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처녀들 밤늦게 전화가 왔다. 은주 누나가 인터폰을 여러 번 눌렀다. 벽 시계는 밤 열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장총찬입니다." 내 목소리가 잠기 가득했다. "저...... 서유리라고 합니다. 기억하세요?" "그럼요."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기대앉았다. 명식이의 동정을 떼 준 여자였다. 설악산의 그 아름다운 밤을 결코 잊을 수는 없었다. "밤 늦게 죄송해요. 춘삼이 오빠 연락처를 까먹어서 그래요. 급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 드렸어요." 춘삼이 형의 연락처가 바뀐 것을 모르는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생활 태도가 크게 변한 것 같았다. "무슨 일 생겼어요? 내가 알면 안 됩니까? 뭔가 답답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늘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었다. 그 빚을 어떤 방법이든 꺼보고 싶었다. "춘삼이 형, 오즘 정신없이 바빠요. 사업이 잘 안 돼서 돈 꾸러 다니느라 정신없어요. 나한테 얘길 하세요." 내가 이렇게 다그쳤다. 춘삼이 형이 벌여놓은 사업을 추스리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얘기해두 될지 모르겠어요. 개인적인 얘긴데요." "유리씨 얘기라면 뭐든 듣겠습니다." 그녀는 한참만에 넋두리처럼 얘기를 털어놓았다. "박복한 년이라 이런 죄를 받나 봐요." "뭔지 모르지만 털어놔요. 괜찮아요." "제가 재일동포 청년한테 시집가게 됐다는 소리는 들으셨죠?" "그래요. 얼핏 들은 것 같애요." "전 진작 죽었어야 할 여자였어요. 눈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저 시집 잘 가나 보다 싶어서...... ." "지금, 거기가 어딥니까?" "집예요. 답답하고 억울해서 잠이 와야죠." "지급 가도 돼요?" "미안해서 그렇지 저는 괜찮아요." "전화로 얘기가 안 되겠어요. 갈게요." "고마워요." 나는 그녀의 신변에 불행한 그림자가 닥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잠들 것 같지 않았다. 옷을 입으며 나는 점쟁이들의 말을 생각했다. 내 몸에 살이 묻어 있다는 말과 관재수가 있다는 말은 중압감을 주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누나, 자동차 열쇠 좀 줘." 은주 누나의 방문 앞에 서서 내가 말했다. 방문이 열렸다. 여인의 잠옷은 컴컴한 밤일수록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누나, 보통 매력 아닌데." "얘가, 자다가 주머니 긁는 소릴 다 하네." "정말야, 매력 만점야." "어딜 가려고 그러니?" "열쇠나 줘." "그러다 큰일나려고." "다음 주에 기필코 면허 딸게." "유행가 가사 같네. 믿어 봐." 누나는 열쇠를 내밀었다. 언제 보아도 고운 손이었다. "누나, 더 늙기 전에 시집가는 게 좋겠어."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누나는 내 등을 때렸다. 유리는 아파트 입구에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조금은 초췌해 보였다. 고급 술집의 접대부 노릇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런 맑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조급하게 물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앞서 걸었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평수 넓은 아파트 내부는 유리의 깔끔한 성격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난 상관 없어요. 맘놓고 하세요. 그래야 도와 드리든 할 거 아녜요." 유리는 잠깐 뜸을 들였다. 정말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왕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얘긴들 못하겠어요. 사실, 제가 못된 여자였어요. 그런 몸으로 시집이나 잘 가보자는 배짱였어요. 벌 받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억울하지 않은 건 아녜요." "그 남잘 어떻게 만났어요?" 한숨만 쉬는 그녀 입에서 얘기를 빨리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어른들이 팔자는 타고 나는 거랬나 봐요. 참 우연한 기회였어요. 일본에 살지만 늘 고국에 대한 향수 때문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나오는 남자였어요. 생긴 것도 괜찮고 여유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얽히다 보니 저도 좋아했고 그 남자도 제게 결혼해 달라고 떼를 쓸 정도가 됐지요." "혹시,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나요?" "구체적으로 한 적은 없어요. 하고 싶지도 않았고 제가 얘기할까 봐 미리 입을 막을 정도로 속이 넓은 남자였어요." "그게 함정였겠군요. 내가 그런 사내라도 그랬을 겁니다." "대충은 알아요. 만난 곳이 내가 있던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요?" "약혼식도 하게 됐어요."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 같으면 재일교포 청년이라는 것 때문에 사족을 못 쓰고 덤벼든 것이 미워서 따귀라도 한 대 때려 줬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에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는 차근차근 뜯어먹힌 여자에 불과했다. 박명수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재일교포 청년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유리가 그동안 헤픈 웃음과 육신을 팔아 모아두었던 아파트와 패물, 현금과 저금통장은 바닥이 나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그 사람 뜻이 더 고마워서 제가 빚을 내온 것도 한두 푼이 아녜요. 그렇게 고국을 사랑하고 고국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을 무슨 짓이라도 해서 돕고 싶었어요." 유리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를 죽이려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가 사기꾼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 그럴 사람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지금도 어디서 누구에게 그런 속임수로 여자를 울리고 있는지 모르죠. 안 속고 배길 수가 없어요." 그녀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얘기는 한 편의 훌륭한 사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사내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수법으로 보아 서유리라는 여자만 걸려든 것 같지는 않았다. 재일교포 미남청년이란 사실을 사기행각에 유효적절하게 써먹으면 꿩 머고 알 먹는 식의 치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내이거나 아예 일본에서부터 사기술을 배워가지고 무대를 우리나라로 잡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수 높은 사내였다. "그 친구, 잡아보면 알겠지만 전과가 많겠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보통 사기꾼과는 달라요. 저도 꽤 똑똑한 척했고 그런 꼴을 많이 봐서 쉽게 속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쩌다 보니,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는 알거지가 되어 있었어요. 이 아파트도 이미 팔려 버렸고 통장은 텅텅 비어 버렸어요." "연고지는 있던가요?" "다 찾아봤어요. 혹시나 해서 공항에 나가 체크도 해 보고 친척집도 찾아가 봤지만 아무데도 아는 데가 없어요. 아주 철저한 남자였어요. 일본에 연락해 봤지만 주소도 틀리고 전화번호도 틀렸어요. 제 생각엔 지금도 어디선가 여자를, 저같이 멍청한 여자들을 농락하고 있을 것 같애요." "그럴 사내겠군요. 일단 연고지부터 뒤져 봅시다. 아는 대로 약도하고 연락처하고 친구들이 있으면 그 친구들을 알려 줘요." "제가 직접 가면 안 돼요?" 유리는 애원조로 말했다. "그건 안 좋은 방법예요." "나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그래요. 여기서 나가자니 갈 곳도 없지만 그나마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구요. 여기 있자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요." "나를 믿는다면 두 녀석쯤 여기 잠복시켜 놓겠어요. 꼼짝 않고 숨어서 망볼 애들이니까 같이 지내는 걸 겁내지 않아도 돼요." "믿겠어요." "그럼 내일 아침부터 밥이나 두 그릇씩 더 해 줘요. 믿을 만한 녀석들이니까 걱정 안 해도 좋아요. 내가 그 사내의 뒤를 캐고 다니면 혹시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죠." 유리는 같이 찍은 사진과 내가 찾아나설 수 있는 연고지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적어 주었다. "이것들도 대개가 가짜였겠죠?" "정말 그래요. 사업한다던 친구들도 가짜였어요. 이름도 그렇고 연락처도 그랬어요." "이건 계획적인 사기꾼입니다. 쪽발이 냄새 피우는 사기꾼들이 수두룩하게 늘었어요. 재일교포의 쪽발이다 하면 눈깔이 뒤집히는 여자들 때문에 그런 사기꾼들이 활개치고 다니죠. 몸 날리고 돈 날리고...... 나중에 찾지도 못해요. 더구나 이런 자식은 질적으로 단수가 높은 사기꾼예요. 유리씨한테 일찍 떠난 것은 더 먹어볼 만한 재산이 없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죄송해요." 유리는 흐느껴 울기만 했다. 나는 유리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내 품안에 기대었다. 온 몸이 따뜻했다. 훔치고 싶었다. 명식이와 그렇게 아름다은 밤을 엮어나간 여자가 아니면 훔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육체의 섬세한 선이 내 몸에 전율처럼 닿았다. 나는 내 욕정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나만 이런 끈끈한 욕정을 지닌 걸까? 아니면 모든 사내들은 다 그런 것일까? 그도아니면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의 욕정은 그런 것일까? 하나님, 번번이 묻는 것이지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나님은 아실 거 아닙니까. 어떻게 만들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른 겁니까. 아니면 만들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겁니까? 어째서 나는 여자만 보면 이렇게 아랫도리가 건방져지는 겁니까? 애시당초 복잡하지 않게 만들 수는 없었나요? 지금이라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욕망을 선별해서 골라낼 수는 있잖아요. 핵무기 같은 것 자꾸 만들게 내버려 두었다가 이 다음에 한꺼번에 처치하려는 속셈이십니까? 노아의 방주인가 하는 걸로 인류를 멸망시킨 그 잔혹성으로 이번에는 불길로 인류를 멸망시킬 작정이십니까? 만들어 놨으면 책임지는 하나님이 돼 보세요. "아침에 나가려면 주무세요." 유리가 침대 위를 가리켰다. 나는 소파를 가리켰다. "손님이잖아요. 침대에서 주무세요." "나는 아무 데나 상관 없어요. 걱정 말고 자 둬요." "그래도 그럴 수 없어요." 그녀도 퍽 고집스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가위 바위 보를 하자고 했다. "이기는 사람이 자는 겁니다." "좋아요."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했다. "다시 해요.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내가 약간의 시간차로 져 주자 그녀가 투정하듯 말했다. 결국은 내가 침대 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냄새가 물씬 배어 있는 침대 위에 누워서 자꾸 소파 있는 쪽으로 기어가고 싶었다. 누구나 욕심을 낼 만한 여자였다. 박명수라는 가짜 이름을 가진 재일교포 사기꾼을 잡으면 그냥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여자를 등쳐먹을 수 있는 배짱을 아주 요절내고 말 생각이었다. 이 떡을 치고 곤죽을 낼 사내야, 사기쳐먹으려면 복부인 노릇해서 혼자 키들거리며 사는 여편네의 치마를 홀딱 벗겨먹든지, 국민을 우롱하면서 돈 번 고관대작의 간을 꺼내먹든지 할 일이지 어째서 가엾은 여자를 등쳐먹었느냐. 넌 내 손에 걸리면 왜놈들한테 배운 네 사기술의 대가가 얼마나 처절한지 보여 주마. 넌 반드시 내 손에 잡혀야 한다. 그래서 조국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조국의 처녀들을 농락한 그 맛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 봐야 한다. 재일동포 실업가라니까 처녀들이 오금을 못 폈을 것도 안다 그런 계집애들은 당해도 싸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를 못 잡지는 않을 것이다. 쪽발이 처녀애들을 등쳐먹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너는 임자 만난 것이다. 두 녀석을 불러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녀석들이었지만 서유리의 아름다운 육체에 반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미리 다잡아 놓았다. 애들을 몇 군데에 풀어놓았다. 재일교포라는 걸 강조하며 씀씀이가 헤픈 애들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군데 연고지라고 보여지는 곳에 애들을 보냈지만 거의가 사기이거나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었다. 그런 사기꾼들은 쉽게 돌아가지 않고 장소와 대상만 바꾸어 잡는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 사기쳐먹기 쉬운 곳을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나님, 이 땅은 외국물 먹은 사기꾼이나 외국인 증명을 내세워 거들먹거리는 놀이터가 아니올시다. 병자호란 일으켜서 우리들의 외할머니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죠, 임진왜란인가 뭔가 만들어서 또 그 지경으로 만들었죠, 쪽발이들이 아예 차고 앉아 34년 11개월 19일 동안 괴롭히게 내버려 뒀죠, 6.25 전쟁 때는 또 어떤 꼴이었으며 요즘도 왜색시다 양색시다 해서 여자를 들볶는 이유나 좀 압시다. 힘 없는 나라니까 밥이라 이겁니까? 죄 받습니다. 월남 같은 나라 가지고 그만큼 재미있게 놀았으면 정신 좀 차려야 할 거 아닙니까. 미국이나 소련 같은 나라를 가지고 노는 게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스케일 좀 크게 가져보세요. 일본하고 중공하고 한판 붙여 주세요. 우리도 전쟁통에 쪽발이들처럼 부자나라 돼 가지고 큰소리 좀 쳐보게요.그러면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비단옷도 입혀 드리고 편히 쉬실 곳도 마련해 드려서 이 땅이 하나님의 복된 나라로서 손색 없도록 만들 테니까요. 호텔 출입이 잦다는 걸 기억하고 애들을 풀어놓았지만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꽤 유명하다는 술집과 나이트 클럽에서도 녀석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린 뒤였다. 일본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본명과 일본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상착의와 사진으로 찾는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보통 사기꾼은 아니었다. 남겨놓은 사진들은 모두 얼굴 중심이 아닌 배경 중심의 사진이어서 확대하기도 어려웠다. 광화문의 괴짜 할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계획적인 사기꾼이 그런 수법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며칠 동안 찾아봐도 감춘 꼬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많은 이 있다면 차라리 보상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리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그런 길로 들어선 여자의 악착 같은 돈을 한 주먹에 쥐고 달아난 사내라면 쉽게 꼬리를 내놓지 않을 게 뻔했다. 초저녁에 강남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 긴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L호텔에 비슷해 보이는 녀석이 들랑거린대요." "직접 봤냐?" "못 봤어요. 놀부 깔치들이 그러는데 흡사하다는 거예요. 돈을 풀풀 쓰고 다니는데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 꽤 삼삼하대요." "알았다. 잘 지켜보고 놀부 애들한테 아가리 닥치라고 해." 놀부 애들이라면 그쪽의 바람잡이 애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고 놀부와 얽히고 설킨 계집애들을 깔치라고 불렀다. 나는 손 빠른 애들을 데리고 강남의 새로 생긴 L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전망 좋은 방 하나를 얻었다. 커피 숍에 내려가기도 좋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방이었다. 강변을 끼고 서 있는 호텔은 신시가지의 상징처럼 하얀 색깔이었다. "이 사진하고 비슷한 것 같았어요." 깔치는 내가 내민 사진을 확인한 뒤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제 봤지?" "며칠 됐어요. 차는 슈퍼 살롱였어요. 옆에 계집애 하나 달고 다니던데요.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생각이 안 나요." 깔치는 박명수란 사내의 행동이나 말씨를 대개 기억하고 있는 눈치였다. "왜 관심 갖고 봤지?" 그녀가 그렇게 정확한 기억럭을 지니고 있는 게 신기했다. "한번 털어볼까 생각했거든요. 어쩐지 한 건 할 것 같앴어요." "그런데 왜 못 털었어?" "그 사내, 의심이 많아요. 아무리 꼬셔도 모른 체했어요. 하긴 옆에 계집앨 끼고 다녔으니까 틈도 없었지만요."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네가 털어먹으려고 들었어." "이례게 싸악 털려고 했죠." 깔치는 하얀 실크 투피스의 주름치마를 들어올렸다. 눈부시게 흰 팬티가 앙증맞게 보였다. 나는 껄끄럽게 웃었다. 깔치가 그 사내를 꾀어 등쳐먹으려고 별렀다는 게 보통 깔치들은 그런 식으로 돈이 있을 법한 사내들을 꼬드겨 몸을 맡기고는 야금야금 주머니를 털어먹거나 놀부 애들과 연극을 벌여 한탕을 하는 부류들이었다. 나이트 클럽이나 카바레 주변에 서식하는 이른바 얌체족이었다. "네가 당했을 걸." "내가 왜 당해요? 내 손에 걸리면 끝내 주지 못한 사내 없어요." "나도 끝내 줄래?" "아뇨." "왜?" "놀부 애들한테 들었어요." '내 얘길 하대?" "그럼요." "그 녀석, 내가 데려다 줄 테니 한번 "데려다만 주세요. 한 방에 끝내 줄 테니." 그녀는 다시 깊게 패인 가슴을 살짝 열어 보였다. 브래지어 없는 선정적이고 탐스러운 젖가슴이었다. "그나저나 이 자식을 어디 가서 잡아야겠니? 네 생각엔 어디쯤 있을 거 같애." "여기 들랑거리던 사낸데 멀리 갔겠어요? 이 근처 아파트에 있거나 요상스런데 숨어서 헐떡거리겠죠." "그거야 네 말이 맞겠지만...... 다 뒤질 재간도 없잖아." "기다려 보죠 머. 세월이 좀 먹는 것도 아닌데." "자아식." "심심하면 언제나 불러 주세요." 깔치는 일어났다. 빼어난 몸매와 용모였다. 저런 여자애가 어째서 이런 길로 들어섰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부유한 집의 딸로 대학교 초년병쯤 보아 줄 청순함이 엿보였다. 그것이 그녀의 무기인지도 모른다. 그런 무기를 사용해서 어리숙한 사내들의 호주머니를 바닥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작정 기다릴 만큼 성질이 눅은사내는 못 되었다. 애들을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게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재일동포 흉내를 내는 녀석들이 몇 명 걸려 들었지만 정작 내가 찾는 녀석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에게 신세를 져가며 찾기는 싫었다. 신세를 져서 찾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일본으로 도망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유리가 머물러 있는 아파트에도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리는 체념할 수 없다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전화를 하곤 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운전면허장에 가려고 준비했던 서류를 찢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면허 없이 차를 몰고 다니는 게 불안해서 지난 주부터 시험을 치르려고 별러 왔었다. 커피 숍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는데 내 어깨를 건드리는 여자가 있었다. "왜 한 번도 안 불렀죠?" 깔치였다. 물빛 원피스의 짧은 팔이 아주 시원스러워 보였다. 출렁거리는 가슴과 자연스럽게 흔드는 엉덩이의 율동이 매혹적이었다. "털릴 돈이 없으니까." 나는 깔치를 옆에 앉히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에이, 나 순진한 계집애예요.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네가 순진한 거야 천하가 아는 사실이지." "놀리지 마세요." "다른 데서 본 적 없니?" "전혀 못 봤어요. 나도 꽤 돌아다니는 계집앤데 말예요." 깔치는 자연스럽게 내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나, 술 사 줄래요?" 손이 지퍼 근처까지 왔다. "임마, 사람 봐 가며 사달래야지." 내가 슬쩍 손을 치웠다. 깔치가 곱지 않게 눈을 흘겼지만 익살스러워 보였다. 웬만한 사내라면 넘어가지 않고 못배길 유혹이었다. "사 주기 싫어요?" "그 자식 잡으면 실컷 사 줄게. 지금은 술맛 떨어져서 내가 먹기 싫다." "에엠. 그만한 값하면 되잖아." 코먹은 소리였다. 여자의 비음은 언제나 사내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에 혼자 자요?" 계집애가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래." "내가 옆에서 자면 안 돼요?" "왜 자려고 그래?" "그냥 좋으니까." "왜 좋아?" "총찬씨 같은 남자 없대서요." "누가 그 따위 사기를 치고 다녔냐?" "다들 그러던데 머. 대단하다구." 주먹질을 잘하니까 밤에 힘쓰는 짓도 대단하다는 엉뚱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너 정말 기절하고 싶냐?"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계집애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았다. 계집애가 대번에 뾰로통해졌다. "평생 찾아도 그 사내를 못 찾을 거예요. 내가 찾아나서면 몰라두." 깔치가 이렇게 말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그녀라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가 탄 택시가 L호텔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택시를 잡았다. "저 차 따라 잡읍시다." 기사가 피식거리고 웃었다. 시동을 걸며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꽉 죄어 잡는 게 상숩니다." 뭔가 아는 남자 같았다. "그런 게 아녜요. 빨리요." "걱정 마쇼. 도망가 봐야 서울 안에 있을 거요." 기사는 느물거렸지만 제법 속력을 놓고 따라 잡았다. 나는 차창을 열고 소리질렀다. "저 앞에서 내려! 할 얘기 있으니까." 깔치는 고개를 돌린 채 택시 기사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 택시가 쏜살같이 달렸다. "따라 갑시다." 기사는 벌큼거리며 웃더니 앞차를 따라갔다. 앞차도 꽤 달렸다. 한참만에 우리가 깔치가 탄 차를 놓쳐 버렸다. "대낮 같으면 앞에다 팍 꽂는 건데......." 기사가 미안했든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밤길을 달리며 앞차를 추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과 신호등과 밀려드는 차량 때문에 뒤쫓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호텔로 다시 갑시다." "이거 미안합니다." 퍽 공손해진 말투였다. "할 수 없죠." 호텔로 돌아와서 놀부 애들을 불렀다. "걔를 당장 데려와라." 놀부 애들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 깔치가 어디쯤 있는지 짐작한다는 투였다. "급해. 빨리 찾아라." "형, 걔 불쌍한 애니까 손찌검은 마세요." "알았어 임마." 녀석들이 안심했는지 뛰어나갔다. 나는 찾으면 무슨 단서가 잡힐 것 같았다. 의미있게 내뱉고 간 말이 자꾸 귓가에 맴을 돌았다. 깔치가 들어섰다. 무서운 눈초리였다. "앉아." "말하세요." "아깐 미안했다. 얘기 좀 하자." "난 할 얘기 없어요." "이리 와." 깔치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노여움이 가득 찬 눈꼬리였다. "넌 뭔가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얘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난 아무것도 몰라요." "아냐, 알고 있어." "몰라요." 차가운 목소리였다. 내가 어떤 사내인지 알면서 내 앞에서 그렇게 냉랭할 수 있다는 건 그녀의 감정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02 "몰라요." 토라진 모습이 차라리 귀여웠다. 나는다가서서 깔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깔치는 드세게 뿌리쳤다. 나는 힘 주어 그녀를 안고 버티었다. 깔치는 눅었다. 흐트러졌다. 점점 눈을 내려깔았다. "네 마음 안다. 하란 대로 하겠다." "미워!" 그녀의 목소리엔 투정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잘못했다잖아." "왜, 주먹으로 해결하지 않죠?" "할 수도 있지. 연약한 여자에게까지 힘자랑하고 싶진 않아. 너처럼 아름다운 여자에겐." "난 연약하지 않아요." "알아, 그러나 힘으로 네 입을 열게 하진 않겠어." 그녀는 대꾸없이 돌아서서 내 티셔츠 윗단추를 풀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귀중한 정보를 다른 방법으로 꺼낼 수 있었지만 참기로 했다. "난 총찬씨를 먹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으면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를 수집하는 괴벽이 있다고 했다. 제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라고도 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먹어치웠다고 자랑하는 여자였다. 뒤가 깨끗해서 말썽부리지 않는 게 그녀의 기질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뒹굴었다. 율동이 좋은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뒹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흡착력은 나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남자에게 거침없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날 가졌다고 생각하니?" "그래요. 내가 훔쳤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남자들이 그러죠, 여자를 먹었다고." "젊은 애들이 그런 말 하지." "여자라고 먹히는 암컷은 아니잖아요. 난 그런 게 싫어요. 내가 먹어치울 거예요." "대단하구나." "대단할 거 없어요.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기분 좋으니?" "아뇨." "왜?" "난 언제나 그래요." "이젠 얘기해 줄 수 있겠지?" "나한텐 고작 그게 관심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좀더 솔직할 수 없어요?" "나도 사내자식이다. 네가 욕심나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 "알아요."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나는 돌아서서 그녀보다 빨리 옷을 입었다. "탤런트 연미희 찾으세요. 그 여자랑 같이 다녔어요." "연미희?" 나는 얼핏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안 보나 보죠?" "글쎄, 잘 모르겠다." "몇 년 된 여자예요. 가끔 연속극에 얼굴이 비치지만 유명하진 않아요." "그 여자랑 돌아다녔단 말이지?" "확인해 보면 알겠죠." "최근에 본 게 언제지?" "한 일주일쯤 됐어요." "어디서?" "저쪽 구석 자리요." 그녀는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문고리를 잡았다. 나는 웃었다. 그녀가 다가와 등 뒤를 가리키며 웃었다. 지퍼를 올려 주었다. 그녀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껑충거리며 나갔다. 하나님, 보셨겠죠? 우린 교환한 게 아닙니다. 필요해서 서로 준 것뿐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와 틀린 인간사회의 정입니다. 이 정도 재미 안 보고 사는 사내는 없겠죠. 혹시 발견하셨다면 상을 듬뿍 내려 주세요. 흥부가 마지막으로 탄 박 속에서처럼 아리따운 여자들을 선물 줘 보세요. "연미희를 미행해라. 눈치채게 해선 안 된다. 그녀가 마지막 열쇠다." 애들은 쉽게 말뜻을 알아들었다. 연미희를 미행하면 재일교포 사기꾼을 잡아낼 수 있었다. 나는 유리에게 대충 진행 상황을 설명해 주고 아파트를 비워두라고 일렀다. "열쇠는 애들한테 맡겨 놔요. 일이 끝날 때까지 갑갑하겠지만 여기 와 있어요."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유리가 호텔로 자리를 옮긴 두어 시간 뒤에 애들한테서 연락이 왔다. "여긴 정릉 계곡의 산장입니다. 두 사람이 같이 들어갔어요. 슈퍼 살롱은 마당에 있습니다." "내가 갈 때까지 움직이지 마라. 만약 튀려는 기색이 있으면 그때 잡아라. 자동차 바람을 다 빼 놔라. 소리 안 나게 기술적으로해." "나머지 애들은 어떻게 할까요?" "모두 보내고 서너 명만 남아 있어. 조심해라. 놓치면 알아서 해." "염려 푹 붙들어 매십쇼.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길목이 하나뿐인데요." "방심하지 마. 그 자식, 의심이 많아서 까딱하면 눈치챌지 몰라. 죄 많은 녀석이라 눈치 하나는 빠르니까." "자동차 털어볼까요?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잖아요?" "일체 손대지 마라. 멀찍이서 지켜.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마." "일하는 애들 말로 두 사람이 자주 온대요." "이 자식들이...... 누가 그런 걸 확인하랬어? 그냥 지키기나 해. 내가 갈 테니까." "알았어요." 나는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유리가 정문까지 따라나오며 애원하듯 말했다. "너무 다잡지 말아요." "버르장머릴 고쳐 주겠소. 재일교포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나라 여자들을 빨아먹는 자식을 그냥 두란 말요?" "그런 뜻이 아녜요. 생각해 보면 저도 바보였어요. 사람들이 알면 당해도 싸다고 할 거예요." "그건 알아요. 유리씨가 너무 쉽게 넘어간 건 나도 미워요. 유리씨가 이런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명식이하고 결혼해 달라고 조르고 싶을 정도예요. 그런데 그런 자식한테 당하다니...... ." "죄송해요. 제가 눈이 멀었었나 봐요. 여기서 남의 눈치 봐 가며 사느니 일본에 가서 떳떳하게 살고 싶었던 게 제 솔직한 심정였어요. 죄 받는 건가 봐요. 저 같은 여자가 있으니 그런 남자가 행세하는 거 아니겠어요." "알았어요." 나는 택시 속에서 유리의 고운 마음씨가 앙금처럼 내 가슴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보통 여자 같으면 잃었던 돈을 찾고 곤죽이 되도록 복수를 해 달라고 졸랐을 것 같았다. 하나님, 도대체 경제대국이란 일본은 어떤 나랍니까? 그 나라에 사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겁니까? 재일교포 청년 실업가란 명함 한 장이면 우리나라 여자들이 사족을 못 쓰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실하게 일해서 고국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몰론 많습니다. 그러나 저런 치졸한 사내들도 많습니다. 넋 빠진 사내들을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용서하는 게 직업이라면 내가 그런 사내를 합니다. 양색시로 이 땅의 처녀 갉아먹었으면 그만이지 왜색시까지 생산하는 꿍꿍이라도 있나요? 정릉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서 내렸다. 밤길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았다. 약수를 뜨러가는 부인네들과 데이트족이 어울려 산길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상 없어요." 마중나온 녀석이 말했다. "도망갈 만한 길 없니?" "이 길 아니면 산으로 튀는 수밖에 없어요." "어쨌거나 잘 지켜라. 한번 튀면 끝장이니까." "걱정 마세요." 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흰 와이셔츠 차림의 종업원들이 따라붙었다. "식사하실 건가요, 주무실 건가요?" "술 한잔 합시다. 자리 좋은 데로." "방갈로가 있는데요." "그쪽으로 합시다." 우리가 자리잡자 종업원들은 술상을 내왔다. 전망이 좋은 계곡의 초입에 이렇게 아담한 산장이 있는 줄은 몰랐다. "후딱 해치우죠." 애들이 다급했든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안 돼. 시간을 좀 끌어야지." "튀면 어쩌려고요?" "그러니까 내가 지키잖아." "주먹이 근질거려 미치겠어요. 저런 자식은 뼈를 추려내야 하는데...... ." "연미희, 그 친구 체면 좀 세워 줘야지. 재일교포 청년 실업가에게 속아서 몸 뺏기고 돈 빼앗겼다고 소문나 봐. 우리가 그런 건 지켜 줘야잖아." "밤늦게 시작할 겁니까?" "순순하게 잡혀 준다면야 지금이라도 당장 끌어낼 수 있지만...... 저런 녀석일수록 국적이 일본이니, 국제법이니 따져댈 거란 말이다. 까짓 거, 시끄러운 거야 주둥배기 봉하면 그만이지만 연미희 그 계집애를 거덜낼 순 없잖아." "그런 속 빠진 계집애를 뭐러 보호하려고 그래요?" 애들은 그 점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시집 잘 가려고 몸부림치는 탤런트라는 사실이 싫은 눈치였다. 재일동포 청년 실업가라는 한마디에 예쁜 여자들이 몸을 꼬는 게 나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연미희까지 창피를 주고 싶었다.그러나 차마 한꺼번에 몹쓸 인간으로 취급하기는 싫었다. 속아 넘어간 연미희가 아무리 화냥기가 있더라도 보호해 주고 싶었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정릉 계곡의 사람들은 많이 줄었지만 은밀하게 데이트하는 연인 숫자는 줄지 않았다. "안 되겠다. 뒷산으로 빼자."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술상에 남아 있던 술을 마저 비우고 우리들은 일어났다. "저 방이 확실하지?" "몇 번이나 확인한 겁니다." "넌 술값 낸 뒤에 조금 시끄럽게 굴어라.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게 해. 넌 말리는 척하면서 장단을 쳐야 돼. 그 사이에 내가 끌고 튈 테니까." 그런 일을 능사로 해 낼 수 있는 애들이었다. 두 녀석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먼저 내려갔다. 일부러 술 취한 척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한 녀석을 데리고 재빨리 산장 옆으로 숨었다. 불 꺼진 방에선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려 나왔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퍽 정다워 보였다. 나는 구두를 신은 채 복도 끝방으로 갔다. "누구야?" 노크 소리를 듣고 사내가 물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고 대꾸했다. "임검 나오셨는데요." 나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옆에 섰던 녀석이 더 능청을 떨었다. 방문이 삐끔 열렸다. "윽!"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명치 끝을 정확하게 때렸다. "어마!" 계집애 목청이 째졌다. 바깥이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방갈로 쪽엔 관심도 없었다. 불을 켰다. 연미희였다. 홑이불 자락을 뒤집어 쓴 채 머리만 내 밀었다. 홑이불을 와락 벗겨냈다. 잠깐 눈이 부셨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농익은 육체가 터질 것 같았다. "옷 입어. 빨리!" 연미희는 재빠른 동작으로 옷을 추스렸다. 옷을 입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보드라운 헝겊쪼가리를 걸치는 행위였다. "소리치면 너만 죽는다.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연미희의 턱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나면 넌 끝장나는 거다. 얌전하게 따라와. 곱게 보내 줄 테니까." 연미희는 녀석이 끄는 대고 따라나갔다. 박명수가 꿈틀거리며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 나는 한 방 더 갈겼다. 이 자리에서 말씨름 할 시간이 없었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조용한 곳까지 끌고 올라갈 참이었다. 박명수를 끌고 울타리를 넘었다. 바로 정릉 계곡과 연결된 산이었다. 앞서 가던 녀석이 작은 플래시를 비추며 방향을 잡아 주었다. 산장에서 시끄럽게 굴던 녀석들도 플래시 불빛을 확인하고 내려간다는 휘파람 신호를 보냈다. 한참만에 박명수는 저항의 몸짓을 하기 시작했다. 연미희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었다. "그만 가자." 내 말에 앞섰던 녀석이 평지를 골라 멈추었다. 박명수가 잡힌 뒷덜미를 풀려고 몸을 꼬았다. 약간 늦추어 주었다. "당신들 누구요?" "대한민국 청년이다." "왜 이러는 거요? 대한민국엔 법도 없소?" "너 말 한번 잘했다." 박명수가 정강이를 잡고 대굴거리며 굴렀다. "여긴 소리질러 봐야 너를 도와 주러 올 사람도 없는 산중이다. 네가 여기서 죽으면 그걸로 네 더럽고 치사한 인생도 끝장이다." "대체 왜 이럽니까? 뭣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우린 친절하게도 그런 정도는 일러 주는 대한민국 청년이다. 잘 들어라. 귓구멍 크게 열고. 네가 재일교포 청년 실업가란 건 안다. 그걸 미끼로 여자들을 울리고 돈까지 갈취하는 시기꾼이란 것도 말이다. 그래서 같은 동족의 피를 받고 태어난 새끼가 일본물 먹으면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지 분해해 보려고 데려왔다." "뭐라구요?" 녀석은 갑자기 떨었다. "떨 거 없다. 너도 실험동물이란 소리는 들었을 거다. 우린 널 분해해서 네가 사기꾼이 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거니까." "제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난 조국을 사랑해요. 그래서 조국에서 결혼하려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 걸 우리나라에선 놀구 있다고 한다. 더 놀게 해 주마." 나는 사정없이 걷어찼다. 박명수는 내 응어리의 샌드백이었다. "이 거지도 안 주워갈 새끼야. 대한민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더냐? 쪽발이들한테 고작 배워 처먹은 게 그거냐?" 박명수가 내 바지를 잡고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줄 것 같으면 끌고 오질 않았다. 너 같은 건 난지도 쓰레기 더미에도 묻힐 자격이 없는 놈이니까."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박명수는 뒹굴면서도 악착같이 내 바지를 "연미희, 이리 와라." 나무 밑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던 연미희가 내려왔다. "이 앞에서 말해라. 네가 등쳐먹은 여자가 누구누구인지." 박명수가 머뭇거렸다. 나는 구두를 벗어 따귀를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녀석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시면 무슨 짓이고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살고 싶으면 죄 불어봐." 다리를 꺾어 앉혔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저, 가수 명인희하고...... ." "또." "살롱하는...... ." "없어요. 정말예요." "쪽발이 밑이나 핥을 자식." 박명수가 고꾸라졌다. 나는 허리띠를 풀어 녀석의 다리를 죄어 나뭇가지에 걸었다. 그리고 정말 샌드백처럼 두들겼다. "서유리 알지?" "예예." "얼마 빼먹었냐?" "몰라요. 아파트하구...... ." "몇 명이나 알겨먹었냐?" "잘 몰라요." "좋다, 하두 해처먹어서 숫자도 모르겠지. 그 돈 다 어쨌냐?" "...... ." "이 더러운 자식아. 쪽발이들이 판칠 때도 조선 사람 잡아먹는 조선 놈이 설쳐대더니 너 같은 놈은 그것보다 더 악질이니까 아예 뼈를 추려서 이 산중에 있는 동물들한테 선심이나 쓰겠다." 정신없이 나뒹굴던 녀석이 숨을 끊고 뒤로 누웠다. "살려 줘요. 말할게요." "큰소리로 똘똘하게 말해라. 작은 소리로 지껄였다간 틀니 해얄 테니까. 난 귀가 어둬서 잘 알아듣지 못한다." "말할게요. 제발." 박명수는 거품을 북적거리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몇 차례 더 곤혹스런 장면을 연출한 뒤에 박명수는 여자들을 등쳐먹은 내역을 털어놓았다. "그 돈은 어디 있냐?" "일부는 여기 은행에 있구요. 일부는 숱한 여자가 박명수에게 넘어갔다. 돈이 좀 있게 생긴 여자들만 골라 일본으로 데려간다는 조건을 내세워 알량하게 빼먹은 것이었다. 할 때마다 수법이 달랐다. "일본엔 누구누구하고 사냐?" "...... ." "마누라하고, 새끼는 몇 명이냐?" "아들 하나와 딸 하납니다." "네 딸년이 그 지경으로 당해도 시시덕거릴 참이냐?" "아뇨." "마누라는 한국 여자냐?" "일본 여잡니다." 박명수는 더 버틸 기력도 없었다. 내가 묻는 대로 주절주절 대답을 했다. 연미희가 흐느끼고 있었다. "저 여자한테 알겨먹은 돈은 얼마냐?" 내가 연미희를 가리켰다. 박명수는 고개를 겨우 들었다. "이천만 원입니다." 연미희가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박명수의 아랫도리를 걷어찼다. 비명을 지르며 계곡으로 굴렀다. "네 발로 기어와라. 빨리!" 박명수가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돈은 찾아 주겠소. 저 자식한테 속은 건 잊어 버리쇼. 다시는 속지 좀 마십쇼." "네."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저 자식을 어떻게 알게 됐소?" "여의도 황마담 언니가 소개해 줬어요." "처음에 뭐라고 합디까?" "재일교포고 사업가고, 고국에서 결혼하고 했어요." "황마담이라면 아파트에서 비밀요정 하는 여자 말하는 거요? 왕년에 배우 노릇했던 예편네 말요?" "맞아요." "그 여자가 소문대로 신인들 쥐고 흔드는 여잡니까?" "...... ." 연미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명수가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가씨는 먼저 내려가요." 연미희는 내가 시키는 대로 녀석을 따라갔다. "살려 주세요. 저 좀 살려 주세요." "별로 살려 주고 싶은 맘이 안 생긴다. 너 같은 놈 살려 주면 염라대왕한테 혼날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그냥 살려달라는 거냐?" "하란 대로 다 하겠습니다." "약속할 수 있냐?" "맹세하겠습니다." 박명수가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비볐다. "파리란 놈이 그렇게 잘 빌더라. 너 같은 놈은 선량한 재일교포들한테 평생을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도 모자랄 놈이다." "살려만 주시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럼 네 집으로 가자." "예예." "나한테 수 틀린 짓하면 그 자리서 염라대왕한테 보내겠다. 눈깔 똑똑하게 뜨고 나는 표창을 꺼내 박명수의 양쪽 구두코에 정확하게 꽂았다. "제발...... ." "앞장 서라." 박명수는 잘 걷지 못했다. 뒤뚱거리며 계곡을 내려갔다. 계곡 입구에 기다리고 있던 애들이 손을 들었다. "됐습니까?" "그래. 차 잡아와라." 애들이 뛰어가서 택시를 잡아왔다. 밤 열두 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얌전하게 타라. 내 말 명심하고." 박명수가 힘들게 뒷자리에 탔다. 하나님. 차마 하나님도 할 말이 없으실 겁니다. 그냥 잊어 버리세요. H아파트 12층에서 내렸다. 박명수는 문을 따고 들어서더니 침대 위에 고꾸라졌다. 금고 열쇠를 내놓고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금고를 열었다. 여러 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은행의 저금통장 속엔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금붙이와 보석류도 꽤 많았다. "이게 전부 해먹은 거지?" "네." "몇 년 됐냐?" "삼년 됐습니다." "일본에서 무슨 짓 했냐?" "고물상 하다가 망했습니다." "너 같은 놈은 고물로 팔아 치웠어야 하는 나는 집 안을 죄 뒤져 일본의 본처와 오고 간 편지봉투를 찾아냈다. "일본에 있는 네 마누라한테 자세하게 통보해 주마. 한국에 와서 사업한답시고 여자들 등쳐먹은 걸 그대로 알려 주마." 내가 턱주가리를 한 대 갈기며 이렇게 말했다. "제발 봐 죽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저 한번 봐 주세요." "일본으로 빼돌린 돈을 무슨 재주로 찾냐 이 말이다." "당장 제가 전화해서 돈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무슨 재주로 한단 말이냐?" "여기서 사업 확장한다고 하면 됩니다. 정말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봐 주시는 거죠?" "그렇다. 난 약속을 지킨다." 박명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로 전화를 끝냈다. "보냅니다. 꼭 보낸다고 했습니다." "만약 허튼 짓 했다간 일본에 있는 내 친구를 시켜서 너를 박살내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박명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걸 체념한 것 같았다. 내 손아귀에 걸려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애들이 통장과 도장을 챙겼다. 박명수는 비밀번호와 은행의 위치까지 털어놓았다. "널 고발하면 네 신세가 끝장난다. 그러나 네가 이만큼 성의를 보여 줬으니까 용서하려는 거다." "압니다. 고맙습니다." 아침에 나간 애들이 돈을 찾아가지고 왔다. 일본에서 보내는 돈은 일주일 후에 틀림없이 되돌려 받기로 했다. "이 명단 믿어도 되겠지?" "이 마당에 거짓말 하겠습니까? 믿어 주세요." "좋다. 이걸로 입원이나 해라." 나는 현금 뭉치에서 한 다발을 내놨다.박명수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자." 박명수는 문을 열어 주고 꾸벅거리며 절을 했다. 애들이 그런 박명수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우리나라 여자 등쳐먹지 마라. 쪽발이년들이든 양코배기년들이든 삶아먹는 "알겠습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박명수가 적어 준 쪽지대로라면 열 명도 넘게 박명수의 꾐에 넘어간 것이었다. "저걸 그냥 살려둬요?" 애들이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봐 주자. 그놈도 내 핏줄이다." 애들이 아무 말없이 침을 찍 뱉었다.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