廷泰公 墓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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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羅公 廷泰墓誌銘 (월송 황윤석)
此爲羅公廷泰之幽宅生於 (肅廟甲述卒於辛亥二月二十二日享年三十八)葬于沙器村敎官墓左庚座
之原字士宗生纔六歲遭先考喪依養於 仲父進士公受學於 季父新齋公學業早就年弱冠遊洛中
外鄕兪相公拓基甚爲愛敬乙巳 與贈叅議鄭揉進士洪允甫 從弟進士廷一 上疏討耉輝載見
辛壬錄妣兪氏早寡有疾至誠奉養 旣沒廬墓前配不侫從祖叅奉諱載重女 未及于歸歿于
正月二十九日合窆公墓左後配淸道金氏通德郞起澤女 大司憲璘玄孫後 丙午禮判兪公彦鎬啓達公之誠孝及
室金氏之烈行 贈淑夫人以享年九十三依法典也庚戌正月五日歿年九十七墓附右 考諱炳奎奉直郞
祖諱世器內侍敎官 曾祖諱俊宣陵叅奉高祖諱海鳳禁火司別提卽高麗名臣諱富之後本
祖巨卿諱公彦翰林諱昶 皆其先而僉樞杞溪兪命顯其外祖也 有子得綸孫學愼曾孫性裕性彦餘幼不記銘
曰 天何速奪未得不惑孝友學問 庶幾成德討凶一疎照朗一國如非淑人難保宗脉有一孝子其果不食
大統餘分三庚戌我 聖上十四年(1982년보 p631)
2011년 신묘보 3권 613p
通德郞羅公廷泰墓誌銘(통덕랑나공정태묘지명)
글/ 越松 黃胤錫
번역/ 나천수
此爲羅公廷泰之幽宅也(차위나공정태지유택야)/이곳은 나정태가 잠들어 있는 유택이다.
生於肅廟甲戌(생어숙묘갑술)/숙종 갑술년에 태어나
卒於辛亥二月二十二日享年三十八(졸어신해이월이십이일향년삼십팔)/신해년2월22일 향년 38세로 돌아가
葬于沙器村敎官墓左庚座之原(장우사기촌교관묘좌경좌지원)/사기촌에 장사 지냈는데 교관 묘(溪齋 世器)의 좌측으로 경자지원 방향이다.
字士宗生纔六歲遭先考喪(자사종생재육세조선고상)/字는 士宗이요 태어난지 겨우 6세만에 아버지를 여의는 喪을 당하였으며
依養於仲父進士公(의양어중부진사공)/중부 진사공(水月軒 燦奎)에 의탁하여 자랐다.
受學於季父新齋公(수학어계부신재공)/학문은 계부 신재공(新齋 炯奎)에게서 받았으며
學業早就年弱冠遊洛中(학업조취년약관유락중)/학업을 일찍이 성취하여 나이 약관에 서울에서 취학하였으며
外鄕兪相公拓基甚爲愛敬(외향유상공척기심위애경)/외가인 재상 兪拓基가 매우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乙巳與贈叅議鄭揉進士洪允甫(을사여증참의정유진사홍윤보)/을사년에 증 참의 鄭揉와 진사 洪允甫와
從弟進士廷一上疏討耉輝/종제 진사 廷一과 더불어 상소하여 趙泰耈, 柳鳳輝를 꾸짖었는데
載見辛壬錄(재견신임록)/신임록에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妣兪氏早寡有疾至誠奉養(비유씨조과유질지성봉양)/어머니 유씨부인은 일찍 과부되었으며 병이 있음에도 지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旣沒廬墓前配(기몰려묘전배)/이미 죽은 전부인의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不侫從祖叅奉諱載重女(불녕종조참봉휘재중여)/나의 종조부인 참봉 재중의 따님으로
未及于歸歿(미급우귀몰)/미처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기 전에 죽었는데
于正月二十九日合窆公墓左(우정월이십구일합폄공묘좌)/정월29일 公의 묘 좌측에 합장하였다.
後配淸道金氏通德郞起澤女(후배청도금씨통덕랑기택여)/ 후배 청도김씨는 통덕랑 起澤의 따님으로
大司憲璘玄孫後(대사헌인현손후)/대사헌 璘玄의 후손이다.
丙午禮判兪公彦鎬啓達公之誠孝及室金氏之烈行(병오예판유공언호계달공지성효급실금씨지열행)/병오년에 예조참판 유언호가 공의 효성과 室 김씨부인의 열행을 임금께 아뢰어
贈淑夫人以享年九十三依法典也(증숙부인이향년구십삼의법전야)/숙부인에 증직 되었는바 향년 93세 때 정해진 규정을 따른 것이다.
庚戌正月五日歿年九十七墓附右(경술정월오일몰년구십칠묘부우)/경술 정월 5일 나이 97세에 돌아가 공의 묘 우측에 합장하였다.
考諱炳奎奉直郞(고휘병규봉직랑)/아버지는 봉직랑 병규요
祖諱世器內侍敎官(조휘세기내시교관)/할아버지는 내시교관 세기요
曾祖諱俊宣陵叅奉(증조휘준선능참봉)/증조 할아버지는 선능참봉 준이요
高祖諱海鳳禁火司別提(고조휘해봉금화사별제)/고조 할아버지는 금화사 별제 해봉이다.
卽高麗名臣諱富之後(즉고려명신휘부지후)/곧 고려 명신 富의 후손으로
本祖巨卿諱公彦(본조거경휘공언)/조선 조에 큰 벼슬을 한 公彦과
翰林諱昶皆其先(한림휘창개기선)/한림 昶은 모두 그 선조이다.
而僉樞杞溪兪命顯其外祖也(이첨추기계유명현기외조야)/첨추 기계유씨 유명현은 외조부가 된다.
有子得綸孫學愼曾孫性裕性彦(유자득륜손학신증손성유성언)/아들은 득륜, 손자는 학신, 증손자는 성유, 성언이 있다.
餘幼不記(여유불기)/나머지는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銘曰(명왈)/묘지명에 이르기를
天何速奪未得不惑(명왈천하속탈미득불혹)/ “하늘이여, 어찌 40세 불혹이 되기도 전에 빠르게 죽게 하였는가.
孝友學問庶幾成德(효우학문서기성덕)/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부 하였으니 바라건대 덕을 이루어
討凶一疎照朗(토흉일소조랑)/한 번의 상소로 흉적을 꾸짖어 밝고 환하게 하였으며
一國如非淑人難保宗脉/(일국여비숙인난)/이 나라에 숙인이 아니었더라면 종맥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인데
有一孝子其果不食(유일효자기과불식)/한 효자가 있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가.”
大統餘分三庚戌 我聖上十四年 /명(明)나라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한 나머지의 세 번째 경술년, 우리 성상(정조) 즉위 14년(1790년)
<해설>
○遊洛(유락)은 서울에서 놀다, 서울에서 취학하다 란 뜻
洛은 낙양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조선의 한양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外鄕(외향)은 외가
○耉輝(구휘)는 趙泰耈, 柳鳳輝을 지칭 함.
○辛壬錄(신임록)은 조선 순조대의 문신인 趙秉鉉(1791-1849)이 신임사화(1721-1724)의 전모를 기록한 책이다.
내용은 신축년 8월 정언 李廷의 建儲를 청하는 상소로부터 시작되어 편년으로 기록되었다. 노론대신들이 건저를 주도하여 延仍君을 世弟로 세우고‚ 이어 柳鳳輝가 건저과정을 문제 삼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趙泰耉 등이 이를 옹호하고 나서 격화되는 노소론의 분쟁‚ 世弟代理를 둘러싼 파문‚ 같은 해 12월 金一鏡 등이 노론 4대신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듬해 睦虎龍의 고변사건으로 노론이 대거 축출되었다가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어 소론 주도의 정국이 일단락 되게 되고 노론정권이 성립하는 시기까지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노론의 입장에서 관련 기록을 시간 순으로 엮은 것으로 객관성이 결여되긴 하였으나 18세기 정치사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 만한 자료이다.
○“종제 진사 廷一과 더불어 상소하여”에서 대동보 廷泰 소개란에 보면 煥一로 오기 되어 있다.(대동보 558p)
○외가인 재상 兪拓基의 뜻은
아버지 炳奎의 配가 恭人 杞溪兪氏 僉樞 命顯의 따님이다.
○不侫(불녕)은 자기를 낮추는 말, 여기서는 황윤석 자신을 낮추는 말임.
○于歸(우귀)는 신부(新婦)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감
○“未及于歸歿/미처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기 전에 죽었는데”을 음미해보자.
옛날 우리나라 결혼 풍습은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은 전혀 상면치 않고 오직 부모들 끼리 만나 혼담을 하여 결혼을 정하고 사주단자를 주고받는다.
이것은 이미 결혼이 내부적으로 성사된 것이다.
신부가 아직 시집에 들어오기 전에 신랑이 죽었다고 하여 평생을 시집에 들어와 청상과부로 살았다는 節婦任氏行狀, 孝烈婦洪氏行錄에서 보았듯이 반대로 신부가 시집에 들어오기 전에 죽었어도 시집의 귀신이 되어 맺어진 신랑의 묘 곁에 묻혔던 것이다.
○室 김씨부인에서 室과 配의 차이
족보기록을 보면 부인에게는 실 또는 배가 따른다.
족보를 만들 당시에 살아있는 부인은 室로 쓰고, 이미 죽은 부인은 配로 쓴다.
이 글을 쓴 당시 청도김씨가 살아 있었으므로 室로 쓴 것이다.
○庶幾(서기)는 바라건대,
○果不食(과불식)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말한다.
석과불식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물건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박괘(剝卦)는 초효(初爻)에서 오효(五爻)까지 모두 음효(陰爻)이며, 단지 상구효만이 양효(陽爻)로 되어 있는 모습이, 과일나무 꼭대기에 큰 과일이 하나가 맺혀 있는 형상과 같은 데서 온 말이다. 《周易 剝 程傳》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6월 11일 (정축)
신축년(1721) 建儲 때에 의혹과 분노를 크게 일으킨 柳鳳輝와 李光佐 등의 치죄를 청하는 鄭楺 등의 상소
生員鄭楺· 進士洪允輔, 進士羅廷一, 幼學羅廷泰·羅炯奎·羅廷軾
첫댓글 대동보 1권 p631에서 移記 했는데 눈알이 으르르릉 합니다.
정태공할아버지 생몰년 1694~1731 (청도김씨 할머니 1694~1790)남편보다 60년을 더 사셨기에 壽직을 받음
묘지는 사기촌 계재공 옆에 있음
평해황씨 황윤석(1729~1791)은 고향이 고창으로 정태의 配의 친정 조카이며.渼湖(김원행)의 제자다, 윤석의 증조부들 (황세기, 황세정)과 계재공,송간등과
우암의 수제자이며.서로 양가를 드나들면서 어린아이때부터 윤석을 보았고, 그런 친의가 있어 혼사가 있었던걸로 추정함,
정태공과 여흥의 민진오는 동서지간임, 평해황씨인터넷족보 확인함
外鄕兪相公拓基甚爲愛敬(외향유상공척기심위애경)/외가인 재상 兪拓基가 매우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유척기의 6대조 따님이 (병규)의 配임
형규공의 동갑나기 친구이며 계재공의 行狀을 지음
상철오빠님!
청도김씨 할머니가 경술1790년 1월5일 97세로 돌아가시자 , 황윤석이 고모부인 정태공 묘지명을 니재공과 성유가 같이 썼다면 이 기록이 정확 할 것같네요....
有一孝子其果不食(유일효자기과불식)/한 효자가 있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가.” ......니재공 청탁을 받았겠죠
從第進士廷一上疏討耉輝/에서 제가 이기하면서 오기가 있었네요 (弟.아우제)로 수정 합니다.(눈알이 벌겋도록 보았는데......ㅋㅋㅋㅋ.
정일은 대동보에도 從弟간으로 되어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죽은( 평해황씨 아버지) 황재중에게 송간공이 詩를 지어준 2수가 세고집p357에 있다.
2011년 발행본 3권p613에 번역되었음
'이 글을 쓴 당시 청도김씨가 살아 있었으므로 室로 쓴 것이다"....에서 유언호가 청도김씨가 93세때 임금께 아뢰었다는말
청도김씨 할머니가 1790년 1월 5일 죽은 후에 황윤석이가 정태공 묘지명을 쓴것임 .
니재공이 신묘년 (1771)17세 때 고창 흥덕 조모 황씨 묘소를 성묘 한것을 보면 (정태:1694~1731)인데, 정태공 사후 41년 이후에 사구실로 이장한것으로 보인다..
泥齋遺稿卷之四(니재유고권지사)世系-5 기록에 의하면
辛卯 十七歲 八月省前祖母黃氏墓於興德壽山 從翊贊戚叔公 徹錫 學十月還(신묘 17세 팔월 성전조모황씨묘어흥덕수산 종익찬척숙공 철석 학십월환)/신묘년 17세 8월에 전 조모황씨의 묘가 흥덕 수산에 있는데 성묘하다
"後配淸道金氏通德郞起澤女(후배청도금씨통덕랑기택여)/ 후배 청도김씨는 통덕랑 起澤의 따님으로"
족보에는 麟相의 따님임 기택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