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서울을 구더기가 끓는 공동묘지'로 보았기에 제목을 처음에 '묘지'로 했습니다.
[보충설명]
1. 공동묘지로 본 이유에 대한 설명
주인공 이인화가 서울을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으로 보는 안목은 그의 합리주의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이인화는 동경 유학생으로 동경에서 근대적인 신학문을 배웠고 또한 문학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이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근대 초기의 합리주의의 표현인 자아의 정립이나 개성의 실현이다. 그는 이러한 세계관에 대립되는 인습적인 봉건성이나 인간적 수동성, 대세에 휩쓸리는 물주체적 순응 등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인 사고의 소유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적인 합리주의가 인버네스 입은 형사나 부산 거리의 왜갈보, 환도를 찬 맏형, 동우회에 몰려다니는 노인들에게 적용될 때 그 모두가 무덤과 구더기로 보였던 것이다. 즉 식민지 조국의 현실이 '이매망량-온갖 도깨비나 귀신' 같은 존재가 뒤덮인 무덤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합리주의적 사고이다.
이 점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곳은 작품의 후반부에 주인공이, 카페 여급을 하다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일본인 여성 정자에게 쓴 편지에서이다.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하나나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용기와 희망을 돋우어 주는 것은 없으니, 이러다가는 이 약한 나에게 찾아올 것은 질식밖에 없을 것이외다.....대기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 치는 질식입니다."
따라서 그가 마치 쫓기듯 동경으로 귀환하는 결말도, 주인공이 일본에서 배운 서양의 근대적 합리주의 세계관과 봉건적인 서울 현실의 불화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만세전> 이해하기
이 작품은 <신생활> 잡지에 1922년 7월부터 <묘지(墓地)>라는 제목으로 2회까지 연재되다가 3회분은 삭제당한 채 이로 인해 잡지가 폐간되자, 1924년 <시대일보>로 옮겨져 <만세 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완결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서울과 동경을 배경으로, 한 지식 청년의 눈에 비친 사회상의 기록이다. 즉, 만세 운동 직전, 무단 정치라는 식민지 정책 아래 신음하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과 자아 비판적 각성을 냉철하게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째, 구성 방식이다. 모두 9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이 여행 과정의 한 장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로형 소설로 볼 수 있다.
동경 유학생인 주인공이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동경에서 서울로 왔다가 동경으로 되돌아가는 여로로 되어 있다. '동경 → 고베 →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탐 → 연락선으로 부산 도착 → 부산에서 술집을 기웃거림 → 부선서 출발, 김천을 거쳐 서울 도착 → 서울 집의 분위기 → 서울에서의 배회 → 아내의 죽음 → 동경으로 출발'이라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원점 회귀의 구조로 되어 있다.
둘째, 주인공 이인화의 고민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도 주인공의 번민을 자세히 그린 바 있다.
주인공 이인화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문학 지망생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인물로, 일본에 있으면서도 민족 의식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일본에서 귀국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일들을 목격하게 되고 점차 사회적인 인식을 확대, 현실적 안목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주인공이 인식한 현실은 포악한 무단 정치, 가혹한 수탈, 무자각 상태의 조선 민중, 구태 의연한 가족 제도, 겉멋이 든 신여성, 의리 없는 친일 군상 등이 뒤섞여 우글대는 이른바 '구더기가 끓는 묘지'였다.
조선의 현실을 목격한 그는 비로소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어떤 행동을 하는 인물은 아니며,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즉 암담한 현실에 대한 어떤 대응책이나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구원하는 항거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을 고발, 비판, 응시, 분석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셋째, 이 작품이 왜 근대 문학의 기점으로 거론될 만큼, '근대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는 보수적이고 인종적인 조선의 본처와 이지적이고 진취적인 카페 여급 정자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것은 조선과 일본이라는 대립적 구조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우선 빈사 상태에 있는 아내의 모습은 곧 암담하고 인습에 젖어있는 조선의 모습을 상징한다. 결국 학대받으며 괴로운 생활에 시달리다가 공동묘지로 가게 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카페 여급 정자로 대변되는 일본은 발전된 근대 문물, 즉 서구적인 근대성을 상징한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무덤 같다는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의식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그리기만 했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현실을 도피해 버리는 당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만세 전>은 크게 두 가지 의의를 가진다. 하나는 3.1 운동 직전의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에 의해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3.1 운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인공 이인화의 의식 구조를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나약하고 무기력한 의식 구조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염상섭은 이 작품에서 비정상적 인간의 생경한 이념 토로로 일관되었던 초기의 작품들 - <표본실의 청개구리>, <제야> 등의 세계로부터 진일보하여 현실을 실감 있게 묘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만세 전>은 염상섭의 2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 경향인 리얼리즘 소설의 구축에 교량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