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요약>
본고는 조선 중기 백석 유집에 대한 첫 연구로서 의리정신과 의병활동을 점검한 것이다. 백석은 일생동안 숱한 환란을 겪으며, 입신(立身)이나 입언(立言)보다도 나라가 우선해야한다는 춘추대의가 항상 우선하였다. 어린 시절의 왜란에는 대처할 수 없었지만, 성년이 된 이후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활약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스승 김장생의 막하에서 참모관으로서 선봉에 섰고, 병자호란 때에는 이른바 ‘옥과거의오현(玉果擧義五賢)’ 중 한 사람으로서 호남 의병의 중추를 담당하였다. 대의와 명분을 좇아 의병에 나서는 한편, 실질적인 실효를 위해 의군(義軍)에 병법을 교시한 것은 다른 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점이다. 이로써 그가 문무를 겸비한 시대적 인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실제로 의병을 이끌고 출정하여 청주 전투에서 승전한 것은 대의와 명분이 작은 결실을 맺은 쾌거였다. 인조의 항복으로 대의와 명분이 무색해지자, 시대를 한탄하며 고향 김제(金堤)에서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풍속을 교화하며 도학을 실천하였다. 난국의 상황에서 춘추대의와 도학정신을 바탕으로 백석과 의병들이 실천한 의리정신은 나라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불의에 항거하는 ‘호남의 정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제어: 백석 유집, 의리정신, 의병활동, 정묘호란, 병자호란
1. 생애와 시대적 배경
백석 유집(1585~1651)은 조선의 문화가 성대하게 꽃을 피우던 16세기말, 김제에서 태어나 환란의 시대를 살다간 유학자이다. 문화가 난만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이후 그의 일생은 환란의 시대였다. 내란과 외환이 연이어 닥쳤다. 기축옥사(1589),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광해군의 폭정과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과 이인거의 난(1627), 병자호란(1636)이 그것이다. 일생동안 경험한 환란이 이 정도였으니 시대적 운명이라 해도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사대와 교린이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이 조선의 정치에 큰 틀을 형성하며 안정화를 담보하고 있었지만, 상대국의 정치상황에 따라 기조가 흔들리기도 하였다. 내부적으로 기축옥사라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조선은 개국 200주년이 되는 해에 임진왜란이라는 절대적 위기를 맞았다.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틈이 생기면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처절하게 지켜낸 조선의 운명은 암울하였다. 재해병지란 말처럼 연이어 닥치는 환란을 극복하기 위한 시련의 투쟁도 치열하였다. 백석 선생의 생애에 비추어 보면, 5세 때 기축옥사, 8세 때 임진왜란, 13세 때 정유재란을 겪었으니 어린 시절은 참으로 난국이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부친을 따라 관동으로 피란을 떠나기도 하였으니, 어린 시절부터 나라와 운명을 함께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을 타고난 셈이었다. 왜란은 어린 시절에 해당하기 때문에 백석이 감당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이후 백석은 스승을 찾아 학문을 연마한다. 먼저 석계 최명룡과 운학 조평을 스승으로 모셨고, 22세 때에는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 되었다. 백석이 스승으로 모신 이들은 이전의 환란과 앞으로 닥쳐올 환란에서 대의를 좇아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백석이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여 생원시에 합격하고 꿈을 키워가던 시기에 환란의 시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승 조평이 고향 임실로 돌아가고, 최명룡이 별세한 직후 인조반정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을 기점으로 환란은 점차 표면화되었다. 밖으로는 명의 도움으로 왜란이 진정되었지만 뒤이어 호란이 닥쳤다. 사대교린에서 이번에는 사대에 틈이 생긴 것이다. 명과 후금의 각축에서 조선의 외교정책은 변함없이 사대를 표방하였다. 대국이 나라를 보전해 준 은혜에 군신의 의리로써 섬겨야함을 국가적 대의로 설정하였다. 후금이 세력을 키워 조선에 화친을 요구하고 군신지의를 강요하기에 이르자 조선의 조정은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강화를 배척하는 척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두 주장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었으나 어떤 주장도 근본적으로 난국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거듭된 호란의 위기 앞에서 대의를 따라 창의했던 의병들의 의리정신은 그 자체가 조선의 입장이었다. 백석 유집과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그러했다. 부친 유태형(柳泰亨, 1568~1642)과 아우 유도(柳棹)는 물론 스승들도 모두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백석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은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개인적 꿈을 이루기보다 나라를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준 의리정신은 자신과 나라를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선생 사후에 내란과 왜란으로 피폐화된 조선을 재건하는데 일생을 바친 우암 송시열이 선생의 묘비명을 지었다. 그 역시 사계의 문하였으며 백석 선생보다 23세 연하로서 충절을 중시한 인물이다. 이후 17세기 정계의 중심에 있었던 우암은 다시금 대의명분을 주창하며 북벌론을 제기하였다. 의병들의 삶은 끝났지만 그들의 남긴 의리정신은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본고는 백석 유집에 대한 첫 연구로서 그의 의리정신과 의병활동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학문적 연원과 사승관계 그리고 의리정신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략히 살피고, 조목별로 의병활동을 고찰할 것이다. 의병활동은 창의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대의와 명분을 따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각각의 의병활동들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분석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백석 선생의 의리정신과 의병활동이 갖는 의미를 반추해보는 것이 본고의 목표이다. 2. 학문적 연원과 사승관계
백석 유집은 유태형과 김제 조씨(趙惟精 女)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친의 훈도를 받으며 자랐다. 부친은 풍채가 준수하고 기상이 시원스러워 당시의 뛰어난 사대부들이 한 번 보면 이끌리지 않음이 없었다. 구도(求道)에 뜻을 두어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선생은 장횡거처럼 될 자질이라고 칭찬하였다. 백석의 나이 14세 때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에게 수학하였다. 최명룡을 스승으로 모신 이듬해 봄, 운학(雲壑) 조평(趙平)이 임실에서 김제 조동(槽洞:현 구수동)으로 이사하여 삼구재(三求齋)를 짓고 올바른 마음을 구하고, 어진 친구를 구하고, 농사짓기를 구하고자 하였다. 구수동은 백석이 태어난 대촌면 수곡리와 그리 멀지 않고, 후에 거처하게 되는 백석면 승반리와는 이웃 마을이었다. 이때 백석이 조평의 문하에 들어 학문을 닦았다. 조평은 이로부터 19년간 김제에 머무르며 학문과 강학을 병행하였다. 김제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600년 조평이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부친이 언제 사계의 문하에 입문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조평이 사계의 문하에 든 것은 백석이 비로소 기호학파의 학맥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602년 봄, 김장생은 관직에서 해임되어 논산군 연산(連山)으로 귀향하여 양성당(養性堂)을 지었는데, 이듬해 금마(익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때 전주의 최명룡이 사계를 찾아가 배운 적이 있었다. 1606년 김장생이 파직되어 다시 연산으로 귀향하자 유집은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과 함께 사계 선생을 찾아 계상(溪上)에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心經・近思錄 등을 수학하였다. 이로써 백석은 부친을 비롯하여 조평과 최명룡이 모두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 됨으로써 율곡에서 사계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사계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과 교유하게 되었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에 임명된 사계의 막하에서 문인들과 함께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백석은 시대가 불우하여 입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은거하며 몇몇 학인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동갑내기 태천(苔川) 김지수(金地粹, 1585~1639)와 남간(南磵) 나해봉(羅海鳳, 1584~1638)을 만나 함께 김제 귀신사(歸信寺)에서 계몽도설(啓蒙圖說)을 강해(講解)하고,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 시로써 화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스승이나 학자들간의 교유는 대부분 문편으로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석 선생의 문집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드물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200여년 뒤 문집이 간행된 원인이 제일 크겠지만,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백석이 후손들에게 문집간행을 경계시킨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로 인하여 문집에 수록되어야 할 많은 문편들이 일실되었다. 특히 율곡에서 사계로 이어지는 학문적 전통을 문편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아쉽다. 현존하는 문집에는 시대의 불운과 빈천한 삶을 되뇌는 시가 비교적 많으며, 일상에서 행해진 각 4편의 기(記)와 설(說)이 전한다. 수없이 주고받았을 서간도 일실되어 수취한 서간 26통만이 부록으로 실려 있을 뿐이다. 백석 선생이 보낸 편지들이 문집에 전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문집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난국의 상황에서 입신뿐만 아니라 입언(立言)마저도 마음을 비우고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석원지에 수록되어 있는 백석 선생의 문인은 모두 73인이다. 3. 내우외환과 의리정신의 형성
의리정신은 평소에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지만, 내우외환의 환란에서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일인이 만인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의이다. 백석의 재세기는 실로 격랑의 시대였다. 국내의 잦은 반란과 더불어 왜와 청국의 침입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형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광해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정국이 큰 혼란에 빠졌다. 그 당시 부친 유태형과 조평은 광해군의 패륜에 군신의 의리로써 충간하였다. 광해군이 이원익의 충간을 문제 삼아 벌하자 유태형은 상소하여 그를 구원하고, 조평은 문란해진 궁척들의 전횡을 비판하며 폐비를 반대하였다. 수오지심으로 패륜을 막고 인륜의 법도를 밝히기 위해 군신의 의를 내세워 간하였다. 백석이 이괄의 난에 의병으로 나서기 전까지 이들 두 사람은 백석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백석의 정신적 토대였던 두 사람의 의리정신을 먼저 살피고자 한다. 1) 부친 유태형의 의리정신
학적 계통이 세워져 백석의 학문이 채 빛을 발하기도 전에 광해군의 폭정은 백석의 출처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즈음 백석은 부친 유태형이 광해군의 패륜적 폭정에 충언으로 간하다 삭직된 영의정 이원익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섰던 일을 목도하였다. 군신의 관계에서 충간(忠諫)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리정신의 발로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의리정신으로 패륜을 바로잡고 인륜의 도를 밝히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고 믿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유태형의 묘표에 보인다. 유태형은 을묘년(1615, 광해군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광해군이 인륜을 무너뜨리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전임 대신으로서 소를 올렸다가 죄를 받았다. 공은 홍무적(洪茂績) 등과 함께 소를 올려 오리공이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 구원하고,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을 빨리 죽여 인륜의 법도를 밝히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물러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과 운학(雲壑) 조평(趙平)과 더불어 자취를 감취고 산수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다. 백석은 부친이 군신간의 의리를 내세워 충간을 하는 한편,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한다.’는 처세관에 따라 산수에 자취를 감추고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현실을 목도하였다. 부친뿐만 아니라 백석의 스승 최명룡과 조평도 함께 행동한 것을 보면, 이들이 백석의 출처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할 수 있다. 수곡 유태형은 1624년 이괄의 난에 근왕(勤王)을 위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정묘호란과 이인거의 난에도 활약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남쪽으로 분조할 것을 청하자 인조가 이를 수용하였다. 정묘년(1627)에 북로(北虜)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조정에서 파천(播遷)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공이 별좌(別坐) 유태형(柳泰亨)과 함께 묘당(廟堂)으로 가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강화도는 바다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니, 만약 오랑캐 군대가 팔도를 점령하고서 뱃길을 막는다면 강도 이외는 모두 우리의 땅이 아니어서, 각 도에 호령을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주상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양호(兩湖)와 영남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험한 지세의 이점을 이용하여, 충분히 휴식한 군대로써 쳐들어오는 지친 적군을 제압하는 것만 한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멀리 와서 곤경에 빠진 적군은 격파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왕흠약(王欽若)이 강남(江南:金陵)으로 피란 가기를 청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실로 국가가 만전할 수 있는 훌륭한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 공의 말을 옳게 여기는 의논이 더러 있어, 드디어 분조(分朝)하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송치규가 유태형의 묘표에서 “공(유태형)은 수옹공(睡翁公:송갑조)과 서로 시국의 일을 논하다가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으니, 이점에서 공의 충성과 의리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회고한 것처럼, 대의와 명분을 저버리고 청국과 화친을 맺은 사실을 비통해하였다. 이처럼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의리정신은 백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호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청국과 화친을 맹세하고, 급기야 군신관계로 결론이 나자 그동안 고수해왔던 대의와 명분도 사라지게 되었다. 의리를 내세웠던 지식인들은 은거에 들어가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며 일생을 살았다. 정묘호란 때 청과 화친을 맺은 일은 대의와 명분을 따르던 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대의명분을 따르느냐 아니면 불가피한 현실을 따르느냐 두 갈림길에서 불가피한 현실을 따른 것에 분개하며 애통해하였다.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며 척화의 입장에 있었던 이들에게는 강화(講和) 자체가 굴욕이었다. 대의보다는 냉정하게 현실적인 화친을 택함으로써 난국은 잠시 소강(小康)에 들었지만, 대의를 중시하는 척화파의 불만은 오히려 고조되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이인거(李仁居)의 반란이다. 이인거는 “강화를 주도한 최명길(崔鳴吉)과 김류(金瑬)를 처단하고 이어 의주(義州)로 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오랑캐의 사신이 나오면 역시 머리를 베어가지고 돌아오겠다. 또 임금 옆의 간신을 모조리 제거하여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하겠다.”는 명분론을 내세우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다. 이는 대의와 명분을 따라야 한다는 의리정신에서 행한 것이지만, 결국 화친을 택한 인조 임금에 대한 노골적인 항의이기도 했다. 그의 본 뜻이 대의에 있었음에도 군신간의 의리적 측면에서 보면 지나친 처사였다. 결국 그는 역모자로 지목되어 평정되었다. 당시 청과의 강화가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난’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대의를 중시한 척화파의 입장이었으며, 외교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한 사람이 걸머진 것이기도 했다. ‘반란’으로 치부하여 오욕의 사건으로 묻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당시 사관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마는 인거(仁居)의 역적질에는 무리가 20명이 못되었는데도 임금 곁의 악인을 제거하겠다고 방백(方伯)에게 스스로 말하였다. 생각건대 인거의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난역(亂逆)의 죄에 빠진다는 것을 몰랐던 듯하니 참으로 한 번의 웃음거리도 안 된다. 그런데 홍보는 적병의 형세를 장황하게 치계하고, 이어서 진격해 소탕한다는 말을 하여 생판으로 임금을 속이고, 조정의 대신은 덩달아 그 계책을 도와 끝내 녹훈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당시 정국은 강화와 척화라는 두 가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결국 강화를 택한 것은 대의보다는 현실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대의를 저버린 데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다.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던 만년의 신흠(申欽)처럼 임금을 잘못 보필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형식적인 의례가 전부였다. 난은 평정되었지만 당시 학자들이 중시했던 대의와 명분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백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2) 스승 조평의 의리정신
백석은 또한 스승 조평이 일생동안 의리정신으로 행한 처세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평은 일찍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왜적의 습격으로 와해되었고, 양친과 부인 이씨를 이끌고 피란하던 중에 부인 이씨가 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일이 있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신호(申皓)・오성(吳誠) 등과 합세하여 왜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임인년(1602)에는 남인 정인홍(鄭仁弘)과 기자헌(奇自獻)이 서인 성혼(成渾)을 무함하자 상소를 올려 변무하고, 신해년(1611, 광해군3) 과거시험에서 궁척의 전횡을 비판하는 대책문을 지어 낙제한 뒤에 김제로 돌아왔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조정에 상소하여 항론(抗論)하며 강직하게 대의를 밝히고, 또 상소를 올려 간신 정호(鄭造) 등을 논척한 일로 의금부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키고 시폐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으며, 인조반정 때에는 공로로 정사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4)에는 후금의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세자를 전주까지 호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초모도유사(招募都有司)로서 노등(盧縢)·이두연(李斗然) 등과 함께 임실에서 의병을 소집하고 군량미를 모아 여산의 의병소에 조달하였다. 조평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이었던 듯하다. 의리를 중시하고 그 말과 행동이 분명하였다. 황신구(黃信龜, 1633~1685)는 「행장」에서 상소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항론경직(抗論鯁直)’이라는 표현을 썼다. ‘鯁’은 목구멍에 생선의 가시가 걸린 것을 말한다. 그의 말과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평의 의리정신은 그의 스승 김장생도 인정하는 바였다. 사계 김장생이 편지를 보내 진퇴의 의미를 묻자, 조평이 대답하기를, “옛날 성현들은 도가 행해질 수 있음을 안 연후에 그 조정에 섰습니다.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도 조정에 오래 있으면, 아마 공밥을 먹는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하니, 사계가 의롭게 여겨 말하길 “예쁜 우리 조평이 강명(剛明)하고 정직하여 마음을 세워 일을 제재하되 반드시 충효의 의리에서 구하니 진실로 도움이 되는 친구로다.” 하였다. 임실에서 김제로 이거한 조평은 백석의 이웃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간이나 관련 문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평의 처세가 대의를 따른 의리정신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난국 때마다 의병활동을 하고, 특히 과거시험에서 궁척들의 전횡을 비판한 것을 보면 그가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강성한 기질의 소유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암울한 시대를 함께 한 백석은 스승 조평의 강직한 의리정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강직했던 그가 안우(安佑)라는 자의 무고에 걸려 마음을 상하자, 그런 자와 같은 고을에 살 수 없다며 고향 임실로 돌아갈 때까지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스승이다. 조평이 19년간 김제에 거주했을 때 백석의 나이는 15세부터 34세까지였다. 백석은 스승 조평이 세상을 떠나자 제문에서 다음과 회고하였다. 홀로 처연하게 저 엄동설한 속에 우뚝 서서 굽히지 않는 것은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뿐이다. 공이 일찍이 이것을 흠모하여 ‘용학(聳壑)’이라 또 자호하였는데 그 소박한 뜻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로 하여금 잠시나마 상대오부(霜臺烏府) 안에서 다스리게 한다면 간사한 무리들의 쓸개를 혁파하기에 충분하다. 어리석고 게으른 세속을 경계하며, 맑은 지조를 한번 떨쳐 무너진 기강을 붙잡으니, 한나라의 급장유(汲長孺)와 주괴리(朱槐里)의 무리도 풍기가 이 사람 아래에 있을 것이다. 백석은 조평의 절개와 의리적인 모습을 송백에 비유하였다.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에게 사헌부를 맡긴다면 간신들을 혁파하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조평의 절개와 의리정신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부친과 스승 조평의 강개한 처세는 백석의 의리정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백석이 사계 선생에게 근사록과 심경을 수학한 것을 상기하면, 그가 도학 정신에 기반한 성리학적 사유 속에서 의리의 실천이 발로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호남의병과 백석의 활동
백석의 의리정신은 연이어 닥치는 환란에서 의병활동으로 나타났다. 광해군이 행한 현실적인 중립외교정책이 당장의 외란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방편적인 외교로 현실적 실리를 얻고자 했던 것에 반하여 대의명분을 따라야 한다는 학자들의 불만도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광해군의 패륜적인 행동은 대의명분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인륜을 밝히고 대의를 따라야 한다는 춘추대의의 명분론이 마침내 실행으로 옮겨졌다. 인조반정(1623)이 그것이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을 청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중립외교는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처사라고 보았다. 이처럼 조선의 명에 대한 의리에는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화이관이 자리하였다. 현실적 실리보다는 대의적 명분을 더 중시하였다. 둘째는 광해군의 패륜이다.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위리안치하여 증살하는 참혹한 정치는 인륜의 도리를 짓밟는 패륜적 행위였다. 반정은 인륜과 대명사대주의를 강조하였지만 결국 호란을 야기하여 삼전도 굴욕으로 이어지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시대순에 따라 호남의 의병활동과 백석의 활약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이괄의 난 – 백석 40세
인조반정(1623)으로 새로운 조정이 들어섰지만 공신 간 공서파와 청서파로 나뉘어 갈등하였다. 논공에 불만을 품고 이듬해 1월 24일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19일 만인 2월 10일 한양에 입성하였다. 인조 임금은 이에 앞서 2월 8일 자전(慈殿)・중전과 함께 공주산성으로 피란을 떠났고, 남아있던 왕대비는 중외(中外)의 신민에게 의병을 일으켜 구원할 것을 하유한 뒤 피난길에 합류하였다. 이때 백석 유집은 생원으로서 진사 신유일(辛惟一), 감찰 고순후(高循厚)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근왕(勤王)을 위한 의병을 모집하였다. 다행히 난이 조기에 진압되어 출병하지 않았지만 대가가 공주까지 피신하는 초유의 비상사태에서 군신의 의리를 몸소 실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국내의 반란은 이후 청국의 침입으로 겪게 되는 두 차례 호란의 전조나 다름없었다. 2) 정묘호란 – 백석 43세
인조 5년(1627) 1월 19일,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대의명분을 중시하여 명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사대하였다. 반면 세력을 키워 중원을 넘보던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바꾸고 조선에 화친을 요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더욱 공고해진 명과 조선의 군신의 관계는 파기할 수 없는 대의였다. 중립외교를 표방했던 광해군과 달리 인조는 대명사대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청과의 화친을 거부하였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세력이 강성해진 청은 명의 약화를 촉진하는 한편 대등한 국가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에 화친을 강요하였다. 조선이 대의와 명분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마침내 조선에 난입하였다. 인조는 그 즉시 비국의 요청에 따라 유지(有旨)를 내려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을 경상 좌・우도 호소사로, 김장생(金長生)을 양호(兩湖) 호소사로 삼고, 인신(印信)을 내려 보내 의병을 규합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와서 근왕(勤王)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 사계 김장생은 80세의 노구였다. 김장생은 유지를 받들고 즉시 장계를 올린 뒤, 여산부(礪山府) 황산(黃山)에 머물며 모병청 설립하고 막부를 구성하였다. 사계전서 「거의록」에 따라 막부 조직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막부조직도> : 첨부된 파일을 참조바람. 김장생은 인조 정권의 정신적 지주이자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계 거두로서 상징적 인물이었다. 양호의 막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항들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남원부사로 고위직에 있는 송흥주를 부사로 삼고, 우계 성혼(1535~1598)의 문인 윤전(尹烇, 1575~1636)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며, 회덕의 송이창・송국택과 김제의 유집을 참모관으로 임명하였다. 의병장은 보성의 안방준과 광주의 고순후(고경명의 4자)로 정하였다. 정묘호란의 거의(擧義)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호호소사 김장생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의병 모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의병의 모집뿐만 아니라 분조하여 전주로 내려온 소현제자를 호위하는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따라서 김장생은 애초 연산 본가에서 왕명서와 인신을 받잡고 막부를 조직했으나 세자가 머무는 전주로 내려와 소모(召慕)를 지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광산거의록 「호소사격문」에 기록된 소모유사는 류평, 고부민, 류술, 박충렴, 기정헌, 윤경, 박지효, 신필, 정민구 등 모두 9명이다. 김장생의 「거의록」에 보이는 광주의 인물들 중에서 이성춘, 박명달, 기의헌, 고부립, 고부필, 박종, 이도, 이정태, 이용빈 등 9명은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또 의병장으로 임명된 고순후가 광주지역의 유사를 확정하여 막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김장생의 「거의록」 내용과 역할분야에서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고 분조가 이루어진 날, 다급하게 충의를 분발하여 의병으로 구원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교서는 의병을 소집하라는 주된 목적을 적시하기에 앞서, 이괄의 난을 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며 민심을 잃은 네 가지 이유를 꼽으며 반성하였다. 모두 민생과 관련한 문제들이다. 외란에 대한 구원을 요청하면서 민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은 것이 이례적이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거나 청국에 대한 배척을 조장하는 언사는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 교서는 존화양이의 명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민생의 문제를 되짚어 해명함으로써 먼저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심을 얻어야만 조정이 존립할 수 있고, 자발적인 거의 또한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월 29일, 주상이 강화도에 당도하자, 후금 사신이 화친의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아직 지방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일이 계속 되었다. 2월 4일 강화 행궁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두 번째 교서가 내려졌다. 의병 요청에 앞서 인조는 조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적이 안주를 통과한 이후로 누차 차인(差人)이 호서(胡書)를 보내와 우호를 통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개돼지 같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지만 우리의 입장에선 권도로 임기응변하여 일시적으로 전쟁을 완화시키는 계책을 삼아야 함은 어쩔 수 없으나, 오랑캐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기에 심지어 천조를 거절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군신은 하늘과 땅처럼 대의가 절연하니,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 교서는 앞서 소개한 교서와 다른 점이 있다. 내용이 짤막하면서도 존화양이의 화이관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후금의 사신이 문서로 통호(通好)를 요구하자 ‘견양(犬羊)의 말은 비록 믿을 수 없지만’이라고 전제하며 부득이 화친에 응하는 척하여 위급함을 완화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명나라의 지원요청을 거절함으로써 중립적인 외교를 취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인조는 단호했다. 명과 조선은 대의로 맺어진 군신의 관계이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할지라도 명을 배신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위급한 현실 앞에 권도(權道)로써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단호함이 행간에 배어있다. 인조는 화이관에 입각하여 외교정책을 변경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교서가 반포된 날, 호소사 김장생이 장계를 올려 의병의 상황을 전하자 비국이 임금에게 보고했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장생의 장계에 의하면 ‘송흥주(宋興周)를 호남으로 보내고 또 이민구(李敏求)를 부관(副官)으로 삼아 호서의 일을 구관하도록 하였는데, 모집된 군사가 모두 이 교생들이라서 무군사(撫軍司)가 「전진(戰陣)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오늘날의 걱정은 병사에 있지 않고 군량에 있는데 모집된 군사들이 모두 곡식을 납입하기를 원한다.’ 하니, 청컨대 장계에 의하여 군량을 모으는 데 전심하도록 하고 아울러 이 뜻을 타도의 호소사에게도 알리소서.” 하니, 따랐다. 이 장계를 통해 두 가지 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김장생이 호소사로서 의병을 모았지만 대부분이 향교를 출입하는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대의와 명분을 따라 거의에 참여했으나 사실 전장에 투입되기에는 훈련이 부족하였다. 모집된 의병을 점검한 무군사가 그들을 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 것을 보면, 이들은 오직 의리정신으로 대의를 좇아 의병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무군사의 입장에서는 전투병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군사들의 식량이 절실하였다.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곧 전투력이기 때문이다. 2월 27일, 김장생은 근왕(勤王)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가고자 송이창의 집에서 유숙했는데, 종사관 윤전과 참모관 유집도 따라왔다.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어, 마침내 3월 3일에는 빈청에서 금나라와 화친하는 맹세문을 지어 올리고 금나라 유해와 양국이 화친한다는 맹세를 하였다.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화친이 이루어지자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3월 8일 김장생과 문인들이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때 유집이 동행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기록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장생이 강화도에서 인조를 배알한 것은 3월 13일이었다. 인조는 호소사 김장생에게 양호의 인심을 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양호의 인심은 어떠한가?” 하니, 김장생이 아뢰기를, “전라도는 선비들이 많은 곳이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만 청주 등지에서만은 익명서를 마구 내놓아 의병을 훼방하고 있어서 그곳의 인심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서의 인심이 어찌 그 지경이 되었는가.” 하니, 장생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강화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척화의 의논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말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심하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척화의 논의를 어찌 그르다고 하겠는가마는 대신(臺臣)이 나더러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김장생의 대답에 따르면, 호남은 의병모집이 순조로웠지만 호서는 인심이 이반되어 모병이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에 대한 불만이 야기된 것이다. 존화양이를 주장하는 척화의 입장에서 화친을 맺는 것 자체가 굴욕이며, 한편으로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린 것이라 여겼다. 인조도 이러한 비판적 민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득이한 ‘권도’라고 부연했던 것이다. 김장생은 강화를 비판한 윤황(尹煌)과 강석기(姜碩期)에 대해 충심의 소산임을 대변하고, 호소사 직임을 해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4월 10일 왕이 강화도를 출발하여 4월 12일 경덕궁에 환궁함으로써 호란은 일단락되었다. 이날 김장생 역시 호소사 해직을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인신(印信)을 올려 보냄으로써 양호의 의병활동도 막을 내렸다. 백석은 스승 김장생 막부에서 참모관의 역할을 맡아 호남의 의병의 모집과 근왕의 대책을 강구하였다. 중책을 맡아 활약한 것은 그가 도학과 절의정신을 몸소 실천한 명망이 높은 학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금국의 요청대로 강화를 맺음으로써 조선은 그동안 고수해왔던 대의가 무너지고 명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부득이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춘추대의를 중시하고 의리의 실천을 신념으로 삼았던 학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거의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대의와 명분을 잃은 것에 대한 허망함을 은둔으로 위안하며 자책하였다. 정묘호란 때 호소사 김장생의 막하에서 활약한 33인의 약전(略傳)이 사계전서 「거의록」에 등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묘호란 당시 광주의 의병을 기록한 광산거의록이 있는데 의병장 고순후(高循厚)를 비롯한 20명의 창의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3) 병자호란 – 백석 52세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양분되었다.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들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척화와 주화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척화파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주화파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를 탄핵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안 청태종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라고 위협하였다. 여기에다 정묘호란 때 맺은 ‘兄弟之盟’에서 ‘君臣之義’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라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척화파의 강경한 입장에 인조는 평안감사에게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내렸다.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태종이 직접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은 명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명과 군신 관계를 맺은 조선을 굴복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다 이미 늦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포위를 당한 채 12월 19일에 의병을 규합하여 구원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인조는 교서에서 환란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명과의 의리적인 군신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신하의 예로써 섬긴 지 2백년이 되었고, 명 황제 조정의 부육지은(覆育之恩)은 임진년에 이르러 지극하였으니, 이는 만고에 더할 수 없는 대의이다. 한번 서쪽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히니 우리나라 대의로는 그들을 원수로 삼아야 하는데 정묘(1627)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서 위로 명나라에 주달하고, 임시로 기미(羈縻)를 허락한 것은 다만 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오랑캐가 참람한 호칭을 칭하고, 우리와 화친[通議]하기를 강요하는데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입으로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하니, 힘의 강약을 따지지 않고 그 사신을 드러내놓고 배척한 것은, 다만 만고의 군신지의를 뿌리박게 하자는 이유에서였다. (중략) 지금 이렇게 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스스로 취한 바가 아니라 단지 군신의 대의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마음과 이 도리는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또한 어찌 차마 군신의 의리에 대해 모르는 체하여 나에게 갑자기 닥친 어려운 일을 구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서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며 마땅히 예로써 섬기는 것이 대의임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전 정묘호란 때 후금과 화친한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존화양이의 대의를 저버리고 화의한 데 대한 해명이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대의명분을 강조하되 현실적인 처지를 급보함으로써 근왕(勤王) 거의를 요청하였다. 호남절의록에서는 병자호란시 호남의 창의를 크게 산양(山陽:寶城의 별칭), 옥과(玉果), 화순(和順), 나주(羅州) 네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호남에서의 동시다발적 창의 규모와 지역 분포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1764년에 간행된 호남병자창의록에 따르면, 앞서 호남절의록에서 언급한 대표 인물 중 산양(보성)의 안방준(安邦俊)과 나주의 김선(金旋)이 보이지 않는다. 호남병자창의록이 호남절의록보다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누락된 것이 의아하다. 이와 관련하여 호남병자창의록 「범례」에서 고부, 고창, 순천, 영광, 함평 등 다섯 고을의 격문을 상고할 수 없다고 밝힌 것처럼 이미 창의관련 문건들이 일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다 포함하여 전체적인 규모와 지역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어서 「倡義時事蹟」에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을 때 부윤 황일호(黃一皓)가 포위망을 뚫고 교서를 가지고 나와 창의를 독려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12월 25일 이른바 ‘옥과거의오현’이 격문을 작성하여 회람을 마치고 수결(手決)한 뒤, 도내에 격문을 보내 각 고을에 모의도유사를 나누어 배정하고, 정축년(1637) 정월 20일 여산(礪山)에 집결하기로 기일을 정하였다. 이로써 보면 호남병자창의록은 옥과거의 5현을 중심으로 창의한 사실을 기록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12월 27일 옥과현을 출발한 오현의 격문은 창평→광주→남평→능주→화순→동복→낙안→흥양→보성→장흥→해남→진도까지 전달되었다. 창의록에 의거하여 각 고을의 도유사와 격문의 도착 시각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는 첨부된 파일을 참조바람> 병자호란 때에도 역시 호남의 창의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묘호란 때 의병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병자호란 때에도 역시 의병에 앞장섰다. 호남병자창의록에 따르면 창의의 선봉에 섰던 사람은 106인이다. 교서와 격문이 도착한 시점에 따라 창의한 시기가 다를 수 있지만, 어느 곳이나 지체함이 없이 시각을 다투며 구국의 일념으로 충의를 다한 점에서는 똑같다. 정묘호란 때보다는 의병의 규모가 컸지만 현실적으로 의병의 모집이 쉽지 않았다. 본고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옥과에서 거의한 오현이다. 이들은 모두 전북 출신으로 이흥발・이기발・유집 세 사람은 석계 최명룡의 문인이며, 양만용은 강항과 박동열의 문인이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창의했으며 간양록의 저자로 유명하다. 최온은 구체적인 사승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총명함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내 명망이 높았으므로 서로 교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교적 나이가 어린 이흥발・이기발 형제와 최온은 현직에서 관아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긴박한 상황 속에서 교서와 같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당시 이흥발은 옥과 관아에 있었는데, 마침 아우 이기발이 모친을 뵈러 형의 임지인 옥과에 와 있다가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임지로 돌아갈 길이 없자 형과 함께 거의하였다. 순창 현감인 최온은 옥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양만용은 오현 명의의 창의격문을 발한 후에 ‘설산(옥과면)에서 급히 집으로 돌아와 모부인께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고향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석 유집은 김제에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거의 장소인 옥과에 이르기까지 하루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오현의 격문이 12월 25에 작성되어 27일에 발송된 것은 회람과 수결, 판각 등에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묘호란은 양호호소사 김장생을 중심으로 막부를 조직하여 호남의병을 모집하였고, 병자호란은 지역별로 모의청을 설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정묘호란 때 거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병자호란 때에도 주축을 이루었다. 4) 거의일기에 나타난 유집의 의병활동
백석 유집의 의병활동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의병의 명단보다는 실질적인 활약상이 기록된 문헌을 찾는 일이 급선무이다. 훗날의 기록보다는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처럼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는 비록 사적인 기록이지만 그 가치는 매우 높다.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전남 화순의 의병 류함의 문집 百泉遺集에 수록된 「丙子擧義日記」와 조수성의 雲巖逸稿에 수록된 「和順擧義時日記」는 그 좋은 예이다. 백천 류함은 백석 선생과 직계는 아니지만 같은 문화류씨로 아홉 살 연상이고, 화순현감 류훤 역시 같은 종씨로 한 살이 아래였다. 이 두 기록을 토대로 긴박했던 당시의 의병활동을 보다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옥과거의 오현의 격문이 12월 28일 화순에 전해졌다. 당시 류함은 이미 이틀 전인 26일에 조수성의 거의에 동참하고 있었다. 오현의 격문이 아래 지방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지역마다 거의에 동참하는 중심인물들을 명기하고 대표자가 수결하였다. 다음날인 29일 오후에 옥과의 격문이 또 도착하였고, 아울러 한 폭의 서찰이 동봉되어 왔는데 이는 백석 유집이 류함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내용은 화순 현감인 류훤(柳萱, 1586~1661)의 서찰을 통해 류함이 거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부를 전하면서 「兵家緊要」라는 병법에 관한 글을 첨부한 것이다. 거의 당시 화순 현감은 류훤이었다. 류훤이 교외 객사문 밖에 모의청을 설치하자 조수성・조엽・최명해・임시태가 가장 먼저 참여하여 모병을 주도하였고, 류훤은 거의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적극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백석 선생이 조수성 의진에 동참한 류함에게 특별히 안부를 전한 것은 혈족으로서 남다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봉한 「병가긴요」는 유사들이 회람하였다. 옆에 있는 제공들이 돌아가면서 살피며, “이는 참으로 병가의 요결이다. 금일 맹주는 저절로 그 사람이 있음을 바로 알았다.”라고 하였다. 백석 유집이 의병활동에 참여했다는 사실 이외에 당시 상황을 대변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주목된다. 사실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향교의 유생들이었고, 노비들도 있었다. 따라서 병법에 관한 군사적 지식이 없으면 당랑거철과 같은 무모한 항거에 그칠게 뻔했다. 이에 백석은 병법의 숙지와 군사교육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혼자만의 지식이 아니라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이나 유사들이 반드시 숙지해야만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백석이 「병가긴요」라고 적시하여 첨부한 요결의 내용은 류함의 百泉遺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며 선조에게 지어올린 「戰守機宜十條」 중 <束伍> 부분이다. 이 십조는 이후에 지은 「軍國機務十條」와 더불어 군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모든 사항을 망라하고 있다. 「전수기의십조」의 조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척후(斥候) 2.장단(長短) 3.속오(束伍) 4.약속(約束) 5.중호(重壕) 6.설책(設柵) 7.수탄(守灘) 8.수성(守城) 9.질사(迭射) 10.통론형세(統論形勢) 열 가지 조목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속오(束伍)’를 발췌하여 보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첫머리에 “병법이 천언만어나 되지만 그 긴요한 주안점은 오직 속오에 있다.”라고 강조한 것처럼, 먼저 의병장들이 모집된 의병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법을 교시한 글이다. 오늘날 장수는 한 사람도 이런 뜻을 아는 이가 없어서 무릇 조정의 관료와 양반들은 겨우 활 잡을 줄만 알면 군관이라 이름하며, 장막 속에 모여서 분군을 하지 않고 겨우 좌우에서 응대하고 사환하는 임무만 갖출 뿐이다. 군졸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각 고을에서 임시로 촌야(村野)의 백성들을 뽑아 보내어 번갈아 왕래만 하니, 본래 싸우고 진을 치는 일을 알지 못하며, 또 대(隊)・오(伍)・기(旗)・초(哨) 등에 예속되는 곳이 없어서 어수선하고 떠들썩하여 수족과 이목이 지향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죽음을 다투는 전쟁터에 몰아넣어 힘껏 싸워서 적을 이기기를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장수가 참으로 속오를 안다면 비록 시정의 잡된 무리들을 모은 군사라 할지라도 훈련시켜 적군과 교전할 수 있거니와, 반대로 속오를 알지 못하면 비록 굳센 활을 당기고 수레를 뛰어넘는 군사라 할지라도 다 미리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 무너져 버린다. 이로써 속오 한 가지는 군정(軍政)의 큰 강령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이전 정묘호란 때에도 호소사의 임무를 맡은 김장생이 자신은 늙고 병법을 모르니 병법에 밝은 장수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보면, 실질적인 전투력을 염려하고 있었다. 대의와 명분을 좇아 창의에 동참했지만, 의병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전투력을 지녀야 한다. 명분과 의리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전투는 실제로 몸을 활용하는 일이다. 백석은 이전부터 군사에 관한 실질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학자이지만, 한편으로는 난세를 살아가는 학자로서 전장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군사적인 공부를 겸한 듯하다. 백석을 평하여 ‘문무를 검비했다’라는 말이 그것을 반증한다. 류함의 백천유집 권3에 수록된 「병자거의일기」 12월 26일 조에 “오후에 이흥발・유집의 격문이 도착했는데, 집(楫)은 백천공의 종족 종손(從孫)이다. 학행으로 등용(登庸)된 인재로 문무를 겸했는데 호남모의유사가 되었다.”라고 적었다. 선친이 여러 차례 의병을 나섰으며, 또 실제로 난을 평정한 공신이었기 때문에 병법에 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정묘호란 때 호소사 김장생이 백석을 급히 불러 참모관으로 삼고 계책을 논한 것도 아마 백석이 병법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때는 출정하기 전에 화의가 이루어져 해산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임금이 포위되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었으니 실질적인 전투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따라서 백석이 창의의 본거지라 일컬을만한 화순에 병법 요결을 전달한 것은 의리와 명분을 넘어 실질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호남의병은 1월 20일 여산의 모의청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오현의 옥과 의군이 1월 19일 먼저 여산에 도착했고, 조수성이 이끄는 화순 의군은 1월 11일 출정 길에 올라 장성→노령→태인읍→금구읍→전주→삼례역을 거쳐 1월 20일 여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의군과 호서에 있던 정홍명(鄭弘溟)의 의군 등도 여산에 집결하였다. 호남의병이 총집결한 것이다. 1월 19일 여산에 도착한 이흥발과 유집 등이 먼저 여산에 주둔하고, 각 읍 병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전라감사 이시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서에 있던 정홍명이 의병대장으로 감사와 힘을 합하였다. 류함이 제공들과 의논하기를 “이공(이흥발)이 만약 저들(이시방의 군대)과 합치자고 하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하니, 조수성이 말하길 “우리들은 수백 의병을 인도하여 이곳에 도착했는데 어찌 남에게 제재를 받겠습니까? 우리가 모집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별도로 한 부대를 맡겠습니다.”라고 하니, 백천공이 “바로 제 뜻과 합치됩니다. 비록 그렇지만 동정을 잘 살펴보고 방법과 계략을 결정합시다.”라고 하였다. 이때 정홍명(鄭弘溟)을 전라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정홍명은 창평(昌平) 출신으로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다. 1633년 6월부터 1635년 8월까지 김제군수를 역임한 적이 있고 백석과는 동문이다. 의군들은 1주일가량 여산에 머물며 화순에서 군량을 조달받고 조열한 뒤, 1월 27일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출정길에 올랐다. 공주를 거쳐 청주 서평원에 이르러 남하한 청나라 군사와 마주쳤다. 1월 30일, 마침내 의군의 첫 전투가 있었다. 각 진중에서 두루 모집하여 산 계곡에 있는 적의 형세를 가서 엿보게 하였는데 응하는 자가 없었다. 양만용・이기발・유집이 몸을 떨치고 가기를 청하니, 바로 명령을 내려 대여섯 명의 포수로 뒤를 따르게 하였다. 산에 올라 적을 내려다보니 적기(賊騎) 수백이 계곡 속에 모여 소와 말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단속하고 한편으로는 속이면서 이기발이 단약(單弱)함을 속이려 따르는 자에게 일제히 방포케 하니, 적기가 크게 놀라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주둔지를 포위하니, 이기발이 바로 위험에 빠져 다급할 즈음에 백천공(류함)이 여러 장사들과 굳센 병졸 50명을 데리고 그 뒤에 다다라, 이기발이 포위된 것을 발견하고 앞장서 돌진하고, 양만용・유집이 힘을 합쳐 적기(賊騎)를 죽여 흩트렸는데, 머리를 벤 것이 9명이었다. 버려진 병기를 획득하여 돌아오니 우리 병졸은 죽은 자가 5, 6인이고, 다친 자가 또한 10여 인이었다. 출정한 지 20여일 만에 청주 서평원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두 일기에서 언급된 인명이 약간 차이가 있지만 옥과의군과 화순의군이 힘을 합쳐 승리를 거둔 사실은 다름이 없다. 의군의 승전은 명분과 실질이 부합되는 쾌거였다. 창의하고도 출정하지 못했던 정묘년과는 달리 병자거의는 대의명분과 실질이 부합하여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청주 서평원 전투에서 잠시 승전의 기쁨을 누리던 그날,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고 환궁하였다.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군신지의를 맺은 것이다. 호남의 의군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사기를 북돋아 진군하였다. 그리고 2월 4일에서야 삼전도굴욕의 비보를 접하였다. 이로써 호남 의병의 역할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굴욕의 대가는 혹독했다. 대의와 명분을 일시에 잃은 의병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선봉에 섰던 이들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향리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백석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존화양이의 대의가 사라진 세상을 망국이라 한탄하였다. 광해군의 폭정을 물리치고 반정으로 이룩한 왕조가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치욕감에 자결한 이도 있었다. 대의를 따라 창의했던 이들의 의리정신과 충절은 이후 은거의 삶을 통해 반추되었다. 파란의 인조조가 막을 내리고 효종이 즉위하자 그동안 반추되었던 대의명분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북벌론이 대의명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5. 結語 조선시대 의병활동은 춘추대의에 입각한 의리정신의 실천이다. 임금이 위급하거나 나라의 운명이 위급할 때 대의명분을 따라 근왕(勤王)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내란이 있을 때에는 군신의 의리를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왜란과 호란 때에는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대의를 내세워 창의하였다. 앞서 밝힌 것처럼 창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대의와 명분을 따랐기 때문이다. 백석 선생은 파란만장한 시대적 운명을 타고났다. 일생동안 숱한 환란들을 목도하며 개인적 입신이나 입언보다도 나라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대의가 항상 우선하였다. 어린 시절 왜란에는 대처하지 못했지만, 성년이 된 이후 접하게 되는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스승 김장생의 막하에서 참모관으로서 선봉에 섰고, 병자호란 때에는 이른바 ‘옥과거의오현’ 중 한 사람으로서 호남의병의 중추를 담당하였다. 실질적인 실효를 위해 의진(義陣)에 병법을 교시한 것은 다른 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점이다. 이로써 그가 문무를 겸한 시대적 인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실제로 의병을 이끌고 출정하여 청주 서평원 전투에서 승전한 것은 대의와 명분이 작은 결실을 맺은 쾌거였다. 인조의 삼전도굴욕으로 내세웠던 대의와 명분이 무색해지자, 시대를 한탄하며 고향 김제에서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풍속을 교화하며 도학을 실천하였다. 격랑의 시대에 춘추대의와 도학정신을 바탕으로 백석과 의병들이 실천한 의리정신은 나라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불의에 항거하는 ‘호남의 정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참고문헌> 論語 宋史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金長生, 沙溪全書 柳成龍, 西厓集 柳涵, 百泉遺集 宋時烈, 宋子大全 宋浚吉, 同春堂集 宋穉圭, 剛齋集 趙平, 雲壑集 柳楫, 白石遺稿 白石院誌 김동수 교감・역주, 호남절의록, 景仁文化社, 2010. 羅海鳳 저, 李栢淳 역, 國譯 南磵集, 羅州羅氏南磵公宗會, 2007. 金珔國 編, 影印本 湖南節義錄, 光文社, 2007. 金堤先生案, (사)김제향토사연구회, 2011. 광주유림 편, 신해진 역주, 光山擧義錄, 景仁文化社, 2012. 신해진, 「호남병자창의록 초간본의 실상」, 호남병자창의록, 태학사, 2013. 박기상・이덕양 편, 신해진 역주, 湖南丙子倡義錄, 태학사, 2013. 姜東元 편저, 화순병자창의일지, 화순병자창의일지편찬위원회, 2015. 柳涵 저, 김균태 역주, 百泉遺集, 태학사, 2020. 李銀赫 譯註, 白石遺稿 上・下, (사)김제향토사연구회,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