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 기획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난타'나, '김덕수'로 흔히 대표되는 사물놀이를 보고있으면, 어쩌면 정말로 인류의 음악의 시작이 바로 타악기로부터 시작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멜로디 없이도 타악기만으로 훌륭한 하나의 음악이 될 수 있듯, 재즈의 역사도 바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타악기를 매체로 태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굳이 지겨울 정도로 재즈에 대한 책마다 언급되고있는 재즈와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측면에서 드럼은 가장 원초적인 악기이자 기본이 되는 악기가 아닐까 한다. 박자를 맞추는 박수소리나 두들김으로부터, 마칭 밴드의 큰북, 작은북과 심벌즈로, 그리고 이것이 실내로 들어오며 한사람이 연주 할 수 있도록 세트화 하면서 현대적인 드럼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드럼연주의 패턴의 변화는 재즈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축이기도 하였다. 브라스 밴드의 큰북과 작은북 그리고 심벌즈를 한데 놓은 것 같은 구성으로, 마칭 밴드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연주하던 것이 초기 재즈에서의 드럼의 모습이라면, 스윙시대로 접어들어서는 베이스 드럼과 사이드 드럼으로 리듬 분할을 하고 하이 햇이나, 탑 심벌을 일종의 장식음으로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연주자로는 진 크루파나 칙 웹, 그리고 조 존스 같은 인물을 들 수 있다. 이후, 밥시대에 이르러서는 베이스 드럼과 사이드 드럼의 역할은 크게 준 반면, 탑 심벌과 하이햇으로 리듬 분할 및, 2, 4 박에 붓점을 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케니 클락에 의하여 시도되었고, 맥스 로치와 아트 블랙키를 거치면서 하나의 스타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재즈 드럼도 이 당시의 영향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필리조 존스, 로이 헤인즈, 토니 윌리엄즈, 등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음에 대하여 상당한 이해가 없다면 연주자에 따른 드럼 연주의 특성을 알아 차리기 힘들 것이다. 특히 멜로디 악기와 같이 소리가 섞이면 더욱 더 그 소리를 알아듣기가 어렵다. 게다가 이미 과거 하나의 스타일을 정립했던 명인들의 발자국이 너무도 커서, 현재의 드럼 주자의 소리들이 대동 소이하게 들릴 때도 많다. 솔직히, 필자도 그러할 때가 많기 때문에 열 명만을 선정하는 작업이 여타 악기 주자들의 때에 비하여 많이 힘들었다. 게다가 비슷한 수준의 연주자들이 너무 많고, 자신의 색을 주장하는 연주자보다는 다양한 음악을 모두 소화해내는 연주자들이 훨씬 많아서 그들의 음악적인 경향을 모두 비교해 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드럼은 각종 재질과 튜닝 등을 통하여 어느 드러머라도 같은 소리를 내지 않을 만큼 다양한 변화가 가능한 만큼, 새로운 드러머들의 출현은 생명력 있는 재즈를 이어감과 동시에 재즈의 다양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고 있다. 끝으로 선정과 관련하여 칼 앨런, 헤린 라일리, 랠프 펜랜드 등은 선정되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지만 나이가 다소 많아서 제외하였으며, 대표작은 가급적 구하기 쉽고 피아노나, 베이스 주자들의 대표작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였음을 밝혀둔다
Cindy Black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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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 블랙맨은 여성 드러머이다. 모델과 같이 머리 모양과 옷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듯한, 그래서 어떠한 재즈 연주자 보다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는 그러한 연주자이다. 그러나 필자가 처음 월리스 로니의 앨범을 통하여 그녀의 연주를 접했을 때만 해도 그 앨범의 드러머가 여자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라기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샤카칸처럼 미모를 앞세워 별것도 아닌 실력의 드럼을 두드리는 연주자가 여성 드럼주자의 대부분(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 중에)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힘있는 연주를 하는 연주자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신디 블랙맨은 클래식 음악가였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가졌다. 대부분의 연주인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그러한 연유로 조기 교육을 받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타악기를 두드리던 그녀는 하트포드 대학과 버클리 대학에서 클래식 타악기를 정식으로 공부하기에 이른다. 8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한 후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긴 그녀는 프레디 허바드와 샘 리버의 라이브 세션으로 참여하며 재즈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1987년에는 재키 맥린의 정규 드러머로 참여하는 동시에 Muse를 통하여 그의 첫 리더 작품을 내어놓았다. 그녀의 연주는 아트 블랙키나 토니 윌리엄즈를 연상하게끔 매우 힘이 있으면서도 어떠한 스타일의 연주라도 믿고 맡겨 봄직한 형태를 띄고 있다. 한편, 탐탐 드럼이 다섯 개나 되는 커다란 세트와 보다 간략한 구성의 두 가지 드럼 세트를 같이 하는 연주자의 성격에 맞춰 바꾸는 등, 참여하는 다른 연주자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세심함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경향때문인지, 그는 1988년 월리스 로니의 음반에 참여한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의 앨범 세션으로 꾸준한 활동을 보이는 한편, 재키 맥린, 조 헨더슨, 돈 풀렌, 파로아 샌더스, 샘리버, 카산드라 윌슨 등 인물의 라이브 세션 등으로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지속적인 좋은 연주 활동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
주목받을 만한 새로운 연주자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제프 '테인' 와츠도 어린 시절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한때,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주자를 꿈꿀 만큼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연주자이다. 실제로 그는 듀퀘슨 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하기도 하였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주자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지도를 받기 용이하다는 이유에서 버클리 대학을 택하였고,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실력은 클래식보다는 퓨전 경향의 연주자들의 눈에 먼저 뜨임으로 하여 하베이 메이슨,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를 거쳐 마하비누쉬 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팝 음악의 드럼 주자로 대중에게 먼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재즈에 정착하게 된 것은 마샬리스 형제를 만나고 난 이후였다. 장르가 다른 연주자를 그것도 재즈 필드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상당한 모험임에도 불구하고 윈튼 마살리스는 제프 왓츠가 전통적인 드러밍의 진지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곡의 특성에 맞게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고 있었기에 그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그의 그룹으로 제프 와츠를 발탁하였다. 현재까지도 제프는 소위 잘 나가는 드러머들이 이러저러한 연주인들과 많은 교류를 갖는데 비하여, 오히려 폭이 좁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소수의 연주자들과만 연주를 함께 하고 있다. 윈튼과 브랜포드 마살리스, 제리 앨런, 마이클 브렉커와 케니 가렛, 코트니 파인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케니 커크랜드까지, 비교적 뚜렷한 자신의 색을 갖춘 인물들과 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데, 상대 연주자가 바뀔 때마다 연주자의 특성에 맞춰 자신의 색을 변화함으로서 전체적인 흐름을 좋게 하는 동시에 독특한 색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1993년 이후 그는 드문드문 자신의 작곡을 발표하고 있는데, 오케스트라의 일원을 꿈꿔왔던 그의 어린 시절 꿈이 남았음인지, 드럼주자 같지 않게 멜로디의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쓴 흔적을 볼 수 있다. 현재 자신의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재즈를 배우는 중이라고 겸손해 하는 그에게 많은 발전의 가능성을 점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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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드럼을 연주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겠지만, 마빈 스미티 스미스는 생후 6개월부터 드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할 때부터 그는 드럼 주자였던 아버지의 연습장에서 아버지의 연습 모습을 죽 지켜보다가, 아버지가 쉴 때마다, 기어와서 페달을 누르고 드럼을 두들기곤 했다고 한다. 주전자고 밥솥이고 보는 족족 두드려대는 아이에게 그의 아버지는 아예 드럼을 가르쳐 주기로 하였다. 그의 나이 세 살. 학창 생활 동안에도 그의 연주는 계속되었고, 한동안 버클리에서 교육을 받기까지 한 그는 80년대 초반 존 헨드릭스의 드러머로서 재즈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
이후 그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바쁜 드러머' 혹은, '드럼계의 존 콜트레인'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라이드 햄튼, 아치 셉, 케빈 유뱅스, 데이빗 머레이, 테렌스 블랜차드, 도널드 해리슨, 도널드 버드,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스티브 콜맨 등 다양한 연주자들의 음반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간 다운비트 비평가 부문별 주목할만한 신인에 선정된 것은 그의 이러한 실력과 경력을 생각했을 때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의 이력 중에 특히 재미있는 것은 레이 브라운, 데이브 홀랜드, 론 카터 등,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베이스 주자와 계속 일을 같이 했다는 점인데, 이는 마빈 스미스가 같은 리듬세션으로서 중견 베이스 주자들을 편안하게 해 줄만큼 튼튼한 실력과 함께 그때그때 적응하는 능력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반증이라고 하겠다. 1987년 이후 발표되고 있는 그의 리더작들도 고른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음악에서도 쉽게 적응이 가능한 확실한 기본기와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해 가려는 노력.. 미국과 유럽 일대를 순회하면서 워크샵을 개최하는 등, 후학의 양성에도 힘을 쏟는 그의 모습에서 차세대를 이끌어갈 확실한 드러머로서의 모습을 엿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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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네 명의 삼촌들이 모두 드러머인 음악 가족을 둔 덕분에 랄프 피터슨은 세살 때부터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곱 살 때부터는 트럼펫을 아울러 연주하기도 하여 고등학교 때까지는 드럼과 트럼펫을 함께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는 재즈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재즈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된 것은 디지 길레스피와 클리포드 브라운의 음반을 접한 이후였다. 본격적으로 재즈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럭거스 대학에 입학, 본격적인 재즈 화성과 작곡, 그리고 연주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
그에게 있어서 대학은 단지 거쳐가는 곳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가져다주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하나는 정신적인 자세. 당시 그의 지도 교수였던 마이클 카빈은 그에게 재즈의 기본 정신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였고, 전통위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음악가의 자세에 대하여 누누이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아트 블랙키를 만난 것이다. 대학을 시절 무렵 랄프는 테렌스 블랜차드로부터 아트 블랙키를 소개받게 된다. 몇 개월간, 재즈메신저의 연주를 옆에서 지켜보던 그에게 아트 블랙키는 랄프 피터슨에게 더블 드럼 공연을 제의하였고 결과 'The Boston Globe Festival'은 그의 공식적인 데뷔 무대가 되었다. 1985년 대학 졸업 후 주 무대를 뉴욕으로 옮긴 후, 월터 데이비스, 데이빗 머레이, 스탠리 터렌타인, 다이앤 리브스, 카운트 배시, 테렌스 블랜차드 등 다수의 연주자와 활동을 벌이는 한편, OTB(Out of The Blues)의 공동 리더로 활약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첫 리더 작품은 1988년 블루 노트를 통하여 발표되었는데 <Trianular>, 이 작품은 스윙저널에서 그해의 앨범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1992년까지 여섯 장의 앨범을 블루노트를 통하여 발표하였고, 이후 Evidence등의 레이블을 통하여 서너장의 앨범을 더 발표하고 있으며, 나오는 작품 모두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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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계에서 널리 알려진 최초의 여성 드럼 연주자인 그녀는 1965년 재즈 연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팻츠 월러, 듀크 엘링턴, 그리고 추 베리 등과 연주한 경력이 있는 드럼 주자 맷 캐링턴이고, 아버지는 색소폰 주자로 활동을 하던 소니 캐링턴이다. 이러한 내력으로 그녀는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그녀의 할아버지가 직접 사용했던 드럼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드럼 치는 여자 아이.. 언뜻 듣기에도 충분히 대중의 주목을 받을 만한 어린 테리는 라산 로랜드 커크의 연주에 탬버린을 들고 함께 함으로서, 여타 연주자들이 기껏해야 로컬 밴드나 학교 밴드에서 처음 연주 활동을 시작한데 비하여 출발부터 화려하였다. |
이후로도 그녀의 '신동'적인 경력을 계속 이어져, 디지 길레스피, 오스카 피터슨, 조 윌리엄즈, 클락 테리 등, 쟁쟁한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실력과 경력을 인정받아 그녀의 나이 열 하나에는 버클리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아, 신동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 그녀는 드럼 이외에도 피아노, 비브라폰을 함께 연주하였고, 동시에 화성과 작곡을 공식적으로 교육받았다. 한편으로 케빈 유뱅스, 마이크 스턴, 브랜포드 마살리스 등 쟁쟁한 연주자들과 계속된 활동을 하였고, 또한 그녀의 첫 데뷔작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83년 그녀는 재즈의 본고장, 뉴욕으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1989년 LA로 이주하기 전까지 더욱 다양하고 많은 연주자들과 연주활동을 하게 되었다. 스탄 게츠, 제임스 무디, 레스터 보위, 파로아 샌더스, 카산드라 윌슨, 다이앤 리브스, 데이빗 샌본, 그리고 웨인 쇼터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인물들과 함께 한 이 시기는 어쩌면 그녀에 있어서 전성기같이 보인다. 1989년 LA로 이주한 이후 그녀의 활동은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 일찌감치 주목을 받은 탓인지, 연주보다는 영화, 텔레비젼 등 다른 일로의 외도가 잦다. 그러나, 동년배들로서는 꿈꾸기 힘든 위대한 연주자들과 함께 한 경력과, 오랜 경험으로 다시 음악에 몰두한다면, 재즈팬들을 분명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연주자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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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아마도 요즘의 대세는 이것 같다. 하나의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팔방미인이 대접받는 듯한 분위기이다. 여기 살펴보고 있는 드럼 연주자들도 다양한 형태의 음악 장르를 모두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위너드 하퍼는 결코 대접받지 못할 것 같은 연주자이다. |
대단한 힘의 소유자도, 그렇다고 정교한 부드러움을 무기로 삼는 연주자는 아니지만, 흙 냄새 물씬 나는 전통적인 하드밥 드러밍에 충실하면서도 전체의 리듬 변화를 관장할 수 있는 숨은 힘이 있는 연주를 펼친다. 사실, 위너드 하퍼는 드럼 주자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너무도 참여한 작품의 수가 적은 편이다. 그의 공식적인 활동은 1982년 덱스터 고든과의 연주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자니 그리핀 그룹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의 실력을 눈 여겨 본 베티 카터에게 발탁되어 그녀의 밴드의 정규 멤버가 되었다. 1986년까지 약 4년간을 그녀의 밴드의 일원으로 지내면서 그는 다수의 연주자들의 라이브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6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의 연주가 녹음된 것은 단 한편<Betty Carter, Compact Jazz series>에 불과하며, 그나마, 몇 트랙에서만 그의 활약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후로도 그의 독특한 연주형태 때문인지, 30점 이내의 작품의 세션으로 참여한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그의 동생 필립 하퍼와 결성한 'Harper Brothers'의 앨범은 구하기 쉽지 않고, 몇몇 앨범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연주자의 앨범이다. 그러나 몇몇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의 실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며, 특히 그의 세 장의 리더 작품은 연주 실력과 더불어, 앨범의 컨셉트와 구성 모두 잘되어 있어 비평가들의 좋은 평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보다 활발한 활동을 한다면, 이 색감 독특한 연주자가 주목받을 날이 머지 않아 도래하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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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반바지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양말의 외관. 스네어 하나, 심벌도 하나, 지름이 작고 대신 길이가 길다란 베이스 드럼 하나.. 일반적인 드럼세트와 비교하면 형편없어 보일 정도로 빈약한 그의 악기... 그런 것이 필자에게 있어서 레온 파커의 첫인상이었다. 재키 테라슨의 <Reach> 앨범을 듣다가, '그 드럼주자 참 잘 친다.' 하는 생각이 들어 앨범의 내지를 확인하고 그의 이상한 모습에 씩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레온 파커.. 1965년 뉴욕주 출신의 레온 파커는 세 살 때 처음으로 드럼 스틱을 잡았다고 한다. 열 한 살부터는 본격적인 연주자의 길에 들었으며, 열 다섯에는 로컬 재즈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이후 잠시 클래식 타악기 주자로서 교육을 받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뉴욕으로 본거지를 옮겨 배리 해리스로부터 본격적인 재즈 드러밍에 대한 교육을 받는 한편, 프리랜서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현대적인 드럼세트의 구성은 스네어 드럼, 베이스 드럼 이외에 몇 개의 탐탐 드럼과 라이드 심벌, 하이 햇을 비롯한 몇 개의 심벌 등으로 이루어진다. 게다가 취향에 따라 카우벨 등 잡화상을 방불케 하는 많은 기구를 붙여서 사용하는 연주자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그러나, 레온 파커는 베이스 드럼, 스네어, 그리고 심벌로 이루어지는 최소한의 세트를 즐겨 사용함으로서, 원류에 가까운 진솔한 연주를 들려줄 때가 매우 많다. 그렇지만 어느 한 순간도 빈 듯한 느낌은 전혀 주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요소가 레온 파커의 능력을 높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바로 이러한 세팅을 뉴욕에 진출한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실력만 놓고 본다면 어느 주자에 빠지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러한 점 때문인지, 그렇게 굵직한 연주자들과의 연주 경력은 많지 않다. 다만, 듀이 레드맨, 데이빗 산체스, 제시 데이비스 그리고 재키 테라슨과의 앨범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최근 젊은 신예 기타리스트인 찰리 헌터와 같이한 음반으로 다시 주목을 받고있기도 하다. 자신의 세 장의 리더작 또한 비교적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열 명 가운데 아마도 가장 독특한 경향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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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으로보다는 존 스코필드의 드러머로서 더 많이 알려진 빌 스튜어트 또한, 어린 시절부터 재즈에 대한 애정이 깊은 인물이었고 한다. 재즈와 R&B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앨범을 모아왔던 그의 아버지 덕분에 빌은 어렸을 때부터 재즈와 친숙했었고, 독학으로 드럼과 피아노를 익혀 학창시절 학교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
클럽을 전전하면서 그는 천천히 명성을 쌓아갔고, 끝내 래리 골딩스의 눈에 띄어 그의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뉴욕의 한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마세오 파커의 세션으로 앨범에 참가하였고 끝내 존 스코필드의 그룹으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약 5년간의 그룹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다른 연주자의 세션으로 녹음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조 로바노, 래리 골딩스, 팀 헤이건, 밥 벨덴 등과의 활동은 좋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1995년 블루노트에서 자신의 리더작을 발표하였다. 조 로바노 등 자신과 교분이 있던 출중한 연주자를 대거 초청, 수록곡 전곡을 자신의 자작곡으로 채우면서 작곡능력까지 과시하였다. 멜로디 라인이 다소 불안전하다는 느낌은 있으나, 미묘한 리듬의 변화에 신경을 많이 써, 드럼 주자의 리더작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발표된 두 장의 앨범에서도 거의 같은 경향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두 번째 작품 <Telepathy>에서는 첫 작품의 부족한 점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팻 매스니, 조지 가존, 마이클 브렉커 등의 앨범에 출현,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가 리더작에서 시도했던 리듬의 변화에 의한 곡의 재해석 작업이 보다 완숙해져서, 확실한 자신의 색을 정립하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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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허친슨의 아버지는 타악기 주자로서 어린 그레고리에게 타악기 연주를 직접 전수하고 자신이 이끌던 레게밴드에서 연주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레고리의 어머니는 대단한 재즈 팬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모아두었던 음반까지 물려받아 하나의 라이브러리라 할만큼 대단한 음반 소장가였다고 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그레고리는 자연스럽게 재즈 드럼에 접근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위하여 맨하탄 음대에 진학하게된다. '저의 음악적인 스승은 필리 조존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음악에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제게 영감을 주는 것은 찰리 파커의 음악입니다 |
. 파커의 음악은 제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저의 드럼으로 노래하는 것이죠.' 그의 말대로 그는 과거의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그들의 음악을 많이 들은 데에서 비롯한 새로운 재 창조적인 자세로 연주에 임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다른 연주자들에게는 반길만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른바 자신의 색을 확실히 갖춘 연주자의 앨범에는 거의 한번씩은 출현했을 만큼 바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97년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한 바 있는 레이 브라운의 <Superbass> 앨범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베티 카터, 에릭 리드, 조 헨더슨, 로이 하그로브, 앤토니오 하트, 조수아 레드맨, 밥 벨덴, 스티브 윌슨, 케빈 마호가니, 로드니 휘태커,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등, 중견 연주자, 신예 연주자 모두와 성공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대학 시절 저스틴 디치시오의 문하에서 같이 음악을 배운 케니 워싱턴은 "허치슨의 연주는 그가 얼마나 드럼과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은 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타 주자들과는 확실히 다르게 그는 다른 악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를 부각시키도록 연주를 하지요."라고 그를 평가한다. 전통에 충실한 어법과 확실한 기본기, 거기에 더하여 다른 연주자에 맞게 움직일 수 있는 폭넓은 이해로 인하여 앞으로도 더욱 바쁜 연주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이른바 영 라이언으로 대표되는 신세대 연주자들과, 그 이전 연주자들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아마도 '교육'인 것 같다. 본지에 계속되고 있는 시리즈를 보더라도 요즘 웬만한 연주자의 이력에는 버클리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의 이름이 붙어있다. 두 번째는 선대의 많은 연주를 CD라는 좋은 매체를 통하여 많이 듣고 자랐다는 것이다. 이는 요즘의 연주자들의 경우 주먹구구식이 아닌 체계적인 교육을 통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테크닉이 확보가 되었다는 것이며, 음악의 구조와 화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좋은 음질로 선대의 음악을 감상함으로서 자신의 연주를 계속하여 벤치마킹 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들의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연주는 풍부한 감성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머리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끊임없는 벤치마킹을 통해서는 자신의 특성이 많이 무뎌지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 드럼의 경우에는 이러한 단점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탑 심벌과 하이햇으로 리듬 분할 및, 2, 4 박에 붓점을 가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었던 케니 클락에 의한 커다란 패러다임의 변화 이후에 별다른 큰 흐름의 변화가 없었을 뿐더러, 맥스 로치, 아트 블랙키, 필리조 존스, 로이 헤인즈, 토니 윌리엄즈 등을 제외하고는 블라인드 폴드 테스트로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연주자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신세대 드럼주자 브라이언 브라이드의 몇 가지 새로운 시도는 이러한 현재의 드럼 주자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이에 대한 이야기 전에 그의 약력을 간략히 정리 할 필요가 있겠다. 브라이언 브레이드는 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줄곧 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미국의 교회, 특히 흑인이 중심이 된 교회는 자연스럽게 가스펠을 접할 수 있는 장소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그는 바이얼린을 처음 자신의 악기로 삼아 연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교회밴드에서 드럼을 맡고있던 자신의 형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스틱을 들게 되었고 이후 그는 드럼주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는 재즈와 거리가 있는 활동을 하였다. 교회 반주자, 그리고 지역밴드의 일원으로 R&B 스타일의 팝 음악을 주로 연주하던 그는 친구가 선물한 음반을 듣고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뉴올리언즈에 있는 로욜라 대학으로 진학하여 공부와 연주를 계속하던 그는 피아노 주자 존 코워드를 만나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그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테크닉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공연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장르를 떠난 다양한 연주 활동이다. 비록, 여타 다른 연주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성은 아니지만, 그의 연주의 일차적인 특성은 일차적으로 성실함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전통적인 어조로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의 소리는 매우 경쾌하다. 마치도 고무공이 튀는 것처럼 넘쳐나는 스윙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특히 아주 빠른 곡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브라이언 브레이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연주자들이 브라이언 브레이드를 세션맨으로서 선호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브라이언 브레이드는 바쁠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보다 그의 색을 분명히 가지려는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대학 시절 교분을 가졌던 존 코워드와 결성했던 'Brian Blade Fellowship'을 통하여 브라이언 브레이드는 현재의 드러머로서의 드러머의 한계를 넘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첫 리더작인 <Brian Blade Fellowship>과 최근 발표된 두 번째 리더작인 <Perceptual>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분석에 더욱 무게를 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두 작품에서는 기본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연주자들의 구성.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교분을 가졌던 존 코워드를 비롯, 멜빈 버틀러, 데이브 이즈리, 크리스토퍼 토마스, 마이런 월덴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이 계속 되고 있으며, 이들간의 역할 분담도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두 번째는 기본적인 전개 방식. 기본적으로 이들이 연주하는 곡들은 자작 곡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 대부분을 브라이언 브레이드와 존 코워드가 담당하고, 편곡은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브라이언 브레이드와 그의 친구들'은 브라이언 브레이드의 또 하나의 악기가 되는 셈이며, 그안에서 자신은 드럼 주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두 장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의 드러밍은 여타 연주자의 세션으로 참여할 때에 비하여 조금씩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추측컨데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 당분간 계속 될 것으로 보이며, 이 젊은 드러머의 작은 도전에 조심스러운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