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시,
열린 하늘은 적당히 흐리고 선선함을 뿜어내는 기온이 산행엔 최적의 날씨다.
늘-씬한 가을을 만날 수 있는 아파트 광장에 모일 사람은 미소를 머금고 다 모였다,
번개팅 참여 희망자 11명 중 회장님 부부만 사정상 미리 얘기하고 빠졌지만....
보기엔 작지만 키다리 홍만이도 때려눕힐 것 같은 머프가
야무지게 쏱아내는 질주의 본능을 나태함으로 무디어진 고속도로에 깔고 있다.
풍년가를 울릴 황금물결을 타고 천주산을 넘고 단숨에 넘는가 싶더니
함안 IC를 내팽개치고는 벌써 향긋하고 푸짐함이 물들어 가는 함안 5일장을 지날즈음
멈추지 못하는 달림의 끝에서 내 마음은 몇 번이고 다짐을 해 본다.
오는 길에 들려 농심을 맛보고 남음이 있다면 가족의 여흥도 챙겨보리라.
누르면 주저 앉을 것 같고 두 팔을 뻗으면 다소곳이 안길 것 같은 함안 면소재지가
10년 전이나 다름 없이 유쾌한 노년의 모습과 갈라진 흙손으로 반겨주지만
퇴색함이 지나친 그 모습에 난 실망을 하고 말았다, 적당히 변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세월만 먹을 줄 알았지 변화를 모르는 그 어리석음과 우직함에..........
09시 10분,
여항산 아래 볕바른 곳 좌촌리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쁘게 몰아온 숨을 미련없이 끈다.
깊은 산 속인 이 곳이 오히려 화장을 하고 온 갖 치장을 하는지 괄목의 변화를 느끼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싶다. 더 이상의 오지가 아니라 지상낙원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날씨도 그만이라 힘들고 먼 3코스로 산행길을 택하고는 돌담길을 돌아 오르니
늙은 감나무 아래 질서 없이 나뒹구는 미어진 홍시를 주워들고 맛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워 하던 어느 시인의 '조홍시가'가 생각난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알밤 터지는 소리가 시냇물소리와 장단을 이루고
빠알간 홍시의 단맛과 가쁜 숨소리가 어우러지는 쓴맛의 조화로움이 계속된다.
샘터를 지나고 40여 분을 오르자 중산골과 정상으로 가는 삼거리 이정표가 외롭다.
무표정의 그 습성으로 아무런 일도 없다는데 나만 천금의 미소로 포장 하는 건 아닌지........
벌써 이 고개가 끝이냐고 되묻는데 처음부터 정상 앞까지 계속되는 된비알이다.
그런데 묵직한 내 꼬리를 잡고 끝까지 뒤를 쫓는자가 있어 산대장 자리가 위태로울 즈음
산빛이 열리는 정상 아래 미산령 갈림길에 토실토실한 도토리가 홀라당 드러누워 뒹군다.
낮은 포폭으로 가라하여도 갈 수 있는 곳이니 오늘 고생은 끝이라는 실한 거짓을 치고 만다.
10시 20분,
헬기장 옆 세 갈래 갈림길,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30분) 미산령이고 직진하면(10분) 정상이다.
칼을 세워놓은 듯한 정상 부근에 구름도 바람도 햇살마저 길손이 되는 평원(?)이 있다니.....
눈을 감고 마파람에 얼굴을 맡기고는 가슴으로 잠시 사방을 둘러보니
'방어산' 마애불이 가슴을 벌리고 내 가슴엔 속살거리던 거제도가 무지개로 뜬다.
10시 30분,
구름은 물러나고 갈바람이 샘솟는 땀을 훔쳐가는 옹골차고 늠름한 여항산 정상에 섰다.
기세 당당하던 뫼마저 발 아래 있고 새털 같은 구름마저 물러난 오늘의 조망은 천하절경이다.
남쪽으론 다도해를 품은 진동만이 정겹고 비껴앉은 무학산의 그리메를 넉넉히 즐길 수 있는 곳,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엔 우리가 사는 뒷동네 불모산 레이더 탑마저도 미덥고 살갑게 느껴진다.
빛살처럼 가벼운 구름은 솔개가 되어 나래를 펴는데 정상의 나는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무거워 한다.
어찌하여 정상에 서면 힘겹고 어지럽던 세상사를 한 칼에 베여놓고 하늘 같은 세상만 보게 할까.
아무리 멀고 힘들어도 그래서 사람들은 말 없는 저 산을 오르며 나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
"힘들게 고생하며 왜 산에 오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비경을 보여주고 날이 오늘인 것 같다.
이렇게 푸짐한 진수성찬과 오장육부를 채우는 풍광의 경이로움에 오색 색칠을 더하는 여유로움,
내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서 세상에 고개를 숙이고 누구에게 더 이상의 찬사를 감히 하겠는가!
'여항산'에 지명에 담긴 깊은 뜻은 모르지만 얄팍한 나름의 해석으로 풀어보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하지 않는 마음(항산)이 한결 같은 산'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
올려다 보고 내려다 보고 아무리 팔방을 둘러보아도 어디에도 찌푸림이 없으니
오늘,
우리는 정신적 위안과 육체적 보약을 눈과 가슴으로 먹고 추억 속에 채우고 가는 행운아들이다.
정상석 아래 벼랑에 무거운 짐을 풀고 저마다의 간식을 나누며 허기를 달래본다.
과자 조각 하나에 더해지는 인정과 머루 포도처럼 검붉게 물드는 배맛도 일품이고
출저가 어디이든 최상의 맛을 풀어내는 이 곳이 명당이요, 삶의 안식처이다.
여기를 두고 백척간두의 위태로움이라 했던가!
이 바위 끝에서 내려다 보면 충격이 와 닿는 여기가 바로 그 곳이고 그 말이다.
먹음을 틈타 우쭐한 얌생이처럼 진동만이 안기는 벼랑에 올라 포효를 한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내 상관할 바 아니니 이 기쁨을 다 퍼 내놓고 가려는 심정으로......
심심해 못 견디는 사람과 오늘이 어제 같은 사람은 우리와 함께 해 보시라!
평범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무덤덤함은 변화와 함께 날개가 되고 새가 될 터이니....
천상천하를 굽어보는 해맑은 일권씨의 살인 미소는 내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
당분간 짱짱한 산길은 내가 먼저 좁힐 수 있으니 이에 위안을 삼으면 되겠지.
11시 30분,
3.5km 밖 남서쪽에서 손짓하고 있는 말끔한 서북산으로 뛰다가 몇 번을 치고내린 후
별천마을로 내려서는 갈림길 전망바위에 옹기종기 앉아 우리만의 소풍을 즐긴다.
희망가를 부르며 내려보는 별천부락이 그야말로 예쁘고 얌전하여 별유천지의 기운을 다 품고있다.
25년 전, 대학시절 봉사활동을 한다고 봇짐을 싸가지고 와서는 일주일 씩이나 저 계곡 아래서
삽과 꽹이로 길을 다듬고 리어카를 운반 수단으로 하여 집집마다 소독을 해 주고는
시원한 계곡 바위 아래 담궈놓은 동동주도 얻어 먹고 인심을 느껴었는데........
그 때, 지금 내 나이쯤 되었던 이장님은 수년 전 고인이 되셨다는 소식이 넘 서글프다.
12시 30분,
서북산 정상에 서니 진동만으로 다이빙을 해도 될 듯이 가깝고 잔잔하고 시리도록 푸르다.
정상석 뒤로는 우리가 왔던 능선이 치마주름처럼 핼쓱하고 여항산 정상이 젖무덤처럼 봉긋하다.
정상석 아래 6.25 당시 이 곳이 최대의 격전지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마른 꽃을 안고 외로이 서 있고
늘 그대 곁에 머물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고 있을 넋들이라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억새가 길을 안내하는 서북산 헬기장에서 한 발만 내려서면 여기서 부턴 가파른 하산길이다.
몇년 전보다는 몰라보게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하산길은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야야야!!! 힘이 남아 망아지처럼 뛰는 너도 조심, 힘이 부족해 쩔쩔 매는 나도 조심이다.
13시 20분,
마지막 갈림길이다, 왼쪽 임도를 따라 3km를 내려가면 편안한 하산길이요.
직진하면 3.5km(정상까지 1시간 40분 거리) 후방 땀깨나 흘려야 하는 봉화산인데 어쩌랴?
모두가 내 눈치를 살피는데 봉화산으로 가자는 눈빛과 꼬리 내리는 눈빛이 반반이다..
다다음 주,
설악산 능선을 제대로 밟으려면 빡시게 훈련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직진한다,
이 결정이 누구를 위한 변명이고 핑계인지 모르지만 ......
1km 정도는 산능선을 따라 이어진 임도라 걷는 데는 무리 없지만 볼 것은 개차반이다.
두드려 가며 오찬을 신명나게 먹어서인지 빠르기는 쏜살이요, 힘은 무량대각이다.
오르막길에 반쯤 흐드러진 야생밤도 주워 먹고 얼음물로 오장육부를 식히니 거칠게 없다.
봉화산 첫능선에 서니 진동 땅이 발아래 꿈틀거리고 잔잔한 파도소리가 뱃고동을 실어오는 듯하다.
첫능선에 올라서자말자 우측으로 가면 진동으로 하산 하는 길인데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 그런지 초입이 또렷하지 않아 리본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여기서 뒤돌아 보면 서북산과 여항산이 태산 같은데 저 길을 어찌 왔을까?
몇 번을 치고오르는 노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지만 봉화산 정상까진 길은 또렷하고
마치 흑갈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이 길은 푹신한 게 숲길이 엄청(?) 편안하다.
길을 따라 군데군데 멧돼지 놈들이 파놓은 게 밭을 일꾸어 놓은 듯 하지만
누군가가 함께 한 길이라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 지고
주둥이가 쟁기 같을 힘센 그 놈을 마난면 맞서 겨루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등산로에 떨어진 굵은 도토리를 줍느라 일행을 보내고 간만에 아니,
처음으로 혼자가 되어 앞서간 자들을 쫒아 걸으니 기분이 묘하고 이상하다.
15시,
내 마지막 인연의 장인 봉화산 정상이다.
정상석은 밋밋하지만 너덜바위가 있어 잠시 쉬었다 가기엔 그저 그만인 곳,
오래지 않은 현대의 인공미가 넘쳐 흐르는 황금빛 봉화대가 이 산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곳,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2% 부족한, 어쩜 그 보다 훨씬 부족한 느낌이 들어 개운치 못하다.
가방 무게를 더해주던 먹거리 떨이를 하고서야 본격 하산길(저수지 까진 2.5km)로 내려선다.
오늘은 누구라도 피곤한 육신이지만 마지막 하산길에서 횡재(?)를 나누어 가진다.
황갈색 참 도토리가 노다지로 뒹굴어 도토리 줍기 체험 2~30분인데 두어 대는 더 될 것 같다.
이 놈을 잘 말려서 묵 파티를 해야하는 숙제를 떠안고는 산길을 벗어나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오는 길에 알밤도 털어 먹고 그림 같은 전원 주택도 구경하고 신바람나는 하루를 마무리 한다.
17시,
약 14km, 7시간이 넘는 산행 후 하산 종료.
우리는 3주 연속 강행군 중이다. 설악산에서의 그 떳떳함을 위하여.......
가장 절망적일 때 떠오르는 말!
"맛나는 것 먹고 가자."그 말에 살아갈 용기를 얻는지 모르겠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서방님 마중을 나온 향미씨와 페트!
그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살면 평생을 나로 인한 고통들은 없겠지요.
'산수촌 산장' 식당에서의 일품인 오리 불고기 맛도 실컷 즐기고
향긋하고 감칠맛나는 산이 있어 더 즐겁고 행복한,
정지된 바람처럼 사소함으로 당당해질 수 있는 그런 하루였다.
첫댓글 이후 못다한 후기는 오후에 .......
멋진 하루였습니다.... 제일 맛있는 오리불고기..냠냠냠.....
맨 아래사진은 보물줍나요? 수고하셨습니다. 함 따라 부치야 될낀데..("된비알" 올만에 듣는 정겨운 단어입니다..^^)
이른 아침에 급하게 올리다 보니 중간중간 글과 사진을 빠뜨린 게 있군요, 저녁에 수정해서 다시 올리고 나머지 사진은 '이런저런 사진'란에 올리겠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는데 다른 님들은 산행준비가 잘 되어 가는지 모르겠군요.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특히,오리불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