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되새김글
아! 옛날이여, 아득한 그리움이여, 내 젊은 날의 추억이여!!
남평! 산포! 다도! 드들강! 원효대산! 느티나무!
천년 목사골의 한 축을 담당했던 남평! 남쪽의 너른 땅들이 많아서였을까. 그 이름처럼 베이비붐 세대의 우리는 그렇게 중학시절을 보냈다. 배 고프고, 먹을 것 없고, 가난이 너무 자연스러웠던 시절, 청운의 꿈과 희망을 품었던 남평중학교. 여러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친구들의 낯섬과 우정, 무섭고 어려웠던 선생님들과 생활은 희노애락이 가득했었다.
오래된 느티나무과 낡은 건물. 8개반의 500여명의 학생. 그리고 엄격했던 남녀 분반. 쪽지 시험과 월말고사. 그리고 복도에 성적 공개. 경쟁자이면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어느 친구는 공부에, 어느 친구는 청춘 사업에 빠져 3년의 세월을 의미있게 보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었던 그 시절, 공부보다는 집안 일을 도와야 했고, 또는 일을 했어야 했던 우리 세대는 엄청 불운아였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주변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던 아쉬움은, 지금은 너무나 크다.
읍내에 거주하는 남평초 아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남평동초, 산포초, 산포남초 아이들은 읍내의 학교를 다니기 위해 자전거 통학을 해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자 아이는 물론 여자 아이들도 자전거를 자유자재로 묘기를 부릴 정도의 싸이클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신작로, 비포장 도로 위에서 청소년의 시절은 영글어 갔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학급인원수는 60여명이 넘어갔고, 선생님들의 수업 또한 강의식 수업이 전부였지만 열심히 배우고 익혔던 그 시절은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시험을 보고 나면 틀린 점수만큼 맞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많이 때리고 맞은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유난히 체벌을 했던 선생님들이 기억에 사라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불문율을 깨고 그 사이에도 쪽지도 오가고, 또는 읍내 튀김집에서 짝을 찾아 삼만리 했던 친구들도 없지 않았다. 남평 읍내 아이들은 산포까지 정을 가서 젊음을 만끽하곤 했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랑과의 전쟁을 지금과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만 모르고 친구들 사이는 다 알고 있는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추억임예랴!(당사자들의 충격 고백이 있기를!?)
그리고 광주로, 나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삶을 살아갔다. 세월이 흐르고, 결혼을 하고, 생업을 이루고, 일가를 이루었다. 삼삼오오, 계모임도 꾸려졌다. 초등학교별로 연락을 하고 우정을 쌓아나갔다.
졸업 30년, 감회가 새롭다. 이제 우리들 자식이 그 시절의 나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 친구는 사업가로, 교사로, 공무원으로, 자영업으로, 전업주부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 또한 많은 추억들이 있다. 이제 그 추억을 같이 나누며,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500여명의 친구들! 못할 것이 없는 인원이다. 서로 힘이 되어주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또한 추억을 더 만들어가자. 내 그리운 친구들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첫댓글 더 재미난 추억담을 기다립니다. 특히 아련한 첫사랑을 간직한 친구들의 솔직담백한 야그들이 많이 올라왔으면 조우커타~!@!@!@)
내 그리운 친구들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참으로 가슴뛰게 하는 말이구만~~~, 그옛날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학교다니던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