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0.8.8
산행지 : 괴산 도명산
일행: 수봉산우회
(無住相의 山情無限 51차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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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랫만에 산에 갔다. 2월달 운제산을 갔다 온 이후로 이런 저런 날들과 중복되어 산을 잊다시피 살았다.
이번 달 산행지를 보니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화양계곡이 포함되어 있어 눈에 번쩍 띄었다.
내 평소에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꼭 한번 답사해봐야 겠다고 염원해 오던 중 산우회에 따라가면 금상첨화에 안성마춤이 아닐까 했다.
7시반에 출발한 우리버스는 상주를 거쳐 문장대 나들목을 나와서 백두대간을 넘어서 한참을 가서야 목적에 다달랐는 모양이다
글에서만 읽었던 화양계곡의 어디 언저리쯤인가 싶었는데 계곡 중상류부근의 자연학습원인 모양이다.
차에서 내리니 방향감각도 어럼한데다 흘러가는 물이 생각과 반대로 꺼꾸로 내려가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계곡의 입구가 아니고 상류쪽에 우리를 내려놓았는 것이다.
우암 송시열이 천하절경인 화양계곡 중에도 화양구곡에 은거하며 후진양성을 했다하는데 이게 계곡의 개념은 아니 올시다다.
우선 가믐이 계속되었는지 어제 그제 비라도 왔는지 이렇게 넓고 많은 물이 꾸정물 같다. - 첫인상부터 시원찮다
이건 계곡이 아니고 천(川)이라 해야 하겠다. 우리가 백두대간이라고 이름을 바꿔부리기 전에는
이게 소백산맥일텐데 산맥이 어디로 이어가다 말고 또 다른 산맥이 건너편으로 내달리고 있을 상 싶다.
남부지방에 사는 우리들은 산맥이라 해봐야 몇시간 거리밖에 안되니 자연스레 계곡도 짧다.
일단은 산행대장의 지시에 따라 잘 포장된 임도로 30여분 내려가니 학소대라는 바위가 나오는데 鶴巢臺란다.
학이 알을 낳는 곳 쯤으로 이름을 지었는 모양인데 이게 화양구곡 중 8곡이라 한다.-실망스러워 사진도 안찍었다.
이제부터 도명산 산행이 시작이다. 학소대 다리를 건너 들입구 들어선다.
내가 오늘 산우회원들과 등산을 오면서 화양계곡과 송시열을 자꾸 연관시키면서 그에 몰입하다 보니
산기분을 전혀 낼 수 없었는데,아 이제 여름 산의 시원한 내음을 맡으며 등로에 접어든다.
모처럼 산을 타면서 오늘같은 복날에 고생되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을 했지만 어디가나 울창한 나무잎들이
따거운 햇살을 가려 주어 땀이야 소나기오듯 떨어질지라도 기분은 상쾌하다.
간간이 산 모서리를 비껴지나갈 때 마다 더없이 장쾌한 백두대간 연봉들이 나좀 보고 가란듯이 머리를 빼곡이 내밀고 있고,
재작년인가 장마비가 엄습했을 때 무진무진고생했던 대야산도 저만치 서서 다시 한번 청명할 때 오라고 하고 있고,
비산비야의 영남의 산들만 자주 보아오다가 호쾌한듯 누웠는가 하면 우뚝 서고 앞으로 솓아지는가 싶으면
옆으로 내달리는 화강암 암봉들이 더없이 시원타.
나는 이쪽 산으로는 몇번 와보지 않았지만 작년 10월달의 조령산 신선봉도 좋았는데 도명산 정상에서 사방팔방으로
막힘없이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모처럼만에 살갑다.
넓적한 암반에서 동문도반들과 나누는 점심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즐겁다.
사람은 세가지 인연을 잘만나야 한다했다.
부모와의 인연,배우자와의 인연,자식과의 인연, 이 인연이야 천생인연이다. 내가 만드는 인연이 아니다.
그런데 흔히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세가지 인연은 후천적인 인연이 아닐까 싶다. 내가 스스로 지어야 하는 인연이니까.
같은 일가로 태어나서도 혈족간에 처신을 바로 해야 인정을 받고 같은 고을에 태어났어도 행실이 발라야 욕먹지 않고,
이왕 다니는 학교지만 전통있는 학교를 나와야만 될 터이니 참으로 우리 동문들과의 인연이 내게는 중하다.
특히 산을 즐기는 岳友동문들은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하산도 즐거워야 하니만은 젖은 등산화를 그늘에 말리지 않고 방치했다가 신어서 그런지 볼이 꼭 끼어서 엄청고생이다.
새끼발톱이 빠지는 것 같다. 이것도 내 오래지 않는 등산경험에서 온 결과다. 간신히 살금살금 내려오니
제 3화양교아래 넓다란 암반이 나오길래 양말을 벗어던지고 발은 물속에 넣어두고 배낭을 베고 누웠다.
물은 구정물 수준이지만 그런대로 시원하다.
이미 계곡은 계곡이 아니고 천이 됐고 전국각지에서 피서를 와서 난장판이다.
3시 반까지 원점에 모이라 했는데 세시가 다됐다.복날이라 백숙으로 하산주를 한다하니 1시간은 여유가 있겠지.
이제 송시열을 찾아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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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만동묘 터. 아래사진은 복원된 현재의 만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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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에도 그리던 만동묘와 화양서원은 발을 담그고 잠시 쉬었던 화양3교에서 지척거리에 있었다.
도중에 서재겸 정자로 사용했다는 암서재가 개울 건너 암반위에 있었으나 거긴 내가 봐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만동묘 !. 이건 정말 내가 상상했던 곳이 아니었다.
초야시설 대원군이 만동묘문지기에게 행패를 당하여 좇겨났다는 만동묘는 어리어리할 줄 알았다.
당대에 송자(宋子)로 칭해지고 문묘에 제향된 우암의 화양서원이 또 이렇게 초라할 줄이야.
우암 송시열 만큼 평가가 극단적인 인물이 또 있을까(김대중대통령?).
경주촌놈인 나는 단지 노론의 수괴이며 노회한 한 정치가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엉뚱한 길로 가서,
그 폐해로 나라가 망하는 단초가 되는 원동력의 중심에 이 양반이 자리하고 있었다는데 핵심이 있다.
나는 우리 문중의 역사를 거울삼으며 사라져가는 전통을 붙들어 볼려고 문중카페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역사공부를 새롭게 하고 있는데, 4색당파의 피비린내 나는 한가운데 우암이 있고 ,
당권을 잡기위해 인조반정이 있었으며 역사시간에 배웠던 효종의 북벌계획도 애시당초 마음에도 없으면서 정권유지를 위해
우암이 군왕(효종)을 가지고 놀았다는 데 끓는 분노를 삼키지 못했다.
자파의 권력유지에만 올인했던 우암, 역사는 반복한다는 진리를 확인시켜준 것만은 감사할 따름이다.
서인이 주도했던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부정받을까봐 5대(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로 봉사하면서 갖은 권모술수로
같은 파당끼리도 일전을 불사하여 노론 소론으로 분당을 주도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나 3년 입어야 하냐를 가지고 왕권위에 군림했던 신권의 대부 송시열.
갑술환국 이후 200년동안 정국을 좌지우지하면서 국정을 농단했던 그와 그의 꼬붕들.
그것 보다 우리 영남의 수많은 남인사대부 집안의 씨를 말리고 쑥대밭을 만들었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이자리에서
허무하게 봐야하다니 실망속에 오히려 무덤덤하다.
만동묘가 무엇인가.萬折必東에서 따온 말이라네.(중국의 강들이 만번 굽이굽이 돌아 동쪽으로 간다는데서 연유)
중국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지켜준다는 뜻이라는데 사진에서 처럼 이곳 바위 곳곳에 새겨뒤고 자나께나 망한 명나라에
머리조아리게 했을 것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타.
만동묘 사당안에는 명나라 마지막왕인 신종과 임진왜란때 원정군을 보내준 의종의 위패를 모셔두고 건물 배치도 북향으로 하여
끝까지 事大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육중한 비문은 글자가 죄다 망가져서 알아보기 힘든데 안내문에는 일본놈들이 그랬다고 해놨는데
일본사람들이 송시열에게 무슨 억한 감정이 있다고 이것부터 손댔을까.
비문은 원래 미화되기 마련이다. 죽고난 후에 참회하는 형식의 비문이 있다는 소리는 내 일찌기 들어보지 못했다.
누가 원한맺힌 비문을 쪼아버렸을까 참 용단있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 봤지만 이걸 자랑이랍시고 그대로 세워놓는 후손
또한 용기가 대단하다 싶다.
만동묘앞 계단은 상식을 넘게 가파르고 좁다. 이 자들이 이걸 만든 때는 돈도 있고 권력도 있었을 텐데
이것도 무슨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타가,
파락호 대원군이 이곳 문지기에게 멱살을 잡혀 내동댕이 쳐졌는데가 이쯤 아닐까 해서 실소했다
(대원군이 집정하고 서원철폐 때 맨먼저 손본 곳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이고 보면 사필귀정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문자니라)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수제자 권상하가 다른 곳에 있던 화양서원을 만동묘를 애워싸듯 아랫쪽에다 ㄷ자 모양으로 지었단다 .
내부는 보고싶지도 않다. 우리 경상도 양반들, 노론집권 200년동안 핍박받으며 찬밥신세가 되어도 그래도 자존심 하나로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나라를 걱정하던 지조를 지킨 결과 양동이나 하회마을이 유네스코에도 지정되지 않았나.
떵떵거리며 위세를 날리던 그들 가문에 누가 항일운동을 하며 망해가는 나라를 건지려 했다던가.
-송병준 그 선조의 그 자손이 퍼떡 생각난다
허망한 심정으로 서원을 나와 일행이 기다릴 곳으로 가는데 첨성대라는 표지판이 있다.
기암이 우뚝 서 있고 그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는데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
그 바위는 우암이 기거했다는 암서재의 정면에 있다. 우암이 문만 열면 맨 먼저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이 기묘한 바위를 나는 준엄대[峻嚴臺]라 명명했다. 우암에게 농락당했던 효종의 영혼이 바위가 되어
밤낮으로 사람은 자고로 그래 살면 안된다고 준엄하게 꾸짓는 곳이라고....
실망감으로 맥도 풀리는데 발톱까지 아파지기 시작하여 다리를 질질끌다시피해서 원점에 다 왔을 무렵 박철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걱정어린 말투로
"어데고? "
(수봉동문이 좋다! 동기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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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재를 내려다 보고 있는 첨성대(화양5곡)--백일봉엘범에서 퍼옴
바위에 새긴 글자해석
非禮不動(비례부동)
화양동에 있는 여러 바위글씨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양동을 찾는 많은 이들이 이 바위글씨를 보지 못한 채 되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무나 소중하기에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바위글씨는 화양동 제5곡인 첨성대에서 계곡 쪽으로 20m 내려온 지점에 있는데, 제6곡인 능운대의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다. 암서재에서 계곡을 따라 위로 오르면 도명산 이정표가 나오고 이곳에서 10m 정도 산길을 오르다 왼쪽 계곡방향으로 내려간 뒤 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또는 화양제3교를 지나 능운대식당 앞 계곡을 건너 하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산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만날 수 있다.
바위글씨는 큰 바위 밑을 쪼아낸 뒤 붉은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글씨들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글자와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여덟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비례부동’ 네 글자는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멋진 글씨이며,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우암의 글씨이다.
이들 글씨의 내력은 그 주변에 새겨져 있는 작은 글씨를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비례부동’ 우측에는 ‘崇禎皇帝御筆’(숭정황제어필) 여섯 글자가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숭정황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가리키며 어필은 황제의 글씨란 뜻이다. ‘비례부동’ 네 글자는 바로 명나라 의종황제의 글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씨는 언제 누가 새긴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비례부동’ 왼쪽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풀어준다. 그곳에는 ‘陪臣閔鼎重奉至 與宋時烈等謹拜手 稽首摸勒時四十七年甲寅四月日也’(배신 민정중이 받들고 와서 송시열 등과 함께 삼가 공손히 절을 하고 본떠 새기니 때는 47년 갑인 4월 일이다)라는 29자가 새겨져 있다. 이 29자의 한문 뜻은 민정중이 가져온 것을 송시열이 갑인년 4월에 새겼다는 의미이다. 갑인년은 1674년(현종 15)이다. 따라서 ‘비례부동’은 1674년 4월에 송시열이 직접 바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우암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민정중은 1669년에 동지사 사신으로 청나라 북경에 갔다.1) 민정중은 북경에 머물면서 명나라 의종의 글씨를 널리 구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의종의 글씨를 가지고 왔다. 민정중은 비용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려 하였는데, 민정중의 뜻을 안 그 사람은 돈을 사양하고 글씨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글씨를 구한 민정중은 조선으로 돌아와 우암 송시열에게 1671년에 주었고, 우암은 그 글씨를 1674년 4월에 화양동에 새긴 것이다.
우암은 ‘비례부동’이 다른 사람이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유필(遺筆)이라는 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의종은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1644년(인조 22)에 의롭게 죽음으로써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의리’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우암은 의로운 의종의 죽음이야말로 예를 실천한 것이자 ‘비례부동’의 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비례부동’의 정신은 무엇인가? 원래 이 말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원이자 핵심으로 이해되었다.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출발점이자 요체는 수신(修身)에서 시작되며, 수신의 핵심은 비례부동에 있다는 인식이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대해 ‘비례물시․비례물청․비례물언․비례물동(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이라고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말을 <<논어(論語)>>의 핵심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때 예가 아닌 ‘비례(非禮)’는 사사로운 욕심을 의미하며 그 뒤에 나오는 네 조목은 각각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를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비례부동’이란 말 뜻은 ‘극기복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다는 뜻의 ‘存天理 去人欲(존천리 거인욕)’과도 상통한다. 예는 곧 하늘의 이치로써, 사사로운 인간의 개인 욕심을 제거할 수 있는 근원이자 방편인 셈이다.
더 나아가 우암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의 정치관과도 부합되었다. 우암은 현실과 타협하여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극기복례와 비례부동에서 버리거나 극복해야만 할 ‘기(己)’․‘비례(非禮)’․‘인욕(人欲)’으로 보았다. 반면에 청나라에 복수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예(禮)’․‘부동(不動)’․‘천리(天理)’로 인식하였다. 그런 만큼 우암에게 있어서 청나라를 거부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며 중화의 정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늘의 이치였던 것이다.2)
이처럼 ‘비례부동’이란 말은 우암의 철학을 대변하는 말이자 그의 세계관과 정치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암은 민정중으로부터 의종의 글씨를 넘겨받은 뒤 화양동 계곡 바위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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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혹여 은진송씨 동문이 있으시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공과 과가 있게 마련이지요.
핍박받았다고 여기는 영남 남인 후예의 한사람으로서 우암을 평해보았습니다.
더 자세한 글을 보시려면 손곡박씨들의 카페(http://cafe.daum.net/songok114)에 오셔서
역사공부,한국의 명문가문. 한국의 인물메뉴를 일독해보시고 아래 글들은 참고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송시열의 만동묘
만동묘'에 얽힌 유생들의 事大와 탐학
한국의 유학자 중에서 우암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애증, 포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수많은 서원 중에서 송시열의 화양서원(華陽書院)처럼 말썽많은 서원도 없을 것이다.
송시열에 대해 일각에서는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추앙하고, 다른 쪽에서는 '당쟁의 화신' '골수적인 사대주의 신봉자' '극단적인 권력추구자' 등으로 비난한다.
추앙하는 측은 '송자(宋子)'라 부르고, 비난하는 쪽은 '송자(宋者)'라 부른다. 전자는 공자맹자순자 등에 붙이는 최상급의 경칭이고, 후자는 욕할 때 쓰이는 놈자라는 최하급의 비칭이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이나 그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걸출한 정치인이고 유학자이자 경세가였다. 당대는 물론 후대에 까지 상극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유언으로 만동묘(萬東廟)라는 유학사에 치욕을 남긴 사람이다.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것을 모셨으나, 정부가 청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김자점과의 대결로 다시 낙향했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재등용되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계획이 중단되었다.
효종의 장례때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발생한 예송논쟁에서 개년설(1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됨으로써 남인세력을 몰아내고 서인정권을 수립했으나 1674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발생한 자의대비 복상문제에서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다가 실각하고 유배되었다.
이른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과격한 숙청을 주장하다가 서인중 소장파들과 대립했으며, 마침 제자였던 윤증과의 감정도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화양동에 은거하던중 장희빈의 아들 균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사약을 받았다.
만동묘 짓고 사대의식에 매몰
송시열은 충청북도 청천면 화양리 화양동의 화양구곡 또는 동천구곡으로 불리는 빼어난 경관을 사랑하여 이곳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1666년 이곳에 초당을 짓고 거처로 정하였다.
처음에는 화양동 제2계곡인 운영담 위에 화양계당(華陽溪堂) 다섯 칸을 지었다가 그후 다시 제4계곡인 금사담(金沙潭) 위에 '암서재(巖書齋)'를 지었다. 송시열은 이곳의 절경에 시 한 수를 지었다.
'푸른 물은 성난 듯 소리쳐 흐르고,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 살피니, 내 세파에 연연함을 저어하노라'
송시열은 효종과 함께 청나라 북벌을 주장하면서 명나라에 대해서는 임진왜란때 나라를 도와준 은혜를 잊지 못했다. 1671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신종(神宗)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넉자를 구해 제5곡인 첨성대 아래 암벽에 모각하여 놓고 존명사대(尊明事大)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다.
신종의 어필은 민정중이 사신으로 북경에 갈 때 구해온 것이다. 원본은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의종(義宗)의 사당을 별도로 지어 보관하면서 그 자리에 만동묘를 창건하여 유생들의 집합소로 삼도록 했다. 만동(萬東)은 선조의 어필중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 왔다. 항상 중국의 힘은 동방의 조선을 옹호한다는 뜻이다.
명나라는 이미 망한지 오래이고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여 조선은 정묘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면서 청국을 새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8년 동안이나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효종이 귀국하여 임금이 되고 북벌계획이 논의되면서 송시열은 중앙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따르는 유생들도 많았지만 정적도 만만치 않았다.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대륙을 석권한 청국을 '북벌'하기에는 조선의 힘이 너무 미약하고 정계와 유생사회는 비생산적인 예송논쟁으로 날밤을 지샜다. 화양서원은 붕당정치의 논쟁이 극심한 와중에 건립되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사회에서 서원은 정치의 중심지였다. 화양서원 역시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화양서원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죽은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송시열에 대한 신원(伸寃) 및 추모사업이 시작되면서 세워졌다. 1696년(숙종22) 그의 문인 권상하 등 노론계 관료와 유림들에 의해 송시열이 은거했던 화양동에 건립되었다.
처음 건립된 장소는 화양동 밖의 만경대였는데, 그후 권상하가 주동하여 화양동 안 만동묘 옆으로 이건했다. 옮긴 곳은 만동묘 오른쪽 전면으로 가서 마치 만동묘를 위요(圍繞)하며 보호하듯 ㄱ자 형태로 북향하는 건물배치를 하였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으면서 제자들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도록 했다. 이 유언에 따라 권상하 등이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3년(숙종29) 읍궁암 남쪽에북향하여 지은 것이다.(〈서원〉, 열화당)
화양서원은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모시고자 세워졌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ㆍ사당ㆍ서당이 햇볕을 받는 동향이나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데 비해 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을 굳이 북향하여 지은 것은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였다.
조선후기 유생들의 성역
송시열의 제자 문인과 그의 당파 노론이 계속 집권하면서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거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조선후기 사림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그 위세는 날로 더하여 토지를 늘리며 양민들을 종으로 부리는 등 그 위세는 날로 더해갔다.
이곳은 일년 내내 전국에서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역이 되었다. 서원의 주인으로 자처하고 행세하던 양반ㆍ유생들은 그 대부분이하는 일 없이 서원의 재산을 도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크고 작은 감투가 이곳에서 배정되고, 특권을 빙자하여 사당을 보수한다거나 제수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지방관서나 고을의 주민을 공갈 협박하고 금품을 강탈했다.
권력이 집중되고 특권이 행사되면서 백성들이 자진하여 서원의 노비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였다. 심지어 죄를 지은 자들이 이곳에 피신하여 패거리를 형성하기도 하고, 화양서원이 자의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는 누구나 그 통첩을 어길 수 없어 폐해가 극심해졌다.
화양묵패는 '유생들이 모여앉아 제멋대로 남의 재산을 평가하고 고지서를 발송하는 것이지만 묵패를 받으면 관인이건 백성이건 또는 양반이건 누구를 막론하고 논밭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게 되면 지체없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당하게 되고, 때로는 사사로이 형벌을 받기도 하였다. 이른바 화양묵패는 약탈을 전제로 한 협박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한국의 서원〉, 대원사)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악의 소굴이 되고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조정에서도 누차 이를 우려하는 논란이 제기되었지만 그들 세력이 집권을 하고 있고 이미 기강이 무너진 세도정치에서는 근본적인 타개책이 강구될 수 없었다.
이곳의 세력이 얼마나 심했던지 흥선대원군이 초야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문지기한테 봉변을 당했을 정도가 되었다.
원래서원은 유생의 사학기관으로서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조선중기 이후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이를 근거로 정쟁을 일삼으며 백성을 못살게 괴롭히는 폐단이 크게 나타났다. 화양서원은 그 대표격이었다.
역대 조정에서는 이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유생들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864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서원이 철폐되었다. 가장 먼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철폐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 송시열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극의 평가가 따르고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썩은 선비들의 집합소, 사대주의의 소굴로 불리게 되었다.
출저 : http://blog.naver.com/killidmg/120009083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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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평가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송시열은 학문에의 치적은 뛰어났으나, 선진 문물의 도입을 통한 국부의 축적의 중요성은 거의 외면하였고,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해 결국 조선이 19세기 근대화의 대변혁에 적응하지 못한 점도 있다.
또한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북벌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없다.(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송시열이 효종과 북벌을 논의했다는 것은 그 본인만의 주장이다. 효종이 죽고 16년 후인 숙종 1년에 그는 유배중이었다.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그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출처: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하권 20쪽)
친명 반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 준 명나라에 대한 예는 끝까지 각별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명나라가 청에 망해가는데도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성을 보여주는 기록물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을 화양구곡에 남겼다. 송시열이 권력의 중심에 오간 기록들과 그의 죽음을 보면, 현재 대한민국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계속된 마찰과 똑같다. 그의 묘도 화양계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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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원래 산이 많아서 논이 적다. 비도 적게 내리는 편이라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벼슬을 하지 못하니 월급도 없었고권력에서 나오는 부수입도 전혀 없었다. 흉년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게 예사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초근목피라는 말이 안동의 남인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척박하게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만 흉년이 들면 밥 굶는 일이 예사였다.
접빈객(接賓客)을 중시하는 사대부 집안에서조차 손님을 대접할 양식이 부족한 경우가 허다했다. 멀리서 온 귀빈에게도 대접할 것이 없어서 조당수(粗糖水)를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안동의 명문가 후손에게서 많이 들었다. 조 껍질을 벗기고 죽을 끓인 것이 조당수다.
안동 전탑 옆에 자리잡은 고성(固城) 이씨 대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은 대저택이고 부잣집이다. 그런데 임청각에 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생치(生雉) 다리’다. 살아 있는 꿩의 다리라는 뜻이다.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반찬이 없어 하인을 시켜 급하게 들판에 나가서 꿩을 한 마리 잡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손님 밥상에 꿩의 다리 하나를 일부러 날것으로 올려놓았다. 삶아서 요리하지 않고 날것으로 올려놓은 이유는 그 손님이 먹어버리면 다음 손님에게는 꿩의 다리를 올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치다리 밥상을 받은 손님은 꿩의 다리를 먹지는 못하고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임청각 같은 집안도 이 정도였으니 다른 서민 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당수와 생치다리 이야기는 안동의 사대부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벼슬은 시켜주지 않고, 녹봉이 없으니 배는 고프고, 벼슬은 못해도 양반의 체통은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품위를 그나마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글공부밖에 없었던 것 같다. 글이라도 잘 읽어야 양반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종가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중앙권력을 대신할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남인은 그 권위를 종가에서 찾지 않았나 싶다. 현재에도 노론보다 남인 집안의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제사뿐 아니라 집안의 문중행사에도 열심이다. 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문중 결속력에서 노론은 남인을 따라가지 못한다.
문중과 종가에 대한 결속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인 원인이 바로 조선 후기의 남인 소외였다.
이것이 남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안동과 영남에 유교문화와 고택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계기인 것 같다.
한편 영남에서 남인이 아닌 노론이던 집안은 안동 김씨말고도 또 있었을 것 같다. 어느 집안이 유명한가.
(계속)
땅에 묻힌 「북벌론」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에 송시열과 독대한다.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금지돼 있었다.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피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단성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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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차별 35년, 영남 차별 2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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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패권과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이 누린 것이다. 대략 170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모든 인물과 권력, 재력이 집중됐다. 물론 수도이니까 예전부터 집중되는 현상은 있었지만 ‘장김’을 비롯한 노론 일당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서울 집중에 가속도가 붙었다. 예전에는 정권교체가 자주 이뤄져 실권한 당파 사람들은 지방에 내려가 살았다. 교체가 되면 이긴 당파는 서울에 살았지만 패한 당파는 낙향하여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승리한 당파는 기호(畿湖)에 기반을 둔 노론(老論)이다. 기호학파가 서울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정권투쟁에 패해서 지방으로 몰린 당파는 경상도에 근거를 둔 남인(南人)이다. 경상도 남인, 즉 영남학파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산촌에서 대략 200년 동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했다.
(계속)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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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둘러싼 300년 신화의 가면 벗기기..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역사서
1부 흔드리는 주자학의 나라에서 - 어찌 감히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랴(조선 성리학이 예학드로 들어간 까닭을 찾아서)
37p 율곡의 학통을 이었다는 김장생과 김집, 그리고 송시열 등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예학은 개혁이 아니라 수구 사상이었다. 이들은 율곡 사사의 진수인 내적 정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껍데기 학맥만을 이은 것이다.
예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종민은 결코 지백메급인 사대부에게 저항할 수 없다. 사대부는 영원한 지배계급이고 농민은 영원한 피지배계급인 것이다.
이들이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당시 그만큼 사대부 계급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었다.
2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이 낳은 비극들(병자호란, 역사적 반동이 가는 길)
광해군의 재위 15년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현군이었다. 우선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대륙 정세의 격변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조선을 전란에서 비켜가게 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었다...그러나 서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끌어내려 했다. 이들은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국익을 위한 광해군의 양면외교 정책이 임진왜란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선왕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 것은 불효라는 명목으로 쿠데타을 일으켰다.
그러나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군을 파견한 것은 명나라 정벌의 기치를 내걸었던 왜군과의 전쟁터를 한반도로 국한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한 것은 그간 왕위를 둘러싸고 왕가에서 숱하게 있어 왔던 불상사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대비 김씨는 선조 말엽 친정 아버지 김제남와 함께 자신의 소생인 영창대군에게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해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작업을 수행했으므로 일방적으로 광해군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소현세자, 그 진보성과 개방성의 좌절
- 인조의 남한산성 농성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정유재란이 끝난 지 불과 40년도 안된 상황에서 다시 발생한 호란에 분개해 의병도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조선은 청군의 포위로 일체의 보급이 끊어진 겨울 산성에서 더 이성 버티지 못하고 항복해야 했다...소현세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볼모가 도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동생인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함께였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당시 만주에 있던 청나라 수도 심양이었다...볼모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정세를 갖게 되었으나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쳤다...1644년 11월 1일 청의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반포했다...드디어 멀고 길었던 볼모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국왕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인조23년(1645년) 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갔던 세자는 삼십대 중반의 연부역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의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소현세자는 볼모기간동안)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행위인지를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사상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학 등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성리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던 것이다...
의심 많고 용렬한 부왕 인조에게는 세자의 귀국 자체가 의혹의 대상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사고는 멀리했다. 소현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론 긍정적 몸짓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정신은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인조는 시종 세자에게 냉담했고, 부왕의 이러한 냉대에 상심했다. 이런 상심 때문인지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병에 걸려 누었다.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해 4월 23일로...2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인 26일에 세상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한 나라의 세자가 그야말로 약 한 첩 못써보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소현세사가 독살되었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자에도 나온다...인조가 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사실은 장례 절차에도 나타난다. 인조는 시신을 담은 관의 명칭에 '재궁(梓宮임금 세자의 관)이란 호칭을 못끄게 하고 대신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 柩'자를 쓰도록 했다...무덤의 이름도 원園자 대신에 묘墓자를 쓰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이보다 더 큰문제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당시 종법에 따르면 당연히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이 뒤를 이어 세손이 되어야 했다...원손 석철이 폐위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인조의 저주는 이제 세자빈 강씨에게 향했다...인조 24년 정월 임금에게 올린 전복 구이에 독이 묻은 사건이 발생했다.(인조의 자작극 가능성 농후)...신하들은 물론 인조가 주범이고 강빈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녀을 역적제로 품의해 몰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기의식을 조장했다...이런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후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드디어 인조는 재위 24년 2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賜死)하라고 명했다...강빈을 죽인 후 인조는 이전의 저주사건을 재심해 궁녀들을 고문함으로써 강빈의 친정 어머니까지 옥사를 확대시켰다. 결국 강빈의 어머니마저 처형당했다. 인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석철을 비롯한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소현세자의 뒤을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어야 했던 석철은 인조 25년 7월 죄수의 몸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12세의 어린 나이였다...석철은 다음해 9월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인조실록>은 석철의 죽음을 풍토병 때분이라고 기록했으니 이 또한 독살의 혐의가 분분하다. 당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인조가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골대가 석철을 키운 후 자신을 폐위시키고 그에게 왕위를 줄 것을 우려한 인조가 석철을 그냥 둘 리 없었다...그리고 세자의 둘재아들 석린도 석 달 후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산림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불행 뒤에는 조귀인과 낙당의 영수인 김자점이 있다고 믿었다 ..김자점의 낙당 또한 서인의 한 갈래지만 김집 송시열 송준길이 주도하던 산림은 당시만 해도 이런 정치 공작에 반대했다. 이때만 해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선명성이 무기였던 산림은 강빈의 한을 풀어주는 '강빈의 신원'을 당론으로 삼았다. 효종과의 한판 격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3부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
- 북벌, 말인가 실천인가?(송시열 북벌의 300년 신화 벗기기)
- 농민을 잃을지언정 사대부를 잃을 수는 없다 (송시열의 정적들-대동법의 경세가 김육)
- 숭무주의자 효종과 숭문주의자 송시열 (북벌대의 겉뜻과 속뜻)
-스러진 북벌의 꿈 (기해독대 뒤에 생긴 일들)
송시열은 북벌을 소리 높이 외치지만 북벌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효종과 맺은 암묵적 연합전선이 깨지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챙기는 효종이 인사권과 행정권, 그리고 군사권까지 위임하며 맡긴 대임을 방임할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이때 송시열을 위기에서 구해 주는 급박한 사태가 발생한다..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 10년 5월 4일, 송시열과 독대한 지 두달이 안된 시점이었다...숱한 의혹들을 남긴 채 군사강국을 지향했던 효종은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다시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던 것이다.
4부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
-임금이라도 차자가 아닌가(효종의 국상에는 3년복을 입을 수 없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살아있었던 것이 제1차 예송논쟁의 시발이었다..만 30세의 효종이 즉위했을때 그녀의 나이는 만 25세였다. 10년을 재위한 효종이 죽었을 때 겨우 만 35세엿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녀는 인조와 국혼을 올렸으니효종에게 법적인 어머니였다....부모상에 자식은 장자(長子), 중자(衆子:맏 아들이외의 여러 아들)를 막론하고 무조건 3년복이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장자와 중자의 경우가 달랐고 바로 이점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맏아들인 장자상에는 부모도 3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차자이하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장자부의 상에는 1년복을 입게 되어있으나 중자부의 상에는 9개월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적자라는 호칭은 임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송시열의 정적들 - 예론의 대가 허목)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1년복 주장. 윤휴 허목등 남인=3년복 주장)
-종통과 적통이 어찌 다르랴 (송시열의 정적들- 시인 정객 윤선도)
남인 고산 윤선도 "시열은 종통은 종묘사직을 맡은 임금에게로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다면 적통 종통이 둘로 갈리게 되는데 이러한 이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주장..윤선도의 논리대로라면 송시열의 1년복설은 효종의 종통과 정통성을 부인한 역적의 의논이었다.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장자의 사손, 즉 소현세상의 살아 있는 3남 석견을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서인은 1년설을 더듭 물고 늘어지는 남인의 속셈을 확실히 읽게 되었다. 남인의 의도가 예론을 바로잡자는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송시열을 죽이고 서인 정권을 몰아내는 데 있음을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즉 학문논쟁이 아니라 정치공세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예송논쟁을 제기하는 남인의 속뜻이 서인 정권의 타도에 있음을 안 서인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윤선도를 공격했다...현종이 이를 받아들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살라지고 그 몸은 삼수로 귀양보내졌다...서인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집권당이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는 임금 혼자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였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이었다..반면 인조반정 후 관제야당으로 출발한 남인들은 예송논쟁을 이용해 야당의 지위에서 벗어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남인들은 막강한 신권에 불만을 느끼는 국왕을 자당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3년설을 주장한 것이다. 서인들은 왕권과 신권의 차별보다는 치자 계급인 사대부의 보편성을 중시한 데 비해 남인들은 신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극대화 함으로써 왕실의 지지를 얻으로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송시열 송준결로 대표되는 주자예론과 윤휴 허목 윤선도로 대표되는 반주자예론의 대립이기도 했는데, 정통 주자학이 신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수구 보수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라면 반주자학은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진보 개혁적 견해의 표출이었다.
- 어찌 감히 주자와 달리 해석하랴 (송시열의 정적들-반주자학자 윤휴)
- 온양 행궁에서 벌어진 싸움 (송시열의 정적들-한때의 주인이었던 이경석)
- 왜 15년 전과 다르단 말인가 ( 고례(古禮)와 국제(國制)사이의 줄타기)
며느리 장사때 시어머니의 상복은? 효종을 큰아들로 보면 인선왕후도 큰 며느리이므로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했던 것이다. 처음 예조에서 1년복으로 결정했던 것이 문제를 더욱 불거지게 했다. 예조판서는 조형과 참판 김익경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의정한 다음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따라 자의대비의 보제는 대공으로 결정되어 시행...인선왕후 사후 5개월 만인 그해 7월 대구 유생 도신징이 이를 정면으로 반작하고 나섬으로써 논쟁이 재연...현종도 이제 서른 네살의 장년이었고...현종의 생각에 자의 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9개월복으로 고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는 서인들이 모후를 차자부로 여기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는 나아가 15년 전에도 서인들이 부왕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이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요약 : 기해년 : 장자에 대해 고례=장자 3년복 , 국제=장자 중자 구분없이 1년복 따라서 국제에 따라 1년복.
이번국상 : 고례 = 대공복, 국제= 장자부는 기년복)...서인 대신들의 결정은 15년 전의 기년복은 국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의대비가 무슨 근거로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였는데 그 부분이 빠져 있었다. 15년 전처럼 국제를 인용했다면 이는 둘째 며느리의 복이었다. 고례를 인용했다면 기해년에는 국제를 인용했는데 지금은 왜 고례를 인용하느냐의 물음이 뒤따를 것이다. 서인 대신들은 곤혹스러웠다...제1차 예송논쟁때 서인들이 겉으로는 국제 대로 장자의 기년복으로 했다면서 실상은 고례에 따라 차자의 기년복으로 정했다는 자인에 다름 아니었다...현종은 서인들이 의정한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집권당 서인에게는 국왕의 명령보다 당론이 더 중요했다...현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했다. 현종이 향리인 충주에 있던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집권당을 교체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그러나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서인을 내쫓고 남인을 등용하던 현종이 갑사히 급서한 것이다. 제2차 예송논쟁 와중인 재위 15년 8월 15일이었다(34세)...허적은 왕비에게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을 갈아치울 것을 권한다. 허적은 분명 현종의 급작스러운 와병에 인위적인 요소가 작용하지 않았는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5부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예송 끝의 낙마)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즉위 당시 나이가 겨우 열넷이었다. 열넷의 어린 나이로 현종이 미완으로 남긴 예송논쟁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유업을 이어야 했던 것이다...이 어린아이에게 대로 송시열이 끝내 목숨을 잃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 못했다. 숙종이 즉위 초 송시열을 극히 우대했기 때문이다...숙종은 어렸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었다. 송시열이 조부 효종과 현종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몰라서 그를 판중추부사로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숙종과 송시열은 서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숙종이 송시열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자 현종의 급서로 낙담했던 남인들은 기뻐했다...드디어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인조반정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 놀란 서인들이 그들을 관제야당으로 끌어들인 지 52년 만에 마침내 정권을 빼앗는 상대로 등장한 것이다. 서인들은 이에 태업으로 맞선다. 송시열의 유배에 항의해 정사를 거부한 것이다.
아버지가 중한가 스승이 중한가 (송시열의 정적들 -은자 윤증)
정권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허적과 윤휴, 죽임을 당하다)
허적의 연시연에 허견이 무사를 모아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서인들이 퍼뜨린 것이었다. 허적이 정변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이 소문의 숙종의 의구심을 증폭시키기 위해 서인들이 조직적으로 유포시킨 것이었다. 경신환국은 서인 외척 김석주가 배후에서 움직인 결과였다...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가 죽고 남인들이 몰락한 빈자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송시열이었다.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이상 송시열의 재기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인들의 원한을 어찌 풀겠는가? (소론 서인에서 갈라지다)
윤증은 이처럼 서인이면서도 3년설이 옳다는 이론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복제가 1년복으로 결정났으면 그대로 따를 거싱지 이를 두고 계속 싸울 것은 없다는 실제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윤증은 당시 이단으로 몰리던 양명학을 공공연히 신봉하던 자신의 제자 하곡 정제두와 평생 교유할 정도로 수용폭이 넓은 인물이기도 했다. 주자의 해석에 다른 이론을 보탠 윤휴와 박세당이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판에 양명학은 더욱 위험한 사상이었다...윤증은 서인이지만 남인과도 잘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암인 권시의 사위이고, 그 아우는 암인 거두 이유의 사위였으므로 서인과 남인을 두루 잘 알았다. 그가 보기에 서인과 남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울 이유가 없었다...서인이 노론과 소인으로 갈린 것이 숙종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서인이 송시열 1인 체제로 결집되어 있다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이 될 것이었다.
남인 소생 왕자가 어찌 임금이...(타당 소생의 임금 탄생은 목숨 걸고 막아야)
숙종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바로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와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두 왕비를 두었다. 인경왕후는 경신환국이 이루어지던 숙종 6년(1680) 천연두고 사망하고 그녀가 낳은 세 딸도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다음해인 1681년 숙종은 15세의 인현왕후를 맞이했으나 그녀는 20세가 다 되도록 왕자는 물론 공주도 낳지 못했다. 그 즈음 숙종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장옥정이란 궁녀 출신의 여인이다. 훗날 장희빈이라 불리는 그 여인이다...숙종이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봉조하 송시열의 나이 82세였다. 송시열은 고향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은거를 끝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배후에서 서인들을 움직여 왔으나 집권 서인은 국왕 숙종의 전광석화 같은 조치에 원자 정호라는 일격을 당한 뒤였다. 그는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송시열은 이미 장희빈 소생의 아들이 원자로 정호되고 종쿄에 고한 이후라는 시기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숙종의 분노 (마침내 몰락의 때가 오다)
...숙종은 이 자리에서 원자와 왕비 후궁, 그리고 송시열이 뒤얽힌 문제에 대해 고차원의 정치방정식을 제시한 셈이었다. 인현왕후는 노론 중진인 영돈녕부사 민유증의 딸이었다. 전 좌의정 민정중은 그녀의 큰아버지이기도 했다. 귀인 김씨는 김수항의 종손녀였다. 왕비 문제를 푸는 해법은 당파간의 역학관계에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그는 민비가 쫓겨난 당일로 종묘에 행차해 이 사실을 고했다. 그리고 열흘 후에는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해 역시 종묘에 고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시각에 서인들은 철저하게 당하고 있었다. 임술년(1682)에 남인들을 도륙 낸 서인들의 정치보복이 7년 후인 기사년(1689)에는 고스란히 서인들에게 돌아왔다...송시열은 멀리 보이는 물을 바라보았다. 83세의 노구에 제주에서 뭍까지는 너무 먼 뱃길이었다...송시열은 서울로 향했다. 마지막이 될 길이었다. 그가 가는 길마다 노론계 유생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 인현왕후 폐출은 국모를 내쫓은 것으로서 남인 정권을 역당으로 부인할 수 있는 좋은 소재엿다. 그들은 왕비 폐출과 송시열의 국문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다...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송시열은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상소를 썼다...송시열은 사약을 들이켰다. 83세의 파란 많은 생애가 정읍에서 막을 내린 것이다. 1689년 6월 8일 아침이었다.
나가는 글 - 그리고 그들의 나라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 공허한 찬사)
송시열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서 학문이 어긋남이 없다."고 까지 말했지만 그 주자학이 정치에 적용될 때 어긋남이 너무 컸던 것이 송시열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주의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 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란 명분론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맞게 학문을 변화시키는 것이다...그러나 송시열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 노론이라는 당의 이익이엇다. 이를 위해 농민과 여성들은 억압받아야 했다. 심지어 송시열은 현종 10년 1월 동성간에는 본관이 다르더라도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다..송시열의 이 주청에 따라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이 같으면 결혼이 금지되었다. 물론 모계는 성은 물론 본관이 같아도 상관없었다. 송시열의 예론은 이처럼 철저하게 사대부, 노론, 그리고 남성만을 위한 위한 예론이었다...그는 남인 소생 여인의 아들이 원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노론 당론에 목숨을 걸었고 그 때문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5년 후인 숙종 20년(1694 갑술)에 그의 당인 노론은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집권한다. 송시열은 무덤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그가 죽은지 약 60여년 후인 영조31년(1755)에는 드디어 유학자 최대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사회변화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면 송시열은 진정한 성인으로 많은 백성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 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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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 당쟁가 송시열. 그는 조선과 한국사에 비극을 잉태한 인물이다. 300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송시열 신화의 비밀. 성인과 악마라는 극단적 찬사와 저주 사이에 놓인 그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이 책은 송시열과 그들이 만들어낸 조선사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한국사의 그늘. 그 숨겨진 비극적 역사의 실체와 진실을 역사학자 이덕일이 추적한 것이다.
저자소개
![이덕일](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kyobobook.co.kr%2Fnewimages%2Fauthor%2F1000020501.jpg) 1961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첫 책으로 본격적인 역사서를 쓰기 시작하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전2권) 등의 책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학문적 깊이와 인간 중심의 사관을 바탕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사서술에 주력, 2000년 이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에게 길을 묻다', '오국사기'(전3권) 등을 내놓았으며, 2003년 8월 새로운 개념의 한국사 통사로 '살아있는 한국사 1,2,3'를 펴냈다.
목차
001. 들어가는 글 - 논쟁속으로 들어가다 ...14 제1장.. 흔들리는 주자학의 나라에서 1.. 어찌 감히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랴 ...22 2..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 3..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이 낳은 비극들 ...40 4.. 소현세자. 그 진보성과 개방성의 좌절 ...50 제2장..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 1.. 북벌. 말인가 실천인가? ...78 2.. 농민을 잃을지언정 사대부를 잃을 수는 없다 ...94 3.. 숭무주의자 효종과 숭문주의자 송시열 ...107 4.. 스러진 북벌의 꿈 ...133 제3장..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 1.. 임금이라도 차자가 아닌가? ...154 2.. 적자라는 호칭은 임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168 3.. 종통과 적통이 어찌 다르랴 ...180 4.. 어찌 감히 주자와 달리 해석하랴 ...205 5.. 온양 행궁에서 벌어진 싸움 ...218 6.. 왜 15년 전과 다르단 말인가 ...233 제4장..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 1..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252 2.. 아버지가 중한가 스승이 중한가 ...278 3.. 정권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290 4.. 남인들의 원한을 어찌 풀겠는가? ...315 5.. 남인 소생 왕자가 어찌 임금이 ...349 6.. 숙종의 분노 ...367 026. 나가는 글 - 그리고. 그들의 나라 ...390 027. 이 책을 쓰는 데 직접 도움을 받은 자료와 책
출판사 서평
한국 역사성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신돈이나 정도전, 혹은 정여립 같은 이들을 꼽기도 하지만 생전이나 죽은 후에 송시열에 집중되었던 논란의 비중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최대의 당쟁가, 송시열. 저자가 우암 송시열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지인(知人)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쓸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 대한 우려 때문어었다. 310여 년 전에 죽은 그는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83세의 나에에 사약을 마시고 사사 당했다. 숙종 때를 제외하고는 역모가 아닌 경우 대신을 사형시킨 예가 없고 국문도 하지 않을 만큼 대신을 우대한 조선에서 그는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사 당했다. 그러나 그는 죽고 난 이후 다시 노론의 재집권과 함께 유학자로서의 최대 영광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고, 공자 맹자 주자 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다. 대부분의 신화들이 과장되어 있거나 상상부분 조작되어 있듯이 송시열과 마찬가지다.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노론 쪽에서는 송시열을 성인의 자리에 그대로 두려 했다. 좋든 싫든 한 시대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써 그 시대에 대한 공적과 과오가 병존하는 일반적인 정치가로 끌어내리려는 모든 정치적, 학문적 시도에 대해 노론 계열은 감정적으로 대응해 왔다. 조선 후기 이후 성인 송시열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 왔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노론은 멸망하지 않았고, 세력을 유지해 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 동안 접근조차 금지되어 있던 한 정치가에 대한 300년 신화의 가면을 벗겨 냈다. 극단적 찬사와 극단적 저주가 공존하는 조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당쟁의 시대에 온 몸을 내던진 인물, 송시열. 그 동안 그는 완전한 인물처럼 왜곡되어 왔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은 금기처럼 되어 있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왔던 송시열에 대한 글들처럼 그를 성인으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좋고 좋은 그런 류의 글이 아닌 그를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파탄에 대한 부채를 지녀야 하는 한 정치가의 자리로 끌어내려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논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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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승! 참 역사에 조예가 깊네 ! 우리는 그저 국사교과서만 달달 외우다 보니 '송시열하면 위대한(? 책에나온 인물이니까), 만동묘-서원철폐' 뭐 이정도 뿐인데. 또 조선시대 말 하면 김좌근, 김병기등 안동김씨가 득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대립은 있었지만 송시열의 이면에 있는 부분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니까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줄은 몰랐네. 나도 몇차례나 화양계곡을 갔네만
꼭대기에 차를 대놓고(회사야유회) 아래로 내려오면서 구경하는 것이 제일 좋은 코스라는 것만 알고 있고 아래쪽에서는 멋있는 정자가 있는 곳 이상은 올라 가 본 적이 없는데 (우리는 원체 등산을 싫어하니까)
또 물건너 정자가 '참 명당에 자리잡았다, 멋있다, 사진 한장 찍자' 이게 전부니 그 정자의 현판이 무엇인지 조차 기억에 없네. 나도 거의 전국을 여행하다싶이 했는데 딱 세군데는 절대로 안가네 섬과 산꼭대기와 동굴이네 동해의 무릉계곡과 상주의 문장대, 이 두 곳이 내발로 올라간 전부가 아닐까 싶네 나머지는 케이블카 타고 잠깐 돌아 본 것이 전부네 그래도 명색이 유명한 계꼭이란 계곡은 다 가봤다고 하는데 입구만 깔짝거리다 내려왔네. 참 부끄럽구만 이 혹서기에 산을 그것도 등산을 가는 유승을 생각하면. 그렇지 그렇게 긴 시간을 묵묵히 걸어야 많은 생각을 하게되고 좋은 글이나오겠지. 역사적인데만 너무편중하지 않고약간의
문학적인 문장만 가미하면 정비석의 <산중무한> 정도의 더좋은 글이될것같네. 잘 읽었네 지난 일요일 나는 회사 일보따리 지에다 풀어놓고 종일 컴퓨터와 씨름했네 이 더위에 산에 오른 유승보다 더 고생했당게
<했당게>하고 보니 말인데 유승은 옛날에는 전혀 그런 얘기를 않했던 것 같은데 호남사람들을 좀 심하게 싫어하는가봐. 허기야 우리같은 영상도 사람이 호남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겠냐마는 나처럼 서울에서만 살다보면 항상 주변에서 함께 생활하다보니 함부러 표현을 않는 습관이 붙어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산다네 그런데 바로 어제 우리회사 홍이사라는 사람 왈 <군대에 가면 쫄병 중에 가장 마은에 들고 바지런한
쫄병이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참 중에 가장 악랄하고 쫄병 괴롭히는 고참 또한 전라도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내가 한참 웃었다네. 나 왈 <홍이사는 어떻게 그런 기막힌 비유를 해요>했다.
그 홍이사라는 양반은 경기도가 고향인데 이 말에 주석을 달면 자기가 약할 때는 강한자에게 가장 잘하다가 자기가 힘이세어지면 약한 자를 괴롭힌다는 말일쎄. 그런데 이 홍이사라는 친구나보다 5살인가 연하인데 <상무님은 무게도 있으시고 말씀도 적으셔셔 진짜 경상도분 같아서 존경한다고 평생 연락을 하며 살자면서 우리 사장 진주가 고향인데 아무리 봐도 경상도 사람이 아닌것 같습니다>한다. 이만하면 내가 사회생활 잘하고 살지?
ㅎㅎㅎㅎㅎㅎㅎㅎ 안봐도 그 광경이 선하다.
그런데 몇자스면 띵동 해사서 깜짝 놀라 '등록'을 클릭하다보니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오자 투성이네. 요즘 내 왼쪽 눈이 백내장이라 글 읽기가 많이 불편하네 회사 좀 한가해지면 수술해야지 하면서 벌써 수개월이 지나버렸네
지난주에 KBS에서 한국인의 3대질병 암,심혈관질환,뇌와 치매에 대해서 3일 연속했는데 고혈압이 그렇게 무섭데. 평생 달고 살지 않으면 안되더군. 니 술먹을 때180된다며.다시보기/동영상/시사교양/한국인의 3대질병에 찾아서 꼭 봐라. 우리나이에 건강 지가 챙겨야 한다. 나도 지금까지 코방구만 뀌었다. 건강하다고 자신했거던. 건강하게 살기 결론
1.운동(땀날정도 걷기 45분정도, 3~4회/주 2.짜게 안먹기 3.스트래스적게 먹기 4.육식 안하기 4.정기 조기검사 5.금연(특히)-니 요새도 담배피제?- 참 용감하다!
니는 스트래스회사 그만둘때까지 3번은 안될끼고,육식을 주로 하면 콜레스테롤이 심혈관(상단)에 관상동맥에 혈소판이 달래붙으면 심근경색>>.2시간내 병원 안가면 사망아니면 식물인간된단다. 고혈압 120만 넘어도 평생 약먹어야 된다니 니 술 좀 줄이고 혈압약 꼬박꼬박 챙겨먹어라 니마눌 자식한테 천덕꾸리기된대이
그래서 나 열심히 등산할라 한다. 집에 일거리 가져오지 말고 관악산에나 엘심히 다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