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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채만식과 군산
글/사진 김경식
섣달 하늘은 낮고 흐리다. 황소바람이 불고 있는 금강하구언에서 바라 본 군산시내는 잿빛이다.
다만 역사적인 구도와 아슴한 호기심으로 항구도시의 이미지를 가슴으로 그려본다.
초겨울부터 맹위를 떨친 이번 겨울은 내 유년의 겨울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역만리에서 날아 온 철새들의 무리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군산(群山)이라는 지명은 고군산군도에서 유래한다. 군산은 바다에 산이 무리지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채 얼려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 채만식 소설 탁류 중에서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군산의 지형지물을 이렇게 묘사했다.
충남 서천에서 금강하구 둑을 달리다 보면 “ 남쪽 언덕에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는 소설
'탁류'의 표현이 적절함을 알게 된다.
금강하구
강산이 몇 번 변할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강은 그렇게 휘돌아 돌아 왔지만, 이제 강물을
막고 있는 금강하구 둑에 막혀 금강은 갈 길을 멈춘다.
천리를 걸어온 강물은 바다와 합류하지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었지만, 겨울이면 철새들의 도래지가 되어 사람들 보다 새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고은 시인은 1933년 군산시 미룡동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내 고향 군산에서’ 라는 시에서 군산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내 고향 군산은
한밤중에도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곳
내 고향 군산은
뱃고동 소리에
아이들이 돛대처럼 자라는 곳
내 고향 군산은
오늘도 누가 떠나는 곳
안개 걷히우면
누가 돌아오는 곳
내 고향 군산의 술집은
저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먼 나라 사공과 함께 취하는 곳
어서 오라 네 나라 깃발 펄럭일 바람을 주마
--고은 시인의 시 ‘내 고향 군산’ 전문
1970년 고은 시인은 군산 앞바다 어부들의 위해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양희은이 불러 유명해진 ‘세노야’ 라는 시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 고은 시 ‘세노야’ 중에서
시 ‘세노야’ 에는 이 고장 어부들의 슬픈 삶이 녹아 있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세노야, 세노야’는 군산 앞바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며 부르던 노동요의 추임새를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바닷가 군산에서 태어나 슬프고, 고단한 노동요를 들어 왔기에 고은 시인은 이 시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금강하구 신성리갈대밭
군산의 역사는 아득하고 큰 싸움이 많았던 지역이다.
구석기시대부터 군산지역에는 사람이 살아 왔다. 2002년 내흥동에서 군장철도 연결공사 중 유적이 발견되어 구석기시대 군산에 살았음이 증명되었다.
조개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다. 4세기 까지 금강 이남은 마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4세기 금강 이남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 된다. 군산은 삼국시대 때 백제에 속했다.
백제의 수도는 웅진성(공주)과 사비성(부여)였다. 두 도읍지 모두 금강 연안에 위치해 있었다. 서해에서 백제의 도읍지로 가는 강의 초입에 군산이 있었기에 군산은 백제의 대외무역과 군사상의 중요 지역이 된다.
백제시대 군산지역에는 마서량현, 부부리현, 시산현의 3개 현이 있었다. 당시 금강 입구 지역을
기벌포, 백강, 웅진강구라 불렀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금강입구에서 4번의 큰 싸움이 있었다.
서해바다와 금강이 만나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략 때 첫 공격 대상이 바로 군산지역이다. 이것이 기벌포에서의 첫 전투였다.
기벌포는 금강 하류 지역이므로 지금의 군산 인근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전투는 663년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다. 이 싸움에서 백제 부흥군이 참패함으로써 백제는 완전히 멸망한다.
세 번째 싸움에서 군산(기벌포)은 676년 신라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물리친 곳이다.
645년 신라와 당나라는 상호 군사동맹을 맺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다. 8년 후인 668년 고구려를 무너트린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고 하였으며, 신라의 정권까지 간섭하려 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동맹 때 김춘추와 당(唐) 태종은 평양 이남 땅을 신라의 지배권에 동의했었다. 당나라가 이를 위배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의 옛 땅에 점령정책을 개시한다. 이런 이유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670~676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된다. 마침내 기벌포(군산)에서 당나라를 크게 무찌른다. 기벌포 싸움은 결국 신라의 승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신라는 673년부터 함선 100척으로 서해를 방어했다. 676년 당나라 설인귀의 해군이 기벌포로 남하하여 군산 앞바다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진포대첩비
네 번째 싸움은 고려 말 왜적과의 싸움이었다. 이 전투가 진포전투다.
군산은 남으로 만경강과 북으로는 금강이 서해로 유입되는 두 강의 하구 사이에 낀 바다를 마당으로 한 지리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서해안 벽지에 지나지 않은 곳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확장의 각축전에서 내몰린 백제의 남하서천( 南下西遷)정책으로 수도가
금강 중류의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옮겨 오면서 금강하구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격상되었다.
백제멸망으로 240년간 금강은 후백제(AD900년)의 출현과 더불어 중국의 오월(吳越)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서해에서 금강입구에 있는 군산의 입지적 여건은 19세기 후반 일제에 의해 능멸의 극치를 당하기도 한다. 수탈한 공물을 운반하던 항구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도 군산은 조세와 공물의 집산지로 성황을 이루었고 조선 효종 때는 호남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시모노세끼조약을 맺은 후 군산을 개항시킨다. 개항 당시 150여 가구가 살던 마을 군산은 구릉을 제외한 낮은 곳은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다. 1899년 개항 후 해방 때 까지 일제에 의한 가장 강력한 지배구조 하에 있던 울분의 도시가 되어야 했던 곳이다. 일제의 토지강탈과 그 곡물의 수탈항구로서의 오명(汚名)을 간직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한일강제합병은 군산에 큰 특수를 가져왔다. 군산은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한 물품을 자국으로 옮기는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한 어촌마을에 불과했던 군산이 부로 승격되어 군산부청이 설치된다. 1908년 전주와 군산간의 포장도로가 전국 최초로 완공된다.
국내 총 수출량은 전국 2위로 부산 다음이었다. 수출은 당연히 쌀이었다. 군산이 이렇게 급성장하는 항구도시가 된 것은 그들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호남, 충청의 농토를 빼앗아 자신들의 소유로 삼아 일본 농민을 이주시켰다. 물론 그들의 부족한 쌀을 생산하는 기지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금강하구 들녘
군산지방은 유독 일본인 농장이 많이 모여 있었다. 항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26년 말 3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농장수는 전북이 1위였다. 30정보면, 10만 평이다.
거대한 규모의 농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소작농이 많다는 반증이다.
이즈음 일본 공산품들은 군산항으로 계속 들어왔다. 농토를 잃은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어졌다. 결국 그들은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농민이 된다.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농민들은 수확량의 2/3의 소작료를 감당해야 하는 삶 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삶 이었다. 조선봉건지주는 1/2의 소작료를 내야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농장주들이 흉년에도 소작료를 감해주지 않아 그대로 빚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되었다.
남아있는 농민 역시도 조선의 봉건지주보다 혹독한 수탈을 당했는데 소작료가 조선시대에 그 수확량의 1/2이었으나 더 많은 2/3에 가까워지고 흉년에도 소작료를 감해주지 않는 등 최악의 실정이었다.
1910년 당시 일본인이 강탈한 토지는 86,951정보였다. 이 중 전남북이 42,000여 정보로 약 1/2을 차지한다. 전국 평균 소작이 40%인데 전북은 68%였다. 자작은 전국 평균이 19%, 그러나 전북은 5.8%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소설가 조정래는 그의 작품 ‘아리랑’의 서두를 군산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채만식의 소설 ‘탁류’도 이곳 군산에 작품의 무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앙고보 재학 당시 채만식
그러나 군산은 3,1만세운동과 항만노동자들의 파업을 통한 항일의 끈질긴 투쟁도 병행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인천에 항구로서 역할을 빼앗기고 그나마 6,25를 당하여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후 군사정부의 집권 하에서도 소외의 길을 걸어오다가 최근의 90년대부터 ‘서해안 시대’란 이름하에 다시 군산은 활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국가공단으로 이어진 해안가 도로변에는 아직도 게딱지같은 허름한 집들이 즐비하다. 아직 군산은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이곳저곳에는 궁색하고 어색한 일제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하긴 일제는 군산을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곡식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곡물을 실어내던 곳으로 만들었다. 1919년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군산의 인구 13,000명중에 일본인의 숫자가 6,800명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차라리 그들이 장악한 도시였다.
서해안 시대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군산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서울에서 목포까지 완공된 이후 군산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오래전에 나는 채만식의 ‘탁류’에서 금강을 표현한 것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의 금강에 대한 표현은 어느 지리학자도 흉내 낼 수 없는 빼어난 것이었기에 옮긴다. 탁류의 첫 시작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에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 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 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 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 근처에서는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
그리고 북쪽 줄기는, 좀 단순해서, 차령산맥이 꼬리를 감추려고 하는 경기 충청의 접경 진천 근처에서 청주를 바라보고 가느다랗게 흘러내려오다가 조치원을 지나면 거기서 비로소 오래 두고 서로 찾던 남쪽 줄기와 마주 만난다.
이렇게 어렵사리 서로 만나 한데 합수진 한 줄기 물은 게서부터 고개를 서남으로 돌려 공주를 끼고 계룡산을 바라보면서 우줄거리고 부여로, 부여를 한 바퀴 휘돌려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메, 강경이 까지 들이닫는다.
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으로, 빗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섭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 채만식의 소설 ‘탁류’ 중에서 인용
채만식문학관
장항에서 금강하구 둑을 건너 군산시로 진입하는 초입에 ‘채만식문학관’이 앉아 있다.
채만식이라는 이름은 아직 생소하지만 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1930년대 군산일대의 사회상을 빼어나게 묘사한 작품 ‘탁류’를 쓴 작가로 기억하고 있다.
바람이 차갑게 불었지만 다른 날 보다는 덜 추운날, 나는 소설가 채만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경위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로 3시간 좀 더 걸려 군산에 닿았다.
그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간 내흥동에 위치만 채만식문학관은 아담한 2층의 건물이었다. 겨울의 배롱나무들이 추위에 떨면서 반기듯 서 있다.
군산시에서 관리하는 문학관은 채만식선생의 일대기를 ‘군산과 채만식’ ‘삶과 고뇌’ ‘전시실’ ‘영상세미나실’ ‘작품세계’로 분류하여 아담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집필실을 입체 그래픽을 이용하여 실체감을 보여 주도록 하였는데 원고지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채만식선생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채만식선생의 치열한 문학적 삶을 시대적상황과 연계하여 파노라마식으로 소개하고 있고 특히 전자음향 자동장치를 이용한 설명은 문학관이 어떻게 만들어 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듯 사실감을 더해 준다.
채만식문학관 내부
추운 겨울 2층 창으로 보이는 금강의 풍경은 흐리다. 눈이 내리기 직전의 흐린 모습은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의 ‘탁류’ 주인공 초봉의 삶과 닮아 있다.
군산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넓은 호남평야의 곡물을 강탈해가는 항구의 신도시였다.
충남을 휘감아 돌아온 금강은 유장한 흐름의 물길을 서해 바다에 몸을 풀면서 호남과 경계를 이룬다.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의 경계인 금강하구 둑에서 금강을 바라보면 바다처럼 광활하다. 이 금강호에는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비상하곤 한다.
이 하구 둑에 비바람을 맞고 서 있는 시비가 있다. 이광웅 시인의 시 ‘목숨을 걸고’시비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 이광웅 시인 시‘목숨을 걸고’ 전문
이광웅 시인 시비 (뒷면)
이광웅(1940~1992)시인은 익산출신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세상을 떠난 시인이다.
지금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왜 이런 시를 써야 했을까. 문학은 그 시대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선생을 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역설적인 표현들은 그의 삶을 알지 못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가 된다.
1992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났으니 어제가 바로 시인의 제삿날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지났다.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후 1998년, 그의 삶을 기억하고 가슴 아파하던 이들이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자연석에 음각한 시비에는 가슴을 울먹이게 하는 그의 자필로 쓴 시 ‘목숨을 걸고’가 투박하게 각인되었다. 외모는 작았지만 마음이 넓고 정직했던 그는 천진무구한 가슴을 지니고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 이었다.
오송회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공안정국을 강화하던 1982년 군산에 있는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을 시국사범으로 몰아 처벌한 조작사건이다.
1982년 11월 오장환 시인의 시집 ‘병든서울’을 읽었다는 이유로 군산경찰서 형사들은 군산제일중고 교사들을 연행한다. 이 사건을 확대하기 위해 전북도경은 이들을 대공 분실에 불법감금하고 약 한 달간 고문과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받는다.
당시 전북도경에 의해 연행되고 1983년 5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이옥렬, 황윤태, 강상기, 채규구, 엄택수 조성용등이다. 모두 군산제일고등학교 선생님들이었는데, 단지 조성용씨는 당시 나이 45세로 KBS남원방송국 방송과정의 신분이었다. 2심 재판이었던 광주고등법원은 오히려 1심보다 높은 형량을 때렸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비정하고 오만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 법정이었다.
이광웅 시인'목숨을 걸고'시비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오송회 사건을 국가보안법을 남용해 조작한 사건으로 규명한다. 2008년 11월, 오송회 사건의 피해자들은 그 광주고법에서 '무죄'를 입증 받았다. 실로 26년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광웅 시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지 몇 년이던가. 오송회 당사자들로서는 통곡할 일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오장환의 시 ‘병든서울’이란 시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좋아졌다는 것은 이런 경우일 것이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 오장환의 시인의 시 ‘병든 서울’ 부분
시인 오장환(1918~ 1951)
이 시에 등장하는 ‘인민’이란 단어로 인해 이광웅 시인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오장환 시인은 신장병으로 입원하여 있던 병원에서 8,15 해방을 경험한다. 광복의 감격과 설레임은 잠시 울분과 좌절이 그의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펜을 들어 ‘병든 서울’이라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었어도 식민지 시대 친일파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며칠 전까지 황군위문 공연을 하던 문인들이 이제는 민족문학을 부르짖고 있던 서울은 병든 서울이었다.
일제하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던 이들이 정당을 마구 만들어 거들먹거리는 해방 정국은 이미 오장환 시인에게는 꿈에 그리던 해방이 아니었다.
오장환 시인은 이런 서울을 떠나 월북을 감행한다. 이광웅 시인은 1982년 봄 동료 교사들과 함께 4,19와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학교 뒷산에서 이야기했다.
이광웅 시인은 당시 오장환 시인의 시 병든 서울 복사본이 있었는데 박정석 교사가 이를 복사한다. 복사된 병든 서울은 그의 제자가 빌려가서 읽다가 버스에 두고 내리게 된다. 이 시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은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시를 검증받는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이란 표현을 예로 들면서 고정간첩이 쓴 것이라고 경찰에게 통보한다.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어 군산제일고 교사들이 수사를 받게 된다. 결국 오장환 시인의 시 ‘병든서울’이 오송회 사건의 원인이 된 것이다.
수사당국은 처음에는 이들이 남성고 출신이기 때문에 ‘오성회’로 하려했다. 그러나 황윤태 교사가 남성고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직 이름을 무엇으로 조작할 것인가 고민했다. 수사기관은 최종 오송회(五松會) 이름을 만들고 조직표를 먼저 만들어 놓고 강압수사를 한다. 오송회는 군산제일고 뒷산 소나무 밑에서 5명의 교사들이 모여 의식화를 하였다고 하여 수사관들이 만든 이름이다. 수사관들의 작명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시인은 떠났어도 언어로 살아나 시비로 남는다. 여기 군산 금강하구 겨울 바람 스치는 작은 둔덕에 고 이광웅 시인의 시비가 누워있다. 억울한 삶을 살았던 그의 시비 앞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광웅 시인의 시비 앞에서 아마도 누군가 도종환 시인이 그를 위해 쓴 시 한 편 읽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 제목이 ‘이광웅’이다. 저 광활한 금강호의 눈부신 물결에 이는 바람에 눈물이 난다.
도종환 시인은 서정 시인이지만 의식 있는 시인이다. 그는 이광웅 시인을 다음처럼 노래한다.
오장환 시인 생가(충북 보은)
그대는 이 땅의 맑은 풀잎이었다가
허리에 도끼날이 박힌 상처받은 소나무이었다가
그대는 별자리에서 쫓겨난 착한별이었다가
견결한 향기로 시드는 가을들판 마른 쏙잎으로 앉아 있다가
그대는 진흙도 물벌레도 다 와서 살게 하는 고운 호수였다가
천둥번개도 눈보라도 다 품어주는 저녁하늘이었다가
그대는 지금 갈기갈기 소나기로 내리는 슬픔
쏟아지며 쏟아지며 온 세상을 다 적시는 눈물의 빗줄기.
- 도종환 시 '이광웅' 전문
오래전부터 도종환 시인은 오장환 시인의 고향 근처에 살면서 그를 선양하고 있다.
그런 그가 오장환 시인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이광웅 시인을 위해 시를 쓴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월북 작가가 작품이 해금된 것은 1988년 올림픽 때문이었다.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도 해금된다. 이광웅 시인은 1987년 민주화의 영향으로 감옥에서 풀려난다.
이광웅 시인이 좋아 하던 시인이 또 있었다. ‘김강사와 T교수’를 쓴 소설가 유진오가 아닌 해방공간의 무명시인 유진오였다. 유진오 시인은 6,25 당시 전주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총살을 당한 문인이다.
신경득의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2002년 살림터)에 의하면, 1950년 6월 28일부터 20여 일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좌익 정치, 사상범 1천6백여 명은 군, 경에 의해 학살된다.
시인 유진오(1922-1950)도 이때 학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빨치산 문화선전대로 지리산에서 활동 중에 체포되어 1949년 10월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당한다. 그러나 유진오는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돼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당시 완주군 고산면 출신인 유진오는 해방공간의 젊은 시인이었다. 정음사에서 1948년 펴낸 유진오 시집 ‘창’에 서문을 쓴 조운도 시인은 '기백과 정열의 시인, 시의 육탄이라는 민주청년'으로 그를 평가했다. 유진오 시인은 시집 후기에 다음 같은 강렬한 고백문을 쓴다.
"시인이 되는 것은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돼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1946년 국제청년 날에 기념식장에서 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낭송한다.
이 시로 인해 그는 필화사건을 당한다. 그러나 그의 시 ‘불길’을 읽으면 그의 진정성과 낭만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운 사람이 있음으로 해
더 한층 쓸쓸해지는 가을밤인가 보다
내사 퍽이나 무뚝뚝한 사나이
그러나 마음 속 숨은 불길이
사뭇 치밀려오면
하늘도 땅도 불꽃에 싸인다
아마 이 불길이 너를 태우리라
이 불길로 해
나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밤은 숨막힐 듯 기인가 보다
불길이 스러진 뒤엔
재만 남을 뿐이라고
유식한 사람들은 말하더라만
더러운 돼지 구융같이 더러운 것
징글맞게 미운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불길!
이것은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일찍이 이렇게
신명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불길을 사랑한다
낡은 도덕(道德)이나
점잖은 이성(理性)은 가르친다
그것은 너무나 두렵고
위험(危險)하지 않느냐고
어리석은 사람아
싸늘한 이성 뒤에 숨은
네 거짓과 비겁을
허물치 말까 보냐
네가 생각지도 못한
꿈조차 꿀 수 없던 그런 것이
젊은이 가슴에 손에 담겨서
그득히 앞으로만 향해 간다
외곬으로 타는 마음이 있어
괴로운 밤
나의 사랑 나의 자랑아
나는 불길에 싸여버린다
--유진오 시인의 시 ‘불길’ 전문
오장환 시집 병든 서울 (오장환 문학관)
유진오 시인이 태어난 해와 죽은 날을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다. 그의 삶과 문학이 나를 슬프게 하는 이유다. 강한 신념과 낭만성을 가진 그였기에 더욱 그렇다.
유진오의 시를 좋아했던 시인 이광웅(1940-1992)은 '유진오는 죽음 앞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변절하지 않고 의연했던 뛰어난 시인'이라며 '그의 시 세계에서 역사와 현실을 옳게 보는 힘을 배웠다'고 말했다.
2008년 광주고등법원은 오송회(五松會)사건 관련자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 본인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 점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사죄드린다”고 했다. 26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이광웅 시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의 시비는 군산 금강하구언 언덕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아직도 ‘목숨을 걸고’ 삶에 임 하길 기원하고 있다.
이렇듯 오장환 시인의 시집 ‘병든 서울’은 6,25에서 월북 작가 해금이 있기 1988년 전까지는 남한에서는 무서운 책이었다.
오장환(1918~1951)은 충북 보은군 회인읍(현 회북면 중앙리)에서 태어났다. 안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중학을 다녔다. 휘문중학교에서 정지용시인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의 일치였던가. 그는 정지용선생의 제자였다. 훗날 정지용 선생이 납북되었다거나 월북하였다는 이야기들이 나올 때 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설왕설래를 낳았다. 정지용선생의 고향이 바로 옆 동네 옥천이래서 더욱 그랬다.
오장환 시인은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이후 1937년부터-1947년 까지 <성벽> <헌사> <병든 서울> <나 사는 곳>.등 4권의 시집을 냈다. 당시의 궁벽한 살림살이와 어려운 문학적인 토양 아래서 10년 동안에 시집을 4권이나 발행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에 관한 갈망과 집착이 강렬하지 않았다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이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해방 전 미당 서정주와 시인부락의 동인활동을 한 단짝이기도 하였고 자오선의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친화력이 있는 선이 굵고 활달한 성격의 미남형 시인이었다고 전한다.
젊은날의 채만식
8,15광복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 맹활약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채만식문학관’에서 이광웅 시인의 시비를 찾아 가기 위해서는 진포 대첩비를 만난다.
1380년에 바로 앞에서 벌어졌던 싸움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고려 말기이던 1380년 8월에 진포(鎭浦)로 500척을 타고 왜적이 침입해 왔다. 왜적들은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최무선, 나세, 심덕부등이 왜적의 배를 불사르고 격퇴한다.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왜적은 육지 깊숙이 침입하여 남원과 운봉을 거쳐 황산까지 피해를 끼친다. 잔존세력들은 남원의 황산에서 이성계, 변안렬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섬멸한다.
이를 기념하기 하기 위한 탑이 우람하게 서 있다.
5년 전에 이곳을 탐방 하였을 때는 이런 조형물을 볼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문학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해안이 펼쳐진 길을 따라 차를 몰아 달렸다.
바다 건너편에는 장황제련소 굴뚝이 옛 명성을 잃어버리고 홀로 서서 군산을 바라다보고 서 있었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나는 채만식문학비가 있는 월명공원을 찾아 나서기도 했었다. 오늘은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군산 시내를 휘돌아 다니며 월명공원을 쳐다 보았을 뿐이다.
5년 전 나는 항구를 따라 해안가에 우뚝 솟아 길게 누워있는 월명공원입구에 차를 세우고 돌계단을 올랐었다. 오늘 답사는 겨울이었지만 당시는 이른 봄이었다. 군산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는 공원에는 봄의 햇살을 받으며 유치원생들이 노란색 교복을 입고 병아리처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4학년은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강암 송성용 선생이 소설 <탁류> 한 구절을 유려한 필치로 써내려간 비문의 기억이 선연하다. 문학비는 높고 외진 곳에 앉아서 금강이 마지막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1984년 6월 11일 세운 채만식문학비는 홍석영씨가 글을 썼고 군산문화원에서 세웠다.
백능 채만식 선생은 이 고장이 낳은 작가로 그의 업적은 한국문학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는 1902년 옥구군 임피면 - 중략 - 그의 대표작은 탁류로서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풍자적 작품과는 달리 철저한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세태의 묘사에 뛰어난 작품이다. 탁류의 배경은 이곳 항구도시 군산이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농민이 어떻게 몰락해야 했으며 도시화 과정에서 한 고장의 삶의 풍속이 어찌하여 타락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역사와 현실이라는 삶의 혼탁한 현장으로서 깊이 있게 표현되었다. - 중략 - 탁류는 한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인간의 탐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제 유서 깊은 이 고장을 도도히 흐르는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성을 모아 여기 한 돌을 세워 그 업적을 길이 추모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그지없다.
-- 월명공원 채만식문학비 뒷면 글 인용
소설가 채만식 서재
오늘은 비록 월명공원을 오르지 못했지만 군산 시내를 구경하면서 탁류의 작품 무대를 연상했다. 정주사, 정초봉, 정계봉, 고태수, 장형보, 남승재, 박제호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도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세파에 시달리는 고달픈 여인 정초봉, 미모로 인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 슬픈 이름을 불러본다. 탁류를 읽다가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연민의 정 때문 일 것이다.
‘탁류’는 1937년 10월 13일부터 1938년 5월 1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일제식민지의 열악한 경제적인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의 살기위한 몸부림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소설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주인공 초봉이의 운명이 금강의 흐름을 서술한 것이란 것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초봉이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기구한 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백제에 관한 표현들은 망한 조선을 다시금 연상하는 것이리라.
초봉이의 일생과 정주사의 비정함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민족의 수난이라는 전체적인 문제로 부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작품은 어둡고 서늘하다.
월명공원은 군산시 중심에 위치한 군산시민들의 안식처이고 4월의 진달래와 벚꽃, 철쭉꽃이 만개하면 볼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한겨울 섣달의 설한풍이 눈물 나게 만드는 날 멀리 바다만 바라다본다.
몇 년 전에 다시 읽었던 그의 작품 ‘태평천하’는 채만식의 수작이다. 소설 ‘태평천하’는 부정과 모순상황과 시대현실을 그의 독특한 문학적 기법과 비판의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1937년 9월 어느 날의 저녁부터 다음 날 점심 때 까지를 표현한 이 소설은 질곡진 역사의 현장인 한말과 일제강점 시대를 부정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
군산 시내를 해매이듯 돌아다니다가 임피에 있는 채만식 생가를 찾아 나선다.
채만식의 고향 임피
그의 고향 가는 길은 군산과 익산으로 가는 27번 국도를 타야한다.
군산에서 임피까지 16km, 15분정도 4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임피’로 내려가는 길이 기다린다. 잠시 더 내려가는 제법 번화한 동네가 반긴다. 과거 2차선도로 때 있었던 고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교통이 편해 졌지만 옛 추억의 길도 함께 사라졌다. 임피사거리, 채만식선생의 고향마을은 오히려 예전보다 옹색하다. 파출소가 있고 상가가 도열한 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소읍(小邑) 모습 그대로다.
한국문인협회 군산지회가 세운 생가표지석에는 <小說家 蔡萬植先生生家터> 10호정도의
오석(烏石)에 예서체로 써 있고 뒷면에는 ‘선생께서는 1902년 6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나시어 ‘탁류, 레이디메이디 人生, 太平天下,等 百餘篇의 珠玉같은 作品을 우리 文壇에 남기셨습니다.’ 라고 각인되어 있다. 표지석 앞에 차량이 주차하면 생가(生家)표지석은 그나마 꼼짝없이 갇히게 되어 있는 장소에 앉아 있다.
‘명화마을’이라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둡고 칙칙한 헛간이 나온다. 그곳에 채만식선생의 유년시절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우물이 있다. 채만식 선생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이 우물일 것이다.
정치자금 몇 백억을 차떼기로 주고받는 나라에서 소설가의 마지막 남아 있는 생가의 흔적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이 아직은 우리의 현실이다.
생가 표지석
채만식선생의 생가를 답사하려고 멀리에서 달려온 사람들의 실망은 당연하다. 그 곳은 생가가
아니고 단지 생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작고(作故) 문인들 중에서 자신의 집을 지니고 살면서 생가를 보존하였던 작가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모진 가난에 집 없이 방랑 하다가 말년에는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 예술가들의 삶이었다. 생가 터에서 북쪽으로 언덕 같은 산 아래 채만식선생의 모교인 임피초등학교가 있다. 개교 100주년이 넘은 이 학교 정문입구에는 4백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채만식 선생도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학교에 다녔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다.
임피초등학교는 역사가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교다. 특히 4회 졸업생인 채만식선생님이 학교 출신이다. 5년 전에 답사 왔을 때 원본 졸업대장을 학교의 배려로 볼 수 있었다. ‘蔡萬植 1914년 졸업’이라는 희미한 펜글씨체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 경험으로 당시에 나는 90년 전 졸업한 채만식선생을 현실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임피초등학교는 향교의 옆자리에 위치하며 옛 빛이 아름다웠다.
임피초등학교
그러나 채만식선생의 문학비가 없는 학교가 왠지 싫어서 채만식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묘소는 계남리의 야산에 위치 해 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비석은 봉근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한 개씩 서 있다. 뒤쪽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의 푸르름이
위안일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묘소 바로 아래 채만식 선생이 얼마간 거쳐했다는 집이 쓰러져 가고 있었고,
폐허가 된 빈집 마당에는 포크레인 같은 장비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다.
섣달 설한풍에 채만식 선생의 묘소 가는 길은 스산하다. 채만식선생이 임종 직전에 차남에게 했다는 유언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외투, 동복, 두벌의 춘추복은 사후에나마 생색이 있도록 팔아서 장내비와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라.”
--채만식 유언
채만식 집필실
채만식 선생이 집필실로 썼다는 빈집은 그의 죽음 직전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궁벽한 모습을 하며 무너지고 있다.
소설가 채만식은 1902년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31번지에서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의 5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의 한학을 배운 후에 서울로 유학하여 1922년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부속제일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입사하여 재직하던 중 1924년 단편<세길로>가 ‘조선문단’ 에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장한 이후 창작생활을 병행하며
그의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1936년 기자 생활을 접고 개성에서 금광업을 하던 그의 형 준식을 찾아 갔지만 일 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의 집은 부농에서 차츰 가난하게 되어 갔고 1940년대 들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민족정서에 어긋나는 글을 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채만식의 일생에서 가장 혹독한 오점이 되고 있다.
체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일제의 제안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 슬프게 한다. 지식인에게 가난과 정치, 사상이란 것이 변화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란 것을 다시 채만식에게도 느껴야 하는 것이 먼 길을 달려 묘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연민의 정이 되리라.
1959년 소설가 이무영이 세운 채만식 묘비
그는 다작의 작가였다.
195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장편 11편, 중편 7편, 단편 69편, 희곡 28편, 잡문 74편, 평론 32편, 수필 76편, 꽁트 7편, 동화 3편, 동극 1편, 시나리오 2편, 좌담 3편, 기타 15편, 기행문 10편, 서평 6편, 방송극 1편 등 모두 345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1945년 낙향한 그는 고향에서도 부농이 아닌 가난뱅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인근의 이리(익산시)로 거처를 옮긴다.
이 무렵 그는 책상도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폐결핵으로 병든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글을 써야만 했다. 자신이 거쳐할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탁류>의 성공으로 인세(人稅)가 생기자 1947년 기와집을 마련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어렵게 마련했던 집을 팔아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친하게 지내던 시인 장영창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가난이 가져온 가련한 작가의 애절한 편지를 읽는다.
“장군, 인편에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한 20권만 보내 주소. 그러면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보고 싶은 것 일세”
-- 소설가 채만식 편지중에서
소설가 채만식 묘소
1950년 6월11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이 비록 예술가들에게 형극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리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지 말 것이며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주오”
가난으로 인한 폐결핵에 시달리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채만식선생의 고향 마을로 다시 돌아와 고샅을 걷는다.
사운거리며 퇴락하고 있는 임피향교에는 노인들이 마실을 왔지만, 나그네의 발자국들 듣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정자도 겨울에는 무용지물, 그러나 옛적 이 마을의 부흥기를 말해준다. 임피초등학교는 급식소 건물공사 마무리로 분주하다.
비록 겨울이지만 임피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임피는 과거와 현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마을이다.
언젠가 들꽃이 필 때 다시 찾아와 선생의 묘소에 헌화하기로 하고 그의 고향 마을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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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시인님! 차가운 날씨에 답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고나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와 민족과 정의를 선도하고 참된 인생의 좌표를 제시하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과 문학인들은 왜 모진 이념과 권력앞에 희생물이 되어야 하고 일부는 가난과 고독속에 죽어가야 하는가 ! 시인의 말씀처럼 그들의 삶과 문학이 우리를 슬프게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교수님 우리 역사는 질곡과 파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을 찾아 기억하는 일에
동참해 주셔서 큰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