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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내려오는 미사리 터널을 빠져나오자 멀리 보이는 산야에는 아직도 눈들이 쌓여 있었다.
3월 말이라 절기상으로 춘분이 지났건만 아직도 겨울이 잊혀지기 두려운듯 춘천에는 가끔 눈발이 날리고 영하로 내려가는 날도 있다.
터널을 빠져나와 먹구름 사이로 존재를 머금은 햇살이 차에 드문드문 비춰지자 조수석에 앉은 솔희는 거의 직각에 가깝게 좌석을 세우고 패트병 물을 한번 더 마신뒤 선바이져를 열고 투명한 립글로스를 꺼내 입술에 바른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듯이 운전석의 정균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어 보인다.
“당신 이제 좀 나아?”
“터널 빠져 나오는 순간 기운이 나기도 하네요”
솔희의 말에는 힘은 그닥 없었지만 그늘진 모습이나 당황한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이제 정균은 솔희를 집에 데려다 주고 함께 있을 것인지, 다시 직장으로 나갈지를 선택해야 한다.
한 낮에 급작스레 솔희를 데리러 먼곳까지 왔기 때문이고 정균이 진행하던 작업들은 그가 사무실을 급하게 튀어나올 당시의 그대로 보류되어 있는 상태다.
“집으로 가는건가요?”
“그래야지, 당신 내려놓고 어떡할지 봐야지”
“사무실로 가요. 어차피 늦은 오후가 되었으니 저 땜에 일 버리는거 원치 않아요. 당신 일 끝날 때까지 차 안에라도 있으면 되죠?”
“무슨 소리야, 당신! 무슨 숨겨둔 여자처럼 따로 차안에서 기다리는게 말이돼? 무슨 죄인인가?! 떳떳하게 내 사무실로 들어와서 쉬고 있어. 사모님한테 누가 뭐란다고”
“호호......근데 사모님이라는 표현 너무 좋다아.....그럼 사모님 노릇좀 해야죠, 가까운 마트에 차세워봐요, 직원들에게 박카스라도 한박스 사서 돌리게요.”
그는 자기 때문에 일을 망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솔희에게서 깊은 성숙함을 보았다.
온통 자기 밖에 모르던 솔희가 더 이상 아니었다.
“사모님이란 호칭이 뭐 대단한거라구”
“당신 덕에 사모님 소리듣는거죠. 근데 여보, 당신한테 이렇게 혼나면서도 저 웬지 기분 들뜨는거 있죠?”
정균은 보기 드물게 솔희를 꾸중했지만, 솔희는 그에게 야단맞으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정균은 시내의 사무실 쪽으로 차를 몰며 중간중간 신호대기중 수시로 솔희의 머릿결을 매만졌고 그럴때마다 솔희는 쓰다듬받는 고양이처럼 눈을 껌뻑껌뻑 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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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반경 정균의 집 응접실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는 그랜드 피아노, 어젯 밤부터 입었을 나이트가운 차림에 방금전 세안을 한듯하고 머릿결에 물기를 머금은 뽀얀 생얼의 솔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평균율과 하이든의 소나타를 치고 있다.
예전 미국생활 시절 그랜드 피아노를 응접실 중앙에 놓았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응접실의 한 구석으로 밀려 났지만 여전히 큰 그랜드 피아노의 면적으로 인해 그 존재는 남달랐다.
솔희는 언젠가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세안을 마치고 아침 준비를 한뒤 정균이 일어날때까지 피아노를 친다.
정균이 세안을 마치고 복장을 갖추고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오거나, 정균이 솔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운동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목적도 있지만 그냥 솔희는 피아노를 치는게 좋았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미국서 결혼생활을 할때는 솔희는 전용 연습실을 이용했기에 이 피아노는 그저 장식용에 불과했었다.
그것을 보스톤으로 가져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져가고 엘에이로 다시 옮겨왔어도 공동주택의 특성상 피아노를 연주하기가 어려웠고 그랜드피아노는 좁은 공간을 차지하는 괴물에 불과했었다.
이 피아노가 제대로 된 공간을 만나자 솔희는 피아노와 함께 자유로와졌고 음악과 함께 평온을 누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보이거나 평가받기 위해서 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음악적 감상을 만족시키면 되는 것이니깐.
정균이 출근하려할 때 차고까지 따라나온 솔희는 정균의 한쪽 팔을 붙잡고 외출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여보, 오늘 낮에 서울에 청랑리 부근에 있는 전문 산부인과 레이디메딕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허락하실거죠?”
명확히 행선지를 밝히자 정균은 지난주에 어머니 생신 때에 서울에 갔었는데 왜 또 가냐고 물으려다 관뒀다.
솔희는 이곳에서 정기검진을 위한 신경내과와 산부인과를 정해 놓은 터였고 굳이 서울의 전문병원까지 간다는 이유에 대해 정균은 궁금증은 일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중장거리 외출에 대해 굳이 남편의 허락을 구하는 솔희의 태도가 예전과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변모한 것이라 그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다녀와야지, 그럼 차 바꿔서 운전하자. 당신 차는 후륜구동이라 갑작스레 진눈깨비라도 만나면 곤란할테니.”
정균은 쥐고 있던 팔리세이드 열쇠를 다시 거라지 출입문 옆에 걸어 놓고 그 옆의 제네시스 키를 잡았다.
“외출 허락해줘서 고마와요! 당신도 일찍 들어오세요. 사랑해요, 여보!”
솔희는 정균의 입술에 연속으로 세 번 입술을 떼었다 붙이며 쪽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릴 정도의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녀는 이제 정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수식어처럼 자주 하기 시작했다.
솔희는 정균의 차인 대형 SUV를 몰고 서울로 진입하자 그전엔 안나던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리저리 밀리고 끼어들고 무질서한 길거리의 행태는 무척이나 짜증스러웠다.
어찌했던 솔희는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 레이디메딕이라는 분홍색 간판이 달린 3층의 아담한 건물 앞에 도달해서 야외주차장에 차를 놓고 건물로 들어갔다.
일정한 시간을 기다리자 간호사가 솔희를 호출하고 그녀를 전문의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젊은 남성 의사와 마주한 솔희는 살짝 긴장되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실오라기같은 희망, 아니 우연을 바라고 이 병원을 예약한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균과의 재결합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했지만 어느 순간 재결합이 되어 있던것처럼 다른 것도 뭔가 신적 도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민솔희님? 미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은 Solhee Chae였구요, 19xx년 7월 26일생 맞구요?”
“네, 맞습니다.”
“부인께서 8년전 이용하셨던 미국 토랜스라는 도시의 D산부인과에서 이메일로 자료가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그냥 절단시술만 하신게 아니라 레이져로 지지는 시술까지 하셨었습니다”
“네?! 그럴리가요!!”
솔희는 가슴에 쾅!하는 바윗덩어리가 내려와 깔린 느낌이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솔희의 기억이 왜곡된 것이었을까.
신경내과 의사와는 완전히 딴판일 정도로 산부인과 전문 클리닉 의사는 잔인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국어책을 낭독하고 있는 듯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부인의 의지가 강하셔서 그 시술 병원에서 서약서까지 작성하셨더라고요”
그 의사선생은 스캔된 예전 미국병원에서의 수술동의서를 TV화면에 띄우자 영문으로 작성된 각종 서약에 솔희의 ‘SHC’라는 이니셜과 자필사인이 그대로 살아았다.
“지지는 시술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하고 또 사람의 앞으로 일이란 모르기 때문에 다들 꺼려하는 편입니다만, 결론적으로 사모님의 난관 복구는 불가능합니다. 난임클리닉에도 해당사항이 되지 못하고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어. 소용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되니깐)
병원을 걸어나오는 때까지만해도 솔희는 애써 안도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털모자와 오버코트를 벗어 SUV 뒷좌석 유리창 부근에 단정하게 걸어놓고 베이지색 털가죽 장갑을 벗어 운전석 옆 콘솔에 올려 놓았다.
시동을 걸기전 솔희는 핸들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핸들 중앙의 에어백에 이마를 맞대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솔희는 그 자리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았고, 당시의 솔희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녀의 결혼 3년차에 이미 솔희는 정균의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지만 임신과 출산 자체가 그녀의 성공에 걸림돌이 될거라고 판단했고, 심지어 남편 정균조차 방해물이 될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와 결혼생활로 생애 끝까지 갈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솔희는 유명한 예술가들은 여러차례의 결혼이나 복수 연인 정도는 기본이고, 여류 예술가는 아예 출산을 안해야 일에 열중할수도 있을뿐더러 남과 달리 폼나 보인다고 어이없이 생각했던 어리석음이었다.
그것 역시 솔희에겐 지워버린 기억이었고, 이제는 늦으나마 정균의 씨앗을 자기 뱃속에 싹틔우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망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병원에서 과거의 자신과 대면한 감상을 되내이던 순간 솔희는 눈앞이 하얘지기 시작하고 온 몸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켰고 뒷문을 열어 오버코트를 다시 입었고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추위를 가렸다.
알수 없는 추위보다도 극도의 공포감으로 주눅이 든 솔희는 덜덜 떠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자칫하면 솔희는 길거리로 뛰어나가 지나다니는 버스 앞으로 스스로 뛰어들 뻔했다.
하지만 그것을 붙잡은 것은 번갯불처럼 머리를 스친 정균이었다.
솔희는 휴대폰을 꺼내어 정균의 저장번호를 눌렀다.
일하다가 솔희로부터 전화벨이 울리자 정균은 처음엔 솔희가 그저 하루에 몇 번씩 하는 안부와 각종 당부를 담은 수다일 듯 싶어 귀챦은 기색으로 받았다.
하지만 솔희의 목소리와 말투는 그로 하여금 온갖 불길한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 여보오......”
“왜 그래, 솔희! 어디 아퍼? 아님 사고났어? 어디야?”
“........아아.........넘 무섭고 떨려요. 아무것도 할수 없어요. 지금 와줘요”
“그래! 지금 갈게 당장”
“여보, 전화 끊지 말아줘요, 제발”
솔희에게서 공황장애를 앓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바가 있고 정균이 기억하기로는 가끔씩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고개를 뚝 떨어뜨리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솔희를 엘에이에서 데려와 결혼식을 다시 하고서는 솔희에게 그런 가벼운 우울증의 증상은 전혀 캐치하지 못했었고, 솔희가 최근에 다녀온 신경내과에서는 솔희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소견을 들었던 바였다.
정균은 이제 솔희를 어떻게 데리러 가야할지 판단을 해야 한다.
솔희를 도울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서울에 있는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균은 솔희의 우울증과 공황장애의 원인이 어떤 것인지 솔희가 모두 밝히지 않았기에 정확히 모른다.
또 그녀의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한참 심하던 시절 어떤 짓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도 정보가 없다.
그 상태에서 부모님이 솔희의 증세를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솔희가 극단적 상황에서 유일하게 찾은건 정균이었기에 솔희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가 가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다.
당장 택시를 타고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솔희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면 ITX를 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춘천역에서 ITX청춘호 의자에 앉자마자 무선 블루투스를 꽂고 솔희에게 영통을 네 번이나 시도한 뒤에 연결되었다.
솔희는 그 사이에 울었는지 얼굴이 통통 부어 있었고 화장기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것이 안심이 되었던지 솔희의 손가락이 정균의 화면을 가로 막고 있다.
아마도 2D에 불과했던 정균의 얼굴을 만지고 싶은 행동일 듯 싶다.
정균은 과거 솔희가 보스톤으로 갔을 때 영통하면서 솔희에게 가슴을 열어 보여달라고 한적이 몇 번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솔희는 화면 앞에서 요사스럽고 여유롭게 웃으면서 슬립을 내리고 블래지어를 벗어 보이며 정균더러 어린애라고 놀려댔지만 정균은 안타까울 정도로 2D화면을 한손으로 쓸어내린적이 있었을뿐 아니라 카메라에 입술을 대고 키스를 했었다.
그 당시의 우스꽝스러운 행위는 정균에게는 참으로 애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것이 지금 한시간 후면 정균은 그의 리얼한 모습 그대로 멀리 떨어진 서울의 어느 병원 주차장에 있는 솔희를 푹 감싸안아줄 것이다.
“얼마나 남았어요?”
“이제 20분이면 청랑리 역에 도착하는걸로 나오네? 역전에서 당신이 말한 병원으로 가는거면 10분이면 갈거야. 조금만 더 참아. 지금 콘디션 어때?”
“땀이 많이 나서 탈진할 것 같아요”
“병원 로비에 벤딩머신 있지 않나? 물 한병 뽑아”
“...........차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요”
휴대폰 화면 속에서 솔희가 기운없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아직도 공황장애가 진행 중이고 땀을 많이 흘려 탈진 직전에 있다는 것으로 추측될수 있다.
그리고 몇발짝 앞의 병원 로비도 못갈만큼 공포감에 휩쌓여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열차가 청랑리역에 도착하자 정균은 카톡을 끄지 않은 상태로 전화기를 들고 기차를 빠져나와 통로 사이의 벤딩머신에서 생수와 이온음료를 사들고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안에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니 솔희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반쯤 실신해 있는 것 같았다.
택시의 GPS를 보니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신호걸릴 때마다 애간장이 타 들어 가고 있었다.
레이디메딕이라는 건물 앞에서 내린 정균은 짙은 곤색의 팔리세이드가 서 있는 곳을 발견하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휴대폰 화면에 솔희는 차의 실내에서 여전히 반쯤 실신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정균이 그의 차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휴대폰을 끄고 운전석 문을 두들겼다.
솔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벌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단추를 눌러 잠금장치를 해제한다.
하지만 솔희의 입술은 여전히 추위를 느껴서인지는 몰라도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솔히에겐 그녀가 지난 가을의 독서모임 총회때 한껏 꾸미고 따라와 즉흥 연주회를 열고 정균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여유롭게 인사하던 그 카리스마 있었던 모습과 지난 12월의 두번째 결혼식에서 본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움은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솔희는 쓰러지듯 그에게 안겨왔고 정균은 그녀를 안아들고 그의 두툼한 두 입술로 떨고 있는 솔희의 입술을 덮어 고정시켰다.
그의 입술에 덮어진 솔희 입술의 떨림은 서서히 멈추어졌다.
정균은 솔희의 어깨와 엉덩이를 잡아 운전석에서 이끌어 내리고 조수석에 앉힌뒤 벨트를 매어주고 솔희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도록 했다.
솔희가 에너지 드링크를 완전히 비우고 생수를 한모금 마시자 그는 솔희가 누울수 있도록 좌석을 뒤로 재껴주었다.
그러나 솔희는 굳이 좌석을 뒤로 재끼는 것을 거절하곤 운전석으로 올라온 정균의 오른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 어디서 상처받고 병든 몸으로 내게 돌아온거구나)
정균은 이 순간부터 솔희의 증세의 원인을 더 이상 궁금하게 생각지 않기로 했다.
작년 가을에 정균과 솔희가 춘천 호반에서 재회할 때 솔희는 그 한껏 꾸미고 여전히 눈부시게 예쁜 얼굴과 탱탱한 몸매로 왔지만 솔희는 사실 죽음을 준비하러온 것이었다.
정균은 솔희가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과거를 뒤돌아보러 온 것이라는 것까지는 알수 없었지만 그때 솔희가 병든 몸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던 것이다.
아침 출근시간에 정균이 진눈깨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무심결에 예고한 것이 맞다는 듯 서울에는 비와 눈이 뒤섞인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저 땜에 힘드시죠?”
“한국의 운전길에 적응이 안돼었쟎아? 어차피 진눈깨비가 오니 내가 운전교대를 하는게 맞지 뭐”
정균은 눈길 모드로 4WD를 맞춘뒤 천천히 차를 끌고 병원주차장을 나서기 시작한다.
솔희는 그제서야 안심할만한 상황임을 자각한 듯 한숨을 짧게 내쉬며 선바이져를 열어 머릿결을 정돈하고 분첩을 꺼내어 가볍게 화장을 시작한다.
그녀의 눈이 퉁퉁 부운데다가 눈물자국이 뺨에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기온이 내려갈듯 말듯한 가을의 어느날에 중년초입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유성하는 벤츠사의 소형 SUV를 몰고 춘천시 외곽의 비스듬한 구릉지대를 운행하고 있다.
단정한 모노톤 정장 차림의 성하는 창문을 조금 열고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산들바람에 실린 냄새를 만끽하며 운전하고 있는 중이다.
기와지붕이 얹혀진 게이트를 통과후 얼마후 회색과 검은색으로 마감된 모던하게 생긴 2층 주택이 담너머로 보이는 곳에 와서 급격히 차 속도를 줄이며 담벼락 쪽으로 차와의 공간을 좁혀 주차했다.
성하가 핸드백을 챙겨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린 몇발짝 앞의 그집 대문에는 [채정균]이라고 해서체로 새겨진 고급진 대리석 문패가 걸려 있다.
유성하가 대문에 다가가 벨을 누르자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성하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잔디밭에 심겨진 넓게 깎은 화강암 디딤돌을 딛고 지나자 또 한차례 현관문이 재껴지며 8살 여자 아이가 뛰어나온다.
“엄마~ 렛슨 다 끝났어.”
“김.나.혜.! 오늘 많이 배우고 솔희이모, 아니 민솔희 선생님 말씀 잘 들었어요오?!”
“네에! 엄마!”
“오유, 고래고래 내 따알~”
성하는 착 감겨드는 딸 아이와 깊은 허그를 하지만 이제 엄마가 들어올리기엔 부담스런 체격이 된 듯 했다.
집안쪽에서 화사한 홈드레스 차림의 솔희는 두 모녀의 상봉을 웃음띤 얼굴로 바라보며 성하를 실내로 불러 들인다.
자주 보는 사이인데도 이 순간 성하는 가벼운 광택을 머금은 짙은 퍼플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것이 얄미울 정도로 어울리는 솔희의 시들지 않은 아름다움에 더하여 47세의 나이에 걸맞는 우아함이 어우러진 자태에 잠시 멍했다.
또한 솔희의 봄볕같이 따사롭고 온화하여 더욱 아름다운 눈빛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솔희와 성하는 춘천에서도 하루이틀 본 사이가 아님에도 성하는 학창시절의 그 솔희의 도도했고 자신만만한 자기도취성 눈빛과 몸짓을 떠올리며 현재의 솔희의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다.
(어디 쪽이 진짜 솔희 언니지?)
성하가 25년전 미국 뉴욕시 근방의 명문 콘서바토리에 새내기로 입학했을 무렵 여유 충만한 학부 시니어였던 솔희의 모습과 행위들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미국 동부에 사는 한국인 여성들중 가장 출중하다는 미모와 총명한 두뇌와 음악적 재능가지고 세상을 만만히 아래로 깔아 보는듯하던 눈빛과 태도들을 분명히 성하는 기억했다.
입학 직후 한인신입생환영 행사에서 자신을 솔희에게 같은 예중고 3년 후배라고 소개해도 ‘어 그래? 반갑다, 예’ 라고 건성으로 던지는 말 한마디 외에는 그닥 신경 안쓰던 무관심했던 모습도 잊지 못했다.
성하가 2학년으로 올라가고 솔희가 대학원 과정으로 올라가던 무렵 교포청년이며 성하의 전공선배였던 브라이언김과 솔희의 은은하고 예쁜 로맨스도 지켜보았다.
어느날 저녁 성하가 홀로 연습을 마치고 귀가 하던중 어스름한 해질녁의 브라이언의 차안에서 솔희와 그 남자가 둘이서 격렬하게 입맞추고 포옹하던 장면을 발견하고 못볼것을 본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브라이언의 차 근방에서 떨어져 도망간뒤 먼발치에서 그 차를 계속 바라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한국인들이 지구촌 어디를 가나 단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도 또 다시 지연, 학연으로 쪼개는 습성이 있다는게 사실인듯, 이들은 글로벌 콘서바토리에서 한인학생회도 모자라 같은 고등학교 출신들끼리 비공식적 만남을 가지곤 했다.
어느날 대엿명의 한인 여학생들이 뉴욕외곽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고 자연스레 현재 최고참이며 캠퍼스내 퀸카이기도 한 솔희에게로 멤버들의 관심들이 모아졌으며 대학원 졸업을 반년쯤 남긴 상태에서 목하 연애중인 솔희의 거취를 묻는건 당연한 것이었다.
(솔희 언니, 이제 곧 졸업인데 결혼식은 언제 올려?)
(뭐? 결혼식?! 예들아, 연애는 연애고 결혼은 결혼이야. 두 사람의 길이 너무 똑같아서 그냥 연애만 하려고. 우리는 지금의 로맨스와 행복을 즐길뿐이야.)
솔희와 브라이언 두 사람의 길이 똑같다는 것은 둘다 음악적 성공을 염두에 두고 있고, 그러기 위해 각자 모두 음악을 서포트할 비음악인 배우자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하는 솔희가 브라이언을 하나의 이해 조건관계로 만나고 있거나 어쩌면 브라이언이라는 남자를 자기의 감정과 욕구를 학창생활 도중에 해소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캐치해 내고 내심 솔희를 ‘나쁜 년’이라고 마음 속에 새기기 시작했다.
거기에 오지랖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화통하고 성격좋은 백인혼혈아 Jay라는 피아노 전공자가 브라이언과 솔희의 관계를 지켜보며 그 성격에 걸맞지 않게 오랫동안 속앓이를 했다는 것도 알아차릴 정도로 성하는 눈치가 빨랐다.
성하의 눈에 비친 솔희는 Jay를 대놓고 남사친 취급했지만 제이가 보내는 짝사랑의 메시지를 강하게 거부하진 않았고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성하의 예상대로 석사 졸업 연주회 브로셔가 찍혀 나올 무렵 브라이언과 솔희가 깨지자 이들이 캠퍼스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라도 성하가 제이와 솔희를 연결시켜줄 계획을 잠시 세웠었다.
제이라는 남자가 한국말이 서툴고 백인의 외형을 지닌 것이 걸렸지만, 성하가 보기에 제이가 솔희에 비해 너무 아깝고 뭇 남자들이 여자를 바로 꿰뚤어 볼줄 모른다는 생각에 그 계획을 포기했다.
졸업 직후 브라이언은 본가인 뉴욕을 떠나 교향악단 일자리를 찾아 더 극동쪽인 버몬트주로 떠났고 솔희는 엘에이로 이주해서 바로 시집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솔희의 남자관계를 잘 알고 있던 성하에겐 청첩장은커녕 결혼한다는 연락조차 받지 못했었다.
(솔희 그거 완전 걸레쟎아? 땀도 마르기 전에 숫처녀인척하고 웬 순진남 호구 잡았구나! 신랑이라는 남자가 불쌍하네 진짜루…그 결혼 언제까지 갈까? 솔희년 성격상 분명 밖으로 돌거구, 다가오는 남자 거절 안할거구)
하지만 바로 한달도 안되어 성하는 멀리 있는 브라이언으로부터 취업이민온 한인간호사와 결혼한다는 문자를 받았고 그 문자에는 굳이 먼 결혼식장까지는 안 와도 좋으니 돈이나 보내라는 듯이 은행 구좌번호와 페이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선배인 브라이언에게도 실망한 성하는 그 두 남녀의 결별 직후의 행각에 영향받아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것을 염두에서 지워버렸다.
성하가 박사과정 때문에 5년간 학교를 더 다닌후 텍사스로 이주하여 교향악단 생활을 하다가 제이로부터 청첩장과 비행기표를 받고 보스톤으로 날아와 마주친 솔희.
(어머, 성하 너 한국 안갔니? 아직도 여기있어?!)
첫마디부터 성하를 못 마땅해하던 솔희는 여전히 예뻤지만 눈빛에는 어떠한 목표를 위해선 불가마라도 뛰어들겠다는 오기가 읽혔고 눈빛에는 섬찟할 정도로 사기(邪氣)로 가득차 있었다.
성하는 솔희가 제이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브라이언 부부와 어린 아들을 마주친 직후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고 부자연스럽고 오버스러운 행동을 하는둥 의식이 분열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솔희 행동거지 보니깐 결혼하고나서 제이랑 바람났던 모냥이네, 내 눈은 못 속이지, 기껏 남편 버리고 이혼했더니 상간남이 딴 여자랑 결혼하네? 이 결혼식에 나타나는건 또 뭐니? 니가 무슨 신파 드라마속 기구한 운명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니?)
성하는 제이와 에벌린의 결혼식날 만났던 솔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완전히 솔희를 기억에서 지우기로 작정했다.
올곧은 길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성하는 솔희에 대해 경멸할 가치도 없는 여자라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규모가 큰 미국 교향악단에 소속되었던 성하는 영주권획득에 실패한것도 있었지만 오랜 타국살이에 회의를 느끼고 비자와 악단 계약이 끝나기 3개월전부터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국립 KBS 교향악단, 경기도립 교향악단에 이력서와 독주동영상이 포함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내는 작업을 했다.
세계 최고의 콘서바토리 연주박사 출신에 미국내에서 10대 서열 내에 드는 교향악단원을 지냈음에도 국내 정상급 연주단체는 고사하고 경기도권 시향에는 아예 자리가 없었기에 성하는 결국 쓸쓸히 귀국했다.
이후 전국 어디로든지 마구잡이로 이력서와 독주 동영상을 보내다가 연고도 없는 춘천시에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춘천으로 오는 도중 그녀를 태운 기차가 미사터널을 통과하여 춘천권역으로 진입한 순간, 와~하고 경탄을 내뱉은 그녀는 주변의 산야에 매료되어 이곳이 뼈를 묻을 곳이라는 직감에 휩쌓였다.
그녀는 음악공부에만 전념하느라 부족했던 교양과 다방면의 상식을 쌓을겸 친척 친구 하나 없는 이곳에 인맥도 만들겸 이곳의 독서클럽에 가입한 당일 날 성하는 정균의 품격과 신체적 강인함, 그리고 겸손함에 매료되었다.
33살이 된 올드미스 성하는 남녀관계를 믿지 않겠다는 옛 각오와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깡그리 무시하고 지체없이 정균에게 접근했지만 그는 일정 범위 이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11년전 춘천의 독서클럽 총회에서 ‘내가 채정균의 아내요’라며 한껏 꾸미고 나타난 솔희를 보고 경악스러울 정도의 놀라움과 혼란스러움에 기절초풍 직전까지 가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주치는 솔희의 따뜻하고 편안한 눈빛과 온화한 표정, 여유와 너그러움을 품은 자태와 마주하며 과거 솔희를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고 있다.
현관에서 바라본 정면에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옆에 정균과 솔희의 결혼초상이 걸려 있고, 넓은 응접실 한가운데에는 길쭉한 가죽쇼파가 놓여 있었고 가구는 최소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오른쪽 구석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어 존재감을 적절히 숨기고 있었다.
“성하야, 시간있으면 차한잔 하고 가. 오늘 수업없는 날이지?”
“그르게. 근데 악장 쌤이 이탈리아에 연수를 떠나거든. 그래서 날더러 이번 정기연주회 객원악장으로 와달라고 해서 여태껏 시향에 잡혀 있었어. 그날 언니랑 형부랑 초대할께.”
“넌 좋겠다. 남편이랑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니깐, 출퇴근도 늘 같이 하고 그럴거 아냐?”
“단과대학 건물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수업시간도 달라서 함께 출퇴근하는 날은 그리 많진 않어”
솔희는 성하와 성하의 딸인 초등학교 2학년생 나혜를 주방으로 데려와 앉힌뒤 투명한 차주전자를 끓이기 시작했다.
성하와 나혜는 주방 테이블 끝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하는 최근 도내의 음대교수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시향을 떠났지만 악단 측에서는 성하에게 객원악장이라는 자리를 부여하여 인연을 비정기적으로나마 계속 이어나가길 원했다.
또한 성하는 10년전 독서클럽 문총무의 소개로 도내의 대학에서 갓 전임강사로 임용된 남성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았고 그 아이의 피아노 렛슨을 솔희에게 맡겨두고 있던 차였다.
늦게 결혼하여 딸을 둔 성하는 피아노를 치는 나혜를 지금껏 대견하게 여기고 있다.
성하는 딸 나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김나혜! 오늘 선생님이 무슨 말씀 들려 주셨어?”
“응, 이모, 아니 선생님이 렛슨 끝나고 즐거운 마음이 들려면 연습을 즐겁게 해야된다고 했고 그럴려면 집중하라고 하셨어.”
“오유, 그랬쪄요?! 정말 선생님의 훌륭한 말씀 잘 가슴에 새겨야 해요~~엄마가 보기에도 나혜는 조금만 더 집중하는 습관 들이면 더 이쁠거야~”
성하는 두 손으로 딸래미의 볼을 붙잡고 이뻐 죽겠다는 듯이 마구마구 비벼댔다.
솔희는 솔잎파리향이 감도는 차 두잔을 꺼내어 테이블에 놓았고 나혜는 어른들끼리의 대화에 관심없다는 듯이 테라스로 나가 혼자 놀기 시작한다.
솔희가 잠시 냉장고를 열었을 때 성하는 길쭉하고 두꺼운 무언가가 페이퍼 타올에 싸인채 놓인 것을 보고 궁금증이 도진 듯 했다.
“언니, 저거 뭐야?”
“응, 연어 훈제하는 중이야. 어제 해서 넣은건데 지금쯤 다 숙성되었을 시간이야.”
“훈제를 직접 한다고? 와아~ 언니 정성 진심 미쳤다! 형부는 행복한 남자일거야. 나같으면 그런걸 직접 한다는 상상을 못해”
“아서라, 아서. 고명하신 음대교수님이자 시향 객원악장이신 바이올리니스트 유성하님이 이런거 할 시간이 나기야 하겠니? 나처럼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가 이런 취미라도 붙여봐야지 집에서 놀면 뭐하니?”
“에엥? 전업주부라니, 예고 실기강사는 그만둔겨?”
“일주일에 두 번, 다 해서 여덟시간 강의 나가는데 그걸가지고 직업이라 할수 있겠니? 연어 훈제하는 것도 날이면 날마다 하는게 아니야, 오늘이 그이랑 춘천에서 다시 만난 기념일이거든? 그날 저녁에 내가 이 집에서 장봐와서 훈제연어 요리를 해봤지. 그날 이후로 매년 오늘이면..... ”
성하는 찻잔을 붙들고 후후 불면서 솔희와 대화에 연신 놀랐다가 웃었다 진지했다를 반복하면서도 수시로 테라스창 바깥의 나혜의 동선을 체크하고 있다.
“언니한테 나혜 렛슨맡긴거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
“뭐가? 원래 나 귀국하면서 앞으로 절대로 개인렛슨이던지 돈벌이 비슷한것도 안할거라고 했쟎아. 우아하게 취미생활에나 몰두하할거라고 말이지. 학생 렛슨은 울 유성하 교수님 딸이니깐 받아준거지”
“제발 그눔의 교수님, 교수님 소리 쪼옴! 그나저나 나혜가 언니한테 피아노 배우러가는 시간이 너무 좋고 재밌대. 그래서........”
“풋...! 싱겁기는. 음악배우는 시간이 저때부터 고통스러워야 되겠니? 나중에 뭘 목표로 하든 지금은 즐겁고 행복하게 배울때라고 생각해, 지능개발은 덤이고. 나부터가 행복하게 배우면서 자라지 못했기에 잘 알지. 너 혹시 나혜를 몰아 붙이는건 아니지?”
“몰아치긴! 나도 어려서 시작해봐 알지. 애가 자라면서 자연스레 자기가 행복해할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맡기는게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 렛슨가르칠 적에 당신들 만족을 위해 애들 잡는 부모님들 만나면서 느낀게 많아”
솔희와 성하는 따뜻해질 때까지 온도가 내려간 솔잎차를 가볍게 입에 대며 테라스 창 밖에서 혼자 노는 나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하는 솔희와의 이런 대화 속에서 학생시절의 솔희의 그 도도하고 거만했던 모습의 근원을 밝혀냈다.
(솔희 언니는 어린 시절 음악을 행복하게 느끼면서 자라질 못했었구나.......)
자신의 딸로 인해 모든 의문이 풀린 성하는 집 바깥 마당에서 놀고 있는 딸 아이를 잊어버린채 솔희의 은은한 눈동자를 응시한다.
“뭘 그렇게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니? 나같은 美婦 오늘 처음 봐서 황홀하니?”
“허얼~~ 내 나름대로 감상에 빠져있는데 언니 진짜 확 깬다! 언니 안 변한거 있는거 알어? 그 나르시시티즘적인것!”
“내게 변한게 있다는거쟎아, 지금 네 이야기는. 이 몸은 항상 내 자리에 있거든!?”
아닌게 아니라 솔희의 또 그 자뻑스러운 이야기에 성하는 확 깨버렸다.
그럼에도 그런 솔희의 말이 그리 밉거나 추해 보이지는 않는다.
“엄청 변한거 있지, 바로 언니 눈빛과 표정, 딱 짤라서 말하면 학생때랑 지금이랑 천양지차야, 편안하고 행복해 보여”
“세월의 흔적이겠지 뭐, 이리저리 채이고 얻어 맞으면서 둥글둥글해지는”
“그래도 좋아 보이는 방향으로 바뀌긴 쉽지 않아, 언니한테 풍기는 분위기는 섬세하면서도 포근해”
“..................사랑을 찾았으니깐, 그 사랑이 내 몸에 완전히 스며 배어들어서일걸?”
“언니도 진짜 사랑이라는걸 하면서 사니깐 모습이 변해온 것 같아”
“나는 사랑에 있어서는 달처럼 수동적인 존재야. 사랑을 받고 몸과 마음에 갈무리가 되면 그 빛이 몸밖으로 은은하게 새어 노출되는 것일뿐!”
“솔희 언니는 진짜 시인이다!”
이 두 여자가 흥겹게 웃고 떠드는 소리에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혜가 호기심에 실내 쪽으로 뒤돌아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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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생은 익어 가는 것이라는것을
배우면서 잼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