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두 사람
김 정 희
안산문화예술의 전당에서 뮤지컬 공연을 보고 밤공기를 맞으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재건축을 마치고 새로 입주한 아파트 앞길에서 두 사람이 재미있는 포즈를 취하고 놀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저 사람들은 이 밤에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길 반대편에서 걷고 있던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길을 건너는 동안에도 그 사람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같은 포즈를 계속 취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 그 두 사람을 본 순간 픽 웃고 말았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 크기의 동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이게 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그 곳을 지나갈 때는 거기에 동상이 서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지나다가 부딪칠 뻔해서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곳을 지나다가 깜짝깜짝 놀란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부딪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밤에 이곳을 지날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길 위에 늘 같은 자세로 서 있는 그 두 사람은 지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사고를 유발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는 그 길로 오늘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 두 사람을 보러 갔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가는데 그들은 여전히 같은 포즈로 잘 놀고 있었다. 주위를 빙빙 돌며 사진도 찍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사람은 고개 숙여 절을 하는 모양새이고 다른 사람은 두 팔을 벌려 어서 오라고 끌어안으려는 자세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우를 반가이 맞이하는 형님일까? 아우는 개구쟁이처럼 한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둘이 아니라 혼자 서 있었다면 웃음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삶도 혼자서 살아야 한다면 힘들겠지만 둘이 서로 도와가며 의지하고 살아가기에 살만한 것이 아닐까.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 두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물어보았다. 남편 대답은
“둘이 싸우고 있잖아”
한다. 검색을 해보니 그 주변이 문화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안산을 상징하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서 모티프를 얻어 제작한 동상이라고 했다. 단원의 그림을 찾아보다가 ‘씨름’에서 비슷한 자세를 발견했다. 남편은
“그것 봐! 싸우고 있는 거 맞잖아.”
그런다. 그런데 찍어온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두 사람이 싸우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 좋은 형님과 개구쟁이 아우처럼 보일 뿐이다.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소?”
“어서 오게. 내 아우!”
하면서 막걸리잔 기울이는 의좋은 형제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삼십 여 년 전 안산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 본 것은 길 가에 서있는 푯말이었다. 거기에는 ‘안산을 사랑해요’라고 씌어 있었다. 그 푯말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문구가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도시 개발이 한창이고 들어오는 인구가 많을 그 당시에 잘 맞는 문구였던 것 같다. 이제는 문구가 아닌 동상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안산에 삼십 여년을 살다보니 참 살기 좋은 도시다. 곳곳에 작은 공원이 많아 산책하기 좋고 공기도 좋다. 서울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이제는 서울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고 예전에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다 독립하고 나면 남은 시간 남편에게 잔소리 해가며 저 길 위의 두 사람처럼 주위에 웃음을 선사하며 재미있게 살고 싶다.
못 생겨도 괜찮아!
구독의 사전적 의미는 ‘책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구입하여 읽음’이다. 이제는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상품 또는 서비스를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개념이 확장되었다. ‘구독 경제’라는 말도 생겨났다. 햄버거, 빵과 커피, 피자가 정기구독 서비스를 시작하더니 면도기, 생리대도 정기구독 서비스를 하기 시작했다. 과자 구독 서비스, 차량 구독 서비스, 전통주 구독 서비스도 있다. 넷플릭스와 같은 영상 구독 서비스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구독자를 크게 늘렸다. 지식 콘텐츠 정기구독 서비스는 바쁜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만을 큐레이팅해 제공해주는 서비스로 인기가 많다.
이런 서비스도 있구나 하고 지나치다가 최근 눈이 번쩍 뜨이는 구독 서비스를 발견하였다. 크기와 모양이 판매 조건에 맞지 않거나 판로를 찾지 못해 버려지는 친환경 농산물을 정기적으로 배송해 주는 채소 구독 서비스 ‘어글리 어스ugly us’ 다. 판매되지 못하고 산지에서 버려지는 농산물이 전체 생산량의 30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돈으로 환산하면 5조원이 낭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농산물이 썩으면서 지구 온난화의 원인인 메탄가스가 발생하여 환경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고 한다. 모양이나 중량, 과잉생산 등의 이유로 판로를 잃은 농산물들의 가치를 찾아 음식물 쓰레기 발생을 줄이고, 낭비 없는 생산을 꿈꾼다는 어글리 어스의 취지가 마음에 들어 구독 신청을 했다.
‘이번 주에는 이런 친환경 채소들을 구했습니다.’
하고 배송 예정인 채소를 알려주는 안내문자가 온다. 배송 예정인 채소를 미리 알려주는 뜻도 있지만 이런 채소들을 버려질 위기에서 구출했다는 이중의 뜻이 있는 것 같다. 자동으로 결제하고 새벽 배송으로 집 앞까지 배달해 준다.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면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예쁘게 놓여 있다. 비닐포장을 하지 않고 종이 봉지에 채소들을 담고 상자도 종이테이프로 붙여서 온다. 이 채소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사연으로 버려질 뻔 했는지 각각의 채소마다 스토리와 보관 방법, 그 채소들을 이용해 어떤 요리를 하면 좋은지 레시피도 함께 온다. 채식하는 사람들을 위한 비건 레시피도 있다.
“사과를 빨갛게 만들기 위한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색도 옅고, 동녹으로 인한 갈색 흔적으로 겉모습은 예쁘지 않더라도 껍질을 벗겨내면 새콤달콤한 사과 맛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어글리 어스에서는 고구마를 크기와 모양으로 차별하지 않아요. 수확기에 비가 많이 내려 껍질이 얼룩졌어요. 껍질 한 겹 벗겨내면 여느 고구마와 다름 없는 뽀얀 속살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이번 꾸러미의 감자는 두백과 선농의 장점을 합쳐 만든 품종 ‘설봉’ 감자입니다. 분이 많고 수분감이 좋아서 쪄먹을 때 가장 맛있어요. 물론 감자전, 감자튀김, 옹심이로 만들어 먹어도 감자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요.”
이렇게 못난이 채소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시피를 보고 요리를 하면서 못난이 채소 구출작전에 함께 하고 환경보호에 기여한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이번 주에는 고구마사과카레를 만들어 보았다. 지금까지 고기와 감자 등을 넣고 만들어 먹던 카레와는 또 다른 맛의, 사과가 들어가서 달콤한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어글리 어스 택배 상자에는 ‘못생겨도 괜찮아!’라는 말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상자를 열 때마다 채소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잘 나고 똑똑하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대접 받는 세상에서 어글리 어스 채소들은
“좀 못나도 괜찮아!”
“키가 작아도 괜찮아!”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겉모양은 좀 못났어도 맛은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채소들보다 훨씬 더 좋다.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시동생이 결혼을 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동서와 나를 비교하면서 동서는 키가 큰데 너는 너무 작다고 한마디 했다. 나는 그 말에 발끈해서
“어머니! 제가 키 작아서 못한 게 뭐 있어요?”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친척 중 한 분이
“그러게. 얘가 아들을 못 낳았어, 딸을 못 낳았어, 살림을 못해.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하면서 시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시어머니는 머쓱해서
“조그만 몸으로 그거 다 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하고 웃어 넘겼다. 살아오면서 키가 작아서, 잘 나지 못해서, 예쁘지 않아서 받았던 설움을 못난이 채소들을 보며 위로받는다.
어릴 적 어머니는 밭에 심은 여러 가지 채소들 중에 늘씬하고 예쁜 채소만 골라서 읍내에 팔러 나갔다. 벌레 먹고 구부러지고 못생긴 채소들은 우리 식구들 몫이었다. 나는 우리는 왜 늘 못난 채소만 먹는지 불만이 많았다. 채소들의 겉모양을 예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화학비료와 농약이 필요한지 그 때는 몰랐다. 지금은 일부러 못난이 채소를 골라서 내 돈 내고 먹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채소들을 구출해서 보내올지 기대하고 있는데 지금 막 문자가 왔다. 열무, 얼갈이배추, 오이, 완숙 토마토, 애호박, 느타리버섯, 고구마를 구했다고. 마침 김치가 떨어져 가는데 열무와 얼갈이배추로 김치를 담그고 오이소박이도 해야겠다.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못난이 채소 꾸러미를 기다린다.
첫댓글 총무님의 길 위에 두 사람은 안산시 공모전 모집 하면 보내야 겠습니다.
총무님 글을 읽고 반성을 많이 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