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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7대 승지공 조준남, 18대 선전공 조계선 부자(父子) 쌍절각(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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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대 선전공(宣傳公) 조계선(趙繼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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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1570년(경오년) 조선 선조임금 3년 9월 2일,
(卒) 1627년(정묘년) 조선 인조임금 5년 1월 14일 순절(殉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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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조씨(咸安 趙氏) 13충(十三 忠)의 한 분 *
* 壬辰之亂 子 繼先 從 郭忘憂堂 倡義兵 參謨 樹勳 - 見 火旺城 倡義錄
- 전거: 함안조씨 참판공파보 권1, 首編<단기 4291년 무술석인(戊戌石印)> 제3편 續言行錄p29.
* 壬辰之亂 子 繼先 從 郭忘憂堂 倡義兵 參謨 樹勳 - 見 火旺山 倡義銘
- 전거: 함안조씨 사과공파보/ 언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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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본관은 함안(咸安), 휘(諱)는 계선(繼先)이요,자(字)는 효백(孝伯)이다,
함안조씨 중시조 정절공 휘(諱) 려(旅) 어계선생의 증손자이신
함안조씨 원파 中 9번째 문파인 집의공파 파조이신 집의공 휘(諱) 삼(參) 무진정선생이
공(公)의 고조부요, 증조부는 현감공 정균이며, 조부는 생원공 휘(諱) 물(勿)이고,
부친은 승지공 휘(諱) 준남(俊男)이며, 모친은 이경성(李景成)의 따님이다.
1570년(경오년)선조임금 3년 9월 2일에 계선, 술선 두 아들 中 장자로 태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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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체구가 크고, 침착하여 말이 적으며,
재주가 있고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자라면서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괴위(魁偉)하여 궁마(弓馬)를 익혔다.
1603년(계묘년) 선조임금 36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국가의 무인으로써 절개를 다 하려 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공(公)께서는 낮은 직에 있다가,
얼마뒤 광해군의 혼탁한 정치에 실망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사람들이 혹 벼슬을 권하면 곧 탄식하면서
"나는 나라가 무도하면 녹(祿)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들었는데,
이 때가 어찌 대장부가 벼슬할 때냐 ?"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 집안이 대대로 충효를 하여 절개와 의리를 물려받으니,
오직 바라건데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여러대를 거쳐 쌓아 내려 온 덕(德)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나머지 공명을 얻지 못하여도 근심이 없다" 하셨다.
그러나 1623년(계해년)인조임금 원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 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선전관에 제수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 때
구성부(龜城府)가 적에게 함락되어
그의 처남인 중군(中軍) 이윤서(李胤緖) 가 포위되자
원병으로 파견되었는데, 이윤서가 그가 도착하기 전에
적의 포위망을 뚫고 원수 장만(張晩)의 수영(帥營)에 돌아와
적장을 죽이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자결하였다.
뒤 늦게 이윤서의 시신을 거두어 복명하였으므로
그 행동이 느린 것에 대하여 유사(有司)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곧이어 명나라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선천에 진(陣)을 치고있자,
조정에서 이를 우환으로 여겨, 이완(李莞)을 의주 부윤으로 보냈는데,
이완(李莞)은 서찰로 공(公)을 청 함으로써
공(公)은 군무(軍務)에 참여하여 같이 의논(議論) 하였다.
1627년(정묘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정월 13일 저녁 서풍(西風)이 크게 성하였다.
창성에 있는 적이 기습하므로 모문룡군이 밤에 쳐들어 올까하여
방비를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14일 새벽에 호병(胡兵)의 공격이 급박(急迫)함을 알았으나,
성(城)은 위기일발에 놓여있고, 고립된 아군의 구원조차 끊어졌다.
공(公)과 부윤 이완은 지방관리, 장수들과 같이 소속부대를 이끌고,
일선에 먼저 나아가 장병을 독려하며, 앞서서 용기를 내어 적을 쳤으나
관군은 적에게 패하고 말았다.
공(公)은 그리하여도 힘차게 활을 버티고 번갈아 쏘아대니
적이 크게 놀라 주춤거리다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무릇 세번이나 계속되던 중 적은 날카로은 창을 총동원하여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하여 쳐들어 왔는데 적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그러나 화살은 다 떨어지고, 힘을 다 하여 싸웠으나,
판관 최몽호와 같이 이날 역전(力戰)하시다가 전사(戰死)하셨다.
의주부윤 이완도 역시 불에 타 자결 하였다.
때는 1627년 (정묘년) 인조임금 5년 정월 14일이였으니 향년 58세이셨다.
공(公)의 부친 승지공 휘(諱) 준남(俊男)께서는
1597년(정유년) 선조임금 30년 정유재란때
적이 쳐들어와 증조부 집의공 묘(墓)를 발굴하자,
적진을 뚫고 들어가 흙으로 관(棺)을 덮으니 적이 위협하는바
승지공께서는 "선조의 묘소를 무단 발굴하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하시면서
무진정에서 차고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자결하시었다.
1706년(병술년) 숙종임금 32년에 사적(事跡)이 보고되어
숙종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부친 승지공 휘(諱) 준남(俊男)과 함께
부자 정려(旌閭)를 명(命)하여 함안에 부자 쌍절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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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재선생(許性齋 先生)의 기문에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있어 제일 큰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욕심은 무릇 사람이 살고자 하여
죽음을 피하는 일은 누가 못 하리요 마는
그러나 성인도 죽고, 어진 사람도 죽고,
용맹한 사람도 죽고, 힘 있는 사람도 죽게되니
죽음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면치 못 한다.
그런데 욕심이 사는 것보다 심하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 하여
그 욕심의 심한 것과 싫어하는 것의 심함을 알아
그 구별을 하기를 못을 끊고 쇠를 끊음과 같이 결단할 수 있으나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취하는 일은 사람마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오직 천지의 정기(正氣)를 얻어 인의의 본성을 양성하는자,
억만명 중에서도 몇을 헤아릴수 없고,
천리내에도 견줄 사람이 없고,
백세(百世)에도 뒤 따를 사람이 없다.
함안조씨 일문 13충은 천지의 사이와 고금을 통하여 드문 일이다.
오호라 ! 단종때 절개를 다한 려(旅) 호(號) 어계는
사람들이 고죽(孤竹)의 풍도가 있다하여 서산서원에 제사를 올렸다.
그 후에 본손, 지손들이 서로 이어 남만(왜란을 말함),
북호(정묘, 병자호란을 말함)의 전란에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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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1706년(병술년) 숙종임금 32년에 정려가내려졌고,
1854년(갑인년) 철종임금 5년에 병조참의에 추증 되였으며,
1868년(무진년) 고종황제 5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兼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으로 가증(加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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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노복(奴僕)이 의주로부터 돌아 와
본가(本家)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부음을 공(公)의 본가에 전(前)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전사한 일을 말하기를
" 주인이 죽은 날에 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랐으리오
그러나 주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기일(忌日)조차 전하지 못할까 생각하여
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부자(夫子=주인을 말함)를 위난(危難)에서 구출하지 못하였으니
집에 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면서 강(현재: 검암천)에 투신 자살하였다.
충노(忠奴) 가 또한 충신(忠臣) 집에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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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분묘(墳墓)는 함안군 법수면 황사리 두배 토현 을좌(乙坐)에
배위(配位) 증(贈) 정부인(貞夫人) 남평 문씨 분묘(墳墓) 실전(失傳), 4월 21일별세(忌日: 4월 20일).
배위(配位) 증(贈) 정부인(貞夫人) 강양 이씨 분묘(墳墓) 9월 24일 별세(기일: 9월 23일)와 합폄으로 모셔져 있다.
슬하에 딸셋과,
의중(義重), 예중(禮重), 지호(之瑚), 신중(信重), 임중(任重) 다섯아드님을 두셨다.
충노(忠奴) 대갑(大甲)의 비(碑)는 무진정(無盡亭)입구 부자 쌍절각 옆에 세워져 있다.
<密菴文集, 咸案邑誌 咸安趙氏 大同譜, 咸安趙氏 十三忠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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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전공(宣傳公) 묘갈명(墓碣銘) *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잃을 때를 당 하여, 어계 조공 려(旅)같은 이가 있어,
청풍고절로 백대의 이름을 세웠고,
4세를 지나 소격서 참봉 준남에 이르러는 의리상 왜적과 함께 이 세상 하늘아래
머리를 같이 할수없다 하여 적의 흰칼날을 달게 받아 죽었으며,
그 아들 선전공이 또 부장(副將)으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받치고,
서방 국경에서 순절(殉節)하여 전후 100년간에 3절의 빛이 한 집안에 모이니
아아 ! 위대하다.
비록 예전에 변성양, 장문중 집인들 또한 어찌 이보다 더 하리오,
참봉공이 재령이씨 증 병조참판 경성(景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으니
휘는 계선이요, 자는 효백이며, 그 관직 등급과 문벌 세계(世系)는
이미 참봉공 묘갈비에 다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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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나이 5, 6세때 뭇아이들과 놀이하여 놀면서
우는 까마귀를 쏘아 땅에 떨어진 것을 발을 묶어 집에 들어와 이르기를 ,
사람을 우하여 악성(惡聲)의 소리를 내는 물건을 제거(除去)하였습니다. 고 하니
참봉공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차츰 자라서는 뜻이 크고 침중하여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말타는 일과 활쏘는 일을 익혀
선조 계묘(1603년)에 무과에 급제하고는 벼슬에 오르지 아니하였는데,
목릉(穆陵)선조가 승하하고, 얼마 안되어 더러 벼슬을 권하면
곧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 들으니 나라에 도(道)가 없으면 녹(祿)이 부끄럽다고 하니,
어찌 대장부 그를 쫐아 벼슬할 때인가고" 개탄하다가
인조반정이 미치어 비로소 선전관을 배수하고,
명년 갑자(甲子)에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관서(關西)에서 반란함을 알고,
구성부사 이윤서가 중군(中軍)으로 적의 병영에 있음을 알고,
장만 원수가 윤서는 반드시 적을 따를 사람아 아니라 하고 조정에 청하여
공을 보고 달려가 함께 데리고 올 것을 부탁하니
추측컨데 윤서는 공의 처남으로 뜻이 서로 합하기 때문이다.
공이 이른즉 윤서는 여러 동지들과 비밀 약속하고,
5000기병을 거느리고, 밤에 적진을 무너트리고, 탈출하여 굶은지 이미 7일이였다.
원수(元帥)를 보고는 피를 토하며 울면서 이르기를,
장군을 위하여 적을 베지 못하고, 적을 멀리 몰아 쫐지도 못 하였으니
임금을 위하여 보은할 면목이 없다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뜻을 보였다.
공(公)은 이미 시체를 수습하고, 돌아와 복명하니
유사(有司)는 시기가 늦다는 이유로 벌주어 귀양보낼 것을 논정하였다가
명년에 마침 풀려나니 이때 적장 모문룡이 진을 가도로 부터 선천으로 옮기니
좋은 뜻을 볼수없어 조정이 근심하여 이완을 의주부윤을 선임 차출 하였다.
완이 평소 공과 친하여 막료(幕僚)로 불러 군기(軍器)를 관장하게하고
주야로 병사(兵事)에 관한 작전 계획을 도모하다.
하루는 해질무렵 창졸이 서쪽으로부터 폭풍이 일어 적을 경계함이 매우 급하였다.
완이 생각하기를 적장 모군이 야경하여 수비를 엄하게 할 뿐이라고 여겼는데
이튿날 아침에 비로소 적임을 알고 여러 장수 힘써 싸웠으나
성은 고립되 후원병은 끊겨, 전세가 약세하니 어찌 할소냐.
공이 이웃 수재(守宰)와 변장(邊將) 10여명으로 각각 거느린 병력을 이끌고
선두 분격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으나,
화살은 다되고 힘도 빠져서 죽고 성도 드디어 함락되었으니
이때가 인조(1627년) 정묘 정월 14일이다.
적의 창칼날 예리하여 열군(列郡)이 와해(瓦解)를 당하고도
군대를 거듭 옹호하면서 앉아서 보는이 서로 둘러섰다.
이에 패전 불만을 품은 쇠약 병사(兵士)만여명은 위험에 다달아
어려움을 밟고 죽어도 후퇴를 안하며 달게 몸은 죽어 초야의 기름진 거름이 되었으니
이 어찌 임금을 위한 일을 가질바가 아닌가
특히 그 충절은 분울(憤鬱)중에 왕성 하였고,
하고자 하는 바가 살기보다 더 심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이와같이 사람을 가히 열렬한 대장부라고 아니 부르겠는가.
선조 3년 경오(1570년) 9월 2일은 공의 생년월일 이 되니,
향년 58세에 수지(壽止)가 되었다.
남겨준 옷과 머리를 맡아서는 군 북쪽 대산(지금의 법수) 두배촌 뒷산에 장사하고,
유명(遺命)으로 이부인(李夫人)을 부장 하였다.
공이 두번 장가들어 전부인 문씨는 모관 모(某)의 딸이요, 관찰사 득의 손녀이다.
후부인 이씨는 증(贈) 숭정대부 판돈녕부 겸 판의금부사 천수의 딸로 5남을
낳으니 의중, 예중, 지호, 신중, 임중 5형제로 다 장후(長厚)하여 도량이 있어
사람들이 아버지 기풍을 가졌다고 하였다.
딸 3형제로 사위는 이사원, 강전, 이위남이요,
손자는 수, 유, 부는 의중의 아들이고,
전은 예중의 아들이며, 연은 지호의 아들이고,
오는 신중의 아들이며, 염, 운은 임중(任重)의 아들이다.
공은 바르고 곧은 성품으로 관용으로 일을 처리 할때나
타인과의 교섭 교제에 한결 성신(誠信)으로 주장 삼았다.
일찌기 친지가 시관(試官)을 관장하였는데,
홍지(紅紙) 한장으로 공의 아들을 사사로이 과거에 합격시키고자 하거늘
公이 발끈 화를 내어 말하기를
출세는 임금을 섬기는 일이며 속이지 않음을 먼저 할것 인데도
인연으로 남 모르게 과거에 합격함은 임금을 속이는 일이 아닌고하니,
그 사람이 얼굴을 고치고 부끄러워 하며, 사과 하였다고 한다.
그 관서 군막에 부임하며 이미 두메 벽촌 변방에는 두려움이 많음으로
머리털과 속옷을 부인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부인과 같은 무덤에 묻으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 생전에 죽음을 정하여 마음을 편하게 할수 있었으니
어찌 창졸히 죽음을 결정한 것과 같겠는가.
숙종 조정에 이 일이 들려 정려를 내렸으니 또한 참봉공 묘갈명에서 보겠다.
명(銘)에서 이르기를
아들의 효(孝)와 신하의 충(忠)은 천륜의 으뜸인즉 어찌 외부로 말미암아 녹을소냐.
사람이 본디부터 있은 정의 구멍 문 한번 열면 이해가 앞에 얼켰네.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 불효하면 누가 그 천유(天有)를 온전히 할 것이냐.
위대한 공의 가문 대대로 전대(前代) 사람 계승하여 그 미덕 완성하니,
비록 옛 사람인들 누가 더 할소냐,
관서(關西) 국경 멀고 머나 넋은 돌아오고, 화살은 다시갔네.
절개어린 비석에 비명(碑銘) 밝히니 이에 자손 경사 돈독하리로다.
<密庵(밀암) 李裁(이재) 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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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野史 *
북풍에 살을 에이고 !
선전관 휘(諱) 계선(繼先),
산천에 겹겹이 쌓인 강풍에 눈이 얼려 보오얗게 천지가 아우성 치는 모질게 추운 이른 새벽 !
단기(單騎)의 군마가 북쪽 땅 얼어 붙은 들을 쏜살 같이 달리고 있다.
나란히 모은 앞,뒤 말 발꿉이 마치 땅위에서 날으는 듯 표망한 들을 순식 간에 가로 건넜다.
이제 작은 내를 뛰어 넘으면 좌우 아름 드리 소나무가 가득 선 산 길로 접어 든다.
" 이 잇 " 마상(馬上)의 기수가 또 채찍을 휘둘렀다.
무거운 갑옷에 투구를 쓰고, 등에는 강궁과 전통, 허리에는 장검을 찼다.
더구나, 헉 ! 헉 ! 가쁜 숨결 속에서도, 부라리는 호기는 불을 뿜을듯 사나왔다.
만약 앞에 적이 있다면 단숨에 무찔러 버릴 범상치 않는 기세다.
이곳은 조선을 지키는 서북의 최전선 싸움터다.
비록 혼군 광해군에 이어 인조임금이 위에 있었으며,
이곳은 나라와 겨례의 터전이니 한시라도 방심할수 없다.
평안도 의주고을에서 동쪽으로 불과 20여리 떨어진 곳 마상의 기수는 용장 조계선 이다.
<히 힝> 외마디 소리와 함께 군마는 내(江) 의 폭보다 곱이나 넘게 뛰어 넘었다.
이제 눈 앞에는 울창한 수림으로 뒤 덮힌 험준한 산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수는 말고삐를 당기지 않았었다.
바로 이때다, 기수는 머리에 썼던 투구를 벗어 땅 바닥에 일부러 떨어 뜨렸다.
그 것이 달리는 말의 속도에 따라 여러 바퀴 딩굴다가 눈속에 묻혀 버린 순간
" 야 잇 !" 말위에서 기수가 뛰어 내렸다. 군마는 주인을 잃은 채 그대로 달려 갔으나
기수는 몸을 돌이켜, 50여보 뒤로 되 돌아와, 아까의 투구를 찾아 썼다.
이미 수림속에 자취를 감춰버린 군마(軍馬)와 기수 사이는 순식간 이지마는
벌써 10여 마장의 차이, 기수는 군마의 뒤를 쫏았다.
그 것은 범상한 사람의 짓이라고는 볼수 없으리 만치 나는 듯한 빠른 동작이였다.
투구와 갑옷과 병장기의 무게도 스스로의 몸 보다 가볍지 않을 것이다.
잠시후 군마와 기수 사이는 불과 촌보로 줄어 들었다.
바로 이 찰라 ! 기수는 나는 듯이 마상에 뛰어 올라 말고비를 잡았다.
이것은 적의 창칼이나 화살에 투구를 잃었을때나 낙마 했을 때를 위한 익힘인 것이다.
조계선은 이 처럼 말 타기에 비상한 재주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에도 명궁으로 당대에 어깨를 겨룰 자가 없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강 하면서도 빗 나가는 법이 없었다.
용장 조계선 그는 함안 태생으로 어릴때 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 하였다.
전란으로 인하여 이미 부친을 잃고 아우 술선를 데리고
산과 들이 피바다로 화(化)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란통에 목숨을 건졌다.
거침없이 휘 두르는 왜병의 창칼 아래 흰옷을 입은 계레의 동족들이 수없이 쓰러지고
길이 자랑하던 금수 강산이 놈들의 험한 말발꿉아래
무참히 짓밟힘을 젊은 그의 눈은 똑똑히 알 것이다.
눈에 피가 고이고, 가슴속에 뭉클한 덩어리가 맺혔다.
그 것은 굽히거나 삭지않는 반발이요, 서릿발 치는 칼날보다 무서운 투지였다.
< 내 목숨 다 할때 까지 기필코 원한을 풀리라> 다지고 또 다진 웅지는 철석과도 같았다.
계묘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혼조를 만나 두문불출 하다가, 선전관의 중임을 맡았다.
[뜻은 이미 스스로를 위하여 있음이 아니라, 나라와 계례를 위하여 있었다.] 맡은 일에
지성을 기울여 침식을 잃었고, 이루어진 일의 무게는 남의 몇 갑절 넘었다.
천하의 드문 용장- 이 것은 조계선를 가리켜
문무 백관이나 계레들이 늘 입에 담는 그대로의 칭송 이었다.
더구나 몸집은 7척 장신 인데다가 열근 고기에 두 말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도, 미란(迷亂) 하는 법이 없었다.
후에 의주부윤 이완의 추서를 받고, 국경의 최전선 의주 변방에 나온지 엊그제 !
지금 변방은 호군의 암울한 어두운 먹구름이 강풍이 되어
조야로 당장 침범을 당할 위험에 눈에 보이는데 ''''
< 에잇 ! 돌아가자 > 또 얼마를 깊은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던
기수 조계선은 비로서 말 머리를 돌렸다.
좌우에 작은 짐승이 나는 앞에 날 짐승들이 간혹 눈에 띄어도 구태여 강궁을 당기지 않았다.
그야 마음을 내키면 순식간에 수십을 잡을 것이었으나,
툭 트인 속심처럼 소(小)를 취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비교적 내리막인 산길을 느린 걸음으로 바꾸어서 인마가 서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자 들판에 내려서 부터는 다시 무서운 채찍이 군마의 뒷등에 사정없이 날아 들었다.
아랫목 에서도 으시시 몸이 오그라드는 삭풍 속의 이른 아침,
푹 땀에 젖은 인마(人馬)는 넓은 들판을 가로 나는 듯 달렸다.
임진 왜란, 정유재란이 남기고 간 상처로 이땅, 이 계례의 숨 마져 돌리지 못한채,
또 생지옥 같은 아우성이니 언젠가는 기어이 참혹한 꼴을 당할 것이 아니더냐 ?
이곳 국경의 최전선 의주 성(城)을 지키는, 이완과 조계선 이하 모든 장병들은
일기 당천의 정혼 들이요, 방패가 될 나라의 보배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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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대이후는 다음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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