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적 영(pneu'ma) 이해의 특징은, 무역사적이며 비인격적이라는 점에 있다. 사람이 신령해지면 질수록 현실의 역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내면적 심령적 구원에 몰두하게 된다고 보는 점에서, 그것은 무역사적이다. 영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 여겨서, 소유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점에서, 그것은 비인격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바울의 성령 해석은 역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사람이 성령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더욱더 현실의 역사와 그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책임적이 된다고 보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이다. 성령의 역사(役事)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는 점에서,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바울의 성령 해석이 이러한 특징을 갖는 것은, 그가, 선교 현장과 동떨어져 있는 어떤 신령한 존재의 정체나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문제와 씨름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럴 듯한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권능의 나타남으로 하였다고 한다(고전 2:4). 그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성령과 능력을 밀접히 연관시키며,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였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이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役事)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였으며, 그 공동체는 그러한 경험을 기초로 하여 세워졌다. 그들이 경험한 성령의 역사는, 사회적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개인의 어떤 심령적 내면적인 황홀경의 체험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된 공동체적 경험이다. 따라서, 바울의 성령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성령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그 사회적 상황을 밝혀야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그 사회적 상황을 살펴 보고, 다음으로, 그렇게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시작한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고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 살펴 보고, 끝으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 해석은 어떤 것인지 살펴 보려고 한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회적 상황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논할 때 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구절은 고전 1:26∼28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그들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에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구절(26절)이 중요한데, 이것을 해석하는 데서 학자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나타낸다. 첫째로,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그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 사람들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카우츠키(Karl Kautsky)는, 고전 1:26-28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가난한 계급들이 이룬 운동이며, 그들을 일반 용어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다이쓰만(Adolf Deissmann)도, 이와 비슷하게, 고전 1:26 이하를 근거로 하여, "신약성서가 나타내는 비문학적 성격"을 볼 때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람들은 당시 사회의 하층민들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들만을 가지고,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어떤 단일한 계층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판단이라고 하겠다.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부유하다고 서술하는 구절들도 있다(4:8.10).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에 참여할 것을 권한 것도 그들이 최소한의 재산은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후 8:7; 9:14).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갈등(11:17-22; 8:1-13)은 그 교회가 단일한 계층으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많지 않다'(1:26)는 표현에 주목하면서,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하류 계층에 속하였지만 적어도 소수는 상류 계층에 속하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타이센(Gerd Theissen)은, 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 '지배적 역할을 하는 소수'라고 본다. 그는, 고린도교회는 하류 계층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나 상류 계층의 어떤 움직임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어떤 공동체였다고 본다. 헹엘(Martin Hengel)이나 스미스(Robert H. Smith)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나타낸다. 이러한 연구들은,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사회적 신분을 밝히려고 한 점에서, 이전의 단일 계층론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앞 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26절의 강조점은, 고린도교회에 지혜 있는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음'을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음'을 말하는 데 있다. 그들 가운데, 소수의 지배 집단이 있어서 다수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하나님이 다수의 하층민을 택하신 일이 어떻게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며,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는 일(27-28절)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것이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29절)이 될 수 있겠는가? 고전 1:26에서 나오는,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기술이나 철학적 지식을 습득한 사람을, '권력 있는 사람'은 정부의 고위 관리나 이방 종교의 지도자를, '훌륭한 가문'은 귀족의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많지 않았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구절들이 고린도전서에 적지 않게 나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설명을 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의 신분을 설명하기 직전에,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을 생각하여 보십시오"(26a절) 하고 말을 시작한다. 이 말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설명이,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세워지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것임을 의미할 수 있다. 즉,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대한 엇갈린 서술이 나오는 것은, 그 교회가 세워지던 때부터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까지 몇 년 사이에, 그들의 삶의 처지가 변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의 변화 갈릴리의 예수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단일한 민족과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고린도교회 초창기에는 예수 운동의 이런 성격이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26절은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1:2.24.26)이라는 의식을 가진 점에서,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일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고린도는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정책 때문이다. 시이저(Julius Caesar)는, 고린도를 로마의 식민지로 건설하면서, 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고린도에서는 로마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고, 고린도는 그것의 전통에서 어떤 연속성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린도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고린도는 무역과 금융뿐만 아니라, 상업과 공업, 그리고 정치적 행정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27년부터 고린도에는 아가야(Achaia) 지방 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빈부격차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서,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회적 신분의 변화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때까지 기간은 길어야 3∼4년에 불과한데, 그 정도 기간에 고대 사회에서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변화는 이전의 신도들과 사회적, 경제적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새로운 회원으로 들어온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에는 유대 사람 중심의 선교를 하다가, 나중에는 이방 사람을 중심으로, 특히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교한 것(행 18:6b-7)은 이러한 상황과 관계 있는 것일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의 신앙과 도덕적 원리에 동조적인 이방 사람들이다. 디디우 유스도를 비롯하여 그들 가운데는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고넬료, 루디아 등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 거론되는데, 고넬료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으며(행 10:1-2),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수였다(행 16:14-15). 사회적 고위층의 비율은, 대체로 노예와 같은 가장 낮은 계층 출신의 사람들인 개종자들 가운데서보다, 헬레니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안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고린도교회의 부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26절에서 언급된, '지혜도 권력도 없고, 가문도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은,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에도 교회 신도들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교회를 설립할 당시에는 낮은 계층에 속하였지만 지금은 이전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는 노예도 있었다(7:21; 1:11).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이러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미 민족이나 계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동질성을 갖는 집단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고린도교회의 전체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교회는 아무런 원칙이나 목표도 없이 우연하게 구성된 어떤 혼합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신분은 이러한 사회적 신분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다.
'성령의 기준'에 따른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신분 2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육신의 기준'(kata; sarkav)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신분을 설명하는 데는 '육신의 기준'과는 다른 어떤 기준이 또 있음을 함축한다. 그것은 '육신의 기준'과 대조를 이루는 점에서 '성령의 기준'(kata; pneu'ma)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준이라면, '성령의 기준'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를 때에 사용한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또는 '주님께 속한 자유민'이라고 한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은, 어떤 사회적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다(1:23a). 그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혜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였고, 지혜도 능력도 없고 가문도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바울은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민족과 계층과 출신성분을 불문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1:2, 9, 24, 26; 7:18, 20-22, 24).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세상의 지혜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가능하며(1:24),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가능하다(2:10).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어떤 민족적, 계층적 동질성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구원의 현실에 참여한 사람들이 갖는 동질성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민족적, 계층적 동질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문제시하지 않지만,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동질성을 깨뜨릴 때는 엄하게 견책한다(1:13; 3:3; 8:12; 10:21-22; 11:22). 출신 민족과, 계층이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구원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타이센(Gerd Theissen)은 이러한 점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보려고 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바울이 상류 계층 사람들과 하류 계층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타협을 시도하였다고 보며, 이것을 '사랑의 가부장주의'라는 표현으로써 설명을 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의 가부장주의'는 바울 윤리의 근본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바울이 사회 질서에서 일어나는 분열에 직면하였을 때에, 종교적 차원에서 통합을 추구한 윤리이다. 바울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는 그대로 두고 종교 영역에서 어떤 절충을 하려고 하였다. 사회적 기준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스스로 도우려고 할 이유가 없지만, 교회에서는 '사랑의 가부장주의' 정신으로, 곧 가정에서 인자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것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헹엘(Martin Hengel)도 이와 비슷한 입장이다. 이와 같은 '사랑의 가부장주의'는 상류 계층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부자들에게서 그런 윤리적 사랑을 기대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분열의 모습과 그것을 꾸짖는 바울의 말들을 볼 때에, 그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류 계층 사람들의 윤리적 결단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설명하지 않았다. 티드볼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다른 위치를 얻으려고 갈망하지 말고 지금의 신분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비추어서 그러한 구별을 재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지도권은 중간 계층과 엘리트 층에게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 교육적 기능만이 아니라 교회 모임을 열 수 있을 만한 재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그들을 지지하였지만, 그들이 취한 태도나 행동에 대해서는 불만을 나타냈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의 결점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세상적 자만심을 버릴 것을 권고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원칙에서 움직이며 완전히 새로운 인간 관계를 누리는 어떤 '대안 사회'(alternative soceity)임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교회를 세상과는 다른 원칙에서 움직이는 '대안 사회'로 본 것은 옳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에는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의 자만심이나 마음의 완악함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안 사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기준'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룩한 고린도교회는, 그와 같은 사회적 타협이나, 개개인의 자제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드는, 구원의 현실에 기초한 것이다. 그 구원의 현실, 또는 사람들이 그것에 참여한 과정에 대해서 바울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에 참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1:22-25). 그들은 '육신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이며, '세상의 약한 것'이며,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택함과 부르심 때문에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지혜 있는 자', '강한 자'는 부끄럽게 되고, '잘났다고 하는 것들'은 존재도 없게 된다(1:27-28).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알고, 예수를 '영광의 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받음으로써 가능하다(2:6-12).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 곧 타협이나 자제의 지혜를 모색하는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하였다(2:4-5).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부유한 계층의 자제나 양보로써 이루어진 어떤 타협이나 가부장제적 사랑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시받던 사람들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구원의 현실을 경험한 데서,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께 속한 자유민 바울을 타협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은 흔히 고전 7:17-24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들은,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7:20)을, 어떠한 변화도 추구하지 말고 그대로 현상 유지를 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변화시키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고, 다만 공동체 안에서 갖게 될 새로운 신분을 약속한 것이 된다.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세 번이나 거듭하여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아가라'고 촉구한다(17, 20, 24절). 그런데, 같은 구절들에 나오는, 각 사람에게 주는 권고들에는 어디에도 그들의 처지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 권고들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살아가시오'(17절), '그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안에서 머무시오'(20절), '그가 부르심을 받은 사실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오'(24절)이다. 이 구절들에서 강조점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구원의 현실'에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고전 1:26에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그들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그들이 참여한 '구원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1:26과 7:20은 '부르심'(klh'si")이라는 단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위의 세 구절들을 1:26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에, 위의 세 구절의 의미는, '각 사람은 변화를 추구하지 말고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타협주의적 말이 아니라, '각 사람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타협주의'와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7:22은, 노예와 자유인의 첨예한 대립을 무효화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고 하는 타협주의적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을 없애거나, 주 안에서는 그러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어떤 타협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은 다음에 나오는 23절과 관련하여 보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신분을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노예가 되거나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노예는 주님께 속한 자유민(ajpeleuvqero": freedman)이며, 그와 같이, 자유인(ejleuvqero": free man)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이다(22절). 이 구절에 따르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노예가 되거나 자유민(ajpeleuvqero")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상의 신분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신분을 얻었지만, '부르신 분' 앞에서는 종이거나 자유민(ajpeleuvqero")일 수밖에 없다.
바울이 성령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상황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옴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에는 없던,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지식을 가진 사람과 지식이 없는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표출되어,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영(pneu'ma) 이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성령 이해를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이러한 분열을 조장하고 또 가속화시켰다.
공동체의 분열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성만찬과 관련한 공동식사에서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한 일을 두고 바울은 가진 사람들을 견책하였다(11:17-22). 그들은, '먹고 마실 집'이 있고, 잔뜩 먹고 취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무시를 당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22절) 곧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만찬 시간에 맞춰서 올 만한 시간적 여유도, 만찬에서 먹을 것을 준비할 경제적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야 하는 날품팔이나 부두 노동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람들이 공동식사 자리에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먼저 잔뜩 먹고 취한 일을 두고,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20절).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를 깨뜨리고,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공동식사를 하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으라고 권고한다(11:33-34절). 타이센은 이러한 권고가 어떤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는 말은, 부자에게 자기 집에서는 자기 형편에 따라서 먹어도 되지만, 주님의 만찬에서는 교회의 규범에 따르라고 제안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의 타협은, 한편으로는 공동체 안에서의 계급의 특유한 차이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러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는 권고(34a절)를 어떤 타협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바로 다음에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는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34b절). 집에서 먹으라고 한 것은 실제로 집에서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식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심판을 받을 일임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있다. 줄곧 그들을 '여러분'이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배가 고픈 사람은' 하고 부른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으라고 실제로 제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도 배가 고프면 ' 하고 넌지시 책망하는 것이라 하겠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지식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이다(8:1-13). 바울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약한 사람' 또는 '양심이 약한 사람'이라고 부른다(8:7, 10, 11). 그들은 한 때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이며, 지금까지도 우상을 섬기는 습관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에는 자기들이 먹는 고기가 참으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양심이 약하여,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8:7). '약한 사람'과 대조를 이루는 '강한 사람'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8:1). 그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를 두고,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지적이며, 개인적 자유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8:4). 개인의 자유에 대한 사고에서 그들은,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하는, 극단적인 단계에까지 나간 사람들이다(8:8; 10:23). 그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고기를 대접할 만한 사람들과 사귀는 점에서, 부유한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10:25-27).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승전 기념 행사, 큰 종교 축제, 의식이나 제의, 신전에로의 사적인 초청 등에서인데, 이러한 기회는 자주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기를 먹고 안 먹고 하는 식성의 문제나,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 하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여 함부로 행동한 데서 일어난 '교만'의 문제이며(8:1), 사람들을 서로 갈라지게 하는 분열의 문제이다.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였기에 바울은, '강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지식으로 '약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는 그 '약한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그것은 그 형제들에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하게 견책한 것이다(8:11-12).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 공동체의 이와 같은 분열 현상은 열광주의자들의 등장과 함께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들의 헬레니즘적인 영/성령 이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성령 이해와 생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고린도교회의 초기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1:2, 26)이 갖고 있던 성령 이해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잘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의 선포가 성령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며, 그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고 한다(2:1-5). 그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으며(2:12), 그 결정적 증거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영광의 주'로 고백하는 데 있다고 한다(6-12). 이런 점에서, 그 당시에 고린도교회에 널리 퍼진 성령 이해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그 시기를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라고 하는데(2:3), 이는 그가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시기, 곧 고린도교회가 세워지던 시기이다. 그 시기에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대부분, 지혜도 없고, 권력도 없고, 가문도 변변치 않은, 그 사회의 낮은 계층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부르심을 받았다(1:26-28).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요 그리스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1:23-24).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이 거부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점에서 똑같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그들이 그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하였을 때에,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들의 그러한 사회적 신분과는 상관없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役事)에 참여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성령 이해는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열광주의자들의 성령 이해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성령을, '신자에게 전달되는, 또는 신자가 그 안으로 이식되는, 어떤 이로운 실체'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7:40), 스스로를 '신령한 사람'(pneumatikov")으로 생각하였다(14:37). 그들은 신령한 것에 참여하는 데 몰두하여 현실의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든지(6:12; 10:23), "우리 모두는 지식이 있다"든지(8:1),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없다"든지(15:12) 하는 구호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한 것들이다. 이러한 지적인 구호들은 그들의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를 잘 나타내 주는 것들이다. 그들은 신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으며(6:12-20), 방종주의적이거나 금욕적인 결혼 윤리에 빠졌으며(7:1-40),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졌으며(10:23-11:1), 개인의 은사를 성령을 받은 표시로서 강조하였으며(14:1-40),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종말론적 소망도, 죽은 사람의 부활도 부정하였다(15:12-58). 이와 같은 성령 이해는, 현실의 삶을 도외시한 채 개인의 심령적 구원만을 강조하는 점에서,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무역사적 성령 이해이다. 바울은 이러한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가 공동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음에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役事)에 참여한 것을 기억하여,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를 확립함으로써,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를 극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제, 바울이 제시하는 이러한 성령 이해의 논점을,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성령'에 대한 그의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의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성령 고린도교회 열광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종교나 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공동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이론이 분분하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들의 성령 이해가 당시의 헬레니즘적 프뉴마(영/성령)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헬레니즘적 프뉴마 개념의 특징은, 그것이 사람이 어떠한 형태로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라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프뉴마 이해는 2세기 영지주의자들에게 와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예수의 선교 목적을 사람들에게 성령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보았다. 성령은 구원 그 자체이며, 예수는 영적인 것을 나누어 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는, 프뉴마를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로 보는 점과, 그리스도의 위치를 강조하지 않는 점에서,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와 비슷하다.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이 2세기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일 수는 없지만, 이미 바울 시대에 초기 영지주의의 싹이 자라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그와 같은 경향의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영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바울이 열광주의자들의 성령 이해를 문제 삼은 것은, 그들이 이러한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의 영향을 받아서 성령을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의 그러한 성령 이해를 물리치고, 성령은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구상화 할 수 없는 성령 프뉴마를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실체로 보는 사고의 특징은, 프뉴마를 어떻게든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구상화하는 것이다. 후기 영지주의에서는 프뉴마를 '빛'이라는 표상으로 표현하였으며, 철저히 내재주의적인 스토아 철학에서는 사물의 모습들 속에서 그 속에 깃들인 프뉴마를 보았다. 영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사고는, 1세기의 헬레니즘적 유대교, 스토아 철학자들, 플루타크 등에서 일반화된 현상이다. 신약성서 기자 가운데는 누가 기자가 헬레니즘적 요소에 친숙하다. 그는 오직 힘을 실체의 형식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헬라주의자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제 관심은 다른 데 있다. 헬라주의자와는 달리, 그는 성령이 '어떻게' 사람에게 침입하느냐 하는 것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서, 누가 기자는 성령의 활동을 어떻게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와 대조하여 보면, 누가 기자는 성령이 '형체를 가지고' 내린다는 내용을 첨가하였다(눅 3:22). 이것은 그 사건이 단지 예수가 본 어떤 환상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사건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묘사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성령을, 세차게 불면서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공간을 가득 채우기도 하는 바람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불같은 혀들'로 구상화한다(행 2:1-3). 나아가서 그는 집이 흔들리는 것으로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기도 한다(행 4:31). 누가 기자는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성령이 채워진다'거나 '성령을 부어 준다'(행 2:33)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령이 어떤 액체와 같이 사람을 채운다는 사고는 그리스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다. 누가 기자는 '채워진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pivmplhmi라는 동사의 단순과거 수동태인 plhsqh'nai를 자주 사용하며, 이와 비슷한 의미의 형용사 plhvrh"(행 7:55)나 동사 plhrou'n을 사용하기도 한다(행 13:52). plhsqh'nai라는 단어는 우리말로는 흔히 '충만하다'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 기자 가운데서 성령과 관련하여 plhsqh'nai를 사용한 사람은 누가 기자뿐이다(눅 1:15; 1:41; 1:67; 행 2:4; 4:8; 4:31; 9:17; 13:9). 누가 기자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곧 그가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그들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役事)를 개인의 내면적 환상이 아닌 객관적인 사건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열광주의자들도 사람들 속에서의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 개개인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음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 누가 기자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서도, 성령이 어떤 개인에게 역사함을 남에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언이나, 기적 행하는 은사, 병고치는 은사를 선호한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을 구상화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성령을 어떤 소리나 형체로 표현하지 않으며, 성령이 사람을 채운다거나 사람에게 성령을 붓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어느 은사나 다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고전 12:11), 은사에 차등을 두고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특정 은사만을 선호하는 것에 쐐기를 박았다. 대신에 그는 '남을 돕는 일'과 '관리하는 일'(12:28), 그리고 '섬기는 일', '나누어주는 일', '지도하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롬 12:7-8) 등, 곧 성령의 임재를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것을 은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것들을 은사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에게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나타남 성령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바울의 노력은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을, '주다'(divdonai)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기자의 경우에는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다(눅 11:13; 행 5:32; 8:18; 15:8). 그는 파루지아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간절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선교의 역사가 파루지아를 대신한다. 그는, 요엘이 말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영'(행 2:17)이 오순절 사건과 선교 역사에서 이미 사람들에게 부어졌다고 보았다. 그가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 것은, 종말이 지연된 선교 현장에서의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강조하려는 것이지, 사람이 성령을 소유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아예 한 번도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 적이 없다. 두 단어를 나란히 사용한 경우는 고린도전서에서 두 번, 그리고 고린도전서 이외의 바울서신에서 두 번 나온다. 먼저 고린도전서 이외의 경우를 보면, 한 번은 '성령'이 현재 분사(didovnta)의 목적어로 되어 있고(살전 4:8), 또 한 번은 과거 수동태 분사(doqevnto")의 한정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롬 5:5). 어느 경우에서나 그 분사는, 성령을 사람에게 '소유하도록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결하고도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려고(살전 4:3-7),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과 인내와 소망을 일으키려고(롬 5:4-5),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의 경우(12:7·8), 바울은, 독자들이 그 두 단어를 연관시켜서 성령을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고전 12:7을 직역하면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eJkavstw/) 성령의 나타나심이(hJ fanevrwsi" tou' pneuvmato") 주어진다(divdotai)"이다. 이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나 성령이 개인에게 주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役事) 속에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 곧 성령의 은사이다. 바울은 '주어지다'(divdotai)라는 동사의 주어를 '성령'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함으로써, 사람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는 있지만 성령을 소유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divdotai),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 하는데(8절), 여기에서 '성령으로'(dia; tou' pneuvmato")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라는 의미이고, '같은 성령으로'(kata; to; aujto; pneu'ma)는 '같은 성령을 따라서'라는 의미이다. 즉, 성령의 역사(役事) 속에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곧 은사가 사람들에게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사이지 성령이 아니다.
성령을 받음 '받다'(lambavnein)라는 동사는, 그 목적어가 사물인 경우에는 '취함'을 의미하지만, 그 목적어가 '성령'일 때에는 '받음' 또는 '영접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령을 '소유함'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힘'이다. 바울서신에서 이 동사가 '성령'을 목적어로 취하는 경우들(롬 8:15; 고전 2:12; 갈 3:2·14)을 살펴보면, 그 동사의 주어(성령을 받은 이)는 언제나 '우리'이거나 '여러분'이다. 이는 성령을 받은 주체를 개개인보다는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가운데 일어난 성령의 역사(役事)에 사람들이 사로잡힘을 의미한다. 곧,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일(롬 8:15; 갈 4:6),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영광의 주'로 고백한 일(고전 2:6-12), 복음을 듣고 믿은 일(갈 3:2,14)이다. 이러한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나타난 것은, 무슨 신비체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 곧 기도이다(롬 8:15·26-27; 갈 4:6). 개개인이 성령을 받는 것은, 공동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개개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지, 공동체와 관계없이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기자의 글에서 이 동사가 '성령'을 목적어로 취하는 경우들(행 2:38; 8:15.17.19; 10:47; 19:2)을 살펴보면, 바울서신의 경우들과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누가 기자는, '각 사람'(e{kasto")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고(행 2:38, 참조: 행 2:3),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도 한다(행 8:17-19). 그는, 성령을 받기 위한 조건 같은 것으로 회개, 세례, 죄의 용서를 들기도 하고(행 2:38), 사도가 손을 얹는 것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 매개로서 작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행 8:17; 19:6). 이런 것은 바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술사 시몬이 자기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해달라면서 사도들에게 돈을 내민 일(행 8:19)을 두고, 누가 기자는 그가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한 것을 문제 삼지만(행 8:20),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개개인에게 성령을 나누어주려고 한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는 어떠한 조건이나 중재도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본다(갈 3:2·14).
공동체 안에 임하는 성령 '여러분 가운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개인에게 임함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예수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활동을 묘사하는 것들이다. 예수와 성령의 관계는 특별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바로 성령이 개인에게 임하는 예를 끌어낼 수는 없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예수께 성령이 임한 경우 말고도 개인에게 성령이 임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임재를 말할 때는 언제나, 성령이 개개인에게 임한다고 하지 않고, '여러분 가운데'(ejn uJmi'n) 임한다고 한다(롬 8:9; 8:11 고전 3:16; 6:19 갈 3:5). 이는 곧 성령이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임함을 말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의미를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에는 '각 사람에게'(eJkavstw/)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롬 2:6; 12:3 고전 3:5; 4:5; 7:17; 12:7; 12:11; 15:38). 바울은 고전 12:7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이 주어진다고 하고 나서, 잠시 후에 다시 각 사람에게 은사가 주어진다고 한다(12:11). '각 사람에게'라는 표현을 이와 같이 두 번이나 거듭하여 사용한 것은 이례적인데, 그것은 그가 여기에서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나타나심' 또는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성령 자체가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임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는, 어떤 영적 실재가 하늘에서 땅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나 헬레니즘의 프뉴마 이해에서 나타나는 프뉴마 임재의 특징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프뉴마의 임재는 곧 프뉴마가 초월적 세계에서 인간에게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스토아 철학과 후기 영지주의의 프뉴마 이해에서 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프뉴마의 임재는, 공기가 사람의 코로 들어와서 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과 같이, 천상적인 실재가 사람의 몸 속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에서 나타나는 '빛의 파편'으로서 프뉴마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하늘의 어떤 본질이 사람 속에 나누어진 것이며, 육체 속에 갇힌 것이다. 현실의 삶을 도외시하고 신령한 것에 몰두한,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도 이런 식으로 성령의 임재를 이해하였다. 그들은 신령한 신적 본질이 '각 사람'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각 사람'을 신령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은 '각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계시며, '각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고전 3:16). 이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소나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役事)하는 곳에 계심을 말하며, 그곳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동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성전'(naov")을 단수로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개개인이 작은 성전을 이룸을 말하려 했다면 단수형 대신에 '성전들'(naoiv)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을 것이다.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고전 6:19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분은 성령의 전입니다'(3:16)라는 이전의 진술에다가 '몸'(sw'ma)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6:19)라고 한다. 이로써 신령한 삶이 내면적, 심령적 체험에서가 아니라 신체적 실존의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바울이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15:46)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롬 8:9). 이 구절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ejn uJmi'n) 임재하는 것과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 사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며,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다.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役事)할 때 그 현실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 안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거의 다 예수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예수의 삶과 활동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는 '성령 안에서'는 주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삶과 은사,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현실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는 열광주의자들에게서는 '신에 들려서', '황홀경에 빠져서'와 같은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말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ejn pneuvmati qeou')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가 아니고는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고전 12:3). 이 점에서도 바울의 성령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은 바울이 '성령 안에서'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롬 9:1; 고전 12:13과 갈 3:28). 고전 12:13과 갈 3:28은 둘 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말하지만, 전자는 '성령 안에서'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는 바울서신에서 주로 나오는 것인데, 그 의미는 전치사 ejn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것이 '장소'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그 장소를 역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신비적인 해석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수단'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활동을 어떤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함으로써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원 활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것이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전치사 ejn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관계'를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형식적, 교리적 관계로 보지 않는 한에서 타당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성령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정체도 모르는 영에 들려서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성령 안에' 있는 상태로 착각하는 열광주의자들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를 확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 관계가 아닌 역동적 관계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맺음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4:8). 이 말은, 지금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을 두고, 바울이 그들 자신의 표현을 가지고 비꼰 것이다.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희망으로 확립함으로써(6:14; 15:22-20),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종말론에 쐐기를 박았다.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는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자아도취나 교만으로 나타났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이러한 교만을 직·간접으로 지적하고 있다(4:6, 8, 18-19; 5:2; 8:1). 이것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 기초를 뿌리째 흔들어 공동체 전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위험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위험의 뿌리는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에 있다고 보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열광주의자들이 성령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바울은 성령은 구상화 할 수도 없고, 개인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령을 받음은, 어떤 내면적, 심령적 황홀경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께서 이룩한 구원의 현실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령이 임재하는 곳은 개인의 마음속이 아니라 공동체('여러분 가운데')임을 밝힘으로써, 성령의 역사(役事)는 내면적, 심령적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성령 안에서'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정체불명의 영을 받고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영을 분별하는(고전 12:10)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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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hillch 호주성산 신약신학 연구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해석 holyhillch 호주성산 신약신학 연구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해석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신약학회가 한국 교회의 모습과 자기 위치를 성서적으로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성서적 뿌리 찾기를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뿌리 찾기의 한 부분을 위해 바울의 교회 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특별히 바울의 교회에 대한 성령론적인 시각을 확대하면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교회 자체가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 생겨진 종말론적인 영적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교회 이해에 대한 성령론적인 접근이 가능할 때 비로소 기독론에만 얽매어 있는 정태적인 교회론을 벗어나 보다 역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이해가 그 동안 기독론에 의해 흡수되어 제대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일방적인 영적 신비주의 운동의 사역으로 내몰렸고, 그렇지 않으면 문화 철학적인 기의 명상운동이나, 또는 사회적인 투쟁 영성 운동으로 이해되어 왔고, 그와 같은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교회론적인 접근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결여된 채 기독론에 편향된 접근의 경우, 교회론의 교의적 근거에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교회의 역동적이며 유기적인 틀을 부각시키지는 못했으며, 영적 신비주의의 틀에서 본 교회론의 경우, 교회의 은사론에 대해서는 막대한 관심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통전성을 제시하는 데는 미흡했다. 반대로 성령의 인격과 능력을 단지 일반적인 기철학으로 축소시키거나, 사회 정치적인 저항 영성으로 이해하는 경우,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지닌 영적인 계시의 자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공동체성을 상실케 하는 우려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교회론적인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신비를 강조하면,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는 도덕성의 결여로 나타날 뿐 아니라, 신앙이 개인화 됨으로써 공동체성이 파괴당하는 결과로 나타났으며(물론 이러한 경향성은 교회 안에 나타난 신비적 현상이나 결과를 복음의 영적인 계시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단지 그 현상과 결과를 신비주의적으로 몰고 간 데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영성을 드러내려 하면(원시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은 뚜렷하게 대두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역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계시의 자리와 신비는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양자를 적절한 차원에서 접합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반된 신학적 경향성이 그 동안 한국 교회의 교회론적인 방향을 주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이미 이천년 전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바울의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인식과 사도로의 부르심, 그리고 선교 비전이나 능력의 부여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인격적이고 실천적인 능력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의 현실은 성령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교회론적인 본래의 특성을 상실하고 공동체 없는 개인주의적 신앙양상으로 변모되든지, 아니면 영적인 현상과 그 결과에만 매달려 유대인의 율법적 업적주의를 그리스도인의 영적 업적주의로 바꾸어 버리는 특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 성령이 십자가에 달린 분의 영인 것을 망각하고 도리어 그 영을 사물화함으로써 자기 자랑을 하고, 분파하며, 서로 적대하는 공동체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바울이 의도했던 성령론적인 교회상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또한 기독론에 근거하는 교회를 왜 바울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며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의 교회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교회 이해에 대한 성령론적 접근과 반성이 중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에게서 성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묶는 힘이며, 개인과 공동체를 엮는 힘이고,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힘으로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되게 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I. 성령론적 해석을 위한 바울의 교회 이해에 대한 몇 가지 중심 표상들 1. 바울의 교회론은 그의 다른 신학적 주제보다 훨씬 더 상황적인 특성을 잘 드러낸다. 그것은 바울의 편지 대상이 그가 직접 세운 교회이거나(고린도교회 등), 아니면 그가 선교적, 목회신학적으로 관심을 깊이 두었던 교회(로마교회 등)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발생한 실제적인 문제들은 바울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써 어떻게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신학적, 목회적으로 반성케 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편지는 그 자체가 교회를 설립한 사도와 지도자로서의 바울에게 선교와 목회활동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기독론,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론을 진술하면서 기독론적인 접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기독론을 넘어 성령론적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교회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앙 공동체가 겪는 실제적인 주요 문제들이 성령 경험을 통해서 나타난 것들이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바울은 그 모든 문제들이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극복 될 수가 있다는 확신을 지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교회론을 다루면서 무엇보다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려 하고 있다(바울에게서 성령은 독립적으로 "영"(pneu/ma)으로(갈 3,2; 5,25; 롬 8,26), 또는 "하나님의 영"(pneu/ma qeou/)으로(고전 2,11.14; 3,16; 롬 8,9), 또는 "거룩한 영"(pneu/ma a[[gion)으로(고전 12,3; 롬 5,5), 또는 "그리스도의 영"(pneu/ma Cristou/)으로(롬 8,9; 빌 1,19) 사용된다. 이는 서로 교환 가능한 용어들이다. 무엇보다 이 영은 인간학적인 의미에서의 "영"(pneu/ma: 고전 7,34; 고후 7,1 등)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살전 1,5; 갈 3,2-5; 고전 12,7이하; 롬 15,19)으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선물이다(고후 3,6; 참조 롬 2,29; 7,6; 8,15이하). 참조 J. Kremer, EWNT III, 279-291).
2. 바울의 교회론은 무엇보다 표상적 언어를 통해 묘사되면서 그 상황적 맥락에 나타난 논쟁적인 특성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참조 고후 6,16; 롬 9,25-26; 갈 6,16)으로서의 교회이며, 두 번째는 "성령의 전"(참조 고전 3,16-17; 롬 9,25-26)으로서의 교회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참조 롬 7,4; 12,4-5; 고전 10,16-17; 12,12-26; 골 1,18.24; 2,16-19; 3,15; 엡 1,23; 4,4-6; 5,23)으로서의 교회이다. 교회가 지닌 이러한 각 표상의 고유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 세 표상들을 묶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거주, 그리고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바울은 구약 인용문이 나타나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롬 9,25f=호 2,25; 롬 10,21=사 65,2; 롬 11,1f=시 93,14(LXX); 롬 15,10=단 32,43; 고전 10,7=출 32,6; 고후 6,16=레 26,12)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이스라엘"(롬 9,6-13; 갈 6,16: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교회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이라는 표상이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교회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용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약속을 받은 신앙 공동체와 관계되어 있는지를 교회론적으로 말해 주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설립한 이방 교회들을 향해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 붙여진 용어를 다시 구속사적인 전망에서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룩한 자들"(롬 1,7; 고전 1,2; 엡 1,1),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할례자"(롬 2,28 이하; 빌 3,3), "아브라함의 자손"(롬 4,1 이하; 9,7 이하; 갈 3,7-8.29),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고전 3,16; 고후 6,16) 등이다. 바울은 이 개념들을 이방 교회에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성령의 약속을 통해서 구약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신분과 유업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성령의 전: 성령의 전으로써의 교회의 표상(고전 3,16-17; 6,19 참조 벧전 2,5; 엡 2,21-22; 고후 6,16)(묵시문학적 전통에서 하나님께서 종말에 친히 세우실 새롭고 완전한 성전을 기대하고 있다: 겔 37,26-27; 사 44,28; 희년서 1,17.29; thHen 90,28-29; 91,13; Sib 3,290; Tob 14,5; 11QT 29,8-10 등; 참조 O. Michel, ThWNT V. 139ff)은 특별히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로써의 교회 이해를 부각시켜 준다. 원시기독교회는 성령의 종말론적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행 2,16 이하). 따라서 그들의 그러한 소망과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손으로 짓지 않은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말씀과 잘 어울리고 있다(참조 막 14,58). 성령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참조 벧전 2,5). 따라서 원시기독교회는 당시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신해서 자신들이야말로 성령의 임재함으로 말미암아 종말적인 새 창조 과정에 서 있는 새 성전이라고 이해했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1 305).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거함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복(갈 3,14)임을 말해주고 있다. 3)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의 출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다양하다(참조 E. Schweizer, ThWNT VIII 1024-1091; H. Merklein, Entstehung und Gehalt 319-344). 그러나 그 중에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 첫째는 성찬 전승이고, 둘째는 아담-그리스도의 모형론이며, 셋째는 우리를 위해 죽음에 넘기시고 부활하신 인자 메시야의 표상(참조 단 7,13-14.22.27)이다(참조 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75-181; P. Stuhlmacher, Biblische Theologie des NTs. Bd I 358ff).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을 통해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는 기독론적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고유한 관계를 말해 줌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켰고, 동시에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의 다양성을 제시함으로써 교회가 지닌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또한 성령론적으로는 몸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통해 그 지체들의 조화와 연합, 그리고 성장하는 모습을 제시해 준다(J. Roloff, Die Kirche im NT 89에서 바울의 교회론이 두 초점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A. Oepke(Leib Christi oder Volk Gottes bei Paulus ThLZ 79(1954) 363-368)와 "그리스도의 몸"의 주제를 강조하는 E. Ksemann("Das Theologiesche Problem des Motivs vom Leibe Christi": Paulinische Perspektiven 1969 178-215)의 입장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양자는 서로 배타하기보다는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곧 두 개의 주제가 두 초점을 이루고 있는 타원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그러나 여기에다 "성령의 전"으로써의 교회 이해를 추가해서 세 개의 초점을 가진 원으로 교회론을 논의할 때에 성령의 사역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I1.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부터 바울의 교회까지 1. 교회의 탄생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때로 교회가 부활절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탄생했다고 간주하기도 하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그 뿌리와 실체를 찾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K. Berger, Kirche. II 201-202; 물론 교회의 역사적 근원은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교회론적 어휘와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참조 김중은, "구약의 교회 - 신구약의 상관관계의 관점에서", {성경과 신학} 7(1989), 286-302; 강사문, "구약에 나타난 교회", {교회와 신학}, 30(1997년 가을호), 106-132).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역이 원시기독교회의 전제이며 근거라 할 수 있다. 갈릴리에 등장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를 요청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수용하도록 요구했다(참조 막 1,15). 예수는 자기 자신을 그들의 목자로 인식하면서 그의 백성들을 모으기 시작했다((참조 마 2,6; 9,36; 10,6; 15,24; 눅 10,10; 막 6,34). 그가 불러모은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었다(마 10,6). 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란 이스라엘의 주변적인 인물들로 당시 소외된 자들, 곧 죄인들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 us I/2 90).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예수의 초청은 그 당시 사회와 종교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들이 아닌 주변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귀신들린 자들과 병약한 자들, 그리고 죄인과 세리들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초청이 시작되었고 그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구체적인 표징으로 성령을 통한 새 사건이 드러났던 것이다. 성령을 통한 귀신축출(마 12,28; 눅 11,20)이나,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병 고침, 그리고 하나님의 죄 용서를 증거하는 식탁 교제등은 바로 예수의 인격(말씀과 사역)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이 땅 위에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표징이었다(이는 오순절 이후에 원시기독교회가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2. 예수의 "12 제자" 선택은 바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한 메시야적 사역에 그들을 동참시키기 위한 부름이었다(막 3,13-19; J. Jeremias, NT Theologie I 223-225;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98ff; G. Theissen, The Historical Jesus 216f에서 12명의 제자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진정성 있는 표현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12제자란 옛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12지파를 상징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중심 인물들로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 비로소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고 파송되었다는 사실이다(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귀신 축출과 병치유가 중심 사역으로 제시된다; 참조 마 10,1-16; 눅 9,1-6; 10,1-12와 눅 7,18-23; 11,20; 막 6,7-12). 따라서 12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부름받은 순간부터 종말론적으로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곧 종말에 심판주로 오실 인자로, 그리고 12제자는 새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우두머리로서 인자와 함께 심판할 특권을 지닌 자들이었다(마 19,28; 눅 22,29-30; 참조 단 7,9f). 그렇다고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권이 단지 12제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지닌 이런 메시야적이고 종말론적인 특권을 현실에서 선취하는 자리로써 식탁 공동체를 베풀었으며(막 2,15-16; 눅 15,1-2; 참조 막 2,17.19; 눅 6,21; 22,30; 막 14,25; 사 25,6; 65,13), 이 식탁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은 비단 12 제자들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리새인이나 쿰란 공동체와는 달리 예수는 사람들을 식탁 공동체에 초대할 때, 그 어떤 제의적 정결의식도 요구하지 않았기에(막 7,1-23) 종교적이나 사회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누구나 이 식탁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었다(눅 14,12-24; J. Jeremias, NT Theologie I 173). 어떻든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은 메시야주의의 변화이다. 예수는 12제자를 선택하고 파송함으로써, 메시야적 권위를 위임받게 됨으로써 전통적인 일인 메시야주의를 집단 메시야주의로 전환, 확대시켰던 것이다(참조 G. Theissen, The Historical Jesus 216). 예수를 뒤따른 사람들의 특성이 어떠했는지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자기 가족들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와 함께 삶을 나누었던 사람들로서,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것을 위해 선교적 파송에 참여했던 제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참조 눅 9,3-4; 10,4-8).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가족과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와 제자들에게 숙박할 장소를 제공하고(참조 막 1,29-31; 10,28-30) 자기들의 재산을 내놓아 그들을 옆에서 섬기고 봉사하던 사람들이다(참조 눅 8,2-3). 예를 들면, 마리아와 마르다(참조 요 11,1),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참조 막 15,42-47)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의 산상설교를 들은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형태의 뒤따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마 5,23-26; 6,1-4.5-6). 말하자면 그들은 매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세리와 죄인들(마 11,19), 바리새인(막 12,28-34; 눅 7,36), 가난한 사람들(눅 6,20; 마 25,31-46),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막 3,34-35), 여인들(막 10,40-41; 여성 제자들은 이 두 가지 부류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조태연, "초기 예수 전승을 통해 본 여성신학적 교회론." 41-81) 등이 그 속에 포함될 것이다.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 죽음을 당할 것을 직면하면서 예수(참조 눅 13,32; 막 10,45 병행; 막 14,22.24 병행)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해 그들도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로까지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린다(참조 눅 6,22-23 병행; 막 8,34-35 병행; 막 13,9 병행; 누가 본문의 진정성에 대해서 참조 I.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52).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 예수가 시작하고 위탁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인 사역을 지속해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참조 눅 17,22-37; 18,8).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제시해준다(마 16,18-19; 석의적인 논쟁에 대해서: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 us, I/2 450-466; 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62-165; 특히 P. Stuhlmacher, "Kirche nach dem NT" 305에서 그것이 지닌 아람어적인 언어 특성과 성전 숙정에 나타난 성전 말씀과의 응집성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말씀은 이차적이라기 보다는 예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게바라는 별명 또한 시몬(베드로)을 지칭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은 이 별명이 예수에게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베드로에게 예수에 의해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계속 세우는 역할이 주어진다. 따라서 갈릴리에서의 예수 부활 현현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와 제자들은 새롭게 12제자들을 구성하고(참조 행 1,12-26; 고전 15,5), 이어 오순절 성령 경험을 통해서 예수가 위탁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행 2,37-41). 말하자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그들 스스로 "성도들"(롬 15,26; 행 9,13), "하나님의 교회"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행 8,3; 11,22; 12,1.5; 고전 15,9; 갈 1,13 등; H. Merklein, "Die Ekklesia Gottes" 48-70; W. Klaiber, Rechtfertigung und Gemeinde 11-21; J. Roloff, Die Kirche im NT 83-85).
4.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바로 안디옥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바울 교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 곧 스데반 그룹에 의해 생겨진 교회였다(행 11,19-20). 따라서 그들은 신학적으로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예수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며 그리스도라는 명백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유대 회당 예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가정 교회의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결과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그들은 외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인들"(cristianoi,)이라고 불리게 된다(행 11,26; 이는 무엇보다 안디옥교회의 이방선교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유대의 회당예배와 분리된 독자적인 모임 영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G. Schneider, EWNT III, 1145-1147)). 바나바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이방 선교를 하게 된 안디옥 교회는 곧 예루살렘교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사도회의를 통해(갈 2,1 이하; 행 15,1-29) 두 교회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선교 영역과 두 개의 다른 복음을 인정하게 된다(갈 2,7: 유대인들을 위한 "할례의 복음"과 이방인들을 위한 "무할례의 복음"; 참조 박응천, "신약 교회의 유대특수주의와 세계보편주의", 244). 그러나 비록 바울과 누가의 기록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안디옥교회를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되는 세 사도는 서로 일치된 의견을 지니게 되었다(갈 2,9: 바울에게 준 "은혜"란 곧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사도권을 뜻한다; 참조 갈 1,15-15; 롬 1,5; 12,3; 15,15; 고전 3,10; 엡 3,8; 빌 1,7: 참조 K. Berger, EWNT III, 1095-1102)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방 선교에 대해 동의하게 되었다(참조 행 10,1-11.18; 11,20-21; 15,1-35; 갈 2,6-10). 그것은 바로 이방 지역에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결과였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특히 사도회의에서 이방 선교를 위한 개방적 결정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행 15,28에서 결정의 주체가 "성령과 우리"이다: 참조 김지철, "복음의 진정성과 교회의 일치성" 50-75).
III. 성령의 피조물로써의 교회 1. 에클레시아의 신학적 의미: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하나의 장소에 모인 신앙 공동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단수로도 복수로도 사용이 가능했다(살전 1,1; 2,14; 롬 16,16; 고전 7,17; 16,1; 갈 1,2(복수) 등). 그래서 당시 산재하는 가정교회 하나 하나가 교회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롬 16,5; 고전 16,19; 골 4,15;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공동체와 상관없이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단수로 나타난다; 예 고전 4,17; 에베소서에서는 보편적 교회의 양상으로 변모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롬 12장과 고전 12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도 그 출발점이 지역교회인 로마 교회와 고린도교회라는 장을 염두에 둔 진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의 후기 서신(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본고에서는 본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에 나타난 우주적인 교회로의 발전 소지가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차단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가정 교회를 지칭하는 "교회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하면서도 이미 고린도전서 1장 1절과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단수 형태로 전체 교회를 통합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살전 2,14)이라는 부름으로써 지역 교회와 보편적 교회와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각 지역 교회가 단지 전체 교회에 참여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영적-기독론적 실체라는 점에서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전체 교회와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이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97).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종말론적인 구원 공동체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교회" 안에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러하다(참조 고전 12,13.27; H. Merklein, "Die Ekklesia Gottes" 315-316). 이러한 점에서 단지 장소적인 모임인 에클레시아의 세속적인 의미를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실체로 확대 해석해 낸 인물은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의 피조물로써의 교회: 바울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살전 2,14; 갈 1,22; 참조 롬 16,16)라는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롤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낸다. 하나는 보이는 세례라는 틀(롬 6,3 이하)이며,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이다(고전 6,11; 12,12-13; 갈 3,27). 그러나 바울에게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실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세례받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속한 통치권의 전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 서게 된다(롬 6,10f; 고전 6,11; 갈 2,20). 따라서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여기에 참여한 신앙인들로 하여금 과거 옛 사람의 특권, 예를 들면, 과거의 종교적, 사회적, 성차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그분과의 새로운 연대와 연합이 가능해 진다. 바울은 이것을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전체를 대표하는 인격적인 표상이다(아담-그리스도 모형론의 배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참조 롬 5,11-21; 고전 15,20-28).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연합될 때, 그는 세상의 사회 종교적 신분에서 야기되는 우월/열등의 차별, 지배/피지배의 권력 투쟁, 정결/부정이라는 이분법적 갈등을 극복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자리에 들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써의 교회의 모습이다.
3. 성령의 약속을 이어받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새 이스라엘)으로서의 교회: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핍박자였으나(고전 15,9; 갈 1,13; 참조 빌 3,6)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 현현 사건을 통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증언한다(참조 C. Dietzfelbinger, Die Berufung des Paulus).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신케 되었다(갈 1,1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복이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하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뜻한다(갈 3,13-14; 참조 사 44,3; J. L. Martyn, Galatians 323). 1)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많은 자손: 창 15,5; 땅의 소유: 창 15,7)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아브라함(창 15,6)이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이 되고 그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율법에 신실했기 때문이거나 할례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롬 4,3; 갈 3,6)이었다는 것이다. 불경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가장 적합한 인간의 태도란 믿음(롬 4,5)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결코 육체적인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롬 4,17)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따라서 그의 육체의 자손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롬 4,16; 갈 3,9)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주적 지평으로 확대되었음(롬 4,18.23.24; 갈 3,8.14)을 뜻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지평 확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로 개방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러한 개방은 이스라엘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을 더욱 유효하게 만들었다(참조 고후 3,6-11). 바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나타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고후 3,16-18). 2)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모형론적으로 제시한다(고전 10,1-13). 그리고 그 출애굽 과정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들의 조상"(1절)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과 바울의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해준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광야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결과를 보여 주면서, 고린도교회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례전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들에게 불신앙과 불법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처럼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례전적 제의에 참여한다고 해서 구원이 결코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영적으로 거듭난 참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 3)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 다음은 헬라인이다"(롬 1,16)라고 하는 구원사적인 선후 관계를 진술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일관된 주장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폐해진 것이 아니다(롬 9,6a)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모두 구속사의 전환이 나타났으나(롬 9,30-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선언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를 세 단계로 진술한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27-130). 첫째 단계(롬 9,6b-29)로써 바울의 기본적인 입장이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 나타난다. 곧 이스라엘에게서 육체적으로 나온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롬 9,6b),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바울의 기본적인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그 안에 야곱과 에서처럼 늘 하나님의 선택과 폐기의 양면성이 있었다(7-9절). 그러나 이러한 선택과 폐기는 어떤 고정된 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달린 것이었다(14-23 절).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유가 결코 하나님의 자의적인 횡포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신실성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표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24-29절; 11,1-10)에게서 발견된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곧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두 번째 단계(롬 9,30-10,21)로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선포는 바로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신실성의 표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약속대로 마지막 때에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입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신 것이다(롬 10,6-15; 참조 신 30,12-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아직도 율법의 길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는 믿음의 길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책임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어두운 전망 하에도(롬 10,19-21)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있음을 알린다. 하나님이 지금 그의 백성에게 수행하시는 심판은 단지 정화의 심판일 수 있다는 것이다(19b절). 이 같은 가능성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넘어서게 한다(참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r 145f). 곧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이 더 풍성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온종일 팔을 벌리시고 불순종하는 백성을 기다리시는 분임(21 절=사 65,2(LXX))을 말한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든다(롬 11,1-36).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한번 남은 자에 대해 언급(참조 롬 9,27ff)하지만, 그것은 미리 아신 백성(롬 11,2)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신실함에 대한 증거로서이다. 바울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 모두를 아직도 버리시지는 않았음을 강조한다(롬 11,1b). 이스라엘이 비록 믿음을 거부함으로써 걸려 넘어졌으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 종국적인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조차도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일시적인 삽화적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롬 11,11a).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대한 거대한 파노라마를 펼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서로 배타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서로 연계성을 지닌 존재들임을 강조한다(롬 11,11: "저희(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은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의 신앙 거부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구원 영역에 참여케 되고 동일한 구원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시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을 통해 그 구원사의 흐름이 역전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수용자로 확정된 이방인들을 보며,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다시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로 돌아올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기다림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대한 바울의 이해이다.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산 시온에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롬 11,26; 참조 사 59,20f) 그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신앙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있다. 즉 바울은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 154-158; 이한수, "바울의 교회론", 40-43, 55-59).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속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롬 11,25-32)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선언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라고 찬탄한다(롬 11,33). 여기서 "하나님의 깊이"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와 지식을 뜻한다(참고 고전 2,7.9.12; U. Wilckens Der Brief an die R mer. II 269). 로마서 9장 1절에서 바울이 "성령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구속사에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드러낸 것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구속사적인 이스라엘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사의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결정적인 분기점과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과의 구속사적인 연속선상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수용과 거부를 통해 이제 구원과 심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교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왜 그토록 스페인까지의 선교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교적인 독자성을 주장하면서도 왜 마지막까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계속 고수하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이방 선교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바로 그의 구원사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원사의 마지막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을 것을 염두에 둔 바울은 자신이 이방 백성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써(갈 1,16),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롬 11,12). 말하자면 바울은 그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침내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소망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태어난 이방 교회들이 그 신앙적 뿌리인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만이 이러한 구속사적인 전망을 계속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확신했다(롬 15,19).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울의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이다(갈 2,10). 그래서 바울은 강한 애정을 가지고 추진했다(고후 8,1-24; 9,1-15; 롬 15,25-29). 이 헌금이야말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사적으로 연대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참조 행 20,1-4). 이로써 분명해지는 사실은 바울에 의하면 교회는 종말의 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이스라엘로서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라고 말한다.
4.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으로써의 교회: 고린도전서 3장 5-17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비유한다(고전 3,5-17). 그리고 그 단락의 결론으로 교회는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임을 밝힌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분파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행한 경고이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는 우상 숭배의 위험 속에 놓인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다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참조 레 26,11; 겔 37,27)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이 그의 처소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인 교회는 새로운 성전이라는 말씀이다(참조 롬 8,9-11). 이러한 성전에 대한 표상(고전 3,5-17; 고후 6,16)이 둘 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강력한 경고가 담긴 문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의 성전 말씀(막 11,15-17; 14,58 병행; 참조 행 6,14)을 연상시킨다. 예수의 성전 말씀에는 당시 현존하는 성전의 역할은 끝났으며, 동시에 예수 자신의 파송이 지금까지의 성전이 수행하던 기능, 곧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는 기독론적인 암시가 들어있다(막 14,58과 요 2,20-2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종말론적인 성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12). 원시 기독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자기 희생을 통하여 성전의 본래적인 목적,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과 함께 거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인식했던 것이다(참조 W. Klaiber, Rechtfertigung und Gemeinde, 39). 그러면 바울은 교회를 성전으로 묘사하며 무엇을 의도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성전은 하나의 건물로서 세워져 나가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령이 임재하는 장소로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1) 하나의 건물로써의 교회는 선교적인 측면(고전 3,5-15; 롬 15,20)과 목회적인 측면에서(고전 8,1.10; 10,23; 14,4.7; 살전 5,11) 부각된다. a. 밭과 건물로 비유되는 교회에서(고전 3,5-17)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밭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건물은 어떻게 건축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을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와 친히 건물의 기초를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밭에 어떻게 씨를 심고 물을 주며, 그 터 위에 어떤 건물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도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참조 W. H. Ollrog, Paulus und seine Mitarbeiter 164-175). 왜냐하면 사역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서 그들이 그 기초 위에 무엇을 가지고 세웠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고전 3,13-15). 다시 말해 선교 동역자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 복음인지 아닌지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교 사역자들이 지닌 복음에 대한 이해와 증거 방법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된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내용과 그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에 의해 서로 갈등하고 분파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b. 밭과 건물로써 교회의 모습은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문제와 연결되어진다(고전 8,1.10; 10,23; 14,4.7 살전 5,11). "덕을 세운다"라는 용어에는 기본적으로 건물로써 성전에 대한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바울의 목회적인 관심과 목표를 잘 보여주는 표현으로서, 신앙 공동체가 서로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내적인 교제와 연합을 이룬다는 뜻과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을 통해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특성인 것이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16; 여기서 교훈체제의 확대나, 사람 숫자의 확장으로서의 덕을 세운다는 의미는 생소하다). 바울이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향해 집중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린도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성령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고전 1,23.24.30; o` evstaurwme,noj Cristo,j의 현재완료형은 지금까지 그 효력이 지속됨을 뜻한다)의 영인 것을 망각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만족하여 배부름과 부요함과 왕적 권위만을 누리고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4,8). 바울은 그들에게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친다(참조 고전 2,2; 4,9-13; 갈 2,20; 롬 8,17; 빌 3,8-11). 또한 고린도 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지식이 세우는 것"이라고 자랑하며, 그러한 지식을 가진 자신들은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전 10,23)고 주장하면서 영적으로 자유 분방한 신앙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바울은 "지식은 오히려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경고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고린도교회가 자랑하는 방언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방언은 비록 방언하는 자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으나,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 절제를 해야 하지만, 예언의 경우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에(고전 14,4), 오히려 그것을 사모하라고 역설한다(고전 14,28.40).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바울의 강력한 권면(고전 14,12.17.26; 롬 14,19; 15,2; 살전 5,11; 엡 4,29)의 직접적인 대상은 교회 안에서 소위 강한 자들이었으며, 간접적인 대상은 그 안에 함께 거하는 연약한 자들(고전 8,11)이거나, 앞으로 신앙 안에 들어와야 할 사람들(고전 9,19-23; 10,32)이었다. 교회란 곧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하나됨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나 직분은 그것이 얼마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따라 평가된다(고전 14,3-5; 엡 4,12)고 할 수 있다. 2) 성령이 임재하는 장소로써 교회의 거룩함의 주제는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 전체와 더불어 그 안에 참여하고 있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먼저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으로 부름 받은 존재이기에 거룩하며, 또한 그 안에 성령이 내주 하시기에 거룩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 거룩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고전 3,17).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영적 이기주의를 통해서 서로 자랑하고 분파하며 성령 경험을 독점하려 함으로써 교회를 사물화했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I/1 305f). 이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일로,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할 죄악이라고 바울은 경고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고전 3,16-17: "더럽히다"(fqei,rw: 고전 3,17)라고 번역된 것은 단지 세속적인 도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세우다"(evpoikodome,w: 고전 12.14)라는 의미의 반대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의 근거까지 파괴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전인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숭배는 결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병존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이 현존하는 교회를 그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닌 우상에 의해 그 영광을 빼앗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론과도 밀접히 연결된다(몸의 소유가 누구인가에 따라 창녀의 지체가 될 수도, 아니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도 있다: 고전 6,16-17). 자기 몸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 여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개인의 윤리적 범죄가 전체 교회의 거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기의 계모와 함께 사는 성적인 범죄를 다루는 것으로, 그것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레 18,8; 신 23,1 등), 당시 이방의 윤리적 규범에서도 간음에 해당되는 범죄였다(Tacitus Ann. 6,19; Cicero, Pro Cluentio 14f). 따라서 바울은 그가 실제로 그들과 함께 그 곳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모일 때에 바울 자신이 그의 영으로 그 곳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내어쫓고, 사탄에게 넘기도록 판단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이렇듯 강력히 경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범죄한 개인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는 그 거룩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I/1 373-378).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바울은 그 범죄자에게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전 5,5). 이로써 중요하게 지적되는 것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인 그리스도인의 몸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신앙인들은 무죄한 상태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는 이 세상과 담을 쌓고 폐쇄된 채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바울은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인정되는 죄악을 교회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과 적대하는 옛 세력(고전 5,7: 묵은 누룩)에 투항하는 일일뿐 아니라, 그것은 교회의 거룩이란 본질을 해치는 것이고 성령의 거룩함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비록 이 세상의 죄악 속에 거하고 있지만, 성령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불신앙의 세상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조사회(Kontrastgesellschaft; G. Lohfink, Wie hat Jesus gewollt?, 142)가 지녀야 할 모습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의 말씀(참조 마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며, 그의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실천되어야 했던 모습이고(참조 막 10,41-45 병행: 섬기는 자), 원시기독교회를 통해서 확증된 것이며(참조 행 4,32-5,11), 또한 바울의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드러나야 할(참조 고전 5,1-6,11; 고후 6,14-7,1; 롬 12,1-2) 삶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도 거룩성을 담지하고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할 종말적인 성령 공동체인 교회가 지녀야 할 특징이기도 하다.
5. 성령의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은 바울의 초기 서신 중 다음 네 구절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의 새 존재를 율법과의 관계에서 언급하는 본문(롬 7,4)이며, 둘째는 신앙 공동체의 은사적 삶을 위한 권면적인 문맥(롬 12,4-5)이고, 셋째는 성만찬의 맥락(고전 10,16-17)과, 넷째는 몸과 비유라는 비유의 틀에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본문(고전 12,12-26)이다. 1) 바울은 로마서 7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세례의 사건을 통해(참조 롬 6,3 이하)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함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의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그 몸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에는 이미 교회론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U. Wilckens, Der Brief an die R mer. VI/2 65)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제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롬 7,6)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두 종류의 인간상으로 나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로마서 7장 7절 이하에 언급된 의문의 묵은 것에 얽매어 고뇌하는 인간상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 등장하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성령을 통해 승리하는 인간상이다. 2)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바울은 몸과 지체라는 틀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받은 영적인 은사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공평하게 나누어준 성령의 선물임을 언급한다. 따라서 영적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신앙 공동체 내의 각 지체가 다양하고 고유한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기 위함에 있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다른 지체와의 차별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위치이며, 그 위상을 통한 몸의 하나됨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전체와 개별의 연대성과 고유성을 인식하면서 자기의 은사에 따라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바울은 그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이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롬 12,1: 하나님의 영적인 본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도 접근 가능한 예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 168; 참조 E. K semann, "Gottesdienst im Alltag der Welt," 198-204)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 언급된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은사목록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윤리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몸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통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고린도전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는 두 본문(고전 10,16-17; 12,12-31)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성례전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으며(고전 10,16-17), 다른 하나는 몸의 각 지체가 그리스도라는 몸 안에서 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역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고전 12,12-31). a.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에 언급된 성찬에 대한 바울의 구원론적 접근은 그의 교회론과 잘 어울린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의 사건에 참여케 되는 구원론적 언급이라면, 고전 10,17은 이러한 구원의 사건에 참여한 각 그리스도인이 이제 소외된 개인의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전체에 연합되었음을 교회론적으로 말해준다. 본래 예전적인 식탁 참여는 그 제의의 대상과 교제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누군가 이방의 우상 제물에 참여하게 되면 그는 귀신과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고전 10,19-20),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그 식탁의 주인으로서 떡과 잔을 나눠주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경험하게 된다(고전 10,16-17). 이렇듯 성만찬의 참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참조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467f). 바울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개념을 서로 연결해서 제시하고 있다. 바로 참여/교제라는 koinwni,a와 직분/섬김을 나타내는 diakoni,a이다. 바울은 이 두 개념이 하나의 몸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먼저 바울은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라는 말로써 식탁을 통한 공동체교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의 떡인 몸에 많은 지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먹는 것을 의미한다(koinwni,a가 "참여"인가 아니면 "교제"를 뜻하는가 라는 양자 택일적 질문은 무의미하다. 외적인 식탁에의 참여는 내용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교제의 자리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H. Conzelmann,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210; 참조 J. Hainz, EWNT II 749-755에서 고전 10,16b의 교제(koinwni,a)와 10,17b의 참여(mete,cw)를 구분한다. 참여를 통한 교제로 하나의 몸에 연합한다). 바울이 여기서 신앙 공동체의 교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린도교회는 개인주의적이며, 동시에 그들은 성례전주의적인 성만찬의 이해에만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앞의 맥락에 속하는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를 통해 인도함을 받고, 광야 생활을 하면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물을 먹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여 영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보장도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바울에 의하면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공동체로 참여하는 것으로서, 참여자는 그것을 통해 그가 속한 공동체의 덕을 세울 책임과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나누지 않음으로 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렸던 것이다(참조 고전 11,21-22.33-34). 이에 바울은 그것은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고전 11,27)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식탁 사건(갈 2,11-21)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식탁 교제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가졌던 식탁 공동체(막 2,14-17)의 정신을 거절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시키는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b. 고린도전서 12장 3-11절은 교회론의 관점으로 성령의 은사론을 언급한 것이며,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은 영적 은사의 통전적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의 관점에서 교회론을 전개한 것이다. 은사론과 성령론이 함께 맞물려 있다. 바울은 이러한 어울림을 통해 신앙 공동체의 하나됨을 보존하려 하고, 동시에 각 은사의 다양성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은 바로 하나인 성령의 역할임을 강력하게 표명해 준다(고전 12,4 이하에서, 같은 성령, 한 성령의 반복, 또한 고전 12,13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교회가 지녀야 할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 고린도교회가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무시하고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미 고린도전서 10장 17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그 원인을 부연한다면,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 중에 특히 방언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고전 12,1; 13,1; 14,1-5). 물론 바울은 영적 은사인 방언을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언을 포함하는 모든 은사들은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각 은사는 교회를 바로 세우며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은사의 진정한 권위와 역할은 신앙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고(고전 12,7), 덕을 세우는가(고전 14,4.26)에 따라 판별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작고 별 것 아닌 은사와 지체가 더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것임을 가르친다(고전 12,22-27). 즉 교회 안에서 개인의 업적이나 신비한 종교적 경험으로 영적 우월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사실임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바울은 영적인 은사마다 영적인 분별력에 의해 평가받아야 할 것을 권고한다(고전 12,10; 14,29; 참조 살전 5,19-22). 이런 과정에서 모든 공동체가 서로 책임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참조 J. D. G. Dunn, "The Spirit and the Body of Christ," 346-348). 바울은 다양한 영적 은사는 섬김(diakoni,a: 고전 12,5)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이 섬김은 당시 헬라어에서 사용되던 식탁의 봉사(참조 행 6,1-2)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바울은 그 말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여 자신이 사도로서 선교적 파송을 위임받은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고후 3,8-9; 4,1; 5,18; 6,3; 롬 11,13). 바울의 이러한 섬김에 대한 이해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왔다(막 10,45; 눅 22,27)는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맥락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고전 11,1; 참조 4,16; 살전 1,6).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형을 이어받고 있으며, 그의 신앙 공동체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다(빌 3,17: 참조 빌 4,9).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신앙 공동체란 서로 자랑하고 뽐내는 지배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서로 돕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서 만인 제사장의 정신과 그 가능성은 바울에게 이미 열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참조 벧전 2,9; 계 1,6).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제(koinwni,a)와 섬김(diakoni,a)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몸을 통해 일하는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은사를 나눠줌으로써 서로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서로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됨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곧 "같은 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고전 12,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잠재해 있는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다양성과 고유성으로, 그리고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공동체됨과 통일성으로 극복하면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성령임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77). 그러므로 교회는 각 지체라는 개인이 단지 공동 연대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이 땅 위에 세워진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 땅 위에 뿌리박고 있는 철저히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으로써 살아있는 몸적인 실체인 것이다(참조 갈 3,27f; J. Roloff, Die Kirche im NT, 108f). 4) 바울의 후기 서신인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들어오면 그리스도가 몸에 대한 권위를 지닌 머리, 곧 교회의 머리로서 표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여기서 지역교회라는 틀을 벗어나 우주적인 교회로까지 확대된다. 머리인 그리스도는 몸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정체성과 성장의 근원이며 동시에 성장의 목표인 것이다. 곧 머리로부터 몸이 세워지고 그 머리까지 자라나게 됨을 뜻한다(엡 4,15; 골 2,19). 여기서 성장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극대화된 표현이다. 교회는 그가 속한 머리인 그리스도, 곧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여 만물의 으뜸이 되신 분이시고, 궁극적으로 세상의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을 다스릴 분이신 그리스도로(엡 1,21-22; 골 2,10)로부터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며, 또한 그의 몸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성장해야 한다(엡 1,23-24)는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몸의 통일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구체적인 자리이다(엡 2,13-22). 여기서 반복되는 주제는 성령의 사역이다. "(한) 성령 안에서"(18.22절)가 강조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란 마지막 시대에 성령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적 내용임을 분명히 보여준다(엡 3,5-12: 5절에서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9절에 "비밀의 경륜"). 교회는 말하자면 이 세상 앞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의 내용임을 의미한다. 5)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에 있어서 직제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언급된 세 종류의 중요한 은사들은 그 뒤에 언급된 은사들과는 달리 일정한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선교지역을 방문하거나, 지역교회를 순회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고정된 장소에 머물면서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인격 안에 그 모든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그는 사도로서, 예언자로서(롬 11,33; 고전 13,2), 그리고 교사로서(빌 4,9; 살전 2,13) 사역을 담당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그 교회의 내적 질서를 도모하기도 하면서(고전 11,34) 선교하고 목회한 인물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은사들은 제도적으로 확정된 교회 직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빌립보서 1장 1절의 감독과 집사의 경우도 후에 목회서신에 나타나는 교회 직제의 의미보다는 훨씬 유연한 의미로써, 교회의 목회적인 관리 차원에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바울이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 받는 교회가 그 시대마다 교회의 운영과 질서에 적합한 제도적 요소를 필요로 함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늘날의 교회법적인 의미에서 교회 직제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은사 공동체는 다만 한 세대만에 유용했던 임시적 직제라고 말해야 되는가(참조 J. D. G. Dunn, "Models of Christian Community in the New Testament" 252)?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바울에게서 은사적 공동체인 교회에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능력은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80). 그는 성령과 교회 직제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직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에 따라 각 시대마다 유연성과 역동성을 지니며 질서있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열려진 틀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개방성의 기준과 한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이라는 기본적 사고가 아닐까?
IV. 한국교회에 대한 성령론적 반성과 새로운 가능성 바울의 교회 이해로부터 이제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바울의 교회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면에서 회복하고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몇 가지 질문형식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양자 간에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비록 깊은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교회 가운데 창조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1. 바울의 교회에 발생하는 갈등과 문제들(특히 고린도교회)은 주로 그들의 성령에 대한 오해와 곡해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로 부딪쳐 나간다. 서로 다른 성령 이해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개인적이며 성례전적인 영광의 신비주의로 성령을 사물화했다면, 바울은 성령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교회의 성령 이해는 어떠한가? 고린도교회의 성령 이해에 붙잡혀 있는가? 아니면 바울의 성령 이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가? 2. 바울의 교회론은 신학적으로는 기독론의 터전 위에, 그리고 선교적이며 목회 실천적으로는 성령론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경우는 이 신학적 기초와 선교적 목회 실천적 방향성이 바뀌어 있지 않은가? 기독론적 신학적 기초 없이 성령의 외적 현상과 능력만을 극대화시키고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기독론적 신학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여 성령의 창조적 자유와 사역을 침묵케 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서로 다른 경향성이 서로 조화되지 못하고 양극단으로 치달리고 있다는 데 있다. 3. 바울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으로 다음 세 종류의 표상적 이해를 제시했다. 첫째로,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이루는 구속사의 실체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존하는 자리인 "성령의 전"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셋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제와 사랑의 섬김을 삶의 원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자기정체성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회상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다가올 완성을 기다림으로 준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성령의 자유케 하심과 새 생명의 창조를 지금 바르게 누리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유지하는 대조공동체로써 세상을 향한 선교 공동체로 나서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 공동체 내에서 서로 교제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4.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 안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조화롭게 나타나야함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통일성의 방향과 목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개 교회의 목회자 중심으로 편의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각 지체의 다양성은 폐기되고 일률적인 그리스도인들만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바울에게서 있어서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성별적 차별성이 극복되고 하나로 연합하는 성령이 함께 하는 표지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 차별성의 극복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직도 성령의 자유케 하고 해방시키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6. 바울은 세례를 통한 교회 예배에의 참여와 성례전의 참여만으로는 그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오도된 인식이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세뇌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그 신분에 걸맞는 윤리적 삶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7. 바울의 은사적 공동체의 직제는 유연성과 역동성을 지닌 직제라 할 수 있다. 곧 만인 제사장적인 정신과 그 가능성이 열려진 직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평신도 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보다 자유롭게 개방된 교회 직제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는 것일까? 교회의 직제가 은사적 공동체를 지나 초기 카돌릭주의로 넘어가면서 제도적 직분으로 경직화되었던 것(예수 공동체 → 예루살렘 교회 → 바울의 초기 공동체와 후기 공동체에로의 변화)을 이제 다시 가능한대로 은사 공동체의 특성으로 되돌려 교회의 영적인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한국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은사 공동체의 문제는 은사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이 오히려 영적 은사운동을 아예 거부하거나, 아니면 자기 중심적으로만 제한하고 열광주의적인 방향으로만 몰아가기 때문은 아닌가? 이제 새로운 세기의 교회는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첫째로 교의와 교직에 기초한 교파주의는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고백으로 말미암아 점차 극복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사역은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그 역할이 확대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의 조화가 극대화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제 또한 성령의 사역과 기능을 더욱 존중하는 열려진 직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인터넷 시대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교회의 모습이 제시될 것이다. 성령이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인격적인 힘인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오늘의 인터넷 시대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과감한 "성령의 네트워킹"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네트워킹"이란 성서적 표현으로는 "성령의 교제"이다. 사이버 시대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절실한 것은 아마도 진정한 영적 인격적 교제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성령의 인격적 능력이야말로 이 사이버 시대에도 가장 핵심적이고 절실히 요청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의 기계적인 네트워킹이 무기적 조직체로서의 연결이라면, 성령의 네트워킹은 유기적 연합, 곧 살아 생동하는 사랑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주는 힘과 능력이다. 따라서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네트워킹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령에 의한, 그리고 성령을 통한 사이버 교회를 이해하고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의 주체이며 동시에 내용이고, 또한 활동하는 능력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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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이 논문은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이해를 근거하여, 바울의 성령 신학을 논 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바울은 신약의 저자들 중에서 성 령론에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이룩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여러 신학적인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어 폭넓고 심오하다. 그러므로 성령론의 몇가지 쟁점 들을 놓고 집중적으로 논쟁을 하기보다는 바울의 포괄적인 가르침을 고찰하는 것이 우선적 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 일부 쟁점들은 아래에서 논의의 대상 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바울 서신이 모두 상황적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재나 도서관에서 작성된 신학 연구 논문이 아니다. 도 리어 여러 교회들이나 사람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 여 작성된 일종의 목회적 편지이다. 그렇지만 바울 서신에는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공 유하는 복음의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한 그 속에는, Beke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신학적인 통일성(coherence)도 있다.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 하다.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종교 개혁의 시각에 사로잡혀 이신칭의를 바울 신학의 열쇠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교리는 구원의 한 은유(metaphor)에 불과하다. 전통적인 견 해에 반대하여, 다른 학자들은 바울 서신에 수없이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믿는 자의 계속적인 그리스도의 체험에서 바울의 중심 사 상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바울의 다양한 신학적인 관심을 모두 포용하 기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다수의 바울 신학자들이 종말론적인 구원을 바울 신학의 핵 심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 시대를 도래시 키고, 놀라운 구원을 성취하셨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형성되고, 이 하나님 의 종말의 백성은 완성을 대망하면서 미래의 축복을 현재 누리며(부분적으로나마)살고 있다. 우리가 취급하고자 하는 성령이라는 주제는 바울 신학의 이러한 중심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이 논문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성령과 삼위일체, ② 성령과 새 시대, ③ 성령과 구원, ④ 성령과 교회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요약과 간단한 호소로 구성된다.
2. 성령과 삼위일체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곳에서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언급한다. 특별히, 그는 성령을 다양 한 행위의 주체로 제시한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시고 (갈 4:6; cf. 롬8:15), 육체를 대적하시고(갈5:17)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고(갈5:18; 롬8:14), 모든 것을 통달하시고(고전2:10), 하나님의 생각도 아시고(고전2:11).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 치시고(고전2:13; cf. 엡3:5),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고(고전3:16; 롬8:11; 딤후1:14), 자기가 원 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시고(고전12:11),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고 후3:6), 믿는 자들의 영으로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롬8:16), 믿는 자들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8:26),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고(롬8:26-27), 믿는 자들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고(엡3:16), 심지어 믿는 자들이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 (엡4:30). 이것은 성령이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라는 사 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그러면 성령과 하나님(성부),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성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Fee의 통계에 의하면,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의 영" 또는 "그의 영"이라는 표현은 16번, "그리스도 의 영" 또는 그와 동등한 표현은 3번 등장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바울이 성령을 우 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출처(source)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갈4:6은 "하나님이 그 아 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살전4:8; 고후1:22; 5:5; 갈3:5; 롬5:5(cf. 엡1:17)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고 진술되어 있다. 그러한 이해는 하나님께서 그의신(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출31:3) 또는 그의신(영)을 부으 신다(욜2:28)는 구약의 이해와 일치한다(cf. 민24:2; 삿3:10). 성령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다. 고전2:6-16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 고,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깨닫을 수 있다는 것을 논한다. 이 문맥속에서 바울은 성령이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며"(2:10), "하나님의 사정(mind)"도 안다(2:11) 고 주장한다. 롬8:27에서는 동일한 진리가 역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는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서 일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성령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은 성령과 하나님이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분명히 하나님 과 구별되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운다(갈4:6; 롬8:9; 빌1:19). 이 것은 롬8:9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악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성령은 처음부터(영원전부터)그리스도의 영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의 주로 높임을 받으신 다음(cf. 롬1:4; 빌2:9-11),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만유의 주로 즉위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성령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고후3:17a("주는 영이시니")와 고전15:45b("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에 근거하여(cf. 고전6:17),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 장은 설득력이 없다. 문맥에서 볼 때, 고후3:17a 의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3:16) 언급된 출34:34의 "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고전15:45b는, 첫 아담이 창조를 통하 여 자연적인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하여 초자연적 인 영역으로 들어가셨음을 말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경 구절 들은 많다(예, 롬9:1; 8:26-27, 34; 15:30); 고전12:4-6; 고후13:13; 엡4:4-6), 그러나 그 중에서 도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롬8:26-27과 8:34이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는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신다. 그런데 성령은 지상에서 간구하는데 반 하여(8:26-27),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신다(8:34).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 는 서로 다른 인격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성령 사이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관계도 아주 친밀하다. 롬8:9-10을 보면, 성령과 그리스도는 상호 교환되어 등장한다; "누 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9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10절). 이것은 엡3:16-17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자 안에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종의 대사(ambassador)역할을 담 당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주(Lord)로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교회 안에서 집행하신다. 유대교에서는 성령을 단순히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능력의 연장 (extension)으로 본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다. 바울은 원래 철저한 일신론자였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얼마 안되어 성령을 체험한 다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 지, 아들, 성령 세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구원은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고후13:13),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 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사 우리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였다(빌2:8).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성취하신 구원을 우리의 삶속에서 실현시키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그 역사적인 구원을 지금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3. 성령과 새 시대 성령의 오심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새 시대가 이미 도래하 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새 시대의 완성(consummation)을 보증한 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의 묵시록적인 종말 사상에 의하면 이 시대(this present age)는 사탄의 지배를 받 고 있는 시대인데, 죄와 질병과 고난과 죽음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메시 야를 보내셔서 이 악한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것 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인데, 의(righteousness)와 온 전(wholeness)과 부활과 성령이 특징을 이룬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오심, 특별히 그의 부활 사건과 성령의 오심은 시대를 바꾼다 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것으로 새 시대(종말)는 이미(already)도래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 하면, 새 시대가 이 세대 속으로 침투되어 들어왔다. 그런데 종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 다(not yet). 다만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죽음의 세력을 완전 히 파하시고 믿는 자들이 몸의 부활을 경험할 때(고전15장), 그것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 시대는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새 창조를 가져온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5:17). 이 세상은 정죄를 받아서, 그것의 현재 모습은 지금 사라져 가고 있다(passing away)(고전7:31). 이러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 특별히 그의 신학의 중심인 구 원론을 보면, 그런 관점이 현저하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 하신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현존하는 사실(reality)이다. 그래서 한편으 로는 우리 믿는 자들이 미래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We shall be saved)라고 말하지만(롬 5:9),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현재 "구원을 얻고 있다"(We are being saved)라고도 말한다 (고전1:18). 이처럼 구원이란,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지만, 이미 성취된 것으로서 우리 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는 우리가 지금 새 시대의 능력인 성령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성령 체험은 우리가 미래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또한 그 것은 미래 완성이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마지막 완성을 보증하는 역 할도 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이러한 두가지 종말론적인 역할(증거와 미래 보증)을 세 은유를 통하여 묘 사하고 있다. 첫째, 성령은 "첫 할부금( )"(개역 성경; "보증")이다. 이 은유는 신약 에서 오직 바울 서신에만 세 번 나타난다(고후1:22; 5:5; 엡1:13-14). 은 고대 헬라 상업세계에서 첫 할부금(down payment)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였다. 이것은 미래에 완불하겠다는 약속("I shall pay in full")이며, 동시에 부분적이나마 현재 사실("Her I pay the first instalment")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성령의 선물은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첫 할부금이며, 동시에 우리의 몸의 부활을 포함한 미래 종 말론적인 유업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다. 둘째, 성령은 "처음 익은 열매( )이다. 롬8장을 보면,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이미 구원의 혜택(예, 성령의 인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 제)을 누리고 있다(8:15-17).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 히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속에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부활)을 기다린다(8:23). 이러한 문맥에서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를 받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8:23).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동격의 소유격으로서, 성령이 곧 "처음익은 열매"라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익은 열매"는 추수기간 초기에 거두어들인 열매 를 가리키는데, 그것 다음에는 본격적인 추수가 반드시 따라온다. 그렇다면 성령은 하나님 의 축복의 첫 배당(first portion)이요 또한 그것 뒤에 완전한 축복이 올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은유는 "인(seal)"이다(고후1:21-22; 엡1:13; 4:30). "인"이란 소유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은유에도 종말론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엡 1:13; 4:30에 의하면, "인"이란 성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치사 우리를 자기 소유 삼으셨다. 그뿐만 아니라, 소유자로서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신다. 그래서 엡4:30은 "그[성 령]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미래 구 속의 완성을 보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성령은 새 시대의 도래와 현존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미래 완성의 보증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면서 단순히 현재의 연약함과 고난을 감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축복을 현재 경험하면서 미래를 대망하게 한다.
4. 성령과 구원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주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이미 언 급한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원을 믿는 자들의 삶에 적용시키 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구원은 복음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듣는 것은 믿음 보다 앞서는 것이며(롬10:14), 또한 믿음을 동반한다(사전 2:13; 살후2:13; 엡1:13). 그런데 듣 는 것은 보냄을 받은 자의 선포가 전제된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는 성령의 사역이다(고후 3:8). 바울은 여러곳에서 자신의 성공적인 선포 사역의 원인을 성령의 역사로 돌린다. 특 별히 롬15:18-19에서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 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증언한다. 또한 살전1:5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 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진술하고, 고전2:4은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 여"라고 말한다(cf. 롬15:18-19); 갈3:2). 인간의 지혜와 수사학과 웅변술은 결코 듣는 자의 마음에 자기 죄에 대한 깨달음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복음이 아무리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된다 할지라도, 듣는 자는 자신이 성령의 조 명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 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자연인( , natural man)에게 는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고전2:14). 그들은 이 세상 신(사탄)의 미혹을 받아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 이다(고후4:4).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눈에서 베일을 제거하여 우리로 보게한다(cf. 사50:5).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생각까지 꿰뜷어 보시는 성령을 통하여서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설(paradox)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고전2:10-16). 이로 보면, 믿는다는 것도 결국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다. 물론, 갈3:2-5에 강조된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이것은 믿음이 성령의 선물보다 앞선다는 것 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성령이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 위 에서 본 것처럼, 성령이 전도자의 선포에 기름을 붓고 듣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 면,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후 4:13에서 셩령을 "믿음의 영( )" 곧 믿음을 일으키는 영이라고 부른다. 또한 고전12:3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분명히 선언한다(cf. 갈5:5, 22). 이와같이 성령은 믿음의 원인(cause)이 된다. 우리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은 계속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믿음을 발생시키는 것으 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은 우리의 신분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믿기 전에 죄와 마귀의 노예였고(갈3:22; 4:3, 8; 롬6:17), 하나님의 원수였다(롬5:10). 그러나 성령은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갈4:6을 보면, 하나님은 "그 아들의 영 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또한 롬8:15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말한다. "아바"는 아람어로 원래 어린 아이의 언어이다. 그런데 그것은 연령과는 상관없이 자녀들이 아버지를 아주 친근하게 부 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막14:36에 의하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직접적이 고 개인적이고 친밀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자들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 은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 음의 중심에서 뜨겁게 체험하게 되고(롬5:5), 아버지께 대하여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가 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적으로(이론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탄생이다. 갈4:29는 믿는 자가 이삭처럼 "성령으로 난 자"라고 말한다. 성령은 "생명의 성령"이다(롬 8:2). 성령은 새 시대의 삶의 원천인 것이다(갈5:25). 따라서 성령의 삶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이다(롬6:11 이하). 죄의 종으로서의 삶은 육체(savrx)의 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저주에 이르게 하는 일들을 생산한다 (갈2:20) 전 인격에 과격한 변화를 가져온다(cf. 갈5:22-23). 골3:10의 말씀처럼, 우리를 "자 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 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개종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인이란 과격하게 변화를 받은 자이다. 근본적인 변화 없이 단순히 죄사함만 선언 받은 그리스도인 은 존재하지 않는다(cf. 고전, 갈5-6, 롬6, 8, 12, 골3, 빌2-4). 여전히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 혀 있으면서도 겉옷만 깨끗하게 갈아입은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는 성령의 침입을 받아 혁신적인 내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cf. 롬12:2). 살후2:13에 진술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cf. 고전6:11). 그러므로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새 삶이란 다름 아닌 성 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갈5:25에서 바울은 진술한다: , . 여기서 ("만일")는 "때문에(since)"의 의미를 가진다. 가 직설법( )을 동반하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그것은 가정(supposition)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 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5:25는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으 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성령을 좇아 행하자."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새로운 삶의 원천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옛 언약(모세언약)안에서 이스라엘의 백성은 율법의 모든 문자적인 요구에 순응하여야 했 다.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은 더 이상 그러한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옛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삶 의 모든 초점을 성령에 맞추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원 증명표(identity marker)는 오직 성령이다. 성령은 새 시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sovereign power)으로서 우리의 전 삶을 주관한다. 우리는 이미 성령이 다스리는 새 로운 삶의 정황 안으로 인도되어,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롬7:14-24에 나타난 갈등과 절규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 고 생각한다. 그들이 볼 때, 성령의 삶이란 단순히 이상(ideal), 곧 비현실적인 것에 불과하 다. 그러나 롬7:14 이하는 그리스도 이전의(before Christ) 또는 그리스도 밖의(outside Christ)유대인(개종 전의 바울 자신도 포함됨)의 경험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회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첫째, 롬7:14-24에 등 장하는 "나"는 죄의 노예로서 항상 패배한다. 그리고 그런 삶은 롬8장에 설명된 성령의 삶과는 결코 양립될 수 없다. 둘째, 롬7:7-25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롬8:9 에 의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중심적인 역할이 가장 선명하게 설명된 곳은 갈5:16-6:10이 다.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권면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5:16; cf. 5:25)이다. 이 권면은 바울의 성령 윤리의 기본이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 면, 그것은 "성령으로 걸으라(walk by the spirit)"가 된다. 유대교에서 "걷는다"는 것은 전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바울은 윤리적인 행동을 묘사하기 위하여 그 표현을 자기 편지에서 17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걸으라" 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하는 명령은 우리의 전 삶이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cf.5:18). 이러한 성령의 삶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먼저, 그것은 믿는 자의 삶에 서 육체의 정욕을 좌절시킨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갈5:16에서 진술한다. 이 진술은 두 가 지 요소, 즉 권면과 명확한 보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육체"는 무엇인가> "육체" 는 히브리어로 인데, 그것은 우선적으로 몸의 살을 가리키나, 때로는 몸 자체를 의미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단어의 의미는 확대되어 여러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하여 연약한 인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예, 창6:3; 대하32:8; 욥10:4; 시56:4; 78:39; 렘17:5). 바울에게 있어서, 그 히브리어 단어에 해당되는 말은 이다. 구약의 의미들이 대부분 그의 서신들에 나타난다.(예, 고전15:39; 고후12:7; 갈4:13-14; 고전1:25; 갈1:16; 빌 3:3).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갈5-6장과 롬8장에서 육체가 죄의 도구로서, 심지어는 죄를 대 신하여 행동하는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육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고, 자체 적으로 "정과 욕심"을 가지고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cf. 갈5:24). 그리고 성령의 열매(갈 5:22-23)에 반대되는 자기 "일"(갈5:19-21)을 생산한다. 이러한 육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갈5:17은 그 것의 이유를 제공한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느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과 육체의 상호 대적으로 말미암아, 둘은 절대적으로 양립될 수 없다 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은 충 족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실, 육체에 매인 자는 정욕에 사로잡혀 육체의 일만을 생각한다 (롬8:5a). 이런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을 배척한다. 그러 나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다(롬8:5b). 그러나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 번도 육체의 정욕에 의해서 유혹을 받거나 그 정욕 에 굴복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도 때로는 실패한다. 그러나 참 으로 성령으로 변화받은 자는 넘어졌을 때에 즉시 회개하고, 다시 성령의 다스림에 자신을 의탁한다. 그러므로 고의적으로 죄 가운데 계속 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cf. 요일3:9). 성령의 삶이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갈 5:22-23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 유와 절제"이다. 여기 맨 처음에 등장하는 사랑은 다른 모든 덕목의 총괄이다. 이 사실 은 고전 13:4-7에 나타난 사랑의 정의를 볼 때 분명해진다. 방종과 자기 만족으로 특징을 이루는 육체의 일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은 남을 위한 깊은 관심과 섬김이다. 이것은 유아독 존식의 개인적인 삶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의 여러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미덕으로서, 공 동체를 세우고 여러 가지로 분리된 자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cf. 갈3:28).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열매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의 재현이라는 것이 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그의 삶과 마지막으로 모든 죄인들을 위한 그 의 죽음에는 그의 본질적인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압축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되는가? 육체에 속 한 자들은 정욕에 사로잡혀 온통 육신의 일만을 생각한다(롬8:5). 이런 자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기" 때문에(갈5:26), 그리스도의 낮아진 삶과 고난과 죽음 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란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고전2:13).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통하여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이다(cf. 롬5:5).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압도당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강 렬한 내적 열망을 창조하는데, 그것은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는 수치스러운 삶을 단호히 거 절하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다(cf. 갈4:19). 그리하여 우리는 결 국 기쁨으로 그의 다스림 아래 자신을 온전히 드리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는 것이다(갈2:20). 이렇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고후3:18). 이러한 삶에 성 령의 열매는 풍성하게 맺어진다. 이처럼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 히 그의 다스림 아래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회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중단 없이 계속되어져야 한다. 육체가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정복된 것은 사실이 나,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갈5:13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육체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정욕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 음에 동참하여(갈2:19-20) 이미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갈6:14)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 다(갈5:24)는 변함없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면서(cf. 롬6:11),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성령의 삶은 계속되는 자기 부인과 철저한 헌신을 동 반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결국 율법의 참된 의도와 목 적이 충족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는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의 삶 속에서 자기 본성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예, 사58을 보라). 그러나 율법은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 인가를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을 공급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 7:14-15; 8:3).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여 그의 사랑의 삶 을 본받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모습(성품)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하신다. 그리하여 율법의 원래 목적과 의도는 이루어진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안에 온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은(갈5:14; 6:2; 롬8:4; 13:10)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갈5:18, 23b ). 갈6:8b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선언한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 을 거둘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의 정욕에 굴복되어 육체의 일을 생산하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된다(갈5:21b, 6:8a). 롬8:6은 요약적으로 말한다: "육신( )의 생각( , mind-set, aspiration)은 사망이요 영( )의 생각( )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것 은 우리가 육체의 지배를 받아 육체의 정욕에 집착하여 살면 죽음에 이르나,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열망을 따라 살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감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그 런 자에게 마지막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구원은 믿는 자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완성된 다(cf. 갈3:3).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믿게 되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며, 성령으로 육체의 참된 목적이 충족 되어 정죄받음이 없이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성령과 교회 마지막으로 취급되어야 할 주제는 성령과 교회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그의 신학 의 중심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단순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관계가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 에 합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개개인을 구원하여 완성될 천국을 위해 준 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 에서 볼 때, 3세기 교부인 Cyprian이 말한 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 므로 바울의 초점과 관심은 항상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전체에 두어져 있다(cf. 고전5:1-13; 6:1-11). 이들은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면서, 현재 이 땅 위에서 미래의 삶을 함께 영위해 가는 자들이다. 옛 언약에서와는 달리,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성령의 보편적인 경험 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의 새로운 탄생이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으로 시작되는 것처 럼, 믿음의 공동체의 존재도 성령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12:13은 말한다: "우리가 유대 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개인이 어떻게 믿는 자가 되느냐보다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이 어떻게 한 몸을 이루느냐는 질 문에 답변하고 있다. 대답은 모두가 개종시에 한 성령으로 세계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 에서 한 몸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전의 모든 구분(인종적, 사 회적, 경제적, 또는 성적)은 없어지고 모두가 한 몸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성전으로 삼고 내주하신다. 구약 시대에는 하 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거처를 정하시고 자기 백성 중에 임재하셨다. 그런데 신약 시대 에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라는 공동체 가운데 거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3:16-17에서 고린도 교인들(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 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또한 고후6:16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바울의 강조점은 믿는 자 개개인보다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 놓여 있다. 물론, 고전6:19는 개개인의 신자 안에도 성령이 거하신다고 말하지만 그는 공동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가 아니고 공동체의 일원이다. 성령에 의하여 시작되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 다. 갈4: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 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또한 롬 8:15-16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 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 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 믿는 자들은 양자의 영(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다. 심지어 롬8:29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엡2:19와 딤전3:15에서 직접적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표준새번역)이라 고 부르고 있다. 이와같이,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은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우리를 한 몸 이요 한 가족으로 묶으신다. 이러한 성령은 우리 안에 아주 친밀한 유대 관계를 생산하신 다. 사실, 성령이 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특징은 참된 교제이다. "성령의 교제"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두 번 등장한다(고후13:13 , 빌2:1 ). 이 표현은 우선적으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서, 성령에의 참여(participation in the Spirit)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주격적 소유격으로서, 성 령이 교회 안에서 창조하시는 교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믿는 자들 사이의 교제는 은혜 와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 그 특징이다(cf. 고후13:13; 갈5:22-23). 빌2:2-4에 의하면, 그 교 제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며", 자기 자신을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힘쓰 는 것이다. 만일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 가운데 불화와 내분과 알력이 있 으면(엡4:25-31), 하나님의 성령은 근심하게 된다(엡4:30).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 으면(엡5:18), 교회 안에서 모든 인간 관계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된다(엡5:21-6:9). 이 로써 아담의 타락 이후 계속되어 온 인간 사이의 불화와 갈등과 대결은 극복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참된 영성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서로 돌아보아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찰하여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이다. 고전12:7은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은사] 을 주심은 공동의 유익을 위함이라." 바울 서신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세 가지 용어가 등장한다. 그것들은 ("신령한 것" 고전12:1; 14:1), ("은사" 고전12:4, 9, 28, 30-31; 롬12:6; cf. 벧전4:10), ("선물" 엡4:7)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이다. Turner에 의하면 는 동사 (to give graciously)에서 유래된 것이고, 접미사 - 는 결 과(result)를 둣한다. 그렇다면 는 문자적으로 볼 때 은혜로 주어진 선물을 의미 한다. 이 는 문맥에 따라 고전7:7에서 독신과 결혼, 고후1:11에서 지극히 위험한 상황에서의 구출, 롬6:23에서 영생(cf. 롬5:15, 16), 롬11:29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여러 특 권들(롬9:4-5)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는 고전 12장과 롬12:6에서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어떤 학자들은 ( 의 복수)가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the Spirit, 고전12:7)에 제한된 것으로서, 조로 고전12:8-10에서 언급된 가시적인(성령의 역사라고 즉각 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은사들, 곧 성령의 초 자연적인 은사들만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문제가 많다. 첫째, 고전12:8-10에 나타난 은사 목록이 다른 은사 목 록들(고전12:28-30; 롬12:6-8; 엡4:11)에 비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 은, 유별난 것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둘째, 고전12:12이 하에서 바울은 교회와 은사의 관계를 몸과 지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몸에는 아름답고 존귀하게 보이는 지체들과 약하고 덜 존귀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있지만, 모두가 몸을 이루 는 데 절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범한 은사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은사들도 주신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를 포괄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에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물론 포함된다. 그러나, 여러 은사 목록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적인 재능이 성령의 능력 을 덧입어 교회를 섬기는 데 사용되어지는 은사들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서신에는 네 개의 은사 목록이 제공된다. 그것들은 의미 있는 중복과 동시에 중요한 변화도 보여준다. 첫째 목록은 고전12:8-10에 나타나 있다: ① 지혜의 말씀(하나님의 지혜 인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력), ② 지식의 말씀(하나님의 역사적이 계시 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그것을 잘 해석하는 능력), ③ 믿음(고전13:2에 언급된 바와 같 이, 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믿음), ④ 병 고치는 은사들(육체적인 몸을 고치는 기적적인 능력), ⑤ 기적들(병고침을 제외한 다른 기적적인 현상들, 특별히 귀신 을 쫓아내는 것 ), ⑥ 예언("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고전14:3, 표준 새 번역] 성령의 감동으로 갑작스럽게 주어진 말씀[고전14:29-32]), ⑦ 영들 분별(예언을 복 음의 기준에 따라[롬12:6]) 분별하는 것[고전14:29]), ⑧ 방언(성령에 감동된 언어로서 하 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고전14:14-15]), ⑨방언 통역(하늘의 언어[고전13:1])인 방 언을 해석하는 것). 둘째 목록은 고전12:28-30에 등장한다: ① 사도(일반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 터 사도적인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지칭), ② 선지자(고전12-14장의 문맥을 고려하면 예언의 은사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를 의미), ③ 교사, ④ 기적들, ⑤ 병 고치 는 은사들, ⑥ 서로 돕는 것, ⑦ 관리하는 것( , administration), ⑧ 방언 ⑨ 방언 통역. 셋째 목록은 롬12:6-8에서 발견되어진다. ① 예언 ② 섬기는 일(행6:1-6에 기술된 집사 의 일, 곧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③ 가르치는 일 ④ 권위하는 일 (exhortation), ⑤ 구제하는 일(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 ⑥ 다스리는 일 ⑦ 긍휼을 베푸 는 일(빈궁한 자, 병든 자, 노약자, 또는 불구자들을 돌보는 일). 마지막 넷째 목록은 엡4:11에 있다. 여기에 (선물)가 (은사) 대신에 사용 되고 있다. 목록은 가장 간단하다: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복음 전하는다(evangelist), ④ 목사와 교사(이들은 하나의 전치사로 함께 묶여 있어, 하나의 활동을 언급하는 것 같다). 이상의 은사 목록들은 모든 은사들을 총망라한 것이 아니다. 각 목록의 구성은 각 서신 의 독특한 수사학적인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령의 삶이다(갈5:16 이하: 롬8:1 이하). 한 지체의 어떤 역할이 교회 공동체에 건설 적인 공헌을 한다면, 바울은 그것을 은사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고전12:7, 11; 롬12:3; 엡4:7). 교회 안에는 은사를 받지 않은 교인, 곧 아무런 쓸모가 없는 교인이 하나도 없다. 각자에게는 성령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최소한 한 가지 은사(그러니까 한 가지 이상의 은 사)가 주어진다. 다양한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고전 12:7). 은사는 결코 개인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교회 공동체)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엡4:12).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 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전 12:12). 이러한 사실은, 지체 들이 상호 의존적이며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에서 언급된 각 은사 의 기능을 고려하면, 그것은 지체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는 여러 차원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 교회, 세상 등에 관한 깨달음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말씀 선 포, 가르치는 일, 예언, 영들 분별, 방언 통역 등에 의하여 충족된다. 바울이 볼 때, 깨달음 을 증진시키는 은사들은 다른 은사들보다 우위에 있다. 새로운 깨달음 없이, 새로운 일과 역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공동체의 정신적·사회적인 안녕(psycho-social well-being), 곧 지체들 사이의 평강 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여기에는 목회적인 성격을 가진 은사들이 중요한데, 그것들은 서 로 돕는 것, 섬기는 것, 권하고 위로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 등이다. 이러 한 은사들이 사용되면, 지체들의 심리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공동체의 사회적인 응집력은 강 화된다. 셋째, 공동체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복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가 단지 영적 인 측면에만 유익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이란 전인적인 것으로 육체적인 평안도 포 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병 고치는 은사, 기적들,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은사 등을 교회에 주신다. 넷째, 공동체의 무의식적인 영역에도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방언이라는 것은 말하는 자신 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송이다(고전14:14-15). 이 방언으로 우리의 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은사들에 의하여 공동체 생활의 모든 영역이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해지도록 계획하셨다. 공동체가 온전하도록 세움을 받는 데는 참으로 다양한 은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도 전인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 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 가 운데 거하셔서 역사하신다(cf. 고후6:16). 그런데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사역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사실, 은사는 주님의 특별한 사역(particular minstries). 이것은 그리 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하여 서로 섬기며 세울 때,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서 역 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은사가 활용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공동체 를 세우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공동의 유익을 위하려면, 은 사는 사랑의 원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전13:1-3; 롬12:9-10; 엡4;15). 사랑이라는 것은 다 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지 않으며, 자기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은사로써 자기의 이익보다 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구한다(고전13:4-5). 그러나 사랑이 결여되면, 은사 사용은 자기 주 장과 자기 자랑과 자기 이익 추구로 표현되어 결국에는 공동체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5:22)과 성령의 은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가 지가 동시에 나타날 때에만 공동체는 진정한 세움을 입게된다. 어떤 학자들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사도 시대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Warfield에 의하면, 성경에서 기적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승인하는 것으로서 정경의 오 나성과 함께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물론, 기적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참됨을 입증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예, 행14:3; 고후12:12). 그러나 그것 만이 기적의 모든 목적은 아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치유와 귀신 축출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거요 선포된 구원의 구체적인 표 현이다(예, 마12:28; 툭4:18-21; 7:20-22; 행10:38). 또한 바울은 위에서 본 것처럼, 기적적인 은사들을 포함한 모든 은사가 교회를 지속적으로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전12:7; 엡4:12).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 실, 교회사에서 기적적인 은사들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는 없었다. Gaffin은 Warfield와 약간 입장을 달리하여, 모든 기적이 사도 시대의 마감으로 중지되었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볼 때, 신유나 그와 관련된 은사들은 지금도 계속된다(예, 약 5:14-15). 그러나 예언과 방언은 모두 영감된 계시인데, 그것들은 정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언과 방언에 대한 Gaffin의 이해는 수용될 수 없다. 고전 12-14장과 롬12:6에 언급된 예언이라는 것은 구약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권위 있는 예언이 아니요, 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교훈하는 목회적인 예언으로서(고전14:3), 사도 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여 분별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고전14:29' 롬12:6; cf. 살전5:20-21). 방 언도 영감된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방언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인 것이다(고전14:14-15). 이 방언은 말하는 자 자신에게 덕 을 끼친다(고전14:4). 그러므로 예언과 방언은 신학적 계시도 아니고, 정경준비(preparation of Scripture)와 관련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고전13:8-10은 은사의 중단 문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한다. 그것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 이 결국에는 폐하여질 것인데, 그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 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재림 때까지 존속될 것이다(cf. 엡 1:17-21; 3:14-21; 골1:9-12).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은사가 다 계속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은 1세기 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고전12:14장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최초의 가르침이 예배 모임의 문맥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통역과 해석이 요구되는 방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으로부터 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이 볼 때, 방 안은 단순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천사의 말"(고전13:1)로서, 성령의 최고 표현이었다. 그래 서 그들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공적 예배시에 방 언을 지나치게 몰두하였다(cf. 고전14:6, 23). 이에 반대하여, 바울은 예배에는 성령의 다양 한 은사가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 하리요"(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 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고전14:26a, b). 그런데 "모든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14:26c).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 을 가르치고 교훈하고 격려하기 위한 다양한 말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께 직 접적으로 드려지는 찬송과 기도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고전14:15-17). 공중 예배에서 기도와 찬송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세워짐이 있는 예배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수직적인 측면과 수평적 인 측면은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인 것처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다.
6. 결론 성령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종의 대사 (ambassador)역할을 담당한다. 원래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살전4:8; 갈3:5; 4:6; 고 후1:22; 5:5; 롬5:5),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런데 성령은 또한 그 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운다(갈4:6; 롬8:9; 빌1:1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 의 주로 높임을 받은 다음,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집행하시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 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령의 오심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성령은 새 시대의 도래 와 현존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미래 완성에 대한 보증이다. 첫 할부금(고후1:22; 5:5; 엡 1:14), 처음 익은 열매(롬8:23), 그리고 인(seal)(고후1:21-22; 엡1:13; 4:30)이라는 은유가 그것 을 잘 묘사해 준다.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하여 미래의 축복을 현재 경험하면서, 미래를 대망 한다. 새 시대의 도래로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은 구원이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십자 가를 통하여 성취하셨다. 그런데 성령은 그 역사적인 구원을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적용시 키는 일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전도자의 선포에 기름을 붓고(살전1:5; 고전2:4; 롬15:19), 듣는 자에게 깨달음(고전2:10-16)과 동시에 믿음을 선물로 주사 참된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신다(고전12:3). 또한 성령은 믿는 자의 마음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음 으로써(갈4:6). 믿는 자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 암은 새로운 탄생으로, 전적으로 새로운 삶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갈 5:25). 성령의 삶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는데, 먼저는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육체의 정 욕을 좌절시키는 것이고(갈5:16), 다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성령의 열매를 생산하 는 것이다(갈5:22-23).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그의 백성의 삶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율법의 원래 의도가 성취된다(갈5:14).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면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갈5:18, 23b; 6:8). 이처럼 믿는 자의 경험의 측 면에서 볼 때, 구원은 성령으로 시작되어 성령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구원한다기보다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구원하신다. 하나 님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모두 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고전 12:13),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전이 되고(고전3:16-17; 고후6:16),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다(갈4:6; 엡2:19; 딤전3:15). 이러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요 한 사역은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구성원들 사이에 친밀한 유대 관계를 생산하여 서로 섬기 고 서로 세우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고후13:13; 빌2:1-4). 이와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은사는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하나도 예외없이 주어진다(고전12:7).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기적적인 은 사들은 물론이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교회를 섬기는데 사용되어지는 자연적인 재능까지 도 은사로 취급된다(고전12:8-10, 28-30: 롬12:6-8; 엡4:11). 은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고전12:7). 이것은 영육간에 지체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목적이 성취되려면, 은사는 반드시 사랑의 원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고전13:1-3; 롬12:9-10; 엡4:15). 초자연적인 은사의 중단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고전 13:8-10). 은사는 주로 예배 모임 가운데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활용된다(고 전14:26). 하나님께서는 참된 세워짐이 있는 예배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상의 요약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경험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삶(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한다. 증거, 믿음, 중생, 성장, 열매 생산, 교제, 은사수여, 서로 섬김, 예배등이 모두 성 령의 사역이다. 현대 교회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입술만으로 성령을 인정하는 것을 중 단하고, 성령을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성령은 두 세대 사이를 살면서 완성 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에게 중단 없이 능력을 공급하는 분이시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신약학회가 한국 교회의 모습과 자기 위치를 성서적으로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성서적 뿌리 찾기를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뿌리 찾기의 한 부분을 위해 바울의 교회 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특별히 바울의 교회에 대한 성령론적인 시각을 확대하면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교회 자체가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 생겨진 종말론적인 영적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교회 이해에 대한 성령론적인 접근이 가능할 때 비로소 기독론에만 얽매어 있는 정태적인 교회론을 벗어나 보다 역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이해가 그 동안 기독론에 의해 흡수되어 제대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일방적인 영적 신비주의 운동의 사역으로 내몰렸고, 그렇지 않으면 문화 철학적인 기의 명상운동이나, 또는 사회적인 투쟁 영성 운동으로 이해되어 왔고, 그와 같은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교회론적인 접근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결여된 채 기독론에 편향된 접근의 경우, 교회론의 교의적 근거에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교회의 역동적이며 유기적인 틀을 부각시키지는 못했으며, 영적 신비주의의 틀에서 본 교회론의 경우, 교회의 은사론에 대해서는 막대한 관심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통전성을 제시하는 데는 미흡했다. 반대로 성령의 인격과 능력을 단지 일반적인 기철학으로 축소시키거나, 사회 정치적인 저항 영성으로 이해하는 경우,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지닌 영적인 계시의 자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공동체성을 상실케 하는 우려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교회론적인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신비를 강조하면,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는 도덕성의 결여로 나타날 뿐 아니라, 신앙이 개인화 됨으로써 공동체성이 파괴당하는 결과로 나타났으며(물론 이러한 경향성은 교회 안에 나타난 신비적 현상이나 결과를 복음의 영적인 계시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단지 그 현상과 결과를 신비주의적으로 몰고 간 데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영성을 드러내려 하면(원시기독교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은 뚜렷하게 대두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역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계시의 자리와 신비는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양자를 적절한 차원에서 접합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반된 신학적 경향성이 그 동안 한국 교회의 교회론적인 방향을 주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이미 이천년 전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바울의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인식과 사도로의 부르심, 그리고 선교 비전이나 능력의 부여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인격적이고 실천적인 능력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의 현실은 성령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교회론적인 본래의 특성을 상실하고 공동체 없는 개인주의적 신앙양상으로 변모되든지, 아니면 영적인 현상과 그 결과에만 매달려 유대인의 율법적 업적주의를 그리스도인의 영적 업적주의로 바꾸어 버리는 특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 성령이 십자가에 달린 분의 영인 것을 망각하고 도리어 그 영을 사물화함으로써 자기 자랑을 하고, 분파하며, 서로 적대하는 공동체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바울이 의도했던 성령론적인 교회상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또한 기독론에 근거하는 교회를 왜 바울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며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의 교회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교회 이해에 대한 성령론적 접근과 반성이 중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에게서 성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묶는 힘이며, 개인과 공동체를 엮는 힘이고,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힘으로 교회를 진정으로 교회되게 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I. 성령론적 해석을 위한 바울의 교회 이해에 대한 몇 가지 중심 표상들
1. 바울의 교회론은 그의 다른 신학적 주제보다 훨씬 더 상황적인 특성을 잘 드러낸다. 그것은 바울의 편지 대상이 그가 직접 세운 교회이거나(고린도교회 등), 아니면 그가 선교적, 목회신학적으로 관심을 깊이 두었던 교회(로마교회 등)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발생한 실제적인 문제들은 바울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써 어떻게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신학적, 목회적으로 반성케 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편지는 그 자체가 교회를 설립한 사도와 지도자로서의 바울에게 선교와 목회활동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기독론,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론을 진술하면서 기독론적인 접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기독론을 넘어 성령론적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교회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앙 공동체가 겪는 실제적인 주요 문제들이 성령 경험을 통해서 나타난 것들이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바울은 그 모든 문제들이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극복 될 수가 있다는 확신을 지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교회론을 다루면서 무엇보다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려 하고 있다(바울에게서 성령은 독립적으로 "영"(pneu/ma)으로(갈 3,2; 5,25; 롬 8,26), 또는 "하나님의 영"(pneu/ma qeou/)으로(고전 2,11.14; 3,16; 롬 8,9), 또는 "거룩한 영"(pneu/ma a[[gion)으로(고전 12,3; 롬 5,5), 또는 "그리스도의 영"(pneu/ma Cristou/)으로(롬 8,9; 빌 1,19) 사용된다. 이는 서로 교환 가능한 용어들이다. 무엇보다 이 영은 인간학적인 의미에서의 "영"(pneu/ma: 고전 7,34; 고후 7,1 등)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살전 1,5; 갈 3,2-5; 고전 12,7이하; 롬 15,19)으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선물이다(고후 3,6; 참조 롬 2,29; 7,6; 8,15이하). 참조 J. Kremer, EWNT III, 279-291).
2. 바울의 교회론은 무엇보다 표상적 언어를 통해 묘사되면서 그 상황적 맥락에 나타난 논쟁적인 특성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참조 고후 6,16; 롬 9,25-26; 갈 6,16)으로서의 교회이며, 두 번째는 "성령의 전"(참조 고전 3,16-17; 롬 9,25-26)으로서의 교회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참조 롬 7,4; 12,4-5; 고전 10,16-17; 12,12-26; 골 1,18.24; 2,16-19; 3,15; 엡 1,23; 4,4-6; 5,23)으로서의 교회이다. 교회가 지닌 이러한 각 표상의 고유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 세 표상들을 묶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거주, 그리고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바울은 구약 인용문이 나타나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롬 9,25f=호 2,25; 롬 10,21=사 65,2; 롬 11,1f=시 93,14(LXX); 롬 15,10=단 32,43; 고전 10,7=출 32,6; 고후 6,16=레 26,12)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이스라엘"(롬 9,6-13; 갈 6,16: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교회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이라는 표상이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교회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용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약속을 받은 신앙 공동체와 관계되어 있는지를 교회론적으로 말해 주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설립한 이방 교회들을 향해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 붙여진 용어를 다시 구속사적인 전망에서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룩한 자들"(롬 1,7; 고전 1,2; 엡 1,1),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할례자"(롬 2,28 이하; 빌 3,3), "아브라함의 자손"(롬 4,1 이하; 9,7 이하; 갈 3,7-8.29),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고전 3,16; 고후 6,16) 등이다. 바울은 이 개념들을 이방 교회에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성령의 약속을 통해서 구약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신분과 유업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성령의 전: 성령의 전으로써의 교회의 표상(고전 3,16-17; 6,19 참조 벧전 2,5; 엡 2,21-22; 고후 6,16)(묵시문학적 전통에서 하나님께서 종말에 친히 세우실 새롭고 완전한 성전을 기대하고 있다: 겔 37,26-27; 사 44,28; 희년서 1,17.29; thHen 90,28-29; 91,13; Sib 3,290; Tob 14,5; 11QT 29,8-10 등; 참조 O. Michel, ThWNT V. 139ff)은 특별히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로써의 교회 이해를 부각시켜 준다. 원시기독교회는 성령의 종말론적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행 2,16 이하). 따라서 그들의 그러한 소망과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손으로 짓지 않은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말씀과 잘 어울리고 있다(참조 막 14,58). 성령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참조 벧전 2,5). 따라서 원시기독교회는 당시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신해서 자신들이야말로 성령의 임재함으로 말미암아 종말적인 새 창조 과정에 서 있는 새 성전이라고 이해했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1 305).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거함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복(갈 3,14)임을 말해주고 있다.
3)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의 출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다양하다(참조 E. Schweizer, ThWNT VIII 1024-1091; H. Merklein, Entstehung und Gehalt 319-344). 그러나 그 중에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 첫째는 성찬 전승이고, 둘째는 아담-그리스도의 모형론이며, 셋째는 우리를 위해 죽음에 넘기시고 부활하신 인자 메시야의 표상(참조 단 7,13-14.22.27)이다(참조 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75-181; P. Stuhlmacher, Biblische Theologie des NTs. Bd I 358ff).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을 통해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는 기독론적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고유한 관계를 말해 줌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켰고, 동시에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의 다양성을 제시함으로써 교회가 지닌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또한 성령론적으로는 몸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통해 그 지체들의 조화와 연합, 그리고 성장하는 모습을 제시해 준다(J. Roloff, Die Kirche im NT 89에서 바울의 교회론이 두 초점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A. Oepke(Leib Christi oder Volk Gottes bei Paulus ThLZ 79(1954) 363-368)와 "그리스도의 몸"의 주제를 강조하는 E. Ksemann("Das Theologiesche Problem des Motivs vom Leibe Christi": Paulinische Perspektiven 1969 178-215)의 입장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양자는 서로 배타하기보다는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곧 두 개의 주제가 두 초점을 이루고 있는 타원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그러나 여기에다 "성령의 전"으로써의 교회 이해를 추가해서 세 개의 초점을 가진 원으로 교회론을 논의할 때에 성령의 사역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I1.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부터 바울의 교회까지
1. 교회의 탄생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때로 교회가 부활절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탄생했다고 간주하기도 하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그 뿌리와 실체를 찾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K. Berger, Kirche. II 201-202; 물론 교회의 역사적 근원은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교회론적 어휘와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참조 김중은, "구약의 교회 - 신구약의 상관관계의 관점에서", {성경과 신학} 7(1989), 286-302; 강사문, "구약에 나타난 교회", {교회와 신학}, 30(1997년 가을호), 106-132).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역이 원시기독교회의 전제이며 근거라 할 수 있다. 갈릴리에 등장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를 요청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수용하도록 요구했다(참조 막 1,15). 예수는 자기 자신을 그들의 목자로 인식하면서 그의 백성들을 모으기 시작했다((참조 마 2,6; 9,36; 10,6; 15,24; 눅 10,10; 막 6,34). 그가 불러모은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었다(마 10,6). 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란 이스라엘의 주변적인 인물들로 당시 소외된 자들, 곧 죄인들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 us I/2 90).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예수의 초청은 그 당시 사회와 종교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들이 아닌 주변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귀신들린 자들과 병약한 자들, 그리고 죄인과 세리들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초청이 시작되었고 그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구체적인 표징으로 성령을 통한 새 사건이 드러났던 것이다. 성령을 통한 귀신축출(마 12,28; 눅 11,20)이나,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병 고침, 그리고 하나님의 죄 용서를 증거하는 식탁 교제등은 바로 예수의 인격(말씀과 사역)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이 땅 위에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표징이었다(이는 오순절 이후에 원시기독교회가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2. 예수의 "12 제자" 선택은 바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한 메시야적 사역에 그들을 동참시키기 위한 부름이었다(막 3,13-19; J. Jeremias, NT Theologie I 223-225;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98ff; G. Theissen, The Historical Jesus 216f에서 12명의 제자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진정성 있는 표현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12제자란 옛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12지파를 상징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중심 인물들로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 비로소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고 파송되었다는 사실이다(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귀신 축출과 병치유가 중심 사역으로 제시된다; 참조 마 10,1-16; 눅 9,1-6; 10,1-12와 눅 7,18-23; 11,20; 막 6,7-12). 따라서 12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부름받은 순간부터 종말론적으로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위탁받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곧 종말에 심판주로 오실 인자로, 그리고 12제자는 새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우두머리로서 인자와 함께 심판할 특권을 지닌 자들이었다(마 19,28; 눅 22,29-30; 참조 단 7,9f). 그렇다고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권이 단지 12제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지닌 이런 메시야적이고 종말론적인 특권을 현실에서 선취하는 자리로써 식탁 공동체를 베풀었으며(막 2,15-16; 눅 15,1-2; 참조 막 2,17.19; 눅 6,21; 22,30; 막 14,25; 사 25,6; 65,13), 이 식탁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은 비단 12 제자들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리새인이나 쿰란 공동체와는 달리 예수는 사람들을 식탁 공동체에 초대할 때, 그 어떤 제의적 정결의식도 요구하지 않았기에(막 7,1-23) 종교적이나 사회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누구나 이 식탁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었다(눅 14,12-24; J. Jeremias, NT Theologie I 173). 어떻든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은 메시야주의의 변화이다. 예수는 12제자를 선택하고 파송함으로써, 메시야적 권위를 위임받게 됨으로써 전통적인 일인 메시야주의를 집단 메시야주의로 전환, 확대시켰던 것이다(참조 G. Theissen, The Historical Jesus 216). 예수를 뒤따른 사람들의 특성이 어떠했는지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자기 가족들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와 함께 삶을 나누었던 사람들로서,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것을 위해 선교적 파송에 참여했던 제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참조 눅 9,3-4; 10,4-8).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가족과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와 제자들에게 숙박할 장소를 제공하고(참조 막 1,29-31; 10,28-30) 자기들의 재산을 내놓아 그들을 옆에서 섬기고 봉사하던 사람들이다(참조 눅 8,2-3). 예를 들면, 마리아와 마르다(참조 요 11,1),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참조 막 15,42-47)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의 산상설교를 들은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형태의 뒤따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마 5,23-26; 6,1-4.5-6). 말하자면 그들은 매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세리와 죄인들(마 11,19), 바리새인(막 12,28-34; 눅 7,36), 가난한 사람들(눅 6,20; 마 25,31-46),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막 3,34-35), 여인들(막 10,40-41; 여성 제자들은 이 두 가지 부류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조태연, "초기 예수 전승을 통해 본 여성신학적 교회론." 41-81) 등이 그 속에 포함될 것이다.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 죽음을 당할 것을 직면하면서 예수(참조 눅 13,32; 막 10,45 병행; 막 14,22.24 병행)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해 그들도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로까지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린다(참조 눅 6,22-23 병행; 막 8,34-35 병행; 막 13,9 병행; 누가 본문의 진정성에 대해서 참조 I.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52).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 예수가 시작하고 위탁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인 사역을 지속해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참조 눅 17,22-37; 18,8).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제시해준다(마 16,18-19; 석의적인 논쟁에 대해서: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 us, I/2 450-466; 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62-165; 특히 P. Stuhlmacher, "Kirche nach dem NT" 305에서 그것이 지닌 아람어적인 언어 특성과 성전 숙정에 나타난 성전 말씀과의 응집성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말씀은 이차적이라기 보다는 예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게바라는 별명 또한 시몬(베드로)을 지칭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은 이 별명이 예수에게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베드로에게 예수에 의해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계속 세우는 역할이 주어진다. 따라서 갈릴리에서의 예수 부활 현현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와 제자들은 새롭게 12제자들을 구성하고(참조 행 1,12-26; 고전 15,5), 이어 오순절 성령 경험을 통해서 예수가 위탁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행 2,37-41). 말하자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그들 스스로 "성도들"(롬 15,26; 행 9,13), "하나님의 교회"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행 8,3; 11,22; 12,1.5; 고전 15,9; 갈 1,13 등; H. Merklein, "Die Ekklesia Gottes" 48-70; W. Klaiber, Rechtfertigung und Gemeinde 11-21; J. Roloff, Die Kirche im NT 83-85).
4.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바로 안디옥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바울 교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 곧 스데반 그룹에 의해 생겨진 교회였다(행 11,19-20). 따라서 그들은 신학적으로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예수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며 그리스도라는 명백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유대 회당 예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가정 교회의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결과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그들은 외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인들"(cristianoi,)이라고 불리게 된다(행 11,26; 이는 무엇보다 안디옥교회의 이방선교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유대의 회당예배와 분리된 독자적인 모임 영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G. Schneider, EWNT III, 1145-1147)). 바나바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이방 선교를 하게 된 안디옥 교회는 곧 예루살렘교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사도회의를 통해(갈 2,1 이하; 행 15,1-29) 두 교회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선교 영역과 두 개의 다른 복음을 인정하게 된다(갈 2,7: 유대인들을 위한 "할례의 복음"과 이방인들을 위한 "무할례의 복음"; 참조 박응천, "신약 교회의 유대특수주의와 세계보편주의", 244). 그러나 비록 바울과 누가의 기록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안디옥교회를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되는 세 사도는 서로 일치된 의견을 지니게 되었다(갈 2,9: 바울에게 준 "은혜"란 곧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사도권을 뜻한다; 참조 갈 1,15-15; 롬 1,5; 12,3; 15,15; 고전 3,10; 엡 3,8; 빌 1,7: 참조 K. Berger, EWNT III, 1095-1102)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방 선교에 대해 동의하게 되었다(참조 행 10,1-11.18; 11,20-21; 15,1-35; 갈 2,6-10). 그것은 바로 이방 지역에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결과였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특히 사도회의에서 이방 선교를 위한 개방적 결정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행 15,28에서 결정의 주체가 "성령과 우리"이다: 참조 김지철, "복음의 진정성과 교회의 일치성" 50-75).
III. 성령의 피조물로써의 교회
1. 에클레시아의 신학적 의미: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하나의 장소에 모인 신앙 공동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단수로도 복수로도 사용이 가능했다(살전 1,1; 2,14; 롬 16,16; 고전 7,17; 16,1; 갈 1,2(복수) 등). 그래서 당시 산재하는 가정교회 하나 하나가 교회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롬 16,5; 고전 16,19; 골 4,15;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공동체와 상관없이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단수로 나타난다; 예 고전 4,17; 에베소서에서는 보편적 교회의 양상으로 변모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롬 12장과 고전 12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도 그 출발점이 지역교회인 로마 교회와 고린도교회라는 장을 염두에 둔 진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의 후기 서신(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본고에서는 본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에 나타난 우주적인 교회로의 발전 소지가 바울의 초기 서신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차단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가정 교회를 지칭하는 "교회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하면서도 이미 고린도전서 1장 1절과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단수 형태로 전체 교회를 통합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살전 2,14)이라는 부름으로써 지역 교회와 보편적 교회와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각 지역 교회가 단지 전체 교회에 참여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영적-기독론적 실체라는 점에서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전체 교회와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이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97).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종말론적인 구원 공동체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교회" 안에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러하다(참조 고전 12,13.27; H. Merklein, "Die Ekklesia Gottes" 315-316). 이러한 점에서 단지 장소적인 모임인 에클레시아의 세속적인 의미를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실체로 확대 해석해 낸 인물은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의 피조물로써의 교회: 바울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살전 2,14; 갈 1,22; 참조 롬 16,16)라는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롤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낸다. 하나는 보이는 세례라는 틀(롬 6,3 이하)이며,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이다(고전 6,11; 12,12-13; 갈 3,27). 그러나 바울에게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실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세례받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속한 통치권의 전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 서게 된다(롬 6,10f; 고전 6,11; 갈 2,20). 따라서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여기에 참여한 신앙인들로 하여금 과거 옛 사람의 특권, 예를 들면, 과거의 종교적, 사회적, 성차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그분과의 새로운 연대와 연합이 가능해 진다. 바울은 이것을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서 전체를 대표하는 인격적인 표상이다(아담-그리스도 모형론의 배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참조 롬 5,11-21; 고전 15,20-28).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연합될 때, 그는 세상의 사회 종교적 신분에서 야기되는 우월/열등의 차별, 지배/피지배의 권력 투쟁, 정결/부정이라는 이분법적 갈등을 극복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자리에 들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써의 교회의 모습이다.
3. 성령의 약속을 이어받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새 이스라엘)으로서의 교회: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핍박자였으나(고전 15,9; 갈 1,13; 참조 빌 3,6)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 현현 사건을 통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증언한다(참조 C. Dietzfelbinger, Die Berufung des Paulus).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신케 되었다(갈 1,1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복이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하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뜻한다(갈 3,13-14; 참조 사 44,3; J. L. Martyn, Galatians 323).
1)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많은 자손: 창 15,5; 땅의 소유: 창 15,7)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아브라함(창 15,6)이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이 되고 그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율법에 신실했기 때문이거나 할례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롬 4,3; 갈 3,6)이었다는 것이다. 불경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가장 적합한 인간의 태도란 믿음(롬 4,5)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결코 육체적인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롬 4,17)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따라서 그의 육체의 자손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롬 4,16; 갈 3,9)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주적 지평으로 확대되었음(롬 4,18.23.24; 갈 3,8.14)을 뜻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지평 확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로 개방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러한 개방은 이스라엘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을 더욱 유효하게 만들었다(참조 고후 3,6-11). 바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나타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고후 3,16-18).
2)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모형론적으로 제시한다(고전 10,1-13). 그리고 그 출애굽 과정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들의 조상"(1절)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과 바울의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해준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광야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결과를 보여 주면서, 고린도교회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례전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들에게 불신앙과 불법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처럼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례전적 제의에 참여한다고 해서 구원이 결코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영적으로 거듭난 참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
3)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 다음은 헬라인이다"(롬 1,16)라고 하는 구원사적인 선후 관계를 진술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일관된 주장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폐해진 것이 아니다(롬 9,6a)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모두 구속사의 전환이 나타났으나(롬 9,30-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선언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를 세 단계로 진술한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27-130).
첫째 단계(롬 9,6b-29)로써 바울의 기본적인 입장이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 나타난다. 곧 이스라엘에게서 육체적으로 나온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롬 9,6b),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바울의 기본적인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그 안에 야곱과 에서처럼 늘 하나님의 선택과 폐기의 양면성이 있었다(7-9절). 그러나 이러한 선택과 폐기는 어떤 고정된 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달린 것이었다(14-23 절).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유가 결코 하나님의 자의적인 횡포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신실성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표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24-29절; 11,1-10)에게서 발견된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곧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두 번째 단계(롬 9,30-10,21)로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선포는 바로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신실성의 표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약속대로 마지막 때에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입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신 것이다(롬 10,6-15; 참조 신 30,12-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아직도 율법의 길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는 믿음의 길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책임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어두운 전망 하에도(롬 10,19-21)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있음을 알린다. 하나님이 지금 그의 백성에게 수행하시는 심판은 단지 정화의 심판일 수 있다는 것이다(19b절). 이 같은 가능성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넘어서게 한다(참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r 145f). 곧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이 더 풍성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온종일 팔을 벌리시고 불순종하는 백성을 기다리시는 분임(21 절=사 65,2(LXX))을 말한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든다(롬 11,1-36).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한번 남은 자에 대해 언급(참조 롬 9,27ff)하지만, 그것은 미리 아신 백성(롬 11,2)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신실함에 대한 증거로서이다. 바울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 모두를 아직도 버리시지는 않았음을 강조한다(롬 11,1b). 이스라엘이 비록 믿음을 거부함으로써 걸려 넘어졌으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 종국적인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조차도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일시적인 삽화적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롬 11,11a).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대한 거대한 파노라마를 펼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서로 배타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서로 연계성을 지닌 존재들임을 강조한다(롬 11,11: "저희(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은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의 신앙 거부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구원 영역에 참여케 되고 동일한 구원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시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을 통해 그 구원사의 흐름이 역전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수용자로 확정된 이방인들을 보며,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다시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로 돌아올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기다림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대한 바울의 이해이다.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산 시온에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롬 11,26; 참조 사 59,20f) 그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신앙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있다. 즉 바울은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 154-158; 이한수, "바울의 교회론", 40-43, 55-59).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속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롬 11,25-32)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선언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라고 찬탄한다(롬 11,33). 여기서 "하나님의 깊이"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와 지식을 뜻한다(참고 고전 2,7.9.12; U. Wilckens Der Brief an die R mer. II 269). 로마서 9장 1절에서 바울이 "성령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구속사에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드러낸 것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구속사적인 이스라엘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사의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결정적인 분기점과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과의 구속사적인 연속선상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수용과 거부를 통해 이제 구원과 심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교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왜 그토록 스페인까지의 선교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교적인 독자성을 주장하면서도 왜 마지막까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계속 고수하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이방 선교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바로 그의 구원사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원사의 마지막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을 것을 염두에 둔 바울은 자신이 이방 백성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써(갈 1,16),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롬 11,12). 말하자면 바울은 그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침내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소망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태어난 이방 교회들이 그 신앙적 뿌리인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만이 이러한 구속사적인 전망을 계속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확신했다(롬 15,19).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울의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이다(갈 2,10). 그래서 바울은 강한 애정을 가지고 추진했다(고후 8,1-24; 9,1-15; 롬 15,25-29). 이 헌금이야말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사적으로 연대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참조 행 20,1-4). 이로써 분명해지는 사실은 바울에 의하면 교회는 종말의 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이스라엘로서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라고 말한다.
4.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으로써의 교회: 고린도전서 3장 5-17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비유한다(고전 3,5-17). 그리고 그 단락의 결론으로 교회는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임을 밝힌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분파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행한 경고이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는 우상 숭배의 위험 속에 놓인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다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참조 레 26,11; 겔 37,27)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이 그의 처소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인 교회는 새로운 성전이라는 말씀이다(참조 롬 8,9-11). 이러한 성전에 대한 표상(고전 3,5-17; 고후 6,16)이 둘 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강력한 경고가 담긴 문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의 성전 말씀(막 11,15-17; 14,58 병행; 참조 행 6,14)을 연상시킨다. 예수의 성전 말씀에는 당시 현존하는 성전의 역할은 끝났으며, 동시에 예수 자신의 파송이 지금까지의 성전이 수행하던 기능, 곧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는 기독론적인 암시가 들어있다(막 14,58과 요 2,20-2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종말론적인 성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12). 원시 기독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자기 희생을 통하여 성전의 본래적인 목적,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과 함께 거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인식했던 것이다(참조 W. Klaiber, Rechtfertigung und Gemeinde, 39). 그러면 바울은 교회를 성전으로 묘사하며 무엇을 의도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성전은 하나의 건물로서 세워져 나가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령이 임재하는 장소로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1) 하나의 건물로써의 교회는 선교적인 측면(고전 3,5-15; 롬 15,20)과 목회적인 측면에서(고전 8,1.10; 10,23; 14,4.7; 살전 5,11) 부각된다.
a. 밭과 건물로 비유되는 교회에서(고전 3,5-17)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밭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건물은 어떻게 건축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을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와 친히 건물의 기초를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밭에 어떻게 씨를 심고 물을 주며, 그 터 위에 어떤 건물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도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참조 W. H. Ollrog, Paulus und seine Mitarbeiter 164-175). 왜냐하면 사역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서 그들이 그 기초 위에 무엇을 가지고 세웠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고전 3,13-15). 다시 말해 선교 동역자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 복음인지 아닌지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교 사역자들이 지닌 복음에 대한 이해와 증거 방법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된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내용과 그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에 의해 서로 갈등하고 분파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b. 밭과 건물로써 교회의 모습은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문제와 연결되어진다(고전 8,1.10; 10,23; 14,4.7 살전 5,11). "덕을 세운다"라는 용어에는 기본적으로 건물로써 성전에 대한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바울의 목회적인 관심과 목표를 잘 보여주는 표현으로서, 신앙 공동체가 서로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내적인 교제와 연합을 이룬다는 뜻과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을 통해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특성인 것이다(참조 J. Roloff, Die Kirche im NT 116; 여기서 교훈체제의 확대나, 사람 숫자의 확장으로서의 덕을 세운다는 의미는 생소하다).
바울이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향해 집중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린도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성령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고전 1,23.24.30; o` evstaurwme,noj Cristo,j의 현재완료형은 지금까지 그 효력이 지속됨을 뜻한다)의 영인 것을 망각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만족하여 배부름과 부요함과 왕적 권위만을 누리고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4,8). 바울은 그들에게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친다(참조 고전 2,2; 4,9-13; 갈 2,20; 롬 8,17; 빌 3,8-11). 또한 고린도 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지식이 세우는 것"이라고 자랑하며, 그러한 지식을 가진 자신들은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전 10,23)고 주장하면서 영적으로 자유 분방한 신앙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바울은 "지식은 오히려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경고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고린도교회가 자랑하는 방언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방언은 비록 방언하는 자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으나,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 절제를 해야 하지만, 예언의 경우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에(고전 14,4), 오히려 그것을 사모하라고 역설한다(고전 14,28.40).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바울의 강력한 권면(고전 14,12.17.26; 롬 14,19; 15,2; 살전 5,11; 엡 4,29)의 직접적인 대상은 교회 안에서 소위 강한 자들이었으며, 간접적인 대상은 그 안에 함께 거하는 연약한 자들(고전 8,11)이거나, 앞으로 신앙 안에 들어와야 할 사람들(고전 9,19-23; 10,32)이었다. 교회란 곧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하나됨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나 직분은 그것이 얼마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따라 평가된다(고전 14,3-5; 엡 4,12)고 할 수 있다.
2) 성령이 임재하는 장소로써 교회의 거룩함의 주제는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 전체와 더불어 그 안에 참여하고 있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먼저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으로 부름 받은 존재이기에 거룩하며, 또한 그 안에 성령이 내주 하시기에 거룩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 거룩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고전 3,17).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은 영적 이기주의를 통해서 서로 자랑하고 분파하며 성령 경험을 독점하려 함으로써 교회를 사물화했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I/1 305f).
이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일로,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할 죄악이라고 바울은 경고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고전 3,16-17: "더럽히다"(fqei,rw: 고전 3,17)라고 번역된 것은 단지 세속적인 도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세우다"(evpoikodome,w: 고전 12.14)라는 의미의 반대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의 근거까지 파괴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전인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숭배는 결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병존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이 현존하는 교회를 그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닌 우상에 의해 그 영광을 빼앗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론과도 밀접히 연결된다(몸의 소유가 누구인가에 따라 창녀의 지체가 될 수도, 아니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도 있다: 고전 6,16-17). 자기 몸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 여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5장 1-8절에서 바울은 개인의 윤리적 범죄가 전체 교회의 거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기의 계모와 함께 사는 성적인 범죄를 다루는 것으로, 그것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레 18,8; 신 23,1 등), 당시 이방의 윤리적 규범에서도 간음에 해당되는 범죄였다(Tacitus Ann. 6,19; Cicero, Pro Cluentio 14f). 따라서 바울은 그가 실제로 그들과 함께 그 곳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모일 때에 바울 자신이 그의 영으로 그 곳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내어쫓고, 사탄에게 넘기도록 판단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이렇듯 강력히 경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범죄한 개인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는 그 거룩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VII/1 373-378).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바울은 그 범죄자에게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전 5,5).
이로써 중요하게 지적되는 것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인 그리스도인의 몸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신앙인들은 무죄한 상태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는 이 세상과 담을 쌓고 폐쇄된 채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바울은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인정되는 죄악을 교회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과 적대하는 옛 세력(고전 5,7: 묵은 누룩)에 투항하는 일일뿐 아니라, 그것은 교회의 거룩이란 본질을 해치는 것이고 성령의 거룩함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비록 이 세상의 죄악 속에 거하고 있지만, 성령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불신앙의 세상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조사회(Kontrastgesellschaft; G. Lohfink, Wie hat Jesus gewollt?, 142)가 지녀야 할 모습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의 말씀(참조 마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며, 그의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실천되어야 했던 모습이고(참조 막 10,41-45 병행: 섬기는 자), 원시기독교회를 통해서 확증된 것이며(참조 행 4,32-5,11), 또한 바울의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드러나야 할(참조 고전 5,1-6,11; 고후 6,14-7,1; 롬 12,1-2) 삶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도 거룩성을 담지하고 이 땅 위에 존재해야 할 종말적인 성령 공동체인 교회가 지녀야 할 특징이기도 하다.
5. 성령의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은 바울의 초기 서신 중 다음 네 구절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의 새 존재를 율법과의 관계에서 언급하는 본문(롬 7,4)이며, 둘째는 신앙 공동체의 은사적 삶을 위한 권면적인 문맥(롬 12,4-5)이고, 셋째는 성만찬의 맥락(고전 10,16-17)과, 넷째는 몸과 비유라는 비유의 틀에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본문(고전 12,12-26)이다.
1) 바울은 로마서 7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세례의 사건을 통해(참조 롬 6,3 이하)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함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의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그 몸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에는 이미 교회론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U. Wilckens, Der Brief an die R mer. VI/2 65)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제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롬 7,6)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두 종류의 인간상으로 나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로마서 7장 7절 이하에 언급된 의문의 묵은 것에 얽매어 고뇌하는 인간상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 등장하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성령을 통해 승리하는 인간상이다.
2)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바울은 몸과 지체라는 틀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받은 영적인 은사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공평하게 나누어준 성령의 선물임을 언급한다. 따라서 영적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신앙 공동체 내의 각 지체가 다양하고 고유한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기 위함에 있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다른 지체와의 차별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위치이며, 그 위상을 통한 몸의 하나됨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전체와 개별의 연대성과 고유성을 인식하면서 자기의 은사에 따라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바울은 그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이 드려야 할 영적 예배(롬 12,1: 하나님의 영적인 본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도 접근 가능한 예배: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 me, 168; 참조 E. K semann, "Gottesdienst im Alltag der Welt," 198-204)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 언급된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은사목록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윤리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몸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통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고린도전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는 두 본문(고전 10,16-17; 12,12-31)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성례전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으며(고전 10,16-17), 다른 하나는 몸의 각 지체가 그리스도라는 몸 안에서 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역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고전 12,12-31).
a.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에 언급된 성찬에 대한 바울의 구원론적 접근은 그의 교회론과 잘 어울린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의 사건에 참여케 되는 구원론적 언급이라면, 고전 10,17은 이러한 구원의 사건에 참여한 각 그리스도인이 이제 소외된 개인의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전체에 연합되었음을 교회론적으로 말해준다. 본래 예전적인 식탁 참여는 그 제의의 대상과 교제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누군가 이방의 우상 제물에 참여하게 되면 그는 귀신과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고전 10,19-20),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그 식탁의 주인으로서 떡과 잔을 나눠주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경험하게 된다(고전 10,16-17). 이렇듯 성만찬의 참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참조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467f). 바울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개념을 서로 연결해서 제시하고 있다. 바로 참여/교제라는 koinwni,a와 직분/섬김을 나타내는 diakoni,a이다. 바울은 이 두 개념이 하나의 몸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먼저 바울은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라는 말로써 식탁을 통한 공동체교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의 떡인 몸에 많은 지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먹는 것을 의미한다(koinwni,a가 "참여"인가 아니면 "교제"를 뜻하는가 라는 양자 택일적 질문은 무의미하다. 외적인 식탁에의 참여는 내용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교제의 자리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H. Conzelmann,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210; 참조 J. Hainz, EWNT II 749-755에서 고전 10,16b의 교제(koinwni,a)와 10,17b의 참여(mete,cw)를 구분한다. 참여를 통한 교제로 하나의 몸에 연합한다). 바울이 여기서 신앙 공동체의 교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린도교회는 개인주의적이며, 동시에 그들은 성례전주의적인 성만찬의 이해에만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앞의 맥락에 속하는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를 통해 인도함을 받고, 광야 생활을 하면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물을 먹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여 영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보장도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바울에 의하면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공동체로 참여하는 것으로서, 참여자는 그것을 통해 그가 속한 공동체의 덕을 세울 책임과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나누지 않음으로 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렸던 것이다(참조 고전 11,21-22.33-34). 이에 바울은 그것은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고전 11,27)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식탁 사건(갈 2,11-21)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식탁 교제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가졌던 식탁 공동체(막 2,14-17)의 정신을 거절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시키는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b. 고린도전서 12장 3-11절은 교회론의 관점으로 성령의 은사론을 언급한 것이며,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은 영적 은사의 통전적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의 관점에서 교회론을 전개한 것이다. 은사론과 성령론이 함께 맞물려 있다. 바울은 이러한 어울림을 통해 신앙 공동체의 하나됨을 보존하려 하고, 동시에 각 은사의 다양성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은 바로 하나인 성령의 역할임을 강력하게 표명해 준다(고전 12,4 이하에서, 같은 성령, 한 성령의 반복, 또한 고전 12,13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교회가 지녀야 할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 고린도교회가 다양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무시하고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미 고린도전서 10장 17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그 원인을 부연한다면,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 중에 특히 방언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고전 12,1; 13,1; 14,1-5).
물론 바울은 영적 은사인 방언을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언을 포함하는 모든 은사들은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각 은사는 교회를 바로 세우며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은사의 진정한 권위와 역할은 신앙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고(고전 12,7), 덕을 세우는가(고전 14,4.26)에 따라 판별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작고 별 것 아닌 은사와 지체가 더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것임을 가르친다(고전 12,22-27). 즉 교회 안에서 개인의 업적이나 신비한 종교적 경험으로 영적 우월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사실임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바울은 영적인 은사마다 영적인 분별력에 의해 평가받아야 할 것을 권고한다(고전 12,10; 14,29; 참조 살전 5,19-22). 이런 과정에서 모든 공동체가 서로 책임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참조 J. D. G. Dunn, "The Spirit and the Body of Christ," 346-348).
바울은 다양한 영적 은사는 섬김(diakoni,a: 고전 12,5)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이 섬김은 당시 헬라어에서 사용되던 식탁의 봉사(참조 행 6,1-2)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바울은 그 말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여 자신이 사도로서 선교적 파송을 위임받은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고후 3,8-9; 4,1; 5,18; 6,3; 롬 11,13). 바울의 이러한 섬김에 대한 이해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왔다(막 10,45; 눅 22,27)는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맥락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고전 11,1; 참조 4,16; 살전 1,6).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형을 이어받고 있으며, 그의 신앙 공동체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다(빌 3,17: 참조 빌 4,9).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신앙 공동체란 서로 자랑하고 뽐내는 지배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서로 돕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서 만인 제사장의 정신과 그 가능성은 바울에게 이미 열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참조 벧전 2,9; 계 1,6).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제(koinwni,a)와 섬김(diakoni,a)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몸을 통해 일하는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은사를 나눠줌으로써 서로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서로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됨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곧 "같은 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고전 12,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잠재해 있는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다양성과 고유성으로, 그리고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공동체됨과 통일성으로 극복하면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성령임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77). 그러므로 교회는 각 지체라는 개인이 단지 공동 연대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이 땅 위에 세워진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 땅 위에 뿌리박고 있는 철저히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으로써 살아있는 몸적인 실체인 것이다(참조 갈 3,27f; J. Roloff, Die Kirche im NT, 108f).
4) 바울의 후기 서신인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들어오면 그리스도가 몸에 대한 권위를 지닌 머리, 곧 교회의 머리로서 표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여기서 지역교회라는 틀을 벗어나 우주적인 교회로까지 확대된다. 머리인 그리스도는 몸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정체성과 성장의 근원이며 동시에 성장의 목표인 것이다. 곧 머리로부터 몸이 세워지고 그 머리까지 자라나게 됨을 뜻한다(엡 4,15; 골 2,19). 여기서 성장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극대화된 표현이다. 교회는 그가 속한 머리인 그리스도, 곧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여 만물의 으뜸이 되신 분이시고, 궁극적으로 세상의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을 다스릴 분이신 그리스도로(엡 1,21-22; 골 2,10)로부터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며, 또한 그의 몸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성장해야 한다(엡 1,23-24)는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몸의 통일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구체적인 자리이다(엡 2,13-22).
여기서 반복되는 주제는 성령의 사역이다. "(한) 성령 안에서"(18.22절)가 강조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란 마지막 시대에 성령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적 내용임을 분명히 보여준다(엡 3,5-12: 5절에서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9절에 "비밀의 경륜"). 교회는 말하자면 이 세상 앞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의 내용임을 의미한다.
5)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에 있어서 직제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언급된 세 종류의 중요한 은사들은 그 뒤에 언급된 은사들과는 달리 일정한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선교지역을 방문하거나, 지역교회를 순회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고정된 장소에 머물면서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인격 안에 그 모든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그는 사도로서, 예언자로서(롬 11,33; 고전 13,2), 그리고 교사로서(빌 4,9; 살전 2,13) 사역을 담당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그 교회의 내적 질서를 도모하기도 하면서(고전 11,34) 선교하고 목회한 인물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은사들은 제도적으로 확정된 교회 직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빌립보서 1장 1절의 감독과 집사의 경우도 후에 목회서신에 나타나는 교회 직제의 의미보다는 훨씬 유연한 의미로써, 교회의 목회적인 관리 차원에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바울이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 받는 교회가 그 시대마다 교회의 운영과 질서에 적합한 제도적 요소를 필요로 함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늘날의 교회법적인 의미에서 교회 직제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은사 공동체는 다만 한 세대만에 유용했던 임시적 직제라고 말해야 되는가(참조 J. D. G. Dunn, "Models of Christian Community in the New Testament" 252)?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바울에게서 은사적 공동체인 교회에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능력은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F. Lang, "Das Verst ndnis der Kirche" 180). 그는 성령과 교회 직제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직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에 따라 각 시대마다 유연성과 역동성을 지니며 질서있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열려진 틀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개방성의 기준과 한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이라는 기본적 사고가 아닐까?
IV. 한국교회에 대한 성령론적 반성과 새로운 가능성 -결론에 갈음하여
바울의 교회 이해로부터 이제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바울의 교회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면에서 회복하고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몇 가지 질문형식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양자 간에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비록 깊은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교회 가운데 창조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1. 바울의 교회에 발생하는 갈등과 문제들(특히 고린도교회)은 주로 그들의 성령에 대한 오해와 곡해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로 부딪쳐 나간다. 서로 다른 성령 이해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개인적이며 성례전적인 영광의 신비주의로 성령을 사물화했다면, 바울은 성령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교회의 성령 이해는 어떠한가? 고린도교회의 성령 이해에 붙잡혀 있는가? 아니면 바울의 성령 이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가?
2. 바울의 교회론은 신학적으로는 기독론의 터전 위에, 그리고 선교적이며 목회 실천적으로는 성령론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경우는 이 신학적 기초와 선교적 목회 실천적 방향성이 바뀌어 있지 않은가? 기독론적 신학적 기초 없이 성령의 외적 현상과 능력만을 극대화시키고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기독론적 신학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여 성령의 창조적 자유와 사역을 침묵케 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서로 다른 경향성이 서로 조화되지 못하고 양극단으로 치달리고 있다는 데 있다.
3. 바울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으로 다음 세 종류의 표상적 이해를 제시했다. 첫째로,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이루는 구속사의 실체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존하는 자리인 "성령의 전"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셋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제와 사랑의 섬김을 삶의 원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자기정체성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회상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다가올 완성을 기다림으로 준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성령의 자유케 하심과 새 생명의 창조를 지금 바르게 누리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유지하는 대조공동체로써 세상을 향한 선교 공동체로 나서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 공동체 내에서 서로 교제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4.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 안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조화롭게 나타나야함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통일성의 방향과 목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개 교회의 목회자 중심으로 편의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각 지체의 다양성은 폐기되고 일률적인 그리스도인들만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바울에게서 있어서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성별적 차별성이 극복되고 하나로 연합하는 성령이 함께 하는 표지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 차별성의 극복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직도 성령의 자유케 하고 해방시키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6. 바울은 세례를 통한 교회 예배에의 참여와 성례전의 참여만으로는 그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오도된 인식이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세뇌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그 신분에 걸맞는 윤리적 삶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7. 바울의 은사적 공동체의 직제는 유연성과 역동성을 지닌 직제라 할 수 있다. 곧 만인 제사장적인 정신과 그 가능성이 열려진 직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평신도 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보다 자유롭게 개방된 교회 직제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는 것일까? 교회의 직제가 은사적 공동체를 지나 초기 카돌릭주의로 넘어가면서 제도적 직분으로 경직화되었던 것(예수 공동체 → 예루살렘 교회 → 바울의 초기 공동체와 후기 공동체에로의 변화)을 이제 다시 가능한대로 은사 공동체의 특성으로 되돌려 교회의 영적인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한국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은사 공동체의 문제는 은사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이 오히려 영적 은사운동을 아예 거부하거나, 아니면 자기 중심적으로만 제한하고 열광주의적인 방향으로만 몰아가기 때문은 아닌가?
이제 새로운 세기의 교회는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첫째로 교의와 교직에 기초한 교파주의는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고백으로 말미암아 점차 극복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사역은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그 역할이 확대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의 조화가 극대화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제 또한 성령의 사역과 기능을 더욱 존중하는 열려진 직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인터넷 시대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교회의 모습이 제시될 것이다. 성령이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인격적인 힘인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오늘의 인터넷 시대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과감한 "성령의 네트워킹"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네트워킹"이란 성서적 표현으로는 "성령의 교제"이다.
사이버 시대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절실한 것은 아마도 진정한 영적 인격적 교제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성령의 인격적 능력이야말로 이 사이버 시대에도 가장 핵심적이고 절실히 요청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의 기계적인 네트워킹이 무기적 조직체로서의 연결이라면, 성령의 네트워킹은 유기적 연합, 곧 살아 생동하는 사랑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주는 힘과 능력이다. 따라서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네트워킹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령에 의한, 그리고 성령을 통한 사이버 교회를 이해하고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의 주체이며 동시에 내용이고, 또한 활동하는 능력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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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 지 철(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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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hillch 호주성산 신약신학 연구실 바울의 교회이해에 대한 성령론적인 반성 holyhillch 호주성산 신약신학 연구실 바울의 교회이해에 대한 성령론적인 반성
근자(近者)에 들어 자주 언급되는 개념인 영성(靈性, spirituality)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분명하게 정의가 되어있지 않다. 또한 신약 성경에는 이 '영성'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으며 그래서 영성은 현대적 개념이다. 기독교의 모체인 1세기 유대교의 사상적 골간은 흔히 경건(piety)과 의(義, righteousness)로 요약되는데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를 집약한다. 이는 예수께서 쉐마와 이웃사랑으로 온 계명을 요약한데서 잘 드러나 있듯이 (마 22:34-40, 막 12:28-34) 당시 유대교의 일반적 이해였고,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 기독교에 의해서 이것이 그대로 수용이 되었다. 우리가 현금에 언급하는 영성이란 넓은 의미에서 전자(前者),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고, 고양하는 경건(敬虔)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진다.
영성을 이렇게 이해할 때, 바울의 영성이란 주제는 이 제한된 지면으로 다루기에 너무 방대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영성의 측면을 현대적 개념에서 고대의 바울에게 적용하는 연역적 방법보다는 바울의 1세기가 표현하는 의미에서의 영성을 찾아내는 귀납적 방법의 일환으로서, 필자는 영성이란 단어가 나오게 된 바탕 개념인 '영(靈)' 또는 '성령(聖靈)'과 관련해서 바울의 생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시작되고, 이어지고, 종결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인간 개인이 그 복음을 이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입하는데 있어서의 초기적 인식(認識)과 각성(覺醒)의 단계에 초점을 두고 바울의 영성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영감(靈感)의 수용과 이성(理性)적 판단에 기초한 합리적 자기 사고를 조화시켜 건전한 영성을 보전하는가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II. 聖靈의 力動性
바울을 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차가운 조직신학자로만 보는 것은 현존의 바울 서신으로만, 특히 로마서의 논리적 전개를 염두에 두고 그를 대하는 현대인의 편견이다. 바울은 한번도 스스로를 연구실 책상에 앉아있는 이론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운 목회자였고 현장에서 자신을 불사르는 실천가였다. 점잖아야 할 공적 서신에서 욕과 (갈 3:1) 비아냥 (고전 3:1-2), 흥분 (고후 11:16-22), 저주와 외설(猥褻)을 (갈 5:12) 주저하지 않은 열정의 이념운동가였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영성을 논할 때도 평화롭고 한적한 어느 산 속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수도승의 영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는 거리와 현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공동체의 사람이었고, 그의 영성은 복잡한 인간들이 모여서 야기시키는 갈등과 혼돈과 싸움 속에서 형성되는 역동적(力動的)인 움직임이었다. 바울을 사로잡고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 그의 사역을 주도했던 성령도 마음에 잔잔한 감동만 불러일으키는 정적(靜的)인 영이 아니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적(動的)인 영이었다.
그가 이방인들, 즉 그레코-로만 세계라는 커다란 문화권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개념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하는 '말씀'에 의존하는 전도와는 크게 차별성을 갖는 일이었다. 물론 신약성경이 형성되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구약(舊約)인 히브리 성경 두루마리나 그것의 헬라 번역판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여 전도여행시 갖고 다닌다는 것은 그 부피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고작 재력이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비치된 두루마리를 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성경에 대한 의존의 전부였을 것이다. 더구나 유대를 잘 모르는 헬라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히브리 성경을 주해한다는 것 자체도 별반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예수'라는 유대 이름이나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유대적 개념 조차 그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바울이 복음을 진리로 제시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비일상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수반(隨班)되어야 했고 이것을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라 명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에 대한 언급은 바울이 자신이 설립한 교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를 회상하는 구절들에 잘 드러나 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서신들에 나타나고 있다 (롬 15:18, 고전 2:4-5, 갈 3:2-5, 살전 1:5). 이러한 성령의 현상을 바울은 반복하여 '두나미스'(dynamis, power)라는 표현으로 기술하였다. 성령의 그 역동적인 성격은 성령을 불에 비유하여, "성령을 끄지 말라"는 데살로니가 전서 5:19의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III. 바울의 靈感認識論 - 고린도 전서 2:6-16
바울이 복음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한 성령의 '두나미스'를 회상하는 것은 성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하는 계시의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내용이 일반인들에게는 수용하기 힘들고 잘 깨달아지지 않는 메시지였다 (고전 1:23).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개인에게 진리로 인식되는 과정의 중심에 성령의 역할이 놓여있고 이러한 영감인식론(靈感認識論)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 전서 2:6-16이다. 복음 수용, 즉 진리 인식의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에 대해 다소의 기술적(技術的)인 주해(註解) 작업이 필요하다.
靈感認識論 提起의 背景
고린도 전서의 도입부를 벗어나면서 바로 바울은 1:10-17에서 교회의 분열 문제를 직접적으로 끄집어 낸다. 우리의 본문인 2:6-16을 바로 뒤잇는 3:1-9에서도 바울은 분열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운데 놓여 있는 1:18-2:16은 문제의 원인을 설명하고 목적한 권고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구축하는 큰 삽입단락(parenthesis)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삽입단락의 주제는 1:17에 응축(凝縮)되어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포와 '지혜의 말' 사이의 대립 관계를 설정, 그 대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대조 내용은 1:18-25에서 구체적으로 상술된다. 그래서 뒤이어지는 1:26-31과 2:1-5는 그러한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두 예증(例證)으로 정의해도 무리가 없다. 지혜의 개념과 십자가의 복음 사이의 대조는 2:4-5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내 말과 재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로 이 절정의 시점에서 바울은 극적으로 문학적 Aufhebung, 즉 대립되던 '정(正)'과 '반(反)'을 용해시켜 역접사(逆接詞) de를 사용하면서 '합(合)'을 창조해 낸다. 이제 바울은 여태까지 공격을 가해 오던 '지혜(소피아)'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며 논의를 이끌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문학적 Aufhebung이 개념상의 합성물(合成物)을 생산해 내지는 않았다. 바울이 '소피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단어가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함축하고 있던 의미와 가치관을 그대로 담아온 것은 아니었다. 바울의 손에 넘어온 '소피아'의 실질적 내용물은 바울이 이제까지 주창해 온 '십자가의 메시지'이며 이전까지 진행되던 개념상의 대립은 문학적-수사학적 Aufhebung에도 불구하고 2:6-16에서 뚜렷하게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역동적인 전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존한다 했던 (2:4-5) '케리그마'를 일단 '소피아' 담론(談論)에 끌어넣는 바울을 발견하게 된다. '소피아'는 '지식'및 '이해'와 연관된 개념이기 때문에, 하마터면 영원히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영감 인식론이 그의 구원론의 논쟁 가운데서 본문의 표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無知의 問題
본문에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구분선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 이 시대의 관원이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2:8). 하나님의 지혜는 숨겨진 미스터리가 되며 (2:7), 멸망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 (2:9). 인간의 오감(五感)이나 (눈과 귀) 지성으로는 (마음) 도무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육에 속한 사람(푸쉬키코스 안쓰로포스)'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2:14). 사실상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한다 (2:11b). 도대체 누가 주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2:16)
이처럼 강한 바울의 회의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소피스트 고기아스(Gorgias) 류의 지독한 불가지론과는 다르다. 바울의 전제에는 인간의 영이 인간의 일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2:11a). 인간은 지력(知力)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영은 그러한 지성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나 하나님께 귀속되어 있는 것들을 아는 지혜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무지는 본질상 인간됨과 신성(神性)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distance)'의 문제이다. 인간 무지는 하나님의 '미스터리'에 접근할 수 없음에 그 이유가 있으며 (2:7),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2:11). 여기서 바울은 본 단락 이전의 글에서 그릇된 인간의 지혜에 대해 가했던 비판을 신학적 명제의 형태로 재론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1:21, 25). 역설적인 표현을 빌자면, '인간 지혜의 무지'가 너무 깊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메시지가 인간적 지혜를 사용하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천치(天痴, 모리아) 같이, 또는 스캔들(스칸달론)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1:22-23). 그들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알고보면 인간 지혜를 구사하는 자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3:18). 이러한 혼동의 상황에서 바울은 판별력의 역전(逆戰)을 천명(闡明)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기준으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천치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2:6-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에 갇힌 천치들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1:27).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짝이 없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와서 그들과 복음으로 만났을 때 '인간의 지혜'보다는 '인간의 무지'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 그는 오히려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었다 (2:2).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총체적 무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사람들
바울의 회의적(懷疑的) 인식론은 2:10a에서 정지된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 개입에 의해 인간 무지의 상태가 유보(留保)된다고 할 수 있다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에게" 저들이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도록 해 주셨다. '저들'의 무지와 '우리'의 앎이 현저하게 대조되고 있다. 반복되어 등장하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 (2: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어서 (2:10) '알고' 있으며 (2:12), 아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2:13) 그리스도의 마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2:16). 보통 사람들과 구분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범주로 분류된 일군(一群)의 사람들이란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구분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6절에 있는 "온전한 자들"은 (teleioi) 바울이 아는 자들로 구분한 '우리'라기 보다는 3절의 "어린 아이들"에 대비되는 통칭의 지적, 도덕적 성숙함을 갖춘 막연한 대상으로서 수사학적 의미의 불특정 대화 상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바울이 '텔레이오이'나 그 파생어들을 사용한 나머지 네 곳에서도 모두 이와 유사한 용례(用例)를 보이고 있다 (롬 12:2, 고전 13:10; 14:20, 빌 3:15). 바울이 '텔레이오이'라는 표현으로 대화 상대자를 끌어 들이며 발언한 6절의 뜻은 이렇게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정 고집한다면, '지혜'에 대해 한번 얘기를 해 봅시다. 그러나 이 말이 가져올지 모르는 오해에 대해서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 가운데 이미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성숙한 사고자가 되어 한번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합시다."
'아는 사람들'로서의 '우리'는 2:15의 '프뉴마티코이'(신령한 자)로 정의된다. 이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로서 '푸쉬키코이 안쓰로포이'(육에 속한 자)와 (2:14) 구분이 되며 후자는 하나님의 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이 '프뉴마티코이'가 신앙 공동체 내에서 특별히 구분된 일부 특수 집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뉴마티코이'가 이 단락에서 '푸쉬키코이 안쓰로포이'와 대조가 되면서 정의가 되듯이 1:18-2:16에서는 이분법적 인간 구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맥락에서 볼 때 1:18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프뉴마티코이'와, "멸망하는 자들"은 '프쉬키코이 안쓰로포이'와 동일한 집단임이 확인된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고 (갈 6:1), 그의 편지들 여러 곳에서 믿는 자들을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롬 8:9, 14-16, 갈 3:2; 4:6, 빌 3:4, 살전 1:6; 5:19). 고린도 전서 3:1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풍자(sarcasm)에 의해 그 의미는 더 명확해 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르키코이'(육신에 속한 자)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프뉴마티코이'이지만 그렇게 대우하지 못하겠다고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당연시 하면서도 (3:16) 그에 부합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개탄하는 것이 3:1의 표현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자들은 바로 '프뉴마티코이'이고 그래서 진리를 아는 일은 필연적으로 성령과 관련을 갖는다.
靈感認識論 構成
무지(無知)에서 인식(認識)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어 있다. 바울의 경험과 사상이 계시에 의존하고 있음은 다른 여러 곳에서 보여지고 있지만 (롬 1:17-18; 8:18; 16:25, 고전 2:10, 고후 12:1f, 갈 1:12, 16; 2:2; 3:23, 빌 3:15),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로서 성령의 역할이 언급된 곳은 고린도 전서 2:10 이하에서 뿐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 즉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들을 (2:9)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다 했다 (2:10). 성령은 모든 것을 꿰뚫어 찾아낼 수 있고, 하나님의 깊숙한 곳까지 알아낸다. 로마서 8:26에서는 하나님께서 '에루나오'(찾다)의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언급이 된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의식의 표면에서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 속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접촉하여 우리의 마음을 알아 내신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고린도 전서 2:10에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 속을 찾으실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프뉴마티코이'이고 그 성령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내적 인식의 과정이다. 이른바 영감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이라고 명명(命名)할 수 있는 개념이다.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영감받은 수사학'과 '진리의 분변력(分辨力)'으로 확장된다. 우리 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내적 관계를 형성하는 성령으로 인해서 깨달음의 인식뿐 아니라, 인식한 것을 전달하는 언어작용까지도 성령의 가르침을 통할 수 있게 된다 (2:13). 그래서 앞에서 바울이 선포한 것으로 언급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바로 성령이 가르쳐 준 언어의 표현임을 (성령의 가르치신 말씀) 암시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성령이 가르쳐 준 언어적 표현인 복음의 메시지가 어리석은 것으로 (1:23) 보이고 인식이 되지 않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분변(分辨)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2:14b). 여기까지 온 바울은 더욱 대담한 발언으로 이행한다. 성령을 가진 자, 즉 '프뉴마티코이'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을 한다 (2:15a). 성령을 소유한 '우리'는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2:16b) 그래서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올바른 진리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에는 바울이 지도자로서의 위치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는 고린도의 상황에서 그 자신의 진리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자기 변호의 논리가 담겨져 있다. 바울이 자신의 진리 주장을 성령의 소유와 연계시키는 전략은 7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혼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놓고 이렇게 말을 맺는다. "나 또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1) 근본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깨닫게 되는 '마음의 인지적(認知的) 변형'에서 2) 내재한 성령이 성령을 소유한 자의 언어 표현을 주장하는 '수사학적 영감(靈感)'을 거쳐 3)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진리 주창(主唱)의 자격'으로까지 발전한다.
IV. 靈感認識論과 그레코-로만 修辭學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고린도 교회의 '소피아' 개념과 대립하면서 표면화된 이론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8-31에서 집요하게 모종의 '지혜'를 비판하였으며, 그 지혜의 방법의 대립 개념으로서 (antithesis) 성령의 능력을 설정하고 (2:1-5), 종국에는 우리의 본문에서 (2:6-16)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여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부각시키면서 성령과 지혜의 통합을 (synthesis) 구성해 내었다. 바울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이 '소피아'라는 용어는 고린도 전서에서 인간이 진리의 이해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사용된 인간적 방법 또는 수단을 지칭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인간과 관계된 지혜라 하는 것은 복음 메시지의 이해와 수용에 이르게 할 능력이 없는 인간 사고의 과정을 가리킨다 (1:21; 2:6). 그래서 결국 이 지혜는 그 반의어(反意語)인 '모리아'(어리석음)로 불리워 져서 (1:20; 3:19) 진리 인식을 위해서는 실패한 방법이요 수단으로 전락된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과정 자체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영성(靈性)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고린도 소피아의 背景
여기서 바울이 반대하는 것은 '이성적 사고의 과정'으로서의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모종의 수사학적 언변(言辯)과 연계가 되어 있는 '소피아'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자신이 사명을 입은 복음의 선포가 "말의 지혜"에 의존한 것이 아님을 굳이 강조하고 있다 (1:17). 1:20의 수사학적 반어법에서도 "이 세대에 변사(辯士)가 어디 있느뇨?"라는 질문을 통해 고린도의 '지혜' 상황이 말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지혜가 모종의 언어 표현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은 2:1-5이다. 2:1에서 그의 선포가 저들의 지혜와 대조되는 위치에 있는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는 언급은 고린도에서의 지혜의 개념이 언변의 탁월함과 연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2:14에서 가리키는 '바울의 말'은 케리그마인데 케리그마는 '설득하려는 지혜의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바울이 자신의 케리그마를 지혜의 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듣는 자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2:6-16의 영감 인식론은 '소피아'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고린도의 수사학적 상황에 반대하면서 구성된 개념임이 명료해진다.
지혜와 수사학의 관계에는 성격상의 친밀함이 있다. 어떤 현상이나 주제를 이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언변을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이해' 없이 청중의 설득을 목적으로 어떤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한다는 것은 거의 가능치가 않은 일이다. "참된 능변은 소피아를 요구하며 반대로 표현해서 지혜롭지 않은 말은 능변일 수가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와 참된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서 수사학을 불신했지만, 그레코-로만 세계의 중요한 수사학 이론가들은 대부분 지혜를 수사학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을 시켰다. 이소크라테스는 말의 기술이 바로 이해력을 훈련하는 길이며 지혜를 습득하는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수사학과 철학의 구분 자체를 엄격하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키케로는 철학과 수사학이 서로 소원하게 되는 것을 개탄하면서 지혜와 웅변의 이상적 결합을 강하게 호소했다. 이성과 능변은 함께 인류를 "야만인으로부터 친절하고 고아한 종족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 기능이라고 했다. 유사하게 퀸틸리안도 수사학의 이상적 목표는 철학과의 연합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고린도 시는 지혜로 인식되는 수사학적 전통이 강세를 보이는 헬라 도시들 중의 하나였음을 감안할 때, 바울이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고린도의 지혜는 수사학의 문제였음을 확실하게 한다. 여기에다가 고린도 공동체의 분열의 한 축으로 언급되는 아볼로를 사도행전에서는 수사학적 전통이 강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행 18:24).
그렇다면 바울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정죄하면서 수사학을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자세로 복음과 능변을 절대 대립의 관계에서 보고 있는 것일까? 바울 자신이 그의 복음 선포에서 수사학적 노력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고전 1:17, 2:1-5) 스스로를 "말에 졸"하다 했으나 (고후 11:6) 그러한 발언들이 그의 서신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꼭 부합하는 것만은 아니다. 바울이 지혜를 부인하고 이론을 파한다고 하지만, 그 자신이 매우 영교(靈巧)한 방식으로 주장과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우리가 읽고 있는 그의 편지들 자체가 다름아닌 '지혜 안에서의 이성적 논쟁'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수사학에 대한 강한 부정이 담겨 있는 고린도 전서 1-2장만 보아도, "대조법 (1:17), 수구반복(首句反復)과 곡언법(曲言法) (1:26), 역용논법(逆用論法) (1:26-28), 누적법(累積法) (2:1-5) 등의 사고와 담화의 수사(修辭)로 흩뿌려져 있다." 비록 바울의 서신들을 특정의 수사학적 교범서의 규격에 짜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들은 상당히 주관적인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시도들을 이끌어내는 수사학적 요소들이 그의 편지들 내에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귄터 보른캄도 바울이 지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편지를 통해 강력한 합리적 논쟁을 구사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바울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에 호소를 하며 그 자신 부인할 수 없는 수사학적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그의 공동체들에게 진리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 사려깊게 합리적 사고를 할 것을 요구한다.
피스티스와 聖靈과 두나미스
만일 바울이 수사학적 관행이나 이성적 사고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의 수사학적 지혜가 기초하고 있는 모종의 전제(前提)에 대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사학은 능변의 문제이고 앎은 인식의 문제로서 서로 다른 영역인데,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에서나 고린도 후서 10-11장에서 굳이 고린도의 수사학적 지혜에 도전할 때마다 '인식론'을 그 대립의 위치에 배치하는 점은 (고전 2:1-5, 고후 10:5; 11:6) 바울의 복음과 고린도의 수사학적 관행과의 갈등이 양자가 기초하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들' 사이의 긴장관계, 양자의 바탕에 깔려있는 영성의 갈등관계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 단어 '피스티스'가 바울의 영감 인식론과 그레코-로만 수사학, 양자 모두에 있어 중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 전서 2:6-16에서 논한 '앎'의 문제는 결국 2:5에서 말하는 '피스티스'의 문제이고 바울이 말하는 종류의 지식은 결국 '피스티스'이다. 그는 빌 3:8-9에서도 '피스티스'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 표현했다. 고린도 후서 10:5와 11:6에서 수사학적 관행과의 대립으로 언급된 '지식'이 함축하고 있는 것도 결국 '피스티스'이다 (고후 10:15). 그런데, 그레코-로만 수사학의 근본적 목적은 청중의 마음에 '피스티스'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사학은 '본질적으로' 설득의 예술"이라 할 수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을 싫어했지만 철학적 진리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의 수사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두 철학자 모두 인식론적 측면에서 수사학은 철학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수사학은 오직 개연성(蓋然性)만을 달성할 수 있지 진리의 확실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수사학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 안에 믿음을 발생시키는 것이라 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의견이나 개연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상 열등한 위치에 놓인 단계의 지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플라톤 류의 절대적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는 애초부터 '피스티스'가 그러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당대의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참된 수사학을 제시하려 했던 이소크라테스(Isocrates)도 인간이 존재의 절대적 본질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이 설득 가능한 지식을 존중하면서 '피스티스'를 건전한 지식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수사학은 그저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었다.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파의 영향때문이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과학에 절대적 확실성의 진리를 적용하려는 이상주의를 완화하여 '피스티스'의 범위에서 작용하는 과학과 예술의 영역들을 허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설득," "증명," "믿음"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피스티스'는 설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득의 과정이기도 하다. '피스티스'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술"일뿐 아니라 그로 인해 "결과된 마음의 확신 상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고 후대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수사학의 이론적 틀은 바울의 지식으로서의 '피스티스' 개념과 이를 성령의 능력에 돌리는 점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주로 설득의 수단인 '피스티스'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 '피스티스'들이 바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에토스, 파토스 그리고 로고스이다. 변사는 이 세가지 '피스티스'를 잘 구사하면 듣는 사람에게서 '피스티스'가 발생하게 되며 그때 그의 연설은 성공한 것이 된다. 우리가 '피스티스'를 "증명(proof)" 또는 "논쟁(argument)"으로 번역하는 고전적 관행을 접어둔다면, 에토스, 파토스 또는 로고스의 형태로 전달자 안에 내재해 있던 '피스티스'가 언어행위를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 속의 '피스티스'로 전이되는 것이 수사학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청중에게 믿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두나미스'로 (재능, 능력) 정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사학은 "일종의 논증법의 한 부분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어느 특정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단지 논쟁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두나미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사학은 가능한 설득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두나미스'로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리고 그의 체계를 거의 변동 없이 전승받은 1세기 그레코-로만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수사학은 청중이 특정 주제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피스티스'들을 잘 조직할 수 있는 '두나미스'이다. 반면에 바울은 '두나미스'를 하나님과 성령에게로 돌리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두나미스)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바울에게는 '피스티스'가 수사학적 '두나미스'나 "말의 지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두나미스' 안에 놓여 있으며, 그 '피스티스'는 신자들 마음 속에 있는 믿음(피스티스)으로 전이된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 상황의 '말의 지혜'에 대한 바울의 저항은 수사학적 기교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린도에 영향을 미친 그레코 로만 수사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피스티스'의 발생을 인간 변사의 '두나미스'에 두는 것을 거부하며 성령의 '두나미스'에 둠으로써, 인간의 진리 인식을 근본적으로 영성(靈性)의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성령의 '두나미스'가 인간의 영 속에 발생시키는 '피스티스'이지, 인간의 '두나미스'에 기초한 인간적 동의(同議)로서의 '피스티스'가 아니라는 말이다.
V. 맺는 말과 適用
그렇다면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나 언어적 노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합리적 사고와 언어적 노력을 구사하되, 긍국적으로 올바른 영적 진리를 분별하는 최종적 힘을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교감에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진리의 '영성(靈性)'이 '이성(理性)'에 입각한 깊은 사고와 '성령'의 영감에 의존하는 신비추구의 지혜로운 조화를 필요로 함을 배운다.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하여 인본주의의 오만으로 흐르는 경향은 필연적으로 '천치됨'(天痴, 모리아)을 면할 길이 없다. 반면에 상식적 합리성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고포기(思考抛棄)'의 열광주의에서만 발견하는 경향은 공동체의 파괴와 건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왜곡을 가져온다. '연구'와 '기도'는 올바른 영성(靈性)의 양 수레바퀴와 같다.
또한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 더 깊이 다룰수 없었지만, '피스티스', 즉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방 선교의 현장에서 인식과 동의를 요청하는 수사학적 '피스티스'와 유대적 의미의 '신실함'을 통합한 개념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행위의 열매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은 결국 야고보의 지적대로 죽은 믿음으로 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회심의 순간에 작용하는 믿음은 수사학적 의미의 '피스티스'가 지배적이나, 삶 속에서의 믿음은 유대적 의미의 '신실함'이 지배적이다. 바울이 로마서 1: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으로 복음의 성격을 규정했듯이, 올바른 영성의 전개 과정은 받아 들이는 믿음에서 변화되고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충성과 헌신의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덧붙이는 말 (결론과 적용의 첨가)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의 양자 비판에도 그의 균형 감각이 드러나 있다.
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바울에게서 유래된 프뉴매틱(성령주의자들)과 아볼로에게서 유래된 소피아(수사학적 이성주의자들)로 단순화될 수 있다. 바울의 목회상 관심은 분열과 혼동 속에서 어지러워진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사도적 권위 아래 통일시키려는 것이다. 1-4장은 후자에 대한 견책, 12-14장은 전자에 대한 통제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 1-4장에서는 소피아로 인한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견제한다. 여기서는 끈질기게 수사학적 지혜를 물고 늘어진다 (1:17, 19, 20, 27; 2:4).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인본주의에 입각한 이성주의는 진리에도 영성에도 도달치 못함을 천명하고, 4:18-19에서는 그 "교만"한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로고스)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인간의 언어적 사고작용(로고스)에 의존하는 이성주의에 분명한 일침을 가하고, 진리에 도달하는 지성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교감에 의한 영성의 문제임을 확실하게 한다.
다) 반면에 12-14장에서는 바울 자신 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보인다. 이들이 강조하는 "신령한 것"(프뉴마티콘)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 가면서 (12:1-3) 2:6-16에서 언급했던 것, 즉 '성령으로만 인식되어지는 예수의 주되심'을 다시 상기시킨다 (12:3).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이들도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아는 바울은, 그들이 주장하는 성령이 여럿이 아닌 한 성령임을 강조하여 (12:13) 사랑을 호소한다. 그래서 제일 큰 은사로서 13장의 사랑을 얘기하고, 14:1에서 그들이 구하는 신령한 것들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14:1) 명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명령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열광주의에 의해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질서"를 요구하고, 엑스타시의 방언보다는 사고를 수반하는 "예언"에 무게를 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4:6-9에서는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라" 권면함으로써, 지성과 판단에 입각한 의사소통의 작용을 강조한다. 14:14에서 방언이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겠다고 말한다. 20절에는 1-4장에서 그렇게 공격했던 지혜의 개념을 다시 끄집어 내어 이르기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성령-열광주의자들을 오히려 지혜의 개념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9절에는 "분변하라," 즉 생각을 바로하라는 권고를 하고 결국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권고로 14장을 마감한다.
라) 1-4장이나, 12-14장이나 영성은 "성숙"과 "사랑"의 윤리적 귀결로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