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말을 길러낸 갑마장
사람이건 동물이건 무리로 모여 살게 되면, 그 중에서 꼭 뛰어난 놈이 나오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엔 가장 최고의 등급을 가진 말을 갑마(甲馬)라 불렀다.
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한 말들을 곧바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놈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길러야할 필요성이 제기된 듯하다. 해서 만들어진 것이 소위 갑마장(甲馬場)이다.
'갑마장길', 끝없는 평원·봉긋하게 솟은 오름… 봄처럼, 포근해
제주도에는 도보여행길이 '올레'외에 다른 '길'도 많다. 이 중 하나, '갑마장길'이 지난해 봄 제주에 개장했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일대에 난 길인데 말(馬)에 얽힌 이야기와 제주 목축의 역사가 고즈넉히 녹아있는 길이다. 조선시대에 최상급 말을 '갑마(甲馬)'라고 했다. 갑마를 길러내던 곳이 '갑마장'이다. 길은 해발 90~570m의 제주 동부 중산간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목장, 오름, 마을…. 가을인데도 풍경은 봄처럼 포근하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녹산로'
제주시에서 가시리마을로 향하는 도로 주변 풍경이 참 예쁘다. 특히 대천동사거리에서 가시리사거리까지 이어진 '녹산로'가 그렇다. 제주퓨어워터 사업장과 정석항공관 앞을 지나는 도로다. 큰사슴이오름과 작은사슴이오름 앞을 지나기 때문에 사슴 '록(鹿)'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도로 옆으로 가을 억새가 끝없이 이어졌다. 종종 나타나는 삼나무들, 초원과 목장이 운치를 더한다. 봄에는 유채와 벚꽃이 억새를 대신한다. 그 너머로 어깨를 견준 야트막한 오름들이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도로는 한가하다. 제주시에서 표선으로 넘어갈 때 차들은 주로 폭이 넓은 '번영로'를 이용한다. '녹산로'는 '번영로'에서 비껴있는 '작은 길'이라 덜 붐빈다. 풍경 바라보며 도로를 달리니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녹산로'는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여러 차례 이름을 올렸다.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없다.
조선시대 최상급 말 키우던 목장 … 중산간 목축문화 엿보는 '갑마장길'
'갑마장'이 있던 곳은 지금 가시리 마을의 공동목장이 됐다. 큰사슴이오름, 번널오름, 따라비오름을 꼭지점으로 해 너른 평원이 펼쳐졌다. 개인이 아닌 마을 소유의 공동목장은 제주도에서도 흔치 않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조선 선조 때 이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김만일이란 인물이 자신의 말들을 군마로 임금에게 바쳤고, 이후 우수한 말을 기르는 갑마장이 됐다." 문헌에 따르면 김만일은 선조 때인 1594년부터 인조 때인 1627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1,600마리 이상의 말들을 진상했다. '헌마공신'이라는 칭송도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아들 김대길을 시작으로 218년간 후대 83명이 목장을 관리하는 '산마감목관'이란 공직을 수행했다. 헌마공신이나 산마감목관은 제주도에만 있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던 갑마장은 일제 강점기 때 마을 공동목장으로 전환됐다. "원래 약 1,000헥타르(330만평)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약 750헥타르(226만평) 규모다".
'갑마장길'은 갑마장을 에두르는 길이다. 마장이 중심이 되니 제주도의 목축문화가 묻어났다. 잣성(목장 경계를 표시한 돌담)을 따라 목장과 초지를 지나고 오름에 올라 평원을 굽어본다. 한 번에 여러 개의 오름을 볼 수 있는 길은 제주도에서도 드물다. 가시리에 13개의 오름이 있는데 이 가운데 8개의 오름을 갑마장길이 지난다.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압권이었다. 끝없는 평원과 봉긋하게 솟은 오름, 목장과 목장을 구분 짓기 위해 심어놓은 삼나무가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전깃줄, 전선탑 등의 구조물이 눈에 띄지 않아 더 천연했다. 제주 4·3사건(1948) 때 숱한 마을주민들이 억울하게 살해된 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다.
따라비오름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 분화구 세 개가 연결됐다. 능선이 만들어내는 완만한 곡선이 여인의 가슴처럼 푸근한 느낌을 안겨준다. 이 모습에 반해 따라비오름을 '제주도 오름의 여왕'으로 꼽는 이들이 많았다. 오름에는 무덤도 있고 돌탑도 산재했다.
이를 통해 제주도 사람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오름 자락 아래에서 텃밭을 일구고, 방목을 하며 살다가 죽은 후에 오름에 묻힌다. 그래서 더 애틋한 풍경이다. 따라비오름 입구에서 정상까지 20여분이면 닿는다.
60~70년대 섬생활 사진 전시 … 자연사랑 갤러리와 조랑말체험공원
갑마장길에는 잠깐 숨고를 곳도 많다. 가시리 마을회관(문화센터) 옆 자연사랑 갤러리에서는 제주도의 천연한 자연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곳 서재철 관장은 지난 40여 년간 제주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2003년에 폐교를 개조해 갤러리를 열었다.
비바람 몰아치는데도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제법 많다. 60~70년대 섬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은 흑백사진도 볼만했다. 가시리 마을도 꾸밈이 없다. "60~7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이 여기다.
마을 공동목장 들머리에는 조랑말체험공원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정갈하게 꾸며뒀다. 제주도의 목축문화와 관련한 유물 100여 점을 전시했다. 카페가 있어 휴식 취하기에도 적당하다. 카페 창을 통해 바라보는 목장은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할 만큼 평화롭다.
비가 오면 더욱 운치가 있다. 조랑말 타기, 먹이주기 체험도 가능하다. 또 몽골텐트로 만든 게스트하우스와 캠핑장도 마련돼 있었다.
조랑말체험공원 입구에는 '행기머체'라는 것이 있다. '머체'는 '돌무더기'의 제주 방언. 즉, 머체 위에 행기물(놋그릇에 담긴 물)이 있었다고 해 붙은 용암덩어리다. 돌무더기 위에 나무가 자란 모양이 독특했다. 제주도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이런 식의 돌무더기로는 동양에서 가장 크다.
제주도 중산간의 풍경은 해안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지도를 놓고 보면 '올레'는 해안을 따라 제주도를 에두른다. 중산간을 제대로 관통하는 올레는 아직 없다. '걷기'가 아닌 올레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다른 풍경 보기가 힘들어질 것 같다. 이런 이들에게는 올레 코스 벗어나 이곳저곳 기웃거리기가 의미 없는 일로 느껴질테니까.
제주도에는 올레 말고도 길이 많다. 저마다 제주도의 문화와 역사, 현지인들의 생활상, 식생 등을 엿볼 수 있는 길들이다. 올레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 보면 제주도를 더 잘 알 수 있다.
'갑마장길'은 가시리 마을회관(문화센터)에서 시작해 설오름->따리비오름->잣성->큰사슴이오름->행기머체->조랑말체험공원->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 걷는데 약 7시간 소요된다.
조랑말체험공원->따라비오름->큰사슴이오름->행기머체->조랑말체험공원을 연결하는 약 10km 구간의 '쫄븐 갑마장길'도 있다. '쫄븐'은 '짧은'이란 의미의 제주 방언이다. 걷는데 약 3시간 30분 걸린다. 조랑말체험공원(070-4145-3456)이나 가시리 마을회관(064-787-1305)에서 지도 등을 얻을 수 있다. 자연사랑갤러리(064-743-3360)는 가시리 마을회관 옆에 있다.
가시리 마을은 기시린 도새기, 돼지고기와 순댓국이 맛있기로 제주도에서도 유명하다. 마을에 10여 곳의 식당이 영업 중인데 이 가운데 가시식당(064-787-1035)이 '원조'로 알려졌다.
동양최대의 크립토돔(머체)과 조선 최고의 말을 길러낸 갑마장,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인 유채꽃길, 오름의 여왕 따라비, 제주흑룡만리를 이루는 31.4㎞의 잣성길 등을 △녹산유채(녹산장 봄꽃 유채) △지조추로(따라비오름의 가을 억새) △대록전경(큰사슴이오름에서 보는 대평원) △봉귀청담(병곳오름에서 보는 오름 푸른 담채화) 등 가시 10경에 녹여냈다.
마을의 모세혈관인 가름질(동네+길)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숨겨진 보물들이 하나 하나 고개를 든다.
가시리의 가시10경
1. 녹산유채(鹿山油菜) : 녹산장 봄꽃유채
2. 지조추로(地祖秋蘆) : 따라비오름의 가을억새
3. 대록전경(大鹿展景) : 큰 사슴이오름에서 보는 대평원
4. 봉귀청담(鳳歸靑淡) : 병곳오름에서 보는 푸른 담채화
5. 녹조장원(鹿祖墻垣) : 큰 사슴이오름~따라비오름 잣성길
6. 춘귤화향(春橘花香) : 5월 감귤의 꽃향기
7. 가시춘궐(加時春蕨) : 4월 가시리의 고사리
8. 서을천선(西乙天線) : 설오름 정상에서 보는 하늘의 선
9. 행기머체 : 제주탄생의 지질적 흔적. 머체-돌무더기
10. 청선장천(靑蘚長川) : 푸른이끼 융단으로 덮힌 가시천
▲현존하는 제주도 지도 중 제작 형식이 가장 독특한 것으로 평가되는 '탐라지도(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소장)'. 백록담을 크게 과장해서 표현하고, 중산간 목마장의 각 소장별 경계선과 당시 목마의 중심 촌락이었던 교래촌을 중요 마을로 표시하고 있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 이 말이 참 기분나쁜 시절이 있었다. "제주는 말이나 사는 땅이라는 말인가" 하는, 제주인들을 업신여기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었다.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는 만큼, 말에 관한 한 어느 곳도 제주를 따를 수 없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어서 그리 속 상할 일만도 아니다.
말은 과거에 농경과 교통은 물론, 국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기병 한 명이 보병 10명을 상대한다고 했고 말의 가격이 노비 세 명과 교환될 정도였으니 지금에 비추어보면 탱크 한 대 값이 아니었을까.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한 것도 몽골기병의 역할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에는 "말산업육성법"이 제정될 정도로 말 산업이 전국적인 기대를 모으고 있지 않은가.
마을 주변 초지에서 방목으로 말을 기르던 제주에 처음으로 목장이 만들어진 것은 몽골의 영향력 아래 있던 13세기 말이다. 삼별초 항쟁이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당한 뒤 몽골이 1276년부터 말 160필과 목축 전문가들인 목호들을 불러들여 성산읍 수산리 수산평 일대에 "탐라목장"을 설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목장이 형성된 것은 조선시대로, 해발 200~600m 지역을 10개 구역으로 나누어 설치한 국영목장 "십소장"(十所場)과, 제주도 동부 해발 400m 이상 산간지역의 "산마장"(山馬場)이 대표적인 목장이었다.
십소장은 제주목 지역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1소장 부터 6소장, 대정현 지역에 7, 8소장, 정의현 지역에 9, 10소장이 분포돼 있었다. 산마장은 조천읍 교래리 바농오름 일대의 침장(針場), 산굼부리 일대의 상장(上場), 표선면 가시리 소록산과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 사이 초지대의 녹산장(鹿山場)으로 구성된다.
중산간지역을 빙 둘러 만든 국영목장 '십소장'과 동부 산간지역의 '산마장'
이쯤에서 소개해야 할 두 인물이 있다.
제주에 국영목장 설치를 세종에게 건의한 제주 교래 출신 고득종(1388~1452)과, 탁월한 목축능력으로 국가의 위기상황마다 조정에 말을 바쳐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칭송받는 의귀 출신 김만일(1550~1632)이다.
세종 때 문과 중시에 급제한 뒤 한성판윤(서울시장)까지 지낸 고득종은 방목하는 말 때문에 농작물 피해가 발생하게 되자 세종에게 해안의 마을지역에서 방목하고 있는 말들을 중산간지역으로 옮겨 체계적으로 말을 기를 수 있도록 국영목장 설치를 건의했다.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 세종의 결정에 의해 세종 11년(1429년) 해안지역의 농경지와 중산간지대의 방목지 사이에 경계선인 돌담, 즉 '잣'을 쌓게 된다. '잣성'으로도 불리는 이 돌담을 해발 150~250m 지역에 섬 전체를 빙둘러 쌓은 것이다.
'알잣' '하잣' '하잣성' 등으로 불리는 이 돌담은 말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높이 1.2~1.5m 정도의 겹담으로 쌓았다. 그리고 방목하는 말들이 한라산 삼림지역에 들어가 동사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 1700년대에 해발 450~600m 지역에 '상잣'('웃잣')을 쌓았다. 이후 해안지역의 농경지 부족을 주민들이 호소하자 해발 350~400m 지역에 '중잣'을 쌓아 방목지역을 둘로 나누고 농사와 방목을 중잣의 위 아래 지역에서 번갈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십소장'이다. 한 '소장'에 5~7개의 '자목장'(字牧場)이 있었는데 1개 자목장에는 암말 100필과 숫말 11필이 사육됐고, 자목장마다 군두 1명, 군부 2명, 목자(테우리) 4명이 배치돼 말을 관리했다. 조선후기 기록에 제주의 자목장은 모두 58~64개가 있었다고 하니 6천~7천필의 말이 국영목장에서 사육되던 것으로 보인다.
국영목장 설치를 건의한 고득종은 그밖에도 제주의 토지 등급을 내려주도록 요청해 제주인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 주기도 했고, 서울로 올라가 종사하는 제주 출신 관리의 자제를 위한 수당제를 만들어 경제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는 제주고씨 영곡공파의 파조(派祖)이기도 하다.
제주의 말 목축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김만일은 고향 의귀에서 교래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서 1만여필의 말을 키웠다.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자 선조 27년(1594) 군마로 쓸 수 있는 좋은 말 300여필을 국가에 바친 것을 시작으로 선조 33년(1600), 광해 12년(1620), 인조 5년(11627)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네차례에 걸쳐 모두 1300여필의 말을 바쳤다.
이 공으로 그는 인조 6년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고 헌마공신으로 칭송받게 된다. 이후 김만일의 개인목장은 '산마장'으로 운영되면서 산마장 관리를 위해 '산마감목관'제가 신설됐다. 그의 셋째아들 김대길이 초대 '산마감목관'에 임명된 뒤 그 후손들이 218년동안 임기 6년의 감목관을 세습하게 된다.
산마장에는 '갑마장'(甲馬場)을 두어 산마들 가운데서 골라낸 품질이 가장 뛰어난 '갑마'를 따로 관리했다. 이 산마장에서 기르던 말이 얼마나 됐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김만일이 1만여필을 사육했고 이후 산마장의 범위가 성판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된 것으로 미루어 1만필 이상의 규모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숙종 28년이던 1702년 10월 15일 산마장에서는 대규모 이벤트가 벌어졌다. 제주목사 이형상이 산마감목관이 관리하는 산마장 가운데 하나인 녹산장을 방문한다. 목사는 녹산장 중심부인 현재의 표선읍 가시리 큰사슴이오름(대록산)을 올라 정상에 좌정한다. 산마장에서 방목하던 말들을 성판악 바로 아래 산쪽 끝지점에서부터 대록산 아래 드넓은 초지까지 몰아 내려온다. 이 과정에는 '구마군' 3,700여명이 투입된다.
구마군이 말을 몰아내려오는 동안 다른 목장과 경계인 목책 바깥에 '결책군' 2,000여명이 줄지어 지켜서서 말들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대록산 아래 초지대에 대기하고 있던 '테우리' 200여명은 달려내려오는 말들을 원형의 목책(원장) 안으로 몰아넣는다. '원장' 안으로 들어온 말들은 한 줄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사장'을 통과하도록 한다. 사장을 지나는 동안 말의 수와 건강상태 등을 일일이 점검한다. 이 '점마' 과정에는 제주판관, 정의현감, 감목관이 자리를 지키고 서서 품질이 우수한 말을 골라낸다. 조정에 진상할 말들이다.
이날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모두 6,536명이었다. 이런 내용은 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포함된 '산장구마'(山場驅馬)에 그림과 함께 기록돼 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산장구마(山場驅馬)
1702년(숙종28) 10월 15일, 산장에서 말을 몰아 일정한 장소에 모으고 그 수를 확인하는 그림이다.
산장은 ‘산마(山馬)를 목양하는 목장’으로 한라산 중턱 이상에 설치됐는데, 효종 9년(1658) 제주 목사 이회(李禬)의 계청(啓請)에 따라 김만일(金萬鎰)의 후손들이 국가로부터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을 세습적으로 임명받으면서 비롯되었다.
이들 산장은 숙종 대를 거치면서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으로 개편되었다. 이 그림은 세 군데 산장 중 한 목마장의 말들을 점검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각 산장마다에는 원장과 사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장은 우마를 모아놓기 위해 만든 원형의 목책이고, 사장은 모아놓은 우마를 한 마리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 통과로다.
모아놓은 우마가 이 사장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게 하면서 나라에 봉진할 우마를 간택하거나 우마의 질병, 증감의 숫자 등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원장 대신에 미원장(尾圓場)과 두원장(頭圓場)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사장을 만들어서 두 원장을 연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우마를 먼저 미원장에 모아놓은 다음 사장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하면서 점검한 뒤에 다시 두원장에 모아놓고 있는 것이다.
사장은 우마의 수효를 파악하는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상 혹은 다른 목장으로 우마를 보내기 위해 하나씩 붙들 수 있게 된 장치이기도 하다.
이날 산장의 점마는 제주판관, 정의현감, 산장감목관이 책임을 담당한 가운데 결책군 2,062명, 구마군 3,720명, 목자와 보인 214명 등 총 6,536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원이 동원되었다.
성판악 바로 밑에 있는 산쪽 끝 지점에서부터 구마군이 말을 몰고 내려오면, 결책군들은 다른 목마장의 경계인 목책 바깥에 줄줄이 도열해 지킴으로써 말들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미원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군인과는 다른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목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원장에 모인 말들의 낙인으로 자신이 관리하는 목마장의 말인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장 바로 앞에는 제주판관, 정의현감, 감목관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말의 수와 낙인, 상태를 직접 점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마를 통해 골라낸 공마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봉진되었다.
1. 제주목사가 조정의 지시에 따라 그 할당량을 3읍의 감목관에게 배정한다.
2. 3읍의 감목관은 각 목장에 공마에 충당할 마필의 수집을 명한다.
3. 각 목장에서는 구마군·결책군·목자 등을 동원하여 공마를 가려낸다. 이때 미원장에 몰아넣은 마필들을 사장으로 통과시키면서 공마에 적합한 마필을 골라낸다.
4. 가려낸 공마를 소속 영문(營門)에 인도한다.
5. 제주·정의·대정 영문에서는 감목관의 책임 아래 습마(習馬) 6명이 각 목장에서 보내온 말의 마적(馬籍)·낙인자(烙印字)·말 주인(개인 말인 경우) 등을 확인한다.
6. 말의 나이, 키, 털빛, 건강, 조습실태 등을 조사하여 골라서 공마의 목록과 함께 보고한다.
7. 골라진 공마는 세목(細目)과 함께 조천포, 화북포로 운반해 진상선에 실어 조정에 바쳐진다.
Ⅰ. 제주목장
1.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목초지, 건물, 목책 등을 설치한 장소.
2. 개설
제주 지역의 목장은 해발 200~600m의 중산간 초원 지대에 마을 공동 목장, 관영 목장 및 전(기)업 목장, 관광 목장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3. 연원
제주 지역에서는 1276년 몽골이 설치한 탐라목장이 제주 지역 목장의 효시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산간 지대에 잣성을 쌓아 말을 생산했던 십소장과 산마장이 있었다. 그 중 산마장은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으로 구성되었다. 소를 사육했던 모동장(毛洞場), 천미장(川尾場), 황태장(黃泰場)도 있었다.
부속 도서에는 소를 사육했던 가파도 별둔장(加波島 別屯場)과 말을 사육했던 우도장(牛島場)이 있었는데, 1894년부터 공마제(貢馬制)가 폐지되면서 이러한 국영 목장들은 사라졌다.
4. 마을 공동 목장
마을 공동 목장은 전국에서 오직 제주 지역에만 존재하는 목장 제도로, 한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목장조합을 만들어 공동으로 우마를 방목하는 목축지를 말한다. 제주 지역의 토양은 바람에 잘 날리는 화산회토(뜬 땅)이기 때문에 진압 농법에 필요한 우마 방목을 위해 공동 목장 제도가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마을 공동 목장은 가축 공동 방목에 의한 축산 진흥과 가축 개량 및 가축 방역 공동 실시에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토지는 국·공·사유지를 임대·매수하여 확보하였고, 목장은 비법인 단체로 1930년대 공동목장조합을 조직하여 운영되었다. 마을 공동 목장에서는 급수장을 설치하고 돌담(목책)을 축성·보수하였으며 목초 등을 공동으로 재배하였다.
마을 공동 목장은 자연 마을 단위로 조직된 자생 단체로 조합원들은 목장 조직 당시 거주한 유축 농가로 한정하였다. 출자 방법은 토지, 현금, 노역 등으로 충당하였으며 수입은 방목장 임목료로 입목두수로 배정하여 정하였다.
마을 공동 목장의 대표는 이장이 겸직하거나 별도로 선출하여 정하였다. 목장의 이용 실태를 보면, 조합원 소유 축우나 인근 양축가 축우를 위탁받아 방목했으며 방목 기간은 5월 초에서 10월 말까지 약 6개월 동안이었다.
1988년 당시 제주시 관내 마을 공동 목장은 9개소였으나 그 중 3개소 공동 목장이 매각됨으로써 6개소를 유지하여 운영·관리하였다.
1994년 제주시에서는 양축 기반 확충과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해 마을 공동 목장 시범 육성 사업을 추진한다는 취지로 사업비 2억 4000여만 원을 들여 관내 7개 마을 공동 목장을 대상으로 목책 시설과 급수장 시설, 초지 보완 등 8개 사업을 전개하였다.
2003년 말 마을 공동 목장에 참여한 마을은 13개 마을 24농가로 570명의 조합원들이 활동하였으며, 전체 축우 두수는 518두가 사육되었다.
Ⅱ. 10소장
1. 정의
조선 전기 제주 지역에 세워진 10개의 국영 목장.
2.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 정부는 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1429년(세종 11) 8월부터 이듬해 2월에 걸쳐 제주 지역에 중산간 초원 지대에 잣성을 새로 쌓거나 정비하고 그곳 120여 리에 10개의 목장을 조성하였다.
3. 내용
제주목 지역에는 1소장부터 6소장, 대정현 지역에는 7소장과 8소장, 그리고 정의현 지역에는 9소장과 10소장이 있었다.
1소장은 구좌읍 중산간 지역, 2소장은 조천읍 중산간 지역, 3소장은 제주시 회천동에서 오등동에 걸친 중산간 지역, 4소장은 제주시 연동에서 해안동에 걸친 중산간 지역, 5소장은 애월읍 광령리, 고성리, 유수암리의 중산간 지역, 6소장은 애월읍 어음리, 봉성리, 한림읍 금악리 중산간 지역에 설치되었다.
대정현의 7소장과 8소장은 각각 안덕면 중산간 지역, 8소장은 구(舊) 중문면(中文面) 중산간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정의현의 9소장은 구서귀읍 중산간과 남원읍 중산간 지역, 10소장은 표선면 성읍리 지역에 설치되었다.
이들 소장에는 국마와 주민 소유의 사마가 공동으로 방목되었으며, 각 소장의 주위는 45~60리였다. 종6품의 감목관과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으로 구성된 마정 조직을 통해 운영되었다.
4. 변천
10소장은 1894년에 감목관제와 공마 제도가 폐지되어 공마 공급이 종료되고 1897년부터 공마제 대신 금납제를 시행하게 되어 소멸되었다. 이후 중산간 지역 목장 터는 주민들의 경작지로 개간되고 주민들이 거주하는 취락지로 변하였다.
Ⅲ. 잣성
1. 정의
조선시대에 제주 지역의 중산간 목초지에 만들어진 목장 경계용 돌담.
2. 개설
제주도민들이 잣 또는 잣담이라 부르는 잣성은 1970년대 제주도 지형도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용어이다. 『제주계록(濟州啓錄)』에는 장원(牆垣)으로 기록되어 있다.
3. 건립경위
제주는 고려시대 원 간섭기에 대규모 목마가 시작되었고, 조선 시대엔 최대의 말 공급지로서 부각되며 사람보다 말 중심의 ‘마정(馬政)’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 경작지가 있는 해안가 평야 지대를 비롯한 섬 전역에 흩어져 있어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에 고득종(高得宗)이 한라산 중턱으로 목장을 옮기고 경계에 돌담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수락되어 1429년(세종 11) 8월 중산간 지대에 목장 설치가 착수되어 이듬해 2월에 완성되었다. 이때 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10소장(所場) 체계가 갖추어졌다. 그리고 국영 목장인 10소장 위·아래 경계에 돌담을 쌓았는데, 이를 잣성이라 한다.
잣성은 하잣성, 상잣성, 중잣성 순으로 건립되었다. 하잣성은 15세기 초반부터 축조되었고, 상잣성은 18세기 후반부터 축조되었으며, 중잣성은 축조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잣성들은 대체로 두 줄로 쌓은 겹담 구조이다.
축담 후에 말들이 장내가 좁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없고 먹을 풀이 모자라 야위고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담을 허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말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목장 사이 돌담을 군데군데 허물었을 뿐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4. 위치 : 잣성은 위치에 따라 제주도 중산간 해발 150m~250m 일대의 하잣성, 해발 350m~400m 일대의 중잣성, 해발 450m~600m 일대의 상잣성으로 구분된다.
하잣성은 말들이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잣성은 말들이 한라산 삼림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얼어죽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중잣성은 하잣성과 상잣성 사이에 돌담을 쌓아 만든 것이다.
5. 의의와 평가 : 잣성은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국영 목장이 설치되었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유물인 동시에 제주도의 전통적 목축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것은 제주도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역사 유물이자, 단일 유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선형(線形) 유적으로서 보존이 시급하다.
제주마의 기원
제주는 예로부터 사나운 짐승들이 없어서 말 기르기에 적합한 곳으로 일컬어졌다. 또한 오랜 세월 제주는 ‘말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그 명성은 이어져 오고 있다. 흔히 부르고 있는 ‘조랑말’이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적 동물임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제주마의 역사는 제주의 역사와 함께 한다.
△제주마의 유래
기록에 근거한 제주마의 기원을 흔히 고려 충렬왕 3년(1277년)에 원이 제주에 목장을 설치하면서부터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몽골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제주에서 말을 키웠던 흔적과 기록은 곳곳에 남아있다.
제주에 말이 서식한 시기는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의 사람과 척추동물 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64호) 등으로 미뤄볼 때 구석기말부터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고 있지만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유적지인 덕천 승리산, 제원군 점말, 청원 두루봉 등과 삼성신화의 망아지·송아지·오곡 이야기, 「고려사」지리지 탐라조에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사냥을 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는 기록과 곽지리 패총,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이빨) 등으로 미뤄볼 때 제주에 말이 서식한 시기를 석기시대 말기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기원전에 만주 서남방에 살았던 예·맥족의 과하마, 만주 중앙부의 부여와 남방의 고구려 3척마의 사육한 것과 한바도에 들어온 동예도 과하마를 생산·수출했다는 자료 등 북방 유목민의 의식주 풍습과 제주를 비교했을 때 그 유사성 등으로 미뤄 제주마가 이들과 연계성이 있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마한조에는 주호(제주도)의 기록에는 제주도에 소와 돼지를 사육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중국과 한반도와 교역했다는 말은 있지만, 말을 사육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백제 무왕 10년(610년)에 탐라에서 준마를 백제에 바치자, 백제에서는 이 말을 당나라에 바치니 당왕은 ‘과하마’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는 대형종 말을 사육했지만 당나라 왕실에는 과하마를 진상했다는 것과 후백제 27년(918년)에 탐라는 공마를 오월에 바치고 중대부의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이어 고려 현종 16년(1025년)에 목감양마법, 문종 25년 도거(섬에 설치한 목장) 관리를 제정한 후 문종 27년(1073년)부터는 계속 탐라국에서 예물로 말이 진상돼 문·무관에 하사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본격적인 제주마 사육
제주에서 본격적인 마사육이 시작된 것은 고려 원종 14년(1273년)에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 일대에서 평정된 이후 일본·남송 공략의 군마 공급지로 만들고자 몽골군이 주둔하게 된 13세기 후반부터의 일이다.
충렬왕 2년(1276년)에 몽골에서 대완마 160필과 마 전문가들인 목호들이 탐라국에 들어와 현재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몽골식 마목장인 탐라목장을 건설한 것이 제주도 목마장의 기원이다.
충렬왕 3년(1277년)에 목마장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동·서아막을 설치했다. 동아막은 수산평에 설치돼 동부지역(동도, 정의)을 관장케 하고, 서아막은 한경면 고산리에 설치돼 서부지역(서도, 대정)을 관리했다.
고려말 공민왕 때 제주도는 다시 고려에 귀속되고, 친명정책에 따라 말 관리도 직접 하게 됐다. 하지만 몽골 출신인 목호들은 ‘원나라의 원수 명나라에 말을 내줄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살해했고, 이에 1374년 최영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 이들을 진압했다.
조선시대의 마목장은 세종 11년(1429년) 제주출신 고득종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해안지역의 촌락과 경지와의 경계를 돌로 하잣을 쌓기 시작해 성종 24년(1493년) 이전에 완성돼 이를 10개로 나눠 10소장(목장)이 설치됐다. 각 소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잣은 제주어로 성의 뜻이며, 제주도 중산간의 소장(목장 또는 목마장) 경계에 돌들을 길게 쌓은 돌담을 말한다. 이를 흔히 잣 또는 잣성이라고 부른다.
한라산 고산지대(산림지대)에 쌓은 것이 상잣이고, 다른 소장의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았는데, 이를 간담(선잣)이라고 했다.
제주목마장은 중앙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 병조 및 사복시 지휘감독아래 전라감찰사, 제주목사, 감목관(제주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 겸임),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 순으로, 계급적으로 배치돼 운영됐다.
말을 직접 사육하는 가장 하위 계급인 목자들은 관리들의 행패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풀이 없는 초봄이나 겨울이 되면 굶주려 죽는 말이 많았고, 목자는 죽은 말 가죽을 벗겨 관가에 바쳤다.
관가에서는 장부의 기록과 말이 저절로 죽은 것이 증명되면 가죽만을 받았지만, 관리들은 막무가내로 말의 죽음을 목자의 책임으로 돌려 말 값을 물어내게 했다. 이로 인해 목자는 말 값을 물려고 재산을 팔아야 했고, 심지어 친척들까지 배상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목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등 제주마의 목축 역사에는 비극이 깔려있기도 했다.
또 조선시대 제주도내 말 사육필수는 태조 7년(1398년)에 4414필, 세종 11∼16년(1429∼1434년)에 1만여필을 사육했고, 숙종 28년(1702년) 탐라순력도에는 국가가 사육한 말과 개인이 사육한 말 등 모두 2만여필이 사육됐다고 추정되고 있다.
제주마는 탐라국 초기부터 백제와 신라에 예물로서 조공했으며, 일본과 당나라와 교역을 했다. 고려 문종 때에는 탐라국에서 예물로 진상된 제주마를 문·무관에게 하사했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매년 수십필에서 수백필까지 국가에 바쳤고, 각 지방에 오늘날의 관용차처럼 제공됐다.
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전쟁에서 타고 다니던 여덟 필의 말을 8준마라고 했으며, 이 중 위화도 회군시에 탔던 말이 제주마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실록에 보면 제주도는 국내 최대의 목마장으로서, 임금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파발마, 태마, 만마, 복마 등 다양하게 활용됐다.
조선시대 이후 일본강점기, 4·3사건, 한국전쟁 등과 농기계 보급 등 제주마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서 1986년에는 제주마 사육두수가 1347필로 현저히 감소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같은해 2월 제주마 64필을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했다.
첫댓글 자세한 안내 감사합니다. 갑마장길 걷기가 더욱 새롭고 뜻깊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