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대창학원 시대(大昌學院時代, 1922-1947)
1. 설립 준비
3.1운동(1919)의 좌절로 국민이 실의(失意)에 빠졌을 때,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시대의 조류가 예천(醴泉) 땅에도 밀어닥쳐 예천청년회(醴泉靑年會)가 주동이 되고 예천유도회(醴泉儒道會)의 후원 아래 설립 준비를 하였다. 특히 벽천 김석희(碧泉金碩熙) 선생이 중심이 된 예천청년회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재래 서숙(在來書塾)의 수업자(修業者)로서 학령(學齡) 관계로 보통학교(普通學校)에, 혹은 보통학교의 졸업자로서 학비 관계로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자들이 방황 탄식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중 1921년 8월 31일 정기총회 때 학술 강습회(講習會)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1일부터 소인 문예극단(素人文藝劇團)을 조직하여 그 학술 강습회의 설치 취지를 선전하고 종래의 악풍 폐습(惡風弊習)을 고치기 위하여 각 면(面)에 순회 공연하였는데, 많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동시에 유지들의 기부금으로써 설립 기금을 만들었는데, 읍내 독지가(篤志家)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김석희(金碩熙), 이규화(李圭華), 황영찬(黃永瓚), 정인학(鄭寅鶴), 권준흥(權準興), 김주천(金周川), 최병주(崔秉柱), 강필원(姜弼元), 박교석(朴敎錫), 최영건(崔榮健), 안정호(安政鎬), 김명운(金明雲), 박운수(朴雲洙), 이자헌(李子軒), 이정백(李正白), 김주형(金周亨), 황운해(黃運海), 조규찬(曺圭燦), 한세원(韓世源), 황위해(黃瑋海), 장수암(張守岩), 황중문(黃仲文), 최영규(崔榮奎), 이기현(李琦鉉)
1921년 12월 15일에 권준흥(權準興) 외 2명의 명의로 설립 인가를 받아 명칭은 대창학원(大昌學院), 위치는 예천향교(醴泉鄕校, 醴泉邑 栢田里) 풍영루(諷詠樓)로 정하고, 개학은 1922년 2월 15일로 정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 한편 전임 강사(專任
講師)는 정수일(鄭秀日)을 초빙하고, 당분간 박원석(朴元錫), 곽기종(郭琪宗)을 무보수 강사(無報酬講師)로 위촉하였다.
<교남지(橋南誌)> 37권 예천군조(醴泉郡條)에서 이르기를, "대창학원은 송대(松臺) 위에 있는데, 임술년(壬戌年, 1922)에 예천군 사람 김석희(金碩熙)와 유지 여러 사람들이 의연금(義捐金)을 모집하여 창설하였다."라고 하였다.
2. 대창학원 개교(大昌學院 開校, 1922.2.15)
1922년 2월 9일에 예천향교 풍영루 교사(醴泉鄕校諷詠樓校舍)의 수리가 완성되고
또 입학 지원자도 150여 명에 이르렀고, 강사와 그 외 준비도 완료되었으므로 같은 달 15일 오전 11시에 그 교사(校舍) 내에서 개교식(開校式)을 거행하였다. 예천면장 정남섭(醴泉面長鄭南燮) 등 많은 내빈의 축하 속에 성황리에 개교식이 끝났다. 이 때 예천향교의 명륜당(明倫堂)과 풍영루의 처마 끝에 눈 녹은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대창학원이 개교하는 성스러운 순간이었다. 예천군민의 추앙의 행사이고, 숭고한 민족 장래를 약속하는 행사였다.
개교하여 수업을 시작한 한 달 뒤인 3월 25일에는 학력차가 심한 이들을 모두 함께 수용할 수도 없고 학생 수도 늘어나서 부득이 시험을 치루어 학력이 나은 이들을 2학년으로 하고, 2개 학년을 각각 갑을 조(甲乙組)로 분반(分班)하여 4개 학급으로 편성했으며, 뒤이어 4월 1일에 중등과정(中等課程)인 고등과(高等科) 1학급을 증설하게 되었다. 대창학원이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당에 한문(漢文)을 배우러 가던 소년들, 산에 나무하러 가던 초동(草童)들, 소 먹이러 가던 목동(牧童)들, 예천장(醴泉場) 보러 왔던 청년들마저 모여들어 개교 초의 교문 앞에는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성시(盛市)를 방불하게 했다고 한다. 예천군을 중심으로 영주(榮州), 봉화(奉化), 안동(安東), 문경(聞慶) 등 7개 군에서 배움에 불타는 12세로부터 30여 세까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교과목은 고등(高等), 보통(普通) 두 과(科)로 나누어 고등과에는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정도로, 보통과에는 보통학교(普通學校) 학령(學齡)이 초과한 자로 수용하여 보통학교 과정을 교수하였다.
개교 후에도 고등 보통 두 과의 입학 지원자가 정원 이외에 50여 명씩이나 초과되었을 뿐 아니라 학원을 찾아와 취학을 탄원하는 자가 매일 10여 명이므로 1922년
2월 26일에 향교 일부 건물인 명륜당을 예천유도회에 진정하여 대여(貸與)받기로 승락를 얻었다. 곧 명륜당을 수리하여 1학급을 증설하였으나, 수용생은 오히려 이로써도 부족하였다.
3. 학원 설립의 공로자들
대창학원(大昌學院)은 예천 사회의 청년 유지들의 발기와 희생으로 발족되었다. 그때의 청년회 간부였던 김석희(金碩熙) 선생을 기점으로 하여 김천 출신이며 예천공립보통학교 훈도(醴泉公立普通學校訓導)를 역임한 박원석(朴元錫) 선생, 그리고 당시 예천면장(醴泉面長), 금융조합장(金融組合長)이었던 정남섭(鄭南燮) 선생 등이 주동되어 그 때 1년에 두 차례의 춘추향사(春秋享祀) 이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예천향교(醴泉鄕校)를 활용하게 하여서 직책상 향교의 관리인이었던 당시의 예천군수 김병태(醴泉郡守金秉泰) 선생의 후원을 얻어서 학원이 출범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의 학원 구성은 학감(學監)에 박원석 선생과 후원회 책임자로 김석희 선생과 정남섭 선생 등이 있었고, 교사(敎師)로서는 곽기종(郭琪宗), 정수일(鄭秀日), 윤창근(尹昌根), 전홍열(全弘烈) 등 여러 선생이었다.
군수 김병태 : 후일 개성 부윤(開城府尹), 전북 지사(全北知事)를 지낸 분으로, 예천읍(醴泉邑)의 못을 매립하여 시가지 발전에 새 역사를 창조하였다. 당시 예천읍은 오늘과 같은 편편한 좋은 장소가 아니고 서본리 삼익수도(三益수道)에서 영주 통로 양편에만 집이 들어섰고 경찰서 문전까지 예천초등학교 교지(校地) 일대가 연못이었고, 남쪽도 굴모리에서 안동통로까지 거의 다 못이었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양쪽 못에서 연꽃이 만발하여 연못으로서 유명하였다. 이 못을 김병태 군수 노력으로 매립케 되었으니 삼익수도를 확장한 이범익 군수(李範益郡守)와 더불어 우리 예천의 역사에 길이 빛난 이들이다.
학감 박원석 : 전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前朝鮮日報主筆崔錫采)의 외숙(外叔)으로 김천 출신인데, 성격이 카랑카랑하여 학생에 대한 준엄이 있었고, 명령 일하(一下)에 학생은 물론이요, 선생들까지도 절대 경복(敬服)하였다. 탁월한 지도력과 능숙한 교수법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2대 학감 문하영(文夏永) : 박원석 학감 다음으로 대를 이은 선생은 온후하고 성실한 인격을 갖추었다. 선생은 사설 교육 기관에 대한 경찰의 간섭이 극심하여 학교 운영이 점점 궁지에 빠지고 학교에 대한 일반 사회인의 신뢰감이 식어질 무렵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오직 희생정신으로 학교 숙직실에 유숙(留宿)하면서 헌신 봉사하여 학교 명맥을 이어온 유공자이다.
원장 김석희(院長金碩熙) : 장대한 기골에 엄격한 자세이면서 너그러운 풍도를 보여주었다.
후원회 책임자 정남섭(鄭南燮) : 당시 예천면장, 금융조합장이었다.
교사 곽기종(敎師郭琪宗) : 선생은 후일 문경 김용사 주지(金龍寺住持)로 있어서 불교계에 헌신하였는데, 아담한 성격과 온화한 인정미의 소유자라 교수 방법이 능숙하였고 웅변가로서 교내 교외 신망이 지극히 두터웠다.
교사 정수일(鄭秀日) : 선생은 그 계씨 정수열(季氏鄭秀烈) 선생이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에 오래 교편을 잡아 우리 향토 교육에 이름을 남겼고, 정 선생은 근무 기간이 짧았지만 그 교수 방법이 전교에 첫째라 학생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았는데, 고향인 전라도에 다녀온다 하고 귀향한 뒤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교사 유창근(尹昌根) :
교사 전홍열(全洪烈) : 선생은 강원도 출신이었고, 퇴임 후 강원도에서 경찰관에
채용되었는데, 그 후 소식은 묘연하다.
교사 쓰끼오까(月岡南묘) : 선생은 일본인으로, 일본 북해도(北海道) 사뽀로 농과대학 출신인데, 학벌이 훌륭할 뿐 아니라 6척 거구(六尺巨軀)에 늠름한 체격으로 위풍이 당당한 지사형(志士形)의 인물이었다. 취임 후 열성이 지극하여 학교 환경을 일신시켜 자수(刺繡)로 지도, 괘도 등 교편물을 제작하여 학생들의 실력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므로 학부형들의 절대 지지를 받았고, 군내 거류 일본인 사이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서 있었으므로 학교 위신을 높이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선생은 옹졸한 일본인답지 않고 호걸스럽고 유쾌한 독특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제자들의 후일담(後日談)에는 꼭 한몫 끼이기 마련이다.
교사 권영달(權寧達) : 두드러진 실력가로 학생들에게 유달리 신망이 높던 선생은 평소에 별로 말이 없고, 단아하기만 하듯 낭랑한 음성으로 가르칠 때, 제자들에게 더할 수 없이 신성한 교직의 존엄을 느끼도록 하였다. 선생의 옥고(玉稿) <조선어문정체(朝鮮語文正體)>가 발간되었을 때, 제자들이 광고문(廣告文)을 써 가지고 서울 종로 거리에다 붙이러 다니던 일이 있었고, 불철주야(不撤晝夜) 학구에 그리도 진지하던 선생의 모습을 통해서 책을 들고 살고 싶은 오늘의 제자들 마음가짐이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교사 정종덕(鄭鍾德) : 일제 수난 속에서 끝끝내 대창학원(大昌學院)을 지키신 최후의 기사였던 선생은 "똑똑똑..." 자르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매끌어지 듯이 칠판을 메워 가던 그 깨알같이 잘고 정교한 글씨는 오늘까지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교사 이만녕(李萬寧) : 산북(山北) 모(某) 보통학교(普通學校)에서 일본인 교사와 싸움을 하고, 그곳을 그만 둔 뒤 대창학원으로 왔다는 선생은 사범학교의 정식 코스를 밟아 나온 쟁쟁한 젊은 선생이었다. 일제의 버림을 받고 있던 당시의 대창학원으로서는 모시기 힘든 분이었기에 학생들에게는 하늘같이 우러러 보였고, 천하 없는 우리 선생이라고 학생들이 자랑하기도 하였다. 찌렁찌렁 울리는 금속성 음성에 굽힘없이 땡땡하게 살아나가려던 젊은 패기가 있었다. 남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이 없이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 나가려던 선생은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인 성격과 인생관, 멋지게 살아가는 낭만주의 기질의 소유자였다.
교사 유근영(柳近永) : 선생은 중학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상해(上海)로 떠나자는 여운형(呂運亨)의 꾀임을 받고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사설 대창학원(私設大昌學院)의 선생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라고 추억담을 하곤 하였다. 가난한 가운데서 오히려 안연한 자세를 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보다 여유있는 마음으로 살던 선생의 성인군자다운 풍모, 항상 한적(漢籍)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고, 한문이라면 막히는 것이 없었다.
이상의 사실들은 학원 제1회 졸업생인 현석호(玄錫虎) 전 국방부장관, 학원 졸업생인 권동하(權東河) 전 도의원 부의장, 그리고 역시 학원 졸업생인 김경한(金慶漢) 전 교감 등이 <송대(松臺)> 창간호(1972)에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