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堂 漫筆>
숨김의 미학
박성환
우리 어린 시절에는 집밖의 동네공터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집단적으로 노는 놀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숨바꼭질은 아이들이 자주 하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아내는 놀이다. 인간에게는 숨겨진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어린 시절의 숨바꼭질은 인간의 이러한 본능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놀이라 할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예술이 무어냐는 물음에 조각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안에 숨어 있는 형상(形象)을 꺼내는 것이라 했다. 그 형상을 둘러싸고 있는 돌조각을 쪼아서 부스러뜨려내고 가치 있는 형상을 꺼내는 예술이라 하였다. 일본의 교세라 기업의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연구 개발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이 우주 어딘가에 ‘지혜의 창고’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무언가를 절실히 바라고 미치광이처럼 몰두하다보면 그 숨겨져 있는 지혜의 창고로부터 섬광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찾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숨겨진 다이아몬드는 만들 수 없고 캐내야 하듯이...
하이데거는 자연의 감춤과 숨김은 무한하여 우리가 알고 만나는 세계는 극히 작은 부분이며, 드러난 세계는 숨겨진 세계의 아주 작은 사건이라 하였다. 세상이 신비로운 것은 만물은 드러나면서 더 큰 세계로 자신을 숨기기 때문이며, 숨겨진 자연이 드러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감을 느끼게 하고, 감춤-숨김은 드러남-나타남과 더불어 우리 존재에 무한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자연과 미지 세계의 신비를 파헤치려는 19C 과학자들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자연은 무한히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그것을 드러내거나 발견해 내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며, 역사는 자연이 감추거나 숨기고 있는 것을 파헤치고 발견해내서 인간의 의지와 의미대로 가공하는 과정이라 하였다. 어둠 속에 묻힌 물상(物象)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두워지면 사라지지만, 밝아지면 다시 나타나는 것.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物象을 돌려주지.”<박남수, ‘아침 이미지’ 중에서>) 어둠이 우리의 시야를 여닫듯 우리 인간의 눈은 우주를, 자연을 여닫는다.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에는 사소한 것이든 거창한 것이든 인간에게 숨김과 드러남, 드러남과 숨김의 이원적(二元的) 운동의 근본원리가 관류하고 있단다.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다. 이 호기심은 감추어진 것, 숨겨진 것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기제(機制)의 일부는 미지의 것, 새로운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이 ‘지적 호기심’은 자연의 ‘지혜의 창고’에 숨겨진 무한한 그 무엇을 그냥 지나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지혜의 창고’ ‘지적 호기심’, 이 둘은 잘 매치(match)되는 조합이다. 숨김은 결국 호기심이라는 기제를 통하여 드러남으로 그 끝을 보게 되지만, 드러남의 결과는 또 다른 상황 발견의 빌미를 제공하는 기제가 된다. 숨김이 드러남이 되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에서는 자신을 숨기는 연극을 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사회의 대다수가 따르는 ‘사회적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이 사회에서 사형을 선고 받을 위험성이 있다.” (까뮈, 『이방인』서문에서) 취업을 위한 면접의 경우 얼굴을 대면하여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때 그 얼굴은 가면을 쓴 숨긴 얼굴이다. 면접이 끝나고 문을 나설 때 스치는 표정, 술집에서 회사 동료들과 상사를 안주거리 삼아 히히덕거릴 때의 얼굴표정, 그런 게 ‘숨김이 없는’ 얼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술집이나 사적 공간에서 굴러가는 게 아니다.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이 아니라 가면 뒤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그게 사회생활의 본질에 더 가깝다. 가면을 벗고 숨기는 것 없이 진실 되게 살아가자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아직 사회와 인생을 잘 모르는 철부지일 뿐이다.
숨김이 비난 받고 숨긴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진상을 밝히라고 아우성치는 집단 시위가 자주 벌어진다. 국가적 권력과 관련되어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숨기는 것이라 짐작되는 사안은 국민의 ‘알 권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매도된다. 그런 경우 대개는 부정부패나 권력남용 등 사악한 공권력 행사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아무리 숨겨도 감출 수 없고, 아무리 감추어도 숨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알 권리’가 무시될 때 사회는 불신(不信)의 늪에 빠진다. 불신 사회는 혼란의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무신불립(無信不立)--신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 불신은 불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가 없다. 어둠이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듯이.
대중은 완전히 까발린 진실이라야 믿는 경향이 있다. 숨김의 여러 상황이 외부로 노출될 때에만 핵심적인 진실로 여긴다는 말이다. 옳은 말이지만 그런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연을 대변할 뿐이다. 진실이라고 전해진 것 모두를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숨김을 탈출하면 거기에 진실이나 진정 같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진실의 진짜 얼굴은 모세혈관으로 뒤덮힌 핏발이 발갛게 선, 적의(敵意)가 가득한 모습이기 십상이다. 어떻게 그런 얼굴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술집 같은 사적 공간에서 서로 핏발 선 얼굴로 마주 앉아 진실이라는 것을 안주로 술 마시며 시간 보내는 것은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소설가 이상(李箱)이 말했듯이 우리 인생은 까고 또 까보아도 알 수 없는 양파 같은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짐작이 난무하고, 짐작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바람처럼 휩쓸다 쓰러지는 풍문(風聞)--가십(gossip)을 횡행하게 한다. 가십은 전달하는 자가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고 각색, 왜곡된 내용이 전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진실은 사실상 해석된 진실이다.”[니체] 그래서 숨겨진 진실은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이 잘못 하여 생긴 추한 진실은 대개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드러내려 하지 않고 숨긴다. ‘도둑질’, ‘간음’ 등 원초적인 죄(罪)는 불교에서는 “karma(업:業)”이라 한다. 업은 우리 마음속에 쌓이지만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괴로운 고해(苦海) 속에서 헤매게 한다. 숨겨져 있어 남이 모르지만 ‘숨김의 고역(苦役)’ 임에 틀림없다. 진실의 이런 숨김은 ‘숨김의 추(醜)한 면’일 것이다.
숨김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호수에 평화롭게 떠다니는 백조는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유유하고 번듯해 보이는가. 그러나 물아래에서는 물위에 드러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물갈퀴는 물아래에 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물위의 평화스런 모습을 연출하기 위하여 온힘을 다하여 요동치는 것이다. ‘숨김의 미학(美學)’ 아니겠는가.
인간은 지적 호기심 때문에 불완전한 정보를 갖게 되면 완전한 형태의 정보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빈틈이 생기면 메우려 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불완전하면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예컨대 중간 중간이 비어 있는 불완전한 점선(點線)으로 이뤄진 원은 빈틈이 전혀 없는 실선(實線)으로 완결된 원으로 상정한다. 19C말의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인기를 끌었다. 인상파 화가는 그림과 대상 사이에 뭔가를 탈루(脫漏)함으로써 보는 사람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빈틈을 채워 넣게 한다. 인상파 이전 화가는 가능한 한 대상을 똑같이 재현(점선이 없는 실선으로)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점선을 채워 넣는 재미를--그림을 보며 이러 저러한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인상파그림은 그림과 대상 사이에 숨겨진 그 무엇을 두고 화가와 관람객 사이에 게임이 벌어진다. 화가는 될 수 있는 대로 찾지 못하게 숨기고, 관람객은 그 숨긴 것을 찾아내려는--‘숨김의 미학’을 두고 시소게임이 벌어진다.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도 동물들처럼 남을 끌어들이려는 흡인본능(吸引本能: instinct to abstract others by pleasing)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표현본능(自己表現本能: self-expression instinct)이 있다고 한다. 카나리아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 것이나 수꿩이나 공작새의 꼬리가 영롱하고 아름다운 것 등은 흡인 본능 때문이란다. 인간도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장식물을 붙이고 문신이나 치장, 화장을 하는 등으로 자기표현을 한다. 지하철에서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하얀 무릎을 드러낸 채 맞은편에 앉아 있으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그녀들도 앉은 모양새가 여간 불편해 하지 않는다. 치마는 덩그마니 올라가 허연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보기 민망하다. 치마를 무릎 쪽으로 내리려고 자꾸 당겨보지만 이미 짧디 짧은 치마는 내려올 리 만무다. 그렇게 민망하고 불편해 할 바에야 왜 짧은 치마를 입고 나오는 걸까? 남의 시선과 주의를 끌려는 흡인본능과 제 속의 생명력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은 자기표현본능 때문이겠다.
여성의 흡인본능과 자기표현본능은 특히 성적 욕망에 닿아있다는 주장이 있다.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상대방을 흡인하는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을 촉발시키는 것은 몸 전체가 아니라 드러난 육체의 특정부위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가시고기는 번식기가 되면 암컷은 배가 풍만해진다고 한다. 이때 풍만한 배의 암컷을 보면 수컷은 본능적으로 구애의 춤을 춘다고 한다. 배가 불룩하기만 하면 나무토막이라도 상관없다. 암컷의 몸뚱이 전체가 아닌, ‘풍만한 배’라는 신체의 특정부위가 성적 끌림을 발생시킨다고 한다. 인간의 경우에도 홀랑 다 벗은 완전 나체보다는 많은 부분이 가려지고 숨겨지고 일부 드러난 여체, 엉덩이나 종아리 등을 훔쳐 볼 때 욕망이 더 잘 촉발 된단다. 역설적이게도 육체의 숨김이 완전 나체의 드러남보다 더 고혹적이라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서 캄캄한 밤에 프쉬케가 시각(視覺)이 차단되어 에로스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숨김의 미학을 시사하는 신화라 할 수 있겠다. 시각이 차단된 숨김은 상상 속에서 사랑(Eros)과 영혼(Psyche)이 결합하여 완벽한 기쁨(Volupta: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이 탄생한다. 육체와 관련된 성적상상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 속에 숨겨진 것을 보는 사람이 찾아내게 하는--그림을 보며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이러 저러한 상상과 해석을 하게 하는 재미를 주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여성들이 짧디 짧은 치마를 선호하는 것은 흡인본능과 자기표현을 위하여 인상파 화가들이 구현한 ‘숨김의 미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어느 해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적벽(赤壁)에 놀이 갔다가 “적벽부(赤壁賦)”를 남겼다. 여름, 7월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겼던 그는 그 풍경을 못 잊어 11월에 벗들과 다시 겨울 뱃놀이를 감행한다. 같은 장소임에도 여기가 그때 그곳인가 싶으리만치 달랐다. 배가 적벽 아래로 들어서자 여름의 풍부하던 수량이 줄어든 때문에 물속에 잠겼던 바위가 수면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다. 여름에 보이지 않던 바위가 물이 줄어들자 제 생긴 대로 울퉁불퉁, 흉한 몰골을 수면 위로 드러낸 것. 더 이상 볼 흥미도, 더 보려고 애쓸 마음도 없구나! 이 시는 수량이 풍부할 때는 흉한 몰골을 다 가리고 품어 안아 드러나게 하지 않음으로써 ‘숨김의 미학’이 넉넉하였기에 물속에 무엇이 숨겨있는가 상상과 추측과 추구가 이어지는 것. 그러니 흡인본능을 동반한 자기표현도 이렇게 본색을 다 드러내면 호기심이 사라지면서 아무런 흥미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로지 보기에 민망함과 수치심만 남기는 것과 같다. 수치심의 원형은 나체 노출이다. 수치(羞恥)의 희랍어는 ‘aidoia(아이도이아)’, ‘성기(性器)’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다. 수치심 때문에라도 노출된 몸은 옷으로 가려져야 한다.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는 드러내기보다는 아스라니 감추거나 숨길 때 흡인에 효과적이다. 홀랑 다 드러내면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추하고 역겨운 느낌만 줄뿐이다. 온몸이 다 드러나면 하느님 앞에 나체로 선 아담과 이브처럼 부끄럽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수치가 발견하는 것은 ‘폭로되는 자기존재’뿐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숨겨진 아름다움에서 비쳐 나온다. 눈을 현혹하는 드러난 화려함은 잠시 눈을 끌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다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머금고 있을 때,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삶의 가장 절정의 순간에도 ‘숨김의 미학’이라야 진정한 즐거움이 배태(胚胎)된다.
2016.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