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6장 나실인이 됨 94. 8. 17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6: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6: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6: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6:6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6:7 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6:8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6:9 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에 머리를 밀것이니 곧 제칠일에 밀것이며
6:10 제팔일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 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6:11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하여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
6:12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릴지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때에 그 몸을 더렵혔은즉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
6: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6:14 그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6: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6: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6:17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6: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6:19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6: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6:21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 예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하려니와 그 서원 한대로 자기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진으로, 군대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더러움을 해결하고 불순함을 해결하는 문제를 보았다. 문둥병은 더러운 병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뜻이다. 문둥병의 원인은 거역이었다. 거역이 있는 한 하나님의 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거역은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은 마치 거역이 자랑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순결의 문제였다. 그래서 이 순결의 문제는 절대적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해야만 진이 될 수 있다 하는 뜻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실인이 되는 문제인데 이것은 서원의 문제이다. 아무리 내가 깨끗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가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문제가 나의 서원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서원이 없이는 우리의 깨끗함과 절대적인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서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가장 완전한 나실인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에서 여러 나실인들이 있다. 사무엘도 나실인에 속하고, 삼손도 나실인에 속하고 이런 걸 알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의 계통을 밟아와서 가장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구별한 사람은 예수이기 때문에 이 나실인은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볼 수가 있다.
이 나실인은 특별한 서원으로 자기를 드리는 사람을 말한다. 더러움을 처리하고 그 다음에 순결한 사랑을 확보한 후에 나실인은 서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출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결정 안에서 “너는 제사장이 되어라.” 하고 결정을 해놓았기 때문에 아무나 내가 하고 싶다 해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사장은 출생에 의한 것이고, 나실인은 서원에 의한 것이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은 원칙상 하나님이 시작한 것이고 나실인은 사람이 시작한 것이다.
이 둘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것은 신약 안에서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걸 보게 된다. 신약이 오기 전에, 다시 말하면 성육신하기 전에는 출생은 출생이고 서원은 서원이다. 그래서 출생은 출생대로 따로 있고, 서원은 서원대로 따로 있었다. 그런데 성육신 안에서 비로소 출생과 서원이 하나가 된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은 출생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확고하게 출생했다 하더라도 서원을 통해서만 확고한 출생이 보충된다는 것을 증거 해주고 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졌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서원을 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일 수가 없다는 그런 말이 된다.
사무엘을 예로 들어볼 때,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어린 사무엘이 봉사를 하게 되고, 거기서 제사장 직분을 보충하게 되었다. 돕는 사람이 되게 되었다. 결국 엘리가 노쇠했기 때문에 젊은 사무엘이 그 노쇠한 제사장의 일을 도왔던 것이다. 이것은 그걸 의미하는 것이다. 엘리는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제사장이 된 사람이고, 사무엘은 서원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는 사람이었다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한 사람으로 성육신한 걸 보게 된다. 예수님은 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종함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이시라도 받으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했다 하더라도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기까지 그는 순종하심이 필요했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건 모순된 말이 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했다 해도 만일 그가 인정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 논리가 나오게 된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정과 자유의지, 이런 논쟁이 되게 된다. 예정이라는 교리 안에서, 신학 안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했다.’ 그런 말이 되게 된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 안에서 된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미 벌써 모든 것은 결정된 것이다. 제사장이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이 결정됐던 것처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섬기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도 결정됐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어떤 사람이 멸망할 것인가 하는 것도 이미 결정됐다.
이런 극단적인 논리가 예정론 때문에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정 교리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는 이런 이중 예정론이라는 게 나오게 됐다. 하나님은 이미 벌써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정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정해 가지고 한 일이니까 우리가 노력을 한다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이런 논리가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한편으로 이런 것이 나온다.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뛰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오직 은혜 베푸신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아, 사람의 노력이라는 건 전혀 필요 없구나. 하나님의 정하심에 달렸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 이런 것 때문에 결국 예정론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떤 데 가면, 스로보니게 여자나 이런 여자들이 예수 앞에 왔을 때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에 도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만일 자기가 사랑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그 부스러기를 얻어먹을 수 없을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가 또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의 문제다, 우리가 결정해서 가는 것이다 하는 논리가 나오게 되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하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이것은 철학과 신학의 해결되지 않는 미결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 안에서만 이것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이 아닌 교리나 생명이 아닌 이론 안에서는 이것은 영원히 통합이 불가능하다. 합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보니까 이것이 가능하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시기도 하나님의 아들로 났지만, 또 순종하심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더라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말하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났기 때문에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됐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다.” 이런 말도 나오게 된다. “진짜로 개로 출생했다면 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 또 “정말로 짖을 수 있는 것은 개다.” 이런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론적으로는 어떻게 해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우리가 개를 볼 때는 그것이 완전하다. 완전하게 개가 짖도록 태어났지만 안 짖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입을 딱 다물고 안 짖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는 짖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짖을 때는 자기 생각에 의해서 짖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예정되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우리의 뜻에 따라서 표현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표현해지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리 우리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개가 짖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짖을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개를 짖을 수 없도록 구조적으로 만들어놓았다면 개에게 아무리 짖을 수 있는 의지가 있다 해도 역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명을 볼 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생명 아닌 것을 볼 때는 문제가 된다는 걸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교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가 있다. 생명 안에서는 하나이고, 율법 안에서는 둘이다. 다시 말하면 이론에서는 둘이고, 실제 안에서 하나다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정말로 개처럼 짖을 수 있는 것은 개밖에 없다. 사람이 아무리 개처럼 흉내를 낸다 해도, 그래도 그것은 개는 아니다 이것이다. 개처럼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들을 때 개같이 들리기는 들려도 개들이 들으면 구별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르고 둔해서 구별을 못하지만 개들은 아마 사람이 개 짖는 흉내 내는 소리를 듣고 자기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로 짖는 것은 개고 개만이 짖을 수 있다, 이런 논리가 나오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됐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히 표현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내가 표현하려고 해야 표현이 되지, 내가 표현하려고 안 하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노래를 잘 하도록 성대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노래가 싫어서 안 하는 사람은 노래가 안 나오게 돼 있다. 그러나 반대로 성대는 좀 잘 못생겼지만 노래를 너무너무 좋아하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노래를 불러낼 수가 있다. 그러니까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 하는 말도 가능하고, 천재가 노력을 만든다, 그런 말도 역시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이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볼 수 있다.
출생에 의한 제사장과 나실인의 서원, 그래서 구약은 어쩐지 완전치 않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난 사람, 나실인은 자기의 서원에 의해서 된 사람, 이러니 이것이 영원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가 필요하고 성육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성육신 안에서 비로소 ‘아, 이것은 바로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구나. 제사장과 나실인은 하나구나.’ 이걸 알게 된다.
왕과 제사장도 똑같다. 구약 안에서는 왕과 제사장은 영원히 다르다. 왕이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해서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던 것이다. 또한 제사장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왕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제도 안에서는, 율법 안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어떤 조직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 맡겨진 고유한 임무는 다른 사람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걸 아무나 하면 안 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율법 안에서는 반드시 어떤 한계를 짓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예정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정해놓지 않으면 혼돈이 생겨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 좋을 대로 해버리게 되면, 제사장 되고 싶으면 제사장이 되고 왕이 하고 싶으면 왕을 하게 되면 어느 날 가서 이렇게 할 것이다. 자기가 제사장이 높임 받는다고 생각되면 “나는 제사장이다.” 이렇게 할 것이고, 왕이 좋다고 생각되면 “나는 왕이다.”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월권을 하는 것이 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 반드시 이것을 갈라놓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생명 안에서는 가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갈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신약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세계가 완전히 통일된다는 걸 보게 된다. 통일되는 세계, 이런 세계 안에서 우리는 나실인을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원할 때 ‘우리 자신이 서원 안 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 이것을 내가 결정 안 해도 저절로 되겠지.’ 이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어떤 걸 주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그것을 발휘해야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발휘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책임에 달렸다.
아무리 하나님이 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안 하려고 하면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걸 볼 때 우리의 책임이 소중하다는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전도? 가만히 있으면 전도가 되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내가 복음을 전할 부담을 느끼게 된다면 내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복음을 전할 부담도 없는데 복음을 전한다고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물론 않다.
내게 그런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나는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준비되어진 사람은 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좋은 복음을 갖고 있어도 입을 딱 다물고 일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발표되지 않게 될 것이다. 서원은 그래서 필요하게 됐다.
군대도 그렇다. 젊은 청년은 누구나 군대에 갈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만일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군대는 안 갈 수 있다. ‘나는 징역을 살겠다.’ 그러고 안 가버리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분명히 군대에 가서 훈련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합격을 했다. 이 말은 군대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나는 안 가겠다.” 이렇게 결정하면 형무소로 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고 안 가는 것도 내게 달려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가고 싶다 하더라도 신체조건이 맞지 않으면 또 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은 절대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표현해야 될 그런 의무를 갖고 있다.
이렇게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는 포도주와 관계된 모든 것을 끊으라는 것이다. 여기 성경을 보면 아주 자세하게 얘기를 해놓았다. “6: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6: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하여간 포도에 관계된 모든 것을 먹지 말아라 하는 뜻이다. 포도를 전혀 먹지 말아라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가? 포도는 성경에서 땅에서 소출한 소출 중에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에 속한다. 땅에서 소출한 것은 나를 배부르게 하는 것도 있고, 살찌게 하는 것도 있고, 힘을 내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포도는 나를 즐겁게 하는 것에 속한다. 그래서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모든 것에서 단절되어야 된다는 뜻이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모든 것에서 자기가 끊어져야 된다는 뜻이다. 그 근원까지, 씨나 껍질까지라도 버려야 된다는 말이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걸 말한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 나실인의 생활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이다. 군대는 전적으로 나라를 위한 사람이다. 그러면 전적으로 나라를 위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군대에 간 사람이 자기의 사사로운 의견을 제출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군대 의견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포도나무에 관계된 모든 것을 끊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즐거움, 자기를 위한 즐거움,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봉사할 수는 없다. ‘아, 내가 전도를 해보니 즐겁더라.’ 물론 즐겁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 때문에 전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내가 누구한테 말씀을 전해봤더니 참 좋더라.’ 그러니까 전해서는 안 된다. 그건 포도주가 섞인 것이다. 내가 괴로워도 전해야 된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말을 듣고 다시스로 가버렸다. 왜 그랬는가? 니느웨에 가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너무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자기가 원수로 생각하는 나라 앞에 가서 축복을 한다. 이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저놈은 망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앞에 가서 “아,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시느니라.” 이렇게 하려면 너무너무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는가. 내가 정말 축복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내가 축복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내가 아주 미워하지만 나는 축복을 해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나는 참 싫지만 해야 될 일이 있다. 내가 정말 싫은 사람이지만 만나야 될 사람도 있고, 내가 정말 싫지만 받아야 될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받는다. 나 좋은 대로만 한다. 이러면 나실인이 될 수가 없다. 제사장으로 섬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싫은 것을 할 수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서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싫은 것을 안 한다는 것, 특별히 우리 대구 교회에서는 싫은 것을 잘 안 하는 그런 것이 습관이 되어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좀 문제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포도주만 마셔 왔다. 그리고 늘 즐거운 것만 해왔다. 간증도 즐거워야 하고, 전도도 즐거워야 하고, 형제 대접하는 것도 즐거워야 하고, 모든 것을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좋은 거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고 우리가 괴로워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섬긴다는 것은 그것이다. 섬긴다는 것이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즐겁지 않아도 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닌가. 즐거워서 하는 것은 노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우리가 만일 에덴동산에 있었다면 우리는 섬긴다는 것이 노는 것이었다. 동산 안에는 먹는 것과 쉬는 것이다. 동산은 공원이라는 뜻과 과수원이라는 뜻이 있으니까 하나는 먹는다는 의미이고 하나는 논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이 세상이 타락한 세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로 섬기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싫은 것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동산을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싫은 것도 있다.
우리가 동산으로 다시 회복될 때, 우리가 계시록 22장으로 다시 회복될 때 그때는 우리가 싫은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앞으로 이런 말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전에는 좋은 것도 있었고, 싫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좋은 것도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했고, 싫은 것도 내가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완전한 동산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날 우리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없어질 거라는 것이다. 내가 전에 싫었던 것이 동산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바꿔지는가? 전에 싫었던 것까지라도 동산 안의 생활로 내가 들어갈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즐거움이 될 거라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상당한 부분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세상 사람보고 하라고 하면 도저히 못할 일인데 우리는 대단히 즐겁게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동산 안으로 그만큼 가까이 갔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전에 우리는 누구한테 복음을 전하라 하면 못할 일인데 지금은 그것을 즐거운 일이 됐다. 이 말은 우리가 동산으로 가까이 갔다는 걸 의미한다.
어느 날 가면 우리는 괴로운 일이라는 건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모든 일이 다 즐거운 일만 될 것이다. 영원토록 괴로운 일이 있다는 건 아니다. 영원토록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 안 드는 일도 해나가야 그 다음에 우리는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없어지게 될 거라는 걸 알 수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것만 봐도 그렇게 생각한다. ‘야,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대단히 즐거운 일인데도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 그만큼 우리는 멀어져 있다.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멀리 지금 와 있다는 걸 볼 수 있고, 이것이 지점이 어디쯤 와 있는지는 확실히 계산할 수가 없다. 세상과 동산 사이에서 지금 어디만큼 왔는지, 삼분의 일만큼 왔는지, 삼분의 이만큼 왔는지, 오분의 삼만큼 왔는지, 오분의 사만큼 왔는지,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이 다 즐겁다면,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생각하는 일까지라도 우리는 즐겁다면 그건 아주 동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형제를 섬기는 것이나 이런 일들이 전혀 괴롭지 않다. 그럴 때는 동산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내게 원수가 전혀 없다. 내가 보기 싫은 사람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동산에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정적으로 그것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있을 수 있다.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 해서는 안 된다. 싫다고 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걸 통해서 더 좋은 세계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세상 안에서는 괴로운 일일 수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라도 십자가는 괴로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섬겨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일 우리 대구교회 식으로 생각한다면 ‘아니, 그건 아직 때가 안 됐으니까 안 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구교회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느끼는 것하고 좀 다를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느끼는 것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느끼는 것하고는 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역시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괴로워도 그는 해야 될 일이 있었다.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이건 결코 어떤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된다.” 그런 말로 말한 게 아니고, 우리의 봉사가 우리 힘에 조금 겨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봉사가 우리 힘보다 조금 넘칠 수가 있다. 그렇지만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꼭 포도주만 마시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포도주를 자유롭게 마시는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포도주를 금지해야 된다는 걸 말한다. 언젠가 포도주를 마음 놓고 먹어도 상관이 없는 날이 오게 된다. 6장 마지막을 보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날이 돌아온다. 그 때까지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아야 된다는 걸 말한다.
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을 하려면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과정을 지나야 한다. 고3이라는 과정은 쓸苦자라고 할 수가 있다. 한방약에 보면 苦蔘이라는 게 있다. 그건 쓴 蔘이라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이 너삼이라고 한다. 苦蔘이라는 것은 무지무지하게 쓴 것이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高3과 苦蔘은 일치하고 있다.
그래도 어차피 통과는 해야 된다. 쓰다고 안 먹어버리면 대학교를 못 가니까 어차피 그걸 전해야 된다. 그런데 대학교를 가게 되면, 우리나라 대학교 같은 경우는 특별히 고3병이 완전히 해결되는 곳이다. 다른 외국의 대학은 고3병보다도 대학이 더 어려운데, 우리는 고3병이 인생 과정 중에서 제일 어렵고 고3만 지나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너무너무 편하다.
밤낮 놀고먹자 하는 것이 대학이다. 주5일 수업밖에 안 하고, 밤낮 놀고, 미팅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데모를 하려면 데모하고, 소리 지르려면 소리 지르고, 별 짓을 다하는 데가 대학이다. 남의 강의실 앞에서 꽹과리를 두드리고 소리를 쳐도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이런 곳이 대학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완전히 무법천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무법천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무법천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고통이지만 고통이 아닌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분명히 어려운 것인데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닌 그런 세계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는 걸 볼 수가 있다. 그 동안까지 우리는 포도주를 거절해야 된다. 자기의 즐거움을 우리가 참을 수 있어야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기 즐거움에 매여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해버린다. 그렇게 해버리면 하나님 일이 망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 “아, 내가 좋으니까 했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할 말이 없지 않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잘못해서 교회에 누가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럴 경우에 자기가 교회에 누가 된다는 걸 생각했더라면 괴로워도 그걸 참았어야 되는데 교회에 누가 된다는 걸 생각 안 했기 때문에 자기 좋은 것만 해버렸다. 괴로운 걸 참지 안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어디로 돌아오는가? 그 누가 교회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면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집이 불이 타는지 뭔지 그걸 모른다. 그래서 촛불 켜놓고 장난하는 것이 재미있으면 불이 나고 안 나고를 생각을 못한다. 생각을 못하니까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서 촛불 켜놓고 놀다가 화재가 나버리는 것이다. 요즘에는 그런 화재가 없지만 옛날에는 대부분의 화재가 아이들이 촛불 켜고 놀다가 난 화재였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결국 불이 나는 것이 뭔지 이걸 모르는 것이다. 자기 집에 불이 나면 나와서 “야, 신난다.” 하고 구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한 것 때문에 교회가 누를 받아서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겠는가. 어른이 된다면 자기가 책임감이 있어야 된다.
장래를 생각할 수 있어야 되고, 미래를 알 수 있어야 그것이 어른이지 전혀 모르는 것은 어른이 아니다. 어린아이와 똑같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린아이로 있는 시간이 좋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간은 일과성으로 넘어가야 되지 영속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시간이라는 걸 볼 수 있다. 계속적으로 있을 시간은 아니다. 우리가 어느 날인가는 우리도 성장해서 우리가 책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렸을 때는 “촛불을 가지고 놀지 말아라.” 그러면 대단히 괴롭다. 불평불만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울게 된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자기 스스로가 촛불을 가지고 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포도주를 마실 때가 된 것을 말한다. 분명히 어린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어째서 어른들은 촛불을 안 가지고 놀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것이 고통스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날 가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는 일이 대단히 쉬운 일이 되게 될 것이다. 꼭 그것이 율법적인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다. 우리의 생명이 성장하는 문제라는 걸 볼 수가 있다.
우리는 나실인의 서원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걸 볼 수가 있다.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아하, 내가 이만큼 서원하면 이만큼 어른이 되어 가면, 또 이만큼 서원하는 동안에 내가 이만큼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감당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리의 분량이 커져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이길 힘을 갖게 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면역기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균실 안에서 산다면 얼마나 병에 안 걸리고 좋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무균실 안에서만 살다가 나오면 금방 죽어버리고 만다. 문명인들은 아프리카에 가면 금방 죽는다 하는 말이 있다. 또 아주 원시림 속에 살던 사람은 뉴욕만 와도 금방 죽어버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깨끗한 데 살다가 너무 더러운 데 오면 병이 걸려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냥 자기 좋을 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포도주를 먹지 않아야 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참아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두 번째는 머리를 밀지 않는 일이다.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다.” 왜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머리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머리, 우두머리 하는 말은 권위이다. 어느 회사의 長이라 하면 우두머리이다. 머리라는 것은 권위를 말한다. 그래서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은 절대적인 권위 앞에 순종하는 걸 말한다. 권위 앞에 순종하는 걸 말한다.
고린도 전서 11장에 보면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라.” 그런 말이 나온다. 왜냐하면 자기 위에 권위가 있다는 것을 상징하라는 것이다. ‘아, 내 위에 남편이라는 권위가 있구나.’ 그걸 상징하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천사에게 유혹을 받는다 하는 것이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이런 말이 나왔다. 이것은 권위가 위에 있다는 뜻이다.
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권위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권위이다. 권위 자체라는 것이다. ‘창조자고 피조물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나를 100% 만든 절대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우주가 절대적 권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는 절대적 권위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절대 권위 안에 있다는 걸 말한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절대적 권위가 있다는 말이다. 절대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내 의견과는 전혀 관계없이 절대적 권위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아닙니다. 나는 내일 장가가야 되는데 오늘 저녁은 아닙니다.” 이렇게도 할 수 없는 그 절대 권위가 있다는 걸 말한다. 우리의 어떤 것도 거기다 開陳할 수 없는, 우리의 육에는 손톱만큼도 開陳이 될 수 없는 절대 권위 하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권위를 그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권위의 어떤 질서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산에 가서 신비를 경험하려고 생각한다. 뜨거운 불을 좀 봤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뜨거운 불이 확 지나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생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이다. 불 받아라 하는 사람도 있고, 생수 받아라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이다. 이런 걸 경험하면 ‘아, 하나님이 있구나.’ 이렇게 느끼게 된다. 방언을 해도 ‘아, 하나님이 있구나.’ 이렇게 느끼게 되고, 몸이 뜨거워져도 ‘하나님이 있구나.’ 이렇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는 하나님을 느끼려고 생각하지만, 권위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
권위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불이나 바람이나 이런 것으로 아는 것은 감각적인 문제지만, ‘하나님은 권위이시다.’라고 내가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내가 인격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알아야지, 감각적으로 알아 갖고는 안 되는 것이다.
감각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을 모른다. 눈이나 코나 귀를 전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이 어떻게 생겼으며, 귀가 어떻게 생겼으며, 코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다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권위 안에 복종하는 것이다.
誓願이라는 글자가 이런 글자라고 한다. 꺾을 折 자 밑에 말씀 言자를 한 것이 맹세한다는 誓자다. 그러면 꺾을 折자는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손 手자 옆에 도끼라는 글자(도끼 斤)를 써놓았다. 손으로 꺾는다는 말이다. 도끼로 꺾는다는 것이다. 그 꺾어진 말을 하는 것이 서원이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권위 앞에 꺾여진 사람, 그 사람만이 서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서원한다는 말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 앞에 내가 꺾여 지겠습니다. 절대권위 앞에 내가 꺾여 집니다.’ 이걸 말하는 것이다.
머리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밀지 말라는 말이 나오게 됐다. 우리는 여기서 권위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을 해야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권위 말고 하나님의 권위를 대리하는 권위가 있다. 대리권위가 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다.” 그렇게 말할 때 이건 대리권위를 말한다. 직접권위가 아니고 대리권위이다.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슬린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슬린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걸 말할 때 바울에게 있어서 직접적인 문제들은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로마정부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로마정부가 그 때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건 세속적인 권위이다. 세속적인 권위이지만 이것은 대표권위라는 것이다. 대리권위라는 것이다. 이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권위에 순종하는 우리의 입장, 우리의 마음을 볼 때는 어느 권위이든지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다 하나이다. 그러니까 내가 만일 대리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나는 진짜 권위에도 순종하지 않는 걸 말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성질이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절대권위인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도 내가 꺾여야 되는 문제이고, 또 대리권위에 순종하는 문제도 역시 꺾여야 되는 문제이다. 어느 것도 내가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은 꺾이는 문제이지, 꺾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반장한테 순종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내 의견하고 틀려도 반장이니까 할 수 없이 내가 듣는 것 아닌가. 거기에 꺾이는 거나 하나님께 꺾이는 거나 똑같다는 것이다. 내가 꺾인다는 것은 내 의견하고 다르기 때문에 꺾이는 거지, 내 의견하고 똑같다면 꺾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나님 의견과 내 의견이 틀릴 때 내가 꺾인다는 게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 저 권위는 나쁜 권위야. 악한 권위야.’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벌써 꺾이지 않았다는 걸 말한다.
“저건 불의한 권위니까 내가 굴복할 수 없다. 저건 불의한 권위니까 내가 순종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도 나는 불의한 것에서 꺾일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어떤 권위에 꺾일 수가 없다는 걸 말하기 때문에 이것이 한 계열이라는 걸 말한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참으로 순수한 권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지 않는 권위도 있다. 세상에는 불의한 권위가 많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순종하는 우리의 심성 안에서 볼 때는 어떤 권위나 꺾이는 원리는 똑같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권위에 꺾인 사람은 저 권위에도 꺾일 수가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하였다. 위에 있는 권세라는 것은 다 나보다 힘센 걸 말한다. 정부도 불의한 정부라 하더라도 나보다 큰 것이 정부이다. 불의 하더라도 내 힘보다 큰 것이 정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 큰 것에 꺾이는 것이 권위에 꺾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내가 나보다 큰 것에 대항을 하고 있다. 이건 내가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걸 말하는 것이다. 이 대리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 안에는 이것에 대해 참으로 말이 많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때는 이런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일본정부가 하라는 대로 그냥 기독교인이 순종할 것이냐, 아니면 거역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이 문제를 가지고 또 논란이 생겼다. 논란이 생겨서, 한편에서 신사참배를 하자 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용해서 “봐라,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복종해야 된다.” 이렇게 말하고, 한편에서는 “불의한 권세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주장했다. 그래 가지고 팽팽히 이것이 맞선 것이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해석하면 이래도 모순이고 저래도 모순이 된다. 그러면 불의한 권세 앞에 내가 굴복한다는 것은 불의를 방조하는 것이 아니냐, 불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가 또 생기게 된다. 그러면 또 하나님은 불의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싫어하는데 나는 불의를 방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협력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내가 오히려 방해를 주는 사람이다.” 또 이런 말이 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론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도 대단히 어렵다. 딱 갈라서 ‘이건 물이고, 이건 불이다.’ 라고 가르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 말씀이 아니면 배울 수가 없다.
하나님에게 굴복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구체적으로 뭘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리권위를 가지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결코 불의를 좋은 것이다, 잘한 것이라고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걸 갖다가 우리가 조장해 주라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 하냐 안 하냐 하는 문제이지, 불의한 권세에게 복종 하냐 안 하냐 그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의 지금 목표는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서원을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에게 꺾이느냐 안 꺾이느냐 하는 문제이지, 결코 내가 세상에 꺾이느냐 안 꺾이느냐 이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세상에서 꺾일 수가 없다면 하나님에게도 꺾일 수가 없는 것 아니냐 이것이다.
만일 세상에는 내가 절대로 꺾이지 않아도 하나님에게는 100% 꺾일 수 있다. 그러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는가? 그것이 가능하지를 않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세상은 현실이고 하나님은 관념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세상 권위에 대해서 절대로 순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에게 순종한다.’ 이럴 때는 관념적인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현실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분명히 눈으로 볼 때 현실로는 불순종하고 있는데, 관념상으로는 순종한다고 이렇게 핑계를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의한 권세지만 거기에 순종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아, 내가 이 불의한 권세에도 순종해야 될 사람이구나.’ 이렇게 안다면 참된 권세에는 더욱 순종할 것 아닌가. 불의한 권세를 보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야 말할 것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건 너무너무 쉬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 권위 앞에, 대리권위 앞에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론적으로는 쉬울 것 같아도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리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기에 쉬운 일이라는 걸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증거가 된다는 걸 볼 수가 있다.
사실상 우리는 세상의 어떤 대리권위 앞에 순종할 때에 ‘내가 순종하면 저 놈이 더 잘 되겠지. 내가 순종하면 악이 더 조장되겠지. 내가 도와주면 그 놈이 더 기세를 부리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도 또 있다. ‘그러니까 저것을 꺾어야 되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내 속에 뭐가 생기는가 하면 이상하게 거역하는 마음이 생겨버린다.
참 이상하다. 분명히 이론은 옳은데, ‘저 불의한 권위를 내가 인정하면 불의한 권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불의한 권위를 기승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저것을 억지로 꺾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러면 말이 된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꺾으려고 하면 그 때 내가 뭐가 생기는가? 내 안에 강퍅한 마음이 생겨버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였다. 불의한 권세가 지배하는 그런 사회라고 할 수도 있다. 정치라고 말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불법적인 정부였다고 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 이건 좀 위험한 말이지만, 예를 들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은 국민의 절대적인 의사에 의해서 선출된 사람만이 그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의 절대적인 의사하고 관계없이 어떤 무력을 가지고 정부를 구성했다. 이럴 때 자유민주주의적인 입장에서는 불법적인 정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30년 동안은 불법적인 정부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니까 한편에서는 저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이런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물론 말은 옳다. 분명히 불법적인 것이 맞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대항하려고 하면 뭐가 되는가? 내가 강퍅해져버린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세상 정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저 사람도 세상 정권이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럴 경우에는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권위문제가 아니니까 누가 정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가 될 것이며, 누구의 주관대로 국가를 이끌어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하고 관계된 문제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는 마음이 강퍅해져버린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런 입장에 섰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가? 마음이 부드러워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강퍅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을 하고 그들을 위해서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될 사람들이 반대로 그들을 증오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증오하는 것은 서로 상대적으로 싸우는 사람끼리 증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증오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중보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입장과 세상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예를 들어서 비기독교인 학생들이 그런 정부를 대항해서 싸운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세상이니까 싸울 수 있다. 중보자가 아니니까, 서로 상대적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니까 싸우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그렇게 싸울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세상과 상대적으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세상을 내가 하나님에게 중보 해야 될 사람이다. 중보 해야 될 사람이 가서 싸워버리면 뭐가 되겠는가? 중보자가 될 수가 없지 않겠는가. 내가 중보자가 되려면 그 사람하고 상대적으로 싸우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중보가 안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야 중보가 되지, 그 사람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싸울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말기에 와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는 결과를 가져와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보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결코 이것이 세상의 악이 좋다는 말도 아니고, 세상의 불법이 좋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이 누가 해야 될 일이냐 하는 문제였다. 세상은 그것을 서로 같이 맞싸워야 될 사람들이고, 제사장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맞싸워야 될 사람이 아니고 이것을 하나님에게 중보 해야 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참 이상하다. 우리가 세상적인 관념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놔두면 그것이 얼마나 잘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우리가 이걸 꼭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우리가 경험을 해보면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도와주면 너무너무 잘 될 것 같은데 잘 되지 아니하고, 더 도와주면 더 빨리 망해버린다. 그게 참 이상하다.
독일은 이차세계대전 때 불과 5%밖에 안 되는 나치당이 독일 전 인구를 동원해서 이차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럴 때 지성 있는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독일 인구의 95%나 되는 기독교인들이 어째서 불과 5%밖에 안 되는 나치당, 다시 말하면 술 취한 놈한테 운전석을 맡기느냐?’ 이런 문제였다. 그래서 본 헤퍼 같은 사람이 그런 것을 주창했다.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아주 촉망받는 사람이었고,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독일로 들어갔다. 왜 그랬는가? 독일이 기독교 국가가 아니면 모르지만 95% 이상의 기독교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어째서 5%의 술 취한 놈한테 운전석을 맡기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차에 탄 다섯 명이 다 죽을 것이 아니냐. 술 취한 놈은 죽어 마땅하지만 네 명의 승객이 있는데, 이 네 명의 승객을 보호해야 되지 않느냐 이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모든 영화를 버리고 독일로 들어갔다. 그래서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적발되어서 결국 옥중에서 죽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책이 ‘옥중서신’이나 “나를 따르라.” 이런 것들이다. 그걸 보면 구구절절이 독일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너무너무 독일을 사랑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단순히 어떤 독립운동가, 혁명가, 아니면 운동권,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아니다. 너무나 독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절절이 흐르는 옥중에서 쓴 서신을 보면서 그 사람이 독일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잡혀서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보자의 위치하고는 다른 거라는 것이다. 중보적 위치가 아니었다. 독일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지만 중보적 사람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만일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혁명가가 될 것인가? 히틀러를 암살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우리는 이치로 생각해볼 때 분명히 히틀러는 죽어야 한다. 히틀러만 없다면 세상은 평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 태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은 거기서 히틀러에게 죽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히틀러가 승승장구를 해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히틀러가 망한 것은 히틀러를 반대하는 독일의 반대당원에 의해서 히틀러가 망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너무너무 自高해져서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불의한 자는 가만 놔두면, 도와주면 더 일찍 망하는 것이다. 빨리 망한다.
제정러시아가 그렇게 망했다는 말이 있다. 정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제정 러시아에 희랍정교회 사제가 있었다. 이 사제가 황실에 들어가서 황실을 부패케 했다는 말이 있다. 온갖 죄악을 저지르도록 그렇게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잘한다고 조장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제정러시아는 빨리 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망할 사람은 도와주면 빨리 망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탈선될 열차는 빨리 가게 할수록 빨리 탈선한다. 우리가 생각하면 탈선할 열차를 좀 붙잡아 놔두면 안 되겠는가 싶은데, 탈선할 놈은 붙잡아 놔두면 탈선할 시간만 지연되는 것뿐이지 어차피 도로 탈선한다는 것이다. 고장날 차, 고속도로 달려다가 바퀴가 빠져서 고장 나서 사람이 죽을 차, 이런 차를 가지고 ‘아이고, 고속도로는 안 달려야지. 고속도로 달리다가는 위험하니까 안 달리고, 골목길만 살살 다녀야지.’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자동차로 하여금 불의한 일을 더욱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더욱더 연장시켜주는 것이다. 오히려 빨리 고속도로를 달려가서 넘어져버려야지 다시는 그런 자동차는 없어질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참 이상한 것은 그걸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막지 않는다. 이상하다. 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일 때 막지 않았다. 우리 생각 같으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보고 멱살을 잡고 “야, 이놈. 이거 내 아들인데 네가 그럴 수 있나? 너는 내 녹을 먹고사는 놈이 그러면 너는 죽는다.” 이랬으면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랬으면 그 부패한 제사장의 직무는 지금까지 계속됐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속 붙잡아 주었으면 그 부패한 제사장은 지금도 여전히 제사장 노릇을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놔두었다. 그냥 나두니까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망할 자는 망하게 놔두지 붙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한다 하더라도 불의한 자를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서원할 수도 없고, 권위에 복종할 수도 없다. 잘못한 사람한테 내가 복종한다면 그 잘못한 것이 더 기가 날 것이 아니냐 하는데, 잘못한 것을 처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가 처리하면 내가 불의해져버린다. 분명히 저쪽이 잘못했어도 내가 손을 대면 내가 악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이 처리해야 완전하게 처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처리하면 꼼짝없이 처리가 되고 완전하게 처리가 되는데, 내가 처리해놓으면 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가보면 다른 문제가 또 생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할 일, 이걸 구별해야 된다. 내가 할 일은 이거고, 하나님이 할 일은 저거다. 그러니까 설사 불의한 자가 더욱 불의하더라도 그건 내가 처리할 문제가 안 된다. 하나님이 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뭘 믿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다.
내 위에 불의한 권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에 더 높은 권위가 있다는 걸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 안 그렇겠는가. 예를 들어 내 위에 있는 놈이 나한테 와서 내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 놈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는 권위가 또 그 위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내게 “내일 너를 체포하겠다.” 하고 왔다. 그런데 그 위에 또 권위가 있다. 그 놈은 오늘 저녁에 체포해갈 권위가 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위를 신뢰하는 문제이다.
그런 얘기가 있다. 6.25때의 일인데, 어떤 동네 사람들을 음력 8월15일 추석날 밤에 완전히 다 죽여 버리기로 작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하게 무슨 일이 생겨서 그걸 못하게 됐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반대로 다 죽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일 죽일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오늘 죽일 권세를 가진 분이 또 있다는 것이다.
권위 위에는 권위가 있고, 권위 위에는 또 권위가 있다. 그래서 권위 위에는 영원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 위에 있는 권위에게 복종한다 하더라도 그 권위를 처리할 것은 그 위에 있는 권위가 처리한다는 것이다. 내가 예를 들어 9급 공무원이다. 내 위에 계장이 있는데, 계장이 좀 불의하다. 그래서 계장이 나한테 불의한 일을 계속 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계장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러면 계장 그 놈은 잘 되어 간다는 것이다. ‘아, 내가 계장 이 놈을 도와주면 이놈이 불의한 놈인데, 점점 더 잘 되어가겠구나.’ 이렇게 생각 안 하겠는가.
그런데 계장 위에 과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장이 불의한 걸 누가 보고 앉았는가 하면 과장이 보고 앉아 있다. 내가 밑에서 내개 간섭을 해서 “계장님, 이거 하면 안 됩니다. 이거 안 됩니다.” 하면 이 놈이 불의하기는 불의한데 불의한 것이 표현이 안 된다. 표현이 안 되니까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내가 잘 도와주면 이놈이 얼씨구 좋다 하고 잘 할 것 아닌가. 그러면 불의가 더욱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과장 눈에 확실히 보이게 된다. 어느 날 가면 과장이 철퇴를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권위 위에는 또 권위가 있으니까, 그 권위 위에 또 권위가 있으니까 그렇다.
세상의 정치나 이런 걸 보더라도 결코 우연한 일은 없다. 뭔가 하여간 어떤 우연한 것은 없다. 그래서 절대로 안 망할 것 같은데, 어느 날 가면 망해버린다. 독재를 하고 강압적인 정치를 하고 나쁜 짓을 하고 이러면 한없이 갈 것 같지 않는가. 그런데 오래 가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로 선정을 베풀고 하는 나라가 오래 가지, 악정을 베푼 나라치고 오래 간 나라가 없다. 이걸 볼 때 어떤 원리가 있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가 그것을 막는 것인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좌우지간 역사는 그걸 증명한다는 걸 볼 수 있다. 절대로 오래 가지는 않는다. 오래 잘 되는 건 아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리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처리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이다. 내가 처리할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이다. 내가 처리하면 내 심령이 강퍅해져버린다. 그래서 내가 범죄자가 되어버리게 되고, 내가 하나님하고 문이 막혀버린다.
처음에 나도 그랬다. 한 4년 동안 싸울 때 처음에는 하나님하고 문이 잘 열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옳고 저쪽이 그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힘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뒤로 가니까 이상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문이 막히더라는 것이다. 왜 막혔는가? 내가 강퍅해지니까, 내 마음속에 강퍅한 것이 생기니까. 싸우다보니까 강퍅해졌다.
지금 우리 사회도 그렇다. 극한적인 대립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이 굉장히 강퍅하다. 왜냐하면 싸우다보면 사람은 강퍅해진다. 아무리 순한 사람도 부딪혀 싸우다보면 강퍅해지게 된다. 뺨 때기 때리는 것이 있는데, 둘을 세워두고 번갈아 가며 하나씩 때리라고 한다. 그러면 처음에는 둘이 서로 한 반 친구니까 세게 때릴 수가 없으니까 가만히 때린다. 그런데 나는 가만히 때렸는데, 저 놈이 때리는 게 더 아프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치밀게 된다. 그러면 나는 조금 더 강도를 높여 때리게 된다. 그러면 저 놈이 또 분이 나서 조금 더 강도를 높이게 된다. 계속 높이다보면 뒤로는 완전히 싸우게 되는 것이다. 원수진 놈처럼 싸워버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그런 사회가 되었다.
옛날에 침팬지들을 훈련시켜 복싱을 시키는 것을 보았다. 글로버를 끼워서 링 위에 올려 복싱을 시켰다. 그러면 처음에는 저희들끼리 장난을 했다. 권투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장난을 할 것 아니겠는가. 장난을 하는데 맞다보니까 이놈이 화가 나서 뒤로는 완전히 떡이 되어서 둘이 물고 안 떨어졌다. 싸우는데 강퍅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 ‘싸우면서도 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리라.’ 이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미워하면서도 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리라.’ 절대로 안 된다.
‘나는 미워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절대로 안 된다. 기도가 막혀서 되지 않는다. 그걸 하면서도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말로 기도를 하면 막혀서 기도가 안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지금 강퍅한 마음이 있고, 내 마음에 미운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하겠느냐 이것이다. 그건 기도가 될 수가 없다. 절대로 기도가 막혀서 안 나온다.
정말로 영이 맑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남을 미워하자마자 자기 기도가 막힌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는 못 견디게 될 것이다. ‘야, 괴롭다. 차라리 내가 용서하고 말지. 내가 이걸 하고 는 하나님께 문이 막히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 안에 사는 사람의 생활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영 안에 살지 않고 육안에 산다면 미워하는 것이 더 앞서지 하나님께 막히는 것이 더 앞서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막히는 감각은 둔하고, 미워하는 감각은 세다는 것이다. 이러면 우리가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권위에 순종한다는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걸 말한다. 대리권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대리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 대리권위라는 것은 반드시 선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악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악한 것일지라도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악한 것이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 악한 권위라 하더라도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한테 “나는 못 박힐 수 없다. 이놈들아, 네가 누군데 나를 못 박느냐?” 했으면 십자가를 못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십자가를 질 사람이 아니지만 못을 박는데 순종했다는 것이다.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였더라.’ 그랬으니까 이사야 53장에 응한 것이다.
만일 그가 가야바의 법정에서나 십자가 앞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이놈들 말이지, 네가 나를 누구로 알고 이러냐?” 이랬으면 이사야 53장이 도무지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사야 53장을 이룰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을 이룰 사람이 누구냐, 누가 이 말을 이루겠느냐 이것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그걸 이루어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낸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성취할 사람이 없으면 그 말은 권세가 없다. 안 그렇겠는가. 예수가 없다면 사탄이 와서 하는 말이 “이런 말이 어디 있느냐?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가 도수장에 끌려가면서 잠잠하겠느냐?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이라니. 인간이 그럴 수가 있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을 딱 성취하고 나니까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성취해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말을 성취해주는 사람, 자기를 정당하게 하는 사람, 이걸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고 인 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참되신 분이라는 걸 누가 인 치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인 치게 되는 걸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만일 “아니, 사람이 말이지. 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해? 그건 인간도 아니지. 그건 하나님이 너무 무리한 거야. 그건 하나님 말씀도 아니야.” 이래버리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참 말하는 자로 만들었다. 그 안에 와서 어느 것도 아니라함이 없고 오직 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앞에 짤림- 대리권위 위에는, 높은 곳에는 참 권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짤림.
권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가정 안에는 가정 안에 권위가 있다. 교회 안에는 교회 안에 권위가 있다. 이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아, 나는 하나님께 순종한다.” 이건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세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세상은 지금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온 세상은 어떤 권위의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끊어져버리면 모든 게 파괴되어 버린다. 전부가 다 파괴되어 버리고 말아버린다. 비록 불의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것마저 이것이 끊어져버리면 다 무법천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느 세상이든지 간에 권위가 없는 세상은 절대로 없다. 우리는 무법천지를 경험해보았다. 해방 직후에 무법천지였다. 그러니까 때 그건 정말 무서운 세상이었다. 힘 있는 놈이 장땡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경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가 생기니까 질서가 생기게 되었다. 권위가 생기니까 인정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나쁜 권위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 그래도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지만 그것마저 없애 보라. 그건 무법천지가 되는 것이다. 무법천지처럼 무서운 게 없다. 6.25사변 때 무법천지를 경험했고, 8.15 해방 직후에 무법천지를 경험했다. 그건 정말 힘 있는 놈이 장땡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어디 가서 말할 데가 없는 것이다. 소송할 데가 없다. 파출소에 가서 불 지른 놈들을 생각해보면 ‘저놈들이 파출소에 불 지르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다.
우리 집에 도둑놈이 오면 누가 잡아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들 집에 도둑놈이 오면 누가 잡아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파출소가 나빠도 파출소에 불 지르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 불의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대리권위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순경들이 다 성인군자이고 예수님이고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순종을 안 하면 무법천지가 된다. 무법천지가 되면 그 피해가 어디로 돌아오는가? 나한테 다시 돌아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통경찰들을 방해한다든지 하면 그 피해가 다시 나한테 오는 것이다.
이 사회라는 것은 무언의 계약이다. 법률적인 계약이고 또 무언의 계약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받기 위해서 계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약을 파기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전체는 권위로 조직되어 있다. 이 권위가 파괴되어 버리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내가 만일 대리권위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내 집에서 내 식구들이 나의 대리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니, 당신도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데 나도 안 해야지.” 이러면 뭐 할 말이 없지 않는가. 왜 나한테 순종하지 않는가 하면 “아니, 당신이 불의하니까 순종하지 않는다.” 이래버리면 불의 앞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불의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자기의 불의를 지적하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권위로 유지되고 있지, 선과 악으로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니다. 참 이상한 법칙이다.
그래서 誓願한다는 것은 내가 꺾인다는 것을 말한다. 꺾을 折자, 원할 願자, 꺾여 지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려니까 부득이 보이는 것을 가지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안 보이는 뜬구름 잡는 것을 얘기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게 무언지 모른다.
내가 여기서 하루 종일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얘기를 해봐야 무슨 감이 잡히겠는가.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대리권위를 가지고 얘기를 해야 그 말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되게끔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세상 권위를 옹호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 다음에는 주검을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죽었을지라도 그 시체를 접촉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나실인이 서원을 하는 날 동안은 거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보다도 하나님이 더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부모는 내 위에 가장 절대적인 분이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더 절대적인 게 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일단 서원을 했을 때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보다 우선한다는 뜻이다. 군대에 가는 것도 부모보다 우선한다. 내가 부모에게 순종하려면 군대에 못 갈 수가 있다. 그렇지만 부모의 권세보다 정부의 권세가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이 군대에 간다.
옛날 시골할머니들 같은 경우에는 자식을 보내는데 얼마나 애가 타겠는가. 그래서 애걸복걸하고 울고 한다. 그러면 내가 부모 말을 들으려고 군대를 안 갈 것이냐, 아니면 부모 말을 못 들어도 군대를 갈 것이냐 할 때 우리는 군대를 할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의 권위보다도 정부의 권위가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
언제든지 권위는 더 높은 권위가 더 우선한다. 그러니까 만일 어떤 경우에 “아니, 나는 부모에게 순종하려니까 군대에 못 가겠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정부가 그것을 봐 줄 수가 있는가? 봐 줄 수가 없다. “야, 이놈아. 너 효성은 지극하다만 나라 일이 더 급한데 어찌하겠느냐? 그러니까 너는 안 가면 총살이다.”라는 것이다. 지금은 군대에 안 가면 3년간 징역을 가는데, 옛날에는 군대에 안 가면 총살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났을 때 안 가면 총살이다. “너 여기서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의 권위보다 국가의 권위가 더 크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 국가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대국적인 거니까 그렇다. 부모와 나와의 관계는 가정문제지만 국가와 나와의 문제는 전체 국민의 문제이다. 내가 군대를 안 가면 온 국민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이 다 죽는데 가정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부모에게 불순종하지만 할 수 없이 군대를 가야 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내가 나실인으로 서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건 부모에게 불순종한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부모의 권위보다 더 높은 앞에 있는 권위에게 내가 맹세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혈족의 시체라도 접촉하면 안 된다는 말은 사망을 절대로 어떤 이유로도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죄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사망이라고 했다. 죄 지은 놈은 회개할 기회가 있다. 죽은 놈은 살아날 수가 없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살아만 있다면 회개할 수가 있다. 가롯 유다라도 안 죽고만 살았더라면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죽어버리면 헛일이다. 죽으면 끝이다. 그러니까 주검이 가장 심각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검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사망이다. 내 아내가, 혹은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내 자식이 어떻게 함으로 인해서 내가 사망에 빠져버렸다. 그러면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동정과 애정 때문에 그렇다. 그 동정과 애정 때문에 나는 사망에 빠져버린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서원한 사람으로서는 사망에 빠지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에 빠지면 전쟁에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도 사망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정이나 동정이나 이런 것에 의해서 우리가 사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냘픈 아내가 집에서 울고 있다. 인정상 어쩔 수가 없다. 이래서 우리가 군대에 안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군대는 가야 된다. 어쩔 수 없이 가야 된다. 이건 무정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애정보다 더 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어떤 애정 때문에 사망에 또 빠질 수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그 사람을 다른 사람이 때렸다. 그러면 나는 그걸로 인해서 걸려 가지고 사망에 빠질 수가 있다. 교회 안에서 그런 경우가 있다. 아무리 교회라 하더라도 더 친한 사람도 있고, 좀 덜 친한 사람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친한 사람을 누가 와서 나쁘다고 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형제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 이 말이 나온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그 말을 했을 때는 괜찮은데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형제인데 누가 와서 그 형제를 나쁘다고 하면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 교회에 대해서 회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야, 교회가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사망에 빠져버린다. 이것이 바로 애정에 의한 사망이다. 가령, 누가 내 식구들보고 나쁘다고 한다. 보통 다른 사람들보고 나쁘다고 하면 괜찮았다. 그런데 내 식구들보도 나쁘다고 하면 ‘야, 교회가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걸리기 시작하면 사망에 빠져버린다. 그러면 ‘에이, 내가 그런 교회에 뭐하러 가.’ 이렇게 된다. 그러면 ‘그런 군대 뭐하러 가.’ 이 말과 똑같다. ‘내가 그런 법궤를 뭐하러 메고 가.’ 이건 똑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친족이라도 시체를 접촉하면 안 된다 하는 말은 우리가 애정에 의해서, 정에 의해서 사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군대다 이것이다. 내가 기분이 나빠도 군대는 군대 아닌가. 내가 기분이 상해도 적이 오면 전쟁에 나가야지, 기분이 나쁘다고 전쟁을 안 할 수가 없다. “야, 오늘 기분 나쁘니까 전쟁하지 말자.” 이럴 수가 도저히 없다.
예를 들면 장사는 내가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말자.” 이럴 수 있지만, 전쟁은 기분 나쁘다고 안 할 수가 없다. 기분이 나빠도 해야 되고 좋아도 해야 되고 그렇다. 그래서 전쟁 안에는 사망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교회 집회를 하는데, 어떤 사망도 이걸 지배해서는 안 된다. 오늘 교회 집회하는 날인데, 집안에서 거리끼는 게 있어 사망이 찼다. ‘에이, 교회 가야 뭐하겠는가? 안 간다.’ 그러면 ‘군대 가야 뭐하겠는가?’ 이것하고 똑같은 이치이다.
구세군은 집회를 하는 걸 보고 전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쟁하는데 빠져버리면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도 사망은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친척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누구든 간에 사망을 동정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내가 사망의 동류가 돼서는 안 된다. 사망에 빠진 사람은 사망에 빠진 대로 놔두고 나는 전쟁에 나가야 된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전우라 하더라도 총에 맞아 죽어버렸다. 그러면 나는 그 때 어찌해야 되는가? 이 사랑하는 전우를 붙들고 애걸복걸하고 통곡을 하고 울어야 되는가? 인정상으로는 그래야 된다. 같은 同鄕에서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너무너무 친한 사람인데 한 부대에 와서 군인이 되었다. 군인이 되어서 있는데 그만 옆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너무너무 슬픈 일이다.
이 친구를 놔두고 내가 무슨 전쟁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 친구가 죽어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전쟁을 하다니! 그건 인간도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면 군대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시체를 놔두고 어떻게 가겠느냐? 이걸 갖다가 그래도 내가 싸고 가서 고향 산천에 묻어주어야지.’ 이러면 군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죽었으면 할 수 없이 버리고 가야 된다.
어떤 경우에는 확인사살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총에 맞았는데 회생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 놔두고 가면 적에 의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하고 죽이고 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전쟁할 때는 그런다고 한다. 이건 절대로 동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큰 것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항상 이것보다 더 큰 것,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친족이라 하더라도, 부모라 하더라도 그 시체를 접하면 안 된다. 나실인은 시체를 접하면 안 된다. 나실인은 그걸로 인해서 사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한다.
두 번째 문제는 예기치 못한 주검을 접했을 경우이다. 내가 생각지도 안 했는데 그만 상여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고 가는데 그만 상여가 지나갔다. 교회 올 때 참 기분 좋게 왔는데 어떤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서 기분을 상하게 한다. 말씀을 듣는데 옆에서 잔소리를 한다. ‘야, 이 사람이 십년이나 나온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대구 교회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렇게 하다보면 사망에 빠져버린다. 이것은 예기치 않는 것이다.
너무너무 기분 좋게 전쟁하려고 들어오는데 보기 싫은 사람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예기치 않은 일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분 나쁜 말을 던지더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예기치 않는 주검을 접촉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도 처리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서원한 날이 있는데, 서원한 날 동안에 금지령이 있다. 내가 서원을 해놓았는데 중간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면 제 칠일에 다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서원을 다시 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더럽혀져 버렸으면 그걸 그냥 가지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걸 완전히 원점으로 돌려 가지고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예를 들어 백일 동안 서원하기로 했는데 90일 만에 그만 예기치 못한 주검을 만나버렸다. 열흘만 채우면 될 텐데 그렇게 됐다. 그랬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되돌아가야 된다. 90일은 무효라는 것이다. 90일은 무효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된다. 이러니 얼마나 주검의 문제가 심각한가 하는 것을 말한다.
조금도 주검이 묻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쟁하러 나가려면 사망이 묻으면 안 된다. ‘오늘은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하니까 안 나가야 되겠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걸린 것 때문에 교회를 못 나오는 사람이 있다. 기껏 몇 달간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래도 또 가야지.’ 하고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그날 걸린 사람이 생겨버렸다.
하필이면 그날 보기 싫은 사람이 나와서 간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걸려 가지고 몇 달 못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그런 사람이 있다. “하필이면 재수 없이 그날 나옵니까?” 아마 그 사람한테는 그 문제를 처리하려고 그런 것 같다. 그게 한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인데, 번번이 그렇다. 간신히 어떻게 마음을 잡아서 나오면 그날 딱 걸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은 걸리는 게 자기 팔자니까, ‘아, 내 팔자를 고쳐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되지, 걸린 사람이 없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대구 교회에 영원히 걸릴 사람이 없는 경우가 없다. 언제든지 있기는 있을 거니까 자기가 안 걸릴 사람이 되어야지, ‘6개월 정도 쉬었으니까 이제는 걸릴 사람이 없어졌겠지.’ 이러고 와서는 안 된다. 와봤자 또 걸릴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 사망이 오는가? 죄라는 것은 우리 욕심 때문에 저지른다. 사망은 왜 오는가 하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선악과가 가장 주된 원인이다. 교회 안에서도 선악과 때문에 사망에 걸린다. ‘아, 저 사람,’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나쁘다. 안 좋다.’ 이러면 내가 사망에 빠져버린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선악과는 절대적인 방해물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하나님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했을까? 그 때는 참 이해하기 어렵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진을 구성하려고 해보면, 교회를 구성하려고 해보면, 교회가 되려고 해보면 이 선악과가 결정적인 방해물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형제를 판단해진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렇고, 이 사람은 이렇고, 자꾸 판단이 생기면 그 형제와 나 사이에 사망이 오고가버린다. 그래서 교회가 안 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교회생활이 안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는 문제가 없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판단할수록 사람들은 똑똑하다고 했다. 직장에 가서도 그런 사람 보면 “야, 너 참 똑똑하다. 너 나서서 말 한 자리 해라” 다 이랬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더욱 우쭐대서 더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사람은 ‘아이구, 저거 맹물이야.’ 이렇게 다 취급해버린다. 쳐주지도 안 한다. 그런데 뭔가 좀 똑 부러지게 선악을 가르는 사람을 보면 다 “야, 너 괜찮다. 대의원 해라.” 하고 추천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대의원을 할 데도 아니고, 앞에 나와서 선동할 곳도 안 되고, 도무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도무지 쓸모가 없고, 자기가 교회생활이 안 되는 것이다.
왜 선악과에 대해서 그렇게 우리는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가? 나는 처음에 그걸 잘 몰랐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때는 교회생활이 별로 없었으니까 몰랐었다. 그러나 그 선악과라는 것이 이상하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선악과는 절대로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것이 선악과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개인 간의 판단 때문에 선악과가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뒤로 보니까 그것이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문제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지식은 세상에서는 대단히 위대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있으면 안 되는 문제다 하는 것이다. 선악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는 결국 함께 살 수 없게 되고 함께 설 수가 없다는 걸 보게 된다.
군대로 편성하는 데는 선악을 가지고는 군대가 편성될 수가 없다. 군대는 오직 이 편이냐 저 편이냐 그 문제밖에 없다. 누가 선하냐 누가 악하냐 이것이 없다. 내가 비록 악한 군대에 소속됐을지라도 ‘아, 우리 군대는 악해.’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비록 악한 군대에 소속했을지라도 군대는 용감해야 된다.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나가야 되지, ‘아이고, 우리 군대는 나쁜 군대인데.’ 이 생각을 하면 군대가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총살감이다.
그러니까 군대라는 곳은 선악이 없다. 오직 명령밖에 없다. 그러니까 서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머리는 좋고, 잘하고 잘못하는 게 다 보이고, 자기 위의 상관이 자기보다 머리가 나쁜데 머리가 나쁜 놈이 지시하니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군대에 가서 생활을 못하고 자살을 제일 많이 한다. 군대가 뭔지 모르니까 그렇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잘 통했지만 군대는 그게 아니고 명령이다. 아무리 나보다 학벌이 낮아도 소위이면 나를 명령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된다. 또 복종을 해야 군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선악을 아는 지식은 군대에 전혀 무용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에는 이것이 무용하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이것이 무용하다. 교회는 진과 마찬가지이다. 전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건 우리가 철저하게 대항하고 철저하게 부수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부수기 위해서 우리는 좀 잘못했던 것들을 용납했던 것이다. 잘못한 줄 뻔히 알면서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좀 개망나니인 줄 알면서도 그냥 우리가 용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했다 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것을 가르다 보면 선악과가 또 나오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들이 좀 생활이 엉망인 사람도 있고 이랬는데, 그걸 그냥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엉망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고, 그것을 가르다 보면 선악과가 너무 불거지니까 그래서 그 선악과 때문에 그냥 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걸 눈치를 못 채고 ‘그래도 괜찮으니까 말하지 않겠지. 아이고, 목사님이 말 안 하는 걸 보니까 괜찮으니까 말 안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괜찮아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선악과 때문에 안 한 것이다. 그걸 자꾸 하다보면 우리의 선악과가 막 뛰쳐나와서 엉망이 되니까,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낫지, 좀 잘 못하고 있는 게 낫지.’ 해서 그냥 둔 것이다. 선악과로 서로 싸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비난할 때 그렇게 말한다. “야, 교회를 십 년이나 다녔다는 사람들이 생활을 보니까 엉망진창이더라. 교회 집회하는데 가보니 떠들고 질서도 없고 사람들이 교양도 없고 이렇더라. 뭐 신앙 좋다 하는 사람들이 그 모양이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냥 놔두었는가? 그런 것을 일일이 가르려고 하다보면 교회가 안 되고 만다. 그건 장례식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차피 장례식보다도 떠드는 잔칫집이 낫다 하는 것이다. 잔칫집에 가면 시끄럽고 좀 복잡하다. 복잡하지만 그래도 조용한 장례식보다는 낫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 것이지, 결코 좋다는 뜻은 아니다. 또 우리가 자랑할만한 문제도 못된다. 어디 가서 우리는 이렇다고 속없이 자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자랑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으니까, 그것보다 나으니까, 주검보다 나으니까, 사망보다 나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처리하는데 제 칠일 날은 이걸 처리하고, 제 팔일 날은 비둘기를 가지고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다. 비둘기, 제 팔일, 이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다. 제칠 일로 끝내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다시 기르기 시작해야 된다. 지금까지 90일 길렀으면 많이 길렀을 것이다. 그런데 똑 깎아버리고 다시 길러야 된다. 칠일 날은 청산하고 팔일 날은 비둘기를 가지고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사망에 접하면 언제든지 그것이 무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전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무효가 되어버린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다 무효가 된다. 그러니까 사망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잘 살았지만 어느 날 죽어버리면 잘 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으면 잘 산 게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이란 것은 그렇다.
죄는 져도 안 죽은 거니까 고칠 수가 있다. 그런데 사망은 고칠 수가 없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사실 원칙적으로 생각하면 사망에 빠진 놈은 영 지옥으로 가야 된다. 한번 사망에 빠져도 영 지옥에 가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다시 돌아와서 또 시작하라 하는 기회를 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원리원칙대로 해버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에서 사망에 안 빠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면 그러니까 사람은 그날로 끝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생각해봐도 죽으면 끝나는 거지, 죽으면 다시 살아나올 수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되돌아갈지라도 사망을 없애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제물을 다시 드리라는 것이다. 왜 죄를 졌다고 하는가? 그것은 서원을 파기했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것이다. 왜 속건제를 드리는가? 그것은 실수했다고 하는 허물이다. 그래서 허물을 사하기 위해서 속건제를 드리게 된다. 이 두 가지 제물을 드리고 다시 우리는 군대로서, 제사장으로서 가야 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군대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죽음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군대만은 꼭 살아있어야 된다. 절대적으로 살아있어야 된다. 반쯤 살아있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이다.
군대를 갈 사람은 건강하지 않으면 못 간다. 혈기가 왕성하고 생명이 왕성해야 군대를 가지, 만일 반쯤 시들시들한 사람은 군대를 못 간다. 사망이 접해서 시들시들한 사람은 군대에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되돌아가라는 것이다. 백일 중에서 90일을 하나님께 서원해서 잘 이행했다 하더라도 내가 만일 92일째 불의에 생각지 않는 때에 주검을 봤으면 되돌아가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기서 주검을 봤으면, 주검을 만졌으면 내 생명 속에 주검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병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군대에 갈 수 없으니까 다시 되돌아가서 또 건강한 사람으로 다시 와야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군대는 절대적으로 살아있는 군대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살려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살려내려면 절대적으로 내가 살아있어야 된다. 내가 만일 반쯤 살아있다. 그러면 나는 반쯤밖에는 하나님을 못 살려낸다. 내가 절대적으로 살아있어야 절대적으로 살아낼 수가 있다.
절대적인 서원, 절대적인 생명, 이것은 왜 필요한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절대적인 것이 필요하게 된다. 하나님을 반쯤 살아내는 것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간신히 살 수 있다. 간신히 연명하며 숨만 쉬고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내면 안 된다. 그렇게 살아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해버린다. 안 그렇겠는가. 우리가 그럭저럭 교회를 다닌다. 그럭저럭 서원을 한다. 그럭저럭 깨끗하다. 그럭저럭 우리는 봉사한다. 이러면 세상에 나가보면 힘이 없다. 가서 복음을 전하면 힘이 안 생긴다. 상대방이 무시를 해버린다. 짓밟아버리고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적으로 살아있으면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꼭 다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병든 하나님을 내놓는다든지 병든 예수를 내놓는 것이다. 내가 병들어 있으면 나는 예수를 내놓는 것이다. 내가 시들시들한 사람 같으면 시들시들한 예수를 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얕볼 것 아니겠는가.
내가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절대적인 헌신이 있는 사람이라야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가 있다. 반대를 할지라도 “너의 충성만은 내가 인정하겠다.”, “내가 예수는 안 믿겠지만 너 같은 삶이 되어야 되겠다.” 이렇게는 되어야 될 것 아닌가. “왜냐하면 네가 절대적으로 사는 걸 보니까 정말 그건 존경스럽다.” 말은 못 알아듣더라도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들시들해 가지고 단무지 말라버린 것처럼 이렇게 있으면 사람들이 웃고 가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적당히 교회 다녀요. 나는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되고, 이렇게 해도 돼요. 대구 교회는 참 좋은 데예요. 왜냐하면 가고 싶은 날 가고 안 가고 싶은 날 안 가도 돼요.” 이렇게 이래저래 해버리면 시시하게 생각해버린다. 우리는 그 사람을 데리고 오려고 그렇게 하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그 사람한테 너무 강력하게 얘기해버리면 혹시 그 사람이 튕겨버리면 어쩔까 이런 생각이 나서 불안해져서 “아이구, 나오다 안 나오다 해도 됩니다. 적당히 나와도 되고 헌금도 안 해도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시시하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무시해버린다. ‘야, 그런 것 가지고 와서 신앙이라고 하냐?’ 이렇게 생각한다.
이방인들 가운데는 ‘아, 거 편하다. 놀러갈 만하다.’ 이런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정말로 그건 창피한 일이다. ‘우리는 헌금 안 해도 된다.’ 이건 너무너무 창피한 일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헌금을 더한다고 해야 된다. 그 사람들이 못하는 걸 우리가 할 수 있어야 되지, 안 한다고 하면 ‘야, 저런 걸 가지고 신앙이라고 와서 전도하고 있냐?’ 이렇게 생각한다. 창피만 당하고 온다는 걸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절대적인 삶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비록 모른다 할지라도 자기들이 절대적으로 못산 것에 대해서, 세상만이라도 절대적으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못살지 않는가. 어딘가 몰두하고 싶은데 못하지 않는가. 정말 자기가 뭔가 죽을힘을 다해서 해보고 싶은데 못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 뭔가 그래도 자극을 준다. ‘야, 저 사람은 그래도 뭔지 모르지만, 예수가 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절대적으로 사는구나.’ 이건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시시해버리면 우습게 생각해버린다. ‘그런 건 나한테도 많다.’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서원하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살아내는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끝날 날이 돌아오면 완전하게 제물을 드리게 된다.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 즉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제물을 다 드린다. 그러고 난 다음에 머리털을 회막문에 다시 밀고, 요제를 드리고 난 후에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서원을 마치는 날,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는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전의 자유와 다른 것이다. 서원하기 전의 자유라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도 하고 싶은 자유이다.
그런데 서원이 다 끝나고 난 후의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은데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 저 사람은 참 자유롭게 산다. 뭐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고, 걸린 것도 없고 그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된다. 그래서 어설프게 그걸 흉내 내려고 하면 야만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내가 자유롭게 사는 것을 보고 그걸 그냥 흉내 내면 야만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나를 볼 때 야만적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지 않는가. 내가 자유롭게 살지만, 자유롭게 산다 해서 내가 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하기 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살면 야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런 풍습이 더러 있다. 나를 보고 모두 왔으니까 내가 어떤 율법이나 규범이나 이런 데 매인 것 같지 않으니까 ‘아, 참 편하고 좋다. 나도 이제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이 된다. 뒤로 한참 가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 가는 건지 잘 모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서원을 마치는 날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 자유는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니다. 십자가 후에는 완전한 부활이 있었다. 그 부활은 완전하게 자유 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것이 중들의 자유하고 틀린 거라는 것이다.
우리 형제들 중에서 그런 문제가 생겨났었다. 절대적인 자유라는 문제 때문에 율법이 완전히 없어지고 나니까 모든 것이 율법에서 해방된 그런 자유가 한참 유행을 했었다. 그런데 그런 걸 보다 보면 불교에서 중들이 자유 하는 것하고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 금강경 독송회를 간다든지 이런 일이 생겼다. 가보면 그 사람들도 자유롭다. 그래서 ‘야, 우리하고 비슷하다. 대화가 된다. 교제가 된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 그것과 다른 것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자유여야 된다.
지금 울산 교회에서는 그런 문제 때문에 문제가 되어 있다. 한쪽에서는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그 절대적 자유라는 것은 금강경 독송회 같은 자유이다. 불교 같은 그런 자유이다.
중들을 보면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 술 먹고 싶으면 가발 하나 쓰고 가버리면 그만이다. 가발 쓰고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나가면 된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아무 문제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어디 가서 술 냄새만 조금 맡아도 가책이 생긴다. 냄새만 맡고 와도 ‘아이구, 이거 내가 안 맡을 냄새를 맡았는데,’ 이러고 회개해야 되는데 그것이 참 귀찮은 일이 아닌가.
세상에 나가 보는 것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성의 자랑과 이런 것인데, 한참보고 나면 ‘아, 또 회개해야지.’ 이렇게 한다. 그런데 중들이 사는 걸 보면 아무 거리낌이 없고 아무 죄책감도 없다. 그 사람들은 죄라는 개념이 없다. 업이라는 개념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너무너무 편하다. 어떤 형제들이 그런 것을 하더니 이것하고 혼동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자유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서원 후에 번제물과 속죄 제물과 화목제물을 회막 앞에서 완전하게 드리고 난 후에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물을 전혀 안 드렸는데 포도주만 자유롭게 마시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우스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 교회만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다른 교회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교회는 아예 철통같이 하니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회개해야 된다. 안 하고는 찝찝해서 못 견딘다. 어느 교회에 가니까 새벽기도를 하고 저녁기도를 또 하는 것이다. 새벽에 와서 ‘오늘 하루 죄짓지 않게 해주옵소서. 나쁜 걸 보지도 말게 해주옵소서. 생각지도 않게 하여주옵소서. 냄새도 맡지 말게 해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나간다. 나가지만 하루 종일 나가 있으면 그렇게 되겠는가. 그러면 저녁에 와서 또 해야 된다. ‘오늘 내가 보지 않을 걸 봤습니다. 맡지 않을 걸 맡았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또 하고 잠을 자야 된다. 그러니까 일반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자유가 잘못 봤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게 됐다.
우리는 완전하게 제물을 드리고 난 후에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제물도 한 가지만이 아니다. 번제물과 속제물과 속건제물과 요제와 전체를 드리고 난 후에 그 다음에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가 있느니라.” 이것이 바울이 말한 그런 말이다. “내가 먹을 권이 없겠느냐, 내가 마실 권세가 없겠느냐?” 하는 말이 이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에게 그것이 거리낌이 된다면 안 하겠다.” 이런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먹을 수도 있는 자유도 있고, 안 먹을 수 있는 자유도 있다. 문제는 내가 안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마실 수는 있는데, 안 마실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바울은 마실 수도 있고 안 마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싸우는 것도 그렇다. 싸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싸울 수도 있고 안 싸울 수도 있으면 문제가 안 된다. 그렇지만 싸울 수는 있는데 안 싸울 수 없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참을 수도 있고 안 참을 수도 있어야 되는데, 안 참을 수는 있는데 참을 수는 없다. 이러면 곤란하다. 이것이 다 십자가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가 싸운다 하더라도 싸운 것이 아니고, 먹는다 하더라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자유이다. 이 사람은 결국 남에게 손상을 줄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사람은 남을 유익케 할 자유만 가지고 있다. 남을 살려낼 자유만 가지고 있지 남을 해할, 망하게 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간다면 참으로 자유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갖지 못한 자유를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남을 망하게 하는 자유가 아니라 전부 남을 살려주게 하는 자유가 될 것이다. 남을 살려줘도 내가 괴롭지 않는 자유이다. 세상의 자유는 내가 남을 살려주려면 내가 괴롭다. 내가 남을 자유 하게 하려면 내가 괴롭다. 그래서 남에게 자유를 못 주는 것이다.
소대장이 소대원에게 자유를 주려면 자기가 괴로워야 된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억압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가면 소대장이 소대원에게 자유를 줘도 자기가 괴롭지 않는 자유가 될 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자유이겠는가? 십자가 이후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 자유만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먹을 권세도 있고 안 먹을 권세도 있다. 내가 왜 고기를 못 먹겠느냐. 나는 지식이 있으니까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이걸로 인해 가지고 너희가 걸림이 된다면 내가 안 먹겠다.” 는 것이다. 안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지만 궁핍에 처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궁핍에서만 잘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풍부에서도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풍부도 자기 것이 아니고 궁핍도 자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궁핍할 수도 있고 풍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십자가로 말미암지 않으면 어떤 사람은 풍부할 때는 찬양할 수 있는데 궁핍할 때는 찬양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궁핍할 때는 찬양할 수 있는데 풍부할 때는 찬양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오는 걸 오면 자기가 망하고 안 되고 이러면 교회를 찾아온다. 대구교회를 알기 때문에 ‘여기 가면 위로를 받을 데가 있겠지.’ 그래서 찾아온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괴로울 때는 절대로 안 오는 사람이 있다. 뭔가 좀 잘 풀릴 때 오는 사람이 있다. 그게 참 이상하다. 그것이 성격 문제인지 은혜 문제인지 확실히 구별하기 곤란하다. 그걸 너무 구체적으로 구별해버리면 또 걸리는 사람이 생기니까 구체적으로 구별하지는 않겠다. 하여간 그런 유형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망하면 온다. 그래서 ‘아, 저 사람. 망하면 올 거다.’ 우리가 그걸 예언할 수 있다. ‘아, 저 사람. 틀림없이 망하게 되면 올 거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망하게 되면 아주 안 오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잘 될 때까지 기다리고 안 오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참 이상하다. 그러니까 ‘뭔가 좀 되고 풀린다.’ 이러면 얼굴이 비쳐진다. 그런데 안 나오는 걸 보면 그 사람은 뭔가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얼굴을 안 비쳤다 하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서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궁핍도 내 것이 아니고, 풍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 되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못되는 것도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상관이 없다. 그런데 내 일이 되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자기가 창피하다든지 자기가 자랑스럽다든지, 이것이 있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잘되나 못되나 똑같을 것이다. 내가 못될 때도 있고, 잘될 때도 있다. 내가 일을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내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항상 잘되는 것은 아니다. 잘 못될 때도 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수가 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낙심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했으니까,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안 줘서 그렇지.’ 이렇게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또 ‘이것이 내 문제가 아니고 내 분깃이 아니니까 그렇구나.’ 이걸 깨달을 수가 있다. 내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됐다. 그러면 ‘아하,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이걸 얼른 깨달아야 된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한다. 그것도 멍청한 짓이라는 것이다. 빨리 깨닫고 ‘아하, 이거 내 길이 아니구나.’ 이렇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도준이가 자기는 참 열심히 공부했는데 안 됐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너무 열심히 한 줄을 모르고 기대를 너무 안 해줘서 섭섭하다고 했다. 열심히 했는데, 내가 총력으로 집중해서 했는데 안 됐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낙심할 일이 아니고, ‘아, 이것이 내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이 또 있구나.’ 그래서 내가 그렇게 전향을 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 사람만 전향할 수 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전향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미련이 또 남는다는 것이다. ‘아, 조금만 더했으면 될 텐데. 다섯 시간 잔 걸 네 시간만 잤으면 되는 건데.’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네 시간만 자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네 시간만 자고 해봐야 된다. 해보고도 안 되면 빨리 전환을 해야 된다.
그런데 여섯 시간쯤 자고 해서 안 됐다. 그러면 ‘아이고, 내가 다섯 시간만 자면 될 텐데 안 됐다. 또 해봐야지.’ 이러면 평생 그러다가 만다. 그러니까 아예 그러지 말고 내가 몇 시간만 자면 목숨이 연명 되겠는가 계산해서 죽을 판 살판 모르고 해보고 안 되면 ‘아, 이건 내 분깃이 아니구나. 내 분량이 아니고 내 갈 길이 아니구나. 다른 길이 하나님께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깨끗하게 돌아서야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싸워서 지면 무릎을 꿇고 굴복한다. 그것이 좋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표면적인 것만 보고 “어떻게 두 얼굴을 가질 수 있냐? 어제까지 이렇던 사람이 오늘 와서 확 바꿀 수 있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사무라이 정신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진 사람한테는 완전하게, 이긴 사람한테는 완전하게 100%이다.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져놓고는 한참 돌아가면서 욕을 한다. 그 자리에서는 욕을 못하고 못 대들고 한참 달아나서 거기서 욕하고 달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비겁하다는 것이다. 졌으면 그 자리에서 졌다고 선언해야 된다. 그리고 얼굴을 다시 돌려서 웃는 얼굴로 그 사람을 대해야 된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 사람의 얼굴에 표정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승부가 분명하니까 그렇다. 방금 전까지 화를 내다가도 자기가 안 되겠으면 딱 얼굴을 바꿔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나온다. 이걸 보고 너무 간사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졌으면 완전히 지고, 이기면 완전히 이기고, 그것이 깨끗하지 않느냐 이것이다. 져놓고 변명하는 것처럼 구차한 것이 없다. 잘못해놓고 변명하는 것처럼 구차한 게 없다. 잘못했으면 아주 확실하게 잘못했다 하는 것이 깨끗하고 좋다. 그래야 그 사람은 확실하게 잘 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항상 지저분하면 항상 깨끗할 수 없지 않는가. 어느 특파원이 일본 사람들에 대한 나쁜 점을 책으로 썼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사무라이 정신에서 나왔다, 승패가 확실한 사람들한테서 나온 것이다 하는 것이 생각났다.
그것이 꼭 세상에서 완전한 것이다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참고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굴복할 때는 완전하게 굴복하고, 내가 반항하려면 확실하게 반항해보고, 굴복하려면 확실하게 굴복하고,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서원하더라도 확실하게 하고, 내가 주님을 따르더라도 확실하게 따르고, 그래야만 내가 남한테 가서 할 말이 있다. 안 그러면 어정쩡하게 가서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하다가 보면 듣는 사람이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교회를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의 헌신이 분명하고, 우리의 서원이 분명해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분명한 서원 안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시원찮으면 다른 사람들을 시원찮은 자리로 이끌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실인으로서 서원한다는 문제는 하나님의 결정을 우리가 돕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제사장으로 태어났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지어놓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을 통해서 이것을 완성해낸다는 것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엄숙하게 서원해야 될 것이다. “나는 주의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만 내가 살겠습니다. 당신 아닌 것을 내가 원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위해서만 내가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걸 볼 수 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당신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당신을 담을 그릇으로, 당신을 도와야 할 군대로 우리는 살기에 합당하도록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만들어주신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하게 주님께 이것을 드려 가지고 당신의 일을 협력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일을 우리가 돕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이제 계시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쓸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는 자로 그렇게 우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쓰려질 자로 알고 우리 자신을 머리를 깎고 서원을 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려진 자로 살기를 원하고, 그 서원한 날 동안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유가 당신 앞에 우리 자신을 꺾어바침으로 말미암아서 와지는 자유가 되게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은 자유가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제한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평안과 당신의 제한 속에서 갖는 자유를 갖게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크신 경륜 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전진하는 군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나라를 위한 삶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진을 위한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