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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5)*회개
사도행전 2장 14-21절 / 송태근 목사
⚑“우리가 어떻게 할까?”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보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2장]을 마치려고 합니다. 2장이 대체적으로 길어요. 선교 부분을 대체적으로 본문에서는 생략을 했지만 오늘 내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한 번 건드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를 우리 잠깐 보도록 하지요. 우리 [2장 14-21절]을 좀 볼까요? 저하고 한 절씩 교독을 하십시다.
➤“14. 그러나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이르되,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지금은 겨우 세시이므로 너희가 짐작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술 취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 오히려 대언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니라, 일렀으되, 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아들딸들은 대언하며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들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날들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 위에 부어 주리니 그들이 대언하리라.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이적들을 보이며 아래로 땅에서는 표적들을 보이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저 크고 주목할 만한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뒤로 넘어가서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이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동일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니라.” 아멘! 초대교회 나타난 이 현상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저들이 새 술에 취했구나! 술이 새로 나왔나 보다. 취해도 어떻게 저렇게 취하냐?” 그러는 가운데 사도 베드로가 “아니다” 하면서 최초로 설교를 하는 내용이지요?
설교 본문이 워낙 길기 때문에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이 설교 내용을 놓고 신학교에서 설교를 가르치는 설교학 교수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설교만 연구를 해요. 그래서 ‘어떻게 설교를 잘 전달하고, 좋은 내용으로, 어떻게 논리적으로 틀을 짜는가?‘ 이것을 공부해서 저처럼 목회 현장에서 가르치는 후학들을 위해서 가르치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번은 이 성경에 나타난 몇몇 설교를 집대성 해 가지고, 평가를 좀 한 겁니다. 설교학 적으로 이 설교는 어떤 장점이 있고, 약점이 있는가? 이분 설교는 어떻게 강점이 있고, 약점이 있고, 이런 평가를 좀 한 거예요.
베드로의 설교는 설교학 교수들의 평가에 의하면 어느 정도 평가가 나왔다고 생각하세요? 몇 점쯤? A, B, C, D, E로 치자면? 몇 점쯤 평가가 나왔을 것 같아요? C? 너무 박하네요. 아주 낙제 점수가 나왔습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는 설교학적 관점에서는 거의 논리력, 설득력, 감화력 다 떨어진다.‘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TOP class의 평가를 받은 분이 계세요. 누군지 아세요? 스데반입니다. 이 두 분의 직책을 한 번 보세요. 베드로는 사도예요. 제자예요.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런데 스데반은 집사예요. 우리식으로 표현을 하면 집사예요. 우리식으로 설명을 하면 평신도예요.
이제 [사도행전 7장]쯤 가면 그분 설교를 만나겠는데, 그분 설교를 쭉 읽어보면 우선 가장 탁월한 게 논리적인 설득력입니다. 그리고 성경 신학적 관점이 굉장히 탄탄해요. 놀라울 정도의 구성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 베드로의 이 직선적이고 투박하고 막 집어던지는 식의 설교! 인정사정 보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고, 막 집어던지는 식의 설교! 그런 설교를 듣고는 하루에 남자의 수(數)가 삼천 명 이상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스데반 설교를 듣고는 몇 명이 돌아왔나요? 돌아오기는커녕 그 청중들에 의해서 돌 맞아 죽었어요. 최초의 石(석)死(사) ^^ 너무 진지하게 듣는 것 같아서 분위기를 한 번 흔들어 본 겁니다.
이게 뭘까요? 자! 여기에서 성경 기록자가 사실은 말하고 싶은 초점이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설득력, 감화력, 논리력에 그 결과가 있지 않습니다. 설교는 항상 두 가지 주된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청중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오해를 해요. 많이 배워야 되고, 여러분 그런 측면에서는 그 유명한 논리에 불을 붙였다는 별명을 가진 (마틴로이드. 존스) 같은 목사님은 성경 강해자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그분의 설교 영향을 받지 않은 신학도들이 있을까? 목회자들이 있을까? 많은 영향력을 주었지요.
저도 그분의 [로마서], [에베소서] 거의 참고를 합니다. 아주 탁월하지요. 그분은 궁중 의사 출신이에요. 신학을 하지 않았어요. 또 영어권에서도 그만한 설교자가 나오지 않지요? ’황금의 입‘ 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스폴전) 저는 학부 졸업하면서 그분의 설교를 논문으로 한 번 연구를 해 본 적이 있어요. 그분은 침례교 목사인데 철저히 [칼뱅주의자]에요. 그런데 그분이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서재에서 놀았어요. 그게 다예요.
그런데 오늘날 영어권에 아직도 (스폴전)을 이을만한 설교자가 안 나온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인물들이지요. 이 베드로의 거칠고, 투박하고, 직선적이고, 친절하지 않은 이 설교를 듣고는 사람들이 삼천 명씩 돌아와요. 그런데 스데반 설교를 듣고는 돌을 던져 죽이더라고요. 그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감화력 있는 설교를 듣고는? 그러니까 설교라는 것은 절대 설교자의 논리력, 학력, 설득력, 전달력에 있지 않아요.
’성령님의 역사‘ ’하나님의 주권‘이다.
여기 강대상에 아무리 누가 서더라도 항상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는 태도 가운데 가장 놓치지 말아야 될 중요한 자세는 뭐냐 하면 “오! 성령님! 오늘도 내 마음을 열어주셔서 저 목사님의 곤고한 설교를 잘 알아듣게 지혜를 열어주시옵소서.”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거예요. 믿습니까? 자! 이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의 반응이 어땠나?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2장 37절] 같이 읽겠습니다. ➤37 “이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까? 하거늘” 자! 앞을 보십시오.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까?” 요즘 설교의 위기를 이렇게 설교 학자들이 진단하고 있어요. 오늘날 설교들이 거의 ’퍼니즘‘에 빠졌다. ’재미주의‘ 그러니까 설교자들도 거의 코미디언 수준에 이르러야 사람들이 안 졸고 들어요. 굉장히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항상 2천 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타락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가?‘ 하면 강단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복음이 선명하게 전해지지를 못하고 재미주의에 빠져버린 거예요. 오늘날 어떻습니까?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
우리 기독교가 그렇게 가고 있어요. 그래서 스타 목사를 찾아요. 감화력 있는 목사를 찾아요. 설득력 있는 목사를 찾고, 학벌 좋은 목사를 찾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건 위기에요. 저는 여러분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힘주어 이 연사는 강조하는바 “은혜 받았다.”는 얘기에 속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 받았다는 것은 ’두 가지’에요. 첫째, “오늘 설교 내 생각하고 똑같다. 나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오! YES! 맞아. 저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듣기 좋았다.” 그게 은혜 받은 걸까요? 정말 은혜를 받았다면 오늘 [37절]에 들쑤심이 내 속에 있어야 돼요.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이 신음 같은 고백으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설교 헛듣고 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 설교자들이 어떤 유혹에 넘어가느냐? 하면 ‘오늘날 이 청중들이 무얼 필요로 하느냐?’ 현장의 욕구가 뭐냐? 그래서 거기서부터 설교의 소스를 시작하고 찾아요. 망하는 거지요. ‘설교’라는 것은? ‘메시지’라는 것은? 청중이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 기초가 되어서는 절대 안돼요. ‘하나님이 이 고통 가득한 세상에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가?’ 여기서부터 ‘설교의 필요’는 시작이 돼야 됩니다. 동의 하십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설교가 거의가 ‘청중의 필요는 뭐냐?’ 그래서 [시장조사]라는 이런 환장할 짓들을 해요.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만들었지요? 그 유명한 일화 가운데 “절대 나는 시장조사 같은 걸 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면 발전이 없다. 만약 내가 그때 시장 조사라는 것을 했더라면”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다니던 시대 아닙니까? 사람들이 “더 빨리 달리는 말은 없느냐?”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 아닌 자동차를 만들어 냄으로써 시대를 바꿨잖아요. ‘시장 조사’라는 건 웃기는 겁니다. 더더군다나 기업인들도 그런 머리를 쓰는데, 우리 기독교가 시장성을 생각을 해요? 아니에요. 시장이라는 것은 대중의 대세를 본다는 것인데 기독교의 역사를 보세요.
아니, 기독교의 역사를 제한할 필요도 없이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대중과 대세가 옳았던 적이 있나? 대중은 십자가를 보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게 대중의 소리였어요. “바라바를 놓아주라” 여러분! 설교라는 것은 “청중이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로부터 시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얼 말씀하고 싶은가?” 그래서 설교자는 청중의 편에서 아우성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아우성을 치고 악을 써 내려가면 돼요.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왜? 설교의 전달이 전달력에 논리력에 이해력에 있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요. 믿습니까? 아멘!
죄 사함을 받았으니, 너 돌아서라.
자! 이 청중들의 반응에 대해서 베드로가 이제 무얼 얘기하는가? 좀 보십시다. [38절]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원문에 보면 사실은 순서가 뒤집어져 있어요. “죄 사함을 받았으니, 즉 구원을 받았으니 회개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오늘 한글번역 성경은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죄 사함을 받으리라” 논리적으로도 이게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훨씬 우리가 이해하기가, 설득되기가 쉬워요. “회개하라. 그리하면 죄 사함을 받으리라” 그런데 우리 교단이,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신학적 입장을 <개혁주의 입장>이라고 얘기합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으니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여기 시체 하나가 있어요. 제가 이 시체를 보고 “너 피아노 있는 데까지 뛰어갔다가 오면 살려줄게.” 말이 돼요, 안 돼요? “너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게 똑같은 얘기거든요. 죽었는데 어떻게 회개를 해요? 영이 죽었는데 감각이 없는데 어떻게 회개를 해요? 사실은 뭐예요? “살려놓고 회개하라”는 거예요. “살려놨으니, 구원 받았으니, 죄 사함을 받았으니, 너 회개해라” 그 말이에요. 그래서 회개는 누가 하느냐? 구원받은 자만 회개해요. 회개는 조건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의 필수적인 정서적 열매에요. 삶의 열매여야 합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이렇게 썼느냐? 이걸 우리는 ‘수사적 표현’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걸 놓쳐서는 안 되지요. “성경이라는 책은 하나님이 인간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에서 쓴 책”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돼요. 여러분! 오늘도 동쪽에서 해가 뜹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법이지, 오늘도 지구가 돌고 있군요.“ 이렇게 얘기합니까? 누가? 그렇게 얘기 안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태양이 중심이에요? 지구가 중심이에요? 이 천체를 보면 태양이 중심이지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은 어떻게 해요? ”오늘도 해가 동쪽에 떠오릅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사적 표현’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글을 쓰도록 명령하셔서 이런 순서로 글이 쓴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용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반응으로서 눈물을 흘리고, 삶이 고쳐지고, 회개가 나오는 거예요. 이런 참된 회개가 아직 없다면 그분의 구원은 문제가 있거나 다시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나는 정말회개 했는가?“ 뼈 속 깊이 십자가 앞에 부딪히는 그런 정면 승부의 회개가 있었는가? 구원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이 회개가 나와야 돼요. 왜? 살려놓고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회개는 조건이 아니라니까요. ”회개하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라“ 그 말이에요.
이어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잘 보세요. [38절] 하반절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무얼 받고? “침례(혹은 세례) 또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침례(세례)는 구원의 조건입니까? 침례(세례)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까? 그러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한편 강도, 어떻게 이해하실 거예요? “네가 나와 함께 오늘 어디에 있으리라?” “낙원에 있으리라” 그 사람에게 “이거 잠깐 풀어줄래? 세례를 줘야 되는데” 그러셨나요? 그냥 낙원으로 갔어요. 같이 처형당해서 세례 안 받았잖아요.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의 예식일 뿐이에요.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이건 거지요. 우리 옛날 우리 어머니, 아버님들 피난 시절에 만남이 이루어지면 언제 면사포 쓰고 결혼식을 합니까? 그냥 신고만 하고 사는 거예요. 아들, 딸 낳고 손자 보면서 사는 거예요. 부부 아닙니까? 부부 아니에요? 혼인신고 하면 부부가 되지요? 그렇지만 결혼식은 못 했어요. 형편이 안 되고 어려워서 그래서 그분들의 평생소원이 늙어서도 면사포 한 번 써 보는 것, 아내에게 면사포 한 번 씌워주는 게 소원이 아니에요? 그래서 늦깎이 결혼식들을 가끔 하지요? 예! 그겁니다. 그 결혼식 소중해요, 소중하지 않아요? 소중하지요. 결혼식은 이런 거예요. 온 천하에 내 신랑을, 내 아내를, 천명하고, 공개하고 커밍아웃 하는 겁니다. “나는 이제 이분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신랑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천하에 공개를 하는 사건입니다.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그게 침례(혹은 세례)에요. 그러니까 세례(침례)를 여러분들이 소중히 생각하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례(침례)를 받으세요. 그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예식의 순간으로 여러분들이 이해를 갖고 계셔야 됩니다. 침례(혹은 세례)를 받았으면 그다음에 어떻게 해요? 신랑이 남기고 간 사랑의 편지 한 통이 있어요. 그 사람의 편지를 읽어가면서 신랑의 마음을 헤아려야 되겠지요. 신랑이 남기고 간 편지 한 통이 뭘까요? 바로 이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전체의 이야기가 이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 신랑이 신부인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고, 어떻게 살 것이고, 여기에 다 있어요. 이 성경책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고 간 연서예요. 요즈음은 편지들을 안 쓰지요? SNS를 다 사용하기 때문에 말도 짧아지고, 전부 기호화 되고, 부호화 돼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ㅋㅋㅋ 그러는데 뭐가 웃긴다는 얘기인지? 저도 하기는 저도 가끔 그런 표현을 해요.
할 수 없이. 옛날에는 다 손 편지를 썼지요. “말없이 건네주고 떠나간” 이런 가사가 담긴 노래들이 많았어요. ‘편지’ 훈련소에 간 아들에게, 군대 간 아들에게 첫 편지가 왔어요. 그때 마침 엄마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네요. 우체부 아저씨가 “여기 창식이네 집이지요? 훈련소에서 편지 왔습니다.” 그러면 빨래하던 엄마가 “그거 거기에다 그냥 두세요.” 그러고 계속 빨래질 할 엄마가 있어요? 얼른 장갑을 벗고 달려가서 편지를 뜯지요. 그리고는 벌써 울 준비가 다 돼 있어요.^^ 아들의 삐뚤삐뚤한 글씨만 봐도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에요.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절절히 엄마 안부, 아빠 안부, 동생 안부! 그런데 건너 방에서 할머님이 “누구한테 편지가 왔다고?” “예! 창식이 한테 편지가 왔어요.” “그러면 내가 까막눈이니까 편지 읽어라” 그런데 끝까지 거의 다 내려갔는데도 할머니 안부가 없어요. 그래서 엄마가 막 지어가지고 “할머님은 안녕하신지? 이러고 읽는 것 아니에요? 제가 그런 엄마를 실제로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이놈의 자식이 할머니 안부를 빼먹은 거라. 군대에 가면 할머니 안부도 꼭 여쭈세요. 집의 개 안부까지 물으면서 말이지요.
우리 막내 동생이 하사관으로 군에 입대를 했었는데 얘는 ‘개’ 하면 미쳐요. 집에 루비라는 개가 있었는데? 저는 개를 보면 일단 걷어차고 그래요. 그러니까 루비는 나만 보면 꼬리를 내려요. 그런데 편지가 왔는데 형 안부는 한 마디도 없고 ”집에 루비는 잘 있는지요?“ 그런 편지를 한 번 집에 보낸 적이 있어요.
사랑하는 이로부터 편지가 오면 그거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지요.
외우다시피 읽어요.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롯 헤어졌으나“ 여러분 성경책 너덜너덜 합니까? 헤어졌습니까? 요즘 ‘후딱 교인들’이 많이 생긴다고 그러지요? 일주일 내내 성경책 선반 위나 컴퓨터 앞에 놨다가 일주일 동안 먼지가 쌓이면 주일날 아침에 오네요. ‘후~~’ 먼지 불어 ‘탁’ 책을 두드린다. 이게 ‘후~탁’ 교인이에요. 그런 사람들 없어요? 이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과 장차 새살림을 시작할 아름다운 청사진과 그린들이 유업을 입을 자들에게 다 기록한 거예요.
선포하고 공개하는 사건
그래서 야경이 깊기 전에, 새벽이 오기 전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처럼 이 성경을 읽고 또 읽고 꿀 송이 보다 더 단 말씀으로 읽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지겠구나! 우리 신랑이 이런 준비를 해 가지고 오겠구나!’ 유대 결혼식을 설명할 때 설명 드린 적이 있지요? 정혼과 결혼 사이에 남은 1년 별거 기간 동안에 신부는 무얼 합니까? 신랑 집 가풍에 모든 살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세례 받은 사람들은 그냥 단순한 세례가 아니라 ”이제 나는 이 신랑의 아내, 신부가 되었습니다.“ 를 천하에, 일터에서,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선포하고 공개하는 사건이에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매뉴얼대로 살아야 됩니다. 이때 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가? 이제 성경을 통해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으로 넘어가서 [43절] 한번 같이 읽을까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통하여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개역개정) [43] “모든 혼 위에 두려움이 임하고 사도들을 통하여 이적들과 표적들이 많이 일어나더라. [44]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45]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킹제임스 흠정역 1611) 이렇게 세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일 먼저 나타난 삶의 변화가 뭐냐 하면 ‘호주머니의 회개’예요. <존 웨슬레이>가 유명한 얘기를 했지요?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교인은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저는 그 말을 200프로 동의합니다. 정말 번 어게인 한 ‘거듭난 성도’는 제일 먼저 물질관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호주머니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돈의 방향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신약 성경[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라는 인물이 나와요. <삭개오>라는 이름 뜻이 뭔지 아세요. 따라서 하십시다. ‘청결한 자, 깨끗한 자’ 아마 삭개오의 엄마, 아버지는 그를 낳았을 때 그런 인생을 소망하며 그런 복된 이름을 붙여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조국에 비수를 들이대는 세리로 살아요.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지요? “그는 세리요, 부자였더라.” 그때 세금 법은 이렇게 돼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에 일정한 액수를 바치면 나머지는 얼마를 징수하던 자기 몫이 돼 있어요. 그래서 거의가 세리들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전부 유대인을 고용하여 쓰곤 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삭개오에요. 세리장입니다. 민족들에게, 동족들에게 원수 취급 받았어요. 개, 돼지 취급 받았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세리는 죄인이라고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날 그 마을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지런히 호기심에 야생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지요. 키가 작았어요. 야생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는 그 인생의 콤플렉스, 또 여러 가지 부당하게 살았던 삶의 멍에를 메고 하루, 하루 부자로 살았는데 행복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의 욕구와 욕망과 추구는 끝나지를 않았어요.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이때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나무 꼭대기에 있는 삭개오를 발견하게 돼요. 발견하자마자 첫 마디가 뭐였지요? “삭개오야! 내려와라!” 보세요. 왜 첫마디가 “내려오라!” 일까요?
삭개오의 일생은 계속 남의 등 밟고, 남이 쌓은 것 밟고, 움켜쥐고 올라가는 인생이었어요. 꼭대기로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가는 인생이었어요. 그러니 그 피비린내 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하고, 힘들고, 고단하고 피곤했겠어요? 얼마나 그 마음에 평안이 없었겠어요? 이때 예수님은 그 삭개오를 보자마자 첫 마디가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에게 인사하십시다. “내려오십시오!” 여러분! 내려와야 삽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창조의 질서는 아래로, 아래로 흘러야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믿습니까? 은혜도 낮은 곳에 고입니다. 그걸 가장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 누구입니까?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아래로 내려오셨어요. 죽기까지 복종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살아난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때 민족이 살고, 인류가 살아납니다. 여러분들이 내려가는 곳에 생명의 도화선이 불붙기 시작합니다. 고지가 아니에요. 저지대로 내려가야 돼요. 그것이 이 땅의 몸 된 교회에 명하신 예수님의 명령이에요. 내려가야 돼요. “삭개오야! 내려와라!” 그랬을 때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셔서 삭개오에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삭개오가 처음으로 반응했던 고백이 뭐였습니까? “내가 이제까지 잘못 살았던 모든 삶을 회개합니다. 네 배나 갚겠습니다.” 네 배! 그도 율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제일 먼저 무슨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주머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중요한 열매입니다. 이게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물질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는 움켜쥐고 쌓고, 모으고, 잡아당기고, 깔고 앉고, 남 죽이고, 이것이 사람들이 살아왔던 패턴이었다면 이제는 흩어줍니다. 아멘!
그리고 그 다음 변화를 성경을 보세요. ➤[47절]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 받아야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게 더하시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백성들에게 무얼 받았어요? ’칭송(호감)‘을 받았어요. 칭찬을 받았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믿는 자들에게 구분 없이 칭찬을 받는 자가 돼야 됩니다. 믿습니까? ’아이, 뭐 하나님만 알아주면 되지‘ 무얼 무르고 하는 얘기에요. 하나님도 뭐라고 하셨어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외모 본다고 하셨지요. 웃음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느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인간은 한계 때문에 외모를 보고 그 속을 평가한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이야 속을 직접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외형, 태도, 중요해요, 중요하지 않아요? 거기서 외모는 생긴 모습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태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자! [46절]을 보시면 이런 대목이 있지요? [46] “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킹제임스 흠정역]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개역개정) 어디에서 떡을 떼며? 성전에 모였던 감격과 은혜와 기쁨이 어디에까지 확장되고 있어요? 집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어요. 할렐루야! 이거예요. 이게 뭐예요? <선교적인 제자로의 전환의 삶>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집에 가서 하도 못되게 구니까 사모님이 ”여보, 이러지 말고 이불 싸가지고 강대상으로 갑시다. 당신 강대상에 서면 천사의 말을 하는데 왜 집에만 오면 왜 이렇게 애들을 잡느냐?“ 고. 절대 우리 집 얘기 하는 것 아니요. 웃음^^ 그런데 이런 패턴이 너무 많아요. 교회 공동체에서는 다 기쁨을 가장할 수 있고, 그런 척 표정을 꾸밀 수 있어요. 교회에서는 다 천군, 천사인데 집에만 들어가면 거의 사탄 수준으로 애들에게 아픔을 주고, 아내에게 아픔을 주고 하는 사람들, 가장들! 얼마나 많아요?
성령님의 충만함 첫 번째 순종의 현장이 어디로 제시 되었다고요? 가정!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첫 번째 순종의 현장이 가정이란 말이에요. 예배당에서 가정으로 이 모임의 기쁨과 은혜가 지금 흘러가고 있고, 확장되고 있단 말이에요. 오늘 여기에서 예배를 했다면, 이 예배의 감격과 들은 말씀이 일터로 가정으로 확장되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뭐가 있어야 돼요? 칭찬이 있어야 돼요. 믿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백부장이 나와요.
로마 군대의 꽃이지요. 우리 군대편대로 이야기 하자면 중대장 이상의 계급인데,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 장교의 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장교를 보고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 극찬을 했어요.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그 칭찬 뒤에는 사람의 칭찬이 있었어요. 그 백부장 집에 종이 하나 있었는데, 종은 그 당시에 물건이에요. 하나 죽어 나가도 누구 하나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문화요, 사회적 배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어가는 종을 백부장이 데리고 고쳐달라고 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내 아이가 죽게 되었나이다.“ 이 백부장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첫 번째 열매 중에 하나가 생명에 대해서 관점이 달랐어요. 인격을 물건으로 보지 않았어요. ”내 아이가“ 자녀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생명관이에요.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높낮이를 보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보신 예수님의 눈으로 똑같이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유대 장로들이 이 로마 장교를 칭찬을 해요.
예수님에게 추천을 하지요? ”이가 자기 재정을 드려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어줬습니다. 이분에게는 이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이분의 요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이 관계로 말하자면 원수지간이 아니에요? 유대 장로와 로마 장교는 하나는 식민지 주둔군이고 하나는 그 백성들이고 그런데 이 유대 장로들이 이 백부장을 칭찬을 해요. 예수님도 그 칭찬을 거쳐서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인물을 내가 믿음을 본 적이 없다.” 극찬을 하지 않습니까? 항상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는데 칭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흘러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대 여러분들에게 이 주변에서 싸우지 마세요. 손해 보세요. 그냥 주세요. 싸우면 안 됩니다. 어금니를 꽉 물고 참으세요. 여기 지금 유턴해서 택시 많이 서지요. 주일날 택시 많이 타고 오세요. 그런데 그것은 잔돈 악착같이 받아 챙기느라고 그러지 마세요. 잔돈은 드리세요. 애기를 들어보면 그분들 하루에 그 택시 하시는 분 사납금 지급하려면 보통 고된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분들이 삼일교회, 기사 분들이 다 아시는데 뒤에 빵빵 거리지, 그런데 그거 잔돈 받겠다고 앉아 있으면 안돼요. 제가 돈의 값어치를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빵빵거리면 뒤에 또 고개 돌려 가지고 “지금 잔돈 받고 있잖아요.” 예배 오는 사람이 이 눈을 부릅뜨고, 그러면 되겠어요? 제가 깜짝 놀란 게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우리교회 반주하는 자매 아버님이 이 운전을 하시더라고요. 그런 저를 보고 하는 얘기가 “거기에 담임 목사님의 새로 오셨나?” 그러세요. 저를 뒤에 앉혀놓고 그래요. 이렇게 유리알처럼 투명한 세상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점점 칭송이 높아 가야돼요.
칭찬을 쌓아가는 것은 수십 년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방에 무너진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욕을 먹고 성도로 목사로 사는 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어요. 대형 교회마다 사고 안 터지는 교회 지금 있습니까? 전부 구설수에 올라 가지고. 이게 뭡니까? 그래도 우리는 또 다시 일어나야 됩니다. 차곡차곡 선교적 제자로써 이 초대교회의 순종처럼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받은 은혜와 복음의 기쁨을 저 문을 나서는 순간 거리로, 일터로, 가정으로, 확장 하게 되는 복이 있기를, 순종이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