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구덕운동장
지난 사월, 건축계에서는 ‘부산 재창조 아이디어 콘서트’라는 꽤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부산의 역사적 장소 중 하나인 구덕운동장 주변의 재개발에 대한 반성이 건축가 그룹 ‘도시건축 포럼 B’의 멤버들을 주축으로 탐구되고 발표되었다.
앞서 부산시는 노후화가 진행되는 주경기장과 야구장 실내체육관을 포함한 6만6천여 평방미터의 일원을 수익형민자사업(BTO)방식으로 재개발하려는 업자의 제안을 받고 난처한 처지임을 고백한 바 있다. 결국, 전면적인 재개발을 백지화하고 장소의 역사성을 보존하려는 학계와 시민단체의 입장을 일부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힘이 실렸다.
내가 사태의 흐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고나 할까. 건축적으로 살피면, 1971년부터 건설된 운동장 주변의 시설물들은 콘크리트 전성시대에 지어진 근대의 구조물들로 크고 거칠다. 그럼에도 대신동에서 학교에 다니던 우리에게는 마치 정교한 오벨리스크나 되듯 하나의 상징으로 지금껏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위에는 유독 학교들이 많아 학생들의 열기로 늘 활발한 거리를 이루었다. 광장은 약속 장소가 되었고, 간혹 여학생과 만날 수 있는 ‘만복당’ 같은 빵집들도 모두 그 주변에 있었다. 여고 대항 농구 경기가 열릴 때면 수업을 빼먹고 몰래 응원 갔다가 정학 당하던 이유 있는 반항심의 근원지였다. 축구나 야구 경기가 열리면 우리 학교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곤 하면서 모교의 자긍심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사회 초년생이던 80년대 초 프로야구가 개막될 무렵에는 운동장 또한 팔팔한 전성기였으니, 운동장은 나의 세대와 삶의 궤적을 같이 해 온 것이다. 이후, 마치 동네 지킴이 어른이 알게 모르게 나이를 먹은 모습을 우연히 발견하듯이 운동장 또한 풍운의 세월을 지나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고나 할까? 누가 뭐라 하더라도 대신동을 누비던 어떤 이들에게 운동장의 숙명은 섣불리 묻어버릴 수 없는 푸르고 짙은 회한의 그림자다.
내가 이곳을 더 애틋하게 추억하는 이유는 또 다른 데에도 있다. 그해 여름은 왜 그리 더웠던지. 대신동에 있는 우리 학교는 전국체전 식전 행사 때에 매스게임을 해야 하는 학교로 배정받았다. 지금 같아서는 학부형의 반발로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우리는 사 개월여를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 일에 매달렸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인간 군무의 완성을 목표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름 내내 진행된 훈련을 길고 지루했다. 때론 체벌로, 때론 격려로 한 명의 열외도 없이 1학년 전체가 집체훈련에 동원되었다. 카드섹션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일에 동원된 경쟁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내가 목표하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 일 때문이라 지금도 변명하곤 한다. 생각해 보니 수출을 상징하는 무역선의 출항이 주제였던 것 같다. 더러는 친구의 목마를 타고, 더러는 스크럼을 짜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체전의 개막이 대통령으로부터 선포되고, 조마조마 군무를 펼친 우리는 최고의 갈채를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했고, 몇몇 선생님들께 표창장이 주어졌다. 이후로 모든 집체훈련에 대한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 구덕운동장은 가슴 울렁거림과 육체적 괴로움을 동시에 내 추억의 방에다 새겨 놓았다. 운동장 주변을 통과할 때마다 내 가슴이 뛰는 이유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담장 아래에서 골동품 난전이 펼쳐지곤 한다. 나오는 물건들이야 오래되고 조잡스런 물건이 태반이고, 운동장 구조물의 큰 덩치에 비하여 작은 골동품들의 모습은 얼마나 대조적인지 웃음을 자아내게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세련되지 않은 물건들과 질서없는 상행위들이 밉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마치 운동장과 내 추억의 역사만큼이나 우리의 삶에 오롯이 새겨진 물건들이고 묻은 손때가 남의 것 같지 않아서 일 테다. 생각해 보면 시류의 변화에 맞게 내 주위도 첨단의 것들로 수차례 바뀌었다. 불편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하여 버린 것은 또 얼마일까? 하지만 추억이란 방에서 꺼내어 보면 열사에서 만나는 소나기와 같이 삶의 치열함을 잠시의 식혀준다. 오래되고 불편하다 하여 쉬이 버리지 말아야 함을 골동품은 역설한다.
나는 추억과 같이 느긋한 유추행위를 포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라 본다. 도시의 흔적은 그러한 정신 작용의 매개다. 논란이 되는 운동장 주변의 시설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경제성이나 세련됨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해되어야 하지만, 시민과 희로애락을 같이 해 오던 장소의 야멸찬 소멸은 아무래도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이 발전하면 할수록 같은 양 만큼의 기억 또한 남겨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나 같은 낭만파에게는 운동장 주변이 그렇고, ‘대신동’이라는 동네가 그렇고, ‘서구’라는 원도심의 역사가 그러하다. 개발되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는 주민들에게 욕 들을지 모를 일이지만, 웬만하면 남겨 두자고 또 억지를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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