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를 피해 자결한 탐진 최 씨의 절개, 거창 절부리
경남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에는 절부리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1380년, 왜구가 이 일대를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결혼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은 김순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고 그의 아내 탐진 최 씨 혼자 집에 있었다. 왜구가 마을로 들어와 최 씨를 겁탈하려고 했다. 최 씨는 은장도로 왜구가 만진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을 했다. 훗날 나라에서 그녀의 절개를 기려 정려각을 지어주고 평소 빨래를 하던 빨랫돌에 비문을 새겨 세웠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松亭里)는 거창읍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널따란 평지로 이루어져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산다. 자연마을로는 송정, 운정, 마동, 절부리 등이 있다. 송정리의 지명은 ‘송정’에서 비롯했다. 영천교 주변에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가 있어 ‘솔뚜백이’라 불리다가 차차 ‘솔지이’에서 ‘송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운정(雲亭)’마을은 앞들에 지대가 낮고 습기가 많은, 일명 ‘구릉논’이 많은 까닭에 ‘구릉지이’라 불리다가 후에 ‘구름지이’로 바뀌었다는 설과 함께 새벽 안개에 둘러싸인 마을의 모습이 구름 속에 있는 정자처럼 보인다고 하여 ‘구름지이’라 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동’은 남서쪽에 위치한 뒷산이 말의 형상을 닮아 있으며, 마을은 그 말의 뒤꿈치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마동’ 또는 ‘마적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부리(節婦里)’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는 『동국여지승람』에 오래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말의 일이다. 왜구가 동해안과 남해안 일대로 침략해 마음대로 약탈을 일삼던 무렵이었다. 지금의 거창군 송정리에는 ‘김순’이라는 낭장[郞將, 고려 시대 정육품 무관의 벼슬] 벼슬을 하는 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결혼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은 새신랑이었다. 그의 아내는 탐진 최 씨로 현명하고 정숙했다. 1380년에 왜구가 거창군 일대로 쳐들어왔다. 김순은 왜구를 물리치러 나가야 했다. 젊은 아내 혼자 두고 가기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팠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다치지 않도록 부디 몸조심하시구요.” 김순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싸움터로 나간 얼마 뒤, 왜구들이 김순과 그의 아내가 사는 마을까지 쳐들어왔다. 그들은 마을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함부로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들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 위험은 김순의 아내에게도 닥쳤다. 쫓아오는 왜구를 피해 도망을 치던 최 씨는 왜구에게 붙잡혔다.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왜구가 최 씨의 가슴을 만졌다. 최 씨는 결연한 자세로 은장도로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왜구의 더러운 손이 닿은 젖가슴을 도려내고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조정에서는 탐진 최 씨의 절개를 기려 정려각을 지었다. 최 씨가 평소 빨래를 하던 빨랫돌에 비문을 새겨 세웠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절부리(節婦里)’라고 칭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정려각이 불에 타고 기록도 훼손되는 일을 겪었으나 영조 때 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일제는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정려각을 철거하고 마을 이름도 ‘덕곡’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절부리’로 불리고 있다. 한편 이 마을에는 유난히 크고 붉은 앵두가 열릴 뿐만 아니라 대나무 또한 곧고 푸르기가 유명하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앵두는 탐진 최 씨의 젖가슴이 자양분이 되어 크고 붉은 것이며, 대나무는 그녀의 절개를 닮아 곧고 푸르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웹페이지
디지털거창문화대전, "절부리의 유래", 디지털거창문화대전
웹페이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송정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지방문화원
거창문화원 GO
집필자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