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포은 정몽주 선생 순절 617주년을 맞아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은 종보 제13호부터“포은선 로서도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며, 문학활동을 통하여 고려말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 포은집”에 실려 전해오는 포은선생 시 310여수 가운데 명시(名詩)만을 가려서 1회에 2수(首)씩 싣기로 하였습니다. 시선(詩選)과 집필은 현재 한림대학교 기초교육대학교수이며 포은학회 출판이사로 활동 중 인 하정승(河政承)박사가 맡았으며, 원문과 해설, 그리고 감명 깊은 시평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 감상 속으로 빠져들게 할 것입니다. /편집실 |
詩를 통해 經世와 輔國의지 확고히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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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시의 詩題는「再賦因寄崔郭兩先生」d( 圃隱先生集e권2 수록)이다. 首聯의 내용으로 보아 詩題의 崔·郭兩先生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없으나, 옛날 晉나라때 廬山虎溪의 東林寺에 은 거했던 慧遠法師처럼 자연에 묻혀 사는 인물인 듯하다. 1-2구에 인용된 고사는 주지하다시피 혜 陶淵明과 陸修靜이 찾아오자 이들을 배웅하며 그만 자기도 모르게 호계를 넘어 버렸다는 고사로 서, 혜원법사처럼 은거하고 있는 최·곽 두 선생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에 머무르며 산수만 사랑하지 말라”고 포은은 최·곽 두 선생에게 충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수고하고 있는데, 선비로서 개인의 평안과 기쁨을 위해 홀로 즐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儒者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포은이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한 바탕에는 이와 같은 인식이 자리 잡고있었던 것이다. 드시 산림에 묻혀 있을 필요는 없다는 사상에기인한다. 포은은 경기도 여주의 驪江에 은거하고 있 던 그의 절친한 벗,遁村李集(1327-1387)에게 준 시에서도, “시골을 떠나더라도 능히 色을 피할 수 있으니/반드시 산림 속에 있을 필요 없다네”1) 라고 자신의 서울생활의 정당성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찍이 牧隱李穡은 포은의 이같은 성향을 간파하고「圃隱齋記」에서“지금 達可(포은선생의 字)는 채소밭[農圃]에 은거하되 조정에 서서 儒道를 자기 책임으로 삼고, 엄정한 容色으로 학 이 모두 포은선생의 儒者로서의 현실참여적 기질을 말하고 있는것이다.
학이 뿌리내리고 발전하는 데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다년간의 成均館學官活動과 大司成의 職을 통해서 수많은 젊은 유학자들을 배출해 내었으며, 과거를 主試하여 인재를선발하였고 五部學堂과 鄕校를 세우는 등 다양한 교육활동을 펼친 한 시대 의 스승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의 불교식 喪制를 朱子家禮를 본떠서 家廟를 세우는 유교식으 로 전환하게 하였고, 元나라의 유풍인 胡服을중국식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고려 말 성리학이 도입되어 그 뿌리를 내리는 데에 있어서 포은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忠
「浩然卷子」d( 圃隱集e권2 수록)라는 詩題의 위의 인용시는d孟子e의‘浩然之氣’와d中庸e의‘鳶飛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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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종보 2009 제 13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