심하여 반드시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얕은 산이라면 어찌 모두 수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얕은 산에 쥐처럼 엎드려 있다가 형세를 살펴가며 피란을 하는 것이 안전한 방책일 것입니다”라고 하여 모두 좋다고 하고, 빌무산3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1. 현풍(玄風) : 지명. 대구 밑.
2. 나(都世純) : 1574~1653년. 1월14일 졸. 본관 성주. 몽기(夢麒)의 2자.
자는 厚哉, 호는 巖谷. <京山本誌(星州郡誌)>를 저술하였다.
3. 빌무산(乞水山) : 784m. 성주군 벽진면과 김천시 조마면 사이에 있다.
치성을 드린다는 뜻의 '빌'과 물의 '무'가 합쳐진 말이다. 북동족에 백마산이
있고, 바로 남쪽 앞에 별뫼산(주: 星山) 이 있다. 김천시 농소면과
성주군 벽진면의 경계이다. 이 고개의 남쪽으로 안봉사가 있는 안산, 자산
356m, 나부산, 갈마산 167m이 연결되어 있다. 이 일기의 출발지가 되는
개터(介台)는 나부산과 갈마산의 앞 마을이다
1592년 4월 20일
집안1의 값진 것은 땅에 묻고, 옷과 식량을 싸 놓고 앉았다. 집에 막걸리가 있어서 집안의 시춘2 형님, 김로 아재3와 함께 마셨다.
김로 아재는 술잔을 들고 혀를 차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태어나서 이런 극변을 만나다니… 모르겠다만, 이렇게 다시 술을 마실 수 있을까?” 하며 처량하게 눈물을 흘렸다.
이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니 연기가 하늘에 닿고, 적놈들이 더욱 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都章(도장) 아재는 변방을 지키러 가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내가 아재 집의 어른과 아이들을 불러서 모두 함께 응성 아재4 집으로 갔다. 이곳에 온 사정을 모두 말하니, 아재 역시 놀라서 나와 함께 문을 나왔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놀리며 말하였다. “적이 너의 집에 먼저 왔나? 어찌 그리 빨리 움직이려 하느냐?” 하면서 말렸으나 우리는 이에 따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개터5의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마을을 굽어보고, 조상의 무덤6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대로 내려온 집들이 장차 잿더미가 될 것이고, 조상의 무덤도 반드시 황폐한 구덩이가 될 것이다” 하니 모두 눈물을 흘리고 머뭇거리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저녁이 되어서 산점7에 도착하였다. 鄭淡沙(정담사)의 집을 빌려서 머물렀다.
다음날 집안이 모두 모였다. 이날 밤에 이양덕 아재가 술을 허리에 차고 오셨다. 집안 사람들이 여러 잔을 마시고 헤어졌다.
이 일 이후 며칠간은 적에 대한 소문이 없다.
1. 집의 위치 : 이 당시의 집은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개터, 은행정이라고
부르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600년 가량 된 은행나무 거목이 마을 앞에 있고,
이 일기를 쓴 세순의 13~15대 자손이 살고 있다.
2. 시춘(是春) : 도몽호의 아들. 세순의 6촌 형. 1564년 3월5일 생. 是仁과는 형제.
3. 아재(叔) : 웃항렬의 일가 친척을 부르는 호칭.
4. 응성(應星)아재 : 都應星. 세순의 재종숙.
5. 개터(介台) :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나복실의 앞마을 개울 옆에서
큰 은행나무가 있는 안마을 주위를 말한다.
6. 조상의 무덤 : 개터의 뒷산에는 세순의 증조 운재공(雲齋公) 균(勻)의
무덤과, 나복실 안쪽의 6대조 安, 5대조 以敬의 무덤이 보인다. 세순이 앉아
있던 자리로 보이는 언덕에는 그의 아버지 夢麒, 7대조 允吉의 무덤과
杞菊亭이 있다. ‘杞菊’이란 말은 ‘耆國’과 발음이 같으며, ‘孝, 忠’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 정자는 그의 5대손 尙郁 대에 세운 것이다.
7. 산점(山店) : 산 어귀에 있는 가게. 개터의 북쪽 1km 위에 상점복, 하점복,
산전이란 마을이 있다. 안봉의 입구에 있는 마을들로 산점은 이 근처로 추측된다
1592년 4월 25일
소문에 적이 현풍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산점에서 산을 올라가니 이양덕 아재가 말하기를 “어찌 가벼이 움직이는가? 오늘 조금 머물렀다가 우리와 함께 갈 곳을 의논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하였지만 우리들은 그에 응하지 않고 중봉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둘러보니 강의 왼쪽에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다. 조금 쉬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裵協(배협)이 달려와서 함께 放目菴(방목암)1으로 갔다. 배가의 가족들은 이미 여기에 와서 기거하고 있다.
다음날(26일) 이순경과 배득보 역시 이곳으로 왔다. 이날 저녁에 득보가 송아지를 잡아서 고기를 여러 점 보내 오고, 집에서는 쑥떡을 쪄서 꿀을 발라 올렸다. 득보의 모친과 아내도 함께 왔다.
1. 방목암(放目菴) : 庵子 이름. 뒷산인 안봉사가 있는 안산과 개터 뒤편
玆山(360m) 사이에 있었던 듯. 지금은 없다.
1592년 4월 27일
배협과 더불어 방목암에서 의논하였다. “이곳은 사람이 많고 번잡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암자의 서쪽 밖에 나무를 잘라서 주위를 둘러친 임시 거처가 있으니 배협 일가와 우리 집, 아재네 집 가족이 함께 거처를 하고, 만약 급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서 생사를 함께하기로 하자”고 하였다.
저녁에 성주성1을 바라보니 적이 이미 성을 점거하고, 불을 질러 화염이 성안에 가득하고 불빛이 하늘에 미쳤다.
1. 성주성(星州城) : 현재 성주군청이 있는 장소. 개터에서 약 5km 떨어진 곳이다.
1592년 4월 28일
아침에 흉악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다. 대낮에도 어두워서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갈 곳을 몰라 쥐처럼 숲속에 엎드려 있었다.
잠깐 사이 왜적은 산 위까지 올라 고함을 지르며 돌을 굴리는데, 그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더욱 간이 떨리고 마음이 눌려서, 급히 일어나 깊은 골짜기로 달려 들어갔다. 아버님1은 길이 엇갈려 다른 곳으로 가셨는데, 형님2이 찾아 모시고 왔다.
바위 밑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날이 저물었다. 성주성은 가깝지 않고, 적들은 이미 돌아갔으리라 스스로들 생각하여 모두 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달려왔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적에게 쫓기는 터라 하였다. 되돌아 바위틈으로 다시 들어갔다. 좌우의 사람들은 갈증이 심했다. 형님이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물을 길어 바가지에 채워서 왔다. 마른 목을 축이고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저물어서 부막3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단지 두 명의 적이 왔다.
1. 아버님(都夢麒) : 1542~1594년 11월2일 졸. 자 仁叔.
2. 형님(都世雍) : 1569~1626년 6월13일 졸. 자 時哉, 호 杏山. 무덤은 기국정
맞은편 언덕에 있고, 그 밑에 그의 비석이 증조 운재공 균과 함께 있다.
3. 부막 : 햇빛 가리개로 친 임시거처.
1592년 4월 29일
어지럽고 무서운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는 것이 어제보다 더 심하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한 스님이 달려와서 말하기를 “적이 산의 북쪽 기슭에서부터 둘러싸고 수색을 하는데, 살기가 등등하다고 한다. 어찌 빨리 달아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모두들 놀라 밥 먹던 것을 멈추고, “오늘에는 죽고 말겠구나” 한다. 그래서 억지로 이순경을 만났다.
공보 이순경은 산중의 험하고, 화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잘 알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길을 안내하도록 하고 따라갔다. 어제 머물렀던 바위 위에서 멈추어 있으려고 하니, 공보가 말하기를, “어제 단지 적 두 명을 보고도 정신이 빠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는데, 오늘같이 이렇게 많은 적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정말로 자네의 말처럼 여기서 멈추고 있으면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고 큰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바지를 걷어 올리고 산을 올랐다. 내가 약속하기를, 먼저 가서 왜적이 없으면 휘파람을 불 터이니 다른 분들은 그 소리를 듣고 오라 하였다.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물고기두릅처럼 줄지어 올라가서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사방에 황급히 피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후에 김우곤 어른에게로 갔다. 피란 가서는 안 될 곳을 알려 드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무가 울창하고 녹음이 우거져서 밧줄에 매달려서 내려갔다. 낭떠러지 밑에 앉아서 쉬었다. 일행이 모두 다쳐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다. 조금 후에 산점에서 불길이 오르는데 그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다. 산꼭대기에서 들으니 포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사람들은 모두 구부리고 엎드려 있었다. 작은 동생 예일1이가 칭얼대서 급히 젖을 물려 울음소리를 막았다.
두 사람이 앞 봉우리에서 구르듯 내려온다. 가까이 와서 보니 응진 아재2와 김로 아재였다. 우리들을 보더니 놀라면서 말하기를, “어찌 편히 앉아 있는가? 우리 역시 적에게 쫓기고 있다. 적들이 뒤쫓아서 여기까지 올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모두들 낭떠러지를 따라서 아래로 떨어지듯 내려갔다. 배협은 노모가 있고, 그의 처도 임신 중이라 모두들 잘 걷지 못하였다. 배협이 겨드랑을 부축하여 끌고 내려간다.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하고 망극하여 두 눈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험한 고개를 넘어서 살티3로 달려 들어가서, 뒤로 나무를 병풍처럼 두르고 앉았다.
배협과 형님을 시켜서 봉우리 위4에 올라가 적의 거취를 알아보게 하였다. 오래 되지 않아 배협이 먼저 와서 말하였다. ‘적이 산으로부터 곧바로 내려와서 읍내 길로 향했다’는 것이다. 이미 불길이 산기슭에서 일어나서 공보로 하여금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이것은 들판에 맞불을 놓은 것이라 한다.
조금 후에 허둥지둥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보니, 적의 선봉이 여기로 오고 있는데 앉아 있으면 역시 위험하리라는 것이다. 모두 낙담하여 달아나려고 하였지만 형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헤어지게 되는 것이 싫고, 또 배협은 적이 간 곳을 이미 알아냈다고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믿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스스로 불안하여 앉아서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머니5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동생 복일와 예일을 어루만지며 말하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하시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가련해 했다.
조금 있으니 바람 소리와 새 울음이 들렸다. 적이 쳐들어 온 것으로 생각해서 모두 두려워하며 산봉우리로 달려 올라갔다. 적은 이미 갔으나 형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또 적이 어디로 물러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숲속에 엎드려서 사방을 둘러보고 형님을 불러도 보았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다. 부모님은 추측컨대 화를 입은 것이 아니냐며 울부짖으며 달려가서 같이 죽자고 하신다. 또 배협을 돌아보며, “자네가 내 자식과 같이 가서 망을 보았으면 마땅히 같이 돌아와야 할 일이지, 어찌 혼자 돌아오느냐? 내 아들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꾸짖었다. 배협 역시 근심과 걱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통곡을 하며 아래로 내려와서는 큰 소리로 형님을 찾아 불렀다.
한참 후에 산 위에서 문득 대답하는 소리가 있다. 먼 곳에서 점점 가까워지는데, 바로 형님이었다. 김로 아재가 고개로 올라가서 외치는데, ‘과연 네 형이냐’고 물으신다. 내가 “예, 예”라고 하니, 아재는 이를 부모님에게 아뢰었다. 부모님은 눈물을 거두고는 먼저 돌아가셨다.
나는 남아서 형님을 기다렸다. 만나 보니 더욱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헤어져서 울부짖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형제가 함께 방목암으로 갔다.
부모님이 여러 친척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은 우리를 보자 형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시길, “네가 만약 불행을 당한다면 이 늙은 애비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며 늦은 까닭을 물으셨다.
형님이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산등성이를 바라보니 적이 봉우리에서 오기에 나무를 꺾어서 몸을 숨기고 나무에 의지하여 서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발자국소리가 나서 급히 돌아보니 적 한 놈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나는 몸을 가볍게 날려서 달려가 암벽에 머물렀는데, 그 아래가 몇 길 낭떠러지라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등나무 줄기에 매달려서 아래로 내려가 그 밑에 숨었는데, 괴상한 고함소리가 나서 앉아서 엿보니 적 둘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가 다만 나무 하나 사이, 다섯 걸음 정도였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날쌔게 달려 높은 봉우리를 넘어서 겨우 붙잡히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은 모두 감탄하고,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을 보는 듯하였다.
밥을 먹고 네 시쯤 부막으로 돌아왔다. 감추어 두었던 옷과 재물은 노략질당하지 않았는데, 다만 말 한 필을 왜적이 끌고 갔다. 종숙의 노비 은지가 말하기를 “제가 부막 가에 엎드려서 들으니, 적이 3명 왔는데, 불을 지르려 하자, 한 왜군이 말리며 말하기를 ‘이 집주인이 밤에 반드시 올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나가 있다가 불시에 빼앗으면 얻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그러니 불을 지르지 말자’며 서로 한동안 말하고는 흩어져서 갔다”는 것이다. 왜의 말이어서 알아듣지 못하였을 텐데, 은지의 이 말은 망령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도적의 무리들이 부막에 불을 지르지 아니하고, 감추어둔 비단옷을 훔쳐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정하지 못하였다.
의논 중에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두워졌다. 또 한배미6의 여러 마을을 바라보니 불길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왜적들이 그곳에 주둔해 있고 장차 이곳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들 얼굴빛이 하얗게 무서움에 떨었다.
배협이 말하기를, “사태가 급하다.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쥐처럼 수풀 속에 숨어있어야만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여기에 묶여서 함께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모두 옷 등을 버리고 빈 몸으로 험한 산길을 갔다. 또 비바람이 일어 허리를 굽히고 서로 붙들고 내려왔다. 점촌7 앞에서 安峰寺(안봉사)8의 스님을 만났는데, 桂崇(계숭) 스님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임인생(1542년생, 당시 61세)으로, 나에겐 병을 고쳐준 은혜가 있다.
비가 더욱 거세진다. 그믐달이라 밤은 깊고 앞이 보이질 않는다. 따라오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서 길을 잃었다가 서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모이곤 하였다. 오직 동생 복일9이 대답이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동생이 오도록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종적이 적막하다. 배협은 가족을 데리고 먼저 사두곡으로 향하고, 우리는 비를 무릅쓰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창두 윤금이10가 틀림없이 동생 복일이를 업고 먼저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다가 드디어 떠났는데, 진흙에 빠지고 미끄러져 모두 길에 넘어져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서원11 앞에 이르러 여기저기의 마을12을 바라보니 흉악한 불길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개 짖는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왜적들이 아닌가 생각되어 황급히 개터 종숙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 보니 과연 복일이 먼저 와 있었다. 복일이 달려 와서 “아버지, 어머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며 울었다. 우리를 보자 기쁜 모습이 얼굴에 가득했다.
집안일과 왜적의 형세를 물어보니, 늙은 종 명복이 “집은 29일에 온통 잿더미가 되고, 또 종 은복은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모두 슬피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러 곳을 다닌 나머지, 기력이 없다. 조금 쉬려고 하니 종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적이 올 때라는 것이다. 조금도 지체치 못하고 배응보의 선영으로 달려서 들어갔다. 여종을 시켜 밥을 짓게 하고 그릇 하나에 담아서 함께 먹었다. 큰집이 모두 불탔다. 사당은 불길을 면하였으나, 겨울에 역시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1. 작은 동생(禮一) : 4살. 을축년 1591년 생.
2. 응진(應震) : 도응성의 동생, 세순의 재종숙.
3. 살티(箭峴) : 금수면 후평리에 있는 마을. ‘웃살티’와 ‘아랫살티’가 있다.
이 글로 보아 세순은 웃살티로 피란 갔다. 현재는 인가가 없고 아랫살티에만
인가가 있다. 여기서 한배미(大夜)와는 1km 거리. 옆에는 김천시 조마면과
통하는 살티재가 있다.
4. 봉우리 위 : 염속봉산(650m). 성주읍의 성이 내려다보인다.
5. 어머니 : 江陽人 李良受의 여. 1593년 6월8일 졸. 강양은 합천의 옛이름이다.
6. 한배미(大夜) : 現 벽진면 봉학리.
7. 점촌(店村) : 앞의 산점과 연관이 있는 세 마을로 보인다. 안봉사 밑에
있었던 듯.
8. 안봉사(安峰寺) : 지금의 안산영당(벽진면 지산리 중리마을 뒷산)이 있는 곳.
기록에 의하면 대장경을 보관할 정도의 큰절이었으나 지금은 유적, 유물이
없고, 고려시대에 조성한 작은 미륵석불과 그 전각만 남아있다.
9. 복일(復一) : 세순의 바로 밑의 동생. 이듬해 굶주림으로 죽게 된다.
10. 윤금(閏金) : 男奴. 다음해 겨울에 병으로 합천 야로의 주학정 고개에서
쓰러지고,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 듯하다.
11. 서원(書院) : 川谷書院. 1558년 迎鳳書院으로 창건하여 이후 鄭逑 등이
개칭하였는데 1868년에 훼철되었다.
12. 마을 : 명리와 선학동. 용사란 당시와 그 직후에 성주도씨, 남양홍씨,
성산배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1592년 4월 그믐
비가 더욱 세게 쏟아지고, 눅눅하여 그 피곤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배의수의 집에 가서 불을 쬐어 옷을 말렸다. 곧 점심을 먹고, 부모님은 어린 동생을 안고 배씨의 선영으로 향했다. 나는 형님과 함께 송공의 선영1으로 가서 작은 소나무 아래 앉았다. 연일 비가 내렸는데 옷은 마르질 않고 한기가 뼈에 사무쳤다.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오래라 형님은 팔을 괴고 떨면서 졸고 있어서 내가 형님을 불러서 깨웠다.
사람들이 모두 왔다. 무덤의 옆으로 징기2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사방으로 분주히 달아나고, 또 말을 쫓는 자도 있었다. 형제가 서로 울며 말하기를, “저것들은 왜적이다. 오래지 않아 이곳으로 올 텐데 어떻게 할까? 빌무산으로 돌아가려니 부모님이 피곤하여 억지로 걸을 수가 없고, 우리 둘만 가자니 사람으로 차마 할 짓이 아니다. 차라리 부모님의 곁에서 함께 죽느니만 못하지 않느냐.”
마침내 절뚝거리며 배씨의 先塋(선영)으로 가 보니, 부모님과 누이, 동생이 역시 비를 맞으며 졸고 있었다. 내가 본 바를 말씀 드리니,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다만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셨다. 과연 오늘은 왜적이 오질 않았다.
저녁에 배의수의 집으로 갔다. 아버님과 형님은 홍필봉의 집을 빌려서 잤다. 어머님과 나는 누이와 함께 배의수의 집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촌락이 흉한 불길이 들었으나 오직 홍씨와 배씨의 우막은 보존되었다. 그래서 배응보의 모친과 그의 처자, 배득창의 처와 노비가족 모두 세 집 가족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은 많고 집은 좁아서 제대로 누울 수가 없다. 모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지붕이 새어 비가 물을 붓는 듯하고, 또 마주할 불조차 없어서 그 곤란한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한밤에 배득창이 와서 말하기를 “왜적이 사람을 죽이는 참상이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나는 처자를 버리고 멀리 달아날 계획이다. 지금 자네는 어찌할 건가? 자네처럼 젊은 사람은 반드시 목이 잘릴 것이야. 딴 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몸 보존할 것을 생각하게”라는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놀라 떨고, 간담이 떨어지는 듯했다.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는 “오늘 극변을 당하여 서로 몸을 보존키 어렵다. 왜놈들은 젊은 남자를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너희들은 각자 멀리 달아나서 몸을 보전하였다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너희들 한 몸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부모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멀리 달아나거라”라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서 오래도록 산다 한들, 부모님과 함께 죽느니만 못합니다”하니, 어머님은 더욱 비통해 하셨다.
홍필봉 집으로 가서 배공이 한 말을 아버님께 모두 아뢰었다. 아버님은 “비록 도적들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모두 죽이기야 하겠느냐.” 홍필봉 역시, “자네는 배공의 거짓말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하시고, “절대 현혹되지 마라. 온돌에 편히 누워서 몸에 걸친 젖은 옷이나 말리게” 하시어 두려움이 조금 누그러뜨려졌다. 과연 배공은 처음에는 멀리 숨는다고 스스로 약속하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아끼는 자식들과 모두 굴속에 들어가서는 종일토록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이 허망하고, 진실이 없음을 역시 알 것이다.
이날 배득보의 누이가 죽음을 당했다.
※ 이 글은 이후에 다시 보충한 흔적이 있다. 일기의 날짜는 4월인데, 사당이 겨울에 불탔다고 적고 있다.
1. 송공의 선영(宋公墓山) : 징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2. 징기(樹村里) : 개터의 앞마을. 마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커다란 징개나무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상 수촌리이고, 상수촌, 중수촌, 하수촌이 있다. 상수촌은 수촌리 들판의 중동, 중평, 부흥리, 행촌이다. 고려말 橫溪 都允吉이 칠곡 동명에서 입향하여 세거한 곳으로, 성주도씨의 집성촌이다. 도윤길은 이 일기의 저자 도세순의 7대조이다.
1592년 5월 1일 맑음.
새벽에 배씨의 선영으로 들어갔다. 정오에는 읍내에 주둔한 왜적들이 금릉1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는 개터의 아재 집으로 왔다. 아재의 집은 다행히 불타지 않았다.
이날 헛되이 놀라서 산에 오른 것이 세 번이다. 은복 역시 도망을 갔으나 왜놈들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왔다. 머리를 모두 깎이고 왜옷을 입었다. 완전히 왜놈과 같다. 뜰 가운데에 엎드려서 울면서 말하기를, “처음 붙잡혔을 때 여러 왜놈들이 둘러섰습니다. 시퍼런 칼날을 내 머리에 갖다 대었을 때는, 이제는 살아서 고향 마을로 가지도 못하고, 주인님을 다시 뵙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비탄해 했다.
또 여종 수정은 봉명정2에 엎드려 있다가 왜에 끌려갔다. 그의 어미 애정이 그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늘을 보고 울부짖으며 엎어질듯 넘어질듯 왜적의 뒤를 따라갔다. 어떤 왜적은 칼을 뽑아서는 두들기기도 하였으나 칼날로 치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애정은 왜장이 書院(서원)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 들어가서 슬피 부르짖고, 길길이 뛰었다. 비록 왜놈이 잔악하고 포학하여 짐승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하나, 역시 모녀의 정을 느껴서인지 곧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4월 29일의 일이다.
오늘 빌무산에 묻어 두었던 물품들을 되가져왔다. 그것은 옷과 돈, 서책이다. (끝)
1. 금릉(金陵) : 현 김천시.
2. 봉명정(鳳鳴亭) : 다징기(加樹村)에 있었다. 다징기는 징기와 伊川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동네. 벽진면 매수리
첫댓글 성주(팔거)도문의 암곡(휘 세순)공의 국역 용사일기를 작년에 구매하여 읽었는데 저자가 청년의 나이에 임란을 피해 피란과정을 일기로 써서 생생한감동을 전해주는 책입니다.(한강선생의 문인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눈으로 본듯 선연합니다. 옛날 지명과 용어를 들으니 정겨우면서도 가슴이 아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