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에서 물청소를 하고 있던 엄마는
정말 눈이 이만해져서는 소리를 친다.
"너 어떻게 온거야?"
뜨거운 물에 씻고 나니 엄마는 계속 왜 왔는지 물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어서 비행기 타고 왔어.
엄마 나 졸려."
정말 잠이 쏟아져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서
나는 대충 엄마가 묻는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엄마가 타주는 꿀물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승지야! 좀 일어나봐 밥 먹고 다시 자야지."
온몸이 쑤시고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기가 싫다.
대충 어리광 좀 피우다 다시 자야지 맘을 먹고
실눈을 뜨는데 온 식구들이 쭈욱 내 앞에 둘러 앉아 있다.
"왜 다 모여 있어? 뭐 재산 많은 할아버지 유언 기다리나?"
"기집애가 말을 해도.어떻게 된거야?"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막 아빠가 보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고 재인이 재신이 언니 승우
심지어는 소연이에 오빠까지 보고 싶더라니까?"
내 말에는 또 뼈가 있다.
엄마는 내게 눈을 흘기고 새언니랑 승우는 가만히 웃고
못 알아 들은 소연과 아빠는 눈이 똥그래지고
역시 똑똑한 오빠는 헛기침을 한다.
"고모 햄토리 인형!"
갑자기 재인이가 달려와 턱 밑에 얼굴을 들이민다.
"에?"
언니가 막 웃는다.
"아가씨가 갈 때 햄토리 인형 사다 준다고 했쟎아요."
무서운 녀석들 그걸 여지껏 기억 하고 있다니.
"재인아 고모 아직 아주 온거 아니야.
지금 햄토리 인형 이쁜거 찾는 중이야.
담에 올때 꼭 가져 올께."
아이는 내가 장난처럼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기대한다.
또 버릇처럼 약속을 하는 고모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준다.
그리고 금방 다음 약속에 행복한 웃음이 된다.
다음번에는 꼭 햄토리 인형을 사와야지
어쩌면 희원도 내 약속을 믿고 있을거다.
그냥 멋진 말이 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고개 끄덕여 대답했던
손 놓지 말자는 그 약속을.
깬 사람은 희원이 아니라 이승지 바로 나였는데...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식구들이 모두 잠들고 난 뒤
나는 살짝 집을 나섰다.
아이스크림을 한통 사고 야한 잡지를 한권 사서는
도진에게 간다.
깜깜한 병실안에 도진이 잠들어 있다.
잠든 도진의 얼굴은 왠지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가만히 보다가 진짜 자는건지..손가락으로 쿡 찔러 본다.
"아!"
"어? 안 자네?"
"바보 아냐? 자는데 그렇게 힘 조절도 안하고
쿡 찌르니까 깨지."
"자는척 한거지? 치사스럽게."
"뭐 사왔어?"
"아이스크림"
"아. 너무 하는거 아냐? 금식하는 사람한테."
"아니 이건 나 먹을거고."
"문병 오면서 선물도 안 사오냐?"
"사왔어. 근데 이거 이따 나가거든 봐."
"편지구나? 연애편지."
"어...니가 좋아하는 벽안의 미녀들이 나오는
연애편지다."
"헤헤. 이따가 밤에 봐야지."
"나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어."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한다.
갑자기 꾸역 꾸역 이상한 기분이 밀려 든다.
"너 또 울라구 왔지?"
"아냐. 나 이제 안 울어."
"근데 그 놈은 만났냐?"
"아니, 근데 왜 말끝마다 그놈이래?"
"그러는 너는 왜 나한테는 도진아 도진아
말까면서 그넘한텐 희원씨 희원씨 그러냐?"
"내 맘이지."
"못 만났어?"
"안 만나준대?"
"여행 갔대 방송 일주일분 이틀동안 밤새 녹음하고
오늘 아침에 갔다네 타이밍 죽이지?."
"아이고 아주 둘이서 지구를 한바퀴 돌지 그러냐?"
"이게 죽을라구."
"이미 생과 사를 두 번이나 넘나 들었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
"자랑이다."
"근데 숭지야!"
"응?"
"너 바보 아니냐?"
"왜?"
"지금 이 대목에서 서희원이 방송까지 접고
여행을 간다면 어디로 갔겠냐?"
"에?"
"니가 보고 싶어서 죽겠는 서희원이 밤을 새서까지 이틀 동안 그 고생을
하고 어디에 갔겠냐고."
"헉 진짜!"
"너가 이러니까 연애 하나를 똑 부러지게 못하고
징징 거리는거야."
"진짜?"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냐?"
"진짜로 니 생각 대로면 어떻게 하지? 아! 큰일 났다. 어떻게 해."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도진아. 나 간다. 그리고 나 낼 아침 일본 갈래.
아 첫 비행기가 몇시지? 열한시 반일텐데 아. 어떻게 해 부산에서도
새벽 비행기 없나? 아. 클났네."
"승지야."
"응?"
"이리 와봐."
"왜?"
"나좀 일으켜 앉혀줘."
"왜 오줌 마려?"
"아 기집애가 무슨 오줌마렵냐는 말을 글케 아무렇지도 않게
않게 하냐?"
"그럼? 뭐라고 해?"
"암튼 오줌 마려?가 뭐냐고."
"혹시 소변이 마려우십니까 뭐 일케 하라는거야?"
"아 됐어. 나좀 앉혀봐."
"너 깁스 땜에 무지 두껍다."
"근육이라 생각해 니가 언제 이런 두께의 남자를
안아 보겠냐?."
도진을 안고도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 다른 걱정이다.
"너 지금 얼른 달려가고 싶지?"
"어?"
"어차피 낼 날 밝고 비행기가 있어야 가는거야"
"응"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선물 하나 줄게."
"뭔데?"
"한도진이 말이야. 이숭지를..."
"으윽 너 또 이상한 소리 할라구 하지?"
"좀 조용히 하고 들어."
"너까지 나 머리 터지게 하면 가만 안둔다."
"그 말이 뭐냐면
한도진이 이승지를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사랑했었어."
"에?"
"니가 그랬쟎아. 사랑 했었어로 바꿔 달라고."
"어."
"그러니까 한도진이 이승지를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사랑했었어."
"천년전에?"
"응."
"나도. 천년전에는 그랬었던 것 같은데..
먼저 배신해서 미안해. 으으윽"
"잘 나가다가 뭐가 으윽이야."
"닭살이쟎아."
"생각 해 보니까 내 위에 구멍 뚫린거 말야.
그거 니가 뚫어 놓은 것 같아."
"뭔소리야?"
"니가 내 맘을 몰라주니까 내 가슴에 뻥하고 구멍이 뚫렸단
말이지."
"미안한데 뻥하고 뚫리기엔 너무 작더라.
피식 하고 바람만 빠질 정도래."
"아 얼른 위의 구멍도 메꾸고 이승지가 뚫어 놓은 가슴의
구멍도 메꿔야지."
"......."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나는 그렇게 도진을 안고 있었다.
정말로 천년 전에는 내가 도진을 도진이 나를 아주 깊고
아프게 사랑 했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 하기로 한다.
미안하다는 말 같은걸 하는게 아니었는데...
농담처럼 건네는 말이지만 미안함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릿한 그런게 있는 것 같은데 말로는 잘 표현이 되지 않아서
가슴에서 작은 불꽃이 탁탁 터지는 것 처럼 아프고 또 아프다.
마음속으로는 미안하다 고맙다 은주를 부탁한다 여러말들이
춤을 췄지만 내게 도진에게 무슨 말을 할 자격 같은게 없이 느껴져서
나는 그냥 웃어 보이고 병실문을 나섰다.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불안한 그런 웃음이었다.
도진도 알고 있을거였다.
내가 병실문을 나와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는걸
"아주 돈이 썩어난다니까. 너 그렇게
금방 갈거 뭐하러 왔어?"
아침 일찍 짐을 챙기는 내게 엄마는 말도 안된다며
내내 큰소리다.
"엄마 보고 싶어서 슬픈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까
별로 안 기뻐. 그냥 갈래"
"말을 해도 기집애가. 밑반찬 거리 사다 놨어.
또 너 먹일라고 꼬리도 사다 담궈 놨는데
내일 가."
"엄마! 나 가스도 켜 놓고 물도 틀어 놓고 문도
열어 놓은것 같아."
말도 안되는 내 이유에 엄마는 정말 가고 내 마음을 알아 챈 것 같다.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
얼른 방에서 봉투를 챙겨와 가방에 넣어 준다.
"뭔데?"
"엊그제 오빠가 주더라. 너 용돈 보내주라고."
"왜 그걸 엄마한테 줘?"
"내가 보내는 것 처럼 보내주라고."
"철났네 이승현씨."
"기집애가 꼭 오빠를 빈정거려. 나중에 늙고 보면
피붙이 밖에 없어. 잘해."
"알았어."
사실 엄마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항으로 택시 안에서는 아줌마들의 편지를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다.
"아저씨 다른데 좀 들을 수 있어요?"
희원의 목소리가 나온다.
"커피를 마시다가 첫사랑 떠올려 본 적 있으신가요?
꼭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매일 조금씩 다른 커피의 맛이나 향이
이전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할 때가 있죠?
커피 뿐 아니라 아침 문을 열고 나설때의 공기가
오래 전 어느 날의 그것과 비슷한걸 느꼈을때
혹시 그날이 아름다운 날이었다면 그날 처럼 설레일테고
아주 아픈 날이었다면 다시 그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에요
노래 세곡 이어서 들으실거구요.
저 그 사이에 차 한잔 하고 와야 겠네요. 다음 곡은...."
자꾸 택시를 돌려서 여의도에 가면 희원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당장 희원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자꾸 내게 다짐을 받고 또 받았다.
공항에 도착하니 바람이 제법 불고 있다.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이다.
희원의 말처럼 훗날에 이 바람과 비슷한 바람을 맞았을때
다시 설레여 할 수 있을거라고 자꾸 나는 나를 안심시킨다.
버스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나는 앞을 볼 수가 없다.
매일 보던 거리에 나무들까지 나를 보는것 같다.
택시를 내리고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 가 보지만 기대와 달리 염려했던 대로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이사와서 한번도 말을 건네 본일이 없는 옆집 사람에게 물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우체통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애써 실망 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맘을 고쳐 먹어 보지만 쉽지가 않았다.
'실망 할 필요까지 없어 이승지.'
희원씨가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해도 어디선가
내 생각을 하고 있을테니까 내가 그리워서 몸부림까지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자꾸 웃으면서도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만나지 못한다는게 속상하고
억울해서 자꾸 눈물이 난다.
그 때 전화 벨이 울렸다.
나미꼬 상의 둘째 아이.
내가 너무나 이뻐하는 이즈미다.
"집 앞에 종이가 붙어 있는데
거기 승지상의 이름이 붙어있어요.
한국 말 같아요.
그림도 있는데 승지상 같아요."
다시 물을 것도 없이 희원의 짓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는 혹시 뛰어가다가도 넘어 질 것 같아
천천히 걸어 가는데 매일 매일 다니던 그 짧은 거리가
멀고 또 멀게 느껴진다.
어제에서 오늘보다 아니 지난 4개월의 시간보다 멀고 멀다.
뛰지 않겠다던 생각과 달리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 도착한
나미꼬 상의 집 담장에 똑같은 종이가 네장이나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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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습니다.
12년전, 어느 겨울날
OO대학 학생회관 계단에서
배고프고 차비도 없다고 울던 여고생
동정심을 자극
도와주려는 마음에
잔돈을 찾느라
잠시 커피와 담배를 맡겼으나
그길로 커피와 담배를 들고 줄행랑 침
돈보다 담배를 택한 걸로 봐
불량 여고생으로 사료 됨
증거물. 그날 여고생이 놓고간
이름표.
엉성하게 그려서 초록색으로 칠한
이름표에 李昇知 라고 써 있다.
그리고 범행 당시 모습 해서
조금 통통한 단발머리의 내얼굴이 그려져 있고
예상 최근 모습에
예전 희원이 우리동네 전봇대에 붙였던 전단에
그린 내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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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이 알고 있는 보고 싶어하는 나를 만나는 일이 기뻐서 자꾸
웃음이 난다.
"언제부터 붙어 있었어?"
이즈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어저께 승지상 찾는 사람이 집에 왔었는데
엄마가 이상한 사람일지 모른다고
승지상 여행 갔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했어요. 우리한테도 이사갔다고 하지말라고 했어요.
근데 좀 전에 나오니까 이게 붙어있었어요."
당장 공항으로 달려 가야 한다.
또 엇갈리는 건 참을 수 없다.
하지만 공항에 가기도 전에 난 희원을 찾아 냈다.
택시 정류장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희원이 빵과 우유를 먹고 있다
아주 초췌한 얼굴로.
꾸역꾸역.
가서 어깨를 툭 치면 울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얼굴이다.
오래 기다리고 가슴 떨리던거에 비해 너무 후진 재회다.
하지만 그 모습에 자꾸만 눈이 뜨거워진다.
가게 앞 의자에 앉아서 희원이 빵을 다 먹기를 기다린다.
아주 편안한 기다림이다.
희원이 작은 배낭 하나만 맨채로 가게를 나와 한숨을 쉰다.
살금살금 뒤로 다가가 희원의 눈을 가린다.
유치하다!
"누구게요?"
고개를 돌린 희원은 깜짝 놀라는 듯 하더니 나를 보고 그 놀람까지
멈추고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
"헤헤 인기가수 서희원씨가 왠일로 여기서 뭐하고 있대요?
헤헤헤헤헤헤 나 이렇게 만나니까 쫌 반갑죠?"
나는 한껏 호들갑스러웠는데 희원은 너무 조용하다.
"너무 놀라고 반가우니까 말을 다 못하는구나?"
희원은 여전히 말이 없다.
나는 다시 희원의 앞으로 가서 잠깐 희원의 얼굴을 보다가 희원을
끌어 안았다.
"왠일이에요?"
"알면서."
"나 보러 온거에요?"
"응."
"근데 나 보러 와 놓구 왜 보고 나서 암말 안해요?"
"나 너무 놀라서 정신 좀 차릴라구."
"뭐가 놀라?"
"승지씨 만났쟎아."
"만나러 온거 아니었어요?"
"몰라.만나니까 놀랍다."
"왜?"
"글쎄 못 만날거라구 생각했나봐."
"바보."
"아까 언덕 위에 서 있다가 승지씨가 오면 팔 이렇게 벌려서
확 끌어 안아 줄라구 했는데
그리고 되게 쿨하게 우리 오랜만이죠? 하려고 했는데"
희원은 정말 실망스러워 하는 얼굴이다.
"희원씨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승지씨 어디 갔었어요?"
"희원씨가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길래.
나도 다른 남자들이랑 방황 했어."
"칫"
"승지씨 미안해요."
"뭐가?"
"그냥 전부 다. 특히 제일 미안했던건..."
"제일 미안했던건?"
"기다리게 한거, 나 어제 여기 와서
승지씨 기다리면서 내가 진짜 나쁜놈이구나
깨닫고 또 깨달았어."
"머리 나쁜애들은 꼭 경험을 해야 깨닫더라."
"미안해요. 전부 다 내 잘못야 정말 용서해줘요."
"치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되지
내가 번호 다매겨서 조목조목 따질거야."
희원이 내 어깨를 잡아 나를 한 뼘쯤 떼어 놓고는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 쥔다.
그리고 말 없이 한참 보기만 한다.
"나 얼굴 작아져서 놀라는거죠?"
"하하. 작아지긴 했네 근데.원래 여자는 나이 먹으면 얼굴살은 빠져.
안아보니까 배는 더 나왔네.뭐"
"나 희원씨 아이를 가졌거든."
희원이 놀라서 눈이 이만해진다.
"헤헤."
"이승지씨 개방적인 일본에 오더니 농담이 더 대담해짐?"
"원래 대담했음"
희원이 내 양쪽 귀를 잡아 당기고는
살짝 아주 살짝 입 맞춘다.
"너무 오랜만이라 뽀뽀하는 법도 까먹엇어."
"거짓말."
나는 얼른 희원을 다시 내쪽으로 당겨 길고 또 깊게 입맞췄다.
"근데 승지씨 나 여기 너무맘에 들어."
"승지가 사는 동네니까.."
"아니..뽀뽀를 해도 아무도 안 쳐다보네
여기선 승지씨가 좋아하는 별짓 다해도 되겠다."
"별짓은 무슨, 근데 희원씨 왜 이렇게 꼬질꼬질해졌어?"
"어젯밤에 노숙했어."
"정말?"
"어. 할만 하더라."
"양복 좌악 뽑아 입고 장미꽃 백송이 들고 리무진 타고
아파트로 찾아와야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길에서 빵 먹구 있냐. 후지게?"
"올때 나 멋지게 하고 왔는데 승지씨 찾아 헤매다가
후져진거야."
나는 가만히 희원의 품에서 빠져 나와
희원의 손을 잡았다.
"사실 만나면 머리 다 뽑아 놓을라구 했는데."
"왜?"
"미워서."
"뽑아줘 승지씨. 이따가 밤에 말이야
끈적끈적 한 음악 틀어놓구
한개씩 뽑아줘 그럼 내가 하나 뽑을 때마다 으으으음
이렇게 해야지."
"으으으 변태"
희원의 손을 잡고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걷는다.
희원을 잊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던 거리마다
그 간판 그 나무 똑같은 대문이다.
'이 남자였어. 어때? 내가 그리워할 만하지?'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희원의 옆얼굴을 본다.
그리고 희원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준다.
"왜?"
희원은 여전히 앞을 보는채로 묻는다.
"이뻐서."
"잘 생겨서 조각같아. 뭐 이렇게 말해줘."
"근데 희원씨."
"응?"
"그 이름표 말야.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아니."
"왜?"
'잃어버렸어"
"치!"
"뭐가 치야?"
"근데 정말 그날의 나를 기억해?"
"그럼 그 이쁜 여고생의 미소와 눈물까지 기억하지."
"뻥!"
"뻥이라니?"
"나는 학교다닐때 초록색 이름표 아니구
노란색이었는데 내 아래 학년이 초록색"
"에?"
"내가 승지씨 나온 학교 조사 해가지구
우리 팬들중에 그 학교 찾아내서
나이 생년월일 학년 색깔 다 따져서
계산하느라 쥐나는줄 알았는데?"
"나 일곱살에 학교 갔는데 바보 같이 근데 그건 왜?"
"옛날에 조사 해놓은거야
사실은 승지씨 이름표 우리집에 놔뒀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할라구. 계획과 다르게 써먹게 되네?"
"내가 바본가 이름표를 잃어버렸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난 학교 다니면서 뭐 잃어버린적도 없어."
"잘났어."
그냥 자꾸 웃음이 나온다.
"왜 웃어요. 승지씨?"
"좋아서."
"이렇게 좋을걸 그렇게 버티냐?"
"난 안 버텼어. 기다렸지."
"정말?"
"응."
"그냥 동네에서 기다리지 저번처럼
머리에 봉지쓰고..너무 꽁꽁 숨어서
찾느라 죽는줄 알았네. 다들 짜고 가르쳐 주지도 않고
막 짜증났어.
아무리 있어 보이고 싶어도 그렇지 어떻게 일본까지 오냐?"
"근데 12년전 그날의 그애가 나라는거
어떻게 알았어요?
은주나 도진이가 말해준거야?"
"음, 역시 승지씨 자기가 말하고도 모르는구나?"
"에?"
"그 날밤에 승지씨 7차까지 가던 날 술먹고 날 덮친 밤 있지?
그밤에 말했어."
"익? 또 뭐 말했는데."
"막 내 손 잡고 나랑 한달만 사겨보자
그럼 내가 좋을거다. 막 그랬다니까?"
"헉! 진짜?"
"진짜야.내가 보고 싶어서
회사 다 때려 치우고 퇴직금까지 털어 넣고
우리동네로 왔다고 다 말했어. 자기는 망하면 끝이니까
책임 져라 막 이러면서"
"도진이는 내가 그냥 주정만 부렸다구 했는데?"
"우리 두 남자가 지킨거야 비밀을"
"음 그럼 그래서 나를 좋아했어요?
불쌍해서?"
"아니. 그날 비오던 밤에 간판 불 켜면서
박수 치는 약간 맛이 간듯한 여자한테 반했다니까.
그리고 얼굴은 사실 잘 기억 안나지만
12년전 그 여고생도 귀여웠어."
이제 그런것도 부끄럽지도 않다.
"근데 승지씨도 질기다.
어떻게 12년을 좋아하냐?
내가 멋지다고는 하지만 12년동안 좋아하는건 디게 부담 스럽네."
"어린 맘에 뭘 몰랐던 거지."
"지금은?"
"재수 없어."
희원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나를 끌어 안아 품안에 가둔채 놓지 않는다.
숨이 커억 하고 막힐 것 같은데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우리 이대로 승지씨 얼마나 버티나 내기할까?"
"그냥 안고 싶으면 안게 해줄께 무슨 그런 제목을 붙이나?"
"아니 진짜 소원들어주기 내기 하자."
"그런 내기쯤은 백번도 이길 수 있어."
끌어 안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희원이 입고 있던 옷의 안자락으로 나를 집어 넣는다.
그리고 팔로 머리를 꼭 감싸 앉는다.
이 남자의 품이 언제 이렇게 커진거지?
빗소리는 들리는데 몸에는 빗방울 하나 닿지 않는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승지씨!"
"응?"
"나 춰."
"어?
"춥다구?"
"I win"
"아 승지씨 내가 그렇게 안고 싶었나?
그렇게 안고 싶음 내가 들어가서 더 안아줄게."
"졌다고 인정해 얼른"
아파트로 들어와 현관을 열고 얼른 온수 스위치부터 누른다.
나는 하나도 젖지 않았는데 희원은 온몸이 젖어 있다.
욕실에 물을 받아주고 갈아 입을 옷을 찾는데
옷이 없다.
내 옷중에 제일 큰걸 찾는다.
희원의 공연 티셔츠와 내 분홍색 츄리닝 바지를 건네준다.
"얼른 씻어요 감기 걸리겠다."
"이제 와서 생각 해 주는 척 하냐? 아까 비 맞도록 내비 두더니."
"자 저건 비누 저건 수도꼭지."
"승지씨도 젖었쟎아 같이 씻을까?"
"속보여."
"난 승지씨 속 보고 싶어."
"시끄러워요. 자꾸 떠들면 목욕탕에 넣고 문을 못으로 박아 버린다."
"안 무서워"
"가두고 나서 문앞에서 나 노래 불러 버린다."
"아냐 잘못했어. 승지씨 나 조용히 씻을게."
희원은 정말 입을 옷 하나 챙겨 오지를 않았다.
슈퍼에서 장을 보고 희원이 입을 속옷과 셔츠 하나
바지도 하나 사야지!
우산을 꺼내 들고 천천히 느린걸음으로 빗속을 걷는다.
그.가.돌.아.왔.다.
천천히 일본어로 문장을 만들어 외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두 바보가 도진의 말처럼 지구를 반 바퀴씩 돌고 도는 것처럼
엇갈리고 엇갈리다가 만난 것이다.
예전에 꿈에서 희원이 가르쳐 준 미소된장 끓이는 법이 생각나
된장을 한봉지 사고 굴비가 너무 비싸서
그냥 손질해 놓은 작은돔을 한 마리 산다.
굴비 보다 싸지만 그래도 비싸다.
내 일주일 식비에 맞먹는다.
장을 봐오니 희원은 잠이 들어 있다.
이틀 동안 어디서 뭘 한건지
벗어 놓은 옷이 엉망이다.
밥을 안치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국물을 올려 놓고
희원이 개켜 놓은 옷을 확인해서 세탁소에 맡기고 오도록
희원은 자고 있다.
밥이 뜸이 들고 돔을 쪄내고 된장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고 끓고도
한참을 희원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조용 희원이 깨지 않도록 밥상을 차리고 기다리지만
희원의 잠은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너무 배가 고파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도록 희원은 깨지 않고 잠들어 있다.
정말 피곤했던 사람처럼 달고 깊게 자는 잠을 꺠울 수가 없다.
상을 치우고 조심조심 설겆이에 양치를 하면서도
희원이 여기서, 내 눈 앞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 안심이 되서 가서 손을 잡아 보고
괜히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엄마처럼 머리를 쓰다 듬는다.
그리고 슬쩍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보기도 한다.
잠이 든 희원이 잘 보이도록 의자를 놓고 그앞에 앉아서
그제서야 희원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생각나는대로 뚝뚝 끊어서 쓴 쪽지 같다.
하지만 그 마음은 이미 보이고 또 보이고도 남아서
자꾸 눈물이 나게 한다.
가만히 잠든 희원의 얼굴을 본다.
바보 같은 사람 이다.
희원을 살짝 흔들어서 깨워 본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잠깐 뒤척여서 돌아 눕는다.
나는 가만히 희원을 조금 밀어내고 옆에 가서 누웠다.
처음은 나란히 누웠다가 가만히 어깨를 안았다가 슬쩍 코를 잡아 당겨 보기도 하고
그래도 뒤척임이 없다.
팔밑으로 손을 넣어 머리를 희원의 가슴에 댄다.
그런데 이 남자, 심장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이 남자 언제 깬거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희원의 얼굴 앞에 바짝 대고 기다린다.
'깨기만 해봐라. 깨서 눈만 떠봐라 잡아 먹어 버려야지'
하지만 생각보다 희원은 오래 버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이제 내 쪽에서 견딜 수 없다
허리도 아프고 불편하다.
음..그렇게 나온다면 내쪽에서도 굳이 같은 작전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희원의 귀를 잡고 볼을 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 나갔다.
"너무해!" 를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 승지씨를 부르면서 뛰어 와야 하는데 희원은
너무 조용하다.
빈 복도를 어정거리다가 현관에 귀를 대 보는데
티비 소리만 나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15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도 조용하다.
현관을 벌컥 여니
희원은 밥을 먹고 있다.
"어 치사하게 사람이 화를 내고 나갔는데
쫓아오지도 않냐?"
"승지씨, 나 바지 이거 입고 어떻게 나가?"
희원이 일어나니 분홍색 바지의 밑단이 종아리 중간쯤에 있다.
"푸하하하하"
"승지씨 밥 맛있다.나 밥 좀 더줘."
"밥? 거기 밥통에."
"여기 있는거 다 먹었어."
"헉 그걸 다? 세 그릇은 나왔을텐데?아까 낮에 빵도 먹더만."
"나 승지 씨랑 헤어져서 거의 밥을 제대로 거의 먹어 본적이 없어.
승지씨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사는 이유가 그거더라고 재미만 없으면 재미 없게
살면 되는데 재미만 없는게 아니라 밥맛도 없어.
짜증나게."
장난을 치려던 마음이 부끄러워 질만큼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다.
애써서 눈물을 삭이고 또 삭인다.
"나 승지씨 속셈 알았다."
"뭔데?"
"내 옷 감춰 놓고 이런거 입혀 놓고
나 못가게 하려고 하는거지?"
"응. 애 셋 낳기 전까지는 못나가 크크크"
"그리고 이 티셔츠는 어디서 났어?
혹시 그날 승지씨 이거 입고 공연장에서 전화한거 아니야?"
"은주가 사서 보내줬어."
"나 은주씨 진짜 맘에 들어! 혹시 잘때마다
이거 입고 잔거 아냐? 배게를 막 적시면서.흐흑 희원씨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막 이러면서"
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게 없다.
멍하니 모른척 앉아 있으려니
희원이 일어나 설겆이를 시작한다.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렇게 그리워 하고도 자꾸 자꾸 담아 온 말을 감추고 또 감춘다.
무심히 정말 무심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며 희원을 부른다.
"희원씨!"
"응?"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전에 말했쟎아요."
"응"
"그냥 그렇다구."
설겆이를 마친 희원이 손을 닦고 옆에 와서 앉는다.
"증거 보여줄까?"
"안 보여줘도 다 보여.
많이 좋아하는거."
"그런건 사실 안 들켜야 되는데.
그래야 희원씨가 날 보면 막 떨리고 애태우고
도망갈까봐 잘하구 할거 아냐."
"또 도망가게?"
"어."
"그럼 이렇게 또 찾아내지 뭐."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나 여기 사는거."
"조사했어."
"그래요?"
"후쿠오카 라는것만 알아내고 나서는 그담에는 쉬웠어."
"자! 내 그리움의 증거."
나는 희원에게 쓴 편지가 들어 있는 박스를 건넨다.
희원은 별 말이 없이 뒤적이다.
가장 최근의 편지를 꺼내든다.
그리고 더듬더듬 읽기 시작한다.
"어? 희원씨 일본어 할줄 알아요?"
"4개국어 능통이야."
"에?"
"왜 안 믿어?"
"무슨 능통이 그렇게 더듬 더듬이야?
해석 해봐요."
"사전 있으면 할 수 있어."
"고등학교 때 일본어 배웠어요?"
"아니..나 요즘 일본어 배워."
"왜?"
"승지씨랑 말할라구."
"치."
"승지씨가 내가 모르는 말을,
내가 모르는 세계를 가지면 외로울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일본어 배우고
승지씨가 또 그렇게 그 날처럼 달려서 도망갈까봐
달리기 연습도 했어.
마라톤 나갈지도 몰라."
"마라톤이 누구네 강아지 이름인가?"
"사실 나 너무 겁났어.
나는 기다리고 있는데 승지씨는 도망 가는 걸까봐
나름대로 낮은 포복으로 따라 붙었지.
어! 승지씨 또 우네?"
내가 우는걸 이제는 희원이 나보다 먼저 알아 차린다.
"감동해서 우는거지?"
"아니."
"그럼?"
"억울하쟎아. 나는 희원씨 잊을라구 막 울고
달리기 하고 술도 마시고
비도 맞고 노래도 하고 그랬는데."
"노래까지?"
"응."
"노래까지 했음 정말 힘들었구나 승지씨."
희원이 다가와 가만히 손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가만히 얼굴을 만진다.
"으윽"
"왜 또 으윽이야? 승지씨 혹시 그 으윽이 말이야."
"뭐?"
"신음 아니야?"
"신음을 으윽이라고 내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건 내보기전엔 모르는거지."
"아. 싫어 왜 멀쩡한 사람이 신음 소리를 내."
"두고보자"
희원이 입 맞추기 시작한다.
한번 두번 세번 짧지만 너무나 달콤하다.
한 때는 희원의 입맞춤 손잡음 어깨 손올림
이런것들에 번호를 매겼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셀 수 없을 만큼 그 숫자가 늘어 간다.
숨이 차다.
"흐읍"
"승지씨! 신음 한번!"
"이게 무슨 신음이야? 숨이 막히니까"
"숨 막히도록 강렬한 신음"
"아 저질! 나 희원씨랑 안 놀아."
"안돼!"
"뭐가?"
"나 희원씨 미워! 희원씨 재수 없어! 못생겼어!
이런 말은 나 괜찮은데
희원씨랑 안놀아 헤어져 이런말은 하지말아요."
"사랑해서 헤어지는것도 있어."
"같이 있으면서 밉고 재수 없어서 매 맞는게 더 좋아."
"변태."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연애가 이 남자가 그리고 사랑이 불안하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많이 그의 마음이 보인다.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고 아무데도 보내 줄 수 없다고
말 대신 나는 희원을 꼭 끌어 안았다.
차라리 내가 물이었으면 그냥 공기나 바람 같아서
그렇게 희원에게 스며 들어서 영원할 수 있었으면
내내 생각 했다.
"으아아아아악 승지씨!"
늦은 아침 나는 희원의 비명 소리에 잠이 깼다.
컴퓨터 앞인걸로 봐서는 내가 어젯밤 남긴 선물 때문인거다.
나는 모르는척 아직 자는중인 척 가만히 돌아 누워 씨익 웃고 있다.
새벽 나는 희원의 뒤척임에 잠이 깼었다.
그리고 희원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글을 남겼다.
희원과 영국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고
장난스레 글을 썼다.
그대들의 희원씨는 오늘부로 제가 사랑할까 합니다.
허락을 받는다면 제일 먼저 받아야 할 사람은
여러분일 것 같아서
부족하지만,잘 해 보겠습니다.
거듭 이해와 사랑을 부탁 드립니다.
"아 승지씨 안 자는거 다 알아.
새벽에 이런걸 쓰냐? 내가 먼저 쓸라구 했는데."
"거짓말!"
"모가 거짓말이야."
"계속 쓸쓸한 척 혼자인 척 외로운 척 할라구 했지?"
"아..한남자의 십년 설정을 이렇게 순간 무너 뜨리다니
승지씨 너무해."
"헤헤. 사실은 너희들의 오빠는 내가 접수했다.
이렇게 빨간 글씨로 쓸라다가 나름대로 충격완화 한거야 히히히"
"웃지마 정말! 엉엉 내가 멋지게 올릴라구 했는데.
오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너희에게 제일 먼저 말하고 싶구나!
축복 해 주겠니? 하려고 했는데 엉엉"
희원은 내내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시늉을 한다.
나는 일어나 앉아 희원을 토닥거렸다.
"희원씨 뚜욱! 승지 믿지?"
그리고 희원의 손을 만져 보다가
가만히 희원의 팔을 꼬집는다.
"악!승지씨 왜 그래?"
너무 세게 꼬집어서 희원이 비명을 지른다.
"너무 좋아서 꿈인거 같아서."
"아 승지씨 확인을 그렇게 후지게 하냐?"
"후진남자랑 사귀니까 갈수록 후져지네.헤헤"
"웃지마! 웃지마!"
"왜?"
"너무 사랑스럽쟎아."
"윽"
희원이 가만히 나를 끌어 당겨 이마를 쿵쿵 부딪힌다.
"뭐?"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거 실감 나게 해줄게.
꿈인지 아닌지."
희원의 입술이 내 입술을 물더니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한다.
"으윽 싫어. 실감 났어 이미 됐어. 그만 실감 날래.
아! 그만해요. 나 화 낸다."
나는 이제 희원의 마음 보다는 내 마음을 믿는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거고 희원의 마음도 그럴거라는걸
이미 알고 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는 희원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자전거를 타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더니.
언덕길을 오르면서 힘들어 하고 결국은 자전거를 세워 놓고
그 옆에 주저 앉아 장난 스레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 쉬고 있다.
가만히 옆에 앉아 희원의 손을 잡고 옆모습을 본다.
"희원씨!"
"왜? 헤엑~ 숨차 죽겠다."
"우리 말이에요."
"응!"
"우리 결혼하자."
"컥"
"왜 놀라?"
"그럼 안놀라? 결혼 하자고 하는데?"
"하기 싫으니까 놀라는거 아냐?"
"무슨 소리야?"
"난 헤어지기도 싫고 희원씨랑 맨날맨날 같이 살고 싶어."
"응.그럼 몇가지만 물어봐도 돼?."
"뭔데?"
"매일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주말에 외식 시켜주고 음악회나 영화구경 한달에 두번
그리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줄 수 있어?"
"푸하하하"
"왜 웃어! 나한텐 너무 중요한 이야기야."
"무슨 남자가 그런 말을 해."
"그럼 승지씨는 우리 결혼할까요?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 도 아니고
우리 결혼하자.하냐?"
"안 할려면 안한다고 하면 되지 뭐 여자 남자가 있어."
"에이 나 승지씨랑 안 놀아."
희원이 벌떡 일어나서 내 손에 뭔가 쥐어 주고 저만큼 가버린다.
잘 접은 쪽지다.
가만히 앉아 쪽지를 편다.
희원의 예쁜 글씨와 반지 하나가 있다.
승지씨
나 또 승지씨 잠든 모습 보면서
편지 쓴다.
나 이제 절대로 잠깐이라도 헤어지기도 싫은데
맨날 맨날 같이 살고 싶어.
매일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주말에는 외식도 하고
음악회 영화 구경 한달에 두번씩 꼭 해주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결혼 하고 싶어.
갑자기 미안해져서 나는 얼른 희원을 쫓아 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오오오 희원씨이이."
자전거로 희원을 따라가는데 희원은 한참이나 앞서 달려 가고 있다.
정말 매일매일 달리기 연습을 한걸까?
희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쥰세의
독백을 떠올렸다.
기적같은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어난 기적은
당신이 혼자서 기다려 주었다는 그것
마지막까지 냉정했던 당신에게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가슴속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
나는 지난날을 뒤돌아 볼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 기대만 할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너의 고독한 눈동자에 다시한번
내 모습을 볼수 있게 된다면
그때 나는 너를...
희원은 이제야 숨이 차오르는지
천천히 걸어 가고 있다.
바람이 맑고 상쾌하고 햇살도 따뜻하다.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던 나는 자전거를 내려놓고
희원에게 달려가 희원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희원에 따뜻한 등에 기대어
속으로 나직히 말했다.
내가 믿고 바라는 대로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이 아니더라도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것 만으로는
당장 가슴속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다고 해도
그래서 가끔 외로워진다고 해도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을거라고...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도...마지막 이란는 말을 적으려니 아쉽고 또 아쉽네요.
마지막 글은 마이클럽보다 종점다방에 먼저 올리려고 했는데
다방이 지금 내부수리중이라서 ^^
한분 한분 이름을 못 쓰지만 다들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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