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선우진 선생
이제 막 집에 돌아와 간단히 땀을 씻고 컴 앞에 앉으니 11시 30분이군요.
퇴근 후에 강동구 둔촌동 소재 보훈병원에 문상을 갔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선생이 그제(17일) 타계하셨습니다.
선우 선생과 저는 그리 두텁지는 않아도 개인적인 친분도 없지 않습니다.
백범기념관이 건립되기 전에 백범기념사업협회는 효창운동장 아래편에 있었습니다.
3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전시장, 2층은 사무실, 3층은 강의실이었죠.
더러 취재차 협회 사무실에 가면 선우 선생을 뵐 수 있었습니다.
선우 선생은 가냘픈 외모처럼 조용한 말씨에 성품도 인자하셨습니다.
저녁 8시 무렵 빈소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입구에서 백범기념관 홍소연 실장을 만났습니다.
홍 실장의 안내로 빈소에 도착해서 부의록에 서명을 하고 빈소로 들어섰습니다.
영정사진 속의 낯익은 선생의 모습을 보니 다정다감하시던 선생이 떠올랐습니다.
마치 나를 향해 ‘정 동지! 이제 왔소!’ 하시는 듯 했습니다.
향을 피우고는 선생에게 두 번 절을 올리고, 이어 상주들과 예를 나누었습니다.
선생은 ‘선우 진’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백범 비서’로 더 통했던 분입니다.
임천에서 한광반 훈련을 마치고 1944년 11월 하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향한
선생 일행은 이듬해 1월말 임시정부에 도착했고, 거기서 백범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선생은 23세 청년이었고, 백범은 선생에게 ‘조부나 다름없는’ 69세였습니다.
백범을 모시고 방북길에 38선에서 찍은 모습으로 왼쪽 끝이 선우진 선생이다. 이 사진을 찍은 <조선통신> 유중열 기자는 이 순간을 '역사적 찰나'라고 명명했다(1948. 4. 19)
해방 후 백범 일행과 함께 환국하여 경교장에서 백범 비서로 활동한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만 4년여 백범을 곁에서 모셨습니다.
백범을 수행하여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백범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봐 왔습니다.
백범과의 이런 인연으로 주변에서 회고록 집필을 종용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부터 지난 일을 구술하여 선생은 지난해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서강대 최기영 교수가 정리한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刊)이 그것입니다.
빈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그 책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그간 선생이 회고록 집필을 오랫동안 사양해온 이유가 ‘서문’에 적혀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의 서거가 나의 불민(不敏) 때문이라는 자책이 그 한 이유였다”
회고록 제8장 ‘그날’ 편에 백범이 서거하신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셨더군요.
“(1949년 6월) 26일 11시경 창암학원의 책임을 맡은 여선생을 불러 학교 일을 의논했다. 창암학원은 백범 선생이 피난민이 많던 마포구 염리동에 설립한 학교였다. 11시 30분경 포병 소위 안두희가 찾아와 백범 선생을 뵙기를 청하였다. 안두희는 일전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김학규 선생의 소개로 경교장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가 백범 선생이 손님과 면담 중이라 하자 안두희는 비서실에서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지 지금도 죄책감이 든다. 그날은 한가했지만, 그래서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날이다...여선생이 돌아간 후 안두희는 강(홍모) 대위에게 먼저 백범 선생을 뵈라고 답했다...
10여분 뒤에 강 대위가 2층에서 내려왔다. 안두희가 일어나자 내가 2층으로 안내를 했다. 백범 선생은 휘호를 쓰려는 듯 의자에 단정히 앉아 계셨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때가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선생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모 아주머니가 만둣국이 다 되어간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정신이 멍해졌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백범 선생 방에서 바로 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별안간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급하게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래층에서 이풍식, 이국태 비서가 뛰어 올라가려는 순간, 안두희가 권총을 계단에 철커덕 떨어뜨렸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국태가 먼저 서재로 뛰어 올라갔다. 나도 뒤따라 층계 위를 내달렸다. 허벅지와 무릎이 욱신욱신했다. 온몸이 바짝 긴장이 돼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백범 선생의 방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선생의 얼굴과 오른편 가슴에 유독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오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먼저 백범 선생을 의자에서 내려 방에 눕혔다.
“적십자병원에 가서 의사를 데려와! 어서!”
이국태에게 미친 듯 소리쳤다.
백범 선생은 고개와 팔이며 다리를 늘어뜨린 채 말이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울부짖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순간 나도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는데, 안두희의 권총이 눈에 선명하게 다가왔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안두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풍식 씨가 의자로 때려눕힌 것이었다. 나도 격분해 의자를 들어 안두희를 다시 후려갈겼다.
그때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서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왔고, 안두희를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 경비주임을 막았다.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며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 밖에 있던 쓰리쿼터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백범 선생의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백범 김구 선생의 시신이 안치된 모습
백범 선생의 49제를 지낸 후 유족 등이 묘소 앞에서 찍은 모습. 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선우진 선생이다.
선우 선생은 백범 선생의 서거는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지난해 회고록을 펴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선생은 백범의 삶이 보여준 감동과 인간성 때문이라고 '서문'에서 밝혔더군요.
“백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조국통일에 헌신하신 분이기 이전에 범부(凡夫)를 자처하면서 따뜻한 인간애와 검소, 절제를 몸소 보여주었다. 당신 자신이 으뜸이 되기보다 나라와 국민을 섬긴 겸손한 분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백범 선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선생의 그러한 면면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올해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지 6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문지기’를 자처하며 찾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0주년이기도 하구요.
4년여 백범을 그림자처럼 보좌했던 선우진 선생도 이제 백범 곁으로 가셨습니다.
선우 선생이시여!
안두희의 흉탄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일랑 이제 훌훌 털고 편히 가소서.
저승에 가시거든 다시 백범과 임정 어른들을 잘 보필하소서.
그리하여 선생은 영원한 ‘백범의 비서’로서 역사속에 자리하소서.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고 선우진 선생 빈소
상주들. 오른쪽부터 장남 엽, 차남 환, 조카 승영진 씨
선우 선생 빈소를 찾은 '청년백범' 회원들
첫댓글 김영진님 귀한 사진을 잘 보고 갑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 평안 하소서......
백범께서 외롭지 않으시겠네요. 선우선생과 노통이 왔으니..
사진에보니 선우진 성생께서는 호리호리하시고 신장이 크시니 바로 알아보 겠읍니다
선우진 선생께서 운명을 하시였다고 규운 윤기섭 선생의 따님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익히 선우진 선생을 잘 아시는 사이라서 마음이 무척 아프시다고 말씀을 하시였고요 병석에 게신다는 것을 알고 게셨읍니다 선우진 선생께서 자서전 (전기)을 출간을 하셨다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진이 뜨질 않는군요 아쉽게도....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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