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을 판 천재기술자 기업가
"전후 일본에서 진짜 '물건'을 만든 사람은 혼다 소이치로와 소니의 이부카 마사루, 이 두 사람뿐입니다. 나머지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조직이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은 도큐 그룹의 창업자이자 일본 상공회의소 소장이었던 고토 노보루가 한 것이다. 또 1992년 생산기술연구원이 주관한 한일산업기술교류회의에서 마키노 노부로 미쓰비시 종합연구소 상담역은 이렇게 말했다.
"기초과학의 노벨상 수상자보다는 평생 동안 생산응용 기술분야에 전력을 쏟은 혼다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실제로 노벨수상자가 많은 미국에서도 경제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혼다 소이치로는 소니가 그러했듯이 몸소 현장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엔진을 개발하여 모터사이클 및 자동차에 장착하고, 이를 생산판매하여 마침내 자동차 왕국인 미국까지 진출함으로써 혼다 사를 세계적인 자동차기업으로 성공시켰다.
또한 오늘날 국제화가 가장 잘된 일본기업으로, 특히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독특한 기업문화를 형성 및 발전시켜 온 기업으로 알려진 혼다자동차는 1996년 말 현재 매출액 469억 9천400만 달러, 순수익 1억9천640억 달러를 올리고 있으며, 세계 37개국에 68개의 현지 생산거점 및 미국과 독일에서 해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40여년 전 자전거에 소형엔진을 장착하여 팔던 조그만 제조업체가 창업한 지 12년만에 세계적인 모터사이클 회사로 성장하고, 그로부터 20년 후 세계적 자동차기업이 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혼다자동차의 창업
혼다는 확실히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터사이클을 만들어 파는 동안에도 자동차회사의 미래를 꿈꾸었고, 나아가서는 항공기 제작까지 꿈꾸었던 사람이다. 모터사이클 업계에 뛰어든 지 10여년만에 세계 정상에 도달한 그는 다음에는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혼다는 패전 후 전쟁기간 동안 피스톤링을 제작했던 도카이정기공업을 도요타에 매각한 지 1년 뒤인 1946년 10월 혼다기술연구소를 만들었다. 이때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도카이정기를 판 대금 45만엔과 자신의 집 마당 600평이 전부였다.
내연기관 및 정밀공작기계를 연구하고 제작할 목적으로 세워진 이 혼다기술연구소는 동생 혼다 벤지로를 비롯한 12명의 종업원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전쟁이 끝나자, 혼다는 쓸모없게 된 육군 6호 무선기용 소형엔진을 구입한 후 이를 개조하여 자전거에 부착시켜 되팔았고, 그후에는 직접 제작한 2기통 소형엔진을 자전거에 장착시켜 팔았다. 이 자전거 오토바이는 당시의 경제사정 때문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 물건이 없어서 못 팔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하여 위기를 넘긴 혼다 소이치로는 마침내 1948년 9월 자본금 1백만엔(3천200달러)을 투자하여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혼다에서 만든 엔진 성은이 아무리 좋아도 자전거를 개조한 것인 만큼 차체에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차체와 엔진을 같이 만들기로 결심한 혼다는 1949년 8월 배기량 98cc의 D형 엔진으로 스쿠터와 유사한 오토바이를 탄생시키고 이를 '드림 호'라고 이름지었다. 후지사와 다케오가 혼다기연의 상무 겸 동업자로 경영에 참여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50년 9월 도쿄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을 때, 혼다기연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계속 공장을 확장했는데도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편에서는 혼다기연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오토바이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1953년에는 204개사로 늘어났다.
그후 1954년 혼다기연에 심각한 경영위기가 닥쳤다. D형에 이은 F형 컵의 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한데다 새로 개량한 220cc급 드림 호가 말썽을 일으켰고, 새로 개발한 주노 호도 결함이 발견되어 전혀 판매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주식공개의 압박과 더불어 새로 구입한 4억5천만엔의 공장기계 대금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그야말로 '오중고(五重苦)'의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후지사와 다케오는 혼다에게 이 어려운 시기에 그의 꿈인 '스피드에 도전'할 것을 모든 사원에게 '선언'하라고 강력히 권했다. 그리고 TT레이스에 참가하기로 했다는 혼다의 '선언'은 실제로 사원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혼다 소이치로는 1954년 6월, TT레이스 출전을 위한 시찰이라는 명목하에 영국의 맨(Man) 섬으로 한 달간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그 사이에 혼다기연은 사원들의 노력과 미쓰비시은행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로도 혼다기연은 1958년 슈퍼컵(Super Cub)이 크게 히트할 때까지 계속 낮은 성장률을 보였다.
안전하고 친숙한 자전거 모양에다 전단 프레임을 대고 자동 클러치, 3단변속장치, 자동스타터를 장착한 이 50cc 슈퍼컵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1958년에 판매한 총 28만5천대의 오토바이 중 16만8천대가 바로 이 제품이었다. 이 모델은 혼다 사가 불과 10여년만에 오토바이업계 최정상에 오르는 데 큰 기여를 했는데, 어려운 위기상황이었던 데다 특히 모터사이클 분야에만 250개가 넘는 회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던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급속한 성장을 이룬 1950년대에 혼다 사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① 일류대학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② 금융계와의 적절한 연줄이 없었다.
③ 일본의 정부기관, 특히 통산성으로부터 중요한 회사로 대우받지 못했다.
혼다 사는 이와 같은 약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사와와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서로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성장했는데, 혼다는 특히 생산 및 새로운 기술개발에 몰두했고 후지사와는 경영관리(마케팅)에 전념했다.
모터사이클 제작에서 탁월한 기술력을 달성한 혼다 소이치로는 그후 똑같은 전략을 가지고 경주용 자동차업계에 뛰어들었다. 1960년 4월 스트카 공장이 가동되자 그해 6월 그는 연구개발부서를 통합하여 연구개발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61년 영국에서 열린 세계적인 TT 오토바이 레이스에서 1등부터 5등까지를 휩쓴 여세를 몰아 4륜차 생산을 개시했다.
혼다 사는 1965년 후반에 멕시칸 그랑프리를 획득함으로써 첫 승리를 거두었고, 모터사이클 경기에서도 계속해서 여러 종목을 석권했다. "지금 크다고 해서 영원히 크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며 끊임없이 자동차생산을 계속한 혼다는 1986년 자동차 F1(fomula 1) 경주대회에서도 그랑프리를 제패해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을 놀라게 했으며 1987년에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창피만 당할 것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술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F1출전을 선언했던 혼다의 옹고집이 20여년이 지난 뒤에야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2. 혼다의 국제화 전략 : 철저한 현지화를 통한 성공
일찍이 국제화 전략을 추구하여 성공한 기업들을 살펴보면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채택했던 기업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스위스의 네슬레, 미국의 3M, 그리고 혼다자동차와 소니전자 등을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초기부터 국제화를 염두에 두고 해외시장을 개척한 혼다는 현재 일본 내수시장에서보다도 북미 및 유럽시장에서 훨씬 더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혼다는 창업 후 불과 10여년만인 1959년 혼다아메리카 사를 설립했으며, 현재 세계 각국에 생산거점을 갖추어놓고, '어떠한 곳이라도 고객과 시장이 있으면 생산한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혼다의 국제화 전략은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가 1973년 은퇴한 후 당시 45세였던 가와시마가 혼다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78년 자동차업체로서는 최초로 북미지역에 진출하여 혼다아메리카 사를 설립하고 1989년에는 혼다유럽 사를 세웠으며, 1992년에는 세계시장을 일본, 북미, 유럽, 기타 해외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서 시장성 높은 제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그렇긴 하지만 혼다가 세계 제일의 자동차회사인 GM이나 포드, 그리고 크라이슬러 등 이른바 '빅 쓰리'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 자동차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대단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무모한 짓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도요타나 닛산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혼다는 일본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으므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해외진출뿐이었다. GM이나 포드 등 현지의 대형 메이커들이 비티고 있긴 해도 미국은 일본과 같이 유통구조가 복잡하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에는 미국정부가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또 혼다자동차가 미국에 진출하게 된 배경은 일본의 비싼 부동산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공장부지나 전시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정부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혼다는 미국 오하아오주에 조립공장을 건설한 1982년 이후 지금까지 20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자사의 고유한 글로벌 전략인 S.E.D(Sales, Engineering, Development)체제를 완벽하게 도입하여 미국에서만 5개의 조립부품생산시장, 3개의 판매법인, 2개의 엔지니어링 및 기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혼다는 특히 미국시장에 진입하면서 다음과 같은 4가지현지화 전략을 철저하게 채택했다.
① 인적자원의 현지화
② 제품의 현지화
③ 자금조달 및 운영의 현지화
④ 경영의 현지화
미국에 혼다아메리카 사를 설립할 공장부지를 선정할 때 혼다는 많은 시간을 들여 시장조사를 한 후 오하이오 주 마리스빌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마리스빌 주민들은 시카고나 세인트 루이수, 클리블랜드, 신시내티, 디트로이트 사람들과는 달리 자동차공장이나 산업체에서 일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근면하고 성실한 독일계 농촌주민들로, 교육을 잘 받고 질서와 책임감, 청결을 중시하는 일본인들과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흡사했다.
혼다아메리카 사나 일본의 부품업체들은 이와 같은 현지인들을 채용하여 성공적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했고, 또 마리스빌의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100마일 내에 부품업체를 유치하여 원활한 부품공급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혼다아메리카와 부품업체간, 그리고 부품업체와 부품업체간의 이동거리를 2시간 이내로 단축시킴으로써 부품의 적기공급과 적시시간 생산이 가능했고 부품업체를 자주 방문함으로써 품질관리가 잘 수행되었으며, 또 장기계약에 의한 조달로 부품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즉 미국 현지에서 부품조달, 제품 디자인, 개발, 생산, 판매, 시장조사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혼다와 독립된 경영을 함으로써 현지시장에 적합한 의사결정을 신속히 하고, 현지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여 이에 재빨리 대응했던 것이다. 혼다는 1980년 12월 1백만평방피트의 부지에 2억5천만 달러를 들여 자동차공장을 건립하고 1982년 11월부터 어코드의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산 자동차의 품질이 우려할 만큼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혼다가 미국의 노동력으로 일제자동차와 똑같은 품질의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지 모두 의심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람들은 공공연히 일본에서 직접 만든 자동차만 사겠다고 말하곤 했으며, 심지어는 판매대리점들 조차도 새 공장의 종업원들이 품질 낮은 자동차를 만들어낼 게 틀림없으므로 자기들의 사업마저 망칠 것이라고 불평했다.
하지만 조립라인에서 최초로 완성된 중형세단 어코드를 검사한 관계 전문가들은 놀랍게도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그후 이 혼다 어코드는 1989년 미국에서 95만2천대로 가장 많이 팔린 승용차가 되었고, 미국제로 우리나라에 까지 수입되어 들어왔다.
이와 같은 혼다자동차의 성공은 오하이오 중부의 사람들을 능력있는 노동력으로 변화시킨 혼다의 '관리능력' 덕분이었다. 혼다는 마리스빌 공장에서 자발적인 참여제도인 VIP(Voluntary Involvement Program)를 통해 품질관리와 안전관리, 작업분위기 쇄신을 위한 인센티브 제안제도를 실시했으며, 완벽한 복지제도와 장기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현지부품 조달체계 및 근로자 대표회의나 투표 등을 통한 적극적인 동기유발로 높은 품질관리를 실현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국시장에 진출한 당시의 어려운 환경요건, 즉 선진국들의 배기가스 규제, 일본시장의 포화상태, 대미수출자율규제 등을 오히려 기회요인으로 적절히 변화시킴으로써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천재기술자 : CVCC엔진과 끊임없는 기술혁신
1990년 혼다자동차의 총매출액은 4조3천15억엔(305억 달러)이며, 이중 R&D 투자비율은 4.5%로 1천940억엔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혼다 기술철학이 근본은 기술개발 투자액의 절대규모나 비율에서보다는 혼다만의 독특한 기술연구소 운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혼다 사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연구소를 독립시켜 자율적인 연구 분위기를 갖도록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창업자 스스로가 모방이나 추종을 배격하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중시함으로써 99%의 실패를 1%의 수확을 위한 장래의 씨앗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원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사람이 없다.
독립법인체인 이 기술연구소는 관리직을 제외하고는 직제가 없으며 기술수준에 따른 자격제도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연구개발에 관해서는 누구라도 제안하고 발언할 수 있으며, 선정된 연구주제는 연구자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중단되는 법이 없다. 처음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으로 기대했던 에어백에 관한 연구를 10년 넘게 계속하여 성공시킨 것은 기술개발을 미래를 위한 보험으로 생각하고 업무를 수행한 회사가 거둔 성공사례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의 자동차 품질에 대한 혼다의 평판을 높이는 데 기여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1973년 CVCC엔진을 도입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엔진 기술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소형 자동차 시빅(Civic)이 가연휘발유를 사용해 상당한 주행거리를 달린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더욱이 시빅은 1970년 미국의 '공기청정법(Clean Air Act)'에서 설정한 엄격한 배기기준을 지키는 데 필요한 값비싼 촉매변환기를 달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재래식의 4-스트로크 왕복엔진을 바탕으로 한 저배기시스템을 가진 이 CVCC엔진은 당시 미국에서 자동차산업과 관련하여 주요관심사였던 공해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주었다. 이 CVCC는 내연기관의 배기장치 속에 일산화탄소와 불연성탄화수소, 그리고 질소산화물의 양을 줄이기 위한 촉매변환기가 필요없었으며, 그 대신 소량의 전면혼합물(overall mixture)을 사용하여 공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도록 조절했다. 이런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회사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혼다자동차는 기술혁신적인 회사로 여겨졌다.
CVCC엔진의 탁월한 성능을 가장 먼저 미국에 소개한 것은 리더스다이제스트 지였다. 그 기사 내용을 조금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72년 혼다는 자체적으로 만든 새 CVCC엔진(혼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새로운 엔진)을 장착한 3대의 자동차를 미시간 주 앤 아버에 있는 미국 환경보호처 배기시험연구소로 보내기 위해 선적했다. 혼다 사는 촉매전환물질이나 기타 어떤 물질을 첨가하지 않고서ㅓ도 1975년까지 유효한 모든 어려운 배출기준을 무리없이 통과했다.
예를 들면 연방기준에는 탄화수소의 배출량이 1마일당 0.41그램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테스트 측정계기상 5만 마일 이상을 달린 후에도 이 CVCC엔진은 마일당 겨우 1.242그램의 탄화수소를 배출했을 뿐이었다. 또한 1975년의 연방기준에는 마일당 일산화탄소가 3.4그램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혼다 엔진은 겨우 1.75그램이 평균이었다. 그리고 질소산화물의 연방기준은 마일당 3.1그램이 상한이었으나 혼다 엔진은 이와 같은 스모그를 유발하는 가스의 배출량이 평균 0.65그램이었다.
1975년경 혼다는 월 1만대의 시빅을 판매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출시한 좀더 큰 유형의 어코드는 <모터 트렌드<Motor Trend)>지에서 '올해의 수입차'로 선정되었다. 그 크기와 품질에 비해 가격이 3천 995달러로 매우 저렴해서, 딜러들과 고객들은 이 차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이로써 혼다자동차는 5년만에 경쟁이 격심한 미국시장에서 완전히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수석부사장이자 혼다아메리카의 사장직을 맡았던 고치로 요시자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신제품에 대해 더 구매의욕이 큽니다. 특 그들은 좀더 전통적이고 의식을 중시하는 일본인들과는 다릅니다. 미국시장에서 기반을 잡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참고 기다렸습니다. 물론 미국 시장에서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4. 기술자와 전문경영인의 협력관계
혼다의 성공은 후지사와 다케오라는 매우 유능하고 헌신적인 파트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의 경우 전후에 성공한 기업들 중에는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 동업자적 협동을 통해 성공한 예가 많다. 예컨대 소니의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 그리고 도요타의 이시다 타이조와 가미야 세이타로 등이 그 좋은 예이다.
1906년 11월17일 시즈오카현 이와타군 고메무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혼다는 망치 소리와 함께 자전거포에서 일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16세에 도쿄로 가서 6년간의 자동차수리공 견습생활을 마친 뒤 자기 점포를 차렸다. 자동차광이었던 그는 1936년 전 일본 스피드 경기대회에 참가했다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경주자로서 성공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버리고 자동차수리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일에는 흥미가 없어 곧 그만두고 소형엔진을 개발하여 생산판매를 시작한 그는 얼마뒤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때 극적으로 평생의 훌륭한 파트너였던 후지사와 다케오를 만나게 된다.
1949년 8월 나가지마 항공회사의 바이어였던 타케시마가 혼다에게 '돈이라면 무조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며 후지사와를 소개해 주었다. 이 두 사람은 도쿄의 타케시마 집에서 처음 만났다. 후지사와는 그 자리에서 혼다에게 후쿠시마의 제재소를 팔아서 함께 사업을 시작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장사꾼입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되겠지만, 혼다 씨와 헤어지더라도 나는 결코 손해볼 게 없습니다. 손해라는 게 꼭 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반드시 무엇이든 얻어가지고 헤어지고 싶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십시오. 나도 얻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만들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혼다도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혼다는 판매나 경리에 밝은 후지사와를 상무이사로 받아들여 자신의 인감마저 내주면서 판매와 노무 등 경영전반을 담당케 하고, 자신은 연구개발 분야에만 전적으로 매달리기로 했다. 두 사람의 업무관계에 대해 혼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후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고 한다면, 후지사와와 나는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루트를 택하고, 그는 다른 루트를 택했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철학과 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만일 우리가 똑같은 루트를 택했다면 예상치 않았던 어려움에 부딪쳐 실패했을지도 모르나, 우리는 다른 루트를 택했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었던 겁니다. 후지사와는 내게 '내가 지금 이러이러한 장소에 있는데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말해 줄 수 있고, 그러면 나는 그의 말을 믿고 폭풍우에 대비합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르게 행동하면서도 마음과 마음으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혼다가 엔지니어로서 생산기술적인 측면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면 후지사와는 마케팅과 경영관리,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서로를 존중하고 완전히 신뢰했던 두 사람은 어느 쪽도 서로의 전문적인 범주에 속하는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완벽한 자율 책임경영의 성공사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혼다와 후지사와의 파트너십과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자. 혼다북아메리카의 사장인 테츠오 치노(Tetsuo Chino)가 취임한지 2년째인 1963년, 일본정부가 자동차 메이커의 숫자를 제한하려고 하자 테츠오는 급히 모터사이클의 기술에 바탕을 둔 체인식 스포츠카를 만들었는데, 후지사와는 이 차를 업무용 통근차로 생각했으나 혼다는 스포츠카로 시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츠오는 이 두 사람의 공동설립자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를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때 자신이 취했던 행동에 대해 직접 그가 한 말을 인용해 보자.
"제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두 개의 전시회를 열어 그들을 서로 다른 전시장에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는 스포츠카로 전시하고 또 하나는 업무용 통근차로 전시하여 혼다 씨와 후지사와 씨가 따로따로 그 전시장을 방문하게 했지요. 나는 두 사람을 각자 자기 코너에 있게 하기 위해 혼다 씨에겐 업무용 자동차 전시장을 보여주지 않았고, 후지사와 씨에게는 스포츠카 전시장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두 사람 다 내가 꾸민 이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일에 대해 결코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특별한 파터너십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즉 각자가 서로를 크게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립을 피하는 방식으로 그 상황을 처리했고, 따라서 그들은 서로 만족할 수 있었지요. 결국은 두 사람 다 옳았다는 것이 판명된 셈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혼다자동차는 두 시장 모두에서 판매되고 있으니까요."
이렇듯 이 두 사람이 협력관계를 꾸준히 지속해 나간 점은 참으로 훌륭하고 본받을 만하다. 혼다는 평생 동안 혼다 사의 모든 경영을 후지사와에게 맡겼고, 이 회사는 기술개발과 경영관리의 철저한 분리 속에서 'HONDA'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혼다의 경영철학 및 기업가 자질
지난 1991년 8월5일 혼다자동차의 창설자로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인 혼다 소이치로가 향년 85세로 세상을 떴을 때, 미국의 언론들은 일본보다도 더 슬퍼하며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인들로부터 혼다만큼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일본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기업가로서 혼다는 꾸준한 기술혁신과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창의적인 도전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또한 그는 때때로 화려한 체크무늬의 조끼를 입고 나타나기도 한 영원한 청년이었고,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훌륭한 사람이기도 했다.
'손의 철학'을 가진 기술자
혼다는 경영의 귀재라고 불렸던 마스타 고노스케와 더불어 전후의 두 위대한 일본기업인으로 손꼽히는 '엔지니어의 표상'이다. 언젠가 혼다는 '나의 손'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투박한 그의 왼손이 그려진 그 그림에는 망치에 맞은 곳, 커트에 깎여나간 곳, 네 번이나 빠진 손톱 등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상처투성이 손을 스스로 자신의 보물이라고 술회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언제나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자서전 <내 손이 말한다>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손바닥 크기와 손가락 모양을 비교해 볼 때 오른손과 왼손이 이렇게 다른 손은 드물 것이다. 이 손은 제대로 된 기계 하나 없었던 때부터 자동차를 수리하기 시작해서 여러 가지 것을 만들었다가 부수고, 부수었다가는 다시 만들어온 손이다. 오른손은 일을 하고, 왼손은 그것을 받친다. 그러니 왼손은 늘 다치고 손톱도 수없이 깨지곤 했다. 손끝도 몹시 깎여서 오른손과 왼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은 1센티미터쯤 차이가 난다. 왼손이 짧아져서 손가락이 줄어든 것이다. 내 왼손은 진짜 잘 버텨왔다."
혼다는 창업자였지만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완벽한 엔진을 만들겠다는 신념만 가지고 정열적으로 일했던 기술자였다. 그는 언제나 기름 때묻은 작업복차림으로 젊은 공원들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연구토론을 벌였으며, 사장님보다는 오야지(영감님)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엄할 때는 한없이 엄해서 게으름부리는 사원을 스패너를 들고 쫓아다니면서 야단쳤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또한 그는 기술자들을 사무직과 동일하게 대우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더 우대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기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혼다는 학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1937년말 친척 및 친구들에게서 자금을 빌려 피스톤링 공장을 운영할 때, 혼다는 주물공장을 하던 친구의 충고로 좀더 많은 지식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하고 하마마츠공고(현재의 시즈오카대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에만 마지못해 출석했으며 노트도 갖고 다니지 않고 시험조차 치르지 않았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그를 불러 시험을 안 치르면 수료증을 줄 수 없다고 하자, 혼다는 수료증이란 극장표만도 못한 것이라고 응수하며 "극장표는 극장 좌석이라도 하나 주지만, 학위증서가 직업을 주지는 않습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혼다가 다른 사람들의 교육경력을 하찮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경험이 뒷받침되지 못한 교과서적인 지식을 싫어했으며, 특히 일을 하는 능력보다 학벌을 더 중요시하는 일본의 학연체제를 몹시 경멸했다. 학연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해 보자.
1965년 혼다 사는 영국의 그랑프리 경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뻔했으나 안타깝게도 라인을 눈 앞에 두고 엔진 과열로 실패하고 말았다. 엔진설계책임자는 도쿄대학 이공학부를 막 졸업한 젊은 엘리트였다. 혼다는 그 엔진을 R&D부서로 옮겨와 직접 해체했다. 옛 도면과 새 설계도면을 유심히 비교해 나가던 그는 갑자기 담당자에게 왜 도면을 변경했느냐고 다그쳤다. 설계책임자는 과거의 자료와 각종 계산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으므로 당당하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그러자 성미가 급한 혼다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자네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그걸 설계하고 만들었단 말이야! 나는 피스톤 제작에 여러 해의 경험을 갖고 있어. 이런 멍청이 같으니라고! 피스톤이 불타버리는 게 당연하지. 자네가 여기 이곳의 두께를 바꿔버렸단 말이야."
그 젊은이는 혼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피스톤의 열 중 약 70%가 피스톤링을 통해 분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디자인을 변경해도 과열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요."
혼다는 이 말을 듣자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런 바보가 있나! 내가 이래서 대학 나온 것들을 싫어한다니까. 머리만 쓰려고 들거든. 자네는 정말로 낡고 성능이 낮은 엔진에서 얻은 그런 낡아빠진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20년이 넘도록 피스톤을 만들고 피스톤과 함께 일해 왔어. 이 부분에서는 0.5밀리미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알고 있단 말이야. 내 회사에는 자네처럼 머리만 쓰려고 하는 사람은 필요 없어.왜 이 디자인을 설계하기 전에 그걸 스스로 체크하지 않고, 또 이공장에서 경험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았는가? 만일 자네가 대학에서 배운 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오산이야. 앞으로 다년간 현장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 한 이 혼다에서 자네 같은 사람은 쓸모없게 될 걸세."
이렇게 소리 지른 혼다는 설계책임자에게 주물공장에 가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라고 시켰다. 또 혼다가 최고고문직에서 물러난 후 오하이오 공장을 방문했을 때 전 종업원에게서 악수 요청을 받아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는 바람에 손이 부어서 고생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때 혼다와 악수를 나누었던 종업원들은 "혼다의 따뜻한 체취를 가슴에 간직하겠다"고 말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기업의 국제화 전략
모터사이클에서 자동차로 자연스럽게 그 영역을 확대 개편해 온 혼다 사는 전형적인 전문기업으로 초기부터 세계 지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혼다는 생전에 소형비행기 제작 까지도 고려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가 모터사이클 부문에서 자동차업계로 진출하려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일본의 통산성이었다. 통산성은 산업합리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막 4륜차 생산을 개시한 혼다를 다른 10여개의 자동차회사와 통폐합하겠다고 발표했다. 통산성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내 메이커는 도요타와 닛산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가지 자동차를 생산하지 않았던 업체가 참여해서는 안 된다. 결코 포드나 GM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경제발전이 정계, 관계, 재계의 삼위일체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혼다가 통산성에 반발했던 태도는 다분히 이단적이다. 혼다는 공공연히 "오늘날 우리가 있게 된 것은 통산성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혹시 위락 도산해서 손을 떼게 되더라도 종업원과 설비는 국가를 위해 남을 것이라는 각오 하에 자동차사업을 추진했다"는 말도 했다.
인간관계의 승리, 혼다와 후지사와
혼다가 자신의 일생에서 후지사와를 만난 것은 확실히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두 사람의운명적 만남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냈으며, 흔히 '기업가(창업)는 경영관리를 잘 못하고, 관리자는 창업을 못한다'는 통념을 깨고 자율적인 동업자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함으로써 대기업으로 성장케 한 신화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의 인간관계에 대한 후지사와의 생각을 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조연이나 파트너라는 것은 우선 인간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특히 창업시절엔 주연이 인격을 믿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모오치아이(혼다 소이치로)는 나를 사장으로 앉히려 했고 나도 사장이 되고 싶었으나, 나는 곧 그 생각을 버리고 철저하게 조연이 되기로 각오했지요. 안정기에 접어들자 자연히 조연의 역할도 변하더군요. 주연의 뒤를 따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주연과는 관계없이 앞에 나서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주연이 각광을 받도록 하거나 타격을 입을 것 같을 때 조연은 최대의 연기력을 발휘해야 하지요."
이 말대로 그가 앞에 나서서 최대의 연기력을 발휘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지난 1954년 부도위기에 직면한 회사가 '오중고'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노동조합마저 연말 보너스 임금투쟁을 기점으로 동맹파업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후지사와는 TT레이스의 참가를 위해 혼다 소이치로의 등을 떼밀다시피하여 유럽으로 출장보내고 자신은 야마토 공장으로 달려갔다. 야마토 공장의 공개 교섭 장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혼다가 망하면 우리 모두의 꿈도 사라지고 맙니다. 회사의 실정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조금만 참아주신다면 혼다 사장과 제가 필사적으로 회사를 다시 살려놓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목숨도 아깝지 않습니다. 제 목숨을 여러분에게 맡기겠으니, 부디 여러분들도 힘을 합쳐 혼다를 구해 주십시오."
눈물을 머금고 호소하는 후지사와의 진정어린 말에 노동조합원들은 감동을 받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회사 측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것은 후지사와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젊음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혼다 소이치로는 훌륭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책임을 맡아 일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연공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혼다자동차에서는 실적에 따른 승진제가 행해졌고, 다른 일본 기업과 달리 나이보다는 젊은이의 태도와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회사의 설립 초기에는 부득이 젊은이들에게 많은 책임이 위양되어 있었다. 혼다와 후지사와는 대단한 상상력과 에너지를 갖춘 사람을 선발함으로써 이러한 젊은 기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다. 특히 혼다는 기존체제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존중했다.
혼다 소이치로는 은퇴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결코 입에 담지 않는 말 중 하나는 '요즘 젊은 것들이란 으레 어떠어떠하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젊었을 때에도 늘 이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원래 젊은 세대란 항상 진보적이었습니다. 나는 비록 인생의 '마감'을 생각할 나이에 이르니 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높이 날기 위해 조정간을 잡아당길 때 안심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젊은이들이 안전하게 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인생 목표를 정하라. 그리고 조정간을 단단히 붙잡고 높이 날아라.'"
지난 40여 년 동안 혼다는 여러 가지 무거운 책임을 젊은 사람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1981년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자동차 시티(City)를 개발했던 팀의 평균 연령은 27세였다. 또 혼다는 기업 규모가 커질 때에도 소규모기업이 갖고 있는 특징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혼다 사의 관리자들과 종업원들은 항상 혁신적이어야 하며, 이러한 뿌리 깊고 풍부한 전통에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교육을 반복해서 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혼다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통'이라는 단어였다.
창업기업가의 훌륭한 은퇴
혼다의 위대한 점 중에서도 창업기업가로서 가장 교훈을 주는 것은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알고 이를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사람이란 흔히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자리에 연연하면서 물러날 시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비록 알았더라도 실행에 옮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말년에 노욕에 어두워 물러날 때를 모르고 회사를 거의 위기로 몰고 갔던 헨리 포드의 '내 기업 내 마음대로'라는 기업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73년 1월, 부사장인 후지사와가 창립 25주년 기념일에 은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먼저 밝혔을 때, 혼다 소이치로는 흔쾌히 자신도 함께 그만두겠다면서 사상직을 내놓았다. 이때 혼다는 67세, 후지사와는 63세였다. 혼다 소이치로는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내게로만 몰려들어 빛이 나지 않는다"며 3대사장의 취임축하 장소에도 가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소니 역시 1971년 창립 25주년을 계기로 이부카가 모리타 아키오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다는 점이다.
퇴임식장에서 혼다 소이치로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도 성장하는 기업의 사장 평균 연령은 40대입니다. 60대 사장이 이끄는 회사는 활력이 없고 정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젊다는 게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새로운 가치관, 기업과 사회의 연관성에 대한 신선한 감각, 바로 이러한 감각을 지닌 참신한 경영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혼다는 뒷날 그의 동반자였던 후지사와의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은 조사를 읽었다.
"정열을 불태울 만큼 일에 열중했던 우리는 함께 혼다를 그만두었네. 자네 덕분에 행복했던 인생에 감사하네."
혼다기연은 후지사와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그들이 물러났을 때 이미 '훌륭한 옷'이 되어 있었다.
"혼다 소이치로의 휴머니즘과 나의 로맨티시즘, 이 두 가지가 잘 어우러져 날실이 되고, 혼다기연의 종업원과 판매점, 주주, 거래처가 함께 합쳐져 씨실이 되어 혼다기연이라는 '옷'이 되었죠. 사실은 움직여선 안됩니다. 그러나 씨실은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합니다."
혼다의 위대한 점 중 또 하나는 자신의 아들들을 하나도 혼다자동차에 들여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회사가 자기 혼자 만든 게 아니라 모두들이 함께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절대로 아들들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혼다의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속에서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아들이나 친척이 아니면 사장직을 맡기지 않는다거나, 도쿄대학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거나 하며 기업과는 아무 관계 없는 조건을 내세우는 회사가 있습니다. 모두들 정말로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회사는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곳, 즉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회사는 망합니다."
행운의 기업가
행운이 기업가를 성공시키는 기본적 요소라고 할 만큼 직관력과 모험성을 보완해 주는 요인이라면, 혼다야말로 이러한 행운을 얻은 기업가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기업가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회를 찾아 도전하고 모험하며 불확실한 장래를 향해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업가의 인생을 바꾸게 할 사건이나 주위환경, 즉 시대적인 요구는 기업가들에게 귀중한 축복이자 일생일대의 성패를 좌우하는 전환기를 마련해 주는 기회이다. 더욱이 모험심이 강하고 직관력과 자신감에 크게 의존하는 선구자적 모험가들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회환경의 변화가 유리하게 작용하여 기업가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혼다는 인생에서의 행운과 사업상의 행운을 함께 얻은 사람이다. 인생에서의 행운이란 도쿄에서 발생했던 관동대지진 때 견습공이 도기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일자리가 생긴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선배견습공의 결원이 생기기만을 기다려야 했다면 언제 수련이 시작되었을지 모르며 그의 성공이 상당기간 늦어졌을 수도 있다.
또한 기계제작수리 연구보다는 자동차경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가 사고로 인해 18개월간의 중상을 입는 바람에 기계에 열중하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업가로서 혼다가 얻은 가장 큰 행운은 후지사와를 동업자로 맞이하여 분업적 경영과 품질경영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점이다. 또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 재벌기업들이 해체 내지 규제를 받는 동안 신규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업환경이 무명기업을 중소기업으로 성장케한 행운이었다.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경제적 번영, 모든 기업에 도움이 된 일본 호경기의 혜택, 그리고 미국의 3대 자동차회사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창업한 시기적인 행운, 중동의 오일쇼크 이후 연료공급 중단으로 인한 대형자동차들의 판매부진, 소비자들이 중소형차를 선호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미국진출과 같은 국제화 전략 등을 행한 것도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혼다로부터 최선을 다하는 기업가들에게는 행운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어떤 종류의 행운이 따르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논의할 내용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행운이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기업가들에게 주는 하늘의 축복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믿고 일하는 기업문화
20세기 전반기의 기업가들은 공통된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과 성취욕에 대한 정열이 있었으며, 발명을 통해 꿈을 실현시켰다. 일을 좋아한 혼다 역시 꾸준한 도전을 통해 남들이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모험가적 일꾼이었고,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투사로서 끝내 성공을 쟁취해 내는 노력가였으며, 기술자로서 한 우물을 파며 창조혁신을 수행해 온 혁신가였다. 또한 혼다의 기술자 우대정책은 그가 우수한 기술혁신을 지속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른바 '발명의 날' 행사는 혼다 사의 기업문화 중 한 특징이다.
흔히 기업가는 경영을 잘 못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협동경영, 즉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동업자적 경영을 통해 극복해 낸 혼다는 젊은 후진들을 존중하고 성장시켰으며, '어른'으로서의 친근감을 가지고 기업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사회적 기관으로 발전시키면서 종업원들의 신뢰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믿고 일하는 기업, 즉 협동정신을 키우는 그이 '믿음'은 동업자는 물론 기술자, 사무원 등을 모두 파트너 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전문경영자 중 한 사람인 GM의 슬론 회장은 업적이야말로 경영능률 및 성공을 가늠하는 유일한 좌표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이익률, 성장률, 시장점유율 등 수적으로 증명되는 자신의 찬란한 업적을 자랑스럽게 나타낸 이야기였다. 혼다야말로 이 슬론의 업적 테스트에 합격한 훌륭한 기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