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31)
[에피소드60]
유도시간에 급우와 발차기 장난을 한 적이 있다. 정규 수업인 유도시간에 엉뚱한 태권도를 했으니 유도선생이 좋아 할 리가 없었다. 나를 부르더니 정식으로 도복을 잡고 시합자세를 취하면서 먼저 공격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죄송한 마음으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꾸 재촉을 하길 레 “밭다리 후리기” 한수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업어치기로 순식간에 나를 넘기더니 목조르기를 하면서 “반 정도 죽는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직후 나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고 잠시 동안이지만은 죽음의 체험을 했다. 선생은 이내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지만, 나는 몽롱한 가운데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 체험을 통해서 “생(生)과 사(死)는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에피소드61]
그 무렵 대구는 기독교 부흥회 열풍이 불었다. 서울의 유명 부흥목사들이 대거 내려와서 신앙부흥회 집회를 이끌었다. 신현균목사, 오관석목사, 박덕종목사, 조용기목사, 삼각산 기도원장 XXX씨 등 많은 분들이 다녀갔는데, 그분들 중 대부분은 부모님의 초청을 받아 우리 집에 들렀다. 오전, 오후, 저녁집회 뿐만 아니라 철야집회 까지 열렸는데 나는 담요를 가지고 철야집회에도 참석하는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집회도중 신도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기도를 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기도를 드렸다. 그 열기가 굉장했다. 그래서 한때 대구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한 6개월 간 나는 끊임없이 집회에 참여해 울고 부르짖으며 회개기도를 드렸고 설교를 들었다.
나는 그 덕분에 학교에 소문이 퍼져 2학년 학생회 구성 시, 많은 학생들의 추천을 받아 종교부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학생회장은 후일 김영삼정부 때 국민고충처리부위원장을 지내고 지금은 환경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신대균군이었다. 대균은 나와 같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광고에 진학했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오랫동안 기독교 재야운동을 했었다. 나는 그 당시 신앙심에 불타올라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 기도를 남몰래 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흥회의 주 설교 내용이 냉탕, 온탕 식으로 천당과 지옥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지극히 단순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냉철한 지성보다는 감정이 과도하게 분출(噴出)되는 분위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개신교의 단점은 행동의 실천보다는 말의 성찬(盛饌)이 앞선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당시 하나님께 경건히 드린 서원기도는 향후 나의 인생의 길을 예고하게 되었다.
[에피소드62]
내 삶의 진행에 있어서 지금도 의문을 던져주는 사건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햇볕에 오래 서 있으면 쓰러지는 악성빈혈이 있었다. 나는 비쩍 마른 체격 때문에 체육시간이면 마른 몸매가 드러나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 날도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체육시간을 빼먹고 교실에 몇몇 급우들과 남아 있었다. 전체 체육시간이라 남아있는 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해 K라는 국어선생이 우리 반에 들어왔다. 신경질적인 성격을 지닌 그 선생은 다짜고짜 교실에 있는 학생들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피해갔다. 이제나 저제나 두들겨 맞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떨고 있는 나를 끝내 내버려 두고 선생은 나갔다. 왜 그 선생은 나를 그냥 내버려 뒀을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에피소드63]
학생 때는 빵집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빵집은 불량청소년 들이 각 지역 별로 패거리 모임을 갖는 아지트 역할을 하였다. 거기서 남녀가 만나고 담배도 피우곤 했기 때문에 학생지도 선생이 순찰을 돌면서 단속했다. 한번은 친구가 소개해준 여학생을 만나려고 학교근처 제과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고등학교 학생 두 명도 그 여학생을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되었지만 그 여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호랑이 같은 여학생의 대학생 오빠(유도3단)가 와서 두 명의 고등학생의 안면을 주먹으로 몇 대씩 사정없이 때렸다. 맞는 소리가 마치 떡치는 소리처럼 퍽! 퍽! 났다. 나도 곧 어마어마한 강도(强度)의 주먹으로 맞을 것을 예상하고, 공포감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빠는 고등학생들에게만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휑하게 나가 버렸다. 나는 상대적으로 어린 중학생이라 봐 주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 여학생의 오빠가 내가 자기 여동생을 만나려고 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