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39)
꽃을 보려면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 정호승(1950- ), 정호승 시선집 『수선화에게』, 비채, 2015
**
잠 속이었습니다. 두벌잠이었습니다. 새벽에 잠에 들어 깨었다가 다시 잠들었습니다. 아침이었으나 흐린 날씨에 비가 오는지 어두웠습니다. 두벌잠 속에서 저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로비의 여러 카운터 중 한 곳에 몸을 딱 붙이고 저는 웅크리고 누워 있었습니다. 들고 나는 문이 많은지 사람들은 바쁘게 이쪽저쪽에서 들어와서는 저쪽이쪽으로 총총총 지나갔습니다. 오가는 사람 중에 제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심지어 힐끗거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 누운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사방을 살피니 그곳이 한데가 아니었음에도 한데 같았습니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던가요. 잠깐 써늘했습니다. 이건 아마 잠 속이 아닐 겁니다만 저는 여전히 두벌잠에 한뎃잠에 선잠 중이어서 더 꼭꼭 잠 밖에서 잠을, 잠 속에서 잠을 부르며 웅크렸습니다. 꿈이 쉬 드나들기도 했으니 아니 어쩌면 봄잠이었을까요. 한동안 날씨가 천방지축 했습니다. 기온이 20도를 넘어 여름옷을 꺼냈는데 갑자기 영하로 뚝 떨어져 빨래통을 기웃거리게 하는 날이 자주 생겼습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다 옳았습니다. 나갈 때마다 고심 끝에 옷차림을 마무리했으나 번번이 낙담했습니다. 어떤 날은 추위에 벌벌 떨었고 어떤 날은 더위에 헉헉대었습니다. 누군가는 늘 하던 대로 꽃샘추위니 바람이니 했지만 몇 달을 이어지는 변덕은 아마도 새로운 언어를 요구하지 싶습니다. ‘사흘은 춥고 나흘은 미세먼지’를 뜻한다는 삼한사미三寒四微가 등극하는 새 기후용어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꽃들은 더 죽을 맛이겠습니다. 차례는 이미 물을 건넜고, 바람이 부는 대로 죽을 끓였으니 이미 끓인 몸 내친김에 그냥 웃나 봅니다. 어제는 다저녁에 문밖을 나섰는데 햇빛 잘 드는 화단의 벚꽃이 활짝 심장 떨어지게 웃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봄은 오고, 오늘은 또 기어코 온 봄입니다. (20240327)
첫댓글 날씨가 천방지축이라도 벚꽃이 피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